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12화 – 홍수 25 : 치우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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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4권 12화 – 홍수 25 : 치우천왕


치우천왕

윌리엄스 신부와 판첸 라마는 서로 다른 연유로 충격을 받았 다. 윌리엄스 신부는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던 대홍수의 실마 리가 풀린 데 대하여,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내용과 배치되지 않 을까 하는 데에서 종교적인 충격을 입었으나 판첸 라마는 또 다 른 이유에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가장 아득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은 연희였다.

“한(韓)민족은 고대에 기마민족이었지요. 머리에 나타난 뿔, 그것은 투구를 상징합니다. 근동의 고대사는 무수히 왜곡되어 자취를 찾기 힘들지만, 한민족은 가장 먼저 기마군을 창설하고 투구와 갑옷을 만들어 한족을 지배했습니다. 특히 치우천왕 은 그 투구와 갑옷 때문에 동두철액(銅頭額), 즉 구리 머리와 쇠 이마에 뿔이 돋은 괴물이라고까지 알려졌습니다만 실제는 다릅니다. 첫 번째의 그림은 치우천왕과 황제가 중원에서 격돌한 탁록의 대전투를 나타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다음 그림은요?”

연희는 기름 냄새가 나는 걸 느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연희는 열을 올리면서 말했다.

“중국 측의 고서에서는 황제가 치우를 크게 이겨 치우를 죽였 다고 나옵니다만, 그건 이상한 일입니다. 치우를 죽이고 나서까 지 황제는 치우가 무서워서 베개를 돋우지 못했다고 했고, 치우 와 싸우고 난 후 급히 왕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하며 지 냈다고 하니까요. 치우에게 패해 왕위에서 밀려난 것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그렇게 꾸며서 기록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치우천왕이 황제와 싸운 뒤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설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로 인해 치우천왕이 다른 나라를 건설하여 그곳의 왕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을 ‘장 당경(설’이라고 하는데, 장당경은 티베트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치우천왕이 직접 장당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치우천왕 의 형제가 간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어쨌든 치우씨 왕족이죠.”

“그럼 두 번째 그림이 그것을 나타내는 것인가요?”

“그렇지요. 세 번째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덮인 높은 산, 이건 짐작입니다만 치우는 홍수가 닥칠 것을 미리 알고 대비 한 것이 분명합니다. 높은 산에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은 풍백운사, 우사의 삼사입니다. 일설에는 치우천왕은 풍씨, 즉 풍 백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조상신 정도로 생각되는군요.”

“흠…….”

“전에도 들으셨겠지만 중국은 치수법을 전수받아 대홍수를 그 럭저럭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은 오행치수법을 익혀 서 그에 대한 피해가 별로 크지 않았고요. 홍수의 그림과 그 후 에 치우천왕이 사람을 묻는 그림은 홍수가 일어난 것과 그에 대 한 뒷수습을 하면서 슬퍼하는 치우천왕의 모습을 나타냈다고 여겨집니다.”

“그럼 그 뒤에 나타나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치수법을 청하러 온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다 음에 보면 치우천왕은 무지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무 지개는 비 온 다음의 상징, 비가 갠 후의 상징이니 홍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사방으로 흩었습니다. 치우천왕이 죽고, 사람들은 그의 뜻을 받 들기 위해 그 지식을 담은 녹비를 만들고, 작은 녹비, 즉 에메랄 드 태블릿을 만들게 하여 사방에 전파한 것입니다. 그 녹비는 아 마도 치수법 외에도 여러 가지의 가르침을 담고 있을 것으로 보 입니다.”

“아아, 저런……. 그런 일이…………….”

윌리엄스 신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판첸 라마가 연희에게 말했다.

“놀라운 사실이군요. 그러나 그 홍수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는 알아내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근자에 천기가 불온합니다. 위험이 닥칠 조짐이 보인다는 말 이지요. 아까부터 자세히 보았습니다만, 연희 씨께서는 여기 오 시기 전부터 홍수에 대한 일을 염두에 두고 계시지는 않았는지요?”

연희는 판첸 라마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판첸 라마가 독심술 같은 것을 했단 말인가?

“그, 그걸 어떻게……………”

“이곳은 라마교 비전의 장소. 미리 묻지 않고 작은 재주를 부 린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연이 닿지 않은 사람을 들일 수 없어서 그리하였던 것뿐이니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연희 씨 는 예정된 분입니다.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지만, 대재난을 막을 수 있는 사람들과의 연분이 있는………..”

연희는 퇴마사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리고 『해동감결』의 내 용도. 네 명의 큰 손님, 그리고…………….

“대재난을 막을 사람들…………. 그렇다면 티베트에도 예언서가 전해지고 있나요?”

“예언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전이 비밀리에 전승 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판첸 라마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구한 사람들은 많고도 많습니다. 큰일 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일을 하는 법입니 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럴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제가 이 비전 의 장소를 보여드린 것도 다 인연이 있어서겠지요.”

“잠깐, 판첸 라마님. 그렇다면 저는 무엇입니까? 저에게 부여 된 운명은요? 제가 지닌 힘은? 역할은 도대체 무엇이죠? 네?” 

연희는 판첸 라마가 슬쩍 비친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판첸 라마는 연희가 집요하게 묻자 간신히 한마디를 해 주었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힘도 능력도 운 명도 없습니다. 단 한 가지, 당신만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신 의 타고난 눈만이 진실의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진실의 사람은 누구죠? 누구를 저만 알아볼 수 있다는 겁니까. 네?”

“미리 알려 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다 아시게 될 테니까요.” 

판첸 라마는 더 이상 연희의 이야기에 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다음과 같은 엉뚱한 말 한마디만을 남겼을 따름이었다.

“최후의 날에 일을 해결하는 것은 네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 같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 말을 끝으로 판첸 라마는 돌부처가 된 듯, 눈을 감고 작은 소리로 염불만을 되풀이하여 읊기 시작했다.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는 이상하게 여겨 몇 번이나 말을 걸어 보았지만 판첸 라마 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 연희는 힐끗 입 구 쪽을 돌아보았다. 입구에는 횃불을 든 라마승 한 명이 서 있 었고, 연희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누구세요!”

그라마승은 놀라지 않고 씩 웃어 보였다. 윌리엄스 신부가 재 빨리 연희를 뒤로 보내며 소리쳤다.

“저 사람은 지금 누군가에게 홀려 있소! 다른 사람의 영이 대신…….”

그 순간, 연희에게는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입으로 내지 않고 울리는 복화술의 목소리.

“잘도 여기까지 왔군. 그러나 이젠 끝이다.”

“마, 마스터!”

“네놈이 라마에게 빙의해서 이곳까지!”

그러나 연희가 소리를 지를 겨를도, 윌리엄스 신부가 외치면 서 뛰어들 겨를도 없이 라마숭이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바닥에 던졌다. 곧이어 언제 뿌렸는지 바닥에 흘러 있던 액체에 불이 붙으면서 불길이 순식간에 무섭게 타올랐다. 아까부터 기름 냄새 가 나는 것에 방심하고 있었던 것을 연희는 후회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마스터의 요란하게 웃어 젖히는 소리가 멀어지 는 것과 함께 방의 좁은 출구가 작렬하는 불길로 가득 차 지옥처 럼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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