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13화 – 홍수 26 : 최후의 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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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4권 13화 – 홍수 26 : 최후의 실마리


최후의 실마리

백호는 움쭉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백호뿐만 아니 라아라를 포함하여 주기 선생까지도 맥라렌과 동행해 차에 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법적인 문제를 늘어놓을 계제가 아니었다. 백호와 동 행했던 다른 요원들도 몇몇 있었지만 맥라렌이 한국 측에도 손 을 써 놓았는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백호의 동행을 먼발치 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맥라렌을 만나기 전에 퇴마사들에게 떠 나라고 당부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맥라렌은 아라를 데리고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아라도 꽤 눈 치가 있는 아이여서 자기가 뭔가 잘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모른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그러나 맥라렌도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라 그런 아라에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퇴마사들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갖은 애를 썼다.

맥라렌의 말로 미루어 볼 때 다른 요원들이 소재지를 알아낸 것도 도구르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 분명했다. 백호와 주기 선생 은 도구르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차에 타면서 주 기 선생이 백호에게 슬쩍 말했다.

“내가 도구르인가 하는 그 자식, 없애 버리고 말 거요. 여태껏 생사람 목숨에 손댄 적은 없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다르지. 두고 봐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테니.”

“잠깐.

백호가 주기 선생을 제지했다.

“나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오. 하지만 그 사람 이야기도 들 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도구르만 없앤다고 일이 끝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을 다 죽일 건가요? 요원들 은 끝없이 파견될 겁니다. 아니 우리를 뒤쫓는 사람들 숫자는 점 점 많아질 겁니다. 일단은 두고 봅시다.”

“아, 거 정말 짜증나는군.”

주기 선생은 탄식 섞인 한숨을 내뱉다가 요원 하나가 빨리 차 에 타라고 손짓하자 사나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백호는 주기 선 생이 사고나 치지 않나 뜨끔해서 서둘러 차에 태우고 자신도 차 에 오르려고 했다. 그런데 요원 중 하나가 백호에게 다른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조금 지나 맥라렌이 아라를 다른 요원에게 인계하고 백호가 타고 있는 차에 동승했다.

“어디로 갈 겁니까?”

“먼저 도구르 경위를 만나 보아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대로 말씀해 주셔야지요.”

“나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하오.”

백호가 잡아떼자 맥라렌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한국에 있는 당신 상관과도 이야기를 끝냈소. 당신, 좀 곤란 해질지도 몰라. 알아듣겠소? 당신은 받은 명령과는 다르게 일을 수행한 것 같던데…………….”

“난 명령을 어긴 적이 없소. 중국 공안국이 그들을 놓쳤고, 나 는 그들에게 협박당해 잠시 협조했던 것뿐이오.”

“그래. 나도 알지. 증거는 없어. 중국의 웨이와도 통화해 보았 는데, 딱 잡아떼더군. 그래서 더 냄새가 난단 말씀이야?”

차는 왔을 때처럼 대열을 이루어 마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 다. 맥라렌은 창밖과 뒤에 따라오는 부하들을 확인한 후 백호에 게 말했다.

“당신, 꽤 경력이 화려하더군. 엘리트야. 나 같은 놈하고는 다 르더군. 나 같은 놈들은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아. 머리로는 못 당하니까 다른 방식을 사용하지. 직감이란거야. 알아?”

백호는 맥라렌의 말을 들으며 입을 다물었다. 맥라렌이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은 도망 못가. 육로로 가면 단번에 잡힐 테고, 비행기로 떠도 별수 없을걸. 위성으로 감시하고 있거든. 에이왁스(AWAX) 도 한 대 떴고 말이야. 어차피 잡히게 될 건데 여러 사람 번거롭 게 하지 말자구. 당신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까. 어때? 신사적으 로 이야기하자구.”

그러나 백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하 는 것이 최선일까만 궁리했다.


퇴마사 일행은 요원의 안내를 받아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 하는 중이었다. 출발 시에는 여러 명의 요원들이 각기 다른 차에 나눠 타고 있었으나 미행을 대비해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각 지로 흩어졌다. 박 신부는 한숨을 쉬었다. 한참을 달려가자 넓은 분지 같은 지형이 나왔는데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현암이 묻자 요원이 말했다.

“호텔을 떠나게 되면 외부로부터의 모든 연락을 끊고 여러분 들을 이곳으로 안내하라는 백호 씨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왜 이런 곳으로 가는 겁니까? 공항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요?”

요원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백호 씨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달려가자 넓은 광야가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광야. 그 복판에서 요원은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일행을 전부 내리게 했다. 박 신부와 현암, 준후와 승희, 최 교수 다섯 명을 제외하고는 그 요원 한 사람뿐이었다.

“그럼 이만. 저는 돌아갑니다.”

“잠깐. 그냥 가면 어떻게 합니까?”

박신부가 요원을 불러 세우자 요원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여러분의 행선지를 알아서는 안 됩니다. 백호 씨의 명 령이니까요. 조금 기다리시면 비행기가 올 것입니다. 우리 측의 비행기는 여러분으로 위장한 요원들을 태우고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에 비행기가 옵니까? 누가 그걸 몰고?”

요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힘없이 피식 웃는 게 그의 버릇인 모양이었다.

“밀수 단체죠. 섭외는 끝났습니다. 세계의 어디로든 말만 하면 데려다 줄 겁니다. 그 사람에게도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마십시 오. 이걸 받으십시오. 그럼 건투를 빕니다.”

요원은 그 말과 함께 박 신부에게 봉투 하나를 내민 뒤 차를 타고 먼지만 남긴 채 사라졌다. 현암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백호 씨군요. 물샐 틈 없이 대비를 해 뒀는데요?” 

“그렇군. 아마 파키스탄까지 가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거야.”

박신부는 중얼거리면서 요원이 주고 간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미국 은행에서 발행한 고액의 수표 두 장과 각자의 가짜 신분증과 여권 등이 편지 한 장과 같이 들어 있었다. 편지에 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찍혀 있었다.

동행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할 수 있 는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동봉한 수표 중 한 장은 비행사에 게 주시고 다른 한 장은 필요한 일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뒤에 남는 이유는 만약 다른 정보국의 추적이 계속되더라도 가능 한 한 여러분께 시간을 벌어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 이 뭐라고 하든 간에, 저는 여러분을 믿고 의지할 것입니다. 비록 힘든 상황에 처해 계시지만, 그 위험한 음모를 틀림없이 분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아도 저는 믿습니다. 힘든 상 황인데도 이렇게 다시 한번 부탁을 드리는 것에 대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워낙 글재주가 없고 시간이 없어서 길게 쓰지 는 못합니다. 꼭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납시다. 그때를 기다리겠습니다.

백호

박 신부는 편지를 읽고는 묵묵히 현암에게 주었다. 현암은 승 희와 최 교수, 준후와 함께 그 편지를 읽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숙연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왠지 마음이 한없이 무거 워지는 느낌이었다. 승희는 수다르사나와 애염명왕과 로파무드 에 대해, 현암은 마스터의 능력과 그가 꾸밀 계책에 대해 생각했 다. 박 신부는 세상에 나타난 블랙엔젤을 위시한 악마들을 떠올 렸고 준후는 홍수와 에메랄드 태블릿, 녹비에 대해 고심했다. 최 교수는 두고 온 아라를 떠올리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승희가 중얼거렸다.

“현암 군 전에 수다르사나를 반드시 되찾아 주겠다고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현암이 딱딱했던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백호의 편 지를 집어 라이터 불로 태웠다. 승희가 생일 선물로 주었던 라이 터였다.

“염려 마.”

현암은 라이터를 손에 꼭 쥐었다. 그러자 승희도 우울한 얼굴 을 펴고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 다 깔깔깔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면서 현암의 어깨를 세게 밀어 쳤 다. 현암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 승희의 모습을 보고 준후 와 최 교수도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보고 박 신부는 속으로 기 도했다.

‘주여, 저들을 도와주소서. 살펴 주소서. 필요하다면 저를 택하시고 저들을 도우소서.’

일행은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다. 현암은 자리에 앉아 정성스럽게 월향검을 닦았다. 월향을 닦는 데 몰두하고 있는 현암의 모 습을 승희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래, 그게 나아. 그래야 현암 군답지. 라이터나 잘 간직해. 난 그거면 된다.’

그때 준후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준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하늘 저만치에서 조그마한 점 하나 가 나타났다. 요원이 말했던 밀수단체의 비행기였다.


연희는 눈을 떴다. 도대체 언제 정신을 잃은 것일까? 여기는 어디일까? 컴컴한 천장과 횃불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 그렇지, 불! 불!

연희는 화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옥같이 타오르던 불 은 더 이상 곁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탈라궁의 어느 계단 같았다. 곁에 윌리엄스 신부가 온통 불에 그을린 채 쓰러져 있었다. 연희는 조심스럽게 윌리엄스 신부가 숨을 쉬는가 확인 해 보았다.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다음에는 자신을 내려다보 았다. 윌리엄스 신부와 마찬가지로 불에 그을려서 엉망진창이었 다. 둘만 여기 내려왔던 게 아니었는데? 판첸 라마는?

연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판첸 라마 역시 불에 그을린 채로 계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연희는 한숨을 내쉬며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그래, 마스터 놈이 라마승 의 몸에 빙의되어 여기까지 따라와선 불을 질렀지. 가솔린을 뿌 리고 지른 불이라 걷잡을 수 없었고 금박으로 장식된 방에 비추 어진 불길은 더더욱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그 연기……………. 연희가 기억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불이 나고 정신을 잃기까지 일 분 도 안 되었을 것이다. 밀폐된 좁은 장소에서 일어난 불이라 어떻 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는데………………

“판첸 라마께서 저희를 구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윌리엄스 신부와 자신은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라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정신을 차린 판첸 라마 가 둘을 구해 내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 분명했다. 연희는 고마 운 생각에 판첸 라마에게 합장을 했으나 판첸 라마는 아무런 대 답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을 받은 연희가 판첸 라마에게 다 가갔다. 판첸 라마는 눈을 감은 채 평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숨을 쉬지 않았다.

연희는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혹시라도 마스터가 다시 내려온다면? 연희는 서둘러서 윌리엄스 신부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윌리엄스 신부는 깨어나지 않았다.

“신부님! 윌리엄스 신부님!”

그때 연희의 귀에 계단 위쪽에서부터 술렁거리는 인기척이 들 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내려오는 소리였다. 한 사람이라면 마스 터일 수도 있겠지만 여러 사람이라면 구조하러 내려오는 사람들 이 분명했다. 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앉은 자세로 숨을 거둔 판첸 라마를 바라보 았다. 판첸 라마의 화상은 자신보다 몇 배는 더 심한 것 같았다. 판첸 라마가 목숨을 던져 자신들을 구해 준 것에 반해 무서움에 떨고만 있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연희는 판첸 라마 앞 에 머리를 숙이고 합장을 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때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를 안내해 주었던 젊은 라마이 연희에게 합장을 하며 말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는 다 운명이 있는 것입니다.” 연희는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한 듯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벌써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던가? 준후의 삼 년간 의 수명, 목숨을 잃은 리, 그리고 판첸 라마…………….”

“나는 나는…………..”

“판첸 라마께서 떠나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가면 돌 아오지 못할 것이라고요. 이런 식으로 입적하실 것으로는 예상 하지 못했습니다만 판첸 라마께서 언질을 주셨습니다.”

라마승들이 윌리엄스 신부를 떠메고 판첸 라마의 시신을 수습 하러 올라가는 중에도 연희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다른 것들까지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사람들의 희생이 이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슬퍼하지 마십시오. 누구나 올 때가 있으면 갈 때도 있는 것 이지요. 불을 지른 자는 지금 정신을 잃고 기절해 있습니다. 뭔 가 사악한 힘에 홀렸던 것 같아요. 앞으로 엄중히 감시하겠습니다.”

연희는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져 나와 눈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올라가는 돌계단 하나하나가 이상하 게 보였다. 일그러지고 무슨 문양을 담고 있는 것처럼, 문양, 그 래, 바로 그 문양.

“잠깐만요.”

연희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연 희의 눈에는 결연한 빛이 어려 있었다.

“아래의 그 방은 어떻게 되었나요? 불은 꺼졌나요?”

“불은 꺼졌지만 온통 타 버린 상태입니다. 금박도 녹아내렸고 비석도 제단도 다 깨어져 버렸어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여기 오는 길은 막히게 될 겁니다.”

“가야 해요.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가야 돼요. 죄송합니다. 저 는 여기에 온 사명이 있어요.”

그랬다. 연희에게는 사명이 있었다. 홍수에 대한 실마리. 지금 박 신부와 현암과 준후와 승희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위험과 맞서고 있다. 연희는 홍수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이 임무였고,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이었다. 그런데 지 금 여기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은 그들을 배신하는 결과가 된다. 다 타 버린 것을 뒤져 보았자 뭐가 더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학 술상으로 증빙할 증거가 남은 것도 아니다. 물론 단서는 잡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실마리는 찾지 못한 것이 아닌가? 자신을 구했 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나 자신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 해서나 여기서 눈물이나 흘리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연희가 발길을 돌리자 다른 라마승들도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 히 서서 연희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 라마승이 물과 식량, 횃불 이 담긴 보따리를 건넸고 연희는 그것을 받았다.

“지금 가시면 며칠 동안 혼자 지내셔야 합니다. 화상이 심하신

연희는 대답하지 않고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는 데에만 신경을 쏟았다. 화상 때문에 온몸의 신경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그래도 걸었다.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백호는 전화를 끊었다. 탕 소리가 나게 내던진 것도 아니었고 힘을 주어 눌러 끊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끊을 수 밖에 없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던 ‘그분’의 목소리가 아직 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일, 알지만 묻지는 않겠네. 이제부터라도 협조하게. 그 수밖에 없네. 아니면 자네와 우리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 들이 끝장일세.”

백호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아니,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 제가 아니었다. 백호는 마라톤을 완주하고 난 선수처럼 몸에 힘 이 없고 정신이 멍했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떠오르 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텔 방이었다. 그들이 있다 간 호텔 방. 맥라렌은 퇴마사들의 행적을 찾아 난리를 피우고 있었고 퇴마사 들을 보내고 돌아왔거나 미행을 뿌리치기 위해 흩어졌던 자신의 부하들은 그들에게 심문당하고 있을 것이었다. 옆에는 유럽 사 람처럼 보이는 금발의 청년 두 명이 백호를 지키고 있었다. 백호 는 아무 생각도 없는 표정으로 그들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좋은 청년들 같았다. 애국심도 있고, 자신의 일에 긍지를 지니고 있겠지. 세상을 구하고, 평온하게 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고,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심문을 받는 내 부하들도 그렇게 믿고 있겠지? 백호는 부하들의 자존심과 긍지를 믿었다. 그러나…………… 대체 무엇이 옳은 일일까?

백호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건너편 방에서 누군가가 고래 고래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울음소리도 낯익은 목소 리들이 있었다. 백호는 문 쪽으로 가며 슬쩍 금발 청년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백호를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따라붙을 뿐이었다. 백호는 소리가 나는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 다. 가까이 다가가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주기 선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문을 열자, 예상대로 주기 선생과 울고 있는 아 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저만치에는 얼굴에 붕대를 감아 거 의 미라처럼 보이는 도구르의 얼굴이 보였다.

“이 망할 자식, 살려 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내 소리 소문 없이 없애 주마. 아니지. 두고두고 고통을 준 다음 피가 말라 죽게 해 주마. 망할 자식.”

주기 선생은 요원들이 잡고 있어서 차마 행동을 취하지는 못 했지만 입으로는 갖은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주기 선생 의 말은 한국말이어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백호는 방으로 들어가서 도구르의 눈치를 살폈다. 평온한 얼 굴의 도구르는 백호를 보고 눈짓을 보낸 다음 사람들을 나가게 했다. 주기 선생이 밖으로 끌려 나가면서 백호에게 외쳤다. 

“언제까지 참아야돼? 지금이라도 밟아 버릴까?”

“기다려 보시오. 내게 맡기고.”

주기 선생은 첫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주기 선생 정도면 여기서 빠져나가는 정도는 문제도 아닐 테지만 구태여 그런 능력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기 선생은 요원들 의 손을 뿌리치곤 영문도 모르고 우는 아라를 품에 안았다.

“울지 마라. 착하지? 울지 마. 아! 짜증나네! 제발 좀 그쳐!”

주기 선생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악을 쓰자 아라는 놀랐는 지 울음을 뚝 그쳤다. 주기 선생은 방 안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훑어보고는 요원들을 어깨로 밀치며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 나갔 다. 문이 닫히자 아라가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백호는 아무 말 없이 도구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도구르도 조용히 백호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예전 같은 악의도 슬 픔도 보이지 않았다. 백호는 의아했다. 정말 도구르가 정보원들 에게 퇴마사들이 있는 곳을 밀고했던 것일까? 도구르는 손을 들 어 백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고 백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의자를 끌어 도구르의 옆에 바싹 앉았다. 도구르가 속삭이듯 말 했다.

“나는 이제 며칠 남지 않았어. 신부님 말이 맞았지.”

백호는 고개를 들어 도구르의 눈을 바라보았다. 도구르가 말 을 이었다.

“난 죽는 걸 무서워했소. 그래서 악행을 한 거요. 내가 그동안 해온 일이 좋지 못했다는 거 잘 알아요. 그래서 많이 고민해 봤 죠. 아주 많이…….”

도구르가 고개를 떨구었다. 백호는 붕대로 칭칭 감은 도구르 의 얼굴을 보며 한 가닥 연민을 느꼈다.

“이제 마음은 편해요. 그렇소. 길고 짧은 게 중요한 건 아니오. 얼마나 편안하게 사는가가 중요한 거지.”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구르가 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보기관에는 내가 알렸소. 잠깐, 나도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요. 들어 주시오.”

백호는 고개를 든 도구르의 눈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결의에 찬 눈빛이었다.

“내가 그만둔다고 끝나진 않아요. 다른 누군가가 계속 쫓을 거 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지. 하지만 그럴 방법이 없어요. 그들이 모두 죽든지 아니면 잡히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방법이 없소.” 

도구르는 창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많이 궁리했소. 난 그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는 모르 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데도 그 일에 매달리고 있지. 물론 내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순 없소. 그러면 내 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 난 신부님에게 많은 걸 빚졌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럼 나는 뭘 해야 할까. 참 많이 고민했죠.” 

도구르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백호를 응시했다.

“그들에게 시간을 줘야 해요. 그들의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난 그걸 깨달았소. 누구나 시간이 가면 죽어요. 모두 죽지. 그러 니 그들에게 시간을 줘야 해요. 일을 끝내도록. 최소한 그게 내 가해 줄 수 있는 전부요.”

도구르는 품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여다보며 미소를 짓더니 백호에게 보여 주었다. 그 사진에는 평범하게 생긴 중년의 통통한 여인과 앞니가 빠진 주근깨투성이의 꼬마가 활짝 웃고있었다.

“못생겼죠? 하하하. 하지만 내게 이보다 소중한 건 없소. 난 그 때문에 영혼까지 팔려고 했지. 그런데 곰곰이 돌이켜 보니, 이렇게 하더라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더란 말이지. 단지 시간, 그래, 시간이었소. 그들에게 뭔가 해 줄 수 있는 시간. 난 그걸 못 내준 거지. 그래서 그걸 얻으려 그리 필사적이었던 것 같소. 그렇지만 이대로라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런 시간을 그 들에게 내줄 수 있을까? 쫓고 쫓기면서 말이오.”

백호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흔하디흔한 세상의 일부. 그러나…….

백호는 따뜻한 눈길로 사진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만큼 소중한 건 없소. 그들도 그걸 위 해 싸우는 거요.”

“그래, 그래서 난 정말 내 잘못을 깨닫게 된 거요. 그냥 안게 아니라 깨달은 거지. 이해가 되요? 그들에게 감사해요. 날 오래 살게 해 준 것도 아니고 도움을 준 것도 아니지만 감사해요. 그 리고 그들에게도 주고 싶소. 그걸 할 수 있는 시간을…………. 단 몇 시간이라도……………. 그런 계획인 거요. 믿어 주겠소?”

백호는 도구르의 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원하는 걸 해 주는 거야. 크건 작건 남에게 베푸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일 때만 가치가 있지.

백호는 도구르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도 구르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확신했다. 백호가 손을 잡자 도구르도 눈물을 글썽이며 백호의 손을 꼭 쥐었다. 도구르가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말했다.

“참 줄 것이 있소.”

도구르가 백호의 손을 놓고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져서 뭔가를 꺼 냈다. 나무로 만들어진 기괴하게 생긴 검은색 두상(頭像)이었다. 

“이건 수호자, 당신들은 마스터라고 하더군요. 그자에게 내가 명령을 받을 때 사용했던 물건이오. 이걸 이용하면 그자에 대한 어떤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주는 거요.”

“이걸로 명령을 받았다고요?”

“그렇소. 이걸 통해 그자는 내게 지시를 내렸소. 중국에서 당 신들이 비행기 속에 숨어 있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이것 덕이었지요.”

“중국에서 사용했습니까?”

순간 백호는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현암은 마스터에겐 투시 능력이 없을 거라고 추리했다. 그런데 도구르가 중국에서 이 두 상을 통해 전달받았다면, 마스터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던 것 일까? 그때는 바이올렛도 앙그라도 같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도구르에게 말했다면 현암의 추리 말 고도 다른 의외의 사실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마스터에게 투시력 이 없다는 것은 이제까지 현암의 추리 중에서도 골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구르가 마스터에게서 지령을 듣고 그들을 추 적한 것이라면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을 잘못 짚은 건 아닐까? 백호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가솔린 불에 타버린 방 안은 숯과 돌 부스러기 말고는 아무것 도 남은 것이 없었다. 목재로 된 벽면에 금박을 칠했던 듯, 불이 나자 홀랑 타버렸던 것이다. 염체로 만들어졌던 에메랄드 태블 릿 역시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연희는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 기 위해 숯 더미를 뒤지는 데 열중했다. 그러나 하루 이상을 뒤 졌음에도 찾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연희는 포기하지 않 았다.

사방을 뒤지다가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연희는 꿈을 꾸었다. 그 림에 있던 커다란 투구를 쓴 남자가 말을 타고 다가오는 모습이 었다. 그가 연희에게 말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으로 벗들을 도우리라.

한순간의 꿈에 불과했지만 일종의 계시 같았다. 치우천왕이 그의 뜻을 알리기 위해 이 방을 만들고 영체를 이용하여 비석의 형을 보존해 두었다면 그런 계시를 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 같았다. 이미 그 이상의 희한한 일들도 수없이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무리 기를 쓰고 찾아도 나타나는 것은 없었다. 치우 천왕의 그림은 수첩에 베껴 놓은 상태여서 다시 살펴볼 수는 있 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에메랄드 태블릿에 적혀 있는 내용을 미리 베껴 놓지 않은 것, 그리고 준후에게서 신지 문자를 배워두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처럼 느껴졌다.

연희는 수다르사나가 대홍수의 봉인이라는 것이나 마스터가 대홍수를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애당초 이 일을 시 작할 때부터 직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에메랄드 태 블릿의 조사에서 치우천왕과 얽힌 홍수 신화가 발견되었다는 사 실은 연희에게 충격을 주었다. 연희는 지금 퇴마사 일행과 연락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본질에 접근해 가고 있었던 것 이다. 하루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고 몸에 입은 화상도 돌보 지 않았다. 다만 뭔가 느껴지는 감을 좇아 미친 듯이 타고 남은 자리를 뒤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남은 것은 불에 그을린 일그러 진벽 조각과 새 모양의 옥 조각 잔해뿐이었다. 그것들을 살펴보 았으나 거기에는 단지 하나의 수평선과 널찍한 상자 같은 것만 그려져 있었다.

마침내 연희는 뒤지는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 렸다.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모르겠어. 여기까지 와서 홍수 이야기를 만나다니. 분명히 뭔 가 있는데 꼭 찾아야만 하는데.’

연희는 더러워진 손으로 눈물을 닦고는 마지막으로 건져 낸 벽화 일부를 보다가 그 자리에 떨어뜨렸다. 화상을 입은 다리가 쑤시고 아리기 시작했고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아, 뜨거워. 얼음이라도 있으면…………”

연희는 떨어뜨린 벽화의 나무 조각을 집어 들었다. 선네개 와 수평선 하나. 그 위로 떠 있는 상자 같은 널찍한 것. 널찍한 것 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위와 화상과 갈증에 지친 연희의 머릿속으로 얼음을 띄운 냉수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그러나 얼음으로 보기에는 그건 너무 평평한 모양을 하고 있었 다. 그리고 훨씬 크고 넓었다.

“큰 빙산같이 생겼네.”

연희는 문득 따가워진 눈을 비볐다. 아까 눈물을 닦을 때 눈 에 검댕이 들어갔는지 몹시 쓰라렸다. 순간 연희의 동작이 딱 멈 췄다.

“빙산!”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빙산!”

연희의 머릿속에 어디선가 읽었던 과학 잡지의 기사가 생각났다.


화석 연료 사용에 따른 이산화탄소 양 증가로 지구 온난화가 이대로 계속된다면 극지의 빙하가 녹고 그러면 지구의 칠십 퍼센 트가 물에 잠기게 된다.

극지에서 핵 실험을 계속한다면 그 열로 인해 빙하가 녹아 지 구에는 대홍수가 밀어닥치게 된다.


대홍수가 밀어닥치게 된다.

대홍수가…………….

홍수, 홍수………….

“맞아! 바로 그거야!”

연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동안 홍수에 대해서는 논 란이 많았다. 지구의 대부분이 잠길 수 있는 홍수는 말이 안 된 다는 것이 과학계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물로 이루어 진 거대한 행성이 지나가다가 지구 인력에 휘말려 물을 빼앗기 면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그 막대한 양의 물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였다. 그 물이 흘 러 들어가 바다가 되었다고 하면 그때까지의 기온은 이후와 달 라야 한다. 바다는 실제로 지구 기온의 대부분을 결정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보다 바다가 작다고 한다면 온도만이 아니라 생명체들의 생존조차 달라질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지구의 대부분이 잠길 정도의 대홍수가 아닌 국지적인 작은 홍수일 것이라고 인 식되어 왔다. 그러나………………

“그래, 빙하가 녹았다고 하면 말이 된다. 그러면 틀림없이 대 홍수가 닥쳐.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극지는 차가우니까 다시 빙하로 얼겠지. 그러면 그 물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 졌는지는 분명해.”

연희는 생각을 이어 나갔다. 또 한 가지의 의문은 아무리 고대 인들이라도 정말 홍수 때문에 모든 것이 파괴되는 괴멸적 타격 을 입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연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과학 지식 을 총동원해 그 점에만 골몰했다.

‘그 빙하는 어떻게 녹였을까? 주술? 그건 말도 안 돼. 태양 화 염의 반사 혜성? 아니, 아니야. 그런 황당한 것들을 빼고서도 가능한 것은 있어. 화산과 용암. 그래, 바로 그거야. 용암의 분 출!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모두 녹으면 해수면은 육십 미터 이상 높아진다지 남극이나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바다가 넘치고 그 물은 전 세계를 휩쓸게 될 거야. 맞아, 막대한 빙하를 녹일 만한 열원은 지구의 용암이 틀림없어! 지각은 용암 위에 떠 있으니 어 떤 이유로든 극지 부분이 갈라져서 용암이 터져 나온다면……………. 연희는 북극은 커다란 얼음덩어리로 바다 위에 떠 있고 남극 은 대륙으로 존재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북극일까, 아니면 남극일까? 그건 아무래도 좋다. 둘 다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얼음덩어리 위에 용암이 튀어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뜨겁게 달아오른 난로 위에 물을 던지면 마구 튀어 오르겠지. 지옥 같을 거야.’

연희는 언젠가 아주 소량이기는 하지만 수중에서 해저 화산의 작용으로 용암이 솟아오르는 것을 찍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물속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용암이 있는 것은 놀라운 광 경이었다. 용암 주위의 물들은 그대로 증발하면서 위로 솟구쳐 올랐다. 수증기, 막대한 수증기 …………….

얼음 위로 용암이 터져 나오면 어떻게 될까? 용암이 빙하가 있 는 극지에서 대량으로 솟는다면 일부는 증발해 거대한 구름을 이룰 것이고 더 많은 양이 사방으로 끓어오르면서 대량의 얼음 을 녹이고 퍼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증발된 막대한 양의 수증기 는 상승하여 엄청난 구름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식어 마 침내는 비를 뿌리게 된다. 공기 중의 증기는 포화 상태지만 용암 으로 인한 열원이 계속 증기를 만들어 내므로 비는 그치지 않는 다. 전 세계에 걸친 사십 일간의 강우………. 하지만 그것뿐일까? 해저 화산이 터지면 파도가 마구 일어날 것이다. 해일! 전 세계 에 대홍수를 일으킬 정도라면 분출되는 용암의 양도 아주 많겠 지. 굉장한 양일 거야. 그때 남극 대륙이 솟아오른다면 어떨까? 아니, 남극 대륙은 아주 오래됐다던데. 아니지. 일부 솟았다가 나중에 다시 솟았을 수도 있군. 그만한 땅이 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온다면 그 파도는?

‘홍수는 비로만 내린 것이 아닐지도 몰라. 그래, 그건 선입관 이야, 해일, 해일이 일어날 거야.’

연희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사고를 진행시켰다. 그렇다면 왜 비라고만 묘사되었을까? 맞아. 극점에서 일어난 엄청난 파도가 곳곳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비는 그렇지 않 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일단 분출을 하여 수증기를 많이 뿜어 올 린 후에 본격적으로 땅이 솟구쳐 올라와서 해일이 일었는지도. 그때까지 내렸던 비만으로도 세계의 곳곳은 물바다가 되었을 것 이 틀림없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피하 기 때문에 멸망까지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 더해져서 바 다에서부터 해일이 밀어닥친다면…………….

‘남극 바다의 깊이가 얼마나 될까? 백 미터? 이백 미터?’ 

그 깊이보다 훨씬 큰 파도가 일 것 같았다. 그러면 얼마나 큰 크기의 해일이 일까? 백 미터? 이백? 오백? 지구 역사상 가장 큰 해일이 사방을 휩쓸어 버렸을 것이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주로 물 주변에 있는 평 평한 곳에 살았다. 낮은 곳이라는 이야기다. 최 교수의 이야기에 따르면 대홍수는 기원전 2000년에서 2300년경에 일어났다. 그 리고 탁록전을 치른 치우천왕이 있었던 시기는 기원전 2700년 경…………. 몇백 년의 터울은 있지만 문자도 없던 고대사에서 그 정도의 오차면 실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만 내렸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둑이나 강물이 넘쳤다고 해도 한도가 있다. 물이 차오르면 높은 곳을 따라 올라가면 그만이다. 수백, 수천 미터 높이의 산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리고 비로 물이 늘어 난다면 그 높이까지 이동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 그런데도 왜 모 든 인간이 멸망했다고 전할 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까?

연희는 한 가지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해일이었다. 내륙 까지 쓸어버릴 수 있는 수백 미터의 파고를 지닌 해일. 비를 피 해 어느 정도 높은 곳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안심하고 물이 빠지 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 순간 그들에게 피할 여지도 주지 않 고 해일이 몰아닥친 것이다. 아래는 물로 덮여 있으니 도망갈 방 법도 없다. 갈 곳은 위쪽뿐. 그러나 길도 없고 비가 억수같이 내 린다. 안간힘을 써 보았자 밀려드는 파도를 본 이후에 험한 산 을 기어 올라가서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파도 가 자신들을 덮쳐드는 순간 아우성을 치며 조금이라도 위로 기 어 올라가려는 뭇사람들의 지옥 같은 절규가 연희의 귀에 들리 는 듯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연희는 알지 못했다. 실제로 들려오 는 듯한 절규 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질 때쯤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연희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대에게 진실을 주노라.

연희는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희는 잘 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라마승이 남겨 두었던 식량 보따리 뒤쪽에서 뭔가 횃불에 반사되어 반짝하고 빛났다. 연희 는 엉금엉금 기어서 그쪽으로 몸을 옮겼다. 화상을 입은 다리가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기었다. 분명 보따리를 내려놓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 었다. 떨리는 손으로 보따리를 치우자 고운 녹색을 반사하고 있 는 것이 보였다. 에메랄드 태블릿이었다.

연희는 자신이 그 위에 보따리를 올려놓아서 그걸 보지 못했 던 것인지, 아니면 방금 자신에게 속삭인 치우천왕, 아니 누군지 모르는 그 존재가 거기에 슬쩍 놓아둔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연희는 에메랄드 태블릿 쪽 으로 손을 뻗었다. 아까처럼 손에 잡히지 않으면 어쩌나 두려웠 다. 그러나 딱딱하고 약간은 차가운 느낌이 손에 전해져 왔다. 

‘치우천왕이?’

연희는 에메랄드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비면에는 신지 문자 로 된 비문이 빽빽이 박혀 있었다. 연희는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올라갈까 하다가 문득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 다. 우선 수첩을 꺼내어 들고 면에 새겨진 신지 문자들을 조심스럽게 베꼈다.

‘그것으로 벗들을 도우리라고 꿈에서 말했지? 그래, 도와야지. 반드시 내가 도울 일이 있을 거야. 반드시.’

비문을 베껴 그리면서 연희는 조금씩 다리 운동을 했다. 꼬박 하루 동안 저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화상을 입은 다리로 는 무리일 테지만 연희는 각오하고 있었다.


“이, 이렇게 낮게 나나요?”

준후가 비행기 멀미를 하면서 간신히 말했다. 그들은 지금 커 다란 덩치의 털보 노인이 모는 자그마한 구식 복엽기의 뒤 칸에 빽빽하게 몰려 앉아 있었다. 털보 노인은 술에 취한 듯 보였고 그들 일행에게 퍽 기분 나쁜 태도를 취했다.

복엽기는 이 비행기에 탄 사람들 중 누구보다도 나이가 많을 정도로 고물이었다. 동체는 거의 나무였고 더군다나 여러 곳이 개조되어 있었다. 일차 대전 때 쓰던 것 같은 복엽기였는데, 뒤 의 기총수 자리를 개조한 자리는 비록 다섯 명이지만 서로 겹쳐 앉으니 들어갈 정도는 되었다. 아마도 짐칸으로 쓰였던 것 같았 다. 프로펠러가 몹시 컸으며 엔진은 새로 개조한 것인지 거의 소 리가 나지 않았고 천으로 이어 붙인 날개는 상당히 길어서 기형 적으로 보였다. 그런 비행기가 산악 지대의 지면에 붙을 정도로 낮게 날고 있는 것이다.

“레이더망을 피하려고 그럴 거야. 저공에 나무와 헝겊 동체면 레이더에 잡히지 않지. 스텔스보다 나을걸?”

군의관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며 박 신부가 설명했다. 꼭 해야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박 신부도 상당 시간 동안 침묵이 흐르 자 꽤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비행기에 오른 다음 최 교수가 그동 안 계산해 온 좌표를 보여 주자 털보 노인은 수표를 받아 챙기고는 아무 말 없이 비행기를 몰았고 여태 한마디 말도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박신부가 영어로 묻자 노인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서툰 영 어로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메이비 포 아우어・・・・・・ 앤드…… 셧업!”

네 시간쯤 남았으니 그만 입 닥치라는 내용이었다. 승희가 조 종사인 털보 노인의 곱지 않은 말투에 눈꼬리를 치켜 올렸지만, 박 신부는 씁쓸히 웃으면서 제지했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승희 가 아니었다.

“저 영감, 우리도 자기 같은 밀수단인 줄 아나 봐요. 신부까지 밀수단에 끼여 있다고 속으로 우릴 욕하고 있어요.”

“됐다. 승희야, 차라리 오해를 하는 게 낫지. 정말 우리가 어쩌 려는지 알면 그것도 문제 아니겠니?”

승희가 잠잠해지자 박 신부는 잠시 계산을 해 보았다. 인도 에서 파키스탄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 네 시간이나 걸린다니.

정말 비행기치고는 느린 비행기였다. 박 신부가 최 교수에게 말했다.

“그곳으로 갈 때 좌표를 조금 바꾸는 것은 잊지 않으셨겠지요?” 

“예. 위치를 정확히 가르쳐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약 십 킬로 미터 정도 남쪽 좌표로 말했습니다. 그 정도면 걸을 수 있을 테니까요.”

“잘하셨습니다.”

네 시간에다가 십 킬로미터쯤 걷는 걸 감안한다면 대략 앞으 로 남은 시간은 여섯 시간 정도. 그사이 윌리엄스 신부나 연희에 게서 연락이 올 수도 있었다. 승희에게 투시를 부탁하면 불가능 하지는 않겠지만 공연히 승희의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굳이 연 락할 것이 있으면 먼저 연락이 올 것이고, 없다면 투시해 봐야 헛일이 아니겠는가 싶어서였다.


퇴마사들과 최 교수 일행이 밀수단의 비행기를 타고 파키스탄 으로 향하고 있을 즈음, 맥라렌을 비롯한 요원들은 도구르의 정 보를 믿고 인도 남동부의 스리랑카로 향했다. 물론 백호와 주기 선생도 동행했고 아라도 함께였다. 그들은 요원들에게 둘러싸인 채동승을 강요당했다.

그들이 탄 비행기는 조금 큰 수송기였는데 보기에는 평범했지 만 안에는 복잡한 장비들이 어지럽게 설치되어 있었다. 장비들은 조종석이 아니라 조종석 뒤, 객실의 가장 앞부분에 설치되어 있었고 첩보 등의 목적으로 쓰이는 게 분명했다.

백호는 비행기에 올라탄 후 굳게 입을 다물었다. 주기 선생도 백호에게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는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삼가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주기 선생은 부상이 심한 편이었지만 참을성이 많은지 오기인 지 지금까지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완전히 기가 죽어 쪼 그리고 앉아 있는 아라는 보기에도 처량할 지경이었으나, 요원 들은 측은하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명령 때문인지 어린아이라 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틈에 도구르는 없었다. 도구르는 맥라렌에게 퇴마사들이 간 방향을 알아냈다고 거짓 정 보를 흘린 직후에 간의 상태가 나빠져서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급히 본국으로 후송되었다. 그의 상태는 살아나기 어려울 만큼 나빠 보였다. 그러나 도구르와 나누었던 말들은 아직도 백호의 뇌리에 맴돌았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백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앞쪽에 앉아 있는 맥 라렌이 자꾸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맥라렌은 도 구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 서인지 묘하게 생긴 장비를 계속해서 들여다보며 조작하는 사람 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했다.

‘도대체 저게 뭔데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백호는 잠깐 호기심의 눈빛을 보였다가 하필이면 그때 뒤를 돌아본 맥라렌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백호는 천천히 시선을 피했지만 맥라렌은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왔다.

“헤이, 코리언 저게 무언지 궁금한가? 알려 줄까?”

맥라렌은 잔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건 에이스와 연결된 송신기야. 에이왁스가 뭔진 알지?” 

고성능 초계기인 걸 모르는 줄 아냐, 이 양키야, 라고 백호는 내뱉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네가 위성 전화기를 구해서 그들에게 준 거 알고 있어. 그렇 게 귀한 물건은 추적하기가 쉬운 편이지. 아, 물론 준 게 아니라 빼앗겼다고 하겠지. 그자들이 그 전화를 쓰는 순간! 위치를 알아 내는 건 시간문제란 말씀이야. 하하하.”

백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신이 퇴마사들에 게 위성 전화기를 준 것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것을 벌써 맥라렌이 알아내다니! 백호의 놀란 얼굴을 보고 맥라렌이 소리 내어 웃었다.

“네 상관도 네 편이더군. 네가 지원을 요청했던 물품 목록을 요청하니까 딴소리를 하던데? 하지만 그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 바로 밑 사람은 술술 잘도 불더라구.”

백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자신이 베푼 호의가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전화를 쓰면 안 되는데……………?’

백호가 알고 있기로 퇴마사들의 최종 목적지는 동굴이었다. 깊숙한 동굴로 들어가면 제아무리 위성 전화라도 전파가 닿지 않는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전화를 걸지 않으면, 가만, 맥라렌이 위성 전화에 대해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면 그도 전화번호를 알 것이 아닌가!

백호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맥라렌이 여전히 빙글거리 면서 통신기에 연결된 수화기를 들었다. 백호는 질끈 눈을 감았 다. 그러나 맥라렌이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비행기 천장 뒤쪽에 서 무엇인가가 퍽 하고 터져 나갔다. 큰 폭발은 아니었지만 모두 들 민첩하게 몸을 엎드렸다. 몸을 일으킨 맥라렌이 주변을 살피 며 수화기를 끌어당겼으나 수화기의 선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어, 이건!”

눈을 뜬 백호는 맥라렌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쾌재를 올렸다. 저만치에서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주기 선생이 뭔가 술수를 부려서 수화기의 선을 절단 낸 듯했다. 다른 사람과 다르 게 주기 선생의 표정이 태연하자 맥라렌은 그쪽을 바라보며 거 칠게 욕을 했다.

“갓뎀! 네가…………..”

“이 자식이 내가 뭘 어쨌다고 째려봐!”

주기 선생도 맥라렌이 눈을 부라리자 맞받아칠 것처럼 자리에 서 벌떡 일어서려다가 상처가 아픈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도로 주저앉았다. 백호가 앞을 막아섰다.

“왜 그러는 겁니까?”

“저 자식이 뭔가 수작 부렸지. 응?”

“당신도 바로 옆에 있어서 빤히 보고 있었는데 저 사람이 무슨 수작을 부렸다고 하는 겁니까? 네?”

맥라렌은 할 말이 없는지 수화기를 집어 던지면서 거칠게 외쳤다.

“제길! 뒤쪽으로 끌고 가서 잘 감시해!”

어찌 보면 이것은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뒤쪽으로 간 다면 맥라렌이 없을 테니 눈치를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주기 선생과 아라와 함께 뒤쪽으로 가던 백호 는 수신기가 망가지지 않았다는 기술자의 말을 듣고는 안타까 움에 정신이 아득했다. 주기 선생이 수화기 줄이 아니라 아예 저 통신기를 부숴 버렸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이젠 어 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더 급했으 니까. 퇴마사들이 전화기를 쓰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등에 짊어졌던 위성 전화기에 신호음이 울렸다. 현암은 위성전화기를 내려놓고 박 신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굴까요?”

“글쎄. 일단 받아 보도록 하지.”

수화기를 들자 지직 하는 심한 잡음과 함께 영어를 쓰는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헬로? 헬로?”

“누구죠?”

“윌리엄스 신부의 메시지입니다! 저는 부탁을 받은 포탈라궁의 라마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이런 전화가………………”

전화가 지지직거리자 라마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현암은 전 화기를 박 신부에게 넘겨주었다. 영어를 잘하는 박 신부가 통화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윌리엄스 신부님의 메시지라구요? 말씀하세요.”

라마승은 잡음 때문에 애태우면서 간단하게 그간의 경과를 알 렸다. 라마승은 윌리엄스 신부가 적어 준 쪽지를 그대로 읽어 내 려가는 것이라 내용도 떠듬떠듬했고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러 나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가 신지 문자로 된 에메랄드 태블릿을 발견한 일, 벽화에서 홍수의 근원 전설을 발견한 일, 마스터가 불을 질러 모든 것이 파괴되고 연희가 단서를 잡겠다고 아래로 내려간 일,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에게 전화를 부탁한 윌리엄스 신부도 연희를 찾아 지하로 내려간 지 꽤 되었다는 것. 또한 자신은 전화가 있는 곳까지 내려오느라 시간이 걸렸다는 것 등 등의 내용은 대강 전달되었다. 박 신부는 놀랐다.

“마스터가 에메랄드 태블릿의 내용을 감추려 했다구요?” 

“저는 사정이 어찌 된 것인지 잘 모릅니다. 알릴 말씀이 있으 면 알려 주세요. 전달할 방법이 있습니다.”

박 신부는 포탈라궁의 지하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서는 알 지 못했으므로 할 수 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능하다면 연희 씨가 즉시 올라와 그 내용을 전달해 주었으 면 한다고 전해 주세요. 신지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준후뿐 이니까. 연희 씨가 어떻게든 전달해 줄 수 있겠지요.”

“알겠습니다.”

“우리도 몇 시간 후면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서둘러 주기 바란다고 전해 주세요.”

“네.”

라마승이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리자 박 신부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머릿속이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한 시간 정도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잡았다!”

맥라렌은 수신기 이어폰을 내려놓으며 환호성을 올렸다. 주기 선생의 기지로 송신기가 망가져서 다른 요원을 통해 위성 전화 를 걸게 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는데 고맙게도 다른 자가 전화를 걸어 준 것이다. 맥라렌은 다른 소형 무전기를 통해 요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그자들은 파키스탄 북방을 향해 날고 있다. 표적지가 이 동하는 것으로 보아 느린 비행기를 타고 있는 것 같다. 동원할 수 있는 전 요원을 즉시 파키스탄 쪽으로 집결시켜라. 에이왁스 의 탐지 기능을 극대로 돌려 최종 수신점을 확인하라! 우리도 곧 간다! 오버!”

맥라렌은 무전기를 내려놓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들은 독 안에 든 쥐다. 제법 머리를 써서 도망치려 했지만 소 용없는 수작이다. 도구르는 속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속일 수는 없다는 자부심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한편 비행기 뒤 칸에서는 맥라렌의 목소리를 간신히 엿들은 백호의 얼굴이 납빛같이 창백해졌다.


연희는 끝없이 긴 계단을 비틀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다리 가 아프고 기운이 없었지만 그래도 걸어야 했다. 연희의 한 손 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수첩이 꼭 쥐어져 있 었다. 수첩에는 신지 문자로 쓰인 에메랄드 태블릿의 원본 내용이 모두 적혀 있었다. 잠시 쉬면서 연희는 아까 일어났던 이상 한 일을 생각했다. 비문을 남김없이 적고 나자 에메랄드 태블릿 은 손안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연희는 그 내용을 후대에 전 하기를 바라는 치우천왕이나 다른 선조의 힘이었을 것이라 믿으 며 애써 놀라움을 가라앉혔다. 그러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방을 뒤로 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연희는 이 비문의 내용 안에 홍수의 단서와 이번 사건의 결정적인 실마리가 들어 있다고 확 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마스터가 이곳까지 나타나 증거를 없애 려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 밑에서 몇 시간을 지냈는지, 그리고 몇 시간 동안 올라온 것인지, 화재 때문에 시계까지 망가져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 이 없었다. 게다가 지칠 대로 지쳤고, 다리의 화상도 심했다. 끝 없이 이어지는 계단 하나하나가 흔들려 보였지만 계속 걸었다. 무섭지는 않았다.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 다. 아래로 내려갈 때는 무수히 많은 샛길이 있었지만 위로 올라 갈 때는 줄곧 합쳐졌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여기서 얻은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다. 마스터가 숨기려 고 한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알려 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런 생각마저도 사라지고 머릿속이 몽롱해지더니 몇 걸음 옮기지 도 못한 채 쓰러져 버렸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다시 몇 개 의 계단을 힘겹게 기어올랐지만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연희는 차가운 것이 얼굴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주변에서 수런거리는 소 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깜박이는 불빛도……………. 연희의 눈에 윌리 엄스 신부의 얼굴이 조금씩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연희 양?”

윌리엄스 신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희의 얼굴에 물을 축 여주자 굳어 버린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연희가 입술을 달싹 거리는 것을 본 윌리엄스 신부가 귀를 가까이 대었다.

“어서, 어서 이걸 얼른……..”

“무엇을 말입니까? 누구에게요?”

“이걸, 이 내용…… 준후에게 전해야………….”

연희는 힘겹게 수첩을 들어 올렸다. 윌리엄스 신부는 드디어 연희가 뭔가를 알아냈구나 싶어 수첩을 펴 보았다. 그러나 수첩 에는 윌리엄스 신부로서는 도저히 알지 못할 부호들만 가득 씌 어 있었다.

“이게, 이게 뭡니까?”

“태블릿, 에메랄드 태블릿의 ……………..”

“오 마이 갓! 저는 이걸 어떻게 읽는지도 모릅니다. 이걸 어떻게 전하지요? 내용만 말해 주세요!”

“저도 몰라요. 준후, 준후만이 읽을 수 있는…………….”

“아! 이런!”

윌리엄스 신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 하루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함께 내려온 라마승들에게 들것이라도 만들어 달라 고 해서 같이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라마이 스르르 눈을 감더니 윌리엄스 신부에게 말했다.

“부탁하신 대로 전화를 해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윌리엄스 신부는 깜짝 놀랐다. 다른 라마승에게 부탁했는데 이 라마승이 대답을 하다니. 그렇다면 이들 간에 텔레파시가 이 루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면 판첸 라마가 자신의 죽음 이 닥칠 것을 알고 라마들을 오게 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마스터는 아까처럼 라마 중의 하나에 빙의되었을 때 투시력을 얻게 된 것이 아닐까?

“그쪽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욘희 씨. 맞습니까? 욘희 씨 가 가급적 빨리 와서 통화하기를 바란다고요. 몇 시간 후면 통화 가 안 될 것 같답니다.”

“네? 몇 시간?”

윌리엄스 신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간이라니? 몇 시간 사이에 어떻게 연희를 위로 옮긴단 말인가? 저쪽에서는 이 곳이 얼마나 지하 깊숙한 곳인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 게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하 기 싫은 일이었지만 이럴 때만은 어쩔 수 없었다.

“연희 씨를 제 등에 올려 주십시오.”

“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한참 지난 다음에 올라와 주세요. 저 혼자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 예……………. 절대 보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 까? 저희가 도와 드리는 편이………….”

“아닙니다. 저에게 맡겨 주세요. 다만 절대 보지 마세요!”

라마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윌리엄스 신부가 바라는 대로 연 희를 윌리엄스 신부의 등에 올려 주었다. 자신보다도 훨씬 키가 큰 연희를 업은 윌리엄스 신부는 휘청거리면서 계단을 올라 한 굽이를 돌았다. 윌리엄스 신부는 기도했다.

‘주여, 용서하소서. 또다시 죄를 짓습니다.

기도를 마친 윌리엄스 신부의 눈이 붉어지면서 몸 주변에 차 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몸 안에 있는 흡혈귀의 힘을 이끌어 낸 것이다. 흡혈귀의 힘을 사용한다면 사람이 하루 걸리는 계단이 라도 훨씬 빨리 올라갈 수 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이빨이 비죽이 나온 험상궂은 얼굴로 변한 윌리엄스 신부는 연희를 소 중히 업은 채 번개같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위치가 파악당했다는 걸 모르는 퇴마사들은 파키스 탄 북부의 강가에 비행기를 내리고 있었다. 내리면서 보니 비행기 밑 부분은 방수 처리가 되어 있었고 날개 끝에는 부유물이 붙어 있어서 벌판만이 아니라 물 위에서도 타고 내릴 수 있었다. 비행기를 조종했던 밀수 단체의 늙은 노인은 군말 없이 그들을 내려 주고 잔잔한 수면 위를 멋진 솜씨로 이륙해 순식간에 사라 져 버렸다.

비행기에 실려 있던 고무보트를 이용해서 건너편 강가에 도착 한 퇴마사 일행은 최 교수가 방향을 탐색하는 동안 이야기를 나 누었다. 준후가 신지 문자로 된 에메랄드 태블릿의 비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한 가지를 제안했다.

“지금 연희 누나는 세크메트의 눈이 없어요. 승희 누나가 연희 누나의 마음속을 짚어 주는 것은 어떨까요? 승희 누나가 세크메 트의 눈 한쪽, 제가 다른 한쪽을 들면 연희 누나가 보았던 비문 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것도 좋지. 그런데 내가 연희 언니 마음을 읽으려면 시간이 걸려. 지체하게 되는데, 괜찮을까?”

현암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쫓기는 몸이라는 걸 잊지 말라구. 우선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고, 동굴을 찾을 때까지 연락이 오지 않으면 그때 가서 투 시를 해 봐도 늦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우물거리다가 누구한테 라도 발각되면 곤란하지 않겠어?”

준후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급했지만 현암의 말에도 일리가있는 듯했다. 현암이 승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보다는 이 근방에 수상쩍은 요원들이나 마스터의 부하들이 있는지가 더 중요해. 그런 것이 있나 살펴 줄 수 있겠니?”

승희가 일부러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현암군이 말하는데 해야지. 안 하면 맞으려구?”

현암이 기가 막혀 뭐라 한마디 하려는데 마침 최 교수가 방향 을 파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마스터의 근 거지에 도달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떨렸다.

승희는 주변을 탐지하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주위를 경 계하면서 숲을 헤치고 걷기 시작했다. 현암이 박 신부에게 말을 건넸다.

“이 일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하죠?”

“우선 이 일이나 제대로 마칠 수 있기를 비세나.”

“우리는 그렇다 해도 최 교수는요? 그 안까지 같이 가면 위험할 텐데요?’

그러자 박 신부가 겸연쩍게 웃었다.

“내게 방법이 있네.”


“어떻게 됐나?”

맥라렌은 초조한 듯 부하에게 소리쳤다. 위성 전화를 추적하 여 작은 비행기의 자취를 발견했는데 어쩐 일인지 비행기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맥라렌은 그들이 탐지당하고 있다 는 것을 모른다고 단정 지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거기서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앞은 산과 숲이 우거진 지대라 항공 정찰이나 에이스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숲 어디에 있는지 지금으로 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제길, 차라리 요격해서 떨어뜨려 버릴걸!”

아무리 일급 요원이라도 남의 나라 국경 안으로 전투기를 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맥라렌은 그렇게라 도하는 게 나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알겠나? 전원 집결해. 그리고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도 요청 하구. 숲 전체를 완전히 포위해 버려. 숲이라고 해도 도망치지는 못한다! 가만! 너무 근접하지는 마! 그중 한 명은 그런 것을 알 아내는 능력도 있으니 외곽에서부터 서서히 조여들어. 그리고 내 지시를 기다려라! 이상!”

한편 뒤 칸에선 주기 선생이 슬며시 몸을 일으켜 백호의 뒷덜 미를 툭 쳤다. 백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주기 선생 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너무 걱정 말라구. 방법이 있으니까.”

“무슨 소리요?”

“잊고 있는 모양인데, 승희는 무시무시한 투시력을 가지고 있 어. 우리가 지금의 상황을 마음속에 떠올리기만 한다면 승희가 분명 읽어 낼 거야. 그러면 그들도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하겠지. 그렇게 질려서 떨지 말라구.”

그 말을 듣자 백호도 희망이 생겼다. 승희가 백호나 주기 선생 의 마음을 읽어 주기만 한다면! 백호와 주기 선생은 더 이상 이 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지금의 상황 을 되뇌면서 승희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 것이 최선이었다. 어른 둘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아라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보고 싶 었다. 그리고 준후 오빠나 다른 사람들도 보고 싶었고, 이 지긋 지긋한 비행기 안에서 나가고 싶었다. 아라는 주기 선생에게서 받은 목걸이를 자그마한 손으로 꼭 쥐고 쓰다듬었다.


“거의 다 왔나요?”

“조금만 더 가면 될 겁니다.”

잔뜩 긴장하고서 걸은 지 한 시간이 넘었다. 그때까지 승희는 마음속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승희로서 도 먼 외곽으로부터 군부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숲을 완전 히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 수 없었다. 주변을 살피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어서 백호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현암은 마스터가 또다시 어떤 흉계를 꾸밀지 몰라 불안 했고 박 신부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신동들도 대부분 죽었지만 아직 레드와 구구루는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렇게 잠잠하다니.

“저기일 겁니다. 이제 다 왔어요.”

최 교수가 밝게 소리쳤다. 최 교수가 가리키는 쪽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험한 산비탈이 있었고, 그 한구석에는 금방이라도 허 물어질 듯한 작은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현암이 깊이 한숨 을 내쉬었다.

“다 왔군요.”

그때 정적을 깨뜨리고 현암이 등에 지고 있던 위성 전화기가 울렸다. 별로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자연음과 다른 소리에 숲속 의 새들이 놀라 한꺼번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현암은 수화기를 들었다.

“잡혔다! 좌표 223-49-74! 포위망은 그대로 두고 그쪽으로 정예 요원들을 집결시켜!”

희색만면한 맥라렌의 말소리를 듣고 백호와 주기 선생의 얼굴 이 하얗게 질렸다.


연희는 헐떡이면서 준후를 바꿔 달라고 말했다. 연희의 옆에 는 빈혈 상태로 탈진한 윌리엄스 신부가 쓰러져 있었고 그들의 주변에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티베트인들이 몰려 있었다. 이십여 시간 걸리는 계단을 단 두어 시간 만에 올라온 윌리엄스 신부 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최후의 힘을 짜내 티베트에서는 드문 도구인 전화가 있는 곳까지 연희를 업고 달려온 것이다. 윌리엄 스 신부는 전화가 있는 곳으로 도착한 순간 탈진해 쓰러졌지만 다행히 연희는 윌리엄스 신부의 등에 업힌 동안 어느 정도 정신 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연희 누나!”

준후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자 연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준후야, 비문의 내용이야 들어 봐. 네가 전에 내게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 그대로 그대로 읽을 테니 ………………”

연희는 힘을 다해 고어(古)의 발음으로 수첩에 쓴 신지 문자 의 내용을 준후에게 읽어 주었다. 그러나 내용이 워낙 많고 잡음 이 심했다. 금방이라도 전화가 끊어질 것 같았다. 준후는 연희를 중단시키고 승희를 불렀다.

“승희 누나! 세크메트의 눈! 연희 누나의 마음을 읽어 줘요!”

“알았어!”

승희는 즉각 세크메트의 눈을 준후에게 주고 그 자리에서 정 신을 집중해 연희의 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연희도 수첩을 들여 다보면서 비문들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사이 전화는 이미 끊어 졌지만 연희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비문을 마지막까지 떠올린 다음 연희는 모두에게 안부를 전했다. 그러고는 긴장이 풀렸는지 윌리엄스 신부 옆에 쓰러졌다. 포탈라궁에서 그들을 따라 달려온 라마들이 그제야 도달하여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 를 들것에 실어 옮겼다.


연희가 의식을 잃자 승희는 투시를 멈추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준후를 바라보았다. 최 교수와 현암, 박 신부도 긴장한 얼굴로 준후를 보고 있었다. 준후는 눈을 감고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든 채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다 알았어요. 이제야 다……………. 연희 누나가 정말 잘해줬어요.”

준후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도 캐묻지 않았다. 다만 준후 가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홍수, 그건 땅의 힘으로 생기는 거예요. 애염명왕의 말도, 바바지의 말도 맞았어요. 남극과 북극에 있는 용암의 지맥을 잡 아 놓은 것이 무지갯빛 보석 수다르사나예요.”

“남극과 북극! 그렇다면 빙하가 녹아서 대홍수가 생긴 거란 말이니?”

“연희 누나는 과거의 홍수도 그것 때문에 생겼다고 믿었어요. 그러나 그건 몰라요. 누구도 알지 못해요.”


“내려.”

백호는 고개를 들었다. 수송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비행장에 착륙한 뒤였다. 맥라렌과 요원들이 총을 겨눈 채 백호와 주기 선생, 그리고 아라에게 손짓을 했다.

“헬기로 현장까지 가야 한다. 어서 내려.”

“왜 우리를 데리고 가려는 거지?”

백호가 증오를 담은 목소리로 말하자 맥라렌이 웃었다.

“너희가 죽음을 확인해야 해. 헤이, 너무 인상 쓰지 마. 서툰 짓만 안 하면 너희를 어쩔 생각은 없어. 깨끗하게 끝내자구. 증거없이.”

“난 가지 않겠어!”

주기 선생이 벌떡 일어났지만 맥라렌의 부하들이 총구를 겨누 자 별수 없이 조용해졌다. 맥라렌이 말했다.

“아이까지 데려갈 생각은 없어. 아이는 한국으로 우리가 돌려 보내 주지. 단 너희는 가야 해.”

총을 들이대는 앞에서는 별 방법이 없었다. 아라는 마구 울어 댔지만 한 요원의 허리춤에 끼인 채 다른 비행기로 향하게 되었 고, 백호와 주기 선생은 맥라렌과 함께 헬기에 동승했다. 이번에 도 백호와 주기 선생은 다른 요원들의 감시하에 뒷자리에 처박 혔다. 헬기가 뜰 때 창문으로 언뜻 보니 적어도 다섯 대 이상의 헬기가 동시에 뜨고 있었다. 터무니없게도 완전 무장을 한 공격 용 헬기까지 한 대 있었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엄청난 공력이나 주술이라도 이길 수 없었다.

“이젠 끝인가 보군.”

백호가 중얼거리자 주기 선생이 힐끗 차가운 눈길을 보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진작 저 양돼지를 없애 버렸으면 이렇게 까지는 안 되었을 텐데.”

쏘아붙이듯 말하고 주기 선생이 중얼거렸다.

“백호 당신, 그들에게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주자고 했지? 난 잊지 않았어. 그래, 도구르 그 자식의 말이지만 옳아. 어떻게든 해 보자구.”

주기 선생의 눈이 빛나는 것을 백호는 서글픈 마음으로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준후는 한참 동안 연희의 마음을 읽어 낸 것과 비문에 적혀 있 던 내용을 종합하여 상황을 설명했다. 연희의 짐작과는 다르게 고대의 대홍수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는 치우천왕도 알지 못 했다. 다만 넘쳐나는 물을 막을 수 있는 치수법과 땅의 지맥을 변화시키는 고대의 힘을 사용하여 대홍수를 막을 수 있었던 것 뿐이었다. 아울러 치우천왕은 그러한 홍수가 일어날 것을 예감 하여 높은 땅 티베트에 나라를 정했다. 그리고 지금은 잊힌 고대 의 힘을 사용해 미래에 대홍수를 일으킬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남극과 북극 지하에 흐르고 있는 용암의 지맥이었다.

“치우천왕은 여든하나의 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미래의 후손들 이 맞을지 모르는 이 참담한 홍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술사들 을 모았대요. 그들의 힘을 한데 모아 극지의 땅에 봉인을 한 겁 니다. 극지에 흐르는 용암의 맥이 뚫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한 거 죠. 그런데 기운을 한데 모아 가두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치우천 왕은 그것도 불안하다고 여겼어요.”

“그게 바로 수다르사나?”

“수다르사나에 박힌 무지갯빛 보석일 거예요. 비문에는 무지 개로만 적혀 있으니까요. 그건 장차 닥칠 무서운 대홍수를 방지 한 봉인이지만 지맥을 변동시키는 힘을 지닌 무서운 물건이기도 해요.”

최 교수가 말했다.

“지맥을 변동시키는 힘이 있다고?”

“네.”

“지맥이라………….”

준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최 교수는 중국의 치수 전설에 나 오는 보물인 식양息壤)을 떠올렸다. 치우천왕이 치수할 때 사용 하던 하늘의 보물이 식양이라는 흙인데, 한 줌을 던지면 산이 생 기고 물이 메워지는 것이 그 보물의 힘이라고 전설은 전하고 있 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그것이 단순한 흙이 아니고 지맥을 변동시키는 힘의 열쇠라고 한다면 사정이 달랐다. 홍수가 닥 칠 때 지맥을 불러 산이 솟아나게 한다면 당연히 홍수의 힘은 약 화될 것이다. 최후에 식양을 얻음으로써 치우천왕은 치수에 성 공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식양이 이러한 주술에 근거한 것이라 고 본다면 앞뒤가 맞는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면 마스터가 노린 것은 바로…….”

“맞아요. 지맥을 변동시켜서 극지에 용암을 분출시키는 것. 그 러면 대홍수는 피할 수 없어요! 단순한 주술력이나 물리적인 힘 으로 대홍수를 일으킬 수는 없지요. 이제 알겠어요! 마스터는 녹 비에서 그러한 내용을 알아내고 계획을 세운 거예요.”

현암이 준후의 말을 받았다.

“그랬구나! 마스터는 바바지의 제자였고, 수다르사나의 보관 자는 바바지였으니 수다르사나의 가운데에 붙은 보석을 보았을 지도 모르지. 그리고 녹비를 본 후 그것을 빼앗으려고 이 모든 계획을…………. 아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주술력이나 무슨 짓으로도 천재지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왕에 가두어 두었던 힘을 분출시 키거나 막는 정도는 주술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마스터는 그것 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막는 길은? 그것도 나와 있니? 응?”

박 신부도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준후는 고개를 저었다.

“암호처럼 풀어져 있는 글자들이 너무 많아요. 그것 중에는 수 다르사나에 있는 보석의 힘을 쓰는 것도 있을 테고 또 다른 고대 의 주술에 대한 것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도 지금 당장 알 수 는 없어요.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 보석을 쓰지 못하게 만드 는 방법뿐이에요.”

“그 방법이 뭐지?”

“간단해요. 그 보석은 어떤 힘으로도 파괴할 수 없대요. 단 한 가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려줘야 한대요. 아무도 찾지 못하 게. 그것도 사람의 손으로는 안 되고요.”

“사람의 손이 아니라면?”

“영혼의 힘. 맞을 거예요. 영혼의 힘으로 땅에 돌려줘야 한대 요. 그것도 세 사람…………….”

모두들 말이 없었다. 영혼의 힘으로 땅에 돌려줘야 한다는 것. 아무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죽음을 의미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죽음의 희생으로써 보석을 땅에 봉인 할 수 있다는 의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누가 희생되어 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세 사람? 다들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준후가 울먹이며 말했다.

“연희 누나가 안부 전해 달랬어요. 그리고 꼭 살아오라고………….흐흐흑.”

준후가 울음을 터뜨리자 승희가 준후를 안아 다독였다.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다음 순간, 준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면서 외쳤다.

“아라! 조요경에서 뭔가가!”

“무슨 말이지, 준후야?’

“몰라요. 방금 아라의 조요경에서 뭔가가 느껴졌어요!”

그 말을 듣고 승희는 정신을 집중해 아라의 마음을 살폈다. 그리고 백호와 주기 선생까지도. 잠시 후 승희가 지치고 피곤한 얼 굴로 눈을 떴다.

“이쪽으로 요원들이 새카맣게 몰려오는 모양이에요.”

“뭐라고? 어떻게?”

현암이 놀라자 승희는 힘없게 웃으며 현암의 등에 지워진 위 성 전화를 가리켰다.

“저걸로 알아낸 것 같아. 백호 씨하고 주기 선생하고 마음속으 로 아예 노래를 부르고 있어. 어서 달아나라고 말야. 이번엔 절 대 빠져나갈 수 없을 거래.”

“달아나라고? 지금?”

기가 막혔다. 마스터의 음모를 알게 된 시점에서 이러한 일에 휘말리다니.

박신부는 눈을 감았고 현암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눈은 오히려 빛나고 있었다. 현암이 박 신부의 귓가에 속삭였다.

“신부님. 다른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최소한 승희와 준후만은 살려 보지요.”

박신부는 현암의 눈을 바라보았다. 현암의 눈은 맑았지만 얼 굴에는 간절한 심정이 배어 있었다. 박 신부는 잘 쓰지 않던 능 력을 발휘하여 현암에게 마음으로 물었다.

내 마음을 알고 있었군. 하긴 나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 같이 가 주겠나?

저 혼자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스터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고, 신동 가운데 레드와 구구루가 남아 있어요. 우리 둘이 어떻게든 해 보지요.

세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월향이 있습니다. 월향은 저와 함께하기로 한 처지입니다.

박신부가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제는 어차피………….

동감일세. 미래는 준후에게 맡기세. 준후에겐 죄를 짓는 거네만………….

준후를 믿습니다.

현암은 힘겹게 씩 웃어 보였다. 박 신부도 고개를 끄덕하고는 최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잠시만…….”

최 교수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박 신부는 뭐라 할 사이도 없이 한방을 먹였다. 맥없이 쓰러진 최 교수를 보며 박 신부가 성호 를 긋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서요.”

일행은 아무 말 없이 최 교수를 남겨 둔 채 걸음을 옮겼다. 오분 정도 걸어 동굴의 입구에 닿았다. 현암은 월향검을 들고 경계 의 태세를 갖추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박신부가 준후를 보고 말했다.

“준후야. 이제 우리는 추적받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 겐 시간이 필요해! 시간을 끌어 줄 수 있겠니?”

“네? 저도 같이 갈 거예요!”

준후가 크게 외쳤지만 박 신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 했다.

“같이 안 간다는 게 아니야. 시간을 벌자는 말이지. 나하고 현 암군은 먼저 들어가겠다. 너는 승희와 남아서 동굴 입구에 진을 친 다음에 들어오라는 거야. 우리는 시간을 벌어야 해. 우리가 마 스터와 다투는 중에 요원들이 들이닥치면 훨씬 위험하니까. 안 그 러니?”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안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때 승희가 박 신부의 옆에 찰싹 붙으며 말했다.

“신부님, 저는 같이 갈래요. 준후 혼자서도 진은 얼마든지 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서 박 신부의 귀에 빠르게 속삭였다.

“전 다 알아요. 절 떼어 놓을 생각하지 마세요.”

박 신부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승희는 현암과 자신이 마음속으로 나눈 대화를 투시력으로 엿듣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박 신부는 승희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알고 있었니?

그럼요! 제가 누군데 몰라요? 신부님, 어차피 요원들이 덮치면 저도 가망이 없어요. 하지만 준후는 재주는 많으니 괜찮을 거예요. 저도 같이 갈래요. 네?

하지만………………

세 사람이 필요하다잖아요. 그렇다고 월향하고 현암 군하고 같이 보 내는 건 싫어요. 제가 갈래요. 네?

승희야…………….

박 신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승희는 지금 무슨 생각 을 하고 있단 말인가. 승희는 밝게 웃고 있었다. 승희가 준후 쪽 으로 얼굴을 돌렸다.

“준후야, 부탁한다. 그리고 빨리 와, 응?”

승희는 준후의 어깨를 툭 치고는 다짜고짜 동굴 쪽으로 걸음 을 옮겼다. 박 신부도 그 뒤를 따라갔다. 현암은 등에 졌던 위성 전화기를 주먹으로 갈겨서 박살 낸 후 그들 뒤를 황급히 따랐다. 준후는 조금 망설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둘러서 진을 치고 동 굴 안으로 들어가야지 다짐하면서 부적을 꺼내 사방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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