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2권 15화 – 때는 임박하도다 5 : 혼란
혼란
아우구스티노 수사만이 아니라 백호의 얼굴조차 하얗게 변했 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설레설 레젓다가 말문을 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오오. 어떻게 그런 오해를!”
“오해가 아닙니다. 설명해 볼까요? 우연이 겹쳐도 너무나 겹 칩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죠. 왜 하필 그때 어새신이 백호 씨 를 노린 직후, 우리가 감시하는 중에 수사님이 백호 씨의 아파트 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그렇게 소중하다 는 점토판을 지닌 채로 말이지요. 그렇게 귀중한 물건이라면 응 당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고 다른 일을 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왜 하필 마녀 협회와 성당 기사단의 일원이 그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하지만 그건 우연히 ……………..”
백호는 눈을 크게 뜨고 현암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현암은 빙 긋 웃어 보인 다음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수사님은 백호 씨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고 불쑥 찾아왔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마녀 협회 나성당 기사단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냈을까요? 만약 그들이 수사님이 백호라는 사람을 만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왜 두 패로 나뉘어 이유도 없이 백호 씨를 공 격했을까요? 말이 안 되는 것 같지 않나요?”
“아…….”
“모든 일은 순리대로 풀려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 죠. 아우구스티노 수사님은 가짜이며, 수사님과 싸웠던 둘과 여 기 압둘까지 네 사람은 모두 한패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 호 씨를 암살하려는 검은 편지 결사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거죠. 그렇다면 미리부터 백호 씨 주변을 맴돌았을 테니 우리가 백호 씨를 지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죠? 그래서 수사님과 두 사 람이 싸우는 척하여 우리의 시선을 돌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끌어들이려 했을까요?”
“우리의 신뢰를 얻는 것이 당연히 필요했기 때문이죠, 백호 씨. 수사님의 정말 정체가 성당 기사단이라면 말입니다.’
“무슨 근거로?”
“성당 기사단은 이미 승희에게 『우사경을 빼앗긴 바 있어요. 아마 여기서 승희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겠죠. 그렇다면 우리 를 없애는 것보다는 우리를 잡거나, 혹은 회유해서 사경의 행방을 밝히게 하는 편이 좋겠죠? 일이 잘되면 백호 씨도 없애 고, 그렇지 않더라도 신뢰를 얻어 감쪽같이 끼어들기라도 할 테 니까요.”
그러나 백호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현암 씨가 따라가지 않았으면 일이 잘못되지 않았을 까요?”
“만약 내가 따라가지 않았어도 간단합니다. 그러면 그대로 돌 아와서 셋이 함께 백호 씨에게 덤벼들었을 겁니다. 수사님은 그 다음에 나타나면 그만입니다. 만약 셋이 패해도 수사님은 무슨 핑계를 대어 풀어 주게 할 수 있을 거고, 이긴다 해도 백호 씨를 없앤 다음 우릴 구해 주는 척하고 접근하면 되니까요. 앞뒤를 다 맞춰 둔 완벽한 계획이었지요.”
“놀랍군요. 그걸 어떻게 알았죠?”
백호가 묻자 현암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러나 한 가지 짐작 못한 것이 있지요. 바로 승희가 투시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면서 현암은 옆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는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승희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승희는 조금 전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었답니다. 수사님의 말 이 거짓이라고 알려주었죠.”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고개를 연신 좌우로 흔들면서 놀란 눈으 로 현암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럴 수가. 하지만 아니에요. 난 아닙니다.”
그러자 현암은 여유만만하게 웃으면서 되받았다.
“나도 정말 아닌 줄 알았어요. 처음에는 일이 너무 우연하여 의심했지만, 당신이 쓰는 것 같은 오라의 힘은 신앙심 없이는 발 휘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성당 기사단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죠. 성당 기사단은 변형된 기독교 신앙을 지니고 있 지만 그 근간은 어쨌든 기독교적이니까요. 승희가 손짓해 주지 않았다면 확신하지 못했을 겁니다.”
“오오……. 당신은 참 두뇌회전이 빠르군요. 하지만 틀렸습 니다. 나는 성당 기사단의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나는 교황청 이단심판소에서 왔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완강히 부인하자 현암은 백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까 내가 공사장에 놓고 온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현암은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그들은 올 수가 없어요. 내가 공력을 가해 기절시켜 놓았으니 까. 기다려도 헛수곱니다. 자, 당신이 누구고 정확히 뭘 원하는 지어서 말하시오.”
“아아. 이럴 수가. 어떻게 이렇게…”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다시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현암에게 더듬거리며 서툰 우리말로 말했다.
“그렇다면……”
“순순히 밝히지 않으면 힘을 쓰겠소.”
“당신은 그럼 ・・・・・・ 그렇군, 당신은 나와 적이 되겠다는 거요?”
“원래 적이었잖소?”
현암이 냉정하게 되받아치자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물었다.
“당신은 저 여자의 말을 어떻게 믿소?”
“어떻게 믿느냐? 저 여자는 내 친구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그러자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이오?”
현암은 허 하고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태연히 앉아 있는 승희 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현암은 퍼뜩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왜 승희가 아무 말이 없지? 분명 몇 마디 해야 정상인데.’
현암은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조금 더 자세히 승희를 바라보자 뭔가 이상하다는 의혹이 점점 커졌다. 분명 옷차림도 얼굴도 머리도 체구도 승희임에 틀림없었다. 그 러나 표정이 달라 보였다. 너무나 도도하고 꼿꼿했다.
승희는 저렇게 도도함이 넘치는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하 물며 자신의 제보로 현암이 이런 추리를 해냈다면 분명 몇 마디 공치사라도 했을 것이었다. 그것이 승희답고 자연스러웠다. 그 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뭔지 모를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순간 현암의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압둘에게 생각이 미쳤 다. 조금 전에 겨루어 보았듯 그는 분신을 만들어 사용할 줄 아 는 자였다. 혹시 승희도 그자가 만들어 낸 어떤 허상이 아닐까? 아니다. 승희는 허상 같지는 않았다. 승희는 소파에 앉아 있었 고, 자신도 승희의 안위를 살피느라 건드려 보았다.
승희는 허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승희의 저 분위기는……….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어느 것이 옳을까? 승 희의 말을 믿는다면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가짜고 성당 기사단 소 속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승희가 가짜라면………..?
“승희야?”
현암은 나직한 목소리로 승희를 불렀다. 그 순간 승희의 눈이 번쩍이며 현암 쪽을 향했다. 그 눈빛이 너무도 차가워서 현암은 깜짝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섰다. 놀랍게도 다음 순간 아우구스티노수사가 오라를 발산하며 현암에게 달려들었다.
현암은 박 신부에게서 오라를 자주 보았지만 그에 맞서서 공 력을 발해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발 휘될 경우 그 오라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박 신부의 경우를 보아 대강 알고 있었으므로 현암은 방심하지 않고 칠성(七)의 공력 을 가해서 오른팔로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오라를 막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라는 현암의 공력에 아무런 영 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현암의 팔 속으로 뚫고 들어와서 마치 감 전된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공력은 오라 막을 가격하지 못하고 헛되이 돌았으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것처럼 팔에 극심한 고통이 파고들었다. 현암은 크게 놀라면서 재빨리 뒤로 물러서 오른팔을 오라 속에서 빼냈다. 공력이 가해진 상태에서 오른팔 에 이 정도의 충격을 받는 것은 현암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다음 순간,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나이답지 않게 재빠른 동작 으로 현암에게 몸을 날렸다. 그런데 갑자기 아우구스티노 수사 가컥 하는 비명과 함께 땅에 처박혀 버렸다. 현암이 놀라서 보 니 백호가 압둘의 황금 망치를 들고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내리 친 것이었다.
“백호 씨! 그건 너무 심하…………….”
현암이 채 백호의 행동을 저지하기도 전에 백호는 다시 황금 망치를 휘둘러 승희를 내리치고 있었다.
월향검이 날카롭게 울면서 현암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백호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월향검은 백호의 몸을 정통으로 맞히지 못하고 반질반질 한 금속 표면에 부딪친 것처럼 튕겨서 미끄러져 나갔다. 월향검 이 날아들었는데도 백호는 눈도 돌리지 않고 승희를 향해 망치 를 내리쳤다.
“안돼!”
현암이 외치면서 몸을 날렸지만 때는 늦었다. 그런데 그 순간 현암은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았다. 백호가 휘두른 망치에 맞은 승희의 모습이 그대로 허상처럼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옆방에 서 고통에 가득 찬 비명 소리가 길게 이어지더니 서서히 사그라 져갔다.
백호가 슬쩍 몸을 돌리자 현암은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마루 구석에 처박혔다. 아프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현암은 고개 를 번쩍 들었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 이게 도대체………….”
백호가 황금 망치를 내려놓고 현암을 보고 슬며시 웃어 보였 다. 그 표정이 이상했다. 항상 남자다운 백호의 용모 어딘가에 요염한 여자의 모습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백호의 눈이 번쩍하고 빛나더니 두 눈이 모두 붉은색으로 빛났다.
“어머, 오랜만이네?”
현암의 등골이 써늘해졌다. 그 목소리는 어두운 여자의 음성, 이미 몇 번 퇴마사들과 마주쳤던 악마 블랙 엔젤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