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18화 – 홍수 31 : 해와 달과 별 (혼세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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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4권 18화 – 홍수 31 : 해와 달과 별


해와 달과 별

늦은 시간이었다. 인적 없는 깊은 산중은 밤이 되면 도회지보 다 수십 배나 더 어둡다. 특히나 달도 없는 이런 밤에는 하늘에 점점이 빛나는 별빛만을 길잡이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달도 없는 한밤중의 산길을 한 사람이 거침없이 걷고 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앞이 훤하게 보이는 듯 힘차고 급한 발걸음이었다. 보통 사람의 걸음보다도 몇 배나 빨 랐지만 가끔 풀잎을 스치는 소리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만 이 작게 들릴 뿐,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방향을 확 인하듯 두어 번 사방을 둘러보다가 험한 비탈 사이로 난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니 산 저만치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 오는 곳은 허름하고 조그마한 암자였는데 과연 저런 곳에 건물 을 지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숙한 산속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지은 지 매우 오래된 듯 여러 곳이 허물어진 낡은 암자였다. 하지만 아직도 고색창연한데다 엄숙한 분위기가 주변 을 맴돌고 있었다. 암자 밖에 대여섯 사람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 였다.

그는 불빛을 향해 거의 뛸 듯이 비탈길을 올랐다. 암자에 가까 이 다가가니 나지막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속도를 늦추 고 천천히 암자 쪽으로 다가갔다. 암자의 앞에는 체구가 큰 승려 네 사람과 체구가 작은 승려 한 사람이 합장을 한 채 서 있었다.

이들은 바위처럼 묵묵히 합장을 하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다가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입니다. 현암 시주.”

덩치 큰 사람이 합장을 하자 현암도 마주 합장을 했다. 낯이 익은 사람들이었다. 몇 년 전 초치검 사건 때 힘을 합한 바 있었 던 백제암의 사천왕과 승현 사미였다. 승현 사미는 몇 년 사이에 많이 자라서 앳되고 해맑은 모습 속에 어른 티가 묻어났다. 오랜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었지만 오늘은 길게 인사를 나눌 만 큼 여유가 없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큰스님과거사께서는?”

“현암 시주를 여러 번 찾으시더군요. 나무아미타불.”

현암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실로 몇 년 만에 도혜 스님의 연락을 들을 수 있었던가! 그런데 하필이면 이 오랜만의 재회 가……. 현암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그들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러자 마치 안에서 보고 있었던 듯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젊은 승려 하나가 현암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노스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처음에 현암은 이 승려가 누구인지 몰랐다. 찬찬히 보니 도혜 스님이 자신에게 공력을 전해 줄 당시 따라다니던 동자승인 것 같았다. 이제는 젊은 승려가 된 동자승은 비단 지금 상황 때문만 이 아니라 원래부터 깊은 수심을 드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액아, 손이 오셨느냐?”

현암은 안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서 과거 도혜 스님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 오셨습니다. 큰스님.”

“어서 안으로 모셔라.”

지액이라는 젊은 승려는 현암에게 문을 열어 주고 옆으로 비 켜섰다가 현암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작은 호롱불 하나가 켜 있었고 저쪽에 수염을 길게 기른 자그마한 체구의 노승이 가부좌를 하고 조는 듯 앉아 있었 다. 현암이 꿈에도 잊지 못하던 도혜 스님의 모습이었다. 맞은편 에는 거구의 한빈 거사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로구나.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내 전해 들었다만…………….”

현암은 한빈 거사와 도혜 스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한빈 거사 는 여러 번 뵌 적이 있었지만, 도혜 스님은 예전에 공력을 얻었 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혜 스님은 많이 늙고 수척해 보였다. 어깨가 축 처진 채 앉 아 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눈물이 났다. 자신에게 전수해 준 칠십 년 공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저렇게까지는……………. 현암은 자 신도 모르게 눈물을 닦았다. 도혜 스님이 낮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늙으면 오그라드는 것이 당연한 일, 울지 마시게나.”

현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계속 눈물만 흘렸다.

“속세에 미련을 두는 것은 승(僧)이 할 일이 아니지만 당부할 것이 있어 보고자 했네.”

도혜 스님은 가냘프지만 해탈한 듯한 작고 깨끗한 목소리로 또렷이 말했다.

“명(命)이란 정해진 것이지만 개척하는 것도 가능한 일, 자네 가 옳게 살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네. 순리대로…………….”

현암은 머리를 조아려 방바닥에 대었다. 그다음 무슨 말을 하 실 것인가?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지 한참 지나 갑자기 청천벽 력 같은 한빈 거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입적하시었네. 제자들은 들라!”

현암은 너무나 놀라서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눈물 그득 한 눈을 들어 앞을 보자 도혜 스님은 평온한 미소를 지은 채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나마 가늘게 이 어지던 숨소리는 끊어져 있었다. 좌탈(脫)하신 것이다. 제자들 은 슬픔을 참으며 방 안으로 들어와 입적한 도혜 스님에게 하나 둘 절을 올렸다.

“스, 스님…….”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도혜 스님의 시신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으나 한빈 거사의 목소리가 엄하게 들려왔다.

“생사는 천명에 달린 것이니 상심했다고 망동하지 말라!”

현암은 한빈 거사의 말을 듣고 내뻗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에 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독경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나와 같이 가지 않겠느냐?”

현암은 한빈 거사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몸을 움직이지 못했 다. 세상과 동떨어진 산속의 작은 암자에서 복잡한 절차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짧은 순간에 도혜 스님의 육신은 장작불 위에서 재로 변했다. 그 주위를 둘러싼 사천왕과 지액 스님 등은 합장한 채 엄숙하게 독경을 할 뿐 무표정한 모습 이었다. 현암은 멍한 시선으로 그러한 광경을 꿈을 꾸는 것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끝났단 말인가? 단지 그 말 몇 마디만을 남기고 십여 년 만에 만난 은인은 가 버리셨단 말인가? 이제 막 사위어 가는 저 장작불 속의 한 줌 재로……………

“잠시 이야기나 하세.”

한빈 거사가 말하자 현암은 힘없이 일어났다. 난데없이 한빈 거사가 현암을 냅다 걷어찼다. 현암은 힘없이 땅바닥을 데굴데 굴 굴렀다. 그러나 현암의 뇌리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 았다.

“이놈! 아프냐?”

“…….”

“아프면 산 것이지만 아니면 죽은 놈이구나! 넌 죽은 놈이냐?” 

한빈 거사가 벌컥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걷어찼다. 처음 발길 질과는 달리 이번의 발길질은 너무나 아파서 현암은 자신도 모 르게 헉하는 숨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은 현암의 의식과는 전 혀 상관없었다. 현암은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얻어맞는 대로 그 냥 데굴데굴 구를 뿐이었다.

“이 멍청한 놈 같으니! 네놈은 영원히 살 듯싶으냐? 네가 뭔데 슬퍼하느냐?”

한빈 거사가 거듭 현암을 걷어차자 끝내 현암은 울컥 하고 피 를 토해 내고 말았다. 그런데도 한빈 거사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 았다. 현암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한빈 거사의 기세가 하 도 살벌해서 사천왕과 지액 스님까지도 감히 말리려 나서질 못 했다.

현암은 몽롱해지려는 의식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그렇군. 거 사님의 말씀이 맞아. 도혜 스님은 가셨지만 나는 살아 있다. 또 스님께서는 나를 보길 원하셨다. 마지막 말씀까지 남겨 주셨고 미소도 지으셨다.

“일어서라! 선사께서 너에게 남기신 것이 있다.”

한빈 거사는 크게 소리치면서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추스르고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빈 거사는 종이 한 장을 현암에게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 든 현암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한빈 거사의 인정사정없는 발이 다시 현암의 따귀를 갈겼다.

“누가 슬퍼하라 했느냐!”

현암은 정신을 가다듬고 편지를 읽으려 애썼다. 처음에 편지 의 글은 희미하게 아롱거릴 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 정 신을 집중하자 비로소 한 자 한 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 어두워질 것이야. 달도 별도 없는, 아무런 길잡이도 없이 밤길을 걸어야 할 때가 올 것이네. 그러나 달빛도 별빛도 사라지 는 것은 해가 뜬다는 조짐. 순리에 따라 천명을 다해 주게나.’ 현암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빈 거사는 갑자 기 현암의 손에서 그 편지를 빼앗더니 꺼져 가는 장작더미 속으 로 던져 버렸다.

현암은 자기 손에서 편지가 사라지는 것도 깨닫지 못한 것 같 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눈의 초점을 잡으며 엄숙한 표정으로 변 했다. 피범벅이 되어 버린 얼굴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한빈 거사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바보 같은 네놈을 위해 내 도혜의 뜻을 일 러 주겠다.”


깊은 산속의 밤하늘은 상쾌했다. 몇 가닥 구름 사이로 드러난 별들이 희미하게나마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 하늘을 바라 보고 있는 한빈 거사 뒤에 현암이 무릎을 꿇고 공손히 앉아 있었 다. 현암은 싸늘한 밤공기 때문인지 정신이 맑아진 듯, 눈이 빛 났다. 한빈 거사는 한참 동안이나 하늘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입 을 열었다.

“하늘을 봐라. 저 별이 보이느냐?”

“예.”

“비록 작고 희미한 빛을 비출 뿐이지만 길 잃은 나그네에게는 큰 도움이 되느니라. 허나 달이 뜨면 그 언저리의 별빛은 잠잠 해진다. 달은 꽉 차면 그 빛으로 온 세상을 다 비출 수 있다. 허 나 새벽이 가까이 오면 별빛도 달빛도 하늘 저편으로 서서히 사 라져 간다. 그것은 어둠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밝은 빛이 세상을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해가 뜨면 밤하늘을 밝히던 별빛도 달빛 도 더 이상은 보이지 않게 되지만 세상은 바야흐로 밝아지고 생 기에 넘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라고 병들고 늙고 죽어서 또다시 태어나는 것이 어찌 사람만이겠는가. 우주의 주기인 하 늘이 그러할진대 세상 만물이 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법. 인간 세상도 예외는 아니야.”

“그러면 길 잃은 나그네라 하심은…………”

세상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현암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한빈 거사는 미소만을 지은 채 흔들림 없이 눈을 반쯤 감고 있을 뿐, 현암의 물음엔 대답하지 않았다.

현암의 마음은 착잡했다. 한빈 거사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도 도혜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도혜 스님의 편지는 열반을 앞에 두고 남기신 일 종의 계가 분명했다. 도혜 스님의 생각을 하자 다시 슬픔이 일렁거렸지만 현암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 다. 도혜 스님께서도 자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 을 것 같았다.

허공을 응시하며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한빈 거사가 입을 열었다.

“아주 늦은 밤이로군. 그러나 조만간에 날이 밝을 것이다. 별 도 달도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겠지만 그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고서 외치듯이 말했다. 

“별처럼 달처럼 사라져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사라지고 나면 동트듯이 정말 날이 밝게 되는 것입니까? 만일 날 이 밝는 것이 아니라 구름에 가려지는 것이면 어찌합니까?” 

“달이 구름에 가린다고 해가 뜨지 않는 것을 보았느냐?”

“물론, 달빛도 별빛도 보이지 않으면 밤길을 가는 사람은 답답 하겠지. 그래서 길 가던 것을 그만두려 할 수도 있고, 주저앉을 수도 있다. 또 헛발질을 해 넘어질 수도 있지. 그렇다고 아침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동은 트는 법이다.” 

“그러면 해는 누구입니까? 무엇입니까?”

한빈 거사는 현암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허 공을 향하더니, 곧 작은 목소리로 탄식하듯 말했다.

“앞날이 험난하기만 하구나. 세상사는 운명에 따르는 법이지 만 그 운명 중에 사람이 해야만 하는 부분도 있는 게야. 나나 도 혜나 그 일에는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그것도 정해 진천명. 너와 네 옆 분들의 책임이 크다.”

“천명이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너를 본 지 어언 십여 년이 지났구나. 이제는 꽤 많은 깨달음 을 얻었겠지. 처음 보았을 때에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는데. 허허허.”

“목숨을 구해 주시고 가르침을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것 없다. 도혜 그 친구가 내게 먼저 말했지. 천명이 주어진 사람 중의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사람이 지닌 살기가 너 무 많다고 말야. 그게 너였지. 그 친구는 너를 몰랐지만, 다만 산 (算)을 풀어 보고 그리될 줄 알았던 모양이야. 그래, 나도 한번 잘 수련시켜 볼까 했는데 네가 너무 말을 듣지 않아서 거의 포기 했지. 너에겐 살기가 너무 많았다. 하하하.”

현암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후로 관여하지 않고 그대로 두려고 했다. 하지만 그 런 이야기를 듣고 도혜는 너를 만나 볼 생각을 한 모양이야. 만 나 보기만 할 요량이었던 모양인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을 앞에 두고 자비를 근본으로 삼는 불제자가 그냥 지나쳤을 리 만 무지.”

한빈 거사가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 걱정했다. 안 그래도 살기가 짙은 놈에게 공력을 물려주다니…………. 그런데 확실히 놀라운 것은 네가 품었던 살기 가 어느 틈에 사라져 버린 거야. 그때는 나도 도혜가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허허허. 그래도 네가 이렇게까지 어엿하게 될 줄은 몰 랐다. 검의 경지는 나보다도 나으면 나았지 뒤떨어지지 않겠구 나. 그간 고생이 많았겠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허허허. 아니기는 무엇이 아니냐. 그래, 솔직하게 말해 보아 라. 칠십 년 공력을 얻고 나니 기쁘고 좋더냐? 복수심이나 살기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지난번 헤어질 때 도혜가 한 당부를 잊지 않고 부적을 잘 사용한 모양인데……………. 어떻더냐? 그 이후의 일이….”

현암이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의 일들이 주 마등같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동생의 복수에 눈이 멀어 서 모든 것을 버리고 기공비급을 훔쳐서 산으로 도망쳐 처박혔던 일. 또 그것을 익히다 잘못되어 탈이 났을 때 한빈 거사의 구 원을 받은 일. 다시 한번 거사를 떠나 무리하게 공력을 운행하다 가 또 한 번 죽음의 위기를 맞았던 일. 그리고 도혜 스님에게 씻 을 수 없는 은덕을 입었던 일. 그 후 절치부심, 검기를 만들어 내 는 데 성공했으나 그 상대가 불쌍한 존재임을 알고는 복수 대신 남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했던 일. 그리고 수없는 사투. 구했 던 사람들과 미처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 힘에 대한, 그리고 고 통에 대한 갈등……

“처음에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강한 힘을 지니는 것 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 도혜가 너를 고생문에 빠뜨린 게지.”

“아닙니다. 지금은 그것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갖고 있지 않습니 다. 좋은 곳에 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너 자신은 버려야 하는데도 말이냐? 너는 살생을 삼가고 힘을 부리기를 삼가며 근신하여 잘 행동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 나 한 인간으로서의 너 자신은 네가 힘을 갖게 된 순간부터 죽은 것이나 진배없다. 또한 큰 힘을 얻은 만큼 짐을 더 져야만 했지 않느냐? 너는 그 힘을 제대로 사용했느냐? 쓰지 못할 곳에 쓴 적 은 없었느냐? 꼭 써야만 하는 곳에 쓰지 않은 적은 없었느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후회는 없느냐?”

현암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한참 고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 자신은 어찌하겠느냐? 만일 네가 죽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찌하겠느냐?”

현암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빈 거사는 입을 꾹 다문 채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싸늘한 밤공기 가 이름 모를 풀벌레의 울음소리를 싣고 현암의 얼굴을 스쳐 지 나갔다. 현암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한빈 거사의 얼굴을 쳐다보 고는 밤하늘의 허공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로 무겁게 입을 열었 다.

“가능하다면…… 저도 죽지 않고 세상도 구하겠습니다.” 

현암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끝내자 둘 사이엔 적막감이 흘 렀다. 한빈 거사는 허공을 바라보던 눈길을 현암에게로 향하면 서 큰 기침을 하고서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궁리하겠습니다.”

“허허허.”

한빈 거사가 밝게 웃었다.

“그래, 자신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자가 남의 생명을 진정으로 존중할 수는 없지. 명분에 의해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자는 명분에 의해 남도 망설임 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자다. 옳게 생각하고 있으니 내 너를 믿을 수 있겠구나.”

한빈 거사는 인자한 얼굴로 현암을 바라보았다.

“진리니 무상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이 어이 그다지도 많은 지 알 수 없고, 또 생명보다 존귀한 것이 많기도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그것만은 잊지 말고 있어라!”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될 것이다만, 한 가지만 더 묻자. 생명이 왜 귀중하다고 보느냐?”

현암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박 신부나 준후와도 몇 번이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박 신부는 다소 논 리적이며 이성적인 편이었고, 준후는 따뜻한 감성의 측면에서 그 가치를 평했다. 현암은 둘 다 맞는 말이라고 수긍했지만, 자 신의 의견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현암을 보고 한빈 거사 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생명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냐?”

“아닙니다.”

“어째서 아니냐?”

현암은 마음속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납득하고 공감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진정으로 깨닫기가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지, 누구의 생각도 길잡이를 삼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깨달으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마침내 현암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래된 생명은 가치가 없어질 것인데 그렇지 않습 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생명을 귀히 여겨야 하는 게 중요한 이유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으뜸가는 이유는 아닙니다.”

“그러면 다른 생명에게 그 생명이 무언가를 해 주고 베풀어 줄 수 있기 때문이냐?”

“반드시 그렇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건 또 왜인가?”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지 않는다고 생명의 가치가 없는 건 아 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해만 끼치는 악인의 생명도 소중하기 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생명 자체가 원래 존귀한 것이기 때문이냐?”

“세상에 원래부터 존귀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데에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생명을 지닌 동안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냐?”

“그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것은 현재 살고 있는 몸을 지닌 사람의 경우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란 살아 있는 인간이나 동물에게만 있 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영혼들도 인간으로서의 생명은 끝났지 만 나름대로 존재하고 소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영혼 들도 살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중요하냐?”

“살아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살아 있으니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 한가 지로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숨 쉬고 활동하고 먹고 잠자는 모든 것이 소중합니다.”

한빈 거사는 미소를 띠었다. 현암의 답변이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 모든 것은 하나와 얽히고 그 하나는 모든 것이다. 그만 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기특하구나. 원래는 스스로 찾아야 하 는 것이지만 네 생각이 바로잡혔으니 상세히 알려 주어도 될 듯 싶구나. 내 말 잘 새겨듣고 잊어버리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현암은 한빈 거사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 곧 때가 이른다. 물론 정확한 것까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일 당장이 될지 십 년이나 이십 년 후가 될지도 모른다. 그 후가 될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반드시 때가 이른다는 것이다. 네 생전에 너는 분명 그때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라고 하시면?”

“별도 달도 없는 밤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날이 밝을 기미도 보이지 않을 것이야. 구름이 너무 끼어서 아무도 동이 틀 것이라 고 믿지 않으며 모두 자포자기해 버리게 된다. 나그네가 길을 잃 고 호랑이 밥이 되거나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현암은 숨을 죽였다. 한빈 거사의 비유는 현암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박 신부와의 대화에서도 여러 번 들었던 내용이었다.

말세(世), 말세가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른다. 그 구름이 어디서부터 나와 어떻게 드리워지 는지는……………. 날이 밝고 동이 틀 텐데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 다. 내일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호랑이의 눈빛을 빛으 로 착각하고 귀신의 도깨비불을 광명으로 믿고 현혹된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아무도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면 해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기다리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너나 네 주변의 사람들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 가가 한다. 그 사람이 바로 미륵불이고 구세주이고 메시아이고 정 도령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심하여라.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 사람이 세상을 구하게 되더라도, 그 사람이 세상을 구하는 것인지는 본인도 모 르고 아무도 모른다.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날지도 모를 것이다. 그 사람은 결코 빛 같은 것을 내지 않으니까. 그 사람은 자신이 죽 을 때까지 자기 자신조차 모른다. 또 그 사람 때문에 세상이 구원 받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것이며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그 사람이 구원자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씀입니까?”

“그 반대의 존재가 있다. 징벌자다. 역시 아무도 그 사람이 세 상을 망칠 것인지 모른다. 그 사람 자신도 모르고, 주변에서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모든 것은 구름에 뒤덮이게 된다. 하지만 구원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세상 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구원자가 징벌자를 제거하는 것입니까?”

“아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하였구나. 두 사람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마주치지도 않는다. 서로의 존재도 알지 못하고 자기 자 신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한다. 징벌자에게 악의 사도라는 표시 가 있지도 않을 것이며, 구원자가 착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 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그러하다.”

“징벌자가 악한 존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징벌자가 됩니까? 그리고 구원자가 선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합니 까?”

한빈 거사는 잔잔하기는 했지만 꾸짖는 듯한 어조로 현암에게 말했다.

“내 그래서 묻지 않았느냐? 생명이 어째서 귀중한 것이냐고.” 

그제야 현암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거사 는 그런 질문을 한 것이었다. 그렇다. 구원자나 징벌자나 인간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복잡 미묘한 천기에 변동이 오는 것이다. 구원자 가 있다면 징벌자는 저절로 사그라져서 천기에 영향을 주지 못 하게 될 것이고, 구원자가 없다면 징벌자가 하는 모든 것이 천 기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주어서 세상은 말세로 치닫게 되는 것 이다.

현암은 몸이 떨렸다. 이것은 평소에 자신이 예상하던 말세의 양상과는 달랐다. 차라리 세상을 뒤엎을 만한 악의 존재가 나타 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건 눈에 보이고 존재를 인식할 수 는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징 벌자조차도 자신이 말세의 도화선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며, 그게 악인일지 선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면 징벌자가 어떤 일을 하기에 세상에 말세가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천기다. 하늘 뜻이기 때문에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만 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어떤 행 동이나 악행을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 자체가 전쟁의 원인이 된다거나, 전 세계에 독재정치를 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생각은 접어 두어야 했다. 하 긴 그러한 생각은 아이들도 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말세는 아무 도 모르게 온다고 했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 징벌자는 희대의 악한도 아니고 그렇다고 희대의 선인이나 거짓 지도자도 아닌, 평범한 이웃집 여자일 수도 있고 유치원생 이나 양로원의 할아버지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현암은 몸을 떨다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만약 징벌자가 그렇 다면, 구원자도 표가 나는 사람이 아닐 게 분명했다. 그러면 구 원자를 위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구원자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한빈 거사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거침없이 말했다.

“도혜는 지난 십 년간 천기를 짚어 역을 산으로 풀이했다. 사 실 인간 세상에서는 항상 징벌자와 구원자가 동시에 있었다. 구 원자가 징벌자를 겸하는 경우도 있었고……………. 다만 두 종류의 사람이 항상 같이 나와서 세상은 그럭저럭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곧 그 균형이 깨진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 금 세상은 점차 악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물론 나이 든 사람은 항상 젊은 세대가 버릇이 없다고 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악이 팽배해 있다고 믿고 불안해한다. 그러니 지금이라고 특별 하게 악의 세력이 팽창하는 기간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사 실 특별한 범죄가 더 만연한다거나 법이나 윤리나 도덕이 지나 칠 정도로 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만 무엇인가가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조짐들이 여기저 기서 나타난다.

말세의 징후는 그렇게 시작된다. 천기에서 금해 놓은 한계를 깨뜨리고 그 때문에 구원자가 천명을 다하지 못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징벌자의 존재만이 세상을 물들이고 구 름으로 뒤덮이게 만드는 것이다. 일종의 자멸이다.”

“구원자가 태어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을 획책하는 자들이 있다. 내가 징벌자와 구원자의 존재 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현암아 내 한 가지만 말해주마.”

“예.”

“징벌자와 구원자는 자석의 양극이나 마찬가지다. 천기로 볼 때 어느 한쪽만 나타나지 않으며 그만큼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바꾸어 말하면 징벌자와 구원자는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징벌자는 징벌자고 구원자는 구원 자아닙니까?”

“그 둘을 구분할 방법은 없다.”

“네? 아니 그렇다면?”

“그래서 누군가가 징벌자를 없애려고 한다. 그것이 가장 일차 적인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일은 반드시 실패한 다. 여기에 무서운 점이 있다. 현암아, 만약 그렇게 되면 징벌자 를 없애려고 하는 것은 구원자를 죽이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징벌자를 없앤다면 구원자가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아니, 구원자가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천기의 헤아릴 수 없는 점이다. 징벌 자가 죽으면 구원자가 징벌자가 된다는 것! 바로 이게…………. “

저는 아직도 스승님 말씀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어허! 내 말하지 않았느냐? 둘은 같은 존재이며 양극과 같 은 것이라고. 천기를 어기려는 짓을 하늘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 렇게 안배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 한다. 거기까지 짚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야. 징벌자와 구원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 둘이 구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가 손상을 입으면 곧 하늘의 여움이 떨어지는 것이고, 결국 그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 되는 셈 이다.”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떨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말세라는 것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된 지 오래다. 외압과 같은 외연적인 이유 때문에 종말이 오지는 않는다. 그런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 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니 말세는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다. 인 간의 지(知)가 스스로의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런 것을 깨우쳐 준다면…………….”

“누군지 알고, 몇 명이나 되는지 안다고 어떻게 일일이 깨우쳐 주겠느냐? 더 불행한 것은 그들은 스스로가 악행을 한다고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숭고하고 가장 거룩한 일을 한다고 믿 고 있으며, 정의감에 충만해 있고, 스스로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모든 힘 을 기울인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것 때문에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빠져나가기 힘든 인간 자신의 굴레가 있는 것이다.”

한빈 거사는 말을 끊고 한숨을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죄는 스스로만을 믿고 천기를 변조하려는 데서 시작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 하늘은 우박을 내리거나 대 홍수를 일으키거나 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벌하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자초하여 당하도록 태초부터 안배가 되어 있다. 그것을 피하는 방법도 한 가지뿐. 둘 중의 어느 하나도 죽이지 못하 게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보면 어떨까요? 징벌자와 구원자가 같다고 하셨지 요? 기껏 구해 냈는데 그것이 징벌자면, 우리가 우리의 천기를 믿고 오히려 세상을 망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까지 천기 가 안배되어 있으면 어떻게 하지요?”

한빈 거사는 현암의 말을 듣고 담담히 웃었다.

“그래. 나도 도혜도 그런 고민을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지. 그렇게 되기까지는 네 도움이 컸지만……………..”

“무슨 말씀이신지요?”

“도혜는 너에게 모든 공력을 주고 아무 힘없는 늙은이가 되었 다. 그전에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실제로 겪고 나니 그때부 터 도혜는 명이나 천기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보게 된 것 같아. 도 헤나 나도 그전까지는 징벌자를 없애는 일이 옳다고 믿었지. 그 러나 현암아 한번 생각해 보아라.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은 부자연 스러운 일 아니냐? 없앰으로써 천기가 잡힐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미 천기의 오묘함이 상실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말대로 그 것은 끝없는 순환일 뿐이지. 어느 것이 먼저 어느 것이 나중인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도혜와 나는 순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커다란 대의명분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죄 없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천기가 용납할까 하고 말이다. 도혜의 방법 은 둘 다 살림으로써 세상을 구하려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방 법은 하나를 없앰으로써 세상을 구하려는 것이다. 자! 네 생각은 어떠냐? 아까 내가 물어본 질문에 네가 그럭저럭 내 마음에 드는 답을 했으니 너에게 말해 준 것이다.”

“징벌자가 구원자와 구별이 없다면 둘을 다 없애는 것은?” 

“그러면 천기는 다시 시작이다. 그것은 큰 궤도의 수정일 뿐이 다. 둘을 모두 없애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내가 말한 것을 꼭 되새겨 보아라. 징벌자가 태어나고 구원자가 태어나야만 되 는 것이다. 일단 태어나면 그때는 무슨 수를 써도 천기가 바뀌지 않는다.”

“태어나기만 하면 죽일 수 없다는 말입니까?”

“죽일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태어나는 그 순간으로 세상에 미칠 영향을 다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좌우간 구원자가 태어나 면 천기는 변하지 않는다. 보거라. 다른 자들이 징벌자를 없앤다 면 그것은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둘 다 태어나 지 못한다면 천기가 아예 수정되어야 하니, 그때 태어나는 다른 아이가 징벌자의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천기를 거슬렀으니 구원자는 태어나지 않고 말이다. 알겠느냐? 구원자는 하나뿐이 다. 그러나 징벌자는 하나지만, 천기를 거스르면 여럿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암은 머리를 숙였다. 이해가 될 듯, 되지 않을 듯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문득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 떠올 랐다. 아기 예수를 없애기 위해 헤롯왕은 갓난아이를 모조리 죽 이려 했다. 그러나 스스로의 멸망만 앞당겼고 사람들에겐 고통 만 주었다. 예수는 태어나 자랐다. 물론 이번에는 그 경우가 반 대이다. 자신들은 구원자를 위해 역으로 징벌자를 지켜야 한다. 그 징벌자는 정말로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은 생명을 놓고는 따질 수 없다는 것을 현암 도 일찍부터 믿고 있었다.

이윽고 현암은 마음을 굳혔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할 일은 알았습니다만 누구인지 모른다면…………….”

“찾아라 찾으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네 가까이에 …………….”

현암은 아 하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티베트에서 판 첸 라마가 말했다는 연희에 대한 이야기. 심연의 눈. 가장 밝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 그렇다면 혹시 연희의 심연의 눈이란 것은 다른 능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구원자 나 징벌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 아니 그보다는 심안(心眼)을 지닌 것이 아닐까?

“시간이 없다. 내가 하면 좋겠으나 나도 할 일이 있다.”

“더 가르침을 주십시오.”

“더 이상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지금부터 천지 공사를 드리러 가야 한다. 하늘의 뜻을 짚어야 한다. 이것이 내 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구나. 그리고 너에게 알려 주마. 당장 그 사람을 찾아라. 그때는 못 만날지도 모르니 …………. 아마 이번 이 너와 만나는 마지막이 되겠구나.”

현암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한빈 거사는 따뜻하면서도 엄한 눈빛을 현암에게 보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모두 연(緣)에 달린 일이다. 도혜를 보 고도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느냐?”

마음속에서 뭔가가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혜 스님만이 아니라 한빈 거사와도 만날 수 없다니………. 이별이라니……………… “이후의 모든 일은 너에게 맡긴다. 그리고 너와 같이 있는 분 들께도 내가 말한 것을 꼭 말씀드려라. 특히 신부님의 의견을 들 어라. 그분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

한빈 거사는 현암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절대 순리를 잊지 마라.”

현암은 대답 대신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한빈 거사 는 그러한 현암에게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반대편의 어두운 숲 속으로 사라져갔다. 현암은 움직일 생각도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삼킬 따름이었다.

오열하는 현암의 어깨 너머로 별똥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그 으며 떨어졌다.

(혼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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