퇴마록 혼세편 3권 3화 – 기차의 울림
류순화는 범인(凡人)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는 않지만 사회 일각에서는 제법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철도 기관사 라는 직업에서부터 출발해 혼자 힘으로 사업에 성공했고, 사업 이 궤도에 오르자마자 수익 전체를 사회사업에 바친 사람이었 다. 이제 나이가 들어 일선에서는 은퇴했지만 철두철미하고 뚝 심 있게 헌신한 덕으로 사회 원로로서 존경받고 있었다. 백호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때문에 백호가 승희에게 류 순화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승희 씨, 전 여기까지 온 김에 이 근방에 살고 계시는 은사님 을 찾아뵙고 싶군요.”
“은사님이요?”
“예, 사회사업을 하시는 분인데 저도 은혜를 많이 입었답니다.”
“그래요? 듣고 보니 어떤 분인지 궁금해지는데요?”
승희가 관심을 보이자 백호는 망설이는 듯하다 말을 이었다.
“정말 훌륭한 분이시죠.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백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이 없었다. 그런 백호의 입에서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흥미가 생겼다.
“저는 사실 시골 출신입니다. 아주 깡촌이었죠. 집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도 간신히 마칠 정도였는데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부 모님이 돌아가셨어요. 살길이 막막했죠. 그때 그런 저를 먹이고 공부시켜 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셨어요.”
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백호의 얼굴을 새삼 올려다보았다. 푸르스름하게 보일 만큼 희고 창백한 얼굴, 나이나 직위에 신경 쓰지 않는 편안한 옷차림, 뒤로 질끈 묶은 머리, 그리고 입에서 빙빙 돌리고 있는 빈 담배. 사실 승희는 백호의 전력이 궁금해서 몇 번이나 투시를 해 볼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승희는 투시력이 라는 힘 자체를 혐오하고 있었으므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마 음속을 함부로 헤집고 들어가는 것은 가급적 피했다.
백호는 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자 평소와 다르게 몹시 감상 적이 되는 것 같았다.
“부모 없는 저를 서울로 데려가 집을 구해 주시고 매월 충분한 생활비까지 보내 주시면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공부에 만 열중하게 해 주셨어요. 그러면서도 바라신 것은 아무것도 없 지요. 저를 꺼리고 피하시기까지 한답니다. 제게만 그러시는 것 이 아니고 그분이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 그런 태도를 보이신다 더군요.”
“그래요? 왜 피하시기까지 하실까?”
“고맙다는 말 듣기를 꺼리시는 것 같더군요.”
“그래요? 희한, 아니 좀 놀랍네요!”
백호는 하하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모르겠어요.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공덕이 없어진다고 여기 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래서 신세를 진 제가 그분의 공 덕을 어떻게 좀 깎아내릴까 해서 자주 찾아가 인사드리고 있습니다.”
승희는 쩝 입맛을 다셨다.
“제 아이큐가 백호 씨의 아이큐와 비슷한 수준은 아닌가 봐요. 그런 고차원적인 비유는 접수가 잘 안 되네요.”
백호는 그 말을 듣고 웃다가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땅에 떨어 뜨리더니 머쓱한 듯 웃으며 품 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다시 담배 를 입에 물었다. 역시 불은 붙이지 않았다. 승희는 그런 백호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백호 씨는 담배 싫어하세요?”
“아뇨. 무척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했지요.”
“담배 피우시는 건 한 번도 못 봤어요.”
“피울 수는 없지요. 절대로……………..”
말을 흐리는 백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승희는 그런 백호를 보고 당황스러웠다. 왜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까. 백호는 승희가 당황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안색을 밝게 폈다.
“그냥 안 피우는 겁니다. 그건 뭐 제 결심일 뿐이니까. 그건 그 렇고 이만 일어서도 될까요?”
승희도 할 말이 별로 없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승희는 문을 나서는 백호의 뒷모 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뒤로 묶은 머리에 가죽점퍼를 입은 백호 는 삼류 영화감독 아니면 건달처럼 보였다. 결코 국가의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검사 출신의 고등 공무원이라고는 여겨지지 않 았다. 백호를 처음 보았을 때 승희는 굉장한 괴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백호의 뒷모습에서 승희는 무척이나 쓰라리고 쓸쓸 한 과거의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백호가 나간 뒤에도 승희는 망연한 기분으로 탁자에 앉아 반 쯤 남은 커피를 스푼으로 휘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서 서히 몸을 일으켰다. 묘한 기분이었다. 백호의 뒷모습에서 번져 나오던 쓸쓸함의 빛깔이 왠지 자신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면서 승희는 문득 백호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승희는 원래 오래 고민하고 주저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백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것을 따질 사이도 없이 커피숍 문을 나서 백호가 간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적어도 승희에게는 백호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 가가고 있는 길이나 그가 들어간 집을 못 찾을 염려는 없었다.
벨이 울린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류 순화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은 백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 만 사업에서 은퇴한 뒤로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 에 집이 비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오늘 이맘때쯤에 방 문하겠다고 미리 연락까지 해 놓은 터였는데 아무 기척이 없자 백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호는 슬쩍 문고리를 잡아당겨 보았다. 그러자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백 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백호의 눈앞 에 펼쳐진 광경은 그가 기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승희는 백호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백호가 안으로 들어선 지 십분 정도 지나자 승희는 답답해졌다.
‘내가 왜 여기서 청승맞게 서 있어야 하는 거지? 뭐, 다음에 얘기해도 되는 것 아닐까?’
더구나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이 승희의 얇은 옷 속으로 파고 들어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승희는 발을 동동 굴러 보다가 안 되겠는지 살금살금 집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호가 언제나 나올까 하는 궁금증이 무의식중에 투시력을 발동시킨 모양이었 다. 마치 안에 있는 것처럼 집 안의 동정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승 희의 눈에 머리를 얻어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백호의 모습이 제 일 먼저 들어왔다.
“아앗! 이게 도대체……………”
승희는 놀란 나머지 대문을 박차고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 이 잠겨 있지 않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뛰어든 승희의 눈에 거실 한가운데서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백호가 들어 왔다. 정결하게 정돈되어 있는 거실은 독한 술 냄새로 뒤덮여 있 었고 백호 앞에는 한 노인이 몸을 덜덜 떨면서 깨어진 술병을 거 꾸로 들고 서 있었다. 노인이 백호를 내려친 것이 분명했다. 백 호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해 보건대 노인 이 기습적으로 백호를 내리친 것 같았다.
“그만두세요!”
“너, 넌 누구야?”
호통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억눌린 듯하고 고통스런 목소 리였다. 심하게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노인은 백호를 다시 내리칠 기세였지만 승희가 뛰어드는 바람에 놀랐는지 중심을 잃고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승희는 쓰러 져 있는 백호를 부축하여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서 머리를 살펴 보았다. 크거나 작거나 상처를 본다는 것은 끔찍스러운 일이었 지만 승희는 마음을 다잡으며 상처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유리 조각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지는 않아 외상이 그다지 심한 것 같 지 않았지만 충격은 꽤 컸던 모양이었다.
“정신 차려요! 어서요!”
승희가 백호를 깨우는 동안 노인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난 저놈이 미워! 저놈이 날 이렇게…… 이렇게………….”
노인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깨어진 술병을 무의식적으로 입에 가져갔다가 입 주위를 베었는지 술병을 내던졌다. 취해도 보통 취한 것 같지가 않았다. 승희는 분통이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은사님이라고 고마워서 찾아온 사람 에게 이게 무슨!”
“고마워서 찾아와? 아니야, 난 용서받지 못했어! 그 소리, 그 소리는……………. 으아아!”
노인은 발작할 듯이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더 니 벌떡 일어나 마구 팔을 휘저으면서 벽장을 거의 부수다시 피 왈칵 열고는 진열되어 있던 술병 하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 켰다. 승희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 백호를 흔들어 깨웠다.
“백호 씨 정신 차리세요!”
백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통증이 오는 지 얼굴을 찌푸리다가 눈을 번쩍 뜨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승희 씨…….”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저 노인이 백호 씨가 말하던 은사님 맞나요?”
“선생님은 취하셨어. 그래서 …………..”
“취해? 아냐! 나는 취하지 않았어.”
술을 들이켜던 노인이 반쯤 입에 물고 있던 술을 내뿜으면서 고함을 질렀다. 승희에게까지 술이 튀었다. 승희는 인상을 쓰면 서 옷에 묻은 술 방울들을 털어 냈다.
“차라리 취했으면 좋겠다! 취해서 죽어 버렸으면. 아아, 넌 왜 나를 용서해 주지 않는 거지? 왜 다시 찾아온거지?”
승희는 백호와 이 노인과의 사이에 자신에게는 이야기해 주지 않은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백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 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백호는 승희보다 더 놀란 얼굴로 노인 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을……………”
“왜 돌아왔지? 왜! 그 정도로는 부족했단 말이냐, 엉? 내가 더이상 뭘 해야 하지?”
“선생님, 접니다! 호우예요!”
“내게 더 이상 뭘 바라는 거냐!”
“선생님 잘 보세요! 전 호우예요!”
백호의 본명을 처음 듣는 승희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백 호의 이름이 호우라니, 그러면 혹시 성도 원래 백씨가 아닐지도? 승희는 불현듯 대머리가발을 쓴 대머리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 음이 나올 뻔했으나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었다. 백호는 심각해 보였다. 그는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피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선생님, 지금 다른 사람과 저를 착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저 는 호우예요. 선생님이 키워 주시다시피 한……………..”
“제길! 너는 아직도 나를 용서할 수 없다는 거지, 엉? 난 최선 을 다했다. 그런데도…………….”
백호는 참다못해 노인의 양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 정신을 차리세요. 정신을!”
엉뚱한 상상으로 웃음을 참고 있던 승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백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착잡해졌다. 저 노인 이 지금 망령인지, 술에 취해서 주사를 부리는 건지는 모르겠으 나 노인은 분명히 무언가를 말하려 애쓰고 있었다. 용서받지 못 했다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용서받지 못했다는 말. 그 말이 승희 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승희는 마음을 다잡고 소리치고 있는 백호와 노인을 쳐다보았다.
‘또 잔주름이 늘어나겠군.’
승희는 눈을 감고 노인의 마음속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얼마 나 시간이 지났을까? 백호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노인이 더 이상 발버둥 치지 못하도록 꽉 붙들고 있었고, 노인은 버티기 어 려운 듯 고개를 꾸벅꾸벅 떨구다가 잠이 들었다. 아니, 잠이 들 었다기보다는 강한 술기운에 기절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 다. 백호는 그런 노인의 지친 모습을 의문에 가득 찬 슬픈 눈으 로 내려다보다가 뒤에 있을 승희를 떠올렸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변명조로 중얼거렸다.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분은 많이 취하셨어 요. 아주 많이 …………….”
말을 하면서 뒤를 돌아보던 백호는 승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 려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승희는 백호가 자신을 쳐 다보자 당황하여 몇 번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아, 백호 씨, 머리 상처는 괜찮아요?”
“별거 아닙니다. 놀라실 것 없어요.”
순간 백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승희의 얼굴이 왜 이렇게 질 려 있을까? 눈앞의 상황에 놀라서 그랬을까? 하지만 그것은 아 닌 것 같았다. 문득 자신이 얻어맞고 넘어졌을 때 승희가 어떻게 그토록 빨리 올 수 있었는가에 생각이 미쳤다. 승희는 예의 투시 력을 발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승희 씨, 혹시……”
“예? 상처에 제가 약이라도 발라 드릴까요?”
“아닙니다. 그런데 승희 씨. 혹시 선생님의 기억을………….”
승희는 백호가 자신이 했던 일을 단박에 찔러 내자 얼굴을 붉 혔다. 백호는 그런 그녀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승희 씨,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니, 제가 말을 하지 않아도 승희 씨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녜요!”
승희가 외치듯이 말했다.
“제가 왜 제가 뭔데 백호 씨 마음속을 읽어요?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런 적 없어요. 정말이에요! 백호 씨의 마음속을 읽 은 적은 없어요. 전 저와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들여다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승희는 자신의 투시 능력 때문에 사람들 을 사귀는 것을 꺼려하게 되었다. 마음속을 환하게 아는데 어떻 게 상대방을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마음을 낱낱이 들 여다보는 자그마한 것 하나 용납하지 않는 자신 같은 사람과 누 가 가까이하려 하겠는가? 그런 이유로 언제부턴가 승희는 자신 이 친밀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처 해 있는 상황을 읽은 적은 있었지만 적어도 마음속이나 과거만은 절대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고,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이 능력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인지도 몰랐다. 백호는 승희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말했다.
“알겠습니다. 믿지요. 그러면 혹시……”
백호는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는 노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분의 마음을 읽으신 것 아닙니까?”
백호는 비록 승희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상황 판단 능력만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승희는 고개를 끄덕였 다. 자신이 남의 마음속을 읽을 수 있게 된 후부터 거짓말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백호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입을 열었다.
“저분이 비록 저를 이렇게 만들었다 해도 저의 은사님이라는 것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저분이 갑자기 이렇게 되신 것은 필경 어떤 사연이 있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승희는 자신의 얼굴이 긴장해서 하얗게 질리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과거, 그리고 백호와의 관계. 승희는 노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영상을 읽고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 었다. 비록 앞뒤 없이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영상들이었지만 말 이다. 그러나 승희로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무엇보 다도 그것을 백호에게 알려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알려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승희는 고개를 저었다.
“호기심 때문이라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분은 저의 은사 님이고……………. 저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저분이 어떤 분이시 건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승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 리야!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알게 된다면……. 그러나 눈을 감아도 백호의 목소리는 들려왔다.
“저분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습 니다. 그것뿐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죠?”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백호는 움찔했지만 놀 란 것 같지는 않았다.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분께 너무도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안 돼요. 당신은 도움이 될 수 없어요. 백호 씨, 당신은 저분 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걸 갚겠다는 마음으로 그러는 건가 요? 그렇겠지요. 그리고 저분이 어떤 과거를 지녔다고 해도 상관 없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겠지요. 아, 이건 제 추측일 뿐이 에요. 당신 마음을 읽은 건 아니니 염려 마세요. 하지만 그것으 로는 안 돼요! 저 노인, 아니 저분과 똑같은 고민에 빠질 뿐이라구요.”
“저는….”
백호는 승희가 쏘아 대는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승희는 그런 백호의 모습에서 현암의 모습을 보았다. 역시 그랬다.
“현암 씨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 모든 고생 을 사서 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세상에는 고 통이 너무 많아서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그러는지 도 모른다고요. 물론 저는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일만큼은 꼭 해보고 싶 습니다.”
“은혜를 입은 분이기 때문인가요?”
백호는 멋쩍은 듯 미소를 띠었다.
“아니라고는 못합니다. 그러나 저분이 이렇게 된 데에는 필경 무슨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분은 계속 저를 원망하셨습니다.”
승희는 언뜻 백호의 주변에서 현암의 그림자를 읽었다. 까닭 없이 콧날이 시큰해지고,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 내가 뭣 때문에 이러지? 나는 또 뭔데 내 마음대로 읽고 또 읽은 것을 감추려 들고,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된 거 지? 뭐 좀 알아냈니? 나는 다만 그런 존재일 뿐이지. 도구 아니면 수단. 목적이 되어 본 적이 없는..
“말씀해 주세요. 승희 씨.”
승희는 눈앞이 흐려졌다. 고여 드는 눈물과 공허. 그래, 처음 부터 잘못된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차라리 아무 능 력도 없었다면, 승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요. 가르쳐 드릴게요.”
승희는 백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며 숨을 고르고는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분 원래 직업이 기관사였다지요?”
“맞습니다.”
백호의 대답에는 어느새 아까의 감정적이던 모습은 사라지고 평소 사무적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가라앉은 목소리가 깃들 어 있었다. 백호 스스로가 긴장하고 있다는 표시라고나 할까. 승 희는 자신이 이야기를 다 해도 백호가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 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래전 일인 것 같아요. 삼십 년 이상 되었을 겁니다. 그때 저 분은 광석을 나르는 기차의 기관사로 계셨지요. 아시는 일이겠 지요?”
“들은 적이 있습니다.”
“후에 저분은 기관사에서 사업가로 변신하셨지요. 사업이 성 공하자마자 사회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특히 고아들에 대해 남다른 정열을 쏟았을 거예요.”
“그렇습니다.”
문득 백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듯했다. 승희가 잘못 본 것일까?
“거기엔 이유가 있었어요.”
“이유라고요?”
승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한참 후에 내쉬었다. 백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승희의 입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삼십 년, 정확히 말하면 삼십일 년 전일 겁니다. 저분은 삼십 일년 전 어느 날 예전처럼 기차를 몰고 있었지요. 비가 조금 내 리는 날이었던 것 같아요. 여러 번 꿈에도 나타나고, 회상도 했 던 것 같아서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기차를 몰고 있었는데요?”
“기차에는 엄청난 화물이 실려 있었지요. 적재량 기준을 어기 고 두 배 가까운 광석을 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그걸 빠르 게 운송해야만 했지요. 일이 어떻게 되어서 저분에게 그러한 일 이 요구되었는지까지는 저분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요.”
승희가 말을 돌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백호는 조용하 지만 확고한 어조로 못을 박듯 말했다.
“그래서요?”
“비가 와서 미끄러웠어요. 새벽녘, 해가 막 뜨려고 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때 저만치 앞 철로 위에 뭔가가 희미하게 보였어요.”
백호의 눈이 빛났다. 승희는 입을 다물고 싶었으나 백호의 눈 빛을 대하고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승희는 숨을 천천 히 들이켠 다음 단숨에 말을 쏟아 놓았다.
“아이였어요. 됐나요? 그건 아이였어요. 기적을 울렸지요. 그 러나 아이는 듣지 못하고 계속 장난을 치고 있었어요. 다시 기적 을 울렸지요. 아이가 설마 피하지 않으리라고는 믿지 않았어요. 두 배 이상의 짐이 실려 있는데다가 커브길이어서 기차를 멈출 수도 없었어요. 비를 맞아 미끄러운 선로에서 무리하게 브레이 크를 당기면 전복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기적을 울렸 어요. 온몸이 울리도록. 그 소리로 귀가 멍멍해지고 온몸이 울릴 정도로 크게 계속 말이지요. 제발 피해 가라고, 제발 비켜나라고 말이지요. 나는 그 소리를 들었어요. 그 커다란 기적 소리와 기 차의 울림을요. 그리고 젊은 날의 저분이 그 기차 울림에 지지않 을 만큼 크게 외쳐 대는 소리를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시각각 가까워지는 그 아이의 모습.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차 에 삼켜지면서야 뒤를 돌아보는 아이의 일그러진 얼굴. 그 모습 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눈앞을 온통 덮을 만큼 커져서 온통 캄 캄해지는 순간을 말이에요.”
승희는 단숨에 소리 지르듯이 말을 내뱉고는 헉헉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백호는 애써 태연한 듯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었지만 움켜쥔 두 주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승희는 고개를 숙 였다가 들었다.
“그만, 그만해요. 다 됐어요. 난 더 이상 남의 마음속에 있는 아픈 기억 같은 것을 들추어 낼 자격이 없어요. 그리고 당신도 그런 자격은 없어요. 지난 일이에요. 모두 지난 일…….”
“잠시만요. 승희 씨.”
백호가 승희를 불렀다. 승희는 피곤해 보였다. 투시를 행하는 것보다 퇴마사들에게 힘을 모아 주는 것보다 더 힘이 들어 보였 다. 백호는 그런 승희가 가엾게 느껴졌다. 그러나 알고 싶다는 욕구가 그런 연민을 짓눌러 버렸다.
“다 이야기해 주시지 않았어요. 그것이 저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저분이 방금 저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승희 씨의 말만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아요.”
“하하, 그래요. 좋아요.”
승희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더니 백호를 노려보면서 날카롭 게 소리쳤다.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내 생각이나 내가 느끼는 감정 따위는 상관이 없는 일이겠지요? 내가 남의 마음을 읽을 때마다 무슨 생 각을 하는 줄 알아요? 나는 도둑이라고, 도둑년이라고 소리치곤 해요. 알고 싶다 이 말이지요? 더 알고 싶다는 거죠? 그럼 말해드리지요.”
“승희 씨!”
백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곧 후회가 밀려왔다. 미안 함과 후회가 가득한 눈으로 승희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예전에 자신이 본 어떤 위협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것들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버티어 나가던 그런 퇴마사로서의 승희가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힘과 능력을 통제할 줄 모르고 그 무게에 짓눌려 지 친 보통 사람, 아니 그나마 보통 때처럼 깔깔거리며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사는 그런 승희조차 되지 못하는 바보 같고 나약하 고 불쌍한 승희에 불과했다. 승희는 뒤로 돌아서서 마음을 안정 시키는 듯했다. 어쩌면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백호는 승희의 마 음을 이해할 듯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한계 라고도 느껴졌다. 승희의 마음을 반이나마 이해하는 것, 그 정도 가 비정상적으로 초월적인 힘을 지닌 사람들과 보통 사람인 자 신 사이에 허용된 이해의 한계점이 아닐까.
“승희 씨, 저는 처음에 당신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 다. 남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할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왜 현 암 씨나 준후, 신부님, 그리고 승희 씨는 항상 괴로워하고 고민 하는지, 그리고 왜 그런 힘을 스스로 증오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지 말입니다.”
승희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백호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도 그러한 힘을 그대로 썩히는 것 같아서, 단순히 악령이나 귀신들을 잡는 데에 그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 아쉽게도 여기고 바보 같은 일이 아니냐고 생각한 적 도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그 놀라운 능력들을 살리기 위해, 저 는 순수한 의도였다고 여깁니다만, 그것들을 여기저기 풀 수 없 는 일들을 해결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주선한 적도 있었지요. 제 좁은 소견으로는 그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당신들이 어려움을 견디어 내고 그 일들을 해결해 나감으로써 스스로 그러한 일들 을 받아들이고 힘들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어요.”
“말은 좋군요.”
뒤돌아선 채 조소하듯 말하는 승희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났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되었지요? 더 단련되고 강해져서 이젠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엄청난 힘들을 갖게 되었지요. 그러니 어 떻게 할까요? 엎드려 절이라도 올릴까요?”
백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수없는 고통을 겪었고, 그 결과 오히려 전보다도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더 큰 힘들을 지 니게 되었지요. 이해합니다. 저는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은 요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힘으로 세상을 구원하고 모든 이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건 옳지 않은 일이겠지 요. 지금은 확신합니다.”
백호는 승희의 뒷모습과 쓰러져 있는 늙은 은사의 얼굴을 번 갈아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승희 씨. 그러나 승희 씨는 결코 자신이 지닌 힘 에 조종당하거나 지배당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도구는 승희 씨 가 지닌 힘이지요. 그 어떤 것도 승희 씨를 도구로 만들 수는 없 습니다. 승희 씨 자신만 빼고는 말입니다. 지금 승희 씨는 깊은 번뇌에 빠져 있지만 결국은 이겨 내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꼭 그 러실 겁니다.”
백호는 말을 마치고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늙은 은사의 가벼운 몸을 들어 소파 위에 눕혔다. 뒤를 돌아보니 승희가 이쪽 을 보고 서 있었다.
“제가 오늘 좀 이상했지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승희는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백호 씨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어보십시오. 사실대로 다 말씀드리지요. 오늘만은…….”
백호는 말을 마치면서 승희에게 가볍게 윙크를 해 보였다. 승 희는 미소를 지으며 기분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백호 씨는 왜 항상 빈 담배를 물고 다니지요?”
백호는 대답 대신 쓸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승희가 느닷없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분도 그때 기차를 세우지 못했지요. 어떻게 보면 그건 세우 지 못한 것이라기보다 세우지 않았다는 쪽에 더 가까울 거예요. 기차의 속도와 무게 때문에 자칫하면 전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 더욱 컸겠지요.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 아이가 기차의 소리, 아니 소리를 듣지 못하면 기차의 울림이라도 느끼고는 철 길에서 비켜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그 아이는 죽었겠군요.”
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한참동안 은사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죄책감 때문에 사회사업으로 나서게 되었나요?”
“맞아요.”
“그런데 왜 저에게 이상한 말씀을?”
“그분이 철길에서 본 그 아이의 모습, 그건 당신의 모습이었어 요.”
백호의 눈이 커졌다가 스르르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저는 기차에 치었던 적이 없습니다.”
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쌍둥이도 아니었습니다.”
승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가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 보자 승희가 천천히 말했다.
“물론 그래요. 그 아이는 백호 씨 당신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어딘가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게 누군가요?”
“알 수 없지요. 저분도 모르시니 저도 알 수 없어요. 다만 백호씨와 모습이 닮았다는 것밖에는….”
“그냥 모습이 닮았다고요? 그런데 왜?”
말을 하려던 백호가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아마도 일종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사고는 아무도 몰랐어요. 비 오는 새벽의 철길, 본 사람이 없으면 그걸로 끝이었겠지요. 오로지 저 분만이 알고 계시는 일이죠.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가 않아서 류순화 씨는 그 마을 부근을 기웃거렸던 거예요. 그러다 가 당신을 보게 된 것이죠. 당신의 모습이 자신이 치었던 아이의 얼굴과 비슷해 보이자……………..”
“이유가 어떻게 되었거나 저분은 내 은인입니다.”
승희는 고개를 끄덕였고 백호는 무거운 표정이 되어 생각에 빠져들었다. 한참 후에 정신을 잃었던 노인이 몸을 움직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선생님? 너무 과음하셨습니다.”
백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노인을 부축하여 일으켜 앉혔다.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노인은 아까와는 달리 정신이 많이 든 것처럼 보였다.
“자넨가 호우.”
“예. 접니다.”
“머리가 아프군. 나쁜 꿈을 꾼 것 같아.”
혼잣말처럼 노인은 뭔가 중얼거리다가 백호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백호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로 그때 정신을 차 린 것 같았던 노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너, 너구나. 아냐, 아냐!”
뒤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승희가 재빨리 달려들어서 백호를 뒤로 끌어당겼다.
“백호 씨, 아직 정신을 다 차리시지 못했어요. 뒤로 물러나세요.”
그러나 백호는 거친 눈으로 승희를 돌아보았다.
“안됩니다!”
그사이에도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백호의 멱살 을 틀어쥐면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백호는 고개를 돌려 노인 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선생님, 왜 저를 보고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거죠? 그러실 것 없어요. 지난 일입니다.”
“아니야. 지난 일이 아니야. 나는……………”
“그건 사고였습니다. 오래전에 지나가 버린 일일 뿐입니다. 법적으로도 시효 만료가 된 일입니다.”
“아냐, 아냐. 너는 나를 용서해 주지 않았어. 너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기차 울림이 그 소리가………….”
“네?”
백호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뒤에 있던 승희도 눈을 치켜떴다.
“기차 소리라니요? 이 근처에 기차역은 없습니다.”
“어젯밤부터 다시 그 소리가 들렸어. 너는…………….”
노인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어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백호는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서 알아들으려 애썼다.
“난 평생을 너 때문에 …………. 그 일 때문에 희생하고 가면을 쓰 고・・・・・・ . 그래도 너는 만족을 못하는거냐?”
승희는 점점 창백해지는 백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백호는 입을 꾹 다문 채 노인을 붙들고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갑 자기 노인이 몸을 무섭게 꿈틀거리더니 벽을 가리키면서 소리쳤 다. 그 눈은 광기 같은 것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기차, 기차가 또 온다! 와!”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백호도 악을 쓰다시피 말했다. 그러나 백호의 말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승희와 백호의 등에 소름이 쭉 돋았다. 긴장한 백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승희도 백호의 어깨 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노인이 길게 소리를 쳤다.
“기차, 저 기차!”
사방이 나직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카당카당 하는 선로의 마 찰음과 함께 우르릉 하는 울림,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르는 그 소 리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신경을 쓰고 있지 않으면 느끼 지 못할 정도로 작은 울림이었지만 지금 세 사람에게는 그 울림 이 온몸을 흔들어 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차의 기적 소리가 가 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꺼져 가듯이 사라졌다.
백호가 제일 먼저 멍한 표정을 지우고 중얼거렸다.
“이, 이건…….”
백호에게 짓눌리다시피 붙들려 있던 노인이 차분해졌다. 눈에서 나오던 번쩍이는 광기도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있었다.
“들었나? 아아, 역시…………….”
백호는 뭔가 간절히 바라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지만 승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초능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영적인 것 을 느끼는 능력은 아주 미약했고, 기차의 울림이 전해지는 동안 에는 자신도 놀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 희가 약하게 고개를 흔들며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백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기차의 울림은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세 사람이 말없이 앉아 있는 사이 어느덧 밖엔 어둠이 몰려와 있었다. 노인은 이제 술기 운에서 완전히 벗어나 정신을 차린 듯 차분해져 있었고 어딘가 의젓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어떻게 잠깐 사이에 이토록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을까 하고 승희는 어리둥절했으나 노인의 얼굴에 체념의 빛 같은 것이 비치는 것을 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 고 노인이 백호에게 말을 꺼냈다.
“자네는 전부 알고 있나?”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의 얼굴이 흐려졌다.
“전부터 조사를 해 온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알았지?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그건 ・・・・・・ “”
백호가 더듬거리자 승희가 얼른 끼어들었다.
“선생님께서 아까 혼잣말로 말씀하셨어요. 잠꼬대 비슷하게………….”
노인이 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백호는 난처한 자기를 구해준 승희가 고마웠다.
“자네 애인인가? 안심시켜 주려고 온 모양인데 못난 꼴만 보였으니 늙은이가 면목이 없구먼.”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승희는 그냥 참아 버렸 다. 차라리 노인이 생각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더 나을 듯 싶었다.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백호 의 머리를 살펴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미쳤군. 미쳐도 곱게 미쳐야 하는데 이건 세상에.”
“괜찮습니다. 선생님.”
“괜찮긴 뭐가 괜찮은가? 머리에서 피까지 나는데…………”
승희는 노인이 정신을 차리면 무척 당황하거나 울면서 절망 할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노인의 태도는 예상외로 침착 했다. 정신력이 매우 강한 사람 같아서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 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다시 마음을 읽고 싶지는 않 았다. 승희는 입을 다물고 얌전하게 있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자신은 제삼자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 다 무엇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해 난감해하 고 있을 때 백호가 주저하듯이 말했다.
“선생님, 분명 착각입니다. 아니, 실제로 이 근방을 지나가는 기차 소리일 겁니다.”
“이 근방에 기차나 지하철은 없네. 내가 그런 길에 집터를 잡았을 성싶은가? 그 울림은 어제부터 들리기 시작했다네. 바로 어제부터.”
“그렇지만………….”
“내 죄일세. 내 죄 때문이지. 나는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여겼네. 그러나………….”
“벌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일을 해 오셨습니다. 평생 동안 말입니다.”
노인은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내 죄일세.’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호우 군. 자네에게 내 못난 모습을 보이게 되어 뭐라 할 말이 없네. 그러나 할 수 없지. 나는 악한일세. 항상 가면을 쓰고 살아 온 것이지.”
“그건 사고가 아니었습니까?”
“사고였지, 사고………….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였네. 나는 그 아 이를 치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어. 쉽게 말하면 뺑소니를 쳤던 걸세. 그러곤 숨었지. 도망쳐 버리고 싶었네. 잠을 잘 수가 없 었어. 그런데 아무도 몰랐네. 아이는 글자 그대로 기차에 치이 고 골짜기로 굴러서 없어져 버린 거야. 잡혀가는 것이 아닐까 하 는 생각도 했고 신문이나 라디오에 뉴스가 나지 않나 살펴보기 도 했네. 한번은 근처 경찰서에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데 비슷한 사고 없었느냐고 전화를 해 보기도 했지. 그러나 아무도 몰랐어. 처음에는 안심했네. 그런데 잊히질 않는 거야. 그 아이가 기차에 치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지면서 지었던 마지막 순간의 그 표정이……”
노인은 눈물이 배어나는 듯한 눈을 들더니 백호를 가리켰다.
“난 그 근처의 마을에 가 봤지. 왜 갔는지는 모르겠네. 기관사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 사표를 써 버리고 난 후 제일 먼 저 그 철길이 나 있던 근처의 마을로 갔었네. 그런데 거기서 …………… 허허, 아이들과 싸우다가 얻어맞고 크게 소리쳐 우는 아이가 있 었네. 그 모습이 그 모습이 ………….”
“저였습니까?”
“그렇다네. 나는 자네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지. 자네는 예전 에는 있었는데 이젠 없어졌다고 했어.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고 했더니 그분들도 없어졌다고 말했지. 왜 우느냐고 했더니 그렇 잖아도 울고 싶은데 아이들이 고아가 됐다고 놀리는 바람에 분 해서 운다고 말했었지. 허허허.”
“선생님은 저를 키워 주셨습니다. 또 그 이후에도 수많은 아이 들을요.”
“그래그래 난 그래야 한다고 여겼네. 그래서 ….”
백호는 한숨을 쉬다가 애타는 표정을 지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그 일은 사고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그 이후 수십, 수백 명의 고아들을 어엿하게 길러내는 일을 해내셨습니다.”
“그래. 다들 잘 자라줬지. 잘 자라주었어.”
“선생님, 저는 죄인을 처벌하는 검사입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법이 벌을 내리는 것은 죄에 대한 응분의 보복을 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벌은 죄를 지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 라는 말입니다. 그 죄에 대해 반성하고 속죄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본보기를 보임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그런 죄를 짓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게 하기 위해서란 말입니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호는 말을 이어 갔다.
“2차 대전 때 실수로 고아원에 폭탄을 떨어뜨린 조종사가 전 쟁이 끝난 뒤 그 사실을 알고 고아들을 보살피는 것에 일생을 바 친일이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 조종사에게 어린아이들을 살 해한 악랄한 살해범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고였 고, 또 그 사람은 사고에 대한 속죄로 평생을 다 바쳐 더 많은 아 이들을 훌륭하게 길러 냈습니다.”
백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노인은 백호가 뭐라고 할 사이도 주지 않고 소리치듯이 말했다.
“그래! 그것 때문에 나는 속죄를 하지 못했다는 걸세. 내가 생 각해도 가증스럽네. 내가 그랬다니 ・・・・・・ 나야말로 속고있었는지도, 잊고 있었는지도 몰라. 세상의 이치가 왜 이런 건지, 누구 에게나 미담으로 믿어질 일들이 실은 끔찍하고 음험하기 짝이 없을 수도 있는 거야. 나야말로 죄를 피해 숨어 웅크리고 있는 주제에, 그래, 나도 내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잊었던 게야. 어느 새 다 잊었어. 나는 속죄한 게 아니야. 도망치고 피하고 가린 것 뿐이야!”
“아닙니다.”
“아니야.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네. 잊고 있었지만, 아 니 잊었다기보다는 묻어 두고 있었네만 기차의 울림 ……… 저기 차의 울림이 과거를 흔들어 일깨우고 있네.”
노인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천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제야 비로소 알았네. 기차 울림을 듣고서야 말이야. 내가 그동안 쭉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인생 은…….”
노인이 백호를 바라보면서 소름 끼치도록 맑은 목소리로 말하 기 시작했다.
“자네에게 내 자세히 말해 주지. 왜 내가 용서받지 못하는지.”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본인이 뉘우치기만 한 다면…….”
“그래서 내가 용서받지 못한다는 걸세.”
노인은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나는 말일세. 내 죄를 뉘우치기 위해 선행을 하고 적선을 한 것이 아니야. 죄에 대한 보상을 하려고만 했지. 내가 지은 죄에 대해 나 자신이 응보를 내려서 하기 싫은 일을 했을 뿐이었단 말 이네. 겉으로는 달려드는 아이들을 미소로 감싸 주었지만 속으 로는 귀찮고 꼴 보기 싫다고 여겼고, 나를 결혼도 하지 못하게 만든 놈들이라고 원망도 많이 했었어. 허허허.”
“그게 결혼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내가 낳은 것은 아니라지만 아이들을 수십 명씩 거느리고 있 는 놈이 어느 여자를 데려와 고생시킬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도 아네, 알아. 잘못된 생각이지. 비뚤어지고 옹고집으로만 똘똘 뭉쳐진 생각이지.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나 자신이 원래 그 런 놈이었는걸.”
“아닙니다. 선생님은…………….”
“자네는 나를 모르네.’
“선생님.”
“어제, 기차의 울림 소리를 듣고서 비로소 깨달았네. 내가 그 동안 살아온 모든 것은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난 너무 앞질 러서 판단해 버린 거야. 죄를 지었으니 그에 대한 갚음을 한 것 은 맞지만 그것은 진정한 속죄가 아니었어. 다만 숨기고 감추 고・・・・・・ . 아아, 그만두세.”
“선생님, 제가 조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백호는 애타는 눈빛으로 자신의 은사를 바라보았다.
“선생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의도를 저도 조금은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스스로에 대해 가혹하신 것이겠지 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는 죄를 짓고 그에 대한 벌 을 받고 나서야 참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많기도 하거니와 그런 사람들이 오 히려 정상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에게 벌을 내리셨고, 비록 그러한 선행이 가식적이었다고 말씀 하시지만, 그런 선생님의 결심 때문에 도움을 입은 사람들이 많 습니다. 그리고 그 본연의 의도가 선한 것이었든 그렇지 않든 간 에 결과가 선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내가 한 일이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네. 그러 나 그것이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니었어. 보게, 잊고 있었던 기차 울림이 들려오기 시작했어. 그건 뭔가? 내가 잘못 들은 것 이 아니라는 것은 자네들도 같이 들었으니 알 것 아닌가?”
“그건 틀림없이 기차나 지하철이 지나가는 울림이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 이 근처에는 기차가 지나가지 않아!”
“그러나………….””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써 설명하려 들지 말게. 나는 그것이 뭔지 아네. 그건 내 양심의 소리였어. 허허, 어떻게 보면 내가 억울하게 치어 죽인 아이의 목소리인지도 모르지. 그래,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야. 그 애는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 이야. 그렇게 외치는 거야.”
“선생님.”
“나는 잘못 생각해 왔어. 나는 속죄를 했어야 해. 이렇게 빗나 가고 비뚤어진 방향에서 죄를 피하려고 한 선행이 아니라 정말 솔직하고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일을 했어야 했어.”
“선생님은 선행을 하신 겁니다. 그것만은 변하지 않아요. 정 그러시다면 지금부터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변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선생님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선생님, 마음을 새롭게 가지고 해 오 시던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입니다. 선 생님 스스로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더 이상 고통을 당하실 필 요는 없습니다.”
노인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뭔가를 가만히 생각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는가?”
그때 노인의 눈에서 무언가 반짝하는 것을 승희는 보았다. 아 무 말도 없이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승희였지만 그녀의 마음속 에도 노인의 고통이 느껴져 오는 것 같았다. 투시를 행한 것은 아니었다. 삼십 년이라………….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을까. 그런데도 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있다. 지금 저 노인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인지 승희가 온전히 납득할 수는 없었다. 다만 노인의 고통이 가엾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백 호는 노인의 질문을 듣고 한동안 슬픈 눈으로 노인의 얼굴을 바 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와 함께 류순화의 집을 나오면서 승희는 백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류순화가 아니라 오히려 백호 쪽이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승희는 아무 말 없이 백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미 밤은 깊어 하늘에는 초 승달이 싸늘한 빛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 때 백호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품 안에서 담배 를 꺼내 입에 물고는 빙글 한 바퀴 돌리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빼서 손에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 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왜 빈 담배를 물고 다니는지에 대해 물어보셨지요, 승희씨?”
승희는 머뭇거리다 내키지 않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지금은 아저씨가 되어 버렸지만 저도 연애를 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지요. 머리를 기르고 가죽점퍼를 입고요. 하지만 제가 가 죽점퍼를 즐겨 입었던 것은 멋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쉽게 더 럽혀지지 않고 질겨서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기 때문이었습니 다. 아무튼 미친놈처럼 하고 다니던 시절이었죠. 그때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승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백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남의 마음을 읽어 내지 않고 직접 사람의 고백을 들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승희는 백호의 고백을 좀 더 깊이 음미하기 위 해 눈을 감았다. 백호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 갔다.
“다른 날과 하나도 다를 것 없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애 와 만나고 헤어지는데 그 애가 저더러 담배를 끊으라고 했지 요. 제가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불은 붙이 지 말고 물고만있으라고 하더군요. 제가 그것도 싫다고 했더니 그 애는 화가 나서 골목으로 달려가 버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차 가…………. 그 애가 제 눈앞에서 그렇게 사라져 갈 줄은….”
백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승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세 상은 이렇게 고통으로 이어져야만 할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 면서 백호를 쳐다보았다. 백호는 여전히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 다. 여름에는 검은 남방 같은 걸로 바뀌지만 조금만 쌀쌀해지면 백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바뀌는 검은 옷. 그리고 뒤로 묶은 머 리와 빈 담배. 지금 백호가 입고 있는 가죽점퍼는 비록 그가 지금 말한 그때부터 입었던 것은 아닌 듯했으나 승희는 이 검은 옷이 백호가 항상 몸에 붙이고 다니는 고행대(苦行帶) 같다고 느꼈 다. 고개를 숙인 백호가 말을 이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승희 씨? 물론 저는 남들이 비난할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마 음의 짐을 늘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 는 제가 감히 은사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백호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렇지요. 전 그분을 위해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승 희씨는 저를 위해서 말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 다. 승희 씨 자신의 고민은 또 어디로 간 겁니까?”
승희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백호의 목소리에서 승희가 백호를 만난 이래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공허한 울림이 느 껴졌다.
“인간은 어차피 완전하지 못하니 서로 기대고 위로하며 살아 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과연 진정한 용서는 어디에 있는 겁 니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감싸 주면서 우리의 죄를 그렇게 지워 버리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겁니다. 우리 는 각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은 용서하지 못한 채 똑같 은 처지의 다른 사람을 위로하면서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잊 어 보려 하는 것입니다.”
백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승희는 눈을 감고 아무 말 없이 백호의 말을 들었다. 현암 생각이 났다. 박 신부도, 준후도, 연희도
“누가 저를 위로해 준다고 해도 별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게 절 괴롭힙니다. 저 자신도 믿지 못하고 떨 쳐 버리지 못하는 것을 은사님께는 자신 있게 이야기했어요. 그 렇다면 다른 이들이 위로하려고 저에게 이야기해 주는 말들 또 한 말하는 사람 스스로는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자신에 게는 통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상대방을 위로하려 하는 것입니 다. 도대체 그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승희는 백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백호 씨는 좋은 사람이고, 또 순수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스 스로 고통을 걸머지고 채찍질을 한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나 요? 그 아가씨가 다시 살아나나요? 저승에서라도 자신을 잊지 않았다고 그 아가씨가 좋아해 줄까요? 정말 좋아해 줄까요? 백 호 씨는 바보예요. 아니 바보이기 이전에 불행한 사람이에요.’
승희의 들리지 않는 애절한 외침도 모른 채 백호는 어두운 얼 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 보면 그도 그림자에 얽매여 사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불행했고, 그 안에서 고통을 받 으며 그 고통을 다른 쪽으로 승화시킬 줄 모르기 때문에 또한 바보였다. 승희는 현암과 박 신부, 그리고 준후를 떠올렸다. 그들 이 하고 있는 일도 어떻게 보면 바보짓이었고 멍청한 짓이었다. 자신이 받은 고통에 괴로워한 나머지, 그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도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까지 걸고 미친 짓들을 하는 사 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어떤 때는 자기 자신도 그들을 바보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바보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던 자기 자신과 백호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었 다. 그러나 승희는 백호에게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자기야말로 바보 중의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제멋대로 떠들어서.”
“아니에요.”
백호는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골똘히 궁리하다가 휴대 전화를 꺼내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호는 류순화의 주소를 말 하면서 근처의 모든 지하철과 전철 등의 행로를 조사하라고 지 시했다. 승희는 왠지 백호를 말리고 싶었다.
“백호 씨…….”
그러나 백호는 승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통화에만 열중하 더니 갑자기 환한 얼굴이 되어 은사의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 다. 마치 옆에 승희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승희는 뭐 라고 백호에게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도 없었고 뒤따라 갈 만한 어떤 확신도 없었다. 승희는 백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가 뒤돌아서 터벅터벅 싸늘한 밤거리를 걸었다.
다음 날, 화실에서 혼자 뒤척이며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승희 는 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백호의 동료에게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백호 검사요? 지금 초상집에 갔습니다. 은사분이 돌아가셨다 는 연락이 와서 아침 일찍…………. 백호 검사를 아주 오랫동안 지 원해 주시고 거의 키우다시피 하셨던 분이라고 하던데요. 성함 이 뭐더라……………. 누구신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그랬구나, 역시 그랬구나. 수없이 되뇌면서 승희는 몸을 일으 켰다. 승희는 집을 나서서 지금은 초상집이 되어 있을 류순화의 집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는 백호를 만날 수 있었다. 승희는 그런 백호에게 말도 붙여 보지 못한 채 사진 속 의 고인에게 절을 하고는 조용히 초상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백호와 승희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류순화의 장례가 끝 난 다음 날이었다.
“저는 그날 선생님께 알려 드렸습니다. 기차의 울림에 대한 것 을 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날 밤에 적어 보내신 편지를 어 제야 받아 볼 수 있었습니다. 뜻밖이었죠.”
“그때 기차의 울림은 어떤 것이었죠?”
“정말 기차의 울림이었습니다.”
백호의 말을 듣고 승희는 미간을 좁혔다.
“정말인가요?”
“물론 그 일대는 기차가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새로 지하철 공사가 진행중인 구간이었습니다. 겉에서 파 들어가는 공사가 아니고 땅속에서 굴을 파 들어가는 공법을 사용했기 때 문에 미처 몰랐던 겁니다.”
백호는 머리칼을 무심코 위로 쓸어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울림을 들었던 날, 지하철 공사 구역에서 처음 시범 운행을 했습니다. 우리가 느꼈던 울림도 마찬가지로 지하철 시 범 운행으로 인한 울림이었고요. 우리가 그 울림을 느꼈을 때의 시간은 아홉시오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시범 열차가 정각 아홉시에 사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역을 떠났다는 것을 확인했 습니다.”
승희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지만 백호가 입을 열 틈을 주지 않고 계속 흥분한 상태로 말을 이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 다.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그날 그 이야기를 선생님께 해드렸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
“어떤 내용의 편지를 쓰셨나요?”
“보여 드리지요.”
백호는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승희에게 내밀었다. 하얀 종이 위에는 휘날리는 듯한 연필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면 내가 살아온 모든 것도 착각일 뿐이 아니었겠는가? 과거가 허깨비였고 잊혀야 하는 것이었다면 내가 해 온 모든 것도 허깨비였고 잊혀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승희는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랬군요.”
“그래요. 선생님은 여전히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셨던 것입니 다. 그 기차의 울림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아셨을 때, 그분은 그 분이 쌓아 왔던 모든 가식적인 선행 또한 허상이었다고 생각하 신 겁니다. 결국 선생님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겁니다. 아 아, 그분은 도대체 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셨는지…………….”
승희는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 씨, 백호 씨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계신가요?”
승희가 말을 하자 백호는 놀란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흐려진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저도 고민을 해 보았어요. 그러나 백호 씨, 그것은 어쩔 수 없 는 일이었을지도 몰라요. 그건 그분의 선택이었을 테니까요. 어 디서 주워들은 말이기는 합니다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은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독이지요. 그러나 그런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면 그 사람 은 술을 마실 때보다 더 빨리 쇠잔해지고 금세 죽게 된다는군 요.”
“그럼 그분은?”
“모르겠어요. 이제 정확한 진실은 하나도 알 수 없어요. 다만 추측할 뿐이지요. 그러나 그분이 정말로 고통을 느끼신 것은 그 때의 회한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그분이 말씀하신 대 로 그때의 잘못보다도 오히려 그 이후의 생이 그분에게는 훨씬 후회스럽고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르죠. 그 아이를 치어 죽게 만 든 것보다도 그 이후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스스로 원하지 않는 일로 평생을 마치신 것을 후회하셨던 것인지, 아니면 선인으로 이름을 날려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존경할 사람으로 믿게 한 데에서 더 큰 가책을 느끼셨는지, 아니면 정말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오신 데 대한, 그러니까 자신에 대한 분노 같은 것 때문에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셨는지…”
백호는 뭔가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제가 일로써 처리하는 것과 이번의 선생님의 일이 똑같 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법은 그렇지요. 한 사람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 을 준다고 속죄가 될 수 있을까요?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도움을 준 그 사람을 선하다고 보겠지요. 그러나 깊은 상처를 입은 당사 자는 그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원한을 가질지도 모르 죠. 그렇기 때문에 법이 있는 것이지만 모두가 법을 믿고 만족하 며 따르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법 때문에 죄와 벌 사이의 거리는 더더욱 벌어졌다고 할 수도 있죠. 죄를 지은 사람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법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더라도 법만 피하면 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속죄하기보다는 법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벌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 니다.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다기보다는 법에 걸렸기 때문에 벌 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저 자신도 그러한 일들을 수없이 보면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법을 집행할 때도 본연의 의미는 망 각하고 죄에는 벌이라는 도식으로 판단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 지. 더구나 이번의 경우까지 이르면 저 자신이 정말 무력하고 보 잘것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죄를 갚는 길은 벌이 아니라 용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 용서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하는 것인지, 또 벌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백호는 괴로운 듯이 천천히 말을 이었고, 승희는 충분히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백호의 고민에 나름대로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어라 해 줄 말이 없었다. 결국 모든 사람은 똑같은 고 민에 빠져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가 끊임없 이 발전해 가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답은 하나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죄와 벌에 관한 백호의 긴 독백을 들으면서 승희는 다시 한번 류순화를 떠올렸다. 자신이 아까 생각했던, 그러나 지금은 더 이 상백호를 번민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일을. 승희 자신과 백호는 분명, 그날 기차의 울림을 느끼면서 기적 소리도 같이 들었다. 지하철은 기적을 울리지 않는다. 또 분명 백호는 아홉 시 정각에 기차가 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출발했고 오 분 뒤인 아홉 시 오 분에 기차의 울림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 킬로미터 정도를 가는데 오 분이 걸린다면 그 건 우마차지 기차가 아니다. 하물며 그것은 시범으로 운행한 열 차여서 역도 없었으니 중간에 서거나 해서 시간을 지연시킬 일 도 없었을 것이다. 승희는 백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기차 가 지나가는 시간에 그 집으로 울림이 전해지는지를 알아보자고 할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기차의 울림이 정말인지 아닌지를 밝히려던 것은 류순화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류순화는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지금 그 일을 되새 기는 것은 백호를 더 괴롭히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 다. 틀림없이 그랬다. 백호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진위를 캘 것 이고 자신의 은사가 고통을 받은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그 리고 그 고통까지 넘겨받기 위해서 머리를 싸맬 것이 분명하니 까. 백호는 류순화가 스스로를 용서할 줄 모른다고 안타까워하지만, 백호야말로 스스로를 용서해 줄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승희가 백호를 용서 해줄 차례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승희의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 는 것 같았다. 이것이 자신을 속이는 일일지라도 승희는 그 이상 은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고통은, 세상에 떠도는 모든 고통들은 지금만으로도 충분했다. 승희는 자기 스스로와 백호, 그리고 류 순화를 자신이 용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기차의 울림이 류순 화를 용서하고 안 하고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승희는 류순화와 백호,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이유를 불문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승희는 자기 자신의 기차의 울림 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현암과 박 신부와 준후의 얼굴을 떠올렸다. 승희가 어떤 마음인지 모르 는 백호가 계속해서 죄와 벌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은사 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승희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것 도 들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