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4화 – 묵시록의 재현 4 : 해동감결을 버리다

랜덤 이미지

퇴마록 말세편 5권 4화 – 묵시록의 재현 4 : 해동감결을 버리다


해동감결을 버리다

준후의 모든 행동은 이 『해동감결의 마지막 구절을 위한 것이 었다. 그 때문에 준후는 의혹받을 행동을 해 왔으며, 그 많은 죄 를 뒤집어쓴 것이다.

준후는 가장 친한 사람, 즉 박 신부나 현암이나 승희의 손에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글을 보고는 무척 괴로웠으나 그 예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의 운명이 걸려 있는 탓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괴로운 것은 둘째치고 그들의 손에 죽는 것이야말로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난다 하더라도 퇴마 사들은 사람의 목숨을 해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무슨 죄를 지 어도 자신을 죽이려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준후는 현암을 목표로 삼아 계획을 짰다. 박 신부는 절대 평정을 잃을 사람이 아니고, 승희는 그럴 기운이 없으니 울컥하 는 성미를 지닌 현암이야말로 자신을 죽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현암을 동요시키려면 정의롭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이 가 장 좋았다. 단 한 번의 잘못으로 현암이 자신을 죽이려 할리 만 무했다. 그래서 준후는 온갖 마음의 고통을 무릅쓰고 자신이 악 하게 변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려고 오랜 시간 동안 연극을 해 오며 많은 준비를 한 것이다.

“연희 언니는 정말 죽었니?”

승희가 준후에게 묻자 준후는 이제 자포자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누나에겐 미안하지만………… 연희 누나는 기절해서 보호 받고 있을 거예요. 도인들에게………….”

“도인들?”

현암은 준호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물었다. 준호가 간략히 말 해 주자 머리 회전이 빠른 현암은 아하 하며 탄성을 발했다. 비 로소 준후의 깊은 심계를 눈치챈 것이다.

라미드 우프닉스인 연희는 고반다나 아하스 페르츠 등이 노리 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녀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 이 없었다.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를 일부러 떼어 놓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가 가장 적기였다.

더구나 연희를 혼자 내버려 두면 다른 자들이 해칠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준후는 한빈 거사를 죽였다는 죄명을 뒤집어쓴 채, 도인들이 자신을 쫓게 만들고 연희를 그들에게 넘겨줌으로써 암 암리에 연희가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도인들은 연희가 준후와 가까이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 으므로 연희를 감금할 것이며 또한 잘 보호할 것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그동안 연희는 다른 자들의 공격에 안전할 수 있을 것이 며, 퇴마사들을 따라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 않아도 된다.

여기까지 짐작한 현암은 고개를 저으며 준후에게 말했다.

“너 대단하구나.”

“오래 생각한 거예요………………”

준후는 눈물 젖은 얼굴에 비로소 밝은 웃음을 떠올리며 되받았다.

“그런데 한빈 거사님은・・・・・・ ? 네가 해친 것은 아니지?”

“그럼요…………. 거사님은 천지 공사를 실패하신 후 이번 말세 는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위험이라 하셨어요. 그리고 시해법(P 解法)*을 쓰셨는데, 난 그저 그 상황을 이용한 것뿐이에요. 그 근처에 오행술 자국을 남기고…………. 외람되지만…………… 빈 시신에 흔적을 남겼어요.”

대도인들은 시해법이라는 기법을 써서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하는데, 한빈 거사는 대도인답게 그 방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베드로 수사는?”

박신부의 질문에 준후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제가 그때 바티칸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저도 점토판을 얻으려 했거든요. 그러나 제가 베드로 수사를 따라갔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어요. 저는 점토판을 꺼내 신부님께 보내 드린 것 밖에는 없어요.”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박 신부를 보며 준후가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 아녜스 수녀는 정말 해치려고 했어요. 그때는 저 자신을 자제하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그 녀는 위험해요. 그 여자는 반드시 우리 중 누군가를 해칠 거예 요! 그래서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


*도력이 높아진 선인이나 도사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죽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이 시해법이다. 시해법은 몸 안에 있는 영적인 자신, 즉 원신(神)을 성장시켜 원신이 실제의 자신의 몸과 같아질 정도가 되면 자신의 죽음의 때를 기다린다. 그래서 실제의 몸을 매미 껍데기처럼 죽게 만들고 그때 원신을 피하게 하여 죽음을 맞았으면서 도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원신은 태어남의 과정을 겪은 것이 아니므 로 당연히 죽음을 맞지 않으며 이때부터는 신선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상상의 술수이며 실제로 이루어지는 술수라고는 볼 수 없으나 이러한 전설은 아 주 오래전부터 도교나 수련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왔다.


“역시 넌…….”

승희가 준후의 등을 툭 치면서 기쁨에 겨워 훌쩍거렸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기이한 힘을 불러낸 것이 준후가 아니 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준후가 징벌자를 자처한 것도 해동감 결』의 말을 따르려 했을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해동감결』에는 지금 일어난 상황을 예견하는 듯한 글귀까지 있었고, 그때 ‘그’를 자처하면 모든 것이 풀린다는 구 절도 있었다. 물론 준후가 징벌자를 자처하여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모두 『해동감결의 정확성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모든 상황이 이해되자 현암과 승희, 박 신부의 마음은 날 듯이 가벼워졌다.

잠시 후 준후가 웃으면서 뜻밖의 말을 했다.

“저도 기뻐요. 모두 이해해 주시리라 믿었어야 하는데…………….그런데…………… 서둘러야 하지 않나요?”

“뭘 말이냐?”

현암이 묻자 준후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되물었다.

“나를 죽여야 하잖아요?”

순간 현암과 박 신부, 승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준후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기뻐하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준후는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해동감결을 따라야죠. 아직 틀어진 것은 아니에요. 나는 징벌자를 자처했고, 그 사실은 이제 다 알려질 거예요.”

“아무도 몰라!”

현암이 거칠게 외치자 준후는 미소를 띠었다.

“모두들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나는 알아요. 가브리엘 수사는 빠져나갔어요. 지금쯤 멀리 갔을 테니, 이제 모두들 나를 잡으러 올 거예요. 시간이 없어요.”

“준후야! 어떻게………… 너를…………….”

승희가 다시 울먹이자 준후는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어요. 이게 맞아요. 『해동감결이 옳았어요. 제가 징벌자를 자처했으니, 제가 죽으면 누구도 다시 징벌자를 찾지 않을 거예요. 그리되면 징벌자는 별 탈 없이 태어나게 되고, 천 기는 거슬러지지 않는 거죠. 그리고 지금대로라면 신부님, 현암 형 모두 큰 오해를 사고 있으니 매우 위험해요. 하지만 내가 현 암 형이나 누구 손에 죽으면, 오해도 풀 수 있잖아요.”

말끝을 흐리는 준후를 쳐다보며 박 신부가 간곡히 말했다.

“준후야…………. 내 말 좀 들어보렴.”

그러자 준후가 고개를 저으며 홀린 듯 중얼거렸다.

“망설이지 마세요. 잊었나요?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뭐가 말이냐?”

“왜 모르는 척하시나요? 제가 쓰는 주술은 명을 단축하는 것 들이죠. 그래서 그렇게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현암과 박 신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준후는 슬픔 이 깃들인 얼굴에 무척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알아요. 아주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기뻐요. 내 가장 친한 사람들은 형과 신부님, 누나예요.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삶 인데, 가장 친한 사람들 손에 죽으면 좋잖아요? 행복할 거예요.”

준후는 말하다가 감정이 복받치는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어서요. 망설이지 말아요. 나는 세상을 구하는 거예요. 이보 다 더 행복할 데가 어디 있겠어요? 안 그래요?”

“야, 인마!”

현암과 승희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없이 엉엉 울었다. 아라도 울고, 준호도 울고, 수아마저도 울었다. 그러나 박 신부 만은 장승처럼 서서, 입술을 깨물며 뭔가를 생각했다.

준후는 단정하게 자세를 고쳐 앉아 눈을 감고 말했다.

“어서요! 아프지 않게 해 주면 더 고맙겠군요.”

느닷없이 박 신부가 준후의 수첩을 앞으로 내밀면서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야, 그다음은 어떻게 하지? 여기 씌어 있니?”

“예. 말씀 드려도 상관없지만・・・・・・ 그걸 보시면 돼요.”

“『해동감결 원본은?”

“여기요.”

준후가 『해동감결』 원본을 내밀었다. 박 신부가 그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 그렇구나.”

파리하게 질린 현암과 승희가 동시에 박 신부에게 외쳤다.

“신부님! 안돼요!”

“신부님!”

박 신부는 돌연 껄껄 웃으며, 손에 든 수첩을 갈기갈기 찢었 다. 그리고 오라를 발하여 수첩 조각과 「해동감결」 원본을 휘감았다. 순식간에 그것들은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준후가 깜짝 놀라 박 신부에게 소리쳤다.

“신부님!”

평온한 표정으로 박 신부가 미소를 머금었다.

“준후야, 일어나렴.”

놀라움을 이기지 못한 준후가 다시 외쳤다.

“신부님! 하지만 「해동감결은………!”

그때 현암이 껄껄 웃으면서 나섰다.

“잘하셨습니다! 잘하셨어요!”

“그래서는 안 돼요! 신부님!”

준후가 어쩔 줄을 모르고 계속 외치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급기야 준후는 울상을 지으며 떼를 쓰듯 말했다.

“『해동감은 틀린 적이 없어요! 이래선 안 돼요!”

비록 박 신부의 표정은 온화했지만 목소리만큼은 단호했다.

“『해동감결은 이제 믿지 않기로 한다.”

“예? 아니, 어떻게…….”

현암이 재빨리 말했다.

“찬성입니다! 준후야. 나는 원래 운명이니 예언이니 하는 것, 별로 믿고 싶지 않다. 인간의 미래가 모두 정해져 있다면 끔찍하 지 않겠니? 그런 것, 보지 않았다고 여기면 그뿐이잖아!”

“나도 그래!”

승희가 한마디 거들자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준후가 계속 외쳤다.

“안돼요! 안 돼요! 모두의 마음은 알아요! 하지만…”

대뜸 현암이 준후의 말을 끊었다.

“준후야, 난 운명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생각해. 운명은 개척 하는 거지. 주어진 순번대로 밟아 가는 게 아냐. 예언서를 믿고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 난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 리 스스로의 뜻대로 해 나가면 되는 거지. 예언서 따위를 과신하 긴 싫어.”

“하지만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세상을 구하는….”

이번엔 승희가 덧붙였다.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나는군. 모두를 위해 한 사람에게 희 생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말야. 만약 그런 희생을 통해서만 유지될 세상이라면 차라리 망해 버리라고 그래! 그런 세상이면 망해도 싸! 나도 그렇게 믿어! 아니, 차라리 망하라고 그래!”

“누나! 그건 너무……………”

잠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준후야, 내 생각은 이렇다. 우리가 지금껏 『해동감결을 믿고 따른 것은 그것이 미래에 대한 옳은 조언을 해 주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 이런 행동을 하라고 씌어 있었다는 것을 보니, 그것 도 믿을 만한 것이 아닌 듯싶다. 그런 말을 그대로 믿고 따를 수 는 없는 거야. 설령 『해동감결』의 내용이 모두 맞는 것처럼 보이 더라도, 옳지 않은 행동을 할 수는 없다. 더구나…………….”

박신부는 눈을 감았다가 말을 이었다.

“옳지 않은 행동으론 세상은 결코 구원되지 않는단다. 작은 일 에서는 일순간 옳지 않은 일이 효과를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큰일에는 결코 영향을 주지 못할 거야.”

현암도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준후야, 역사상 테러가 역사의 흐름을 뒤집은 적은 없어. 시저가 암살되었어도 로마가 무너진 것은 아니듯, 세상의 운명이란 것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달라진다고 볼 수는 없어! 그 리고 네가 징벌자 역을 뒤집어쓴다고 반드시 모든 게 잘 풀리라 는 보장은 없어. 네가 헛되이 희생할 확률이 훨씬 크다!”

마치 그 말을 못 박기라도 하듯 승희가 소리 높여 외쳤다.

“『해동감결』은 그저 쓰레기야! 사람을 홀리고 죽이는 백해무익한 책이라고!”

준후는 세 사람이 강력히 외치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지금대로라면……………나는 오히려 일을 그르친 건데…………….”

박신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르친 것도 없고, 다른 방법을 찾을 것도 아니다. 아직 정해 진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틀린 행동을 막는 거야. 말세를 이끌 징벌자라는 이유로 억울한 죽음 을 맞게 되는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일을 시작한 거다. 너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니 그 일을 하면 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징벌자를 노려요. 우리가 과연…………… 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잖 아요?”

그러자 현암이 말했다.

“일단 사람들을 모두 깨우도록 하자. 이 지긋지긋한 곳에 오래 있을 필요는 없잖아.”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