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1화 – 그들이 살아가는 법 1 : 박 신부의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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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외전 1화 – 그들이 살아가는 법 1 : 박 신부의 거처


박신부의 거처

“들어가세.”

낡고 녹이 슬었지만 꽤나 육중해 보이는, 그러나 잠겨 있지는 않은 대문을 밀어 열며 박 신부가 말했다. 그러나 뒤에 서 있던 현암은 머 쓱한 듯 쉽게 걸음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암보다도 더 뒤에 처져 있는 준후는 어느새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기고 한쪽 눈만 빠끔 히 내밀고 있었다. 박 신부는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자니까.”

그러자 현암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굳이 폐를 끼치지 않아도…………….”

“폐 끼친다고 생각할 것 없다니까.”

박신부는 웃으며 현암의 어깨를 지그시 잡고 힘을 주었다.

“정말 반갑네. 그리고 현암 군, 아, 이렇게 불러도 되겠나? 자네도 어른이니 막 부르기도 그렇고……………. 호칭이 영 마땅치 않아서 말일세.”

“괜찮습니다. 연장자시니까요. 하지만…………….”

현암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 신부는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그게………… 저는 정말로…………….”

“사람들이 보네.”

박신부가 넌지시 던진 말에 현암은 바로 고개를 숙이며 대문 안으 로 한 발자국 옮겼다. 안으로 들어서던 현암은 준후 생각에 발걸음 을 멈추고 전봇대 쪽을 돌아보았으나 전봇대 뒤쪽에는 아무도 없었 다. 현암이 조금 놀라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느새 준후가 현암의 등 뒤를 지나 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현암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박 신 부가 다시 웃으며 현암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철컹 하는 쇳소리 가 단호하게 울렸다. 문이 닫힌 후 현암은 문 안쪽의 마당을 둘러보 며 말했다.

“넓군요.”

마당은 밖에서 짐작한 것보다 상당히 넓어 거의 수십 평은 되었다. 몇 그루의 나무와 여기저기 무성히 돋아난, 결코 잔디로는 보이지 않는 잡초들. 그나마 한쪽은 그런 잡초조차 없이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뜰 한쪽 구석에는 조그마한 연못까지 있는데, 멀리서 언뜻 보기에도 물고기가 살기커녕 물 빛조차 시퍼렇다. 퍽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은 티가 역력한데, 박 신부가 변명하듯 말했다.

“사제 서품받는 동안 내버려 두었더니 이 모양이 되었네. 요즘은 여기서 지내기에 집 안은 그래도 대충 치웠지만 마당까지는 손볼 여유가 없어서.”

“신부님들은 사제관에서 지내시지 않나요?”

“사제관에서 지내는 건 본당 신부라고, 교구를 배정받은 사제야.”

“그럼 본당 신부가 아니신가요?”

현암이 다시 묻자 박 신부는 장난기 어린 어조로 가볍게 말했다.

“잘렸어.”

“네?”

“잘렸다고 했네. 파문당했지.”

그 말에 현암은 짚이는 것이 있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혹시・・・・・・ 신부님의 능력 때문에…………?”

박 신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밝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허나 난 교단의 입장도 이해해. 교리에 따르려면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 조용히 티 안 나게 잘린거니 괜찮아.”

박신부는 쾌활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진 것을 느 낀 현암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정식 신부님이 아닌 건가요? 아니, 이제 아니게 된 건가요?”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사제복을 입으셨잖아요.”

그 말에 박 신부는 씩 웃으며 반문했다.

“이게 사제복 같아 보이나?”

“아닌가요?”

“이건 전투복일세.”

박 신부는 말하고 껄껄 웃었다. 현암은 조금 머쓱해졌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물었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박 신부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겉보기에는 같지. 허나 사제복은 교인들을 이끄는 사제로서 입는 것이지만, 난 그럴 수 없잖나. 난 싸우기 위해 입는 거니 전투복 이랄밖에.”

“그런 겁니까?”

“그런 거야. 자자, 들어가자고, 이런 폐허 같은 뜰에 서서 뭘 하겠나?”

그러면서 박 신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준후가 어디 갔지?”

그러고 보니 현암이 박 신부와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준후는 또 어 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현암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말 했다.

“저기, 기둥 뒤에 있네요.”

준후는 아까 전봇대 뒤에 숨었던 것처럼 한쪽 눈만 살짝 내밀고 그 늘에 몸을 숨긴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현암은 웃으며 말했다. “

꼭 고양이 같네요.”

원래는 도둑고양이라고 생각했으나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그냥 고양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준후는 그 말 한마디를 듣자마자 그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현암은 준후가 화난 것 같아 당황했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현암은 미안한 생각이 들어 준후가 몸을 숨겼던 기둥 쪽으로 걸어 갔다. 그런데 가 보니 준후의 모습은 또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현암 이 박 신부에게 뭐라 말하려 고개를 뒤로 돌리자 어느새 준후는 신 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대체 언제 옮겨 간 것인지 알 수 없었 다. 준후가 커다란 눈을 들어 현암을 빤히 바라보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현암이 얼굴을 조금 찌푸리자 박 신부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달래려는 듯 말했다.

“자자, 일단 들어가 차나 한잔하세.”

“신부님, 아무래도…………….”

“왜, 그럼 차가 아니라 술이라도 한잔해야겠나? 술 좀 하나?”

“신부님도 술 드십니까?”

그 말에 박 신부는 껄껄 웃었다.

“매일 마셨어.”

현암은 조금 놀랐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미사드릴 때 영성체 배령을 하는데, 그때 포도주를 마시잖나. 그래서 사제들에겐 금주 규정이 없네. 지금은 정식 미사 집전을 못 하니 자주 안 마시지만…………….”

“그랬습니까? 잘 몰랐………….”

“들어가자니까.”

결국 현암은 박 신부에게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자네, 대단하던데.”

생뚱맞게 생긴 홍차 잔을 앞에 놓고 있던 박 신부가 현암에게 말했 다. 현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 신부가 덧붙여 말했다. 

“자네가 쓴 힘은 뭔가? 무슨 무협 영화에서 나오는 힘 같던데.”

그 말에 현암은 짧게 답했다.

“부산물입니다.”

“음? 뭐라고?”

“그냥 부산물이라구요.”

“무엇의 부산물인데?”

“구도를 통해 정진하는 게 원래의 목적인데,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이라더군요. 이런 힘을 쌓으려 해서 쌓이는 게 아니라는 뜻이고, 이런 힘 따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기도 하죠.”

“중요한 건 구도라는 의미인가?”

“당연하죠.”

“자네도 종교와 연관이 있나?”

“저는 믿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뭐?”

“제가 지닌 힘은 불교와 연관이 깊습니다. 도교・・・・ 아니, 도교라 기보다는 선도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그러니까・・・・・・ 내력은 불교의 것이고 도력이나 기술은 선도의 것이죠.”

“복잡하군.”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직 젊은데 언제 그렇게 긴 수련을 했지?”

그 말에 현암은 슬픈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길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하지도 못했구요. 전부 다른 분들이 넣어 준 겁니다.”

박 신부는 놀란 표정으로 감탄하듯 말했다.

“허어. 그게 가능한가? 난 내력이란 게 정말 있다는 말도 처음 들었는데.”

현암의 입가에 슬픈 듯한 미소가 살짝 어른거렸다.

“내력의 축적이란 것 자체가 일반인에게는 아예 적용되지 않는 개 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백만, 천만에 하나 있 을까 말까 하다더군요. 나머지는 아무리 용을 쓰고 수련을 해도 아예 시작도 할 수 없다는 거죠. 돌연변이라고 말한 분도 계셨습니다만.”

“그럼, 자네가?”

현암의 미소는 무척 서글퍼 보였지만 어딘가 일그러진 조소 같기 도 했다. 입꼬리를 조금 더 일그러뜨리며 현암은 대답했다.

“아닙니다. 물론 저도 희귀한 체질이긴 하답니다. 거사께서 그러 시더군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겠는가? 거사님은 누구신데?”

“제게 선도의 길을 인도해 주신 분입니다. 저를 두 번이나 살려 주셨구요.”

“그런가. 그런데 자네가 좋은 체질인가?”

현암은 더 슬프게 웃어 보였다.

“반대입니다. 애당초 내력 축적과는 쥐꼬리만큼도 연관이 없을뿐 더러 내력이 주어져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체질이라더군요.”

“그런데 어떻게 내력을 쓰나?”

“제게 전도해 주신 분의 내력이 너무도 강하고 맑아서 저 같은 놈 조차 이용할 수 있을 정도였지요. 내력의 축적은 절대 아무나 시작 할 수 없지만, 내력을 쌓을 수 있는 사람에게서 전도받으면 쓸 수 있 다더군요. 쌓인 내력으로 발휘하는 힘을 공력이라고도 부르고요.” 

“그런 거였나?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지?”

박 신부가 조용히 묻자 현암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력을 넣어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모르네.”

“내력이라는 건 달리 말하면 생명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둔 것이라고 하면 비슷 하게 설명이 될까요. 그분의 내력은 무려 육십 년 이상을 모은 것이 었습니다. 한 사람이 육십 년 동안 움직일 힘을 한 번에 쓴다면 어떤 힘이 나오겠습니까?”

“어마어마하겠군.”

“그런데・・・・・・ 그걸・・・・・・ 그걸 저에게 전부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분은・・・・・・ . 그런 큰 힘을 사람에게서 한꺼번에 빼내면 어떻게 되겠 습니까?”

박 신부는 심각한 표정만 지었고 현암은 참담하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물음에 대답했다.

“네. 식물인간처럼 되셨습니다. 미라처럼 바싹 말라 버려서 혼자서는 거동도 하실 수 없는 몸이 되셨죠. 다시는 내력 축적은커녕, 뜰 산책조차 하실 수 없게 된 겁니다.”

“저런……. 그랬는가.”

현암은 눈물을 조금씩 흘렸지만 여전히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생판 본 적도 없는 저 같은 놈을 살리려고 그러셨습니다. 스님이 시고, 법명을 도혜라 하십니다. 제게 깨우침도 주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 얻은 능력을 어떻 게 써야 하는지 말입니다.”

“훌륭한 분이시군.”

현암은 울다가 차가운 조소를 띠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박 신부 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 그런데…….”

“그런데 뭔가?”

“보통 사람이라도 그 정도의 내력을 받았다면 저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더러운 체질 때문에…………….”

현암은 오른손을 꽉 쥐어 보이며 점점 빠르게 말했다. 말하면서 억 눌렀던 흥분이 터져 나오는 듯, 현암의 눈이 점점 충혈되며 붉어져 갔다.

“……그 귀한 힘을 고작 오른팔밖에는 돌리지 못합니다. 오른팔 외에는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란 거죠. 신부님은 절 보고 대단하다 하셨지만, 그게 아닙니다. 받아 놓고도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야말로 폐물, 쓰레기, 기생충 같은 놈이 저예요. 이렇게 귀한 것을 허비하고 쓸데없이 만드는 밥통이 바로…………….”

현암이 흐느끼자 박 신부는 차분하지만 엄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하게.”

“저・・・・・・ 저는…”

박신부가 말했음에도 현암은 마침내 눈물을 터뜨렸다. 박 신부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도혜 스님 같은 훌륭하신 분이 그런 희생을 치르신 걸 의미 없게 하고 싶나?”

박신부의 말에도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그・・・・・・ 그분은 단지 좋은 마음으로 저를 구하셨을 뿐일…… 겁 니다. 그러나 저・・・・・・ 저는 정말 쓸모없는…….”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제부터라도 쓸모 있게 만들게. 그럼 되잖나.” 

그럼에도 현암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움직이려 하자 박 신부는 기 회를 주지 않고 말했다.

“해동밀교 본산에서 있었던 일, 잊지 않고 있네. 자네가 정말 쓸데 없는 사람이었다면 혼자 도망쳤을 테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생전 처 음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주와 그렇게 끝까지…”

박 신부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말하는데 어딘가의 구석에서 흐흑 하는 가냘픈 소리가 울려왔다. 준후가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현암은 주춤하며 당혹해했고 박 신부도 헛기 침을 했다. 현암이 얼른 작은 목소리로 박 신부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박신부는 현암에게 아니라는 듯 눈짓을 해 보인 다음 일부러 과장 된 큰 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자자,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리 쉬세. 피곤하지 않은가?”

준후의 숨죽인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억지로 참는 것인지, 입 을 막기라도 한 것인지 소리는 더 작아졌지만 그럴수록 두 사람의 귓속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현암은 죄지은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 를 떨어뜨렸고 박 신부도 당황한 표정이 되어 급히 탁자 위의 리모 컨을 집어 들며 말했다.

“우리・・・・・・ 함께 TV라도 보세.”

화면에 뉴스가 나왔다. 그것도 아나운서가 막 ‘오늘의 사건 사고・・・

‘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현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박 신부에게 속삭였다.

“딴 데 돌리세요. 만화라도…………….”

“그렇군, 어허헛. 어이쿠. 이거 만화 영화도 하는군.”

박 신부는 일부러 준후 들으라고 크게 소리치며 TV 채널을 돌려 대는데도 정작 만화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박 신부가 얼굴이 벌겋 게 되도록 열심히 리모컨을 눌러 대는 사이, 현암도 다급한 표정으 로 화면과 리모컨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만화는 아니어 도 영화 장면 하나가 화면에 떠올랐다.

박신부는 복음이라도 들은 기분으로 일부러 크게 외쳤다.

“어헛! 이 영화 재미있겠는데?”

현암도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그러게요! 와, 멋지네요!”

그들의 서툰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 영화에 관심이 생겨서인 지 준후의 조그맣던 울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다가 마침내 잠잠해 졌다. 그래도 두 사람은 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신출귀몰한 꼬마는 필경 어딘가 숨어서 엿보고 있을 터였다. 따라서 화면을 보 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영화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두 사 람이 한참을 큰 소리로 떠들어 대자 효과가 나타났다. 아무리 신동 이라도 애인지라 호기심이 들었는지 저 뒤에서 사라락 하고 다가오 는 발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박 신부는 비로소 조금 안심한 표정으 로 현암을 보고 잘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현 암이 갑자기 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몸을 일으켰다. 박 신부는 깜짝 놀라 외쳤다.

“왜・・・・・・ 왜 그러나, 현암군?”

현암은 토사물을 흘리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입을 막고 박 신 부를 바라보았다. 화장실을 찾는 것 같아 손으로 가리켜 주니 현암 은 쾅하는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초인간 적인 속도로 달려간 것인데, 서둘러 움직일 반동을 얻으려 마루를 박차느라 굉음 소리가 들린 것이다. 마룻바닥이 꺼지지는 않았으나 눈에 띌 정도로 굽어서 삐걱거릴 것 같았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고 양이처럼 다가오던 준후의 자취도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박 신부 는 맥이 빠져서 한숨을 쉬었다. 화장실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 렸다. 현암이 세심하게 마음을 쓴 듯, 물을 먼저 내리고 구토한 것 같 아 거슬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박 신부는 그런 점이 더 마음에 걸렸다.

현암이 맥없이, 아까보다 더 기운이 빠진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오자 박 신부는 물었다.

“괜찮은가? 어디 안 좋은가?”

“죄송합니다.”

현암은 무조건 고개만 숙였다. 박 신부는 답답한 생각이 들어 약간 언성을 높였다.

“아픈 게 뭐가 죄송한가? 불편한 데가 있으면 말하게. 내가 이래봬도 전에는 의사였…………….”

“죄송합니다.”

현암이 죄인처럼 고개만 꾸벅거리자 박 신부는 더 화가 났다.

“자네, 죄송하다는 말밖에 모르나? 어디가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그러자 현암이 고개를 숙인 채 빠른 어조로 말했다.

“저, TV 못 봅니다.”

“왜? 도가의 계율에 어긋나기라도 하나?”

“아닙니다. 제가 무슨 도사도 아니고……………..”

“그럼 TV나 영화를 싫어하나?”

“아뇨, 좋아합니다. 영화광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래? 그리고 그게 몸 안 좋은 것과 무슨 관계가⋯⋯⋯⋯⋯.”

현암은 울상이 되었다.

“저 몸 안 좋지 않습니다. 다만・・・・・・ 멀미가 나서요.”

“멀미?”

박 신부가 되묻자 현암은 고개를 푸욱 숙이며 말했다.

“내력 자체는 오른팔에만 들어갑니다만………… 다른 부위도 적응하 려고 그러는 건지 조금・・・・・・ 아니, 예전보다 훨씬 예민해졌습니다.” 

“화면 흔들림 같은 것에 예민해졌다는 뜻인가?”

박 신부도 카메라 시점이 흔들리는 화면을 오래 보고 멀미가 난 경 험이 있었다. 그래서 짚어 본 것인데 현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점밖에 안 보입니다.”

“점이라니?”

“TV 화소 말입니다. 계속 색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화소가 하나 하나 다 보입니다. 그래서 멀미가 나는 거죠.”

현암이 고개를 푹 숙이자 박 신부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럼 자네 시력이 얼마나 되는 건가? 세상에 어떻게 그게…….”

현암은 대답 대신 침울한 한숨 소리를 냈다. 박 신부도 더 묻지 않고 말했다.

“필름을 비춰 주는 영화는 괜찮지 않은가?”

현암은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영화는 더 멀미 납니다.”

“왜?”

“영화가 24프레임이라죠? 그게 따로 보입니다. 필름 컷 바뀔 때 잠시 암전되는 것도 보이고요. 제게는 그냥 켜졌다 꺼졌다 반복하는 것으로만 보이니………… 멀미가 안 날 수 없지요.”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보통 사람의 눈은 잔상이란 게 있어서 24분의 1초 이내의 것은 감지할 수 없다. 그렇기 때 문에 24프레임이나 되는 필름이 연속되는 영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암의 눈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박 신부에게도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지만, 앞에 있는 현암의 얼굴이 너무도 처량해 보여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현암은 푸념하듯 말했다.

“제…… 제가 이상한 거죠? 저…… 저…… 정말 이런 소리 하는 건 처음입니다만, 영화 보고 싶어서 미치겠습니다. 한데, 이것 말고도 적응 못하는 게 많습니다. 더 이상 보통 사람처럼 살기 어려운……” 

현암이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다시 고개를 숙이자 박 신부가 말 했다.

“아닐세.”

“하지만……”

박신부는 대답 대신 TV를 꺼 버렸다. 도저히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일부러 쾌활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 집에 손님을 모셔 두고 대접도 못 했군. 저녁 시 간이 넘었는데 시장하지 않은가?”

“저・・・・・・ 괜찮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는 이만…………….”

현암이 억지로 일어나려 하자 박 신부는 아예 양손을 뻗어 현암을 붙들어 앉혔다.

“그러지 말고 함께 식사라도 하세. 크게 힘을 썼으니 내 한턱냄세. 이 근처에 잘 아는 사람이 하는 횟집이 있는데 배달도 해 주고 솜씨 가 좋다네.”

박신부가 말하자마자 횟집 번호를 누르는데 현암이 박 신부를 올려다보며 눈짓을 했다. 그러자 박 신부도 준후를 생각해 냈다. 불교 중에서도 극단 종파인 밀교에서 일생을 보낸 아이가 생선회를 좋아 할리 없었다.

“그럼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그러나 막상 그렇게 생각하니 반대로 주문할 만한 배달 음식이 마 땅히 없었다. 고민하던 박 신부는 결심한 듯, ‘흠’ 하고 아까 누르다 만횟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 김 사장님. 예, 예, 배달 좀 부탁하십시다. 그런데 회 빼고요. 아, 예. 고기만 아니라 생선도 빼야 한다니까요. 아, 그러면 회가 아니 게 되나, 허허. 그게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까 야채로 죽하고…………. 튀 김도 야채 종류로만 푸짐하게 해 주시고…………. 아뇨, 그냥 제발 주문 대로 해 주시오. 사정이…….”

박신부가 애를 쓰자 현암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분식집 같은 데 주문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박신부가 전화를 하다 말고 현암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이 있나?”

“글쎄요. 제 경우도 육식은 거의 피하기에………… 차라리…………….”

“그렇군. 자네 바라는 대로 주문하지. 내 그래도 이 부근 식당은 꿰고 있거든.”

“저・・・・・・ 전 라면이면 되구요. 뭐, 전 어차피 도사도 아니니까 그런 정도는 괜찮습니다.”

현암이 말하자 박 신부는 서글픈 생각에 말했다.

“그………… 그걸로 되겠나?”

현암은 살짝 웃었다.

“일곱 달 동안 라면만 먹고 산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몸이 축나잖는가. 아무리 그래도……………. 현암은 입꼬리를 비틀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런다고 이 몸이 축나겠습니까. 공력이 있는데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박 신부는 급히 말했다.

“알았네. 그러면 자넨 그렇다 치고・・・・・・ 준후는?”

“메밀국수 같은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군그래! 자네 말이 맞아. 메밀 면에다 다시마 국물에 무 갈아넣은거니까……”

그러자 현암이 덧붙였다.

“불가에서는 자극성 강한 양념도 안 씁니다. 그러니 파나 생강 같 은 것도 빼는 게…….”

“알았네.”

다시 전화를 든 박 신부는 주문을 마치고 나서도 아쉬운 생각이 들 었다. 뭔가 든든하게 대접해 주고 싶었는데 결국은 라면에 메밀국수 라니. 허탈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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