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3권 6화 – 홍수 3 : 잔존자들의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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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3권 6화 – 홍수 3 : 잔존자들의 음모


잔존자들의 음모

박신부는 윌리엄스 신부와 함께 차에 오르는 중이었고 그 뒤 를 따라 연희가 나오고 있었다. 아까 현암이나 승희가 있을 때는

밝은 모습이었지만 지금 연희의 표정은 매우 무거웠다.

“죄송합니다. 신부님. 도움이 되지 못해서…………….”

박신부는 쾌활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을…………. 연희 양. 괜찮아요. 도리어 내가 미안하지.”

“티베트어까지는 익혀 본 일이 없어요. 새로 익히려면 아무래 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 연희 양. 내가 공연한 소리를 한 모양이군. 허허 허. 그렇게 무거운 표정을 지을 것 없어요. 혹시 자존심에 상처 를 입은 것은 아니겠지? 허허허.”

박신부가 유쾌하게 농담조로 이야기하자 연희도 피식 웃으며 얼굴을 밝게 폈다.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이지요. 자존심이라뇨.”

박 신부는 연희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윌리엄스 신부와 함께 차에 올랐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연희 의 눈길을 뒤로 하며 집으로 향했다.

“다른 통역가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마 찾을 수야 있겠지요?”

박신부의 한숨 섞인 소리를 들은 윌리엄스 신부는 고개를 끄 덕였다. 그 말은 자신이 전한 교단의 제안을 이미 마음속으로 수 락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박 신부는 윌리엄 스 신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듯 한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현암과 박 신부에게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되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하던 준후는 현암과 승희가 생각지도 않게 병원으 로 찾아오자 몹시 기뻐했다. 현암과 승희는 준후에게 간략한 상 황 설명을 듣고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놀랐다. 블랙서클의 잔 존자들이 나타났다는 승희의 투시는 적중한 셈이었지만, 그들 이 노리는 대상이 「해동감을 연구하는 준후가 아니고 최 교수 라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주기 선생이 그들보다 앞서서 최 교수를 보호하려고 애쓰다가 오늘 큰 부상을 입은 것 도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칠 인 의 신동이라는 아이들이었다. 그들 중에 세 명과 주술력을 겨루 었는데 준후와주기 선생 둘이 상대하고도 거의 비등했다는 것 은 현암으로서도 믿기 어려웠다. 더구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레 그나와 늑대 소년의 나이는 준후보다도 네다섯 살 정도 어리기 까지 했다니 경악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걸? 신부님께도 말씀드리고 상의해 봐야겠어.”

현암이 결정을 내리자 승희는 박 신부가 걱정된다는 듯 난감 한 표정을 지었지만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현암 군은 주기 선생을 만나 봐. 병원 수속은 내가 처리할게.”

“그래 주겠니?”

“그래요. 나도 물어보고 싶은 일이 많았어요. 주기 선생 아저씨는 아직 응급실에 있을 거예요.”

말을 하면서 준후는 현암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현암은 승희에 게 눈짓을 해 보이고는 준후와 함께 응급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승희는 현암의 손에 자신이 준 선물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을 확인 하자 한숨을 쉬고는 간호원에게 박상준이라는 환자의 입원 수속 을 밟으러 왔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현암은 준후와 함께 응급실의 한쪽 구석에 있는 침대로 갔다. 부상을 입게 되면 주로 오는 병원인지라 퇴마사들의 사정을 병 원 측에서도 잘 알고 있어서 이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응급실인데도 커튼형 임시 칸막이를 설치해 놓았다. 주 기 선생은 고통스러운 듯 가쁜 숨을 내쉬다가 현암이 커튼을 걷 어 내며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금세 평온한 안색으로 돌아갔다. 현 암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왜 왔나? 요꼬마가 자네까지 부르던가?”

주기 선생의 말투는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현암은 별다른 말없이 주기 선생의 안색을 살피고는 준후에게 물었다.

“위독한 것은 아니군.”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기 선생은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난 멀쩡하니 염려 마. 바보같이 다쳤다고 비웃으러 왔냐?”

“아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준후는 조금 묘한 것을 느꼈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현암과 주기 선생은 초치검 사건 이후 처음 만 나는 것일 텐데 언제부터 서로 반말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현암 형, 주기 선생 아저씨 만난 적 있나요?”

준후가 묻자 주기 선생이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아! 누군 아저씨고 누군 형이냐? 현암이나 나나 같은 나이란 말이야!”

현암은 주기 선생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준후에게 말했다.

“한두 번 지나가다 마주친 적이 있지.”

“마주쳐? 뭘 마주친 거냐?”

주기 선생은 악을 썼다.

“날 비웃으러 온 거냐? 번번이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는…”

“악의로 그런 것은 아니네.”

“좌우간 난 기분 나빠! 넌 왜 자꾸 내 앞에서 잘난 척하려고 그러지?”

“난 잘난 척한 일이 없네.”

“그러면 왜 날 도와주려고 하는 거지? 엉? 내 앞에서 폼 잡는거야 뭐야?”

“꼭 자넬 도우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도 아니었네. 그냥 우연히 보게 되었고 누군가 다칠 것 같아 막으려 한 것뿐이지.”

“알겠어. 네가 나보다 세다는 건 인정해. 그러니 제발 가줘.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줘.”

“알고 싶은 것이 있네. 그것만 이야기해 주면 가지.”

“제길, 난 자네가 싫어.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싫다구!” 

“날 좋아해 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싫어한다니 유감이로군.” 

현암은 여전히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하고 있었지만 주기 선생 은 목에 핏발까지 세우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커튼이 가끔 가 다가 들썩거리는 것으로 보아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 나 하고 들춰 보는 것 같아서 준후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이런 말에 대꾸를 일일이 한다 는 것은 현암도 화가났다는 증거였다. 현암이 예전과는 달리 웬 만해선 화도 내지 않는 차분한 성격이 되었지만 화를 참을 수 없 을 지경이 된다면 예전의 결기 부리는 모습으로 돌아가지 말라 는 보장이 없었다.

“좋아. 그래그래. 네가 더 세니깐 네가 다 맡아서 훌륭한 사람돼라. 엉?”

“난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일하는 것이 아니네.”

“좋아, 알았어. 난 못나고 무능하고 돈만 밝히는 놈이니 꺼지도록 하지. 됐나?”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현암의 얼굴이 굳어지는 순간 준후가 슬며시 옷자락을 잡았 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또 있었기에 이렇게 된 것일까? 슬슬 준 후는 주기 선생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진정하세요. 아저씨.”

“뭐가 또 아저씨냐?”

“으음, 네, 주기 선생 형…………….”

“야, 인마 주기 선생 형이 뭐냐?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그냥 상준이 형이라고 해라.”

“아, 네. 상준이 형, 화내시지 말고요 이야기해 주세요. 왜 최 교수님이 위험하다는 건지, 그리고 칠 인의 신동들은 또 무엇인 지. 에, 또 그리고…………….”

“좋아. 어차피 난 며칠 쉬어야 할 텐데 그때 놈들이 또 오면 곤 란하겠지. 너 혼자론 밀릴 것 같으니 할 수 없겠지. 무적 현암께 서 또 나서셔야지.”

“주기, 아니 상준이 형. 그건…………….”

“좋아. 말해 주지. 그 대신 조건이 있다.”

주기 선생의 말에 현암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지?”

“다 말하지. 그 대신 현암 자네에겐 못해! 자넨 미안하지만 최 교수 집에 가서 혹시라도 놈들이 다시 오지 않나 지켜주게나. 내 이 꼬마에게 다 이야기해 줄 테니.”

주기 선생의 말에 현암이 어이없어 하는 사이 승희가 커튼을 휙 걷으며 들어섰다.

“나도 들으면 안될까요?”

“음, 댁은 맘대로 하시오. 무적 현암 씨만 사라져 준다면 내 무 슨 말이라도 하지요.”

현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승낙한다는 듯 끄덕여 보이고 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준후와 승희는 도대체 현암을 싫어하 는 이유가 뭐냐는 듯 곱지 않은 시선으로 주기 선생을 바라보았 다. 그런데 주기 선생은 현암이 나가자마자 껄껄거리며 웃는 것 이 아닌가.

“우하하, 쫓아냈다. 쫓아냈어. 내 말을 저리 잘 듣다니 참 착해 졌구먼. 하하하.”

승희는 뭐가 뭔지는 몰랐지만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허리에 양 손을 올리고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당신 말을 들어서 나간 게 아니라구. 뭐가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그 말을 들은 주기 선생은 승희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준후가 주기 선생의 앞을 막으면서 헤헤헤 웃어 보였다.

“상준이 형, 화내지 말아요. 현암 형은 나갔잖아요. 그러니 이제 이야기해 줘요. 네?”

준후가 나서려는데 승희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서며 쌀쌀맞게 말했다.

“그보다도 주기 선생 씨.”

“주기 선생 씨는 또 뭐요?”

“왜 현암 씨를 그리 미워하는 거죠?”

“미워하는 건 아니오. 싫어할 뿐이지.”

“그럼 왜 싫어하는 거죠?”

“내 자존심을 여러 차례 짓밟았소.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소. 좌우간 보기 싫으니 그렇게 아시오!”

주기 선생이 핏대를 세우자 준후가 달래듯이 말했다.

“상준이 형. 그러지 말아요. 난 잘 모르지만 현암 형은…….”

“그만둬! 이름도 듣기 싫단 말이다. 좋아. 알고 싶은 게 뭐랬 지? 다 이야기해 줄 테니 제발 그만 좀 떠들란 말이다!”

주기 선생이 소리치는데 간호사 한 명이 환자에게 안정이 필 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들어서자 가뜩이나 날카로워져 있던 승희가 간호사를 밖으로 밀어내며 커튼을 홱 소리 나게 닫아 버 렸다. 쿵 소리가 나건, 간호사와 승희가 싸우건 말건 준후는 주 기 선생에게 신경을 집중했고 주기 선생도 그런 준후를 잠시 바 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좀 치사하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마음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

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기 선생도 잠시 입을 닫고 간호사와 승희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주기 선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혹시 홍수 이야기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니?”

“홍수요? 무슨 홍수요?”

“인류의 태곳적에 있었던, 그래서 그때까지 있던 모든 문명과 사람들을 파괴하고 죽게 만들었다는 그 홍수말이다.”

“알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홍수 이야기를 하시는거죠?”

“최 교수가 연구하고 있는 것이 홍수에 대한 거야. 그래서 그 신동이라는 놈들이 들러붙은 모양이고.”

“홍수를 연구하는데 그 애들이 왜 달라붙어요?”

“나도 확실히는 모른다. 그러나 그 애들이 최 교수를 노리는 이유가 최 교수가 하고 있는 연구 때문인 것은 분명해. 그러니까 홍수에 대한 연구 말이야.”

준후는 어이가 없었다.

“전 이해가 되질 않아요. 홍수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왜 그 애들이?”

“나도 몰라. 그러나 사실이야. 그것을 빼고는 애들이 최 교수 를 건드릴 이유가 전혀 없어.”

“흠.”

준후는 생각에 잠겼다. 주기 선생은 상처의 아픔이 느껴지는지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어쨌거나 그 애들이 최 교수를 노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 실이야. 그러니 믿어지지 않더라도 믿는 수밖에 없지.”

“그 애들은 누구죠? 아까 칠 인의 신동이란 말을 했잖아요?”

“하하하. 너도 직접 겪어 보지 않았니? 아이들인데도 무서운 주술 실력을 가지고 있단다. 그리고 최 교수를 암살하려 하고 있 고. 내가 들은 것은 그 아이들이 모두 일곱 명으로 구성되어 있 다는 것밖엔 없어.”

“아저, 아니 상준이 형은 아까 그 여자아이의 이름도 몰랐잖아 요. 그리고 그중에 셋밖에 만난 적이 없다고 했고요. 그런데 그 애들이 모두 일곱 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나에게 부탁한 사람이 그렇게 일러 주었거든! 일곱 명의 아이들이 최 교수를 해치려 한다고 말이야.”

주기 선생의 말을 듣고 준후는 눈을 크게 떴다.

“누가 부탁했는데요?”

주기 선생은 아픈데도 불구하고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어 보 였다. 밖에서는 여전히 승희와 간호원의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부한 사람의 신분은 밝히지 않기로 되어 있다만 어차피 밖 에서 떠드는 저 말괄량이 아가씨가 다 알아낼 테니 숨겨도 소용 없겠지. 청부한 사람은 바이올렛이라는 중국계 백인 여자야.”

“바이올렛이요?”

준후가 눈을 크게 뜨는데 승희가 상기된 얼굴로 커튼을 밀치 며 들어섰다. 주기 선생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 나는 서면으로 부탁을 받았단다. 일곱 명의 무서운 아 이들이 최 교수를 해치려고 하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열흘 동안만 막아달라는 내용이었지.”

“원래 아는 사람이었나요?”

“아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 한 장을 믿고 아저 아니 상준이 형은 그 집을 매일같이 지킨 거예요?”

“편지만 온 것이 아니었다. 우표 한 장이 동봉되어 있었지.” 준후는 점점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표요?”

“그래, 우표, 하하하. 묘한 기분이 들어서 알아보았더니 세계 적으로 희귀품인 우표였단다. 값이 꽤 나가더군.”

준후는 그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주기 선생이 정의감만 가지고 움직였다고 믿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나저나 그런 식으로 거액 을 보내며 청부하는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일단 돈을 받았으니 일은 확실히 해야지. 그러나 사실 나도 맨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단다. 주술력을 지닌 놈들이 왜 하필 고리타분한 학자님을 해치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 그런데 하루이틀 가량 있자니까 정말로 아까 너와 같이 본 금발 머리 여자아 이가 집 안으로 스며들어 가려 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래서 한판 했지.”

“그랬는데도 아무도 몰랐나요?”

“십이지신의 진법 중에는 소리가 뚫지 못하는 결계를 만드는 방법이 있지. 나는 밤만 되면 아예 그 집에 결계를 쳐 놓고서 기 다렸단다.”

“낮에는요?”

“낮에는 결계를 안 쳤지. 그러나 너도 봤다시피 그 애들은 우 리나라 애들과는 차림새가 아주 달라. 그리고 여자아이는 귀신 인형들하고 꼭 같이 다니니 사람들이 많은 낮에는 나도 조금씩 쉬면서 부근만 경계했지. 그 애들은 낮에는 얼씬도 안 하던걸.” 

“그럼 최 교수님 댁에 드나들었던 건 아저씨, 아니 상준 형이 었나요?”

“그래, 도대체 무슨 연구를 하는 것인가 궁금하기도 해서 가끔 들어갔지.”

“아라를 만나서 목걸이 사용법도 가르쳐 주었고요?”

“그 꼬마가 너에게 이야기했니? 허허.”

“목걸이에 이상한 기운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무슨 힘인지 알수가 없어서 끌어내지 못했어요. 그런데 형은 어떻게 한눈에 보고 알아내셨죠?”

“세상에서 네가 모르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거냐? 넌 모르더라도 나는 알 수도 있잖아? 너도 현암처럼 잘난 척하는 습성이 배어 가냐?”

주기 선생이 딱 잘라 말하자 준후는 할 말이 없어졌다. 주기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최 교수의 연구는 아주 마음에 들더구나. 홍수라……………… 그 사람은 우리나라 고대 역사의 원류를 캐기 위해 홍수 연구를 하고 있어. 그래서 나도 꼭 돈 때문만이 아니라 뭔가 좀 의미 있 는 일을 하게 된 것 같아서 기쁘더군. 사실 세 명이나 몰려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 혼자서는 지켜 내지 못 했을 거야. 그리고 이제 다치기까지 했으니. 그렇게 심한 건 아 니지만 힘쓰는 데에는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네가 도와주면 고맙 겠구나.”

“그 애들에 대해 더 아시는 건 없나요?”

“나도 더는 없다.”

“그런데 그 바이올렛이라는 사람은 열흘 동안만 지켜 달라고 편지를 보냈던가요?”

“아니, 그러니까 4월 22일까지만 지켜 달라고 했다. 내가 편지 를 받은 날로부터 열흘이 되더군. 그래서 그렇게 말했던 거다.” 

“그럼 4월 22일 이후는 왜 부탁하지 않은 거죠?”

“정확히는 모르겠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테지. 아마도 내 생각엔 그 사람이 직접 한국에 오려는 게 아닐까 싶다.”

“흠. 최 교수님에게 알려서 안전한 곳으로 가게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이올렛이라는 정체불 명의 여자는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그 여 자가 최 교수 모르게 지켜 달라고 했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 라고 믿는다. 내 짐작이기는 하지만 아마 ……………..”

“뭐죠?”

“바이올렛이라는 여자가 최 교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는 어려울 것 같고, 아마도 그 일곱 아이들은 쫓는 사람이나 집 단의 일원이 아닐까 싶구나. 말하자면 이런 식이지. 바이올렛은 일곱 아이들을 뒤쫓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한국의 최 교수 라는 사람을 해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장 그곳 으로 가지 못할 무슨 사정이 있다거나 해서 4월 22일 전까지는 한국에 오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목적을 달성 하지 못하도록 누군가에게 시켜서 그곳을 지키도록 한 뒤, 자신 이 한국에 와서 그 아이들을 일망타진한다. 뭐 이런 시나리오 아니겠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최 교수님을 무슨 미끼처럼 이용 하다니. 좋은 일 같지는 않아요.”

“아니,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렴. 그 꼬마들이 뭘 안다고 자원해서 그 학자 어르신을 해치려 하겠니? 분명 그 애 들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거야. 그렇지만 누가 그런 사주를 했 는지, 최 교수의 연구 중 무엇이 중요해서 그러는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그러니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뒤에 숨겨진 사실들을 알아내야만 최 교수를 원천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거야. 안 그러 면 그 애들을 잡아 봤자 언젠가 또 다른 자들이 올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니?”

주기 선생의 계산은 상당히 치밀했다. 그리고 주기 선생이 그 정도로 최 교수를 생각하는 건 꼭 돈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준후는 주기 선생의 추리가 어느 정도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기 선생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 았다. 그런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면 본인에게도 알려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더라도 최 교수님께 사실을 알리는 편이……………”

“그 사람이 그런 것을 이해해 줄 것 같니? 또 겁에 질려서 어 디론가 숨어 버리거나 하면 어떡하란 말야? 더구나 본인이 알아 봤자 그런 주술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오히려 모르게 하 고 잘 지키는 편이 더 낫지.”

주기 선생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렇지만 준후는 자신이 위 험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는 최 교수를 떠올리자 고개가 저어졌다.

“그래도 본인의 이해를 구해야 해요.”

“어허, 그런 게 아니란다. 그 집에는 이름이 아라던가? 그런 철없는 여자아이까지 있지 않냐? 최 교수는 자신이 위험에 빠지 는 것은 마다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딸아이까지 위험하다고 느 끼면 절대 그런 일에 동의하지 않을 거야. 염려 마라. 우리가 잘 보호하면 되지 않겠니?”

“그렇지만 그러다가 아라까지 위험해진다면 그건 더…………….”

“그래서 내가 그 여자애한테 목걸이 사용법까지 가르쳐 준 거 다. 아마 급할 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저도 봤어요. 목걸이에서 뭔가 주술력이 나오는 것 같기는 했 지만 그걸로 어떻게 아라가 자신을 지켜요?”

“지키라는 것이 아냐. 그 물건 신통한 것이더구나. 그래서 내 가 살펴보는 척하면서 손을 봐뒀지. 만약 그 집 안에서 뭔가 주 술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면 그 목걸이가 감응하게 돼 있다. 그 러면 그 집 뒷마당에 묻어 둔 내 물건 하나가 나에게 집 안의 사 정을 거울처럼 일러 주게 되어 있단다. 너 조요경 (照鏡)*이란 거들어 본 일 있니?”

그러고 보면 주기 선생도 만반의 준비를 해 두기는 한 것 같았 다. 주기 선생은 통증이 심해지는지 인상을 찌푸리면서 베개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일단 사흘 동안은 기다려 보자. 그래서 그 바이올렛인지 바이올린인지가 무슨 연락을 취해 오거 나 직접 나타나면 그때 상의해 보기로 하고, 아니면 우리끼리 자 구책을 취하도록 하자. 사흘 동안은 일단 기다려 보는 거야. 알 겠니?”

“알았어요. 그런데 상처는 괜찮아요?”

“으음. 너무 말을 많이 했다. 아이고…………. 이만 나 좀 쉬게 해 주겠니?”

주기 선생은 이제 안색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혈은 되었 다 해도 통증이 몹시 심한 모양이었다. 하긴 상처가 깊으니 힘을 주면 내장이 비집고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알았어요. 몸조심하시고 치료에만 신경 쓰세요.”

“내 일을 결국은 너희에게 부탁하게 되었구나.”


* 글자 그대로 요사스러움을 물리치거나 그 존재를 알아내는 거울. 고대로부터 도가에서는 거울이 신비로운 목적, 즉 실제와 허상을 분리하여 보는 데 사용된다 고 믿어 왔다. 조요경이라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비록 소설에서 직접 등장은 하지 않지만 사악하거나 요사스러운 기운이 접근해 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물건으로 설정하였다.


“그럼 이만 갈게요. 이제 간호사도 들어오게 해야겠네요.”

“그래, 그리고 현암한테도 그 집 식구들에게 아무 말 말라고 당부해 주렴. 그리고 신부님께도 안부 전하고.”

“그런데 22일까지 다 나을 수 있겠어요?”

“염려 마라. 병원서 안 내보내 주면 도망을 쳐서라도 그날은 나갈 테니까.”

말을 마치자 주기 선생은 눈을 감았고 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승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준후는 간호사가 자 신을 묘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을 느꼈으나 승희는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응급실 밖으로 나가서야 승희가 말했다.

“난 저 사람 싫어. 도대체 마음에 안 든단 말야.”

“왜요?”

“생각해 봐. 따지고 보면 저 사람이 돈을 받고 청부받은 일 아 니야? 그런데 네가 말려든 걸 기회로 저 인간은 손도 안대고 위 험한 일을 너한테 시키는 셈이 된 거잖아?”

“다쳤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부탁한다는 말이나 있으면 모를까. 말하는 중 에 은근슬쩍 너를 감아 넣었잖아.”

“에이,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다면 모 르는 사람이라도 구해 줘야 하는 건데 하물며 최 교수님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일단 사흘만 더 기다려 봐요.”

그러자 승희도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을 펴면서 준후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최 교수보다는 아라가 더 걱정되는 거 아니니? 호호호.”

“에이, 또 놀리기 시작이에요?”

“호호, 아냐, 아냐. 하긴 그렇기도 하지. 최 교수나 아라도 우 리와 연관이 많고, 일곱 신동이란 애들도 우리와 무관한 건 아니 니까. 일단 신부님께 말씀드리고 상의하자. 원래는 별일 아닌 것 같아서 괜한 걱정하실까 봐 신부님한테는 아무 말 안 하려고 했 는데, 문제가 생각보다 커지는 것 같아.”

“네・・・・・・ . 근데 일곱 신동이란 애들이 우리랑 무관하지 않다 는 건 또 무슨 말이에요?”

“글쎄, 내 짐작이지만 그 애들은 블랙서클의 잔존자들인 것 같아.”

승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으나 준후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블랙서클이라뇨? 블랙서클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잖아요.”

“맞아, 그런데・・・・・・ 너한테도 이야기해 줄게.”

승희는 걸음을 옮기면서 자신이 꿈에 아버지와 정체불명의 아 이를 본 일과 그로 인해 행한 투시의 내용, 즉 그 아이가 서울에 와 있으며, 블랙서클의 수법과 똑같이 마음을 가리고 있어서 해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중얼거리는 내용만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그래서 연희가 위험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던 일 등을 이야기했다. 다만 『해동감결』의 해석 때문에 준후를 걱정한 일과 안드레이의 영을 소환해 보자는 이야기는 준후가 혼자서 무리하게 소환술을 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 승희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어쩐지…….”

“왜? 너도 짚이는 것이 있었니?”

“중국 아이의 무기인 곤선승, 그걸 휘두르는 수법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싶었어요. 지금 다시 돌이켜 보니 코제트가 채찍을 쓰 던 방식과 유사한 것 같네요.”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그중의 하나는 늑대 인간의 모습이었 다지? 그렇다면 그 아이는 카프너의 후예겠구나. 그리고 레그나 슈바르츠라는 애는 좀비 인형을 부린다니 호웅간을 계승한 거라 고 볼 수 있겠고.”

“블랙서클의 잔존자들이 있었다니 놀라워요. 그리고 그것이 아이들이라니, 원참.”

“하지만 그 아이들이 스스로 모든 걸 익혀서 행동하고 있다고 는 믿기 어렵지 않나? 그렇다면 누군가 잔존자가 있다는 말인 데…………. 그가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해.”

“블랙서클의 생존자는 성난큰곰 아저씨 하나뿐이잖아요. 그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꼭 살아서만 일을 저지르라는 법은 없잖아.”

“블랙서클 사람들은 죽고 나서 영까지 악마에게 흡수당했잖아 요. 영이 남아 있었다면 연희 누나와 리 아저씨를 영으로나마 다시 만나게 해 줄 수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 어요.”

“흡수당했는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단다.”

“누군데요?”

“마스터.”

“으윽, 그러고보니 그러네요. 아이구, 만약 그렇다면 큰일인데.”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 마스터라고 별수 있겠니? 차라리 이번에는 마스터도 잡귀일 뿐이니 마음 놓고 주술을 쓸 수 있잖아?”

“그래도 무서운 상대였어요.”

“좀 더 두고 보면서 상의하자꾸나. 우리는 아직 일곱 아이들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 않니? 이름도 레그나라는 아이 한 명밖에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둘은 어느덧 거리로 접어들고 있었다. 현암이 차를 몰고 가 버렸기 때문에 둘은 걸어서 거리까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승희가 뭔가를 알 것 같다는 표정 을 지었다.

“레그나슈바르츠, 이름이 묘한데?”

“네? 어떻게요?”

“슈바르츠(Schwarz)는 독일어로 검다는 뜻이지. 그리고 레그나는 스펠링으로 하면 ‘Legna’가 되겠지?”

“저는 외국어는 잘 몰라요.”

“잘 들어 봐. LEGNA를 거꾸로 하면 ANGEL, 즉 엔젤이 되지. 천사라는 뜻이야. 그런데 슈바르츠라는 성은 영어로는 블랙에 해당해. 그러니 그 애의 이름은 뒤부터 영어식으로 바꿔 읽으면 블랙 엔젤(Black Angel)*이 되는 거야. 범상한 이름이 아닌데.” 

“블랙 엔젤이 뭐죠?”

“나도 잘은 몰라. 그냥 서양에서 믿어지기로는 블랙 엔젤은 악 마중에서도 대단히 높은 서열의, 그러니까 여자 악마들의 대장 격인 악마라고 하지. 천사처럼 날개를 가지고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머리칼이나 날개, 거기다가 옷까지 모든 것 이 검은 사악한 악마란다. 어떤 남성이라도 타락시키는 재주가 있어서 대단히 무서운 존재로 믿어지고 있지.”

“타락이요?”

“넌 몰라도 돼.”

준후와 승희는 다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레그나라는 아 이를 블랙 엔젤 그 자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런 이름을 가 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있어 서 둘은 그것을 타고 퇴마사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 블랙 엔젤은 지옥의 악마 중의 하나이나 통상적으로 대악마들의 지배를 받는 보통 악마보다도 훨씬 지위가 높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악마이며 또 모든 여성 악마들의 두목으로 묘사되어 있다. 블랙 엔젤은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와 날개를 지니고 있어서 천사같이 보이나 온통 검은색이어서 그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 악마는 일반적으로 파괴력보다는 다른 종류의 힘, 그러니까 아무리 마음이 굳고 건실한 남성이라도 매혹시켜 자신의 충실한 수하로 타락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 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박 신부는 집에 도착해 있었다. 늦은 시간이어서 윌리엄스 신 부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고 현암이나 승희, 준후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집 안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돌아다 녔더니 다리 여기저기가 쑤시고 저려서 쉬어 볼까 하는데 팩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박 신부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 서 아픈 다리를 이끌고 팩스기 옆으로 다가갔다.

‘미국 거기서 웬 팩스가 오는 거지?’

전혀 본 적이 없는 주소라 박 신부는 잘못 온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팩스 종이 첫머리에 낯익은 사람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Dear Joon Hoo

‘준후 준후한테 외국인 친구가 있었나?’

박 신부는 준후가 아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다가 안경을 벗어 닦아냈다. 그사이 팩스 수신이 끝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친애하는 준후군에게.

이렇게 불쑥 연락을 취해서 당황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일을 도와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려고 이렇게 연락을 취합 니다. 그러나 준후 군이나 같이 계신 다른 분들과도 관련이 있는 중요한 일이니 힘들더라도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알아보니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더군요. 제가 그 아이 들의 힘을 과소평가했던가 봅니다. 준후 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교수님은 무사하지 못하셨을 거예요. 제가 여러 가지 사실을 알 고 있다고 놀라지는 마세요. 저도 준후 군과 친한 여자분과 비슷 한 재주가 있어서 아는 것이니까요.

제가 한국에 간 다음에 모든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이틀 만 더 교수님을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는 편 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정보다는 조금 빨랐지만 여기도 일이 있어서 당장 달려갈 수는 없군요. 21일 밤에 교수님 댁 부근에서 만나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과 잘 아는 친구 한 분과 같이 갈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른 분들께도 준후 군이 잘 전해 주시 기 바랍니다. 직접 전하는 방법 말고는 안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 용을 적지 못하는 점을 양해해 주십시오.

바이올렛

‘바이올렛? 바이올렛이 누구지? 준후가 무슨 일에 말려든 걸 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박 신부는 팩스 종이를 내려놓고는 다시 한번 안경을 닦았다. 도대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박신 부로서는 한없이 궁금할 뿐이었다.


현암은 주기 선생에게 떠밀려 나다시피 해서 나선 것이라 그 다지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을 했으니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곧바로 최 교수의 집으로 향했고 지금 막 도착한 참이었다. 어차피 최 교수도 모르는 사람이 아닌데다 우연히 그 랬다고는 하지만 준후도 관련이 된 일이고 무엇보다도 위험에 빠져 있다는 사람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암이 골목길에 차를 세워 두고 내 리려는데 좌석 한구석에 승희가 주었던 선물이 아무렇게나 굴러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음’

현암은 차에서 내리려던 자세 그대로 자그마한 선물을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사실 현암은 승희에게 미안하다는 심정뿐이었다. 승희가 전부터 은근히 마음을 주고 있다는 것을 현암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확신하지도 못하 는 감정을 승희에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지금 자신의 입장으로 서는 그런 마음을 결코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 다. 비록 몸을 지닌 것도 아니고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기는 하지 만월향이라는 존재에게 마음을 주었고, 월향이라는 존재와 자 신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함께 목 숨을 걸고 싸워 왔던 많은 일들이 그 계기가 되어 준 것이다. 실 제로 현암이 월향에게 품고 있는 마음이 연애 감정인지는 자신 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현암은 자신이 승희에게 느끼 고 있는 감정도 연애 감정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더 구나 현암에게 승희는 이미 매우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오히 려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포장을 모두 벗기자 작은 상자가 나왔고 상자의 겉에는 편지 한장이 있었다. 상자 속에는 지포 라이터 한 개가 들어 있었고, 편지에는 장난기 어린 필체로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었다.

현암군에게

담배 끊은 것은 알지만 마땅한 선물이 없어서 주는 거야. 그렇 다고 담배 또 피우라고 주는 건 아니야. 불필요한 남자가 되지 말 라는 의미에서 주는 거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해. 생일 축하해!

승희

현암은 편지를 읽은 뒤 라이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망설이 듯 편지도 접어서 윗주머니에 넣은 채 차 밖으로 나갔다. 차문을 닫고 최 교수의 집으로 발을 옮기면서, 현암은 현아의 모습을 기 억 속에서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승희의 얼굴이 현아의 얼굴과 겹쳐 지나가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깜 짝 놀랐다. 어느 사이부터인가 자신이 승희를 여동생처럼 여기 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인 지도 모르겠구나.’

현암은 까닭 없는 한숨을 내쉬고는 최 교수의 집 초인종을 조심 스럽게 눌렀다. 잠시 후에 아라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아, 아라구나. 나 현암이야. 아버님 계시지?”

“아저씨구나. 잠깐만요.”

아라의 구김살 없는 목소리를 들으니 아직은 별일 없는 것이 분명하다 싶어 현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무턱 대고 초인종을 눌러 버렸으니 무슨 용건으로 왔다고 변명을 할 까 하는 고민이 되었다.

최 교수님의 연구가 어떤 것인지 물어보아야겠구나. 어차피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기도 하고, 가능하면 이 집 부근에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으니…………..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닐까 싶어 현암은 조금 머쓱한 기 분으로 집 안에 들어섰다.


“허, 어느새 또 그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승희와 준후의 이야기를 듣고 박 신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 했다. 준후와 승희는 그들 나름대로 박 신부가 받은 팩스의 내용 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박 신부는 블랙서클의 잔존자들이 있 고 그들이 최 교수를 노리고 있다는 것, 잘은 몰라도 그 이유가 최 교수의 연구 내용 때문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랄 수밖 에 없었고 준후는 바이올렛이라는 의문의 여자가 어떻게 한 번 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알고 일을 부탁할 수 있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준후는 바이올렛이 그들의 일을 훤하게 알고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승희에게 물었다. “승희 누나 누나라면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을 기운만으로 알아낼 수 있겠어요?”

“어? 글쎄. 안 될 것 같아. 그건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이 나 어려운 일일 거야. 직접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면 별로 어려 운 일이 아니지. 사진을 본다면 조금 힘들지만 그럭저럭 될 거구. 그렇지만 최소한 이름이나 사는 곳이라도 알아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수십억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떻게 찾는단 말야.”

승희는 준후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다시 설명해 주었다.

“나도 연구해 본 적은 없으니 잘 몰라도 이런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커다란 도서관이 있다고 쳐. 나는 물론 글자를 읽을 줄 알고 말야. 그런데 내가 어떤 내용을 알고 싶을 때, 물론 그 책을 찾기만 하면 아주 쉽게 그 내용을 읽을 수 있겠지. 그런 데 최소한 그 책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겠니? 책 제 목이라거나 저자 이름이라거나…………. 내가 투시하는 건 그런 것 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어.”

“그러면 이 바이올렛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우릴 알 수 있는 걸 까요? 내 생각으로는 보통의 초능력자라면 절대 누나보다 뛰어 날 수가 없어요.”

“칭찬인지 뭔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나도 모르는 일이지 뭐.”

승희가 중얼거리고 있는데 박 신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준후야, 너는 그 신동이라는 아이들 중 세 명과 겨루었다고 했지? 그 애들이 정말 블랙서클과 비슷한 술수들을 쓰더냐?”

“네, 거의 틀림없어요.”

“음…… 승희의 투시도 있고 하니 틀림없을 것 같구나. 그나저나 일이 터지면 한꺼번에 터진다고, 내게도 부탁이 하나 들어 왔는데…………….”

“네? 어떤 거죠?”

“내게 들어온 부탁은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것이란다. 아니, 윌리엄스 신부님도 함께 가시겠지만……………”

“왜요? 다 같이 가면 좋잖아요.”

준후의 말에 박 신부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번 일은 내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부탁한 측 이 가톨릭 교단이란다. 그러니 혼자 가야 한다. 위험한 일은 없 을 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번 일을 잘 조사해 주 면 내 파문을 없던 일로 해 주기로 했단다.”

“어? 와! 그럼 좋은 일이네요. 승낙하셨나요?”

누구보다도 승희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승희도 가톨릭 신자 이기 때문에 파문당한 자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 고 있었고 항상 그런 면을 안타까워하곤 했다. 물론 승희는 그 리 독실한 신자는 아닌지라 영혼관이나 사후 세계 같은 내용들을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교리를 거부한다는 것이 박 신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짐

작할 수 있었다.

“나도 고민을 많이 했단다. 신앙이란 나 자신의 신앙심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물론 신부다운 생각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허허허. 아멘.”

“그런데요? 승낙하셨느냐구요?”

“음, 했다. 그런데 이곳의 일도 큰일이어서 쉽게 마무리가 될 지 모르겠구나.”

“괜찮을 거예요. 준후도 있고 현암 군도 있으니.”

“나도 아직 며칠의 시간 여유는 있다. 우선 그사이에 해결해 보기로 하고, 그때까지도 해결이 안 된다면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하자꾸나. 그건 나에게 맡기렴.”

승희와 준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 도 모든 일에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박 신부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박 신부야말로 모두가 믿고 따르는 지도자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준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신부님. 무슨 일로 가시는지는 물어보면 안 되나요?” 

“허허. 너희들에게야 뭐 말 못할 것이 있겠니? 안 그래도 도움 을 구하려던 참이란다.”

박신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 가톨릭에서의 파문은 중세에는 사형보다도 더한 징벌이었다고 한다. 이는 그 사람의 몸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배제하는 행위이므로 최후의 심판 날에도 파 문을 당한 자들은 재판조차 받아 볼 기회가 없다고 믿어져 왔기 때문이다. 결국 교리대로라면 그런 영혼들의 갈 곳은 지옥의 한 귀퉁이뿐이다. 따라서 중세에는 교황권과 왕권이 충돌하면 교회에서는 가장 강력한 징벌로 파문을 내리는 경우 가 종종 있었다.


“너희들, 에메랄드 태블릿(Emerald Tablet)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 본 일이 있니?”

승희는 고개를 저었고 준후도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다.

“에메랄드 태블릿이 어떤 거지요?”

“에메랄드 태블릿은 고대에 헤르메스트리스메기스투스라고 하는 연금술사가 새겼다는 문서지. 문서라기보다는 일종의 비석 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헤르메스…………… 누구라고요?”

“현자 헤르메스트리스메기스투스.”

“이름이 복잡하군요.”

승희와 준후가 흥미를 보이자 박 신부는 곁에 놓아두었던 책 과 메모 더미에서 책 한 권을 꺼내면서 말했다.

“그래. 이 사람은 고대의 유명한 현자이자 마술사라고 불리는 사람이지. 중세에 연금술이 번창했던 것은 알고 있겠지? 연금술 사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기술의 창시자가 헤르메스트리스메기 스투스라고 믿고 있었단다. 중세에 유행했던 헤아릴 수 없을 만 큼 많은 연금술과 마술에 대한 문헌은 모두 다 이 헤르메스트리 스메기스투스의 것이라고 알려졌지. 물론 대부분이 위작이었겠 지만 말이다.”

“그런데요? 그게 지금 있나요?”

“그래. 에메랄드 태블릿은 실제로 발견되어 그 해독을 위해 사 람들이 대단히 고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 맨 처음 이 비석 이 발견된 것은 전설로 남아 있어. 이 에메랄드 태블릿은 페니키 아 문자로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헤르메스트리스메기스투스가 죽을 때 이 에메랄드 비석을 꼭 쥐고 죽었다고 전해졌지.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헤브라이 지방 근처의 동굴에서 헤르 메스트리스메기스투스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에메랄드 비석을 처음 찾았다는 설이 있단다. 그런데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알렉산 더 대왕이 고대에 알려진 마술사 아폴로니오스의 손안에서 비석 을 찾아냈다고도 하고 또 헤르메스트리스메기스투스가 그 비석 을 모세의 누이인 일리언에게 주었다고도 하지. 아라비아에서는 노아의 방주에 제일 먼저 실은 것이 이 에메랄드 태블릿이라고 전해지고 있어.”

“그런가요? 그렇다면 꽤 유명한 물건이었던 것 같군요.”

“물론 헤르메스 문서라고 일컬어지는 연금술과 마술 문서들은 기원전 2~3세기 전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주로 쓰였을 것 이야. 그리고 그건 당시 번성했던 이단적인 기독교파들의 손으 로 이루어졌으리라 추정되고 있지. 에메랄드 태블릿에 관한 최 초의 언급은 9세기경 아라비아 책에서 나오는데 학자들은 에메 랄드 비석이 이집트에서 제작되지 않고 그리스나 시리아에서 만 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어. 그렇지만 누가 어디에서 만들었는지 정확하게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

승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신부님의 일과 그 에메랄드 태블릿이 무슨 관련이 있지요? 이미 발견된 거라면서요? 비석이 에메랄드로 된 거라면 무지 이쁘겠네.”

“하하하. 그걸 보석으로만 생각하면 문제가 있지. 그리고 내 일은 다른 에메랄드 태블릿을 조사하는 거란다.”

“다른 에메랄드 태블릿이요?”

“그래. 지금 알려진 에메랄드 태블릿의 후작(作)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의 것은 내용이 먼젓번의 것과는 달리 종교적인 색채가 짙고, 문제성 있 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해.”

“네? 문제성 있는 내용요?”

“그래. 가톨릭 신앙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내용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그래서 가톨릭 측에서 조사를 하려는 거야.” “그런데 왜 하필 신부님이 가셔야 하죠?”

“그 돌은 저주받은 것이라더구나. 그래서 이상하게도 보통의 사람들은 접근도 어렵고, 비문의 내용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신비한 일이지.”

“그래서 큰 능력을 지닌 신부님에게 청이 들어온 것이군요.” 

“청이 들어왔다기보다는 윌리엄스 신부님이 천거해 주신 거란다. 무척 힘들었을 텐데 그분께도 감사해야겠지.”

“그렇군요.’

“어쨌거나 이 일이 그다지 위험할 것 같지는 않구나. 태블릿의 내용을 전달해 주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내 생각에는 거기 있는 내용도 별것 아니지 않나 싶어.”

“무슨 말씀이시지요?”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 신앙은 오로지 신앙일 뿐이지, 논리 나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야. 요즘은 예수님의 과거에 대해 서도 말이 많고 마리아께서도 동정녀이니 아니니 하는 논쟁 따 위로 사람들이 싸우는 그런 시대 아니냐. 그러나 사실 그런 내용 들이 신앙 자체에 영향을 준다고는 믿지 않는단다. 오히려 그런 논란보다도 그것이 신앙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더 문제를 끼친다고 볼 수 있지. 이번의 내용도 그런 것이 아닐 까 해. 그러니까 기독교 교리가 고대의 어떤 다른 종교의 내용을 빌렸다거나, 어느 선지자는 신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 라 마술적인 능력으로 신통력을 보인 것이라는 따위의 …………. 아멘”

“그러나 교리를 배척하거나 의심하는 것을 교단에서 좋아할 리는 없잖아요.”

“그렇지만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 않나 싶 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고 인간에게 믿음과 사랑의 마음을 심어 주었기에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거지. 권능이나 기적 때문에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은 아니란다. 그러니 그런 부분을 밝혀낸다고 신앙 자체가 흔들려서도, 또 신앙심에 영향을 받아 서도 안 되겠지. 진화론이 처음 나왔을 때, 얼마나 논쟁이 많았 는지는 승희 너도 대강 알고 있겠지. 그러나 진화론을 믿는 사람 들이 모두 신앙심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 세상에 신앙심 을 가진 자는 거의 없을 거야. 물론 아직도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이다. 신앙심이란 검증이나 이론 때문에 매 도되어서도 안 되고, 그런 검증을 하지 못하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 그게 내가 믿는 바란다. 아멘.”

박 신부는 말을 하는 도중에도 미소를 멈추지 않았지만 말을 멈추고서 더더욱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승희는 고개를 끄덕였 고, 준후는 잘 이해가 안 되는지 멀뚱히 있다가 불쑥 말했다. 

“그런데 그 에메랄드 태블릿의 내용은 밝혀졌나요? 그러니까 이미 발견된 에메랄드 태블릿의 내용 말이에요.”

“그래. 17세기경에 원문이 발견되어 일단은 그 내용이 밝혀져 있지. 그러나 그걸 아직까지 정확하게 해독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래요?”

박신부는 자료집이라고 할 수 있는 메모장을 뒤져서 한 페이지를 준후에게 보여 주었다.

“물론 나도 페니키아 문자를 해독할 능력이 없어서. 영역본을 보고 적어 왔는데 해석이 정확한지 모르겠구나. 여기 대강 적어 놓은 내용이 있단다. 보거라.”

그 메모에는 박 신부가 나름대로 번역한 에메랄드 태블릿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하에 쓴 것은 절대 거짓이 아니며 진정한 진실의 예언이다. 위는 아래와 같고 아래는 위와 같으며 그리하여 하나가 되면 기 적이 이루어지리라.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사람의 생각이 없다면 이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생겨날 수는 없다.

그에게 힘을 준 것은 태양이고 그 모태는 달이다.

바람이 태내를 거치고 대지가 돼지를 키우며 그것은 세상의 모든 놀라운 일들을 낳게 된다.

그리고 그 힘은 다하거나 모자람이 없다.

힘이 땅에 미치면 대지의 기운과 불의 기운을 나누고 또 나누어 미세해진 것을 만물로 나눈다.

그리고 지혜를 가득 품은 채 그 힘을 감추어 승천한다.

힘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면 강한 힘과 약한 힘을 각자의 내면으로 해방하게 되고

그래서 그대들은 천지의 빛과 영광을 얻고 모든 불안과 걱정은 사라진다.

이는 힘 중의 힘이기에 온갖 공허함을 이기고 모든 단단한 것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창조된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조화의 불가사의는 이루어지게 된다.

내 이름은 헤르메스트리스메기스투스이다. 여기에는 우리 천 지간에 있는 세 개의 지혜만을 담았을 뿐이다. 태양의 업에 대해 내가 남겨야 할 것을 여기에 남겨 놓는다.

“이 내용만 가지고 뭘 알아낼 수 있다는 거지요? 제가 보기에 는 오히려 주문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왜 이것을 해석하려고 하 지요?”

박신부는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마술사들이나 중세의 연금술사들 은 모두 다 에메랄드 태블릿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에만 전념했 어. 그러나 아직까지 정확한 해독은 나오지 않았지.”

“이 에메랄드 태블릿이 연금술사들한테 그렇게 많이 읽힌 이유가 뭐지요?”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쓰는 말이 약간 달랐단다. 쓸모없는 금속으로 금을 만드는 힘을 연구하는 것을 연금술이라고 하는데, 연금술사에게 태양은 금을 가리키고 달은 은을 가리키는 말이었 지. ‘검은 유리’는 납이었고, ‘회색 까마귀’는 안티몬, ‘하늘색의 이슬’은 수은이었어. 그것으로 볼 때 이 전반적인 내용은 금속을 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했지. 그런데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하구나.”

“그렇지요. 예를 들면 불경에도 아제아제 바라아제라거나 옴 마니반메훔, 수리수리마수리 같은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건 뜻 을 해석하기보다는 음역으로 보고 일종의 주문이라고 여겨야 하 는 것이죠. 만약에 누가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내용을 해석했다 고 하면 그건 뜻이 없는 말이 되지 않겠어요?”

“그렇기도 하구나.”

“그런데 여기에 쓰인 내용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그래?”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준후가 말을 끊자 이번에는 승희가 나섰다.

“이 에메랄드 태블릿이 페니키아 문자로 씌어 있다고 했죠?” 

“그래. 페니키아의 말로 씌어 있지. 그래서 학자들은 이 비석 이 시리아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나 추측했단다. 페니키아는 시 리아 근처에 있어서 언어도 유사했고 민족도 메소포타미아의 셈족이었지.”

“메소포타미아요? 그러면 바빌로니아와 수메르가 있던 곳이 아닌가요?”

“그래. 페니키아와 시리아는 바빌로니아 신앙의 많은 부분을 모방했단다.”

“그랬군요. 어쨌든 에메랄드 태블릿이 페니키아 글씨로 씌었 다면 그쪽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메소포타미아……………… 오래된 곳이잖아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박 신부와 승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준후가 깊은 생각에 빠 진 듯한 얼굴로 있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내용은 아무래도……………. 음…………. 신부님, 이 메모 저에게 주실 수 있어요?”

“그래. 그러려무나. 그런데 왜 이걸 가지려고 그러지?”

“아뇨. 뭐 좀 생각해 볼 게 있어서 그래요.”

“알았다.”

박 신부가 에메랄드 태블릿의 내용을 적은 쪽지를 주자 준후는 그것을 접어 소매 속에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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