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11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4 : 추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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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5권 11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4 : 추적자들


추적자들

시타 교수는 박 신부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도 곧바로 집에 돌 아가지 않고 있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병원을 나섰다. 그런데 그 가 병원 현관 쪽으로 가다 보니, 뭔가 조금 어수선했다. 낯선 사 람들이 여러 명 와서 병원 문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일까?’

시타 교수는 호기심이 일어 무심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 다. 그 사람들은 시타 교수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는데, 서 양인과 동양인이 뒤섞여 있었다. 더구나 가톨릭 성직자로 보이 는 사람과 아랍인, 그리고 동양의 승려까지 있어서 기이했다. 시타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뭐…………. 나하고는 관련 없는 일이겠지.’

시타 교수는 쉽게 생각하고는 태연히 걸어 병원 현관문으로 향했다. 몇 개의 섬뜩할 정도의 눈초리가 그를 쏘아보았지만, 시 타 교수를 굳이 잡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병원 밖으로 나와 보니, 병원 앞마당은 어디서 몰려들었는지도 모를 특이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그뿐이라 면 모르는 채 지나갔을 텐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들 한가운데는 아까 시타 교수가 보았던 세 명의 아이들 중 사내아이와 중국인 교수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눈치를 보니 그들은 이들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잡혀 온 것 같았다. 사내아이가 시타 교수를 보더니 얼른 남몰래 눈짓 을 했다. 뭔가 위급하다는 신호 같았다.

시타 교수는 뭔가가 잘못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등이 축 축이 젖어 들었다. 시타 교수는 태연한 듯한 걸음걸이로 병원 밖 을 향해 걸어가다가 병원 입구를 나서는 순간 병원 담장 옆으로 달라붙어 담장을 따라 빙 돌아갔다.

‘저 아이가 잡혔다면 로파무드도 위험하다. 그녀는 지금 정신 조차 못 차리고 있는데…………. 저런 이상한 자들에게 잡혀가게 할 수는 없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타 교수는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렸다. 아까 여자 병동을 서성거 렸던 기억에 의하면, 여자 병동에는 밖으로 향한 이층 창문이 몇 군데 있었다.

그 창문 밑에 도착한 시타 교수는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담을 넘으려고 담장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시타 교수는 어디선가 귀신같이 나타난 두 사람에게 덜미를 잡혀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아찔한 충격이 온몸을 감싸자마자 시타 교수는 정신을 잃었다.

시타 교수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어둡고 좁은 어떤 공간 안에서였다. 정신을 차리고 안을 둘러보자. 그 안에 몇 명의 사 람이 더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남자였고 아무래도 동양 인 같아 보였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 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으며 불교의 승려도 있었는데, 모두 누군가와 싸웠던 듯 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시타 교수는 물론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 소곤거리며 나누는 말은 아까 박 신부 일행이 하던 말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 겼다. 그들의 생김새도 분명 동아시아 사람 같았다.

‘그렇다면 혹시 이들도 박 신부의 일행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시타 교수는 그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파더 박? 이…………… 이 횬암? 장…… 주누?”

시타 교수는 아는 말이 없어서 그냥 그들의 이름을 말해 본 것 뿐이었는데, 장준후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그들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갑자기 그 사람들 중 덩치가 매우 큰 승려 한 사람이 시타 교 수의 멱살을 잡고 뭐라고 떠들어 댔다. 그러나 시타 교수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타 교수가 말을 하지 않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한참 이야기 를 나누었고 그중 머리가 길고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사람이 마침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사실 그들은 마치 야만인처럼 온 몸에 문신을 한 시타 교수를 보고 영어는 모를 것이라 여겼던 것 이다.

“장준후를 아시오?”

시타 교수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물었다.

“그가 어디 있소? 어서 말하시오.”

시타 교수가 대답조차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채근했다. 

“어서 말하시오! 영어 못하오?”

시타 교수는 순간, 이들이 준후에 대해 결코 고운 마음을 지니 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난감해진 시타 교수는 영어를 모 르는 것처럼 웅얼거리면서 인도어로 떠들었다.

그들은 오파 성곤과 현현파 근호, 증장 화상과 승현 화상이 었다. 그들은 난감해진 듯, 영어와 잘 되지도 않는 독어, 불어 등 으로 시타 교수와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시타 교수는 모르는 척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급기야 덩치 큰 승려가 불경에서 주워들은 듯한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까지 해 보려 했으나, 시타 교수로 서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 옥신각신하고 있는 차에 실내가 밝아졌다. 그곳은 커다랗고 튼튼한 컨테이너 안이었다. 그 문이 열리면서 두 사 람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준호와 황달지 교수였다.

“어, 네가……?”

준호를 알아본 성곤과 증장 화상이 소리치자 준호도 얼결에 인사를 건넸다.

“그간 별래 무양하셨는지요?”

준호는 바로 이 사람들을 찾으려고 자신이 묵었던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난데없이 들이닥친 정체불명의 사람들에 의 해 불문곡직하고 이곳으로 잡혀 온 것이다.

아라와 수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 두고 와서 잡히지 않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황 교수는 같이 잡혀 오 고 말았다. 원래 아라와 수아를 남겨 둔 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 비해서였는데 그 아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자 신처럼 갇혀 있는 이들을 만나게 되자 너무 놀라서 근래에는 조 금씩 고쳐 가던 옛날 말버릇(한자 성어를 외워 대는)이 다시 튀 어나온 것이다.

그들도 준호를 만난 것이 놀라워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했 다. 그들은 준후를 잡기 위해 불원천리 인도까지 찾아왔고, 준후 는 잡지 못했지만 기절해 쓰러진 연희를 발견하는 데에는 성공 했다. 사실 그것은 준후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그들이 알 수는 없었고 준호도 굳이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다.

그리고 그들은 칼키파의 주술 막이 있는 곳까지 나아갔다가 주술 막을 뚫을 수 없자 일단 시내로 철수했다. 만약 그들이 주 술 막 부근에서 얼쩡거렸다면 큰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그들은 준후에 대해 연희에게 캐물었으나 연희는 조개껍질처 럼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연희는 법력이나 공력, 주술력 등이 없는 보통 사람이니만치 도인의 체면상 닦달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 준후 가 한빈 거사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쓰고 있어서 준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려 했지만 그 말을 들은 연희는 더더욱 입 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기습을 당했는데, 그자들은 기이하게도 연희를 노리는 듯했다. 그때는 그들 중 법력이 가장 깊은 현현이로를 비롯한 여러 승려들이 다 시 한번 주술 막 주위로 향했을 때여서 전력이 약했다.

그들은 기를 쓰고 그 정체 모를 무리들과 대적했지만 중과부 적으로 잡히게 되었는데, 특히 승현 화상은 마지막까지 연희를 보호하려다가 중상을 입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무 련 비구니가 아미 검술을 극도로 발휘해서 연희를 데리고 밖으 로 빠져나갔으며, 그 이후의 일은 그들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난 다음 사람들이 준호에게 물었다.

“너도 준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할 셈이냐? 이제는 사실 대로 말하렴. 너는 내내 준후와 같이 있었지 않니? 우리도 그걸 알고 있으니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다.”

준호가 대답했다.

“준후 사부를 만나게 해 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먼저 오해를 풀어야 해요.”

“오해?”

“예. 준후 사부는 그 할아버지를 해치지 않았어요! 부득이해 서 그런 척했을 뿐이라고요.”

그러면서 준호는 그간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준후 가 그런 행동을 하고 죄를 뒤집어쓰려고 한 것은 모두 세상을 구 하려는 의도였다는 것, 그리고 박 신부와 현암 등도 준후와 뜻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 또한 연희를 어떻게든 그들과 동행시켜야 한다는 것 등등을 마구 떠들어 댔다.

그러나 준호는 사정을 아직 완벽하게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도 못했고 말재주도 별반 좋은 편이 아니어서 이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성곤만은 준호의 말에 약간 귀가 솔깃해진 것 같 았다.

“너・・・・・・ 정말이냐?”

성곤이 묻자 증장 화상이 다짜고짜 외쳤다.

“자네, 이 아이 말이 진짜라고 보나?”

“이런 이야기는 이 아이가 지어내기에는 너무 무리가 있지 않 습니까? 그리고 이 아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모두 믿을 수는 없고 이 아이가 잘못 생각하는 것도 있겠지만, 아무튼 근본적으로 준후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한 것 은 아닌 듯하군요.”

오의파의 성곤은 도방의 감찰이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알아보 는 재주가 있었다. 성곤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증장 화상은 입을 다물었으나 현현파의 근호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이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한빈 거사님을 준후가 해 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해 들은 것뿐이지 않소? 준후 녀석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소. 어쨌든 그 녀석을 잡아야 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러자 준호는 당황스러웠고 한편으로는 화도 났다.

“사부는 거짓말 안 해요!”

“좋다. 어쨌거나 흑백 시비는 그 녀석이 있어야 가려진다. 너는 냉큼 그 녀석이 어디로 갔는지 말해라.”

“그건 ・・・・・・ 그건 나도 몰라요!”

“어떻게 네가 모를 수 있느냐?”

“나도 모른다니까요!”

그러자 성곤은 침착하게 호통을 쳤다.

“요 녀석,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소. 요 녀석! 내 앞에서 거짓 말을 할 생각은 말아랏!”

그 호통에 준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말 이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좋다. 오해는 어차피 풀릴 거고……………. 저 이상한 작자들이 병 원까지 쳐들어왔으니 사부도 위험할 거야. 신부님도, 현암 형도 많이 다쳤고 사부와 승희 누나밖에 없는데 이렇게 개떼같이 많 은 놈들을 당해 낼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러면 모두 전멸이다! 그 런데 이 아저씨들은 비록 사부를 잡으려고 하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들이 아니고・・・・・・ . 도움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거야!’

준호는 아직도 박 신부 일행이 병원에 있다고만 믿고 있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성공에 게 말했다.

“만약 사부가 어디 있는지 말해 주면 ・・・・・・ 사부가 저자들에게 잡히지 않도록 도와주실 거예요?”

그러자 성곤은 힘없이 웃었다.

“글쎄다. 우리도 잡혀 있는 신세인데…………. 저자들은 무척 강하고 수가 많다. 하지만…………….”

성곤은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예전에 현암 씨나 박 신부님과 같이 싸운 적도 있었다. 그분들이 믿을 만한 분들이란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준후의 일에 대해서만은 어찌할 수 없다…… 그렇지만…… 준후를 잡아 진위를 밝히는 것 외에,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해 주 고 싶다. 그리고 그래야 된다고도 믿고・・・・・・ . 어떻게들 생각하시 오?”

성곤이 말을 맺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들 모두는 퇴마사들과 크고 작은 인연이 있었고, 그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모두에게 있었다. 준호가 그들을 보며 골똘 히 생각에 잠기자 성곤이 웃으며 말했다.

“도인과 출가승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준후를 잡는 다 해도 우리가 당장 해치우겠다는 것도 아니다. 만약 오해가 있 었다면 자연히 풀릴 것이고, 또 설혹 준후가 정말 죄인이라 해 도, 현암 씨나 박 신부님의 일이라면 우리가 돕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일단 우리에게도 사정 이야기를 해 주려무나. 알아야 뭘 할지 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준호도 본능적으로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순수한 진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느꼈다. 준호는 이런 상황에서도 과감하게 그들 을 돕겠다고 나서는 지인들을 둔 현암 등을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의로워야 하는구나.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때 성곤이 다시 물었다.

“너는 저자들이 어디서 온 자들인지 아느냐?”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이단 심판소하고 용화교, 음…… 또 그 리고 칼키파나 성당 기사단, 어새신, 검은 편지 결사…………. 음, 그리고…………… 음, 아무튼 모조리 다 몰려온 걸 거예요.”

그러면서 준호가 한참 동안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하자 성곤 등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수군수군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증장 화상이 물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우릴 덮친 거냐?”

“저도 잘은 모르지만……………. 흠……………. 이 이야기는 절대 비밀이 에요. 특히 연희 누나가 이 사실을 알면 큰일 나요. 절대 연희 누 나에게는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세요.”

준호의 얼굴이 하도 심각하여 사람들은 반은 장난이었지만 반 은 혹시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준호는 자신이 주워들 은 한도 내에서 연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희가 라미드 우프닉스라는 것, 그 주술은 태고에 행해진 것 이지만 그것이 부조화를 낳아 지금의 위기가 오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징벌자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라미드 우프닉스뿐이며, 지금 아마도 어른인 라미드 우프닉스는 연희 혼자 남았을 것이 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 때문에 그자들은 연희를 노리는 것이며, 연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준호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곤과 증장 화상 등은 마음이 많이 기울어 지는 것을 느꼈다. 특히 승현 화상은 몹시 다쳐서 이야기를 듣 기만 하고 있었지만 그는 과거 도혜 선사가 입적할 때 현암에게 당부했던 것을 바로 옆에서 들은 바 있었고, 한빈 거사가 현암 에게 그 내용을 풀이해 주는 것을 먼발치에서나마 조금 들은 바 있었다. 그래서 승현 화상은 아픈 것을 참으며 간신히 말문을 열 었다.

“이 아이…………… 말이………… 맞을지도…..”

“사제, 말하지 말게.”

증장 화상이 걱정되는 듯 말했지만 승현 화상이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준후 문제는 어쩔 수 없다 해도…………… 다른 일만은…………… 특히 현암 시주의 일은・・・・・・ 도와야 합니다………….. 선사님과 거사님의 유지이기도 했으니…………….”

“그건 좋지만, 돕기는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우리도 잡혀 있지 않은가?”

현현파의 근호가 중얼거리자 승현 화상이 다시 말했다.

“우리는… 잡혔지만……………. 현현이로께서는 무사하세요. 그분들은 곧 돌아오실 테고…………….. 그러면 우리도 빠져나갈 수 있어 요…….”

“그러고 나면 어쩌겠다는 건가?”

준후를 잡으러 여기 온 사람들은 여럿이었고, 그중에는 현현 이로라는, 현암보다도 배분이 높은 대도인도 있었지만 이 무리 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것은 별다른 도력이 없는 승현 화상이었 다. 승현 화상이 머리가 비상하고 임기응변에 능하기 때문이었 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일단・・・・・・ 연희 시주를 찾아서…………… 현암 시주와 동행시켜야 합니다…. 이 아이의 말이 틀림없다면 ・・・・・・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이에요…………. 지금 저자들은…………… 우리를 무차별 로 공격했고…………… 현암 시주의 앞을 막으니 좋은 자들이라 할 수 없어요……………. 저자들은 우리가 처리해야 합니다…”

“준후는?”

“일단・・・・・・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야겠어요. 만약 그 아이 가 증거라도 보인다면………… 그때는 도와야겠지요…………. 물론 준 후의 말이 거짓이었다면…………… 그때는 물고를 내더라도 말이에 …….”

그때 밖이 수런런해지면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준호는 깜짝 놀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목소리는 아라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이어 굉장히 밖이 소란 해지면서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그들이 갇혀 있던 트레일러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준호는 짐작했다.

분명 아라와 수아가 자신들을 따라와서, 아라가 조요경의 힘 을 쓰거나 수아가 정령들의 힘을 쓰는 것 같았다. 준호가 그것을 말하자 승현 화상이 지체 없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어서 모두 나갑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증장 화상이 무지무지한 힘을 발휘하여 트레일러의 벽을 양손으로 후려갈겼다. 두 번, 세 번을 후려치자 믿을 수 없게 금속으로 된 벽판이 찌그러지다 못해 떨어져 나가 고 말았다. 그리고 승현 화상을 제외한 도인들이 밖으로 달려 나 갔다. 준호는 한국 도인들이 편이 되어 줄 것 같아 마음이 든든 했다.

‘그러고 보면 사부가 선견지명이 있단 말씀이야?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런 머리를 쓴 것 같아.’


밖에는 한바탕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아라가 동물 떼를 불러오고 수아가 정령들을 있는 대로 소환하여 병원 앞은 나무 가 뽑히고 유리가 모조리 깨지는 등 엉망이었다. 그에 반해 상대 방은 숫자는 매우 많았으나 강력한 고수가 없어서 적절한 대처 를 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단심판소로부터 시작하여 용화교, 성당 기사단, 검 은 지하드 등이었는데 정예는 이미 칼키파의 신전 안에서 몰살당했기 때문에 숫자가 많더라도 그리 강한 자는 없었다. 다만 아녜스 수녀와 무색 화상이 고작 한나절 만에 이들을 모두 설득하 여 한데 힘을 모으게 된 것만이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아라와 수아는 준호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먼발치에서부터 뒤 를 밟아 왔다. 사실 아이들이라 겁이 나기는 했지만 준호와 황 교수가 우연찮게 병원 앞 트레일러에 갇히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능력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아라는 수아와 함께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가 트레일러 한 대 가 부서지고 도인들과 준호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자 용기를 냈 다. 그러나 입은 반대로 험하게 돌아갔다.

“이 바보야! 뭐하다가 그렇게 잡히냐?”

준호가 나와서 보니 아라가 이끌고 있는 것은 열 마리 정도의 소 떼와 원숭이 무리였다. 인도에서는 소가 신성시되기 때문에 이곳저곳에 편하게 엎어져 있는 소들이 많았던 것이다. 물론 나 름대로 주인이 고삐를 매 놓기는 했지만 그런 정도는 문제가 되 지 않았다.

수아가 불러낸 것은 역시 정령들이었는데 정령들은 사방에 바 람을 일으키며 상대방의 접근을 방해하고 있었다. 준호는 일단 아까 보았던 무서운 상대들이 없는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만다행으로 아녜스 수녀와 같은 무서운 적수는 없어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능력 없이 그저 주먹이나 좀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가끔 권총 정도를 휴대한 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총을 꺼내기가 무섭게 원숭이 떼에 뒤덮여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거나 쓰러져 버렸다. 아라가 아마도 총을 든 자를 우선적으로 집중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제법인데?”

준호는 욕을 먹었지만 솔직하게 아라를 칭찬해 주고 나서 양 손을 휘둘러 택견의 동작으로 사람들을 쓰러뜨려 갔다. 그런 준 호의 양편에 근호와 성곤, 증장 화상 등이 차례로 뛰쳐나왔다. 그들이 잡힌 것은 순전히 상대방의 총 때문이었는데, 상대방 이 총을 쓰지 못하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래도 상대방의 수가 무척 많아서 쓰러뜨리고 쓰러뜨려도 줄지 않았다.

그때 시타 교수는 상황을 보고 있다가 준호의 행동을 보고 이 사람들이 아군이라는 것을 깨닫고 영어로 말했다. 그러나 시타 교수는 정확한 사정은 몰랐기 때문에 이들이 준후를 쫓는 사람 들이라는 것은 꿈에도 깨닫지 못했다.

“도와주시오! 그리고 로파무드도 구해 주시오! 그녀도 이 병원 앞에 있소!”

시타 교수가 성곤의 팔을 잡으며 영어로 말하자 성곤이 눈을 빛냈다.

“그녀도・・・・・・?”

로파무드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그 한마디로 성곤은 이 병원 안에 퇴마사 일행이 모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들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러고 나자 성곤은 휘파람을 불었다. 준호와 시 타 교수 등은 알지 못했지만 그 휘파람은 성곤이 사람들에게 보 내는 신호로 단순한 휘파람 같았지만 말이나 다름없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 신호를 듣자마자 그들은 아까보다도 훨씬 강렬한 기세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현현파의 근호가 병원 안 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시타 교수도 달려 들어갔다. 그것을 보고 준호는 조금 마음이 켕겼다. 준호도 병원 안에 퇴 마사들이 모두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아무리 도와준 다고 해도 준호는 행여 준후가 해를 당할까봐 먼저 들어가서 준 후에게 빠져나가라고 말할 심산으로 병원 안으로 달려가려고 했 지만, 다음 순간 갑자기 앞을 가로막은 검은 그림자에게 덜미를 잡혀 단 한 방에 내동댕이쳐져 버렸다.

그때 아라가 비명을 질렀다.

“아녜스 수녀!”

아녜스 수녀였다. 그녀는 다른 두 여자의 손목을 잡고 있었는 데 한 명은 연희였고 한 명은 무련 비구니였다. 아녜스 수녀는 무련 비구니가 연희를 데리고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날듯 이 달려가서 그 둘을 기어코 잡은 것이다.

“너희…………?”

아녜스 수녀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에 그녀에게 잡혀 쓴맛을 본 바 있는 준호나 아라 등은 그녀의 눈빛 만 보아도 속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증장 화상 등 도인 세 사람은 그녀의 막강함을 잘 알지 못했던 탓에 연희와 무련 비구니가 그녀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을 보고 기합성과 함께 동시에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세 사람은 아녜스 수녀의 옷자락 한 번 건드려 보 지 못하고 저만치 나가떨어져 뒹굴었다. 그 세 명도 한다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녀가 무슨 수법을 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연희가 소리를 질렀다.

“모두 도망가요! 상대가 안 된다고요! 모두……………”

그러나 아녜스 수녀는 연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연희의 팔 을 장난감처럼 비틀었다. 연희가 비명을 지르자 아녜스 수녀가 말했다.

“이제………… 시간 없어.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용서하지 않겠어…….”

멋모르고 병원 안에서 근호가 소리를 치며 달려 나왔다.

“안에 그들이 없네! 이건……………”

그러다가 근호는 아녜스 수녀가 쏘아 낸 기운에 맞아 성곤이 있는 곳까지 데굴데굴 굴러가 버렸다.

그 뒤를 누군가를 업은 시타 교수가 따라 나왔는데 그의 등에 업힌 것은 분명 로파무드일 터였다. 로파무드는 시트에 싸여 있 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아녜스 수녀는 시타 교수가 누구인지 몰랐던 까닭에 시타 교수는 아녜스 수녀의 제지를 받지 않고 밖 으로 나올 수 있었다. 시타 교수는 곧장 달려서 준호 뒤쪽으로 가 어둠 속으로 숨어 버렸지만 아무도 그를 막아서지 않았다. 준호나 다른 사람들은 근호의 안위보다도 안에 퇴마사들이 없 다는 것에 더 놀랐다.

저만치에서 누군가가 호통을 질렀다.

“어떤 썩어 빠진 계집년이 내 제자들을 괴롭히느냐?”

그 소리는 적어도 백 미터 밖에서 지른 것 같았는데도 바로 코 앞에서 들려오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성곤과 증장 화상 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근호는 기뻐서 자신도 모 르게 외쳤다.

“사부님이시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달려왔다. 외곽에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막으려 했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머리 위를 마치 무슨 돌부리 뛰어넘듯 가볍게 뛰어넘으며 네 번이나 공중제비를 돌아 아녜스 수녀의 앞에 동시에 내려섰다.

도는 동작부터 내려앉는 동작까지 두 사람이 똑같았고 조금도 몸이 흔들리거나 소리조차 내지 않아서 아녜스 수녀마저도 감탄 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현현파의 사부인 현현이로였다.

“너, 이 미친 계집년아. 네년이 내 제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함부로 우리 애들을 잡아간거냐?”

현현이 중에서 성질이 급한 일로가 꾀죄죄한 용모에도 불구하고 매서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둥근 얼굴의 이로가 형을 달래 듯 말했다.

“저 여자는 우리말을 모를 겁니다. 욕해도 소용없어요.” 

그 두 사람은 비록 성격이 급하고 괴팍했지만 자기 제자들은 끔찍이 아꼈다. 그런데다가 도력 또한 대단했다.

아녜스 수녀는 기이하다는 듯 두 사람을 한참 동안 보더니 미 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또 이런 자들이 있었다니…………. 역시 세상은 넓구나.”

그러면서 아녜스 수녀가 손뼉을 치자 저쪽에서 한 무리의 사 람들이 날듯이 달려왔다. 그들은 승려 복장을 하고 있었고 모두 열일곱 명이었다. 그중 맨 앞에 선 사람만이 늙은 사람이고 나머 지는 젊거나 많아야 중년 정도 된 나이였다. 그들은 질서 정연하 게 모든 사람들을 에워싸고 빈틈없는 자세로 섰다.

이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형인 일로에게 말했다.

“저 땡중들………… 소림사 출신 아닙니까?”

“소림사 땡중들이 왜 시커먼 옷 입은 냄새나는 여자 편이람?” 

일로는 그 스님들의 내력이 결코 범상하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러나 그는 지기 싫은 듯 말 했다.

“십육나한진을 친다고 우리가 겁먹을 것 같으냐?”

일로가 손뼉을 치자 저쪽에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달려왔 다. 그들은 일행들이었던 백제암 사천왕 중의 세 사람과 박수무 당, 그리고 현현파의 다른 도인들이었다. 일로가 킬킬 웃으며 말 했다.

“이봐라. 백제암 동자승들아, 너희 넷이면 여기 이 땡중들의 상대는 될 게다.”

물론 동자승이란 백제암의 사천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증장 화상은 부상을 좀 입었지만 동료들이 나타나자 용기백배하여 달 려가 넷이 함께 자세를 이루었다.

네 사람은 사상의 방위를 밟으며 십육나한진의 안쪽에 자세를 잡고 섰는데, 워낙 외에 강하고 건장하여 네 명인데도 열여섯 승려들에게 그리 뒤질 것 같지 않았다.

일로가 아녜스 수녀를 쳐다보며 외쳤다.

“저 시커먼 여자는 내가 맡는다.”

그러고는 이내 십육나한을 이끌고 온 무색 화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은 동생이 맡게나. 그러면 우리 제자들이 남으니 우리가 이긴다. 핫핫핫……!”

일로는 몹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상황이 유리해지자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듯 크게 웃었다. 물론 사람 수는 아직 도 아녜스 수녀 측이 훨씬 많았지만 일로의 눈에 보통 사람은 들 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로는 일로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그래도 네 녀석이 십육나한진을 격파하지는 못할 건데요?”

“그러면 우리 제자들더러 도우라고 하자. 팔합진을 펴면 이기 고도 남는다! 적어도 지지는 않는다!”

아녜스 수녀도 이를 악물면서 손뼉을 탁탁 연달아 쳤다. 아녜 스 수녀가 현현이로의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역시 대단 한 능력을 지닌 그녀는 한눈에 세력의 강약을 알아본 것이다. 사실 여기 몰려온 도인들과 승려들은 한국의 도인과 은거한 기인들 중 절반이 넘는 수였다. 그들이 중요한 용의자인 준후가 박 신부 및 현암 등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어서 최고의 실력자들만을 모아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만 모아도 이단 심판소나 기타 어떤 세력 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아녜스 수녀는 타보트의 예언을 공개하여 다른 여러 파벌들을 단시간 내에 끌어모으기는 했지만 중요한 능력자들을 불러올 시간이 별 로 없었다. 또 각 파벌의 정예들은 이미 대부분 목숨을 잃은데다 흩어져 있던 탓에 현재 상황은 아녜스 수녀에게 불리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아무리 동분서주하고 이단 심판소와 용화교 의 힘을 끌어모았어도 모든 자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던 건 아니었다.

그녀가 손뼉을 치자 사제복을 입은 몇 사람들이 나왔다. 그들 은 우리말을 비롯하여 각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통역관들이었다. 

“당신들은 왜 몰려온 거죠? 왜 난리를 치는 건가요?” 

통역관이 아녜스 수녀의 말을 상당히 능숙한 우리말로 옮겨 주자 일로가 소리를 쳤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너희는 대체 뭐기에 다짜고짜 내 제자 들을 습격했느냐? 그리고 지금도 너희는 우리쪽 사람을 둘이나 잡고 있지 않느냐?”

“나는 당신들을 습격하려고 한 게 아니라 이 여자를 잡으려 한 것뿐이다!”

“여자? 그 여자를 왜 잡으려 하는 거냐? 그 여자는 우리에게 중요한 증인이란 말이다!”

준호와 아라 등은 아녜스 수녀의 입에서 연희가 라미드 우프 닉스라는 말이 나올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아녜스 수녀는 징벌자를 찾기 위해서는 연희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 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해서 연희가 자신을 알게 되면 죽 을 것이고 그러면 연희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이 여자는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그러나 일로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 여자는 우리나라 사람이니 너는 간섭하지 마라!”

아녜스 수녀는 답답했지만 사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 런데 그때 병원 문 앞에서부터 누군가가 달려왔다. 그 사람은 뚱 뚱한 늙은 여자로 바이올렛이었다. 그녀가 숨이 턱에 닿을 듯 헉 헉대며 승려들 사이를 뚫고 나와 아녜스 수녀 쪽으로 달려가도 아무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준호와 아라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몰라 멍하니 서 있는데 갑자기 수아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저 할머니 나빠!”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은 물론 한국인들뿐이었으나 그들도 수아 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녜스 수녀도 바 이올렛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거기서!”

그러자 바이올렛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잠시 헉헉거리다가 말했다.

“숨차군요……. 당신이 여기에 올 줄 알았다면, 찾아다니지않는 건데…”

“찾아? 나를?”

아녜스 수녀가 날카롭게 묻자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당신에게 꼭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게 뭐지?”

“아주 중요한 이야기죠. 아무튼………….. 나를 적으로 여기지는 말아줘요. 나는 이제 당신 편이니까.”

바이올렛이 아녜스 수녀에게 다가서려 하자 아녜스 수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말고 거기서 얘기햇!”

평상시 같았으면 아녜스 수녀는 바이올렛 정도 되는 자는 신 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현이로와 같은 강적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 그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자 칫 잘못하다 허를 찔리면 낭패니까 말이다.

아녜스 수녀가 사나운 기세로 외치자 바이올렛은 할 수 없다 는 듯 두 팔을 으쓱해 보이고는 말했다.

“당신들 여기 온 것은 그들을 잡기 위해서죠? 하지만 늦었을 거예요. 아마 떠났을걸요?”

“이미 안다. 지금 나를 약 올리려는 건가?”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퇴마사들이 이 병원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준후가 없다고 생각하자 도인들은 맥이 빠졌고 아 라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황달지 교수와 승현 화상이 트레일러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오자, 준호 등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한편, 바이올렛은 아녜스 수녀에게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에게 타보트에 씌어 있는, 징벌자가 태어날 장소를 알려 주려고 하는 거예요! 당신이 이미 그것을 해석했다면 그만이지 만, 그렇지 않다면 내 말을 들어야 할걸요?”

아녜스 수녀가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그래요, 내가.”

“믿을 수 없는데?”

“이봐요. 물론 그들은 나의 동료였어요. 아직도 나는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해요. 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틀렸어. 나는 악 마에게서 세상을 구하고 싶어요……..”

준호는 바이올렛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 멍하니 있었지 만 연희와 황달지 교수 등의 안색은 파랗게 질렸다. 다른 한국 도인들은 그녀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연희가 바이올렛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급히 소리쳤다.

“미스 바이올렛! 안 돼요!”

그러자 아녜스 수녀가 연희를 잡은 손목에 힘을 주었다. 연희의 몸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차갑게 굳어져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바이올렛은 그런 연희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이 더 중요해요.”

바이올렛이 막 아녜스 수녀에게 징벌자의 탄생 장소를 말하려 는 순간, 병원 문 쪽에서 또 다른 사람이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바이올렛! 무슨 짓이오?”

그 사람이 비틀거리며 병원 쪽으로 걸어왔다. 성난큰곰이었 다. 그의 온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옆구리와 어 깨, 그리고 머리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가 외치자 바이 올렛도 성난큰곰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 살아 있었군요!”

성난큰곰은 움직이기는커녕 일어나기도 힘든 상태 같았지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다음 순간 무서운 속도로 바이올렛에게 달려갔다. 상처가 벌어졌는지 그가 달려가며 내딛는 걸음걸음마 다 피가 튀어 사방에 꽃처럼 날렸다. 피를 뿌리며 달려가는 그의 처절한 표정 때문에 도인들이나 아녜스 수녀 쪽의 사람들 누구 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아저씨?”

준호와 아라는 놀라서 멍하니 성난큰곰을 바라보는데, 현현일로가 소리를 쳤다.

“저 사람, 네가 아는 자냐? 폐허에 갔다가 다 죽어 가는 걸 구해 왔는데.”

다 죽어 가는 성난큰곰을 구해 온 것은 현현이로와 다른 도인 들이었다. 그들은 주술 막을 뚫어 보려고 다시 신전 부근에 갔다 가 주술 막과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여 부 근을 수색하다가 그들은 거의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성난큰곰 을 발견한 것이다.

성난큰곰이 바이올렛에게 다가가자 아녜스 수녀가 무섭게 호통을 쳤다.

“오지 맛! 도대체 무슨 수작들이야?”

아녜스 수녀가 소리를 치자마자 성난큰곰의 발 앞에서 퍽 하 는 소리가 나며 땅이 날카롭게 쟁기질한 것처럼 파여 나갔다. 성난큰곰도 일단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멈추자마자 비 틀거리면서 그 자리에 풀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도 그 는 바이올렛을 향해 외쳤다.

“당신은…… 어째서…………?”

바이올렛은 성난큰곰이 불쌍한 듯,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윽고 성 난큰곰에게 말했다.

“그들은 틀렸어요…………… 징벌자는・・・・・・ 검은 바이올렛에게서 태어나요. 그 여자를 그냥 둘 수는 없어요.”

성난큰곰도 그 이야기에 놀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성난큰곰뿐만 아니라 아녜스 수녀도 놀란 듯 돌연 눈을 크게 떴다.

“마녀 협회의 바이올렛?”

아녜스 수녀가 자신도 모르게 외치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여자가 징벌자의 잉태자예요! 분명히∙∙∙∙∙.. 그여 자는 사악한 방법을 썼을 거야! 그 아기는 악마의 자식일지도 몰 라요!”

그 말에 성난큰곰이 화난 듯 말했다.

“당신은・・・・・・ 복수심에 눈이 멀었다! 마녀 협회를 망가뜨린 바이올렛에 대한 분노 때문에 눈이 먼 거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친구들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친구들을 믿었어! 하지만 그들은 틀렸어요!”

“그렇지 않다!”

성난큰곰이 크게 외치자 바이올렛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들은 악마에게 이용당하고 있어요! 블랙 엔젤이 지금껏 암 암리에 그들을 돕고 살려 둔 것도 그들의 의도가 자신이 바라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었다고요! 징벌자의 파수꾼 역할을 시키기 위해서요! 그런데도 그들이 옳은가요?”

“악마와는 상관없다! 그건…………….”

성난큰곰은 다시 외치려 했으나 상처의 고통이 극심한 듯 소 리도 지르지 못하고 피를 뿜으면서 뒤로 벌렁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아녜스 수녀가 손짓을 하려고 하자 바이올렛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 사람에게 손대지 말아요! 그 사람도 피해자예요! 그를 건드리면 나는 죽어도 한마디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는 아녜스 수녀에게 침착하게 덧붙였다.

“당신, 세상을 구하고 싶겠죠?”

아녜스 수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연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아녜스 수녀는 성난큰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천왕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성난큰곰의 몸을 안았다. 사천왕들도 덩치가 큰 편이라 그들만이 성난큰곰을 제 대로 부축할 수 있었다.

일로가 대단히 서툰 영어로 소리를 쳤다.

“검은 옷 입은 계집아! 언제까지 우리 사람들을 잡고 있을 거”냐?”

그러자 바이올렛이 아녜스 수녀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으니 모두 보내 줘요. 단, 연희 씨는 안돼요. 아주 중요해요.”

“어느 여자가 연희인가?”

아녜스 수녀는 연희와 무련 비구니를 각각 잡고 있는 양손을 흔들어 보였다. 바이올렛은 오른쪽이 연희라고 말했다. 아녜스 수녀는 무련 비구니의 몸을 가볍게 일로 쪽으로 날려 버리며 말 했다.

“이제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마시오.”

무련 비구니는 아녜스 수녀의 힘에 의해 온몸이 얼어서 딱딱 하게 굳어 버린 상태였다. 일로는 그녀의 몸을 가볍게 받아들어 땅에 내려놓고는 양손을 펴서 그녀의 정수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곧 무련 비구니는 후욱 하고 숨을 내쉬며 몸이 풀려 비틀하고 넘어졌다. 이로가 그녀를 부축하여 뒤에 있던 제자들에게 넘겨 주자 아녜스 수녀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제법인데.”

현현일로가 노기를 띠며 외쳤다.

“둘 다 내놓아라!”

그 말을 듣고는 아녜스 수녀도 화를 냈다.

“한 명이면 됐지, 둘 다 달라고? 어디 빼앗아 가보시지?”

“함부로 손을 놀리는 냄새나는 계집아! 건방지게 굴면 머리칼 을 다 뽑아 버릴 테다!”

현현일로는 영어가 서툴렀지만 의외로 영어로 욕하는 솜씨만 은 능숙했다. 아녜스 수녀는 원래 정체를 감추는 수단으로 머리 칼을 이용해 왔기 때문에 머리 이야기가 나오자 습관적으로 무 섭게 화를 냈다.

그때 바이올렛이 재빨리 나서며 그 앞을 막았다.

“잠깐만! 당신들은 한국에서 온 분들이죠?”

“그렇소.”

그래도 영어에 능숙한 현현파 근호가 뒤에서 말하자 바이올렛이 말했다.

“듣기에는 준후를 잡으러 왔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소.”

그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싸울 필요는 없잖아요? 모두 비슷한 목적을 가졌는데?”

“어째서 비슷한 목적이란 말이오?”

“지금 여기 계신 수녀님과 다른 사람들도 준후와 그 일행을 추 적하고 있어요. 그러니 공통의 목표를 가졌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그 말을 듣고 근호나 성곤 등은 화를 냈다. 바이올렛의 속이 너무도 뻔히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를 속이려 하지 마시오! 우리가 준후에게 볼일이 있는 것은 맞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의 적은 아니오!” 아녜스 수녀도 날카롭게 외쳤다.

“그들 편이면 가만둘 수 없겠군!”

그때 여태껏 조용히 있던 무색 화상이 천천히 걸어와서 그들의 사이를 막고 섰다.

“내 말을 들어 보시오. 나는 무색이라 하오. 지금은 용화교에 몸 을 담고 있지만 한때는 소림이나 관음사의 화상 노릇도 했었소.” 

도인들은 무색 화상이 나이가 많고 수양이 깊은 것 같아 그를 무시하지 못하고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무색 화상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수녀님은 교황청 이단 심판소의 아녜스 수녀님이 오. 지금 우리가 목전에 둔 것은 아주 큰일이오. 사사로운 감정 으로 나서서는 안 될 것이며, 자기편의 입장만 내세워도 좋지 않 소.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기 때문이오.”

그러면서 무색 화상은 도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시들께서는 준후라는 아이를 잡는 것이 가장 큰일인 것 같 군요. 그리고 박 신부나 현암과도 아는 사이여서 그들을 가급적 도우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소만…………….

“그렇소.”

성곤이 현현이의 눈치를 힐끗 보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일 로, 이로는 둘 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금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고 계시 오?”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좋소. 아마도 그 사람들은 지금껏 옳은 일을 많이 해 왔고, 당 신들도 과거 신세를 진 일이 많은 것 같군요. 그래서 그들을 믿는 것 아니겠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색 화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나도 그 사람들을 만 나고 같이 동행을 해 보았소. 그들은 결코 사악한 무리가 아니 며, 항상 정당하고 바르게 행동하려 노력한다는 것을 나도 믿습 니다.”

그 말을 듣고 아녜스 수녀의 눈꼬리가 이상하게 곤두섰다. 그 러자 무색 화상은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런 것을 다 보고 있는 것처럼 재빨리 말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가 있는 법. 그들은 물론 자신들 이 옳다고 믿고 있소이다. 그리고 정당한 길을 걷는다고 여기고 있소. 하지만 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소. 악마의 탄생을 그들은 방조하고 오히려 도우려 하고 있소. 우리는 그들을 막아야만 합 니다.”

성곤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무색 화상이 재빨리 말했다.

“입장이 다른 것은 알겠지만, 이러면 어떻겠소? 우리는 그들 이 하는 일을 막는 것이 목적일 뿐, 그들을 해치고 싶은 뜻은 없 소. 아녜스 수녀, 우리는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징벌자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면 구태여 그들과 충돌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소?”

무색 화상이 이번에는 성곤과 도인들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도 그들을 해치고 싶지는 않소. 나는 현암이라는 청년에 게 많은 신세를 졌으며, 아녜스 수녀도 박 신부에게 목숨을 구원 받은 일이 있소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나서는 것은 보다 큰 대의 때문이오.”

“대의라고?”

“그렇소. 이제 세상을 어지럽힐 자의 탄생이 임박해 있소. 그것을 막아야 할 것 아니겠소?”

“하지만 네놈들을 어떻게 믿고?”

“그자를 옹립하여 세상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자들도 물론 있 었소만, 그들은 거의 궤멸되었소. 우리는 종교인들인데, 어찌 그 런 허황된 마음을 품겠소?”

일로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자 성곤이 외쳤다.

“하지만 당신들은 분명 그들을 해칠 텐데? 난 믿을 수 없소.” 

그러자 무색 화상이 노련한 솜씨로 되받았다.

“내 당신들에게 약속하리다. 우리는 일부러 그들을 쫓아가지 는 않겠소. 우리의 목적은 그들을 잡는 것이 아니거든.”

“하지만 공통의 목적을 쫓는다면 한곳에서 만나게 될 텐데? 그때는 어쩌겠소?”

성곤이 지적하자 무색 화상이 대답했다.

“마주치지 않고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면 그뿐이지만 만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먼저 공격하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우리 일만 하겠소. 단 그들이 먼저 공격해 온다면 별수 없지만

“말이오.”

성곤이 알기에 퇴마사들은 결코 사람을 공격하지 않으니 무색 화상이 약속만 지킨다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그걸 어떻게 믿소?”

성곤이 조금 누그러진 기세로 외치자 무색 화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 어려우실 테니, 우리와 동행합시다. 그러면 되잖소?” 

“뜻이 다른 사람들끼리 마주치면 어떻게 손을 쓰지 않을 수 있 단 말이오?”

무색 화상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미 이들의 정체와 일이 돌아가는 사정을 거의 다 눈치채고 있었다.

“어차피 당신들은 준후라는 아이를 잡으러 여기까지 온 것 아 니오? 그렇다면 그 아이는 손을 쓰지 않고 잡을 수 있다고 봤 소?”

그 말에 성곤은 말문이 막혔다. 무색 화상은 담담히 웃다가 다 시 말했다.

“염려 마시오. 우리가 그들에게 손을 쓰더라도 그들을 해치지 는 않을 것이오. 다만 그들을 제압하여 당신들에게 손 하나 대지 않고 넘겨 드릴 터이니 당신들은 그들의 신병을 인수해 가시오. 우리는 다만 징벌자만 없애면 그만이니까 말이오.”

성곤 등은 무색 화상의 말에 마음이 많이 기울었다. 그들은 징 벌자의 일에 대해서는 깊이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 중에서 도승현 화상과 사천왕만이 도혜 선사의 유지와 한빈 거사가 남 긴 말을 약간 얻어들은 바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성곤 등도 현 암이 맞을 것이라고 짐작해 온 것뿐이지만 직접적으로 확신하고 있지는 않았다.

더구나 지금 승현 화상은 부상 때문에 쓰러져 있었고 사천왕 은 원래 두뇌가 영민하거나 말을 잘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 었다. 그 때문에 자신보다 훨씬 윗사람들인 현현이가 있는 앞 에서 이렇다 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울 수 없었다. 그들이 번 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자 현현일로가 고함을 쳤다.

“제길! 너희는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그 말은 무색 화상의 말에 동의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사천왕 중 광목 화상이 조금 머쓱해하며 일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도 전에 분명 한빈 거사께서 현암 시주에게 하던 말을 들은 적이 …………..”

그러자 현현일로가 버럭 고함을 쳤다.

“거사님께서 실수하신 거다! 송구스럽기는 하다만…….”

“거사님께서 어떻게………….”

“그렇지 않고서야 천지 공사가 왜 실패했겠느냐? 그분이 왜 목숨까지 잃으셨겠느냐?”

그 말을 듣자 사천왕도 뭐라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한빈 거사가 현암에게 유지를 남겼다고는 해도, 한빈 거사 자신이 잘 못 생각했다고 하면 그뿐이었다. 실제로 한빈 거사는 그러한 운 명을 막아 보기 위해 천지 공사를 드리다가 실패하여 목숨을 잃 게 되지 않았던가?

그것을 생각하니 사천왕조차도 박 신부와 현암 일행이 정말 그릇된 길을 걷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자 이로가 일로보 다는 조금 신중하게 무색 화상에게 말했다.

“동행하자 하셨는데 그것도 좋소. 단, 조건이 있소이다.”

그 순간, 아라는 이제 일이 틀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이들 중 준호와 수아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아라가 그나마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확실하지는 않아도 들으면 들을수록 조금 씩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이었다.

황달지 교수도 우리말을 하지 못했지만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라는 그래도 잘못 들었겠거니 했는데 도인들이 우리말로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는 더 이상 도인들조차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라가 조용히 준호에게 말했다.

“튀자.”

“음….”

준호도 얼굴을 구겼다. 아라와 준호 등도 퇴마사들의 일행이 다. 자신들도 연희처럼 잡힌 꼴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더 있으면 가고 싶어도 못 가. 조용히 사라지자.”

준호와 아라는 수아와 함께 조금씩 뒷걸음질해서 사람들의 시 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황달지 교수와 준호 뒤쪽에 숨어 있 던 로파무드를 업은 시타 교수가 그들의 앞을 막아 주다가 다시 서서히 뒷걸음질해서 도망쳐 갔다. 사실 도망칠 수 있을지는 의 문이었다. 땀이 줄줄 흘렀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는 하나 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바이올렛이 배신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 어쩌면 성난큰곰이 아녜스 수녀의 손아귀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것, 퇴마사들은 이단심판소와 용화교 등의 모든 세력들의 피할 수 없는 추적을 받게 되었으며, 거기에 덤으로 한국 도인들의 추적 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 등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오락가락하자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너희들! 어디 가는 거냐?”

현현파 근호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아이들은 죽어라 하고 달 리기 시작했고 황달지 교수와 시타 교수도 역시 정신없이 달아 났다. 어찌되었거나 하도 많은 일을 겪은 다음이라 위기 의식이 꽉 차 있어서 같은 편이 아니라고 결정하자 그들이 전부 악귀나 살인자같이 느껴졌다.

그들 뒤를 여러 사람이 소리 지르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급한 나머지 수아를 들쳐 안고 아라의 손목을 마구 끌면 서 달렸다. 뒤에서 황달지 교수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달리다 넘어진 모양이었으나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마구 터지고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준호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마구 달려만 갔다. 한참 달려가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수아와 아라, 그리고 로파무드를 업고 뛰어 숨 이 턱에 닿은 것 같은 시타 교수만이 옆에 있었다.

그들의 뒤를 더 이상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뭔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며 싸우는 듯한 소리 는 또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라가 헉헉거리며 일단 한숨을 돌린 뒤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글쎄. 신부님 일행이 병원에 없으면 어디 갔을까..? 큰일이네.”

그들은 황달지 교수를 기다려 보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시 타 교수는 연희를 만나면 연락처를 전해 주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 다른 일은 잘 몰라서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울상이 되었다. 이 낯선 땅에서 보호자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

아라가 징징거리자 준호는 박 신부가 도인들에게 전해 주라 고 적어 주었던 쪽지 생각이 났다. 기대에 부풀어서 그것을 펼쳐 보니 거기엔 아이들을 떼어서 무조건 한국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씌어 있지 않은가? 준호는 기가 막혀서 연신 한숨만 쉬었다.

그때, 수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그러나 하고 눈을 돌려서 그쪽을 보던 아라와 준호는 그만 공포로 그 자리에 얼어 붙고 말았다. 시커먼 그림자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것도 잘 아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의 그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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