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3권 10화 – 홍수 7 : 바이올렛의 폭로
바이올렛의 폭로
사람들이 최 교수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로 한 것은 첫째로 이 후에 또 있을지 모르는 누군가의 위협에서 최 교수를 보호하려 는 의미였고, 둘째는 최 교수에게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을 알려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현암 과 승희는 최 교수의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우연히 마주친 박신 부와 백호로부터 일단 집 근처에서 사전 모임을 갖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근방은 어제 일어난 폭발 사고의 여파로 아직도 혼란스러웠을 뿐 아니라 인부들이며 주민들이 계속 오가고 있었다. 일단 레그나를 비롯한 신동들이 다시 올 염려는 없을 것 같 아서 조금 떨어진 커피숍의 한 방에 모두가 모이기로 한 것이다. 폭발의 피해가 상당한 것을 보고 현암은 몸으로 막아 내고도 죽 지 않은 성난큰곰의 힘에 혀를 내둘렀다. 모인 사람은 중상을 입 은 성난큰곰과 주기 선생을 제외한 모든 관련자들로 박 신부, 현 암, 준후, 연희, 승희, 백호, 윌리엄스 신부 그리고 바이올렛까지 여덟 명이었다. 박 신부와 준후는 약간의 찰과상으로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인 상태였지만 그다지 크게 다친 곳은 없었고 윌리 엄스 신부나 연희는 멀쩡했다. 모두들 현암이 완쾌된 것을 보고 반가워했다. 현암은 머쓱한 기분이 들어서 말했다.
“별로 잘한 것도 없는데 ………….”
“오우, 무슨 말씀을. 미스터 현암은 두 명이나 되는 신동들을 혼자 쓰러뜨리지 않았습네까?”
윌리엄스 신부의 솔직한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은 조금 쑥스러웠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 신부가 현암이 궁금해할 것을 알고 미리 다친 사람들 의 이야기를 꺼냈다.
“성난큰곰과 주기 선생은 중상이어서 한두 달은 있어야 할 것 같다더군. 주기 선생은 무리하는 바람에 상처가 덧났고, 성난 큰곰은 워낙 큰 폭발에 말려들어서 많이 다쳤지만 생명에는 지 장이 없다고 하는군. 좌우간 먼저 미스 바이올렛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
바이올렛은 특유의 기관총처럼 쏟아 내는 영어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준후는 물론이고 현암도 거의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연희가 바이올렛의 이야기를 통역하여 사람들에게 들려 주고 있었다. 하지만 두서도 없이 빠르게 쏟아 내는 바이올렛의 말을 정리해서 옮기려니 평소와는 달리 애를 먹는 모양이었다. “바이올렛 씨가 이 일에 말려들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답니 다. 바이올렛 씨는 백마녀협회의 회장이고 수정구를 통해 어디 든지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런 능력을 너 무 내보이면 매스컴이다 뭐다 달라붙는 것이 싫어서 능력을 감 추고 일부러 틀리기도 하면서 적당히 점쟁이 노릇을 하고 있었 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도구르라는 남자가 찾 아와서 바이올렛 씨가 수정구 응시를 통해 세계 어느 곳이라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며 네 사람에 대한 것을 투시 해달라고 협박했다는군요.”
“그 네 사람은?”
“한국의 최영민 교수와 중국의 황달지 교수, 티베트의 판첸 라 마라는 라마, 인도의 시타 교수입니다.”
“황달지 교수?”
그 이름이 나오자 준후와 현암은 흠칫했다. 그 사람은 우리나 라의 역사와 관련된 고서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던, 그래서 조만간 최 교수가 방문해 볼 예정이라고 하던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준후와 현암이 말할 틈도 없이 바이올렛은 계속 이야기를 했 다.
“네 사람을 모두 투시했고 거처를 소상히 가르쳐 주었답니다. 모두 각자 자기 나라 말들로 연구를 하는 중이어서 바이올렛 씨 자신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네 사람의 연구 내용까지 모두 알려 주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투시한 모양 그대로를 종이에 비슷하 게 그려서 말이지요. 거의 일주일에 걸쳐서 녹초가 되도록 투시 를 한 끝에 도구르는 만족한 듯, 거액의 돈을 주고 가 버렸다고 합니다.”
“네 사람이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었나요?”
“알아볼 수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네 사람이 연 구하는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그 런데 인도의 시타 교수와 티베트의 라마에게서는 뭔가를 찾은 듯한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다고 해요.”
“인도와 티베트라………………”
티베트라는 말을 듣고 윌리엄스 신부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바이올렛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투시를 해 주고 나서 바이올렛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 다. 처음에만 해도 바이올렛은 그들이 무슨 학문상의 연구 결과 를 훔치려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물론 거액의 보수를 받은데다가. 협박에 가까운 강요를 이기지 못해 한 일이기는 하지만 좋지않은 일에 자신의 능력을 쓴 것 같아서 바이올렛은 거꾸로 도구 르에 대해 투시를 했다. 그러자 깜짝 놀랄 만한 것이 보였던 것 이다.
“바이올렛 씨의 투시는 어떤 장소를 비춰 보는 것이지 마음속 을 읽어 낸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래요. 그래서 시간이 꽤 걸렸다 는군요. 도구르라는 자는 어떤 조직에서 일하는 것 같았는데 그 조직에서 일곱 아이들을 동원해 네 사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하게 없애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백호가 바이올렛에게 직접 물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없애다니요? 그리고 왜 번거롭게 일 곱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시킨 거죠?”
“주술력을 사용하기 위해서죠. 물론 총이나 폭탄을 사용하거 나………… 세상에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많지요. 그러나 그 조직에서는 동일한 연구를 수행하던, 그것도 따로 떨어져 있 던 네 나라의 학자들이 동시에 죽음을 당한다면 그 연구 내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이럴 경우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주술력이지요. 즉 알 수 없는 힘 으로 사람들을 해치우는 겁니다. 감추거나 하지 않고요. 그러면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그것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죽음을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더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아니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한국에서 한 사람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데 가령 온몸이 알 수 없는 불에 시커멓게 타서 죽 은 것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한 사람은 중국에서 한여름에 꽁꽁 얼어서 죽었다고 합시다. 이런 식으로 사건이 일어난다면 과연 어떤 쪽으로 보도와 수사가 집중될까요? 분명 그 사람들의 죽음 자체가 신비한 것이기 때문에 누가 그 사람들을 해친 것으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만 더 신경을 쓰게 되겠지요. 그러고는 얼마간 알 수 없는 수수 께끼나 신비한 일로만 간주되다가 잊혀 버리겠지요. 그들은 그 것을 노리는 겁니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신부나 현암으로서도 그 말에 수 긍할 수 있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그것이 살인 사건으 로 보이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주술력을 이용하여 사람을 해친다면 거기에는 일반적인 사건에서의 추리 적인 요소조차 끼어들 여지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그 사건들은 기껏해야 국내에서의 작은 가십거리 정도, 아니 언론은 그것조 차 무시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당사자들이 모두 죽은 상황에 서 아무도 그들 간의 연관성을 밝혀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지요? 이미 당했습니까?”
분위기가 상당히 고조되자 말이 통하지 않는 현암과 준후만이 연희의 통역을 듣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바이올렛과 직접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우, 노, 아닙니다. 최 교수가 첫 번째 목표였지요.”
“그 이유는요?”
“여러분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들 덕분이지요. 그들은 블랙서클을 와해시켜 버린 한국의 주술사들 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가장 걱정되는 방해자들은 그들이라 고 말이지요. 그들은 한국의 최 교수만 여러분이 모르게 해치울 수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나머지 사람들을 섣불리 해치다 최 교수가 낌새를 채거나 여러 분들이 개입하게 되면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그들은 최 교수 를 첫 번째 목표로 삼고, 만약에 대비하기 위해 일곱 명 중 여섯 명을 한꺼번에 보낸 겁니다. 사실 저도 여러분들의 능력을 보았 을 때 눈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호호호.”
“최 교수와 우리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요?”
“그들도 나름대로 조사를 했겠지요. 자세한 것은 저도 몰라요.”
박 신부는 준후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바이올렛에게로 눈을 돌 렸다. 바이올렛은 쉴 새 없이 계속 이야기를 했는데 심각하고 무 거운 비밀들을 폭로하면서도 수선스럽게 웃으며 온갖 몸짓을 동 원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로서는 보통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저는 여러분에 대해 하나도 몰랐어요. 그 조직에서는 그냥 ‘한국의 그들’이라고 했지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래 서 조사를 했죠. 투시를 통해 한국의 여기저기를 보았어요. 결국 경치 구경만 했지만 말이에요. 오, 정말 멋진 곳이 많더군요. 원 더풀. 호호호.”
“이야기를 계속하시지요.”
“저는 우연히 아는 사람을 통해 한국에서는 공식 기관에서 암 암리에 그러한 주술사들을 이용하여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죠. 그리고 그 책임자가 백호 씨라는 사실도 알 아낼 수 있었어요. 호호호. 그래서 백호 씨를 며칠이나 걸려서 투시해서 한국어로 된 이름 하나를 알아냈지요. 그게 미스터 상 준이었어요. 처음에는 그분이 블랙서클을 쳐부순 분인 줄 알았 어요. 그래서 도구르에게서 받은 돈 중 반을 떼어 우표를 한 장 사고 미스터 상준에게 부쳐 최 교수를 지켜 달라고 한 겁니다.”
백호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 뚱보 아 주머니, 아니 할머니는 수정구를 통해 어느 정부의 어떤 문건이 라도 마음대로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했지요?”
“오우, 저는 최 교수님이 뭘 연구하는지 몰랐어요. 그저 아주 중요한 거라고만 생각했죠. 그리고 그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었죠. 특히 저는 미스터 상준이 그들이 두려워하는, 그러니까 블랙서클을 물리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분이 지켜 준다면 조직도 포기하고 물러가지 않을까 추측했죠. 제 생각이 짧았나 봐요. 호호호.”
“그러고요?”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서 수정구로 응시해 보았지요. 미스터 상준은 정말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그 아이들 역 시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미스터 상준은 그들 중 한 명을 물리쳤 어요. 하지만 저는 그곳에 이미 아이들이 여섯 명이나 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문제가 심각했어요. 미스터 상준의 힘으로 볼 때 한 명은 상대해도 둘은 힘겨울 거고, 셋 이상의 아이들이 동 시에 덤비면 스크램블드에그가 될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제 예상 과는 달리 그들은 미스터 상준이 지키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겁 내지 않고 덤벼들었어요. 미스터 상준은 그들이 겁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제 실수였지요. 오우, 마이 갓. 그래서 저는 급하게 더 조사를 했지요.”
“그래서요?”
“원래 저는 심령학회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쪽으로 혹시 아는 사람이 없을까 해서 국제 전화를 해 댔지요. 결국 저는 영 국심령학회의 월터 보울 씨라는 분을 알아냈어요.”
“아!”
모두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터 보울은 전에 영국에서 켈트족의 유령 소동을 겪으면서 만났던 사람이니 당연히 퇴 마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또 심령학회 일 을 했으니 바이올렛과 연락이 된 것도 당연했다.
“처음에 그분은 아무 말도 안 하려 하시더군요. 그러나 마침내 블랙서클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상세히 들을 수 있었지요. 그중에 유일한 생존자가 아직 있다는 말도요. 그게 성난큰곰이었어요.”
“그렇게 된 거였군요.”
“시간이 없었지요. 저는 너무나 바쁘게 뛰어다녔답니다.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몰라요. 그건 좋기도 하지만.”
‘이게 살이 빠진 거라면.
승희는 속으로 중얼대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자기 얘기에 취해서 계속 떠들기만 했다.
“호호호. 그러다 보니 이쪽 일이 걱정되더군요. 서둘러서 팩스 를 보내고 성난큰곰을 만나서 사정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래서 그 아이들의 정체까지도 다 알게 되었어요. 성난큰곰은 블랙서 클에서 벗어나자마자 그 아이들을 찾으러 다녔다고 해요. 자신 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죠.”
“그랬군요. 그렇다면 저 아이들은?”
“모두 과거의 블랙서클에서 영능력의 소질이 있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주술 교육을 시켜 육성한 아이들이라고 하는군요. 블랙서클이 붕괴된 이후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성난큰곰이 찾아가보니 이미 모두 사라지고 없었더래요. 그 아이들이 조 직의 킬러가 되어 버렸을 줄은 아무도 몰랐어요.”
이번에는 준후가 연희의 통역을 통해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는 아이들이 성난큰곰을 상당히 무서워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아이들이 왜 성난큰곰을 두려워하죠?”
“성난큰곰을 왜 무서워하느냐고요? 당연하지요. 그 아이들은 블랙서클에서 양성했던 아이들이에요. 성난큰곰은 아이들까지 끌어들여 일을 꾸미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고 그래서 아이 들에게도 냉랭하게 대했지요. 아이들이 나중에야 강한 주술사가 되었을지 몰라도 처음에 잡혀 와서는 공포에 떨었을 거고, 또 그 런 환경이니만큼 눈치가 빨랐던 아이들은 자신들을 내키지 않아 하는 성난큰곰을 무서워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느낌이 아직 까지 남아 있어서 성난큰곰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폭탄은….”
“그 폭탄은 필경 최 교수를 없애기 위해 차고 온 것일 거예요. 끔찍하기도 하지. 가미가제 특공대라니! 그런데 성난큰곰을 보 고 무서운 나머지 성난큰곰을 없애기 위해 폭탄을 터뜨린 것이 분명해요. 틀림없어요.”
그러나 바이올렛의 이야기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들을 일반적인 아이들의 수준에 빗대어 볼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그냥 아이들일 뿐이라면 무서워하는 대상을 피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대 상에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는 보다 냉정한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요?”
이번에는 현암이 끼어들었다.
“저도 신부님 의견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이 파견된 이유가 뭐죠? 미스 바이올렛의 말에 의하면 그 아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최 교수를 암살하기 위해 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폭탄을 차고 오다니요. 그건 모순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아요.”
“그렇다면 뭐죠?”
“그 폭탄은 최 교수를 해치려고 가지고 온 것이 아닐 것 같습 니다. 제 생각에는…………….”
모두의 눈이 현암을 향해 쏠렸다. 이번에는 연희가 바이올렛 에게 현암의 말을 통역해 주어야 했다.
“저는 폭발 상황을 조금 전에야 보았습니다. 그 폭발은 그렇게 까지 거대한 규모가 아니었어요. 정말로 최 교수를 없애기 위해 폭탄을 지니고 온 거라면 집 한 채는 날려 버릴 정도의 것을 설 치했을 겁니다.”
백호가 현암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 말에는 현암 씨 의견과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 제가 조사 했는데 조금 석연치 않은 면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용된 폭약것 같군요. 그냥 아이들일 뿐이라면 무서워하는 대상을 피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대 상에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는 보다 냉정한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요?”
이번에는 현암이 끼어들었다.
“저도 신부님 의견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이 파견된 이유가 뭐죠? 미스 바이올렛의 말에 의하면 그 아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최 교수를 암살하기 위해 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폭탄을 차고 오다니요. 그건 모순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아요.”
“그렇다면 뭐죠?”
“그 폭탄은 최 교수를 해치려고 가지고 온 것이 아닐 것 같습 니다. 제 생각에는…………….”
모두의 눈이 현암을 향해 쏠렸다. 이번에는 연희가 바이올렛 에게 현암의 말을 통역해 주어야 했다.
“저는 폭발 상황을 조금 전에야 보았습니다. 그 폭발은 그렇게 까지 거대한 규모가 아니었어요. 정말로 최 교수를 없애기 위해 폭탄을 지니고 온 거라면 집 한 채는 날려 버릴 정도의 것을 설 치했을 겁니다.”
백호가 현암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 말에는 현암 씨 의견과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 제가 조사 했는데 조금 석연치 않은 면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용된 폭약록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살하려는 목적이지요. 그러나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룽페이는 죽지 않고 발견되었다면서요? 그 애 의 몸에도 폭탄이 있었나요?”
백호가 고개를 젓자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한 가지 설명밖에 남지 않는군요. 그 애들은 우리를 죽이려 한 겁니다.”
현암이 단정 짓듯 하는 말을 연희를 통해서 전해 들은 바이올 렛은 조금 불만스러운 듯이 현암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러분이 이 일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다고 했어요.”
“그들이 원치 않는다고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요. 최 교수를 노린 것도, 자폭한 것도 아니라면 그 아이들이 폭탄을 지 니고 있을 이유는 없어요. 그리고 아이들 중 늑대 소년만이 폭탄 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서 직접 몸 으로 부딪치고 할퀴고 하는 것이 주무기였어요.”
“그러니까 접근을 할 때 터뜨리려고 그랬을 거란 말인가?”
“네. 아마 그 아이들도 처음부터 그걸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 았겠지요. 어쩌면 늑대 소년은 자기 몸에 설치된 것이 폭탄이었 다는 것조차도 몰랐는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준후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다리가 뚫리기는 했지만 의식이 있었어요.
만약 그 아이가 그게 폭탄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신음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번에는 백호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폭탄은 분명 그 아이들 중의 하나가 폭발시켰을 겁니 다. 자기편의 몸에 폭탄을 매어 둘 정도의 잔인한 자들이라면 자 기 쪽이 결정적으로 밀리기 시작했을 때 그걸 터뜨렸을 겁니다. 그런데 폭탄은 한 발 늦게 터졌어요. 현암 씨나 승희 씨가 모두 몸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적 여유를 두고 폭발 시간을 맞춰 놓은 거예요. 아이들 중의 하나가 조작한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 이 몸을 피한 다음에 폭발시키기 위해 여유를 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레그나가・・・・・・ . 그 여자아이가 그렇게 지독한…………….”
박신부는 그때서야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네.”
“네? 물론 보통 아이는 아니지요. 주술적 능력을 가지고 또….”
박신부는 승희의 얼버무림을 딱 자르듯 말했다.
“그 정도가 아니야. 뭔가가 있어. 분명히 그 아이는 우리와 싸울 때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았어.”
준후가 그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신부님과 겨룰 때 온 힘을 쓰는 것 같던데……. 그게 진면목이 아니라고요?”
“그 아이의 이름을 뒤집으면 블랙 엔젤이 되지. 그냥 지은 이 름 같지 않아. 그 아이들 중에 레드 나말라스라는 아이가 있었 는데 그 이름은 뒤집으면 살라만더, 즉 불도마뱀이 되네. 그러니 레그나의 이름도 그냥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지 않아. 난 뭔가를 느꼈네. 그 아이가 가진 것은 보통의 주술력이 아니야. 뭐랄까. 아주 어둡고 은밀하고 사악한 종류의 기운・・・・・・ . 그런 힘을 느꼈 다네. 나도 밀리지는 않았지만 그때 성난큰곰이 나타나지 않았 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알 수 없네.”
박 신부의 말을 듣고 모두가 말을 잊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 후박 신부가 바이올렛에게 질문을 했다.
“이제 대략은 알겠군요. 미스 바이올렛. 그런데 아직 세 가지 사실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첫째, 그 의문의 조직이 어떤 것인 지. 둘째, 그 조직이 어떻게 블랙서클의 후예인 그 아이들을 데 리고 있게 되었는지. 셋째, 그 조직이 어째서 최 교수의 연구 내 용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바이올렛은 특유의 웃음과 말투도 거둔 채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조직이 뭔지는 저도 몰라요. 그곳에서 어째서 그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역시도 저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을 만나서 의논하고자 한 것이지요.”
이번에는 백호가 물었다.
“중국의 황달지 교수와 티베트의 판첸 라마, 인도의 시타 교 수. 최 교수를 뺀 나머지 세 사람의 이름이 맞나요?”
바이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가 그들의 거처를 알려 달 라고 하자 바이올렛은 지난번 도구르의 청탁을 받고 투시했을 때 미리 적어 두었던 듯, 수첩을 꺼내어 백호에게 그들의 거처를 적어 주었다. 그러고 나자 현암이 말했다.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황달지 교수에 대한 것이지요. 그 사람은 최 교수님과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고서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던데, 최 교수 님도 중국으로 가 볼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윌리엄스 신부가 말을 꺼냈다.
“팍 신부님, 판첸 라마의 이름은 저도 알고 있습네다.”
박 신부는 윌리엄스 신부가 판첸 라마를 알고 있다고 하자 눈을 크게 떴다.
“오호, 그래요? 어떻게……..”
“비밀이지만 이 자리에서는 말해도 무방하겠지요. 아멘. 우리 가 찾으려는 에메랄드 태블릿의 소장자가 바로 티베트의 판첸 라마입네다.”
윌리엄스 신부의 말에 백호와 바이올렛을 제외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박 신부가 교단의 은밀한 부탁을 받고 에메랄드 태블릿을 조사하러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대강 전해 들어서 모두 알 고 있었지만 그 에메랄드 태블릿의 이야기가 여기서 언급될 줄 은 몰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도구르라는 자가 판첸 라마를 노리 고 있으며 특히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는 말까지도 바이올렛에게 서 들은 뒤라, 모두는 이번 일이 어떻게든 에메랄드 태블릿과 연 관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최 교수님의 연구는 상고 시대의 역 사에 대한 것인데・・・・・・ 그것도 홍수에 대한…………. 그런데 그게 어떻게 에메랄드 태블릿과 연관이 된다는 거죠?”
준후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현암이 말을 꺼냈다.
“또 다른 한사람은 인도의 시타 교수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이름 모를 조직에서는 네 사람의 죽음을 원한다고 했지요, 미스 바이올렛?”
“틀림없어요.”
“그렇다면 그 네 사람은 어떻게든 서로 연관되어 있을 겁니다. 에메랄드 태블릿과 최 교수님의 연구 역시 전혀 관련이 없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요. 우선 시타 교수 에 대해 최 교수님께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최 교수님이 황 달지 교수처럼 시타 교수와도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거나 뭔가 관련 있는 연구를 한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시타 교수도 에메랄드 태블릿과 관련이 있을 테니까요.”
“좋아. 더구나 나머지 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고 하니, 그사 람들에게도 조만간 위험이 닥칠 거야. 이곳에서 폭발 사고까지 일으켜 놓고도 일이 확산되지 않으리라고 믿을 정도로 그 조직 이란 것이 멍청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 세 사람을 어떻게 불러 모으지요? 그냥 말로 한다 면 그 사람들이 믿어 줄 것 같지 않은데요?”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요.”
그때 불쑥 말한 것은 승희였다.
“지난번 레그나를 투시할 때, 저는 앙그라라는 아이들의 대장이 황 교수를 해치려고 중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박신부가 크게 놀라면서 승희에게 말했다.
“저런! 그런데 왜 이제 이야기하니?”
“경황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지금 생각난 거예요.”
“그렇다면 큰일이군. 황달지 교수에게 전화라도 하는 것이 어떨지?”
현암은 반대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믿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조심시켜 봐 야 그 아이들 정도의 주술사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예요. 오히려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일을 서둘러 해결하려고 할 지도 몰라요. 우리가 가서 지켜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간다고? 그럼 세 곳을 다 간다는 말인가? 그럴 만한 시간이 있을까?”
“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번 최 교수님의 건에서도 그 아 이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어요. 황 교수 건에서도 그렇게 서둘 러서 일을 해치우려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짐작이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현암의 말을 듣고 박 신부가 최후로 결단을 내리는 것 같았다.
“흠, 일리가 있네. 서둘러야겠군. 백호 씨.”
“네?”
“좀 도와주셔야겠소. 중국으로 급히 갈 수 있도록 여권이나 수속을 부탁합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이번 역사 연구 건도 이미 제 윗분께 보고 를 드렸습니다. 그분도 동감하시면서, 가능한 한 지원해 주라고 하셨으니 염려 마십시오. 특히 그 알 수 없는 조직이라는 곳에서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다른 면모 가 드러날지도 모르겠군요. 대찬성입니다.”
“모두 다 중국으로 가는 건가요?”
승희의 말에 박 신부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해결안을 내놓았다.
“어차피 세 곳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만나 보고 보호해야 하네. 그러니 천생 우리도 세 팀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 군. 나는 일단 내정되어 있던 것이기도 하니 티베트로 윌리엄스 신부님과 함께 가겠네. 티베트를 가려면 어차피 중국을 경유해 야 하니 말이지. 중국에는 현암 군과 연희 양이 같이 가는 게 어 떤가? 중국은 그 앙그라라는 신동들의 두목격인 아이가 갔다고 하니 현암 군이 가주어야 할 것 같네. 현암 군 혼자서는 말이 잘 통하지 않을 테니 연희 양이 가야 할 것 같고……………. 또 최 교수님 도 중국에 가려던 참이었다면 같이 가게 하는 것이 좋겠네. 비록 아이들은 다 물러갔지만 아직 혼자 있는 건 위험하니까 말이지.”
“그러지요.”
현암과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준후가 말했다.
“그럼 저는 승희 누나와 인도에 가면 되나요?”
“그런 셈이지. 인도는 영어를 많이 사용하니 승희만 있어도 될 거야. 특히 시타 교수는 우리가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니 승희의 투시력이 필요할 것 같아. 미스 바이올렛도 동행해 주시 면 감사하겠습니다. 시타 교수를 찾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달리 어려울 것 같으니까요.”
“오, 좋지요. 언젠간 꼭 한번 인도에 가 보고 싶었어요.”
“좋아요. 인도는 저나 승희 누나와도 관련이 많은 곳이니까요. 불문 성지(聖地)도 있고 또…….”
준후는 무언가 이야기하려는 듯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그다지 탐탁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팀을 나눈 것 이상으로 합리적인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모두 일어나기에 앞 서서 박 신부가 다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최 교수는 내가 만나 보도록 하지. 그리고 백호 씨는 황달지 교수와 판첸 라마, 그리고 특히 시타 교수에 대해 조사를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잊고 있었는데, 룽페이에게서도 뭘 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경과가 안 좋은 것 같지만……………. 아 멘”
그 일에는 승희가 나섰다.
“세크메트의 눈을 사용해 보죠. 제가 해 볼게요.”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였고 최후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이 가고 싶으면 가고, 승희와 함께 가 고 싶으면 그리로 가게. 그리고 시간이 없으니 볼일이 끝나는 대 로 저녁때 우리 집에서 모이기로 하세. 또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 으니까. 이후의 계획은 그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알았지?”
모두들 동의했으므로 박 신부는 윌리엄스 신부와 준후를 데리 고 최 교수의 집으로 향했다. 백호도 자기 갈 곳으로 갔고 현암 과 연희는 승희와 같이 가기로 했다. 모두 일어서는데 바이올렛 이승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오우, 신부님이 점잖으시던데 저렇게 박력 있고 과단성도 있으시네요. 멋져요.”
‘크, 그 나이에 밝히기는…………….
승희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바이올렛에게 한마디 해 주었다.
“미스 바이올렛이 너무너무 멋지다고 말한 사람도 있답니다.”
“오우, 그럴 리가요. 설마, 과장된 이야기겠지요? 호호호.”
주기 선생을 생각하며 놀리느라고 한 이야기였는데 바이올렛 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아 승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꾸 이런 표정을 짓다 보면 느는 건 주름밖에 없다는 걱정을 하 면서………………”
최 교수를 설득하는 일은 예상보다 어렵지 않았다. 지난번 일 본에서 딸이 겪은 이상야릇한 사건 덕분인지 최 교수는 박 신부 가 일러 주는 말을 별다른 반발 없이 받아들였다. 간간이 긴 한 숨이 최 교수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서 자 신도 모르게 그런 위험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쳤다. 위험이 닥친 이상, 그것도 보통의 위험이 아닌 초자연적인 위험이라면 의당 박 신부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다 는 것을 최 교수는 예상외로 선선히 수긍해 준 것이다. 보통 사 람들 같았으면 박 신부를 미친 사람 취급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최 교수는 자신의 외동딸을 일본에서 구해 준 일로 퇴마사 일행 을 전적으로 믿고 있어서 그나마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최 교수 본인조차도 어째서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본인조차도 자신의 연구 내 용 중에 그렇게 다른 사람이 꺼릴 만한 것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 기 때문이다.
“도대체 고대사 연구를 하는 것이 왜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 인지 저로서도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물론 위험이 있다고 해서 하던 연구를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왜 연구를 중단시키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건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최 교수님. 혹시 연구 중에 고대사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내용이 들어 있지는 않 습니까?”
“허허허. 제가 뭘 안다고 다른 분야의 것을 연구하겠습니까? 고대의 홍수에 대한 각 민족들의 공통적인 신화에서 고대사의 연원과 문명의 갈래를 되짚어 추적해 보는 것이 제 연구 내용의 전부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습니다.”
“그 연구는 중국의 황달지 교수와 공동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 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티베트의 판첸 라마라는 분도 아십니까?”
“전혀 모르는 이름입니다. 티베트 쪽은 조사한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도의 시타 교수라는 분은요?”
“음, 시타……. 시타 교수라 역사학이 아니라 자연 과학 쪽을 전공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이름은 들어 보셨나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실례가 된다면 양해하십시오. 제가 생 각하는 사람이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람이 맞는다면 그분은 원래 화학자로 알려져 있던 분입니다. 그런데 신비주의적 경향 을 너무 띠어서 학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난 뒤 일에서 물러나다 시피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같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 릅니다만…………….”
“화학자요?”
박신부가 최 교수의 말을 듣고는 뭔가가 떠오른 듯 인상을 찌 푸렸다.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닌 화학자라……. 그 말을 들었을 때 박 신부에게 즉각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연금 술이었다. 에메랄드 태블릿과 현자의 돌은 연금술에서 빠지지 않는 테마 중의 하나였다.
‘만약 시타 교수가 연금술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에메랄드 태블릿에 흥미를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 신부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아무튼 최 교수는 자신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더더욱 연구를 그만둘 수 없으며, 어떤 일이 있 어도 연구를 완성시켜 보이겠다고 힘 있게 말했다. 최 교수도 퍽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한번 가 보려고 했는데 마침 잘되었군요. 관(官)에 계신 분이 도와주신다니 더더욱 좋구요. 가서 황달지 교수를 만나 야겠습니다. 그런데 ………….”
최 교수의 눈이 잠들어 있는 아라의 방을 향하자 박 신부가 미 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도 같이 가도록 하지요. 며칠 학교를 못 나갈 수도 있겠 지만 혼자 남겨 두는 것은 그다지 좋을 것 같지 않군요.”
“흠, 이번 일이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요?”
“그러면 저도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딸아이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은 저도 원치 않아 요. 담임 선생에게 잘 말해 보죠.”
최 교수는 애써 평안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그의 얼굴에 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박 신부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