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17화 – 홍수 30 : 에필로그
에필로그
지진이 끝나고 주기 선생의 유해가 치워진 후 새카맣게 타버 린 동굴 안을 수색하기 위해 맥라렌과 정보원들이 백호를 앞장 세웠다. 백호는 죽어도 가기 싫다고 버텼지만 그들은 질질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땅 사이의 갈라진 틈은 용암으로 다물어져 있 었고 그 안에는 새카맣게 타버려서 재도 아니고 자국만 남은 네 개의 사람 모양이 보였다.
“음, 이건 시체도 아니고 재까지 다 타버렸군.”
맥라렌은 잔혹하게 타버린 자국들을 재기 시작했다. “체구가 상당히 큰 사람의 자취로군. 이건 키가 백팔십오?” 백호는 박 신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입술을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손만 풀려 있으면 총을 빼앗아 이 잔혹한 작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었다.
“보통 체격이군. 남자일까?”
현암……………. 백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조금 작은 키, 백육십 정도 되는 것 같고 호리호리한 체격이 었던 것 같은데…..”
백호는 승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건 뭐야. 저만치 떨어져 있는 거. 그래, 아주 작군그래. 아이였나?”
준후…..
“그만!”
백호는 길게 소리를 질렀다. 그 기세에 맥라렌과 다른 요원들은 동작을 멈추었다. 유들유들한 맥라렌은 웃으며 백호에게 말했다.
“그들과 일치하는 인상착의군. 이봐, 코리언. 그들은 모두 갔 군. 원, 세상에 용암에 타 죽다니. 천벌을 받은 거야.”
천벌? 천벌이 무엇인지 알아? 대홍수에 떼죽음을 당할 뻔한 게 누구인지 알아? 그걸 막은 게 누구인지 알아?
백호는 마구 소리 지르고 발광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온몸에 힘이 풀리고 맥이 빠졌다. 까마득히 정신 을 잃어 가는 백호의 귓가로 마지막에 들려온 것은 맥라렌의 목 소리였다.
“상황 종료! 저 코리언 친구 이제 풀어 줘. 공연히 원수질 건 없으니. 따지고 보면 저 친구나 나나 동업자 아니야?”
백호는 병원의 침상에 앉아 식사 때 감춰 놓은 칼을 몇 번이나 쓰다듬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도대체 세상은 무엇일까? 주기 선생이 최후에 준후에게 물었던 것을 백호는 자기 자신에게 되 묻고 있었다. 정의가 정말 이기는 거냐고, 정말로 승리하는 것이냐고.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았으니 정의가 이긴 것인가? 모든 것은 다 이런식인가?’
백호는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도착할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여야 하 나? 나는 무얼 했다고 대답해야 하나? 세상을 구하고, 아무런 미 움도 증오도 남기지 않고 그들이 떠났으니 더 이상 후퇴할 것 없 다고? 백호는 칼을 보았다. 힘들 것은 없었다. 아주 가볍게, 많은 힘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각도는 중요하다. 날이 무디어도 상관 없다. 조용히 찔러 넣으면 그만이다. 백호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장난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문소리가 들렸다. 백호는 칼을 감추었다. 들어오는 사람 을 보고 백호는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승희인 줄 알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 뒤에 서 있는 사툼나를 보고 백호는 한숨을 내쉬 었다. 그건 승희가 아니라 로파무드였다. 사툼나는 주저주저하 면서 말했으나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감사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래, 저 사람은 기쁘겠지.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같이 기뻐해 줄 마음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백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 며 말했다.
“제게 감사할 것은 없습니다.”
“실은 제 딸아이가 이제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직 갓난아기와 같아서 말은 하지 못하지만 자꾸 뭔가를 찾고 있어요. 이쪽으로 온다고 말하니 얌전해져서 뭔가 신의 뜻이 있을까 해서 데리고 온 겁니다.”
백호는 듣기조차 싫었다.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리려다가 불 현듯 승희가 죽어서 영혼이 로파드에게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
“둘만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사툼나는 쾌히 응하여 로파무드를 백호의 앞에 앉혀 놓고 문 을 닫고 나갔다. 그러자 백호는 참았던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로파무드를 살펴보았다. 아니, 로파무드의 얼굴에서 그와 꼭 닮 은 승희의 자취라도 살펴보고 싶었다.
그때 로무드의 얼굴이 붉은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몸도 붉게 물들어 갔다.
“이, 이건 애염명왕의…………….”
백호는 그런 광경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승희의 몸을 애 염명왕이 지배했을 때 그런 모습이 되지 않았던가?
쉿, 목소리를 낮추라.
마음속으로 애염명왕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하지만 이제 요원 들이 철수했으니 목소리를 낮출 것도 없었다. 백호는 어떻게 생 각하면 욕을 하고 싶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반갑기도 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승희 씨의 영혼이 로파무드에게 들어간 것 아닙니까?”
아니다. 이미 영혼의 법칙을 어긴 로파무드의 몸에는 그와 같이 정해 진 영혼의 법칙을 어긴 자만이 배당되는 법. 정상적인 자는 그대로의 길 을 걷는다. 이제 나의 일은 끝났다. 너희가 마스터라 부르던 자의 영혼 이 로파무드에게로 보내졌다.
“마, 마스터가!”
그는 악인이 아니다. 죄인도 아니다. 깨끗이 정화된 어린아이의 영혼만이 안에 남았을 뿐이다. 이제 그도 인연의 업보를 씻었다.
“그럼 승희 씨의 영혼은?”
내일은 이제 끝났다. 나는 내 세계로 간다. 이 여자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것이다.
“승희 씨의 영혼은요? 그리고 그들은?”
그대가 할 일이 있다. 그대가 마무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마무리? 난 이제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게 될 텐데?
백호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애염명왕은 훈훈하게 느껴지는 마음을 전해 왔다.
동굴이 있던 산의 산마루에 그들이 있다. 지치고 힘겨워 정신을 잃고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 어서 가서 그들을 구하라. 나는 사랑의 신이다. 그들의 사랑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더구나 그들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큰일, 아주 큰일이다. 금기를 깨고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러니 어서…..
백호는 목이 메어서 말은커녕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들 그렇다면 기적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들은 용암에 타 죽었다고 했는데………….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피가 솟구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어지러웠다. 그러한 백호의 상태를 알았는지 애염명왕이 간단하게 말했다.
기적은 아니다. 인간들의 일이었다. 과거에 코제트란 자가 지녔던 물건 중에 몸을 이동시키는 반지가 있었다. 비록 두 조각으로 깨어졌 지만, 그 반지는 깨어진 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힘을 발휘한다. 깊은 땅속에 묻혀 있던 반지가 그리로 전해진 것뿐이다. 원래의 주인에 의 해……. 그리고 나는 지금 그대에게 알려 주는 것뿐이다.
백호는 코제트가 지니고 있었다는 텔레포트의 반지를 잠깐 떠 올렸다. 두 조각으로 깨어져 버렸다는 그 반지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났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웃으면서 죽어간 코제트의 이야기도……………. 그러면 코제트의 영혼이 최후의 순간에 그들을 구했단 말인가? 코제트의 영혼이 텔레포트의 능력을 지닌 반지 의 힘을 끌어내어 마지막 순간에 그들을 구해 냈단 말인가? 그렇 다면 그 안에 있던 사람의 자취는 퇴마사들이 아니었던가? 마스 터의 다른 부하들이거나 좀비들이었던가?
생각이 넘쳐흘렀지만 백호는 모두 비우고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들 모두?”
로파무드, 아니 애염명왕의 현신은 항상 하고 있는 화난 듯한 얼굴을 지우고 사람으로는 형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그들 모두!
그 말을 끝으로 로파무드의 몸은 원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왔 다. 백호는 그러한 로파무드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서둘러 환자 복을 벗어 던지고 옷을 꺼내어 입기 시작했다. 재킷에 거꾸로 팔 을 끼웠다가 등 언저리가 찢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서슬에 감추어 둔 칼이 쨍강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백호 는 발로 차서 저만치 밀어 버렸다.
방 안이 소란스러워지자 사툼나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안 으로 들어왔다. 로파무드는 여전히 갓난아기 같은 눈초리로 얌 전히 앉아 있고, 방금까지 다 죽어 가던 백호가 실성한 사람처럼 옷을 마구 꿰어 입고 있었다. 사툼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백호 는 그를 밀치다시피 하면서 병실 문을 나섰다.
그러다가 사툼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한국말이어서 사나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정의는 이겨! 알아요?”
백호는 기쁨에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야호!”
미친 듯이 병원을 빠져나왔다. 음울하던 세상이 한순간 환하게 밝아지면서 모든 것이 좋게 보였다. 사람들이 미친 사람 쳐다 보듯 했지만 백호는 신경도 쓰지 않고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백호는 하늘을 바라보며 주기 선생을 기억했다.
‘내 말 들리오? 당신은 헛된 일을 한 게 아니었소.’
잠시 울적한 기분이 들었지만 숨을 들이마시자 마음이 평안 해졌다. 주기 선생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고 신기하게도 그에 대 해서는 더 이상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바람도 구름도 하늘도 땅 도, 왜 그렇게 달라져 보이는지 백호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 다. 찌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다가드는 공기가 한없이 맑 고 시원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백호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거리 를 달렸다. 산마루를 단숨에 달려 올라갈 수 있는 튼튼한 차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다음엔………. 그다음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