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7화 – 두 사람의 기적 2 : 바티칸에서의 싸움
바티칸에서의 싸움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문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저만치 아주 커다란 회색 리무진이 한 대 서 있었는데, 그 앞에서 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둔하고 낮은 펑펑 소 리와 함께 쏘아대고 있었다. 총 같지는 않았는데, 멀리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주변에는 삼사십 명이나 되는 남자와 여자들이 달리고 피 하면서 겨루고 있었고, 또 저쪽에서는 다른 삼사십 명이 왁자하 니 몰려다니면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로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날렵하게 검은 그림자 하나가 휙휙 날아다니고 있었다. 루카 수사가 말한 것처 럼 한쪽은 분명히 세 명 같았지만, 다른 쪽은 열다섯 명이 아니 라 오륙십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많군요.”
루카 수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른 쪽을 가리켰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죠. 저길 봐요.”
그쪽을 보자 가브리엘 수사가 흠칫하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오……………. 하느님………….”
두 패로 갈라져 싸우는 사람들의 가운데에서는 두 사람이 서 로 마주 보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가 운데의 두 사람은 서로 노려보고만 있는 것 같았지만, 그곳에서 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영력을 지닌 가디언들의 눈으로 볼 때 가운데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의 몸에서는 녹색 오라가 끊임없이 발출되고 있었는데, 반대편의 검은 머리 여자에게서는 그와 전혀 상반된, 검은빛이 뿜어져 나와 서로 충돌하여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세라는 것이 워낙 대단하여, 가브리엘 수사 같은 경우는 자신이 그 안에 휘말렸다가는 단 일 초도 버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버릴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자세히 보니 돌로 된 그들 주변의 바닥이 쩍쩍 금이 가면서 부스러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굉장하군요…….”
루카 수사가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덧붙였다.
“그쪽은 금방 승부가 나지 않을 거예요. 우린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합시다.”그러면서 루카 수사는 가브리엘 수사를 잡고 회색 리무진 쪽 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베드로 수사는 반대편의 사람들 쪽으로 나아갔다. 몰려든 사람들 중 삼분의 일가량은 여자였고 삼분의 이가량은 남자들이었는데, 특히 여자들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사 악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눈빛이 흐리멍덩한 것으로 볼 때 아무래도 제정신인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 예 살아 있는 사람인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외에도 몇몇 다른 남자들은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아 뭔가를 불러내는 듯 보였는데, 회교도들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불 러낸 무형의 존재들은 아직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 듯했다. 그들 도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루카 수사는 추측 했다.
리무진 쪽에 버티고 선 남자는 키가 크고 몸이 깡말랐으며 옷 차림이 단정한 노신사였는데, 그는 이상하게 생긴 엽총을 들고 사람들에게 쏘아 대고 있었다. 처음에 가브리엘 수사는 그것을 보고 너무하다고 느껴 그 사람을 저지하려 했다. 눈치를 채고 루 카 수사가 말했다.
“살상용 총이 아닙니다. 잘 봐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사람이 쏘고 있는 것은 살상용 총알이 아닌듯했다. 총알을 맞은 사람들도 피를 뿜거나 죽지 않고 다만 저만치 나가떨어졌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일어났다. 그런데 그 남자 주위로 계속 달려가는 자들은 모두 남자였고, 여자 는 한 명도 없었다.
그 사람의 총은 개조된 듯이 총알이 수없이 많이 나갔는데, 그 나마도 조금 지나니 총알이 떨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가브리엘 수사가 무화 능력을 발휘해 달려가려 하자 루카 수사 가 제지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조종되는 시체들이오. 여자들 쪽을 해결 하는게 더 쉬울겁니다.”
여자들은 아무리 살상용 총알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앞으로 나서고 싶지는 않은 듯 모두 멀찍이 물러서서 남자들을 조종하 고 있는 듯이 보였다. 가브리엘 수사는 무화 능력을 발휘하고, 루카 수사는 소매에서 짤막한 막대기를 두 자루 꺼내 손에 끼운 뒤 여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한편, 베드로 수사는 또 다른 싸움이 한참 벌어지고 있는 곳 으로 달려가다가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덜컥 걸음을 멈추 었다.
“저건…….”
그곳도 상당수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한데 엉켜 싸우고 있었 다. 베드로 수사는 세븐 가디언의 우두머리답게 여자들은 어둠 의 힘을 사용하는 마녀들이며, 남자들은 그 마녀들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냈다. 그런데 그 안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누비고 다니는 자는……………
‘저건 흡혈귀 아닌가? 이런 세상에…………! 아무리 말세라지만 흡혈귀가 바티칸엘 들어오다니!’
분명 마녀들과 남자들은 떼를 지어 그 흡혈귀를 공격하고 있 었다. 루카 수사의 말에 의하면, 지금 그들에게 더 큰 적은 마녀 들이었다. 하지만 가톨릭의 성직자로서 흡혈귀 같은 반(反)그리 스도적인 괴물의 편을 들 수는 없었다.
‘좋다. 일단 끼지 말고 정세만 관망하자.’
베드로 수사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텔레포트를 하여 몸을 감 추고 돌아가는 대로 상황만 지켜보았다. 그런데 조금 지켜보자 자신의 짐작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녀들은 분명 흑마술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흡혈귀는 어딘가 달랐다. 흡혈귀류는 근래 들어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되었지만 베드로 수사는 흡혈귀 족속을 상대해 본 적이 있어서 그들의 흉포함과 잔인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흡혈귀는 무서운 속도로 움 직이면서 때로는 바람을 일으키고, 때로는 상대를 걸어 넘어뜨 리거나 집어 던지기도 하면서 간신히 조금씩 처리해 나가고 있 었다. 기이하게도 그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절박할 텐데도 그는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마침내 베드로 수사는 루카 수사의 말대로 행동을 개시했다. 열다섯보다는 셋이 상대하기 쉬울 것이라는 루카 수사의 타산적 인 계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저 흡혈귀의 흡혈귀답지 않은, 자 못 신사적인 행동에 마음이 끌린 것이었다.
각자 나름대로의 특기는 달랐지만 세 가디언의 근본적인 힘은 성스러운 기도력에 기본을 두고 있었다. 그런 기도력은 마녀들 의 흑마술에 가장 극성(性)의 힘이기도 했다. 세 수사는 모두 성수 뿌리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성수에 맞을 때마다 적 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댔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지만 세 명의 수사 가 끼어 그들을 돕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일단 밀리기 시 작하자 남자들은 타격을 받고 거의 대부분 땅에 쓰러져 버렸다. 물리적인 공격에는 금방 회복하고 일어나던 남자들도 기도력의 타격에는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성서에서는 피를 생명력의 원천으로 보아 상당히 중시하고 있다. 구약에 나오 는 구절 중 ‘고기를 절대 피째 먹지 말라’고 한 것이나 ‘피 없는 고기는 먹지 말 라’는 등의 문구가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양인들은 ‘피 없는 고기’ 라 하여 최근에 이르기까지 문어나 오징어를 잘 먹지 않았다(단 하나의 예외는 그리스인이다. 이들은 문어 등을 아주 잘 먹는다). 이처럼 기독교에서는 피를 중 시하기 때문에 그 피를 마시고 생명을 유지하는 흡혈귀 유보다 더 반기독교적인 괴물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위기감을 느꼈는지 마녀들은 모두 모이더니 최후의 힘을 한데 모았다. 그러자 검은색의 기운이 뭉클거리면서 그들의 주변 을 에워쌌다. 세 명의 가디언들마저 그 기운에는 잠시 주춤했는 데, 그 순간 마녀들이 목소리를 모아 크게 소리를 지르자 쓰러졌 던 남자들이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연 그들의 얼굴이 점차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비틀 어지면서 손과 얼굴 등에 모두 북슬북슬한 털이 돋아났다. 그러 고는 일제히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다가왔다. 성수도 그들 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웨어울프(늑대 인간)!”
루카 수사가 소리치자 가브리엘 수사와 베드로 수사는 즉각 위치를 옮겨 둥글게 모여 섰다.
그러자 총을 쏘던 남자가 갑자기 외쳤다.
“물러서시오!”
어느새 모습을 바꾼 늑대 인간들이 으르렁거리면서 다가왔다. 남자는 서두르면서도 몹시 침착하게 리무진의 트렁크를 열더니 철컥거리면서 번쩍거리는, 은빛 나는 거대한 기계를 꺼내 어깨 에 둘러멨다. 그러고는 커다란 가방을 하나 손에 들더니 뚜벅뚜 벅 걸어 늑대 인간들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가면서도 그는 계속 기계 장치를 철컥거리며 조종하는 듯했다.
세 명의 가디언은 잠시 멈칫했다. 가디언들도 온갖 초자연적 인 일에 만성이 된 사람들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늑대 인간들을 한 장소에서 만난 적은 없었다. 게다가 굳이 저 남자가 나서는데, 그 안위를 걱정해 주는 것도 그렇고 하여 일단 그들은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수십 명의 늑대 인간들이 몰려오는데도 전혀 기가 죽 지 않고 다리로 딱 버티고 서서 흡혈귀 남자를 향해 외쳤다.
“뒤를 좀 받쳐 주시오!”
흡혈귀 남자는 재빨리 날아와 남자의 등에 불쑥 튀어나온 장 치를 받쳤다. 그러자 리무진 앞의 노신사가 어깨에 멘 커다란 원 통 같은 것에서 뭔가 불쑥 솟아 나왔다. 여섯 개의 파이프 같은 것이 둥글게 이어진 발칸포였다. 그리고 날카로운 모터 소리와 함께 발칸포의 총신이 무서운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가브리엘 수사는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오, 주여! 아예 전쟁입니까?”
그런데 그때 중앙에서 가만히 서 있던 두 사람 중 덩치가 큰 남자의 몸이 약간 움직이는 듯하더니 연녹색의 희끄무레한 빛이 그의 몸에서 쏴악 뿜어졌다. 그 빛은 사라지지 않고 늑대 인간들 의 앞을 막아 장벽 비슷한 것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사나운 늑대 인간들도 위협조로 소리를 질러 댈 뿐,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본 가브리엘 수사가 경악에 가득 찬 소리를 질렀다.
“저건 오라가 아닙니까?”
루카 수사는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려 보일 뿐 이었다. 가브리엘 수사가 다시 말했다.
“세상에………. 저 정도의 오라를 내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베드로 수사가 지기 싫은 듯 불쑥 끼어들었다.
“신의 경지에 다다른 오라는 눈에 보이지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정도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 과연 존 재할 수 있는 걸까요?”
가브리엘 수사가 말하자 베드로 수사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했다. 지금 저 사람은 엄청난 상대와 보이지 않는 대결을 하면서 도 힘을 나누어 저렇듯 강렬한 오라를 발하고 있으니 세븐 가디 언으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때 루카 수사가 나섰다.
“저런 색깔의 오라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나 올 수 없을 거요.”
세 명의 가디언은 오라의 색깔을 보고 지금껏 품었던 불신감 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저 남자가 왜 힘을 나누어 늑 대 인간들을 차단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때 지금껏 눈치를 살피고 있던 듯한 회교도 남자들이 일제 히 힘을 발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미친 듯한 바람이 일면서 무 시무시한 불덩어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이프리트*! 정령력이오!”
베드로 수사가 외치면서 힘을 모으자 그의 몸에서 빛이 나면 서 오라가 접시 모양으로 둥글게 퍼져 나와 방패처럼 세 가디언 의 앞을 막았다. 베드로 수사의 오라 방패는 그의 주특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라는 흑마술이나 기타 사악한 주술에는 강력한 보호력을 발휘하지만 정령력에는 그렇게까지 강렬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브리엘 수사와 루카 수사가 힘을 합쳐서야 날아오는 불덩어리들을 간신히 도로 튕겨 낼 수 있었다.
흡혈귀 남자는 체구가 작은 편이었는데도 무거운 발칸포를 짊 어진 노신사를 들고 이리저리 재빠르게 불덩이를 피해 다녔다. 흡혈귀에게도 미친바람을 일으키는 술수가 있기 때문에 그럭저 럭 염려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중앙의 남 자였다.
* 이슬람 신화에서 이프리트는 거대한 날개가 달린 연기로 이루어진 존재로 알 려져 있다. 또 남성(이프리트)과 여성(이프리타)으로 나뉘어 있고 땅속에 살며, 고대 아랍 부족 사회와 같은 왕, 부족, 씨족의 사회를 이룬다고 전해진다. 진과 마찬가지로 신자(회교도)일 수도 있고 비신자일 수도 있으며 선할 수도, 악할 수 도 있는 존재이지만 마술을 사용하는 강력한 존재다. 그러나 실제적인 어감으로 는 거의 대부분 사악하고 무정한 편에 속한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코란 이나 하디스」(마호메트의 언행을 실제로 목격하여 적은 기록)에도 이프리트가 언급되는데, 대부분은 반항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는 불의 진이 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이프리트가 불만을 다루는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이다. 다만 일반적인 관념에 해당하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불을 다루는 진으로 묘 사했다.
애초에 불덩이들은 그 남자를 향해 쏘아진 것 같았는데, 기이 하게도 그 남자의 몸 가까이에 간 불덩이들은 모두 방향을 바꾸 어 사방으로 흩어져 어지럽게 날아가 버렸다. 그 때문에 세 가디 언은 더 많은 불덩이를 쳐 내느라 그들의 능력을 반 이상 노출시 킬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정령력이 아예 범접도 하지 못하다니.”
가브리엘 수사는 헐떡거리면서도 그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그러자 베드로 수사가 말했다.
“이상하군. 저 남자가 힘을 쓴 것이 아니라 정령들의 힘이 저 남자를 스스로 비껴간 것 같은데.”
그때 루카 수사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쉿 하고 소리를 냈다.
“뭡니까?”
“조용히! 저들의 대화가 들려요.”
중앙의 남자와 그와 대치하고 있는 여자는 겨루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전달되는 이야기였지만 루카 수사의 초감각은 보통이 아닌지라 그런 소리까지도 엿들을 수 있었다.
너는 왜 우리를 막는 거지? 왜 우리 일에 참견을 하는 거지?
너희의 목적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너도・・・・・・ 너도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지 않다.
하지만…………….
몇 마디를 더 들은 루카 수사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 고 조용히 베드로 수사를 쳐다보고는 느껴질까 말까 하는 아주 작은 텔레파시로 말했다.
우린 여기를 떠납시다.
“무슨 소리요? 저들을 그냥 두고…….?”
베드로 수사가 눈을 크게 뜨자 루카 수사는 재빨리 자신이 지 니고 있던 점토판을 베드로 수사의 품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가 브리엘 수사에게도 눈짓을 했다. 가브리엘 수사는 조금 멍하니 서 있다가 곧 루카 수사의 뜻을 알아채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점 토판을 베드로 수사에게 주었다.
“우린 여기 있겠소. 그러니 형제는 몸을 피해 계시오. 반드시 이것들을 지켜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요?”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하겠소. 저들은 아직 눈치채지도 못하 고 있으며, 눈치챘다 해도 베드로 형제의 텔레포트 능력이면 저 들이 쫓지 못할 거요. 형제는 반드시 그들과 맞서려 하지 말고 무조건 텔레포트해서 도망치기만 하시오. 만약 따라가려 한다 해도 나와 가브리엘 수사가 막아서겠소. 그러니 어서!”
그 말을 듣고 베드로 수사는 곧 세 개의 점토판을 잘 갈무리해 길게 늘어진 수도복 속에 넣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격렬하기 이를 데 없던 싸움도 끝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는 잘 버티고 있었지만 여자 쪽 이 점차 뒤로 밀리는 것이 확연했다. 여자는 조금씩 비틀거리면 서 뒤로 물러서다가 마침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는데, 놀 랍게도 여자가 무릎을 꿇자 돌로 된 밑바닥이 움푹 꺼지면서 반 뼘이나 쑥 들어가 버렸다. 무시무시한 힘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 했다.
여자가 악을 썼다.
“이 지독한 놈!”
무의식중에 여자가 쓴 말은 마녀답지 않게 라틴어였다. 남자 도입을 열어 라틴어로 말했다.
“이것은 네 증오의 무게일 뿐, 네 죄악의 무게를 얹으면 이보 다 더할 것이다.”
여자가 갑자기 몸을 뒤로 휙 젖혔다. 여자의 몸은 마치 뼈없 는 물고기처럼 뒤로 둥글게 휘어지면서 두어 바퀴를 그대로 데 구루루 굴러 간신히 남자의 힘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돌연 여자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오라에 막혀 웅성거리던 늑 대 인간들이 요란한 비명을 질러 댔다. 그들의 눈과 귀에서는 피 가 솟구쳤다. 그러자 그들은 형언할 수 없으리만큼 흉포해져 중 앙에 서 있던 남자만을 노리고 달려들려 했다.
그때 저쪽의 노신사가 메고 있던 발칸포가 우두두 하고 회전하면서 맹렬하게 불을 뿜어 댔다. 사방에 탄피가 날리면서 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났고, 늑대 인간들은 와르르 뒤로 밀리면 서 서로 부딪혀 넘어졌다.
바닥에는 잘 다져 놓은 포석들이 부서져 돌가루가 사방에 날 렸다. 늑대 인간들을 향해 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발밑을 향해 쏜 것이었다. 또 워낙 많은 탄환이 날아가는 판이라 몇 명의 늑 대 인간들은 총을 맞았는지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 쓰러져 신음했고, 나머지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노신사는 여전히 차분하게 품에서 뭔가 주먹만 한 것 을 꺼내 휙휙 던졌다. 그것들은 수류탄처럼 늑대 인간들의 머리 위에서 펑펑 폭발했는데, 파편이나 연기 대신 투명한 액체가 쏟 아졌다. 액체가 닿은 늑대 인간들의 몸에서는 푸른 불길이 일어 났다. 그 많고 사납던 늑대 인간들도 몸에 불이 붙자 아우성치면 서 흩어졌다.
다시 한번 조금 먼발치에 있던 남자들이 정령들을 조작하려 했으나 무시무시한 정령들의 기운은 헛되이 허공을 쳐 댈 뿐, 한 방도 명중하지 않았다.
검은 머리의 여자가 문득 짐승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더 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 버렸다. 우두머리가 사라지자 마녀들 은 몹시 당황한 듯 거미 떼처럼 흩어져 달아났다. 조종자가 신경을 쓰지 않자 늑대 인간들도 그 자리에 픽픽 쓰러져 도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회교도로 보이는 자들도 자신들의 주술이 하나도 먹혀들지 않자 조용히 사라졌다.
중앙에 서 있던 덩치 큰 남자나 노신사, 흡혈귀 남자 등은 그 들을 쫓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만 조용히 바 라보고 있었다. 루카 수사나 가브리엘 수사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노신사는 쓰러져 버린 남자들을 살펴보고는 혼잣말로 투덜거 렸다. 언뜻 들으니 이미 죽은 자들인 줄 알았으면 진작 직격탄으 로 처리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하는 듯했다. 마녀들도 몇몇은 도망 치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잠시 후 장비를 풀어 버린 노신사가 루카 수사에게 뚜벅뚜벅 걸어와 억센 북구 억양으로 말했다.
“고맙소. 이단심판소의 수사님들이시오?”
가브리엘 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신사가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대단한 힘들을 지니고 계시던데…. 혹시 프란체스코 주교 님 휘하의 세븐 가디언이 아니시오?”
루카 수사가 나서면서 말했다.
“그렇소. 나는 루카 수사라고 합니다. 당신들은 누구시오?”
“나는 스웨덴에서 온 이반이라 합니다. 프로페서 이반(이반교수). 그리고.”
“저 사람은 흡혈귀가 아닙니까?”
가브리엘 수사가 흡혈귀 남자를 보고 말하자 이반 교수는 미 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 남자는 작달막한 본래의 모습 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분은 성공회의 윌리엄스 신부님이시오.”
그때 윌리엄스 신부는 예의 피를 소모해서인지 그 자리에 털 썩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이반 교수가 덧붙였다.
“흡혈귀의 힘은 지녔어도 남의 피를 빠는 악인은 아니오, 빈혈 기는 좀 있지만……. 그리고 저 가운데 계신 분은 한국에서 오 신・・・・・・ “
박신부가 미소 띤 얼굴로 다가오면서 이반 교수의 말을 잘랐다.
“박이라고 합니다.”
루카 수사는 살져서 안 그래도 가늘어 보이는 눈을 더욱 가늘 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일단 어디든 연락을 해서 시체들과 부상자들을 옮기도록 조 치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저들은 이용당한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라.”
“알겠습니다. 그건 당연히 그래야죠.”
루카 수사의 말에 쓰러진 윌리엄스 신부를 둘러메면서 이반 교수가 덧붙였다.
“물론 이런 일은 가급적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다는 것은 아실줄로 믿습니다만.”
“잘 압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리고 저들과는 어떻게.”
“저들과는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고 해 두죠. 이미 눈치채셨 는지 모르겠지만 저들은 마녀 협회에서 온 자들입니다. 검은 지 하드라는 교권의 비밀 결사와도 손을 잡고 온 것이죠.”
“그럼 저들이 무엇을 노리고 왔는지도 아시겠군요?”
“압니다. 그것 때문에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반 교수에 이어 박 신부가 나섰다.
“가능하다면…… 주교님과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직접 말씀이십니까?”
“예.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곤란합니다. 주교님께서는…………….”
루카 수사가 고개를 젓자 박 신부는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보이면서 말했다.
“이것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걸 돌려 드리러 온 겁니다.”
그것은 또 한 개의 점토판이었다. 방금 프란체스코 주교가 피 신시킨 세 개의 점토판의 또 다른 조각. 아우구스티노 수사가 천 신만고 끝에 얻었다가 한국에서 잃어버린 바로 그 점토판인 듯 했다.
그것을 보자 루카 수사가 인상을 썼다.
“돌・・・・・・? 돌려준다고요?”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대단히 중대한 물건이라 여겨지고, 또 오해가 있었던 터라 직접 만나 뵙고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때 가브리엘 수사는 루카 수사를 잠시 끌고 조금 뒤로 물러 서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만나게 해 드립시다. 아까의 상황을 보면 주교님께서는 이렇 게 될 것을 미리 아셨는지도 몰라요.”
“무슨 소리입니까?”
“주교님은 방금 기적의 은총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안위는 걱정 없다고 하신 걸 테죠. 더구나 또 하나의 점토판을 저들이 돌려준다면 또한 좋은 일 아닙니까?”
“그 말을 어찌 그대로 믿는단 말입니까?”
“하지만 우린 잃을 게 없습니다. 저들은 점토판을 돌려주러 왔 다고 했고, 또 나쁜 의도는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또 저 들이 힘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우리 둘이 저 사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녜스 수녀라도 있으면 몰라도…………….”
하긴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루카 수사는 좀 더 생각해 보면 서 다시 한번 박 신부의 손에 들린 점토판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진짜였다.
“좋습니다. 이쪽으로……………..”
루카 수사는 그들을 안내해 안으로 들어가 가브리엘 수사와 일행을 아래층에서 기다리게 하고 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 층이라도 건물이 상당히 넓고 복잡해 그의 모습은 금방 사라졌 다. 박 신부는 기절한 윌리엄스 신부의 등에 조용히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다른 가디언들이 모두 사라지자 가브리엘 수사는 젊은이다운 호기심을 보이며 이반 교수에게 물었다.
“늑대 인간에게는 아무리 기관포라도 소용이 없을 텐데. 어떻 게 하신 겁니까?”
가까이에서 보니 이반 교수는 비록 표정이 엄숙하고 단정했지 만 아까의 흡혈귀보다 더 흡혈귀 같은 생김새였다. 또 묘하게도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가브리엘 수사가 정말 실없어서 말을 시키는 것은 아니 었다. 조금이라도 말을 해 봄으로써 이쪽의 속내를 알기 위해 말 을 시키는 것이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기절했고, 박 신부는 좀 전의 능력으로 미뤄 볼 때 말을 걸어도 그런 내색을 보일 사람이 아닐 것 같아 지금에야 이반 교수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물론 은으로 만든 것일세. 축성받은 십자가를 녹인 은으로 만 든 총알이니까 효력이 있는 걸세.”
“그러면 아까 던지신 건……………?”
“그건 같은 은을 용해시켜 성수와 섞은 용액일세. 말하자면 수류탄인 셈이지.”
‘그렇게 많은 은십자가를 어디서 구했을까?’
가브리엘 수사는 속으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만드실 생각을 하셨죠? 더구나 그런 포를 어떻게 구해서…….”
“내가 만든 걸세. 내 공장에서.”
“공장요?”
“우리 집안은 벨기에에서 총포 사업을 하고 있지. 그 정도 만 드는 건 어렵지 않네. 나는 주술도, 능력도 없으니 그런 지식이 나 장비라도 있어야 흡혈귀를 잡을 것 아니겠나?”
“흡혈귀를 잡으신다고요? 정말로?”
“팔대째 내려온 가문의 사업이네.”
“정말 그런 집안이 있었던가요? 총포 회사를 운영하신다면서 어떻게 그런 일에 …………….”
이반 교수가 번뜩 불쾌한 빛을 비추며 냉랭하게 되받았다.
“그러는 자네는 그 잘생긴 얼굴로 영화배우를 하지, 왜 성직자를 하는 겐가?”
“죄・・・・・・ 죄송합니다.”
가브리엘 수사는 곧바로 실례했다는 표시를 하고 입을 다물었다. 젊은이다운 순진한 행동이라 이반 교수도 실없이 말이 많았다는 것을 느끼며 얼굴 표정을 더 딱딱하게 만들었다.
“아닐세. 하긴 무리도 아니지. 나도 말이 많군. 자네를 보니까 꼭 내 조카 생각이 나서 말일세.”
“조카님?”
“자네와 꼭 닮았네. 능력자였던 것도 비슷하고,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무능력인데, 그 아이는 예외였지.”
“그렇습니까? 그분은 지금………….”
이반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브리엘 수사에게 말했다.
“삼십 년 전 흡혈귀에게 당했네. 발견됐을 땐 꼭 미라같이 온 몸이 바싹 말라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더군. 수십 마리가 며칠 동안 빨아댄 것 같았어. 좀 심하게 당한 편이었지.”
가브리엘 수사는 자신과 꼭 닮은 젊은이가 그런 일을 당했다 는 게 꺼림칙했지만 내색하진 않고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그러 던 중 기절했던 윌리엄스 신부가 으음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 다. 박 신부가 오라의 힘으로 기운을 차리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둘은 비슷한 기도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도 가능했 다. 그렇다고 피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윌리엄스 신부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박 신부는 한국말 로 그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브리엘 수사는 이반 교수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멋쩍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느낌으로는 이들이 악의를 지니고 있다고 믿기 어려웠다.
그때 루카 수사가 돌아와 말했다.
“주교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올라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