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2권 16화 – 때는 임박하도다 6 : 악마의 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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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2권 16화 – 때는 임박하도다 6 : 악마의 조력

악마의 조력

현암은 블랙 엔젤의 목소리를 확인하자 극도로 긴장된 눈빛을 하며 땅에 떨어진 월향검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도 눈을 똑바로 들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듯한 백호, 아니 블랙 엔젤의 붉은 눈을 지지 않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블랙 엔젤은 현암의 손이 월향검 쪽으로 뻗어 가는 것 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빙긋이 웃었다.

“그걸 집는다고 무슨 수가 생길 것 같아? 흐응, 나에게는 통하 지 않을 텐데.”

그때 현암의 손이 월향검에 닿았다. 현암이 월향검을 손에 쥐 고 공력을 가하는 순간, 빛나는 검기가 서서히 솟아올랐다. 그 러면서 그는 긴장되었을 때만 나오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 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블랙 엔젤은 재미있다는 듯, 날카롭지만 그다지 크지는 않은 목소리로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둘 다 다치잖아.”

현암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영광이군. 나 같은 보통 사람이 대악마인 너를 다치게라도 할 수 있으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이다.”

블랙 엔젤이 현암을 향해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둘이 다친다는 건 다른 의미야 나 말고, 여기 백호라는 친구 가 다치는건데?”

“한번 해볼까? 네가 정말 멀쩡할지?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어머머? 오해하고 있네? 너는 절대 죽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너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동정하는 건가?”

“천만에. 바라는 게 있거든.”

“네가 바라는 게 뭔지 몰라도 너와 타협할 생각은 없다.”

블랙 엔젤은 조금 전과 같이 깔깔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악 마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퇴마사 이, 현, 암. 상당히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자기가 낸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 알지? 그 똑똑함이 오히려 화근이 될 수 있다는 건 왜 모르지? 그냥 잠자코 있는 게 낫다는 걸 정말 모르겠어?”

현암은 아무 말 않고 공력을 집중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월향검은 길게 검기를 뿜어냈고, 왼손에서는 태극기공 ‘탄’ 자 결의 구체가 번쩍거리는 빛을 내며 맺혀 갔다. 그러나 블랙 엔젤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압둘의 것이었던 황금망치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쓰러져 있는 아우구스티노 수 사의 머리 쪽을 겨냥했다.

“내 말을 안 듣고 정말 해볼 생각이면 해봐. 이게 떨어지면 이 늙은이의 머리는 어떻게 될까?”

하는 수 없이 현암은 입술을 깨물고 공력을 가하는 것을 중단 했다. 그러나 ‘탄’ 자 결의 구체와 월향검에 가해졌던 검기는 그 대로 유지했다.

블랙 엔젤이 재미있다는 듯 현암에게 말했다.

“자, 잘 들어. 너 지금 승희라는 그 여자가 어디 갔는지 궁금하 지? 걱정할 거 없어. 무사하니까. 그 여자는 압둘의 분신술에 대 처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일단 밖으로 뛰쳐나갔지. 널 찾으려 고.”

“그럼 어디 갔지?”

“어디 가긴 밖에서 헤매고 있을 테니 염려 마.”

“그럼 여기 있던 승희는?”

“그건 허상이지. 압둘이 만든 허상.”

“말도 안 돼. 거짓말!”

순간 현암의 눈이 번쩍 빛났으나 블랙 엔젤은 태연히 지껄였다. 

“거짓말 아니야. 설명할게.”

블랙 엔젤이 팔을 한 번 젓자 신기하게도 현암의 눈앞에 아까 일어났던 광경이 생생하게 되풀이되어 나타났다.

승희는 백호의 집에 들어서서 잠시 백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투시력으로 베란다에 압둘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래서 재빨리 현암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순간 압둘은 거실 창문 을 통과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허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승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혼비백산했다. 곧이어 승희는 염동력을 압둘의 허상에게 집중했지만 허상은 실제가 아니니 염동력 또한 전혀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승희는 대단히 용감하게 그 허상에 맞서 한참 동안을 싸웠다. 그 틈을 타 베란다에 있던 압둘이 살며시 거실 창문을 통해 황금망치를 던져 백호를 쓰러뜨렸다.

승희는 백호가 맞는 광경은 보지 못했지만 어느 틈엔가 백호 가 쓰러진 것을 본 후에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염동력으로 거 실의 자잘한 물건들을 허공으로 솟구쳐 올리고, 재빨리 소파 테이블을 뒤엎어 압둘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한 뒤 밖으로 빠져나갔다.

허상을 거두고 거실로 들어선 압둘은 승희를 따라갈까 생각하 는 듯했지만 결국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일단 백호를 처리 하려는 듯 압둘은 문을 잠그고 백호에게 다가갔다.

그때 현암이 월향검으로 현관문 손잡이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잠시 망설이던 압둘이 급히 베란다 쪽으로 몸을 날리자마자 거 실 소파에 승희의 모습이 서서히 생겨났다.

그 부분에서 블랙 엔젤이 설명을 덧붙였다.

“꽤 똑똑한 친구야. 전화하는 것과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걸 듣고 승희가 다른 사람을 찾아 나갔다는 걸 안 거야. 그러다가 네가 오니까 너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허상을 만든 거지. 알아듣 겠어? 원래대로라면 너는 결정적인 순간에 승희 모습을 한 허상 에게 한 방 맞거나 기겁을 했어야 했어. 어때?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하지만…….”

현암이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허상이라면 손으로 만져지지 않을 텐데, 아까 승희를 부축하 면서 나는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어. 그 이유는 뭐 지?”

블랙 엔젤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당연히 그랬지. 내가 힘을 약간 썼거든.”

“그렇다면 내가 왜 고마워해야 한다는 거지? 네가 손을 안 썼으면 내가 허상이란 걸 금방 확인했을 테고, 나는 충분히 압둘을 물리칠 수 있었을 거야.”

현암의 말에 블랙 엔젤이 의외의 말을 했다.

“설령 허상이란 걸 알았다 해도, 네가 승희에게 주먹질이나 칼 질을 할 수 있겠어? 또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건 허상 인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이 바보야, 만약 압둘이 승희를 인질로 잡았으면 어떻게 할 거야? 아무리 허상인 것 같다고는 해도, 승희가 잡혀 있으면 네 가 항복 안 하고 배겼을 거 같아?”

그러고 보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리 허상인 것 같아 보 여도 압둘의 분신술이 워낙 대단하니, 승희가 고통을 호소하며 현암의 눈앞에서 애원을 했다면 현암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 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현암은 물러서지 않고 물 었다.

“하지만 그냥 뒀으면 내가 압둘을 잡아 묶었을 때 승희의 허상 은 없어졌을 텐데?”

“압둘이 허상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다면 너와 싸울 때 왜 이용하지 않았겠어? 이 바보야, 내가 허상에 무게를 주었기 때문에 압둘이 조종하지 못한 거라고.”

문득 현암은 할 말이 없어졌다.

“흠…………… 좌우간 난 믿을 수 없다. 게다가 네 도움 같은 건 받 고 싶지도 않고.”

“압둘은 위험한 놈이야. 묶어 둔다고 안심할 수 있는 놈이 아 니지. 분신술을 쓰는 놈을 묶어 둔다고 할 짓을 못하겠어? 그래 서 내가 없애 버린 거야.”

“없애? 언제!”

“놈의 허상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없앨 수 없지만 나는 달라. 그리고 놈의 허상을 칠 수 있으면 그건 압둘이란 놈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거든. 방금 내가 망치를 쳐서 부숴 놓은 것은 허상이지 만 실제로는 그 압둘이란 놈을 부숴 버린 것이기도 해. 의심나면 옆방에 가 보라구. 놈이 박살 나 있을 테니까.”

현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승희의 허상이 부서질 때 옆방에 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고, 그 방에는 아까 결박된 압둘이 있었으니 블랙 엔젤의 말은 사실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 을까?

“사람을 그토록 함부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나?”

“어머? 난 사람 함부로 죽이는 악마 아니었었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야?”

그 말에 현암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압둘이 아무리 적이었을지언정 블랙 엔젤의 태연한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만해. 됐다.”

허나 현암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블랙 엔젤은 계속 지껄여댔다. 

“됐다구? 하!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어? 내가 왜 이렇게 번거 로운 일을 꾸몄는지 알기나 해?”

현암은 또 말문이 막혔다. 사실 블랙 엔젤이 현암을 도우려면, 그리고 어차피 압둘을 해치울 것이었다면 이렇듯 복잡하게 일을 만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런데 왜…………?

블랙 엔젤은 마치 학생을 타이르는 여선생님처럼, 혹은 철없 는 여자아이들처럼 복잡한 감정이 섞인 투로 현암에게 말했다. 현암은 짜증이 다 날 지경이었다.

“넌 그럴듯하게 추리를 한다고 했겠지만 잘못된 점이 많아. 아 까 네 추리도 멋지긴 했어. 내가 한마디 한 걸로 그렇게 길고 긴 이야기를 맞춰 나가다니. 이참에 소설가 되는 건 어때? 호호호.” 

현암이 무표정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블랙 엔젤이 말 했다.

“너는 너희 편이라면 너 자신보다 더 믿는 나쁜 버릇이 있지. 언젠가는 그것 때문에 크게 당할 거야. 그래서 나는 네 그 잘못 된 버릇을 조금 고쳐 주려고 한 것뿐이야. 알아들어?”

그 순간 현암은 벼락같이 손을 뻗어 블랙 엔젤이 아우구스티 노수사의 머리를 겨누고 있던 황금 망치를 쳐 냈다. 그러나 블랙 엔젤은 당황하지도 않고 웃고만 있었다.

현암은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앞을 막아서며 다시 ‘탄’ 자 결의 구체와 월향검에 공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좌우간 지겨운 시간이었다. 이젠 죽을 준비나 해라.”

그러자 블랙 엔젤이 짐짓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승희는 어쩌고?”

“난 속지 않는다. 승희는 네가 건드릴 수 없는 존재야.”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승희는 아바타라였기 때문에 보통의 악 마들이 침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현암은 알고 있었다.

현암의 말에 블랙 엔젤은 다소 교태로운 태도로 눈을 크게 뜨 고 현암을 바라보았다. 백호의 몸을 빌리고 있었기 때문에 백호 의 얼굴이었지만, 지금 그 얼굴은 어떤 기운의 영향을 받았는지 정말 여자처럼 보였다.

“진짜로 네가 쏜다고 해 놓고 나를 맞히지 못하면 어떻게 하려 고? 나는 빠져나가면 그만이고 맞는다 해도 큰 탈 없어. 하지만 백호는 꽤 곤란한 상태가 될 텐데? 이봐. 방금 네 적 해친 걸 가 지도고 나를 나무란 주제에 네 친구를 태연히 없애? 그럴 수 있 는 거야? 그게 네가 말한 정의라는 거고, 네가 걸어온 생명을 존 중한다는 길이었어?”

그 말에 현암은 잠시 더 생각해 보고는 이윽고 한숨을 쉬면서 월향검과 ‘탄’ 자결 구체에 공력을 가하던 것을 중지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커다란 ‘탄’ 자 결 구체와 월향검에 들어 있던 검기는 남겨 둔 상태였다. 블랙 엔젤이 다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안심해 긴장하지 말라니깐.”

“하지만.”

현암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서툰 짓은 하지 마! 더 이상 누구에게라도 피해를 준다면 어 떻게 되건 가리지 않겠다. 솔직히 내가 전력을 다한다면 너도 무 사하다고 볼 수는 없을 거다. 이건 자만이 아니야.”

블랙 엔젤은 현암의 말을 듣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 좋아. 어쨌든 내 얘길 좀 들어 보라구. 너한테도 나쁜 일 아냐. 너 악마인 내가 왜 너희를 도우려는지 궁금하지, 안 그 래?”

현암은 대답하지 않으려 했으나 금세 마음을 바꿔 살짝 고개 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를 도왔어. 물론 너희를 위한다거나 너희 가 좋아서 그런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어. 악마들은 원래 솔직 한 존재거든. 하지만 나는 미친 신의 분노에서 이 세상을 지키고 싶어. 이 세상은 참 좋은 곳이잖아? 이렇듯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고,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이곳이 왜 사라져야 되고, 왜 없어져야 되는 건지, 나는 그게 안타깝거든. 그런 면에서 너희와 의견을 같이하는 것이고. 그래서 너희를 돕기로 했어.”

“네 도움 같은 건 필요 없다!”

“네가 필요 없다고 할지 몰라도 난 도울 거야. 내 마음이거든. 넌 내가 누군지 자꾸 잊어버리니? 난 뭐든 멋대로 해. 악마잖아.” 

현암은 하도 기가 막혀 자신도 모르게 허 하면서 헛웃음을 지 었다. 그러자 블랙 엔젤이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어때, 네 선입관과는 이미지가 좀 달라지지 않아?” 현암은 얼른 표정을 고쳐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네 속셈은 뭐지? 무슨 꿍꿍이로 그러는건가? 응?”

블랙 엔젤 역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리고 난 너 희의 그런 행동에 동조하고 싶어. 너희는 말세가 오는 것을 물 론 알지? 종말의 시간이 멀지 않다는 것도 너희는 그 종말이 다 가오지 않도록, 아니, 그것을 연기하기 위해서 목숨 걸고 이렇게 고생하는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너는?”

“간단해. 나도 인간의 종말을 원치 않고, 인간의 종말이 이루 어지는 것을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을 마음은 없어. 그런 면에서 너희와 나는 길이 같은 거야.”

현암은 즉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절대로 같은 길은 아냐!”

“일단 네 속마음이 어떤지는 잘 알아. 아주 잘 알고 있지. 악마 따위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하고 싶겠지? 하지만 쉽진 않잖아? 이번만해도 너는 벌써 위험할 뻔했어. 그리고 너희 상대는 우리 같은 정직한 악마들만이 아니라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라 는 것을 명심해. 그 미친 신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섬기는, 바보 같지만 교활한 그런 인간들 말이야. 바보 같은 아집은 의외로 강 한 힘을 낼 수 있거든. 더군다나 너희는 인간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잖아? 같은 인간이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너희 힘만으로는 어려울걸. 그렇지 않아?”

현암이 무어라고 금방 대꾸하지 못하자 백호의 몸을 빌린 블 랙 엔젤이 황금 망치와 넘어져 기절해 있는 아우구스티노 수사 의 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현암이 눈을 부라리자 블랙 엔젤은 가볍게 한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이봐, 내가 이 작자를 정말 해치려면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수단을 쓰겠어? 벌써 가루를 냈을 거야.”

현암은 잠시 블랙 엔젤의 말을 가늠해 보았다. 어차피 블랙 엔 젤이 수사를 해치려 한다면 현암으로서도 막을 자신이 없었다. 블랙 엔젤이 지금 이렇게 수작을 부리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 이유라도 들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좋다. 좌우간 아까 이야기한 대로다. 네가 누구든 건드리면 나는 죽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해 싸울 테니까!”

“너나 승희는 안 되겠지만……………. 이 늙은이도?”

“그래! 그리고 네가 몸을 훔친 백호도!”

“원참.”

블랙 엔젤이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자 현암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네가 조금이라도 손을 쓴다면……………. 인질을 잡아도 소용없을 거다. 나는 이미 결심했으니까.”

“알았어, 고집불통.”

블랙 엔젤은 망치와 수사의 몸을 양손에 하나씩 아주 가볍게 집어 들더니 현암에게 말했다.

“자, 그러면 이쪽으로 와 보라구. 내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지.”

현암은 블랙 엔젤의 손에 들린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몸을 보 면서 바싹 긴장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툰 짓일랑 하지 마!”

블랙 엔젤은 현암이 긴장하든 말든 조금도 개의치 않고 아우 구스티노 수사의 몸을 들고는 압둘이 죽어 있을 옆방으로 옮겨 갔다. 현암도 걱정이 되어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 다.

그 방으로 들어선 현암은 눈살을 찌푸렸다. 압둘이 꽁꽁 묶인 채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 몸은 꼭 차에 치인 것같이 엉망진창이었다. 망치로 한 방 맞았는데 이 정도로 박살이 나 버 릴 줄이야. 하지만 짐작과 달리 압둘은 아직 죽지 않은 듯 가냘 프게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현암은 압둘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자 놀라면서도, 한편으 로는 다행이라는 마음에 압둘에게 응급조치를 할 요량으로 손을 뻗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간직하고 있던 검기와 ‘탄’ 자 결의 공력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막 압둘 쪽으로 손을 뻗는 순간, 현암은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감돌면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기절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신은 말짱했으나 마치 뭔가에 꽁꽁 묶인 것처럼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현암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무심코 공력을 거둔 것이 이런 결 과를 낳을줄은 미처 몰랐다.

아차! 방심했구나!’

현암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블랙 엔젤이 그런 현암을 바라보 며 깔깔깔 웃었다.

내색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 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현암은 손 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공력까지 뭔가에 꽉 막힌 듯 운행되 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방심한 아주 짧은 사이에 블랙 엔젤이 자신에게 뭔가 술수를 부린 게 분명했다.

현암은 입을 벌려 보았다. 신기하게도 말은 제대로 되어 나왔다.

“도대체 어쩔 셈이지?”

블랙 엔젤은 현암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말은 할 수 있군. 재주 좋은데. 하지만 움직이진 못할걸?”

블랙 엔젤은 현암에게 윙크를 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겁낼 것은 없어. 아까도 얘기했지? 널 어쩌진 않을 거라고. 아 까 약속도 했잖아. 너도, 늙은이도, 백호도, 승희도 안 건드린다 고 말야. 하지만 이놈은 약속에 들어 있지 않았어.”

“나, 나는!”

현암은 압둘이 이미 죽은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때는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블랙 엔젤은 현암이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난 너에게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자, 이제 잘 봐.”

블랙 엔젤은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방 저쪽에다 내려놓고 곡예 라도 하듯 황금 망치를 번쩍 들어 보였다가 씩 웃었다. 다음 순 간 육중한 황금 망치가 처참한 형상으로 넘어져 있는 압둘의 가 슴팍 위로 뚝 떨어졌다. 우지끈하면서 뭔가 꺾이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압둘의 입에서 피가 안개처럼 확 뿜어져 나왔다.

참혹한 광경에 현암은 눈살을 찌푸리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긴장한 상태라 소리는 지르지 않고 참아 넘길 수 있었지만 부르르 치를 한차례 떨고 난 후 현암은 예의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뭘・・・・・・ 하는 거지?”

블랙 엔젤은 현암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압둘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압둘의 입에서 컥 하는 소리와 함께 피 가솟구쳐 나오고 더듬더듬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뭐 하는 거냐니까?”

끔찍한 광경에 현암이 눈살을 더욱 찌푸리며 조금 큰 목소리 로 말하자 블랙 엔젤이 대꾸했다.

“재밌는 걸 알려 준다니까 그러네. 네가 알고 싶은 것을 다 알 수 있게 해 주지.”

블랙 엔젤이 다시 압둘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나 압 둘에게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암에게 들려주는 듯한 음성이 었다.

“너는 성당 기사단 소속이라고 했지? 성당 기사단이 왜 저 늙 은이를 쫓아다니는 거지? 뭘 바라는 거야?”

그러나 압둘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킬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블랙 엔젤은 다시 서슴없이 황금 망치를 들어 장난이라도 하 듯 압둘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가벼워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힘이었다. 망치가 떨어지는 순간 어깨가 으깨어지면서 압둘의 팔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 방 저편으로 튀어 올라 살아 있는 것처럼 잠시 펄떡거리며 움직였다.

“으아악!”

압둘의 비명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가까스로 참고 있던 현암 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블랙 엔젤에게 소리쳤다.

“그만둬! 그러다 죽겠어!”

현암의 외침에 블랙 엔젤은 현암을 돌아보며 끔찍한 짓을 하 고 있다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 밝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죽어? 절대 안 죽어! 내가 누군데? 내가 이자의 영혼을 잡고 있는 동안 이자는 절대 죽을 수 없어. 온몸을 가루로 만들어도 죽지 않아. 그러니 염려 말라구.”

기가 막혀 현암이 대꾸조차 못하자 블랙 엔젤은 압둘에게 물었다.

“뭘 원하는 거지? 저 늙은이에게서 바라는 게 무엇이기에 여 기까지 따라온 거야? 너희가 꾸미는 일이 대체 뭐지?”

압둘은 극심한 고통 때문에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그 러나 블랙 엔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무언가 술수를 부리고 있는 탓에 죽지 않을뿐더러 기절할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기절 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현암은 마음속 깊이 솟구치는 분노와 역겨움과 안타까움에 미칠 지경이었지만 특유의 필사적인 의지로 얼굴빛 하나 찌푸리지 않고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압둘은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 때문에 자백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듯 보였다. 압둘은 분신술을 그토록 원활하게 쓸 수 있 는 자이니만큼 정신력이나 영력도 강해 블랙 엔젤의 주술에 대 항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블랙 엔젤 또한 대악마이니만큼 압둘의 정신력이 대악마가 직접 가하는 압박을 이겨 낼 수 있으 리라곤 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극심한 고통까지 가하고 있으니.

현암은 저기 누워 있는 것이 압둘이 아니라 현암 자신이라 할 지라도 대답하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 엔젤이 황금망치를 들어 올리자 압둘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나 극심한 고통 때문에 목소리가 떨 려서 또렷하지 않는 영어였지만, 현암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 다.

“프리 ・・・・・・ 프리 ・・・・・・ 프리메이슨의 형제가 원하는 것은……………원하는 것은…………….”

“원하는 게 뭐라고?!”

블랙 엔젤은 박살 난 압둘의 왼쪽 어깨를 망치로 툭툭 건드렸 다. 그럴 때마다 압둘의 몸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부르르 떨었 고, 현암은 잇몸에서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말세의 예언 …… 종말의 때에 대한 예언을 …………… 예언 예언을………….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석 석을…………….”

“아, 예언석, 그런 것도 있었나? 저 늙은이에게 있다는 말이지?”

블랙 엔젤이 대뜸 기절해 쓰러져 있는 아우구스티노 수사 쪽 으로 손을 한 번 내뻗자 그의 품 안에서 작은 가죽 가방 같은 것 이 저절로 쑥 빠져나오더니 허공으로 날아 블랙 엔젤의 손에 잡 혔다.

“이것 말이군. 그런데 말세의 예언을 찾아 뭘 하려는 거지? 그 리고 너는 성당 기사단 사람이랬잖아? 그런데 왜 프리메이슨 이 야기를 하는 거지?”

“성당・・・・・・ 성당 기사단은 프리 …………… 프리메이슨의 지부.” 

“아, 그래? 그러면 성당 기사단보다도 더 상위에 있는 세력이 프리메이슨이라는 건가? 그런데 마녀 협회는 왜 그러지? 너희는 그래도 기독교인지 뭔지 더러운 신앙을 믿는 놈들이고, 마녀 협 회는 나를 따르는 착한 여자들인데 왜 둘이 손을 잡았느냐 말이 야.”

“그건・・・・・・ 그건…….”

압둘이 주저하면서 뭐라고 말을 하지 않자 블랙 엔젤이 큰 소 리로 외치면서 이번에는 압둘의 오른 손가락을 망치로 쾅 찧으며 몇 번 비벼댔다. 망치로 짓찧어진 손가락이 납작하게 뭉개지면서 완전히 바스러졌다.

“으악!”

압둘의 비명이 또 한 번 방 안을 울리자 현암은 그 광경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러면서도 현암은 공 력을 운용해 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 소리를 지 르거나 안달을 해 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어서 공력을 되찾아 악마에게 대항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잠시만…………! 잠시만 참는 거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공력을 모아야 한다. 아무리 대악마라 해도 내 공력은 도혜 선사께서 물 려주신 인간 최고의 힘이다. 절대 이겨 내지 못할 리 없다. 그러 기 위해서는 마음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현암은 전심전력으로 공력을 한데 모아 아래쪽 기해혈 쪽으로 끌어내리려 안간힘을 썼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자 조금씩 마 음이 편안해졌다.

한편, 블랙 엔젤은 현암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고 압둘에게 물었다.

“이봐! 큰 소리로 이야기하란 말이야! 나는 물론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러니 저기 저 친구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얘길 하 란 말야. 알아듣겠어? 알아듣겠지?!”

다시 쿵 소리가 났다. 블랙 엔젤이 압둘의 손가락을 또 하나 부스러뜨리는 것 같았다. 현암은 압둘의 비명을 듣고 자신도 모 르게 눈을 떴다. 블랙 엔젤이 압둘의 이마를 더욱더 거세게 눌러 대고 있었다. 압둘의 머리는 너무나도 맹렬한 힘으로 짓눌려 금 방이라도 으깨어져 버릴 것 같았다.

현암은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 다. 이윽고 압둘은 신음 소리와 함께 조금씩, 조금씩 힘겹게 말 을 내뱉었다.

“나도…………… 나도…………… 정확히는 모르…… 모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뭐라고? 큰 소리로!”

“마녀, 마녀 협회는 라미드 우프닉스를 잡아……………. 마녀 협회 의 바이올렛이 …..”

순간 공력을 모으던 현암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바이올렛, 바이올렛이라면……………?

그러나 현암은 얼른 그 상념을 버리고 다시 한번 있는 힘을 다 해 공력을 가했다. 그런 현암의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이에 현암은 잠시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 천정개혈대법의 다음 단계……칠 단계를 해보는 것이………….”

천정개혈대법의 칠 단계는 공력을 모두 분산시켜 온몸에 퍼뜨린 다음 일시에 그 힘을 모아들여 제방을 무너뜨리는 것 같은 기세로 익히는 방법이었다. 혹시 지금처럼 공력이 사방으로 퍼져 분산된 상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암은 조금 더 고민해 보고는 그것을 포기했다.

화명 노인이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화씨 가문에 전해진 천정개혈대법 구 단계 중 실제로 인간이 이루었던 것은 육 단계뿐이었다. 칠 단계에서 구 단계까지는 이론상으로만 전 해질 뿐, 그것을 익힌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육 단계 이후의 대 법은 임상적인 실험이 따르지 않은 이론일 뿐이었다. 어떤 부작 용이 나타날지 모르고, 실제로 그것을 익히면 위험할 수도 있다 는 의견이 더해져 있었다.

그런 위험 때문에 현암이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위험한 것은 매일반이니 모험을 해 볼 수도 있지만………… 공력 이 부족하다.’

화중명 노인 개인의 의견에 따르면, 천정개혈대법 칠 단계 이 상을 익히기 위해서는 백 년이 훨씬 넘는 정도의 내공력이 필요 했다. 현암은 자신의 내공력이 예전과 마찬가지로 칠십 년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도혜 선사에게서 받은 내공력이 칠십 년 수위 이고, 그 이후 자신은 그다지 열심히 수련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기껏해야 오 년 정도 공력이 늘었으리라고 본 것이다.

어느 정도 공력이 커진 다음부터는 참선이나 운기 등의 수련 보다 실전을 거치는 편이 공력 상승이 빠르다는 것을 현암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천정개혈대법의 칠 단계를 실전할 수 있는 내공 수위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좌우간 화 노인의 편지에 의하면, 공력이 있더라도 백 년의 내 공력을 일거에 조작하는 것은 커다란 폭탄을 망치로 두드리는 것과 비슷한 위험성을 지녔다. 그리고 칠 단계나 팔 단계의 대법 을 익히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구 단계의 천정개혈대법을 통 하게 하는 것은 성공 확률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일이니 절대로 하 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현암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암은 약간이라도 성공 확률이 있어야 모험을 걸어도 걸지, 지금처럼 애당초 성공 확률이 없을 때는 모험을 거는 성격이 아니었다. 단지 이후의 천 정개혈대법 단계는 수십 년 후에나 익힐 수 있겠구나 하는 짐작 을 했을 뿐.

다만 상황이 급해지고 마음이 조금 심란해지자 현암에게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쳤다.

‘가만, 블랙 엔젤은 나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었는데, 어째서 내가 말을 할 수 있지? 그걸 보면 블랙 엔젤의 힘이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는 뜻인데.’

그 순간 현암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현암의 공력은 천정개혈대법 육 단계를 거치기는 했지만 아직 상단전까지 유통되지 않았다. 즉 현암의 머리 부분으로는 공력이 소통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마비된 것은 현암의 공력 이 유통되는 부분에 한정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연일까? 더 구나 블랙 엔젤은 현암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의아 해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따지면 ………………

‘지금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힘은 나 스스로의 공력은 아 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악마의 힘은 스스로의 마음속에 있다 고 박 신부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현암은 자다가 가위에 눌린 것과 흡사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정신은 멀쩡했지만 말이다. 만약 블랙 엔젤이 현암 스스로의 마음에 작 용해 공력을 소통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가위 눌림에서 깨어나는 식으로 해 보면………? 현암은 세심하게 몸의 상태를 살폈다. 공력이 정말 온몸에 분 산되어 있고, 가위 눌림처럼 자신의 신경 마비된 상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블랙 엔젤의 질문과 압둘의 대답은 계속되 었다.

“라미드우프닉스라면 신의 분노에서 세상을 정당화하는 자들 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그런 자를 왜 마녀 협회가 잡아갔지?”

“그・・・・・・ 그 사람은 성당 기사단의 희망. 성당 기사단의 임무는 라미드 우프닉스를 보호하는 것・・・・・・ . 그런데 마녀 협회 ……………바이올렛………… 바이올렛이 그를…………… 그를 데려가서 더 이상 그 들의 요구대로…………… 요구대로………….”

“요구대로 뭐지?”

“메소・・・・・・ 메소포타미아의 석판, 그것을………… 그것을 넘겨주는 것・・・・・・ .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라미드 우프닉스를 해친다고, 흑 마법의 의식으로 해치운다고.”

“라미드 우프닉스는 죽어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 아냐? 그런데 왜 신경을 쓰는 거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 사람을 찾아서 다시 보호하면 될 거 아냐? 안 그래?”

“그건 ・・・・・・ 그건 정말로 나도 모르겠……………”

“흠, 그렇군.”

거기까지 말하고 블랙 엔젤이 현암 쪽을 휙 돌아보았다. 

“이봐, 미스터 현암! 어때, 재미있지 않아? 마녀 협회가 뭔가 를 꾸미고 있군. 인질을 잡아 성당 기사단을 이용하여 석판을 얻 으려 한다는데? 그런데 성당 기사단 위에 있는 프리메이슨도 이 석판을 원하고, 마녀 협회의 바이올렛이란 여자도 이걸 원하는 것 같군. 여기 뭐가 있기에 그럴까? 궁금하지 않아?”

블랙 엔젤은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품에서 빼앗은 가죽 가방을 현암 쪽으로 슬쩍 집어 던졌다. 그러자 그 가방은 마치 살아 있는 듯이 현암의 품속으로 쑥 들어왔다. 현암은 받고 싶지 않았지 만 거부할 힘조차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블랙 엔젤은 생긋 웃으면서 피 묻은 황금망치 를 집어 들고 이번에는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로 다가갔다.

“이봐, 잘 들었어? 어때, 그렇다면 이 늙은이도 가만두면 안 되겠지?”

현암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비록 압둘과 블랙 엔젤의 이야 기를 듣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한다든지 해서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다만 단순히 녹음기처럼 그 내용을 듣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었을 뿐, 현암의 모든 정신은 공력을 제어해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만드는 데만 몰두하고 있 었다.

지금 현암은 천정개혈대법의 칠 단계를 시도하고 있었다. 물 론 크나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될 것 같았으나 블랙 엔젤의 이야기가 끝난 것 같자 현암은 조금 다급해졌다.

‘공력을 풀어도 다시 공력을 모으고 발휘하려면 시간이 걸린 다! 안 되겠다. 칠 단계를 할 시간이 없어. 그것 말고 일거에 공 력을 발휘하려면…. 부동심결밖에는 없다!’

현암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수법은 공력을 한곳에 모아 힘을 내는 반면, 부동심결은 공력을 온몸에 분산시켜 발출함으로써 밝은 빛을 발하는 수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력이 분산된 상태라 해도 감각만 돌아오면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듯싶었다. 더구나 외공과 물리력 일 변도인 현암의 기술 중 백호의 몸을 다치지 않게 하고 블랙 엔젤 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법은 그것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시간이 부족했다. 블랙 엔젤이 황금 망치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자 현암은 그때까지 하던 정신 집중도 중단 하고 급히 소리쳤다. 조금 끌어 올려지던 공력이 갈피를 잃으며 몸 안에서 서로 충돌하는 바람에 격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지 금은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건 안돼!”

블랙 엔젤이 간사하게 웃으면서 되받았다.

“왜? 압둘은 죽어도 되고, 이 친구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건가? 하긴 압둘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지. 그런데 이 늙은이를 살려 두면 너한테 굉장히 안 좋을 텐데?”

“아까 약속하지 않았던가?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고.”

“아까 분명히 약속은 했지. 이 늙은이나 누구라도 해치면 너는 죽을 때까지 싸운다며? 그럼 싸워 봐. 입으로 종알거려서 날 막 을 수 있다면 내가 칭찬해 주지.”

현암은 말문이 막혔다. 블랙 엔젤이 다시 떠들어 댔다.

“이봐, 널 위해서란 말야. 메소포타미아의 석판은 네가 빼앗아 간 셈이 되었어. 그리고 너는 이 사람에게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 고 누명을 씌웠잖아. 지금 이 늙은이를 없애지 않으면 나중에 두 고두고 후회할 텐데 그래도 괜찮아?”

현암은 고통을 참으며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고통이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고 소리를 질러 어떻게든 시간을 끌면서 마 구잡이로 공력을 몰아붙였다.

“절대 사람을 해치지 마라!! 내가 막겠어!”

다행히 블랙 엔젤은 재잘거리며 한참이나 떠들어 주었다. 

“막아? 네가 뭘 막는다는 거지? 손끝 하나 꼼짝 못하고 입만 나불거리면서?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 

“그자를 죽여서 네가 얻는 게 도대체 뭐지, 응?”

“이봐. 이건 말야, 내 말대로 다 널 위한 거야. 너, 그리고 네 동료들은 마음이 모질지 못하니 그게 탈이야. 예를 들면 아까 저 친구가 가르쳐 준 것 같은 정보를 네가 얻으려면 적어도 열 번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스무 번은 싸움을 하고, 서른 번은 번민해 서 서너 달 동안 온 곳을 뒤져야만 할 거야. 여기서 나처럼 간단 하게 너의 적수에게 약간의 고통만 가하면 되는데도 말야. 이렇 게 모든 걸 쉽게 풀 수 있는 길을 놔두고 너희는 왜 일을 어렵게 만들지? 그러니 잔소리하지 마!”

대뜸 블랙 엔젤은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향해 황금 망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현암은 다급한 김에 아직 정신적인 집중도가 떨어지는데도 아 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부동심결의 수법을 발휘하려 했다. 그러 나 부동심결의 심법이 도무지 먹히지 않았다. 원래 부동심결이 라는 술법 자체가 강력한 내공이나 거의 무아지경에 가까운, 극 도로 강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현암에게는 그렇게 집중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무리를 했기 때문에 고통이 극심했고, 시간을 끌기 위해 말을 하는 만큼 집중력도 덩달아 떨어진 탓이었다.

하다못해 공력의 일부분이라도 모인다면! 주화입마를 각오하 고라도 시도해 보겠는데..

블랙 엔젤의 황금 망치가 막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머리로 떨 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현암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가만! 그러고보니 블랙 엔젤은 모든 내 공력을 흩기는 했지 만 입을 막지는 못했다. 일단 사자후의 술법을 발휘하면 소리를 크게 낼 수는 없어도 어떻게든 공력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입 은 자유로우니까!’

현암은 다급한 나머지 더 이상 고민할 겨를도 없이 사자후의 술법을 발휘해 입으로 냅다 큰 소리를 지르려 했다. 예상과는 달 리, 흩어진 공력은 그리 쉽게 모이지 않았다. 오히려 흩어진 공 력이 반탄(彈)되는지 극심한 고통이 물밀듯이 파고들었다.

이상하게도 고통이 더 강하게 느껴지자 마비 상태가 조금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현암은 심한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떨면 서도 두 번, 세 번 사자후의 술법을 발휘하려는 듯 입을 크게 벌 리고 숨을 내뿜으려 했다.

블랙 엔젤은 현암이 컥컥거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잠깐 현 암 쪽을 돌아보았고, 그 덕분에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머리를 내 리치는 것이 잠시 늦추어졌다.

“뭐야? 왜 그래?”

현암은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블랙 엔젤의 눈에 비친 현암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며, 자꾸 꺽 꺽거리며 입을 붕어처럼 벌리고 있었다. 사자후의 수법을 끌어 내려고 애쓰는 것이었지만 겉모습만 보고는 제아무리 블랙 엔젤 이라도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듯했다. 겉으로 보기에 현암이 무 슨 수법을 쓴다기보다는 몸 어딘가가 크게 잘못되어 고통을 호 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나 블랙 엔젤은 대악마답게 냉혹하게 현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수사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네가 어디 잘못되면 안 되지. 가만있어, 이 늙은이만 편하게 해 주고 너도 편하게 해 줄게. 응?”

블랙 엔젤이 황금 망치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짧은 순간이나 마 시간을 번 현암은 비록 엄청난 고통을 느끼긴 했지만 공력을 끌어모아 단전까지 한 줄기 통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순식간에 지나치게 무리한 탓인지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 렸는데도 현암은 깨닫지 못했다. 다만 공력이 단전으로 한 가닥 모여드는 순간, 현암은 때를 놓치지 않고 부동심결의 수법을 발 휘했다.

공력이 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휘한 수법이라 그런지 전신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모든 생기가 빠져나가는 듯이 느껴졌지만 현암은 개의치 않았다.

눈부시게 밝은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현암은 너무나 고통 스럽고 힘이 들어 오랫동안 힘을 발휘하기도 어려웠다. 거의 주 화입마 일보 직전까지 간 상태가 되자 부동심결이 돌연 중단되 었다. 부동심결의 금빛이 가시는 순간 현암은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눈을 크게 떴다.

백호의 몸을 빌린 블랙 엔젤이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내리치지 못하고 저만치 비틀거리며 물러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블 랙 엔젤도 불문(門)의 최상승 심법이라 할 수 있는 부동심결의 빛에 역시 타격을 많이 입은 것 같았다.

블랙 엔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의 빛이 떠올라 있었 다. 그것을 본 현암은 온몸이 으스러질 듯 아팠지만 비틀거리며 블랙 엔젤 쪽으로 달려들어 블랙 엔젤이 들고 있던 황금 망치를 빼앗으면서 그 몸을 어깨로 밀어냈다.

그러자 충격을 입은 탓인지, 아니면 블랙 엔젤이 빠져나갔는지 블랙 엔젤이 지배하고 있던 백호의 몸은 마치 허수아비처럼 저쪽 구석으로 넘어져 처박혀 버렸다.

현암은 황금 망치를 빼앗고 나자 이제야 되었구나 싶어 한숨 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갑자기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후려쳐 왔다.

지금 현암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몸속이 뒤틀려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힘을 피하거나 방어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 다. 현암이 황금 망치를 든 채 앞으로 고꾸라져 몇 바퀴 구르고 나자 현암의 등 뒤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마이 갓!”

현암이 고개를 돌려 보니 아우구스티노 수사였다. 부동심결의 영향 때문에 아우구스티노 수사도 방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 다. 일단 현암으로서는 수사가 정신을 차린 것이 반가웠다. 비록 그에게 한 대를 얻어맞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아까까지의 인자한 할아버지 같던 기색은 간 데 없고,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분노로 가득 차 눈썹과 머리카락을 치켜올 린 무서운 형상이 되어 있었다.

“수, 수사님!”

현암은 넘어진 채 고개를 들어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보았다. 현암은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왜 저토록 화를 내는지, 그리고 자신을 왜 공격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성난 얼굴로 현암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손을 들어 옆에 처참하게 죽어 있는 압둘을 가리켰다. 그것을 보 자 현암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피 묻은 황금 망치가 지 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현암이 압둘을 죽였다고 수사가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현암은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몸 안의 상태가 심각 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현암의 몸 안에는 부동심결을 발휘하느 라 억지로 모였던 공력이 다시 소용돌이치며 온몸을 헤집고 다 녔다. 마치 수천만 개의 바늘이 전신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더구나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뒤에서 가한 그 일격은 가톨릭의 기도력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 안 그래도 흐트러진 현암의 내공 을 더욱더 좋지 않은 상태로 몰고 갔다.

다만 현암은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 변명을 하는 대신 입으로 한 움큼의 선혈을 내뿜었을 뿐이다.

현암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자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곧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만치 백호가 쓰 러져 있는 것을 보며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현암은 내심 블랙 엔젤이 다시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 무슨 짓을 할까 봐 그리로 가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부르짖었으나 이 미 넘어진 상태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다가가 백호를 살펴보니 백호는 넘어져서 눈을 희게 까뒤집은 채 기절해 있었고, 입에서는 한 줄기의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죽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다시 분노를 터뜨렸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분노가 극에 달한 나머지 한국말이나 영 어를 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자신의 모국어로 쉬지 않고 현암 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물론 현암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 었지만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현암이 압둘을 죽이고 백호까지 쓰러지 게 만들었다고 믿는 것이 분명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자기가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처지였다면 블랙 엔젤이 한 짓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말할 기운조차 없으니. 이러다가 수사에게 맞아 죽는 것은 아 닐까?’

답답하다 못해 허망하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어떻게든 흐트러 진 공력을 모아 기운을 차려야만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 뭐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흐트러진 내공은 아우구스티노 수 사의 일격을 받아 더욱더 몸 안을 거세게 소용돌이치고만 있었 다. 자칫하면 금방이라도 주화입마에 빠져 버리게 될 것 같은 상 황이었다.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화난 얼굴로 현암에게 다가왔다. 현암은 뭔가 말하려는 듯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현암의 상태 또한 상당히 좋지 않은 것 을 보고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아마도, 죄를 지 었을지언정 성직자답게 일단 사람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 긴 모양이었다.

그의 손이 현암을 부축이라도 하려는 듯 몸을 건드렸을 때였 다. 뭔가 털썩하면서 현암의 품에서 떨어졌다. 현암은 고개조차 움직일 수 없었으나 무엇이 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아까 블랙 엔젤이 자신에게 넣어 준 석판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 을 다시 집어 올릴 수도, 몸을 일으켜 도망칠 수도 없었다. 현암 은 암담해지는 느낌에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이구! 이거 큰일이다!’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현암의 멱살을 잡고 늘어진 현암의 상 반신을 인정사정없이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은 조금 전보 다 더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까 현암은 아우구스티노 수사 성당 기사단의 일원이라고 매도하면서 그를 적으로 돌리겠다 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정신을 잃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현암이 압둘을 죽이고, 자기편인 백호까지 쓰러뜨린 악당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전까지는 현암이 왜 그렇게 했는 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석판을 보는 순간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모든 것을 나름대로 짐작한 모양이었다. 즉 현암이 석판을 얻기 위해 아우구 스티노 수사를 속이고 압둘을 죽였으며, 같은 편인 백호까지 살 해하려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얼굴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표정 이 역력해 마치 목소리가 들리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 만 현암은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몸이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느닷없이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현암을 왼손만으로 잡은 채 눈 을 감고 성호를 긋더니 라틴어로 짧게 기도를 올렸다. 현암은 라 틴어에 능통하지 못했지만 그 기도가 퍽이나 숙연하여, 어쩌면 저 수사가 자신을 해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부 르르 떨었다.

죽는 것이 두렵다기보다 너무 억울했다. 그러고 보니 혹시 이 모든 것이 블랙 엔젤이 꾸민 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실컷 가 지고 장난치다가 스스로의 손을 놀리지 않고 현암을 해치우겠다 는 음모인지도…………….

현암이 아무 말도 못한 채 고통으로 몸을 떨고 있는 사이, 아 우구스티노 수사의 오른손에는 서서히 오라가 맺혔다. 이어서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손은 금방이라도 현암의 머리를 내리칠 듯 위로 높이 올라갔다.

한순간 현암은 체념할까 하다가 특유의 오기가 뻗쳐 옴을 느꼈다.

‘안 돼!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현암은 이를 꽉 깨물면서 어떻게든 공력을 다시 수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손이 막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현암은 갑자기 온몸에 퍼져 있던 마비 상태가 풀리고 공력이 한 꺼번에 위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공력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너무 갑자기 마비가 풀려 버리자 현암 의 공력은 되레 엄청난 기세로 솟구쳤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현암은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손바닥 이 머리로 떨어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공력을 오른 팔로 몰아가면서 팔을 들어 수사의 손을 막았다. 그 순간 현암은 아차 했다. 몰려간 공력이 너무도 컸다.

‘안돼……………! 이러면 수사님이…………!’

그러나 때는 늦었다. 다음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렸고 아우구 스티노 수사의 몸은 뒤로 몇 미터를 날아가 발코니와 연결되어 있던 창문을 깨뜨리고 베란다에 넘어져 구르고 있었다. 현암의 몸도 같이 튕겼으나 현암은 그냥 넘어지는 정도에 그쳤다.

현암은 이제 막 간신히 공력을 수습한 상태라 힘을 제어하지 못해 모든 공력이 오른팔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 통에 아우구스 티노 수사는 현암을 해치기는커녕 현암의 백 년 공력과 정통으로 부딪쳤고, 반탄되어 오히려 그 자신이 중상을 입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현암의 공력은 또다시 타격을 받고 몸 안에서 충돌하 며 대부분 소멸되었고 현암은 극도로 탈진해 버렸다. 한 가지 다 행스러운 것은 공력이 대부분 바깥으로 쏟아져 나가 현암의 몸 안이 그리 많이 망가지지 않았다는 정도일까?

간신히 눈을 들어 보니 수사의 상태는 짐작보다 훨씬 심각했 다. 수사의 입가에는 피가 흘러나왔고 현암을 내리치려던 오른 손은 서너 곳이나 부러진 듯 덜그럭거리며 기괴하게 휘어져 있 었다. 현암은 암담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도저히・・・・・・ 오해를 풀 길이 없겠구나!’

현암은 급히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상처라도 볼 작정으로 비틀 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현암이 일어나는 것을 본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고통을 무릅쓰고 몸을 굴리듯 해 현암 의 앞을 지나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어떻게나 결사적인 기세였 는지 미처 제지할 겨를도 없었다.

현암은 뒤따라가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너무도 기운 이 없어 털썩 주저앉았다가 급기야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공력 이 흩어졌다가 모인 탓인지 고통은 극심했지만 주화입마까지는 다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다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될지도………….

그러나저러나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해치려 했다는 누명을 벗을 길은 이제 도저히 없을 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암담한 기분이 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현암은 탈진해 누워 있으면서도 이삼십 번 정도 애써 심호흡 을 하자 어느 정도 힘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물론 공력을 전 력으로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몸 을 움직일 정도는 되었다.

현암은 끙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마음 같 아서는 그대로 누운 채 잠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걱정되는 게 너 무도 많았다. 백호는 과연 무사한지, 아우구스티노 수사는 무사 한지, 아우구스티노 수사의 오해를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을지, 그리고 승희는 어디에 있는지 등등.

기를 쓰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현암은 몇 번이나 팔을 꺾으 며 휘청거렸다. 그렇게 현암이 일어나려 애쓰는데, 누군가 등 뒤 에서 현암의 어깨를 잡아 현암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현암은 깜 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백호였다.

현암은 놀랐지만 일단 백호의 얼굴부터 살폈다. 정말로 백호 가 제정신이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블랙 엔젤의 지배하 에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세세히 살펴보니 백호의 얼굴에 떠돌던 여자와 같은 모습은 어느샌가 없어지고,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와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몹시 놀라고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떻게 된 겁니까?”

백호는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는 압둘의 시체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현암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명하자면 너무 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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