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4장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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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워커 2권 – 4장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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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든 평원에서 켄턴으로 접어드는 길 오른편으로는 갈색 산맥에서 뻗어나온 작은 산맥의 끄트머리가 평원과 만나며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켄 턴 시민들조차도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볼품없는 숲이었지만, 이제는 필요가 있다 해도 이름을 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모조리 불타버린 것이다. 평원 곳곳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던 작은 숲과 관목들은 어젯밤에 펼쳐진 상상을 불허하는 싸움에 휘말려 앙상한 잿더미로 변하거나 검은 가 지만 남겨둔 채 쓸쓸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숲 바로 앞쪽으로 검은 안개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풍경화에 잘못 튄 검은 물감처럼, 검은 안개 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데이든 평원의 적막 위에 불안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300년이 지났다고 하셨소?”

흉벽 밖으로 왼쪽 다리를 내놓고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 위에 올려놓은 조금 불안하면서도 방만한 자세로 앉아 데이든 평원을 바라보며, 솔로처는 침착하게 질문했다. 성벽에 부딪혀 솟아오르는 거친 바람이 흰 수염을 나부끼게 만들었고 헐렁한 망토는 정신없이 펄럭였다. 그러나 솔로처 자신은 성벽 위의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데이든 평야를, 그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격전의 흔적이라고는 옷 군데군데 남아 있는 몇 개의 불탄 흔적과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지팡이에 묻어 있는 몇 방울의 검은 피가 다였다.

솔로처가 ‘집어던져 둔 그 지팡이는 몹시 이상한 모습으로 켄턴 시민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지팡이는 정확하게 말해서 솔로처로부터 4큐빗 정도 앞쪽에, 즉 성벽 바깥의 허공에 뜬 채 바람을 맞고 있었다. 지팡이의 곧은 몸체엔 일곱 개의 금속 링이 둘러져 있었고 그 끝부분에는 윤곽조차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색의 수정구가 꽂혀 있었다.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솔로처가 그 지팡이를 쥔 채 무슨 일들을 했는지를 똑 똑히 목격한 켄턴 시민들은 경외스러운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과 그 지팡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민들의 앞쪽에 서 있던 주리오 시장은 열성적으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대마법사님.”

전투에 대비하여 입고 있는 하드 레더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지만 주리오 시장의 목소리는 밝았다. 솔로처는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응? 아니, 나는 그런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자가 못 되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대마법사이십니다. 당신의 스승은, 예, 무례를 무릅쓰고 말하겠습니다만, 실제보다 과장된 명성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너무 낮게 평가되는 것입니다.”

솔로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러자 어깨 위로 늘어진 백발이 가볍게 물결쳤다. 어떻게 정리를 한다 해도 볼품 있어 보이지는 않을 억 세고 곧은 머릿결이 산발을 하고 있는 그 모습에는 희한하게도 어울렸다. 고개를 돌린 솔로처는 눈가를 가리는 머리칼을 옆으로 걷어내며 주리오 시 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장님께서는 내 스승이 어떤 분인지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요. 나는 미거한 마법사로…”

“당신은 저희 가문의 은인이십니다.”

솔로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케이트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솔로처의 눈빛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봐야 어둡기 짝이 없는 용모가 조금 보기 괜찮아진 정도였지만. 솔로처는 주리오 시장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 며 말했다.

“알고 있소만.”

“케이트 추발렉. 저의 12대 조부님의 아내 되십니다. 당신이 안 계셨다면 저는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솔로처는 그만 미소 짓고 말았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고개를 돌려 데스나이트들을 휘감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당신 가문과 나는 정말 질긴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나 보군. 당신의 12대 할머니도 나로 하여금 저들과 싸우게 만들었소. 그런데 300년의 휴식 끝 에 다시 일어난 나는 그녀의 12대 후손인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의 도시를 위해 또다시 저들과 싸우고 있군. 혹시 당신의 기원이 나로 하여금 다시 이 땅에 발 디디게 만든 것은 아니오?”

주리오 시장의 옆에 시립해 있던 히든보리 사집관의 눈이 둥그레졌다. 진짜 그런 것인가? 그들의 등 뒤에 서 있던 시민들에게서도 비슷한 소곤거림 이 피어올라 성벽 위는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솔로처는 농담을 한 것에 불과했다. 그는 다시 몸을 구부정하게 숙이며 데스나이트들을 쏘 아보았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에서 피로가 묻어났다.

“케이트. 당신 정말 뻔뻔해. 당신 애인을 구해 준 것으로 모자라서 당신 후손까지 보살펴야 되나. 그때도 느낀 거지만, 당신 정말 위험한 심장을 가 지고 있어.”

주리오 시장은 황송스러운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장의 가문에 전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한낱 전설일 것이라고 믿었던 많은 켄턴의 시민들은 감동적인 표정으로 주리오 시장과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솔로처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도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게 한 것인지, 당신네들은 뭐 아는 바가 없소?”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은 그저 유피넬의 저울에 걸린 데스나이트의 추에 상응하는 추로서 당신이 도래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따름입니 다.”

“그 균형이 나로 하여금 다시 나를 이 시간의 탁류에 휘말리게 한 것이란 말이오? 좋은 설명이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군. 도움 이 된다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시오.”

솔로처의 말투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주리오 시장과 켄턴의 시민들은 그의 말 마지막에 첨가된 말이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 실을 깨닫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들의 노래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검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터져나온 노랫소리는 켄턴 시민들로 하여금 봄 가운데서 겨울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성문 뒤에 도 열해 있던 경비 대원들은 이를 악물며 포차드를 거머쥐었다. 전원 말에 오른 채 빼든 검을 안장 옆에 늘어뜨리고 있던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움찔하며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솔로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검은 안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계속 외우지 않으면 잊어먹을까 걱정되는가 보군.”

솔로처는 그렇게 싱거운 농담 한마디를 던져주면서 검은 안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검은 안개는 지금까지처럼, 즉 오늘 아침에 이 이상한 강화가 이루어졌을 때부터 계속 그래왔듯이 서서히 물결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솔로처 의 날카로운 눈은 그 안개가 천천히 켄턴의 외성벽을 향해 미끄러지듯 움직여오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안개는 점차 속력을 올리면서 켄턴을 향해 파도쳤다. 이제 건너편에 있던 숲의 모습은 완전히 가려버렸고 지평선의 흔적도 찾기 어려워졌다. 성벽 위에 몰려서 있던 시민들 사이에서 짧은 비명과 한숨 등이 터져나왔고 주리오 시장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솔로처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솔로처 는 귀찮은 듯한 손놀림으로 눈 사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피곤해. 천공의 3기사도 없고 장미의 기사들도 없군. 죽을 맛이야. 이보오, 시장. 당신 말이 맞다면 나뿐만 아니라 천공의 3기사도 돌아와야 되지 않소. 300년 전 저들을 물리친 것은 나 혼자서가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왜 나만 되살아나서 이런 고생을 하는가?”

솔로처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말했고 주리오 시장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켄턴을 보호하고 있기는 하지만 솔로처는 현재 밀리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반나절 거리도 더 떨어진 곳에서 최초로 터져나왔던 데스나이트들의 노래가 이제 켄턴의 성벽에 서 곧장 바라볼 수 있는 장소까지 와 있는 것은 솔로처가 줄곧 물러나며 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로처는 지금 성벽 위에서 힘든 휴식을 취하고 있 었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점점 거칠어지는 데스나이트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주리오 시장은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붙잡아 보았지만 익숙하지 도 않은 칼자루의 감각은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떨리는 몸을 힘들게 가누며 주리오 시장은 안타깝게 솔로처를 불렀다.

“대마법사님…?”

“이건 내가 목숨 기대어 살던 시대도 아니고 내게 무엇을 준 시대도 아니오. 이 시대는 내게 책임이 없고 나 역시 이 시대에 책임이 없단 말이야. 왜 시공을 뛰어넘어 저 자식들과 이런 개싸움을 벌여야 되나. 젠장. 나는 죽었던 자란 말이오! 왜 내가 약속된 휴식을 누릴 수 없단 말인가?”

지금 주리오 시장과 히든보리 사집관의 심장을 꺼내 함께 무게를 달아본다고 해도 한 사람분의 심장 무게도 되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은 헐떡이며 솔로처의 등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렇다. 단순히 이 시대에 되살아났다고 해서 솔로처가 이 시대를 책임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는 시대에 대해서만 권리와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으니까 그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 가 시간을 뛰어넘었다 하더라도, 이 다른 시대에 대해 새로운 책임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그가 사는 시대에 속한 것이

므로 ・・・

펄럭! 솔로처는 눈가를 문지르던 손을 옆으로 힘차게 뿌렸고 그러자 망토가 아우성을 질렀다. 솔로처의 흰 수염이 곤두섰다. 그는 켄턴을 향해 쏟아 져오는 검은 안개를 노려보며 말했다.

“신경질 나니 네 녀석들에게 화풀이나 좀 해야겠다. 너희들도 알겠지. 내 성격은 우리 스승님의 성격에서 비교육적이고 반사회적인 부분만을 빼닮 았다는 것 말이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솔로처는 벌떡 일어서는 한쪽 팔을 거칠게 내뻗어 데스나이트를 겨냥했다.

“쳇! 난 그 노래가 싫군. 음악 공부 좀 시켜주겠다. 샤우트!”

주리오 시장은 히든보리 사집관이 기겁하며 양쪽 귀를 틀어막는 것을 보고는 의의해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장은 고막이 찢어질 듯한 충격 속에 나가떨어지며 왜 자신이 타인의 행동에서 교훈을 찾아내는 재주가 없는지에 대해 통탄해야 했다. 바야흐로 솔로처에게서 수천 개의 벼락이 동시에 떨어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고함 소리가 터져나온 것이다.

“멈춰라아아아!”

우르르르릉! 켄턴의 건물들이 진저리를 쳤다. “어억, 시장님?” 히든보리 사집관이 황급히 부축했지만 시장은 똑바로 서지 못하고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붕에 올려두었던 짚더미나 널빤지들이 와르르 쏟아졌고 개 짖는 소리와 닭들의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꼬꼬댁! 왈왈! 꺄아 아아악! 마지막은 인간의 비명 소리다. 성벽 뒤에 도열해 있던 경비 대원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무릎을 꿇거나 앞으로 나동그라졌고 갑주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개울가에 자갈 튀는 소리보다도 요란했다. “아이고, 맙소사. 유피넬이여!” “게덴이여!” “오오, 레티여!” “어머나, 그랑엘베르!” 신들 의 출석 점검 같은 고함 소리들이 켄턴의 하늘로 쏟아져 올라갔고 무고한 참새들과 까막까치들은 이 충격음에 기절하여 빗방울처럼 떨어져내려 켄턴 의 배고픈 악동들을 환희에 차게 만들었다. 하늘에서 특급으로 배달되는 간식거리에 달려가는 악동들을 바라보며 경비 대원들은 기막힌 기분을 느꼈 다.

제정신을 못 차리는 주리오 시장을 황망히 일으키던(속마음으로는 멱살을 붙잡아 일으키고 싶었지만 물론 그러지는 않았다.) 히든보리 사집관은 눈가에 괸 눈 물을 재빨리 짜낸 다음 몸을 돌렸다. 켄턴을 향해 번져오고 있던 안개의 파도가 주춤하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검은 안개는 늑대의 포효를 들은 양떼처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히든보리 사집관은 탄성을 지를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입이 열렸을 때 터져나온 것은 비명 소리 였다.

“아아악! 대마법사님?”

솔로처는 흉벽에서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즉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보다 빨리 고함 소리의 충격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이 두 번째 충격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솔로처는 그 비명에 대해 이상한 대답을 보냈다.

“나는 단수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출동시키시오.”

그리고 솔로처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솔로처의 지팡이에 감긴 일곱 개의 링 중 다섯 번째의 링이 짙푸른 빛을 뿜어내었 다.

“으윽!”

히든보리 사집관은 눈을 찌르는 그 푸른 빛에 당황하며 얼굴을 가렸고 덕분에 반쯤 일으켜지고 있던 주리오 시장은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집 관! 차라리 부축하지 말…………!” 

실눈을 뜨고 주위를 바라본 주리오 시장은 성벽 위의 모든 것이, 흉벽과 갤러리의 바닥돌과 그 시민들의 모습까지도 시 퍼렇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오싹함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푸른 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켄턴의 시민들은 지팡이에 올라앉은 채 하늘을 날고 있는 솔로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오, 무지개의 솔로처! 하늘을 날고 있어!”

솔로처는 어린 양을 노리는 독수리처럼 검은 안개의 상공을 가로질러 날았다. 켄턴의 성벽 위로는 곧 수많은 주먹들이 튕기듯 솟아올랐고 “와아아 “아!” 검은 안개 더미에서는 욕설과 노호성이 터져나왔다.

“네네놈놈이이 감감히히! 파파이이어어볼볼!”

펑펑펑펑펑! 검은 안개 더미에서 불덩어리들이 빗발치듯 솟아올랐다. 수면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모습을 수천 배로 확대한 것 처럼 솟아오르는 불덩어리들은 데이든 평원 위의 상공에 수천 개의 별똥별이 거꾸로 떨어지는 듯한 장관을 이루어내었다. 그리고 그 불덩어리들은 모두 공중의 한 점,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솔로처에게로 수렴되고 있었다.

“월 오브 아이스!”

솔로처의 아래쪽에서 빠른 번득임이 일어났다. 마법사의 소환에 의해 허공에 갑자기 결빙된 얼음덩이는 하늘을 뒤덮을 듯이 뻗어나갔다. 콰지지직! 서서히, 둔중하게 낙하하던 얼음의 벽에 데스나이트들이 쏘아낸 불덩어리들이 명중했다. 파파파팡! 켄턴의 시민들은 평원 위로 수만 개의 다이아몬 드가 흩뿌려지는 듯한 광경에 압도되고 말았다. 얼음 조각들은 반경 수천 큐빗의 하늘을 쏜살처럼 비산했고 그 가운데로 광포한 수증기의 구름이 피 어올라 햇빛을 가렸다.

“이이 교교활활한한 놈놈!”

수증기의 구름은 솔로처의 모습을 가렸고 데스나이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을 향해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얼음조각들의 번득임뿐이었 다. 그러나 데스나이트들은 전혀 허둥대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100명이 한 사람인 것처럼 외쳤다.

“솟솟아아올올라라라라!”

검은 안개의 첨단부는 갑자기 위로 솟구쳐 올랐다. 수증기의 구름이 햇빛을 가렸기 때문에 데스나이트들은 마음껏 검은 안개를 위로 쏘아 올릴 수 있었다. 떨어져 내리던 얼음덩이는 검은 안개에 부딪히는 순간 마치 장작불에 떨어진 것처럼 흰 연기를 뿜으며 증발되어 올랐다.

데이든 평원의 상공이 운해에 가렸다. 데스나이트들은 물론이거니와 멀리 떨어져 있던 켄턴 시민들조차도 솔로처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피어 오르는 수증기와 검은 안개가 뒤섞이며 수천 큐빗 높이에 이르는 장막이 형성되었다. 안개와 수증기 더미를 바라보던 시민들 중에서 남달리 눈이 좋 은 시민들이 고함을 질렀다.

“저기! 저기!”

안개 더미를 꿰뚫고 솔로처가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솔로처는 지팡이에 탄 채로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급강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켄턴 시민들과 데 스나이트들 모두 솔로처를 단수로 부를 수는 없었다. 안개 더미를 꿰뚫고 나타난 솔로처는 얼핏 보기에도 10여 명이 넘는 숫자였다.

“크크아아아아악악!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에에게 그그런런 환환상상이이 통통할할까까!”

데스나이트들은 포효하며 산개했다. 그 누구도 지휘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데스나이트들은 제각기 흩어져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솔로처들을 대비 했다. 질린 표정으로 10여 명의 솔로처를 바라보고 있던 주리오 시장은 히든보리 사집관에게 붙잡혀 급하게 돌려세워졌다.

“지금입니다!”

“뭐어…………? 아, 그래! 나는 단수가 아닌…………..”

주리오 시장은 말끝을 삼키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성 아래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성문 개방! 레티의 검이여, 출동하시오!”

성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성문으로 달려들었다. 육중한 성문이 열리는 순간 오랫동안 전의를 불태우며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던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마침내 그들의 말에 박차를 가했다.

“레티! 창조가 닿을 수 없는 미를 찬미하며!”

“레티! 레티! 그의 칼로 죽는다!”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싸운다는 점을 볼 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진짜 전사들보다 더욱 전사다운 프리스트들이다. 그들의 기도는 전투의 외침이며, 그들의 성전은 전투교범이며, 그들의 제단은 유혈이 흐르는 전장이다. 켄턴의 성문을 뛰쳐나온 레티의 검들은 그들만의 천 국, 즉 죽음과 유혈의 전장을 향해 돌격했다.

“와아아아!”

떨어져 내리는 솔로처들에 대비해서 밀집 대형을 풀고 산개한 데스나이트들은 성문을 박차고 달려 나온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맞아 분노의 외침을 토해 내었다. 아무런 지휘 없이도 일사불란하게 싸울 수 있다는 점에서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데스나이트들과 같다. 성문을 나와서야 보게 된 광경이 지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서는 곧장 솔로처의 생각을 이해했다.

“뱅가드!”

누군가가 외친 짧은 부르짖음에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재빨리 밀집하여 종심진陣)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제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그들의 이름 에 걸맞게 레티의 검 모양이 되어 데스나이트들의 산개 대형을 날카롭게 찔러들어 갔다. 두두두두두!

“레티! 레티! 레티!”

“이이 보보잘잘것것없없는는 것것들들이 감감히히!”

선두의 프리스트는 데스나이트의 포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맹포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데스나이트의 핼버드가 더 빨랐다. 퓌르르르! 데 스나이트의 핼버드가 검은 빛을 흩뿌리자 프리스트의 몸과 검이 한꺼번에 쪼개지며 그의 상반신이 말 위에서 튕겨 올랐다. “위힝힝힝힝!” 주인을 잃 은 말은 애처로이 울며 달렸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르던 프리스트는 그 모습을 보고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은 채 핼버드를 휘두른 데스나이트의 목을 쳤다. “레티이이이!” 프리스트의 검이 지나친 자리에서는 살이나 피가 튀는 대신 해골과 투구가 허공으로 날았다.

“쿠쿠오오오오!”

데스나이트는 절규하며 몸을 뒤틀었다. 뒤이어 다가온 또 다른 검날은 자세를 잃은 데스나이트의 몸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데스나이트는 땅바닥에 쓰러지기까지 총 네 번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구사하는 뱅가드는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데스나이트들을 찔러들어 갔 다. 선두의 프리스트는 죽든지 돌파하든지 둘 중의 하나만을 택하는 방식으로 진격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만들었고, 그런 식의 가멸찬 공격은 데 스나이트의 진열에 깊은 상처를 냈다. 그리고 그 위로 솔로처들의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다.

“오른쪽으로!”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속력을 전혀 줄이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데스나이트들은 그들이 우회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는 뱅가드로 달리던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일제히 우회 기동을 성공시키는 장관으로 나타났다. 놀라운 기동력으로 라인을 형성한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그들이 갈라놓은 데스나이트들의 산개 대형의 오른쪽을 짓밟기 시작했다. 이 위험천만한 전술에서 나타나는 약점, 즉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배후가 왼쪽의 데스나이트 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는 문제점에 대해서 솔로처는 무시무시한 해답을 내놓았다.

“미티어 스워어어엄!”

슈슈슈슈슝! 공기를 할퀴는 날카로운 소리가 사방으로 흘렀다. 안개와 수증기로 가린 하늘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거린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불의 소나기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갈라놓은 데스나이트의 무리 왼쪽을 향해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다. 꽝꽝꽝꽝! 등 뒤에서 일어나는 폭음은 레티의 프리 스트들마저도 간담이 서늘하게 만들었다.

“크크아아아아아아!”

폭발하며 불어닥친 화염과 열기의 파도는 데스나이트들의 갑주를 순식간에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미티어 스웜에 직격당한 데스나이트들의 갑옷 속 에서 열기를 이기지 못한 그들의 저주받은 몸이 폭발하듯 튕겨져나왔다. 검은 연기와 불꽃의 분출 사이로 말라붙은 살점과 유골들이 불타며 솟구쳐 올랐다. 마치 잘 마른 낙엽 더미에 불을 던진 듯한 모습이었다.

허공을 날며 데스나이트들의 눈을 붙잡아 두던 솔로처들이 일제히 쓴 미소를 지었다.

“역시 패싸움이 유리한 거야. 30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군.”

그러나 솔로처와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잠시 후 똑같은 정도의 절망을 느껴야 했다.

부대를 거의 절단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쪽의 데스나이트들의 기세는 줄지 않았다. 어차피 명령 체계라는 것이 없었기에 부대의 절단은 그들에게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데스나이트들은 제각기 판단하여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어떠한 지휘도 없는 데스나이트들 전체의 행 동은 놀랍게도 일관되게 나타나 싸움은 혼전으로 치달았다. 레티의 프리스트들과 데스나이트들이 뒤섞여 버리자 개인 전투력이 월등히 우수한 데스 나이트들은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빠르게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곧 전장에는 붉은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아악! 레티여!”

“이, 이런! 커허헉!”

병장기의 크기와 예리함, 휘두르는 힘과 기술, 그리고 용기. 그 어떤 부분에서도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 하지만 데스나이트 들 앞에서는 레티의 프리스트들도 무력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들이 휘두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핼버드며 플레일, 사이드들은 레티의 검들을 풀잎처럼 절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괴를 실천하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스스로의 파괴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크으윽!”

데스나이트의 길고 흉포한 파이크에 복부를 찔린 프리스트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데스나이트는 싸늘하게 웃으며 파이크를 뽑으려 했다. 그러나 다 음 순간 프리스트의 머리가 휙 올라오며 그의 두 손이 파이크를 붙잡았다.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파이크를 부여잡은 프리스트의 입에서 피와 함께 고 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혼자서 걸어갈 저승길은 너무 외롭다!”

바로 아일페사스에게 레틴드롤스라는 이름을 받았던 자였다. 레틴드롤스를 찌른 데스나이트는 싸늘하게 웃었지만 그 미소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는 없었다. 레틴드롤스는 오른손만으로 파이크를 쥔 채 왼손을 들어 데스나이트를 가리켰다.

“끼아아압!”

레틴드롤스가 찢어지는 기합 소리를 터뜨린 순간 그의 왼팔이 폭발하며 뼈와 핏방울, 그리고 근육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그 왼팔이 터 져나가는 순간, 눈앞의 데스나이트의 가슴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그 어떤 창조물도 무위로 돌려버리는 레티의 권능이 펼쳐졌던 것이다. 레틴드롤스에 의해 겨냥당한 데스나이트는 비명도 지르 지 못한 채 산산조각났고 갑주의 파편이 비산하는 가운데 악취 어린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레틴드롤스는 왼팔이 폭발한 충격 때문에 나 가떨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오른손으로 고삐를 부여잡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를 띠며 흐느끼듯 말했다.

“다다익선이라고 하지…………. 하하하……”

복부에 파이크를 꽂은 채 왼쪽 어깨에서 폭포처럼 피를 쏟아내는 프리스트의 모습은 공포, 절망, 어둠의 데스나이트들마저도 질리게 만들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분노에 떨며 저주의 말들을 퍼부어대었지만 레틴드롤스가 자신의 오른쪽 팔마저도 파괴해 버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퍼퍼펑! 레틴드롤 스는 오른쪽 팔에 이어 오른쪽 다리까지도 파괴해 버린 다음에야 말에서 떨어지며 절명했지만 그때까지 두 명의 데스나이트들을 죽음으로 인도했다. 비장함을 넘어선, 지독하게 끔찍한 죽음이었다.

레틴드롤스의 죽음은 다른 프리스트들로 하여금 죽음의 이정표를 만들어주었다. 데스나이트들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프리스트들은 주저 없이 자신 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장례를 치를 몸을 남겨두지도, 다시 한번 레티에 대한 송가를 불러볼 희망을 남겨두지도 않는 무차별적인 파괴 행위 앞에 데 스나이트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레티의 프리스트 한 명이 죽는 동안 두세 명의 데스나이트가 파괴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데스나이트들은 수지 타산이 전혀 맞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데스나이트들의 분노는 더욱 희게 타올랐고 그들의 공격은 더욱 험악해졌다.

“이이 지지독독한한 놈놈들들!”

“단단숨숨에에 죽죽여여라라! 목목숨숨을을 붙붙여여두두면면 안안 된된다다!”

데스나이트들은 조금 전의 레티의 프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상대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공격하는 방식으로 태도를 전환했다. 하늘에서 그 광경을 보 고 있던 솔로처는 세 개의 검이 동시에 프리스트의 몸을 관통하는 광경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저 미련스러운 작자들! 어쩌자고 저런 끔찍한 짓을!”

그러나 솔로처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혼전 상태의 무리에 대해서 마법을 구사할 수 없었던 솔로처는 냉정한 판단으로 오른쪽의 데스나이트 들이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솔로처가 팔을 들어올린 순간, 오른쪽의 데스나이트들 사이에서 솔로처의 피를 식게 만드는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디디스스펠펠 매매직직!”

음산한 고함 소리가 전장을 가로지른 순간 허공에 떠다니던 솔로처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환상이 사라지고 나서 남은 하나 의 솔로처는 데스나이트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솔로처는 머쓱하게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받받아아랏랏!”

데스나이트들 중 거대한 활을 든 기사들이 일제히 하늘을 겨냥했다. 인간이었다면 제대로 다루기도 힘들 법한 그레이트 보가 아우성을 질렀다. 빠아 아아아! 솔로처는 다급하게 다시 하늘로 솟아오르려 했지만 데스나이트의 공격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솔로처는 데스나이트들의 사정거리에 몸을 노출시킨 채 공중에서 멈춰 섰다. 벼락 같은 속도의 캐스팅이 시작되었다.

“포스 필드!”

그러나 캐스팅이 완료된 순간 솔로처는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데스나이트들은 그레이트 보를 당기기만 했을 뿐 아직 시위를 놓지 않고 그저 솔로 처를 겨냥하고 있었다. 솔로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속았던 것이다!

“안안티티 매매직직 필필드드!”

데스나이트의 삼엄한 명령이 떨어진 순간 모든 마나의 움직임이 강제로 정지되며 데이든 평원 위의 자연력과 마나는 순식간에 조화를 이루었다. 마 나와 자연력이 조화된 곳에서는 아무런 일탈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법. 솔로처가 캐스트한 보호 스펠은 강제로 취소되었고 무지개의 대마법사는 허 공에서 아무런 보호없이 데스나이트들의 화살에 노출되게 되었다. 솔로처가 황급히 날아오르는 순간, 데스나이트들의 손이 일제히 시위를 놓으면서 죽음의 전주곡과도 같은 파열음이 울려퍼졌다. 핑! 핑! 핑! 핑!

“크윽!”

데스나이트들의 적의에 인도된 화살 하나가 솔로처의 옆구리를 적중시켰다. 솔로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오르던 지팡이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 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했기 때문에 상처를 보살필 시간이 없었다. 핏방울을 길게 흩뿌리며 솔로처는 어두운 기류 속으로 사라져갔다.

검은 안개의 소용돌이 너머로 솔로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데스나이트들은 침착한 태도로 다시 화살을 메기고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솔로처는 떨어지지 않았고 데스나이트들은 별 불평도 없이 팔을 비틀 어 화살을 다시 전통에 집어넣었다. 그 동작은 마치 사냥을 끝내는 엽사의 손놀림처럼 한가로웠다. 하지만 활을 갈무리하자마자 데스나이트들은 즉 각 노성을 지르며 미티어 스웜이 일으킨 화염을 뛰어넘어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를를 겨겨냥냥한한 것것은은 그그 무무엇엇일일지지라라도도 대대가가를를 받받으으리리라라! 정정녕녕 유유피피넬넬과과 헬헬카카네네스스라라도도!”

멀리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주리오 시장은 억눌린 신음을 내었다. 자신의 몸마저도 파괴하며 데스나이트들과 싸우는 레티의 프리스 트들의 분전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들은 더 이상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겠다는 듯이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단숨에 절명시키는 식의 공격을 퍼부었다. 검 하나가 프리스트를 찌르면 곧 도끼가 달려들어 목을 베고, 창 하나가 프리스트를 찌르면 당장 날아온 플레일이 프리스트의 몸을 박살냈다. 이제 전투는 싸움이라기보다는 학살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주리오 시장은 크게 고함질렀다.

“나팔수! 퇴각 나팔을 불어라! 아처리들은 전투 태세로! 마법을 봉쇄시킨 이상 저들 역시 마법을 못 쓴다. 그러니 경비 대원들은 즉각 출동하여 프리 스트들의 퇴각을 돕도록 하라!”

히든보리 사집관은 주리오 시장의 혜안에 감탄했다. 마법을 못 쓴다고 해서 데스나이트가 시시한 상대로 바뀌는 것은 아니겠지만 출동하여 저들과 싸워야 할 경비대원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어린 나팔수도 힘차게 나팔을 들어올렸다.

퇴각 나팔이 데이든 평원 위로 울려퍼졌다. 그러나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성벽을 흘끔 돌아보기만 할 뿐 그 소환에 응하지는 않았다. 응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이미 데스나이트들은 프리스트들과 성벽 사이에 반(半)포위진을 형성하여 프리스트들의 도주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히든보리 사집관은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듯이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주리오 시장은 당황하여 몸을 돌렸지만 이미 그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도 가까스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은 채 히든보리 사집관은 성문 뒤에 도달했다. 그는 곧장 대기시켜 두었던 자신의 말에 뛰어올랐고 출진 준비를 갖추고 있던 경비 대원들 틈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사집관님! 뭐하시는 겁니까?”

갑주와 무장을 걸쳤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게 말에 오른 히든보리 사집관은 그대로 성문을 향해 치달아 갔다. 시장의 명령에 의해 이미 개방되고 있는 성문의 틈 사이를 빠져나가는 사집관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비 대원들은 얼빠진 모습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찢어지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

켄턴 경비 대장 로터스였다. 경비 대원들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지르는 고함 소리에, 그 의미를 파악하기에 앞서 먼저 등줄기를 타고 지나는 차가운 느낌에 진저리쳤다. 로터스의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는 화렌차의 3기사가 동시에 부르짖는 듯한 전율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로터스는 검을 뽑아 들며 목청껏 부르짖었다.

“죽는 것이 무섭다면, 죽을까 봐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삶은 더 길고 더 무섭다! 켄턴 경비 대원, 앞으로오!”

로터스의 외침이 켄턴 성안을 메아리친 순간 경비 대원들은 이미 달려 나가고 있었다. 함성을 지르며 성문을 뛰쳐나온 경비대원들은 레티의 프리스 트들을 반포위하고 있는 데스나이트들의 등 뒤로 질주해 갔다. 말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성벽을 타고 주리오 시장에게까지 피어올라 시장은 잠시 전 장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경비대원들의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던 히든보리 압실링거는 용감한 인물이었고, 그 용기를 발휘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래 서 히든보리는 포위된 프리스트들을 빼내기 위해서는 데스나이트들에게 협공의 위험을 충분히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를 뒤따라 달려 가던 로터스 경비대장은 갑자기 들려온 히든보리 사집관의 거친 노랫소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전율을 느꼈다. 소설보다 장부를 더 재미있게 읽 는다는 그들의 사집관, 꽉 막히고 깐깐한 사집관이 말을 달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일스의 랩소디를.

나팔이 울렸다. 앞으로! 달려라!

동으로 치달리면 대륙의 끝, 앞으로 치달리면 내 인생의 끝

그러나 검은 곧다, 죽음을 넘어서!

나의 주군, 루트에리노! 그의 이름으로 달려라!

히든보리 사집관은 가장 정확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 어떤 이름이 데스나이트를 진감케 하고 켄턴의 시민들에게 죽을 힘을 다해 싸우게 만들 용기를 줄 것인가. 로터스는 앞을 달리고 있는 히든보리 사집관에게서 기사 일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부르짖음이 울려퍼졌다.

“루트에리노, 루트에리노! 사집관님을 따르라, 데스나이트를 물리쳐라!”

히든보리에 의해 불리고 로터스에 의해 퍼져나간 이름은 켄턴 경비 대원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루트에리노, 루트에리노! 그들 모두는 루트에 리노 대왕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난 꼬마들이었고, 그들 모두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전사들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비 대원들 사이에서 노랫소리가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나는 달린다, 진격의! 나팔 소리!

사랑도 끝이 있어 이별하고, 추억도 끝이 있어 잊혀지지만

그러나 끝이 없다, 내 발걸음에는!

나의 주군, 루트에리노! 그의 이름으로 달린다!

데스나이트들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게 만든 것은 경비 대원들의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 루트에리노, 루트에리노! 그 이름이 그들의 주 의를 돌렸다. 데스나이트들은 으르렁거리며 손을 들어올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데스나이트들은 그들 스스로가 이 평원 위의 마나의 움직임을 정지시킨 것을 깨달으며 노성을 터뜨렸다.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휘날리는 풀잎과 먼지 구름, 그리고 번득이는 창칼. 그러나 그 모 든 것을 앞질러 노래가, 루트에리노의 이름이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데스나이트들의 무기가 방향을 바꾸었고 후미의 기사들은 이제 달려오는 경비대원들에 맞서 달려갔다.

히든보리 사집관은 자신이 검을 쥐고 있다는 것을 거의 잊고 있었다.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손끝과 목덜미는 이미 마비되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것은 미칠 것 같은 흥분과 하얗게 타오르는 분노뿐, 히든보리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데스나이트를 정면으로 바라보 면서도 아무런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그가 외치는 이름의 힘은 그토록이나 강했다.

“루트에리노! 루트에리노!”

히든보리를 정면으로 가로막으며 달려들던 데스나이트는 육중한 파이크를 내뻗으며 잔인하게 외쳤다.

“그그의의 곁곁으으로로 돌돌려려보보내내주주겠겠다다!”

“나의 주군이여!”

평생토록 펜촉보다 더 치명적인 무기를 사용해 본 적이 없던 팔이었지만, 히든보리는 그가 목이 터져라 부르는 이름의 소유자처럼 용맹스럽게 그 팔 을 휘둘렀다. 데스나이트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이 맹렬한 공격에 주춤하고 말았고 그것으로 승패는 갈렸다. 흐트러진 파이크 는 히든보리를 놓쳤지만, 화살처럼 튀어나간 롱 소드는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꿰뚫었다. 롱 소드의 끝에 투구를 꿴 채 달려가는 히든보리의 등 뒤로 데스나이트의 갑옷이 검은 기류에 휩싸여 허물어지듯 낙마했다. 꽝깡깡! 히든보리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퍼지는 함성을 질렀다.

“켄턴! 루트에리노!”

귀가 먹어버릴 정도의 고함 소리와 온갖 소음, 그리고 병장기에서 번뜩이는 불꽃과 반사광이 사방에 넘쳐흘렀지만 히든보리의 함성은 드래곤의 포 효처럼 울려퍼졌다. 데스나이트들의 저주가 잇달아 터져나왔지만 그 소리를 뒤덮는 경비 대원들의 함성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으아아아! 루트에리노! 켄턴을 돌보소서!”

“돌격, 앞으로! 루트에리노의 이름 아래 데스나이트를 물리쳐라!”

데스나이트들은 이제 정신적인 의미와 실제적인 의미 양쪽으로 포위를 당했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여전히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데스나이트들 을 압박해 왔으며 등 뒤로는 루트에리노의 망령에 휩싸인 것 같은 경비 대원들이 악귀 같은 얼굴을 한 채로 무기를 휘둘러오고 있었다. 히든보리는 데스나이트들의 주춤거리는 동작을 보며 벅찬 희열을 느꼈다. 이겼다!

다음 순간 히든보리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시야 한구석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히든보리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서 불안을 느낀 것인지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심지어 하늘과 땅마저도 미쳐 날뛰는 것 같은 전장에서 단 한 가지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히든보리의 눈에 팔을 들어올린 데스나이트 한 명이 들어왔다. 주위의 다른 데스나이트들은 레티의 프리스트들과 달려오는 켄턴 경비 대원들에 맞 서 흉맹스럽게 무기를 휘둘러대고 있는데, 그 데스나이트는 신전의 예배당 가운데에서처럼 경건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히든보리 는 얼어붙고 말았다. 데스나이트는 결코 빠르지 않은 속도로, 그러나 무자비하게 외쳤다. 

“모모든든 것것을을 감감싸싸라라, 어어둠둠!”

하늘로 피어올라 소용돌이치고 있던 검은 안개가 빠른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프리스트들과 경비 대원은 당황했지만 전투의 관성은 내리깔리는 안개의 한가운데로 그들을 몰아가고 있었다. 무게와 질감을 가진 듯한 안개는 거침없이 쏟아져내려 주위를 감쌌고 히든보리는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안개 더미 너머에서 비명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크어억!”

“사집관님! 대장님! 이봐, 어디에…………, 으아아!”

“이건…………, 큭! 어머니!”

어둠 속에서 데스나이트들이 움직이면서 끔찍한 파열음과 발굽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당황한 경비 대원들은 서로를 불러대었지 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데스나이트의 공격뿐이었다. 예리한 무기가 갑옷을 꿰뚫으며 나는 소리는 히든보리의 등골을 쑤셔내 는 듯했다. 쿵. ‘무엇인가가 말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히든보리는 시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히든보리는 온몸을 긴장시킨 채 롱 소드를 부여잡았지만 당장이라도 안개를 뚫고 나타난 데스나이트의 검이 자신을 꿰뚫어버릴 듯한 공포는 참기가 어려웠다.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 려 말의 가랑이 사이에라도 숨고 싶은 느낌과, 말을 돌려 켄턴이라고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고 싶은 느낌 사이에서 갈등하며 히 든보리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꿈틀거리는 안개뿐이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켄턴은 어느 쪽이지?

그때 가까운 곳에서 느닷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눈을을 가가리리는는 어어둠둠 속속에에서서 보보이이는는 오오직직 하하나나, 절절망망!”

히든보리는 기겁하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고, 곧 심장이 멈춰버릴 뻔했다. 그의 롱 소드 끝에 꿰어져 있던 데스나이트의 해골이 그를 똑 바로 바라보며 턱을 달각거리고 있었다. 눈동자도 없는 퀭한 구멍 안쪽에서 번득이고 있는 노오란 불빛은 경멸감과 증오심을 담은 채 히든보리를 쏘 아보고 있었다. 롱 소드는 해골의 입을 꿰뚫고 있었고, 그래서 그 끝에서 턱을 달각거리고 있는 해골의 모습은 마치 롱 소드를 삼키고 있는 것처럼 보 였다. 계속해서 검을 집어삼켜, 마침내 손잡이 끝까지 다가온 다음 히든보리의 손을 물어뜯는………….

“으아아아!”

히든보리는 칼 맞은 오크 같은 비명을 지르며 롱 소드를 집어던졌다. 파삭! 해골은 믿을 수 없이 간단히 산산조각이 났지만 히든보리는 그것을 볼 새 도 없이 그대로 말을 돌렸다. 켄턴이 어느 방향인지도 몰랐지만 히든보리는 무턱대고 달려가며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절절망망에에서서 그그대대가가 매매달달리리는는 것것이이 오오히히려려 그그대대를를 파파멸멸시시키키리리라라, 공공포포!”

휘익! 쉬이익! 주위로 예리한 병장기들이 휘둘러지며 날카로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가끔 눈앞으로 번쩍이는 무엇인가가 지나가는 느낌도 들었다. 그 러나 히든보리는 멈출 수 없었다. 그 때 암흑 속에서 갑작스럽게 핼버드가 튀어나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사이도 없이, 튀어나온 핼버드는 그 가 탄 말의 머리를 쪼개놓았다. 말은 비명도 없이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암흑 속에서의 낙마는 끔찍했다. 히든보리는 땅에 떨어진 후에도 한참 동안 더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야 고통이 다가왔고, 히 든보리는 급하게 일어서려다가 팔이 부러진 것을 깨달으며 다시 쓰러졌다. “으큭!”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피와 흙먼지를 뱉어낼 생각도 못한 채 히 든보리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때 아무렇게나 내밀어진 그의 손에 닿는 것이 있었다.

히든보리는 고개를 들어올렸고, 자기가 어떤 생물의 다리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표현할 말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치에서 벗어나 있 는 그 생물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히든보리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히든보리가 쥐고 있는 발 이외에도 그 생물에게는 여섯 개의 각기 길이가 다른 다리들이 더 있었다. 말로 치면 가슴에 해당하는 부분에 있는 세 개의 눈은 크기가 모두 달랐을 뿐만 아니라 위치도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세 개의 눈 모두가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히든보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목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살이나 근육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목뼈만이 보였고 그 목뼈 위에는 마갑을 둘러쓴 머리가 있었다. 그의 눈길이 그 생물에 올라탄 채 투 핸드 소드를 들어올리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모습에 이르렀을 때 히든보리는 눈을 감았다.

‘죽었구나. 제길!’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죽어지지가 않았다. 뭐야. 아무 느낌도 없이 벌써 죽은 건가? 주위가 터무니없이 고요해졌기 때문에 히든보리는 자신의 추 측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추측과는 상관없이 감각은 그가 살아 있음을 계속해서 가르쳐주고 있었다. 어쨌든 죽은 자가 팔이 부러 진 아픔을 계속해서 느껴야 된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럼 나 살아 있는 건가?’

히든보리는 눈을 떴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데스나이트가 그에게는 관심도 보내지 않은 채 먼 곳을 쏘아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저러는 거지? 그때 데스나이트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히든보리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었다. 데스나이트는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저 녀녀석석들들까까지!”


“여어, 비켜!”

주리오 시장은 급하게 위를 올려다보다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성벽 위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솔로처는 그다지 품위 있지는 않은 모습으로 성벽 위에 내려섰다. 지팡이는 여기까지 충실히 그를 실어왔지만 그의 후들거리는 다리는 그렇지 못했다. 솔로처는 성벽의 차가운 돌 위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꽉 누르고 있었어도 화살이 꽂힌 옆구리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렀다. 주리오 시장은 날카롭게 고함질렀다.

“솔로처 님! 이런, 의사! 의사를 데려와!”

끄으응! 솔로처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일어섰다. 재빨리 달려든 주리오 시장의 팔에 의지한 솔로처는 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장. 화살을 단단히 붙잡으시오.”

“예?”

“화살을 꽉 잡으란 말이다, 이 얼간아!”

주리오 시장은 영문을 모른 채 당황하며 솔로처의 허리 뒤쪽에 꽂힌 화살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솔로처는 빠르게 심호흡을 하고서는 흉벽을 부여잡 았다.

“난 두 번은 못 참을걸. 이 뽑는 것도 한 번에 못하면 더 힘든 법인데 하물며 화살인 바에야. 그러니 한 번에 뽑지 않으면 퍽 유감스러워할 거야. 뽑아!”

주리오 시장은 어떤 명확한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화살을 잡아당겼고 그 순간 솔로처는 흉벽을 잡아당겼다. 선혈이 튀어 오르며 화살 이 뽑혀나왔고 주리오 시장은 화살을 쥔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이코!” 주리오 시장은 기겁성을 질렀지만 솔로처는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수고하셨소, 시장, 고맙군. 그리고 그거 화살촉은 건드리지 않도록 유의하시오. 평생 동안 후회하게 될걸.”

바닥에 주저앉아서 멍청한 얼굴로 솔로처를 올려다보던 주리오 시장은 화들짝 놀라며 화살을 내팽개쳤다. 그것은 데스나이트의 화살인 것이다. 화 살이 내팽개쳐진 곳에서는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솔로처는 거기에는 일별도 보내지 않고서 흉벽을 쥔 채 전장을 바라보았다. 다시 아래로 깔린 검은 안개 더미는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살육을 감추고 있었지만 터져나오는 비명과 소음은 가리지 않았다. 솔로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경비 대원까지 다 출동시켰소?”

주리오 시장은 할 수 있다면 이렇게 꾸짖어주고 싶었다.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시는 분이 그렇게 침착하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 그렇습니다. 어쩌지요?”

솔로처는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윽박질러 주고 싶었다. ‘당신 돌았소? 저 아수라장 속에서 경비 대원들과 레티의 프리스트만 빼내 오라고? 그리고 솔 로처는 하고 싶은 말은 해버리는 주의였다.

“당신 돌았소? 저 아수라장 속에서 경비 대원들과 레티의 프리스트만 빼내 오라고?”

“그, 그렇습니다만, 어, 어떻게 방도가, 아, 아니, 대마법사님, 치료를 받으셔야…………. 화살에 맞았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주리오 시장은 상당히 많은 요인이 야기한 복잡한 당황 속에서 횡설수설했고 솔로처는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아, 이런 화살에 맞았지.”

마치 잊어먹었던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말하던(그러니까 주리오 시장의 말에 야유를 보내던) 솔로처는 눈살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거머쥐었다. 솔로처가 지 팡이를 비틀어 그 머리 부분을 상처에 가져다대자 지팡이에 감겨 있던 링 중에서 네 번째 링이 진초록의 빛을 뿜었다. 주리오 시장이 경이 어린 눈으 로 바라보는 가운데 초록색의 빛은 점점 사그라들었고 그에 따라 솔로처의 상처에서 배어나오던 피도 멎었다. 솔로처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다시 전장을 쏘아보았다. 이 노릇을 어찌해야 된다?

“마법사 솔로처셨소?”

‘너 이 자식, 혹시 바보 아니야? 내가 마법사인 거 이제 알았냐?’ 솔로처는 주리오 시장을 향해 이렇게 외쳐주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리오 시장의 턱뿐이었다. 솔로처는 주리오 시장의 눈을 따라 위로 올려다보았고, 다음 순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저울 눈금이 맞아떨어지는군.”

하늘에 떠 있던 사내, 정확하게 말해서 견고하고 훌륭해 보이는 바딩을 한 페가수스에 올라타 있던 사내는 솔로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점잖게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는 익숙한 솜씨로 페가수스를 성벽 위의 갤러리에 내려서게 만들었고 시민들은 숨소리마저 삼가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 다. 페가수스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사내는 간단한 하드 레더만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마(下馬)했을 땐 소음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페가수스의 기사는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리오 시장을 향해 말했다.

“시장님은 어디 계시오?”

“예?”

“켄턴의 시장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었소.”

주리오 시장은 이런 대답을 해야 된다는 것이 퍽이나 거북했다.

“저, 접니다만.”

페가수스의 기사는 다시 점잖은 얼굴에 의아함을 떠올렸다. 어찌나 엄격한 얼굴인지 이 기사의 턱에서는 수염이 자랄 때는 정중하게 허락을 요청할 것 같았으며 땀이 흐를 때는 복창 소리와 함께 대오 정연하게 흘러내릴 것 같았다. 기사는 침착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노델 시장님이 사망하셨단 말이오?”

노델 시장? 물론 사망했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에, 지금쯤은 시체도 찾아보기 힘들걸. 주리오 시장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리오 시장은 이미 이 기사가 누군지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시민들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을 때 주리오 시장은 당연 하다는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두 명이 더 내려와야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페가수스의 기사 오른쪽으로는 역시 군마처럼 바딩을 한 그리폰이 흰 갑옷을 걸친 기사를 태운 채 내려왔다. 그리폰은 사나운 기세로 부리를 딱딱 부딪치고 있었기에 주리오 시장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내려선 기사가 타고 있는 생물은 켄턴 시민들을 광란에 빠지게 만들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내려선 와이번의 등에는, 건장한 체구지만 와이번에 타고 있어서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기 사가 비정상적으로 긴 랜스를 세워든 채 앉아 있었다.

성벽 위의 갤러리는 넓었지만 와이번의 거체를 내려서게 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와이번의 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와이번을 흉벽으로 몰 아갔고 와이번은 횃대에 내려앉는 새처럼 흉벽을 두 발로 붙들었다. 콰가가각! 와이번의 발톱이 흉벽의 돌을 긁으며 요란한 소리를 울리게 만들었지 만 와이번은 균형을 잡고 날개를 접었다. 기사는 와이번의 무릎을 밟으며 가벼운 동작으로 갤러리에 내려섰다.

세 명의 기사들은 솔로처와 주리오 시장의 앞쪽에 나란히 섰다.

기사들의 탈것들은 크기에서든 형태에서든 도저히 유사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각자의 탈것에 어울리는 복색을 갖추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서도 역시 유사점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 당당한 자세로 기사답게 서 있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다.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리오 시장은 그들이 대답 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반갑습니다, 천공의 3기사님. 저는 켄턴 시장……”

“당신들도 되살아났군!”

주리오 시장은 솔로처의 고함 소리 때문에 천공의 3기사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무한히 영광된 순간을 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솔로처나 천공의 3기사 모두 주리오 시장의 안타까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늘에서 날아온 기사들의 얼굴에 끔찍한 표정이 스친 것은 잠시, 페가수스에서 내린 기사는 여전 히 침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 지금이 몇 년입니까.”

“300년이 지났다 하더군요, 딤라이트.”

딤라이트라 불린 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 길군요. 그 정도의 시간을 뛰어넘은 것은 도대체 어떤 사술(邪術)입니까?”

“모르오. 이 시대의 사람들 역시 우리들의 부활이 어떤 힘에 의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소.”

그때 와이번에서 내린 기사가 들고 있던 거대한 랜스를 마치 지휘봉처럼 가볍게 휘둘러 주리오 시장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와이번에서 내려서자 기 사의 거대한 덩치는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기사는 평원의 검은 안개를 가리켰을 뿐이었다.

“마법사께서 눈금이 맞았다 하심은 저들 때문입니까.”

“그렇소, 무스타파.”

그리폰의 기사가 싱긋 웃었다. 우울한 미소였다.

“하아, 아무래도 ‘물리치고 나서 생각하자.’라고 하실 것 같군요. 무지개의 솔로처.”

“물론이오. 내 예정표에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는 시간은…………”

“언제나 여가 선용의 시간으로 돌려져 있다.”

그리폰의 기사는 지겹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솔로처의 말을 받아서 솔로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레이. 잠시 동안은, 내가 부활한 이유가 저 사교성 떨어지는 친구들로부터 이 시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해두기로 했다오. 아무래 도 저 데스나이트들이 우호 선린의 기치 아래 달려오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그레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딤라이트의 냉철한 목소리가 빠르게 솔로처의 말에 대답했다.

“이것이 사술이라면 나는 부활을 거부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고위 마법사라도, 심지어 당신의 스승이라 하더라도 300년의 시간은 뛰어넘을 수 없 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술입니다, 솔로처. 가까운 곳에 오렘의 신전이 있습니까?”

•자살할 거요?”

딤라이트는 마치 모욕당했다는 듯한 얼굴로 솔로처를 쏘아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저 마법사는 원래 저 지경이었지.’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 이었다.

“일스 기사 단원은 대공이나 오렘의 허락 없이는 자살할 수 없음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렘의 프리스트께 저희들의 처리를 부탁드릴 생각입 딤라이트의 이 장중한 선언은 그레이의 왼팔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레이는 딤라이트의 어깨에 팔을 휘감아 그의 머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봐, 이봐. 딤라이트! 처리라니? 하하하! 누가 들으면 우리가 발목 부러진 말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우리가 무슨 쓰레기야, 처리라니.”

딤라이트는 화를 내려다가 참는 거라는 표정을 너무 실감나게 구사하며 그레이의 팔을 치우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레이는 더욱 짓궂게 딤라이트 를 잡아당겨 머리를 비벼대었고 그 상황에서 여전히 침착한 어투를 구사하려 애쓰는 딤라이트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말이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스 기사 단원으로서는 결단코 수용할 수 없는 사술임이 분명한 바…………”

“적 앞에서 도망치는 것도 일스 기사 단원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일이지.”

무스타파는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말하며 데스나이트들을 쏘아보았다. 딤라이트는 이번에는 울컥하려다가 참는 거라는 표정을 구사하며 말했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존재 자체가 떳떳치 못하다면 어떻게 저들을 친단 말인가?”

무스타파는 잠시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를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그러나, 검은 곧다. 죽음을 넘어서.”

딤라이트를 끌어안으며 낄낄거리고 있던 그레이는 이번엔 반짝거리는 눈으로 무스타파를 바라보았다. 무스타파는 검이 아닌 랜스를 힘껏 부여잡으 며 말했다.

“자네는 죽어서도 저놈들과 싸우겠다고 말하곤 했지. 실제로 그렇게 되었잖은가.”

“그건 사술에 의지해서라도 싸우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딤라이트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고 그레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주리오 시장은 당황이 물씬 묻어나는 얼굴로 세 기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솔로처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보시오들. 난 시간이 없어. 당신들은 부랑배도 아니고 산적 떼들도 아니니 지휘자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어떻소?”

그러자 천공의 3기사들은 그 말이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기사는 자신의 우두머리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우두머리 기사는 난처한 표정으 로 말했다.

“에…………, 또, 음, 그러니까. 에이, 난 머리 쓰는 거 질색이야. 이봐, 우리 솔로처 님 따라하자고. 칼잡이들이 마법사에게 머리 쓰는 일 맡기는 건 흉이 아니잖아.”

그레이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각자의 탈것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레이는 그리폰에 뛰어 올라서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솔로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거 참. 이제 됐습니까, 마법사님?”

“됐소. 어서 갑시다. 그레이.”

솔로처는 빙긋 웃으며 지팡이를 위로 던져올렸다. 그레이는 대답 대신 그리폰을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며 고함질렀다.

“이이이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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