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4장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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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워커 2권 – 4장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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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이이…하!”

벌써 수십 번도 넘게 울려퍼진 외침 소리였지만, 그레이의 목소리에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리폰에 탄 그레이가 까마득한 하늘에서 아래로 곧장 내리꽂히며 고함을 지를 때마다 데스나이트는 거친 저주의 고함 소리를 외치며 흩어져야 했다. 지팡이에 탄 채로 하늘을 날던 솔로처는 그레이 가 다시 급강하하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또다시 마법을 못 쓰게 되었군. 갑자기 그의 등 뒤로 날갯짓 소리가 들리며 딤라이트가 나타났다. 딤라이 트는 손에 든 활을 다시 어깨에 걸쳐메고는 솔로처와 나란히 날도록 페가수스를 몰아가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즐기고 있구려.”

“죽음을 겪고 나서도 저렇듯 겸허할 줄 모르니…………, 민망스럽습니다.”

딤라이트의 얼굴은 민망스러워 보이기에는 너무 당당했지만 솔로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려 주고는 다시 그레이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날개를 접 고 곤두박질치듯이 쏘아져 내려간 그레이의 그리폰이 급격하게 날개를 펴자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푸드드득! 거의 직각에 가까운 급반전을 통 해 데스나이트들의 투구에 걸릴 정도로 낮은 궤도로 접어든 그레이는 왼쪽 발을 재빨리 등자에서 빼내었다. 왼손으로 안장을 쥔 그레이는 몸을 오른 쪽으로 한껏 누인 채 검을 마구 휘둘러대었다.

“이야야야야!”

데스나이트들의 입장에서는 바람에 칼날이 달린 것이나 진배없었다. 목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의심스러운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머리 위를 날아가며 칼날을 휘두르는 그레이의 이런 기승스러운 공격은 데스나이트들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고, 혼란에 빠진 데스나이트들이 대오를 정리하여 반격 태 세를 취하자마자 그레이는 다시 창공으로 뛰쳐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늘의 다른 각도에서 무스타파의 와이번이 거대한 날개를 휘저으며 내려 섰다. 와이번은 정렬한 데스나이트 사수들의 등 뒤로 짓쳐들어 가며 격렬하게 포효했다.

“크아아아악!”

그레이의 그리폰이 쏘아진 화살의 사나움에 비견된다면 무스타파의 와이번은 그야말로 전차의 저돌성으로 데스나이트들의 뒤통수를 유린했다. 한 불운한 데스나이트의 투구가 무스타파의 손에 쥐어진 랜스에 명중되는 순간, 투구는 글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며 파편을 흩날렸다. 와이번의 거체 가 이런 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저고도 비행을 하며 일으킨 바람은 데스나이트들의 자세를 크게 뒤흔들었고 그래서 활을 들어 무스타파의 와이번을 겨냥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데스나이트들에게 실제적인 피해는 많지 않았지만 그레이와 무스타파가 십자 비행을 마친 부분의 데스나이트들의 진 형은 붕괴의 단말마를 질러대었고 그 붕괴지점을 정확히 포착한 솔로처는 서슴지 않고 마법을 퍼부어대었다. 폭음과 불길이 요란하게 울려퍼지며 다 시 대여섯 명의 데스나이트들이 파괴되었다. 누가 봐도 고의적이라고 생각되는 저궤도로 불길 위를 가로지르며 그레이는 목청껏 외쳤다.

“아잣차! 이 자식들아, 나도 이젠 데스나이트야! 죽은 기사라고! 우하하!”

그레이의 외침은 경쾌했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딤라이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캐스트를 마치고 다시 지팡이를 부여잡던 솔로처는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

“괜찮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딤라이트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삐를 말아쥐는 동작에 과도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이제 명확하게 떠오르는군요. 예. 저들이 나를 죽였습니다.”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하게 생각하오.”

“아니오. 그것은 우리들의 실수였습니다.”

“실수?”

딤라이트는 서글프게 웃으며 솔로처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사부의 위명에 기대어 이름을 떨치는 마법사로 취급한 것, 지금 사과한다면 너무 늦겠지요? 죽고 나서, 300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하는 사과이니.”

솔로처 역시 웃고 말았다. 세월마저 숨이 차 헐떡일 만한 기나긴 시간이 흐른 뒤, 과거의 악몽이 재현된 것 같은 전장 위에서 그 옛날의 기사가 그 옛 날의 마법사에게 그 옛날의 실수를 사과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솔로처는 재치 있는 대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하긴, 늦긴 늦군요.”

딤라이트는 발 아래의 전장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저희 주군과 당신의 사부님의 관계는 한두 마디로 설명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앙숙이지요.”

“예…………, 앙숙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 그렇게 무례했던 것, 이해해 주십사 말씀드리자면 너무 뻔뻔할까요.”

솔로처는 어제의 일처럼 그날을 떠올렸다.

“젊고, 용감했던 당신이었소. 마법사의 조력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당신의 모습은 실례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다웠지. 그리고 난 당 시에도 그런 말에 흥분하기엔 세월을 많이 훔친 늙은이였소. 화내지 않아요.”

“하지만 끝내 저희들을 도와주러 오셨잖습니까.”

“하하. 그 이야기에 관해서라면 주리오 시장에게 물어보시오. 그의 가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거요.”

“예?”

딤라이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솔로처는 그냥 웃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웃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저 아래쪽에서부터 그레이가 자신이 외친 고함 소리 를 추적할 듯이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르며 외쳤다.

“저 친구들이 뭔가 줄 게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사양하고 싶은데, 마법사님은 어떠십니까?”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지! 화살은 싫소!”

솔로처는 그레이의 말에 대답하며 지팡이를 위로 날아오르게 만들었다. 화살의 비라고 불릴 만한 가공할 대공 사격이 시작되었고 천공의 3기사와 무지개의 마법사는 제각기 하늘의 네 방향으로 흩어져 날아올랐다. 그러자 데스나이트 사수들은 일제히 활을 비틀어 가장 큰 목표물, 즉 무스타파의 와이번을 노렸다.

‘항상 나지.’ 무스타파는 짧게 생각하며 와이번을 복잡한 움직임으로 몰았다. 와이번의 거대한 날개가 제멋대로 휘둘러지며 바람 끊는 소리가 요란 했다. 몇 개의 화살이 와이번의 날개를 찢어놓았지만 와이번은 익숙하다는 듯이 상처를 무시하며 날아올랐다. 그레이는 민첩한 동작으로 그리폰을 솟구쳐오르게 하면서 웃었다.

“하하, 무스타파! 그렇게 느려서야 엉덩이에 화살 맞겠군. 자네 엉덩이가 오죽 큰가!”

“닥치지 않으면 그 새대가리 괴물을 바베큐로 만들어 아이라에게 먹이겠다.”

아이라는 무스타파의 와이번의 이름이다. 그레이는 히죽 웃으며 자신이 타고 있던 그리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그리폰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넌 정말이지 맛없게 생겼단 말이야. 아이라에게 미안한 일인걸.”

무스타파는 신음을 흘렸고 그리폰은 이대로 몸을 뒤집어 이 고약한 주인을 데스나이트에게 집어던져 버리면 어떨까 하는 망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레이는 태평한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별 인사가 요란한 친구들이야.”

그레이의 지적대로 화살을 퍼부어댄 데스나이트들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볼품없는 모습은 아니었다. 비록 상처입고 기세가 꺾여 후퇴하는 것 이었지만 데스나이트들은 품위 있게 행동할 줄 알았다. 딤라이트가 무의식중에 한숨을 흘릴 만큼 질서정연한 후퇴 동작을 통해 데스나이트들은 켄턴 성벽으로부터 약 2000큐빗 정도 떨어진 위치에 진을 치고 검은 안개로 자신을 완전히 감쌌다. 산과 숲에 기대어 만들어진 진형은 천공의 기사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하려는 목적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었다.

평원 위에 검은 언덕이 생긴 것 같은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딤라이트는 짧고 강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레이!”

“응? 왜?”

“어쩔 텐가.”

“어쩌기는. 파도도 거세게 몰아치기 위해선 일단 물러서는 법이야. 켄턴으로 귀환한다.”

그레이는 사태를 간단하게 파악했다. 레티의 프리스트들과 켄턴 경비 대원 그리고 솔로처의 분전이 있었기에 데스나이트들은 혼란되어 있었고, 우 리들은 그 혼란을 잘 이용했다. 하지만 조직적으로 정비를 갖춘 데스나이트들에게 시비를 걸 수는 없다. 돌아가서 밥 먹자.

“이봐, 친구들! 뒤를 엄호할 테니 부상자들을 수용해서 켄턴으로 돌아가시오!”

전장에서 따로 빠져나와 안전지대로 대피해 있던 경비 대원들과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상공을 향해 팔을 휘저어 주었다. 부러진 창대를 팔에 대고 찢 어진 망토로 묶고 있던 히든보리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망토 자락을 창대에 묶어 급조한 깃발로 부상병들을 집합시키고 있던 로터스 경비 대장은 그 깃발을 다른 경비 대원에게 넘기고는 히든보리에게 다가왔다. 로터스는 한쪽 손을 힘들게 꿈지럭거리는 히든보리를 보자 말 없이 손을 뻗어 매듭을 단단히 묶어주었다.

“고맙소, 경비 대장.”

로터스는 힘들게 웃으며 히든보리가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고함 소리를 계속 내지르고 전장의 먼지를 들이마신 후라 경비 대장의 목은 잔뜩 쉬어 있었다.

“내 생전 이런 싸움은 처음이었습니다, 사집관님.”

“나도 마찬가지요. 과거의 공포가 우리를 덮쳤을 때, 역시 과거의 희망들이 부활하여 우리를 돕는군.”

“그렇군요.”

“당연한 일일까요?”

“예?”

히든보리는 온전한 팔로 부러진 팔을 살짝 붙잡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가 부모의 자식이듯, 현재는 과거의 자식이오.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 과거가 현재를 보살피는 것 아닐까요.”

“제겐 어려운 이야기군요, 사집관님.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잔의 술과 한 조각의 빵 이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주겠다면 데스 나이트와도 악수하고픈 생각이 드는 걸요.”

켄턴의 사집관은 빙긋 웃었다.

“내 집에는 우리 어머님께서 담그신 301년산 와인이 있소. 죽었다가 살아난 기념으로, 오늘 그걸 한번 따볼 생각이오. 함께하겠소?”

켄턴의 경비 대장은 입가에 가득 넘쳐흐르는 침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다.

짙어져가는 햇살이 켄턴의 외벽을 달구고 있는 오후였다. 부상병들의 수용이 끝나자 켄턴의 성문은 다시 굳게 봉쇄되었으며 봄의 노곤한 햇살 사이 를 가르며 과거로부터 날아와 그들을 구원한 그리폰, 페가수스, 와이번, 지팡이는 성벽 위로 날아들었다. 주리오 시장은 히든보리를 얼싸안으려 들다 가 그의 총애하는 사집관을 기절시켰고(“으아아! 내 팔! 꼬로로록.”) 301 년산 와인이 잠시 보류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경비 대장으로 하여금 눈물이 찔끔 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주리오 시장은 솔로처와 천공의 3기사를 대할 때는 훨씬 침착해질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예, 정말 감사하다고, 예! 감사합니다.”

주리오 시장의 이 상당히 침착한(?) 언행은 솔로처와 그레이, 그리고 무스타파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장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300년 묵은 빚을 청산했을 뿐입니다, 시장님. 그날 우리는 데스나이트들을 격파하지 못했습니다. 이토록이나 늦은 빚 갚음에 대해 치하의 말씀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이런 식의 대답에는 딤라이트마저도 할말이 없었다. 딤라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구간이 어디 있냐는 질문을 통해 대화의 방향을 바꿔버렸다. “마구간이오?”

“헐스루인도 고생했으니…………, 헐스루인은 제 페가수스의 이름입니다, 쉬게 해주고 싶군요.”

“아, 예. 당연하십니다. 저, 그런데 조금 전 여러분들이 분전하시는 동안 바이서스 임펠로부터 찾아온 손님이 계십니다. 북문으로 들어오셨기에 싸 움터를 피하실 수 있었지요. 그분이 여러분들을 뵙고 싶어하는데요.”

솔로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농담을 말했다.

“손님? 아니, 나는 이 시대에 지인이 없는데?”

그레이와 무스타파는 가벼운 웃음을 떠올렸지만 솔로처의 농담을 알아듣지 못한 딤라이트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리오 시장은 벙긋 웃으며 손을 들어 그 손님을 가리켰다.

대로 저편에서 거구의 젊은이가 한 손은 자연스럽게 칼자루에 얹어두고 다른 손으로는 말고삐를 쥔 채 서 있었다. 온몸에 뒤집어쓴 먼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젊은이의 옷가지들이 원래 무슨 색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지경인 데다가 옆에 서 있는 말은 허옇게 말라붙은 땀 때문에 백마로 보일 지경이 었다. 엄청난 거리를 쉼 없이 달려온 것이 틀림없다. 그 젊은이는 광장에 설치된 임시 숙영지에 수용되는 부상병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젊은이의 순한 얼굴은 이런 표정에 있어 최적이라고 할 만한 얼굴이었지만 그 거대한 덩치를 본 천공의 3기사는 감탄하고 말았다. 그레이는 활짝 웃으며 무스타파에게 말했다.

“이봐, 저 친구, 마치 멜다로 공 같지 않아?”

“체격은 확실히 그렇군.”

“혹시 멜다로 공의 후손 아닌가 모르겠어.”

그레이와 무스타파가 이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젊은이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젊은이는 곧 환한 얼굴이 되어 씩씩한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솔로처 와 천공의 3기사가 바라보는 가운데 멈춰 선 젊은이는 솔로처를 바라보며 열렬하게 말했다.

“아빠!”

바람에 머리카락 흩날리는 소리마저 들릴 듯한 적막이 사람들을 감쌌다. 가장 먼저 혼란에서 깨어난 그레이는 자신이 이 모든 사태를 이해했다는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법사님의 아드님이었군. 역시 부활한 거야…..”

“터무니없는! 난 결혼한 적이 없소!”

그레이는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사태를 이해한 자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 뭐, 꼭 결혼해야 아들이 생기는 것은 아니죠. 첫사랑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 자식이랄까. 300년 만에 시간과 죽음마저 뛰어넘어 만나길 고대하 던 아버지를 찾아서…………”

그레이가 이런 발랄하지만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때 자신이 내뱉은 말에 경악해 버렸던 젊은이는 간신히 제정신을 수습해서 힘겹게 말을 꺼내었다.

“제가 아니라………….., 이 검이 말한 겁니다만……”

젊은이는 그렇게 말하며 매우 특이하게 생겼으며 동시에 아름다운 검을 뽑았다. 천공의 3기사는 주춤했지만 젊은이는 검을 뒤집어 날을 쥔 다음 솔 로처에게 칼자루를 내밀었다. 솔로처의 눈이 커졌다.

“어라? 이게 누군가!”

솔로처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 아름다운 검을 쥐었다. 곧 솔로처는 풀려버린 눈으로 허공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아! 반갑구나, 프림. 음? 떽! 이 아빠를 유령 취급해서는 못써. 그 동안 재미있는 사람들 많이 만났니? 아아 그래그래. 착하다. 음음. 그래?”

딤라이트의 눈썹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쳤다. “마검인가?” 이번엔 그레이와 무스타파의 눈썹이 땅이 꺼져라 축 쳐졌다. 그레이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게 바로 프림 블레이드로군. 대공께서도 말씀하셨잖아, 이 친구야.”

“응? 아아. 기억난다.”

딤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프림 블레이드를 소지하고 계시다면, 귀공은 바이서스 왕가의 분이신가요?”

프림 블레이드를 솔로처에게 건넨 젊은 청년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보다 그 거구에 어울리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저 검의 저번 소유주는 왕족이십니다만 제게 선물로 남기셨지요.”

“그럼 귀공은?”

젊은이는 자세를 바로하며 암기하고 있던 말을 하는 것처럼 절도 있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그레이 휠드런 공, 무스타파 하빈스 공, 딤라이트 이스트필드 공. 바이서스와 일스의 거리를 멀다 하시지 않고 찾아주셨던 분들께서 300년의 시간을 멀다 하시지 않고 다시 찾아주셨으니 무한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샌슨 퍼시발이라고 합니다.”

샌슨은 시간을 쓰는 데 있어서 여유를 두지 말라는 칼의 지침을 잊어먹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샌슨은 부디 들어와서 원로에 쌓인 먼지라도 좀 털고 가시라는 주리오 시장의 권유를 점잖게 사양하며 선 자리에서 외워온 내용을 모조리 말했다. 폭포처럼 쏟아낸 이야기가 마침내 끝났을 때 샌슨은 솔 로처와 주리오 시장만이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공의 3기사들은 돌아가며 프림 블레이드를 쥐어보느라 정신이 하나 도 없었던 것이다. 좋은 검에 대한 전사의 순수한 호기심에 덧붙여 무지개의 대마법사가 만든 마법검이라는 점은 천공의 3기사들을 매우 자극했다. 솔로처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시간이 멈췄다고? 아니지. 다시 말해야 되겠군. 당신네들의 시간이 멈췄다는 말이오, 그럼?”

“예. 우리들의 시간이 멈췄기 때문에 과거의 여러분들께서 우리들에게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그때 무스타파에게 프림 블레이드를 뺏긴 그레이가 솔로처와 샌슨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 샌슨 경. 그거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추리는 당신들의 시간, 우리들의 시간 하는 식으로 시간을 구분했을 때 가능한 말인 거 같소. 그런 거요?”

“무슨 말씀인지요, 그레이 경?”

“글쎄. 당신의 비유는 마치 두 마리의 말이 달리다가 한 마리가 멈춰 서자 다른 한 마리가 따라잡았다는 식의 말처럼 들린다는 말이오. 그러니 두 마 리의 말처럼 두 개의 시간을 따로 말한 것 같소. 우리들의 시간, 당신들의 시간. 그렇잖아요?”

“예. 그렇군요.”

“하지만 시간은 하나잖소. 우리들이 머물던 시간이 그대로 이어져 당신네들의 시간에 이어지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두 마리의 말이 아니 라 한 마리의 말 아니오? 만일 말이 한 마리뿐이라면, 한 마리의 말은 멈출 수야 있겠지만 그 자신을 따라잡았다는 식의 표현은 불가능할 거 같은데.” 샌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렇군요?”

상당한 반론을 예상하고 있던 그레이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 솔로처가 끼어들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소. 그레이. 시간은 하나가 아니오. 당신이 마법을 조금 익혔더라면 설명하기 좋았을 텐데. 음………….., 혹시 헤이스트 스펠이나 타임 스톱이라는 스펠에 대해 들어보셨소?”

“예? 아, 헤이스트 스펠이라는 것은 마법사의 속력을 매우 높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타임 스톱은, 에, 저 그러니까 시간을 정지시키고 마법사만이 움 직이는……………. 아!”

그레이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솔로처는 그레이가 이해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샌슨과 딤라이트, 그리고 주리오 시장이 도통 이해하지 못하고 있 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프림 블레이드를 든 채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무스타파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솔로처는 두 팔을 조금 펼치며 매 우 학자연한 태도로 설명을 시작했다.

“타임 스톱은 사물의 시간을 정지시키고 마법사만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마법이오. 분명히 존재하는 스펠이며, 마나에 깊이 안겨 있는 마법사라면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소. 당신들 중 마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대개 들어보셨을 거요. 그런데 만일 시간이 하나의 흐름이자 고정 불변의 것이라면, 타임 스톱을 성공시킨 마법사가 보낸 시간은 도대체 무엇이겠소?”

“어, 그런가요?”

샌슨은 별로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던 문제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솔로처는 빠르게 말했다.

“그것도 다 시간이오.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의 흐름이 아니지. 시간은 사실 모든 사물에 있어 따로 흐르는 것이오. 하늘을 나는 새와 바람에 흩날리 는 풀잎은 사실 서로 다른 시간,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오. 이해했으리라 믿고, 그럼 헤이스트 스펠을 예로 들어봅시다. 이 경우 마법사는 자 신의 시간을 매우 빠르게 보내는 것이오. 그래서 주위의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법사가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타임 스톱의 경우는 마법사가 자신의 시간을 극한까지 가속시킨 것이오. 아니, 무한이라고 해야 될까? 그렇소. 타임 스톱을 캐스트한 마법사는 자신의 시 간을 무한히 빠르게 만든 것이며, 이때 주위의 시간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멈춘 것이 되는 거요. 아시겠소?”

샌슨은 거의 불쌍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우리들은, 아니, 모든 것들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는…………. 그럼 어떻게 서로 이야기하고 행동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보통의 사물들이 가지는 그 시간 차이라는 것이 거의 0에 가까울 만큼 무한히 작기 때문이오. 그래서 사물들은 모두 하나의 시간을 공유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지요. 마법의 도움이 없다면, 보통의 사물들은 각자의 시간 차이를 절대로 경험할 수 없소.”

샌슨은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래서 샌슨은 솔로처의 말 전체를 그냥 외워버렸다. 칼에게 들려주고 나서 쉽게 설명하라고 요구해야겠군. 샌 슨은 그렇게 결심한 다음 ‘나는 당연 무쌍하게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들의 추측이 맞은 것이라는 말씀이시죠?”

“논리적으로 틀린 부분은 없다고 해야겠군. 하지만…..”

솔로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묻겠소, 샌슨, 부활한 이들은 우리뿐이오? 그러니까 나와 천공의 기사, 그리고 저 데스나이트들뿐이냐고.”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이상하군.”

“예?”

솔로처는 그레이와 딤라이트를 한 번씩 바라보고는 침울하게 말했다.

“왜 우리들뿐이지? 대왕이나 여덟 별은 왜 부활하지 않는 건지. 우리 사부님의 경우는? 나는 조금 전 모든 사물은 각자의 시간을 가진다고 말했소. 그 말을 바꿔 말하자면, 다른 시간에 비해 특별한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 되오. 모든 시간은 평등하오. 그런데 왜 우리들만이 현재에 부활한 건 지……”

샌슨은 미리 들어두었던 대답을 할 수 있어서 안도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족하나마 추측해 본 바에 의하면,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될수록 더 많은 과거들이 우리를 따라잡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레이는 눈썹을 조금 찡그리며 말했다.

“그럼, 우리들이 그냥 처음으로 부활했다는 것이오? 흐음. 마법사님. 조금 전에 다른 시간에 비해 특별한 시간은 없다고 하셨지요? 모든 시간이 평 등하다고.”

“그랬소.”

“그럼 우리는 가장 먼저 떨어진 빗방울인가 보군요. 모든 빗방울들은 다 똑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중에는 분명 가장 먼저 떨어지는 빗방울이 있는 법이지요.”

그레이의 아름답고도 적절한 비유에 솔로처는 피식 웃어버렸다.

“좋아. 일단은 그렇게 여기고 있도록 하지. 음. 그래, 샌슨. 이 사태에 대한 당신들의 대비는?”

“일단 시공의 문제이니만큼 저희들은 이 문제를 요정의 여왕께 여쭤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페어리퀸 다레니안 말씀이오?”

“예. 이미 수도에서는 특사들이 출발했습니다. 저와 동시에 출발했으니 이제쯤은 레브네인 호수에 이르렀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딤라이트가 끼어들었다.

“질문이 있소, 샌슨 경. 당신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거요.”

샌슨은 당황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샌슨은 우물쭈물하다가 힘들게 대답했다.

“저, 그러니까 원래대로…

“잊혀진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단 말이군요. 소멸한다고.”

“그렇게 추측합니다.”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이겠지. 우리는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샌슨은 입을 다물었다. 주리오 시장은 불안한 표정으로 딤라이트의 안색을 살폈지만 딤라이트의 딱딱한 얼굴에서는 그의 심사를 추측하게 할 만한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딤라이트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바라 마지않는 바요.”

“예?”

딤라이트는 밝게 웃지도 않았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지만, 자신 속에 완성된 진리를 말하는 자가 보여주는 당당함으로 말했다.

“꼭 성공하시길 빌겠소. 그리고 그때까지, 우리는 저 데스나이트들이 현재의 여러분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위해도 끼칠 수 없도록 저지하겠소. 그것 이 이 기괴한 상황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정의인 것 같소. 나는 오렘의 이름 아래 맹세하겠소.”

샌슨은 감탄해 버렸고, 그는 감탄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가식이 없는 성격이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온 목적도 바로 그렇습니다!”

“그럴 거라 짐작했소.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군요.”

“부탁? 말씀하십시오.”

“대공께 저희들의 지위를 복권시켜 주시고 임무의 수행을 완료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연락을 취해 주셨으면 하오.”

“예? 대공……, 일스 대공 전하 말씀입니까?”

딤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300년 전, 나는 우정으로서 바이서스를 도울 것을 결심하신 대공 전하의 명령에 따라 데스나이트들을 물리치기 위해 이 땅을 찾았소. 그러 나 나는 선의에서 주어진 협조의 손길을 무시했고, 그래서 콜로넬 계곡의 망자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소.”

딤라이트의 말을 듣고 있던 솔로처는 쓰게 웃었다. 바이서스의 어전 앞에서 데스나이트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 마법사의 도움까지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던 딤라이트의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와 나 모두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흐른 300년은 그를 이렇게 변모시킨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죽음을 경험한 자의 변화인가.

딤라이트는 차분하게 말했다.

“대공께서 내리신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일스로 찾아가 갑옷을 벗고 대공 앞에 무릎 꿇어 죄를 고하는 것이 마 땅할 것이오. 하지만 시기가 이러하니 그럴 수는 없군요. 그러니 원컨대, 나와 내 사랑하는 친구들로 하여금 끝끝내 완수하지 못한 명령을, 우리들의 목숨을 지불하고서도 이행하지 못했던 명령을, 참람된 망자의 몸으로나마 수행하게 허락해 주십사 부탁드려 달라는 것이오.”

“죽어서까지…………… 주군께서 내린 명령을 수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딤라이트 경?”

딤라이트는 동그래진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함으로써 샌슨을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당연한 거 아니오?”

샌슨은 자신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몰라 허둥거렸다. 다행히도 무지개의 대마법사가 그를 구원했다.

“좋소. 샌슨. 그럼 켄턴으로의 지원병은 언제까지 구성 가능한 거요?”

샌슨은 다시 착 가라앉은 얼굴이 되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긴 했지만, 그 대답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이 그에겐 너무 벅찬 일이었다. 샌슨 은 힘빠진 얼굴로 주리오 시장을 바라보았다가, 시장이 이미 그의 대답을 짐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리오 시장은 슬픈 표정으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은 어렵게 말을 꺼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원병은 없습니다.”

“뭐요?”

“자세한 사정은 주리오 시장님께서 말씀하시겠지만 현재 바이서스는 전쟁중입니다. 자이펀과 전쟁중이지요. 그래서 추가 지원이 몹시 힘든 상태입 니다. 그러니….”

샌슨은 말을 맺지 못했다. 이번에는 솔로처가 샌슨을 바보 취급해 버렸다.

“이런 멍청한! 누가 보통 지원병을 말한 거요?”

“예?”

“전쟁중이라. 음. 도대체 평화로운 시기라는 것이 없군. 내가 300년에 걸친 두 시대를 살아본 사람으로서 말하겠는데, 인간사 평안할 날이 없군. 어 쨌든 내가 말한 것은 그런 지원병이 아니오. 이곳은 데스나이트들의 공격을 받고 있단 말이오.”

“그럼・・・・ “무슨?”

솔로처는 대답하려다가 머리를 가로젓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그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 킨 크라이의 깃털 하나만 뽑아주시겠소? 좀 큼지막한 놈으로.”

그레이는 별말 없이 자신의 그리폰에게 다가서서는 그 하얀 깃털을 하나 뽑았다. 그레이에게 깃털을 건네받은 솔로처는 그것을 손에 들고 잠시 바라 보다가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솔로처의 눈이 감긴 순간, 지팡이에 감겨 있던 링 중에서 두 번째 링이 주홍색의 빛을 뿜었다. 주리오 시장과 샌슨이 당황하여 조금 뒷걸음질치는 동안 솔로처는 빛나는 지팡이를 그대로 깃털에 가져다대었다. 순간 지팡이의 빛이 그대로 깃털로 옮겨진 것처럼 깃털은 선명한 오렌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물감으로 물들인 것 같은 빛깔이 아니라 그 자체로 환한 빛을 뿜어내는 것이었다. 솔로처는 만족한 표정으로 깃털을 바라보더니 샌슨에게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시오.”

“예? 아, 예. 어디로…………?”

“빛의 탑으로 찾아가시오. 빛의 탑의 마법사들이 모조리 마학 연구하다가 돌아버리지 않았다면 이 깃털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볼 수 있는 녀석들도 있을 거요. 당신이 할 일은 그저 그들 앞에서 이 깃털을 허공에 던지는 것이오. 그러면 그 친구들은 이해할 거요. 그들이 이해하면, 솔로처가 맡겨둔 물건을 찾고 싶어 한다고 말하시오. 당신이 직접 가져다 줄 필요는 없소. 그 녀석들도 운동 좀 해야 될 테니까. 현재 길드장이 누군지야 내 알 바 아니 지만, 까마득한 사조께서 명령하는 것이니 속히 가져오라고 전하시오.”

샌슨은 황공스러운 동작으로 깃털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레이가 말했다.

“아, 샌슨 경. 부탁이 참 많습니다만 이왕 부탁하는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거 뭐냐, 딤라이트의 말을 전달하는 사자 편에 그레이의 말이라고 해서 한마디 더 전달해 주시오. 내 비록 죽었지만 내가 대공과 맺었던 충성의 서 약은 그대로요. 그리고 그 서약은 내 자손과 대공의 자손에게까지 모두 해당되는 것이었소. 그러니 이렇게 말해 주시오. 인간이 말하는 것과 인간이 말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충성의 서약을 깰 수 없음을 기억하신다면, 300살 넘게 먹은 늙은 수하들을 정의롭게 대해 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일스 기 사단원의 출병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소?”

샌슨은 도대체 이 행운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몰랐고 그것은 주리오 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힘없는 동의(이 시대와 관련된 사람은 아니지 만, 부탁한다면 후손을 위해 싸워주겠다)만이라도 얻어낼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여행이 이런 엄청난 성과로 끝나게 될 줄이야. 샌슨은 이마가 부서 져라 경례를 붙이려다가 눈앞의 사람들이 일스의 기사와 마법사, 즉 그에게 경례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간신히 알아차리고는 대신 머리를 깊 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미력한 목숨 초개처럼 던져 그 전갈을 전하겠습니다!”

그레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죽으면 못 전해요. 살아서 전하도록.”

“아, 예.”

그때 무스타파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말했다.

“죽어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모두 무스타파를 돌아보았고 무스타파는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잖소. 그러니 샌슨 경도 죽으면 되살아날지도 모르지. 그렇잖소?”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솔로처가 말하는 것을 듣고는 더욱 놀라야 했다.

“그렇지는 않지. 만일 샌슨 경과 그 동료분들의 추측이 맞다면 현재는 점차 고정되고 있는 거 아니겠소? 재수가 없으면 여기 있는 우리 친구 샌슨께 서는 사망한 그 순간이 영원히 고정될지도 모르지. 되살아날 수 없게 말이오. 흥미로운 연구거리인데, 음음. 샌슨, 사실의 판단을 위해 좀 죽어주실 생각은 없소?”

“그, 그 말씀은 수용하기 어렵군요……”

솔로처는 껄껄거리며 농담이었다고 말했고 천공의 3기사들도 웃어버렸다. 하지만 샌슨은 방금 오고간 대화에서 깨달은 사실을 생각하느라 웃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 자신은 죽으면 되살아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과거의 시간이 되어 되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죽어버린 그 순간이 고정되어 절대로 부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3의 경우도 있다. 샌슨은 바로 그 제3의 경우를 고민하며 머리 아파해야 했다.

이미 그는 고정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절대로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좋은 해답이 있어요, 아프나이델?”

“모르겠는데요.”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제레인트는 아프나이델의 대답에 풀죽은 표정이 되어서는 풀잎을 뜯기 시작했다. 툭. 툭. 역시 맥이 풀린 표정으로 호수를 바 라보고 있던 엑셀핸드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다.

“이봐, 이루릴!”

“네.”

“다시 좀 불러주게. 이건 도대체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왜 똑똑히 말해 주지 않는 거야?”

“그녀는 대답해 주셨습니다만.”

“그런데 그 대답이라는 것이 머리 아픈 소리잖아! 뭐라고? 어, 그러니까 과거가……… 교차점이…………”

요정의 여왕의 말을 반복하려다가 잠시 주춤한 엑셀핸드는 주위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엑셀핸드는 으르렁거 렸지만 아일페사스가 먼저 말했다.

“까먹었지?”

“……넌 기억하냐?”

“물론이죠, 엑스 오빠.”

“그럼 말해 봐!”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두 흐름의 교차점을 찾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리라.”

아일페사스는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며 낭랑한 목소리로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대답을 반복했다. 엑셀핸드는 드워프 어로 뭐라고 혼잣말을 한 다음 아프나이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당황하며 말했다.

“예?”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아프나이델!”

“조금 전에 말했듯이,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엑셀핸드는 기세 오른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때? 마법사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이란 말이야. 그런 말도 되지 않는 말, 잊 어먹을 수도 있는 거 아냐?”라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아무도 엑셀핸드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모두들 답답한 표정으로 레브네인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요정의 여왕이 한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앉은 자리에 조그마한 건초 더미 비슷한 것을 만들어버린 다음에야 제레인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이상의 다른 대답은 주시지 않을 것 같지요?”

“아쉽지만, 그렇게 추측됩니다.”

이루릴은 평온하게 대답했고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젠 우리들에게 맡겨진 것이군요. 그게 뭔지, 그러니까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이 뭔지 밝혀내고, 그 흐름의 교차점이라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전부 우리 몫이란 말이군요. 아악! 그런데 나는 수수께끼에는 소질이 없단 말입니다! 아프나이델! 좋은 생각 좀 없어요?”

단지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똑똑한 마법사, 잘난 마법사, 이미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들을 추구하는 마법사, 유피넬의 저울 눈금을 속여 헬카네스의 추마저도 비켜가게 만드는 위대한 그 이름, 마법사) 무려 세 번에 걸쳐 지적당한 아프나이델은 기가 죽을 대로 죽어서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에 대한 이런 취급에 분개해서는 외쳤다.

“왜 자꾸 나이드만 못살게 구는 거야? 린! 언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뭐 떠오르는 거 있어요?”

에델린은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잘 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대답했다.

“떠오르는 것이 없네요, 아일페사스.”

“제리! 너는 없어요?”

“지금으로선.”

“엑스 오빠는 건너뛰고, 악! 때리지 마! 아, 루리. 루리는 뭐 떠오르는 거 없어?”

“없군요.”

“그럼 요정의 여왕이 잘못 생각한 거네요. 그 정도만 말해 주면 우리가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그렇지가 못하잖아. 우리들을 너무 대과평가 했나 봐.”

“과대평가라고 하는 거야, 아일페사스.”

아프나이델이 지적했지만 아일페사스는 콧대를 높이 세워보였을 뿐이었다.

“요정의 여왕이 한 말도 모르는 주제에 그까짓 과대평가라는 단어 똑바로 아는 것이 무슨 자랑이야?”

아일페사스의 말로써 일행들은 다시 자신들의 아둔함을 인식하며 속상함에 빠졌다. 제레인트는 다시 한번 처량한 목소리로 아프나이델에게 말했다.

“과거로 향하는 것이 뭘까요?”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신뢰감의 표현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일행 중에 이 묘한 문제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프나이델 이 유일할 거라고 무의식중에 믿는 제레인트의 질문에 아프나이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사인가 보지요.”

“그럼 미래로 향하는 것은요?”

“마법사겠지요.”

아무렇게나 대답하던 아프나이델은 문득 주위가 고요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들었다. 제레인트와 에델린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고 엑셀 핸드는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이루릴은 아무 표정 없이 아프나이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일페사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나이드? 그게 무슨 말이야? 대답을 알아낸 거예요?”

“어? 뭐? 아, 아니. 농담한 건데……”

아프나이델은 당황해서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제레인트가 급하게 말했다.

“잠깐만요, 아프나이델. 그 농담이 왠지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한 거지요?”

아프나이델은 이제 본격적으로 당황해 버렸다. 그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아, 저, 그게 그러니까. 음. 에, 마법사는, 마법사는 그러니까….”

“침착하게 말해. 아무도 너 안 잡아먹어!”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며 말하는 엑셀핸드 앞에서 아프나이델은 주저주저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 음. 예. 이건 그냥 농담입니다. 마법사들끼리 하는 객담 같은 거지요. 전사가 다루는 검은 무엇에 쓰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즉 자 신을 유지하는 도구입니다. 이때 발전이나 변화 같은 것은 배제되지요. 전사는 자신의 몸 어디라도 다치지 않기를 원할 겁니다. 맞지요? 예. 그러니까 검이라는 것은 항상성이나 일관성 유지의 도구입니다. 과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기를 원하는 심리의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체의 도구지요.”

제레인트는 아프나이델의 말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갔다.

“음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럼 마법사의 경우에는?”

“마법사는 반대로 변화를 원하는 심리지요, 뭐. 가만히 놔두지를 못하는 것이 마법사의 심리입니다. 균일하게 배치되어 안정된 마나를 마구 일탈시 키고 변화시키고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에, 그런 것이 마법사의 소행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마법사는 되는 대로 놔두는 것을 못 견뎌하지요. 뭔가를 바꿔보고, 변화시켜 보고.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마법사라는 존재가 뭔지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마법사는 변화의 노예지요.”

“그러니까 현재의 모습을 있는 대로 놔두지 못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뭐.”

아프나이델은 자신의 별 대수롭지 않은 농담에 일행들이 이토록이나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 엑셀핸드까지도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의 말을 되씹고 있었다. 에델린은 작은 코를 힘차게 벌렁거리며 말했다.

“으음. 그 교차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아프나이델 님의 말은 그럴듯하게 느껴지는데요. 그렇잖습니까, 이루릴?”

“예.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그거 농담이라니까요……”

“맞아. 제레인트. 이 친구의 말은 내게도 이해되는데. 음? 그 표정 뭔가. 전에도 본 적이 있는 표정인데?”

“아, 아닙니다. 엑셀핸드. 으음. 확실히 그럴듯하지요? 현재에 살면서도 어제의 충성, 어제의 모국을 지키는 전사, 현재에 살면서도 내일의 발견, 내 일의 신지식을 겨냥하는 마법사.”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농담이고……”

“오아! 어쨌든 나이드, 멋져! 그래도 제일 똑똑해요. 마법사다워요. 당장 맞춰버리다니! 오아!”

“아일페사스, 부디…………… 그건 농담이라고!”

그러나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의 이런 절절한 반항을 무시하며 질문했다.

“그런데, 나이드의 말대로라면 과거로 향하는 흐름은 전사고 미래로 향하는 흐름은 마법사인데, 그럼 전사와 마법사의 교차점이 뭔데?”

“성직자인가?”

제레인트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일행은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만을 바라보았 고 아프나이델은 그만 항복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알 도리가 없지요.”

그러자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아! 남자 전사와 여자 마법사가,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결혼해서 낳은 아이!”

“아냐. 전사의 길과 마법사의 길이 만나는 곳. 그건 명예다! 명예야말로 그 양자 모두가 관심을 갖는 거야.”

“그런 식으로라면 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혹은 보석이라고도.”

“혹시 어린이를 말하는 거 아닐까요? 어린이는 장차 전사가 될 수도, 마법사가 될 수도 있는 존재니까 그 양자의 시발점· 아니, 잠깐. 교차점이 라고 했으니 좀 이상한데……”

“잠깐. 교차점이라고 했으니 그건 어떤 장소를 말하는 거 아닐까요? 알았습니다! 마법 국가인 바이서스와 전사 국가인 자이펀. 이건 바이서스·자이펀 전쟁을 빗댄 말입니다!”

“잠깐만요. 물론 바이서스에 빛의 탑이 있긴 하지만 바이서스는 어디까지나 기사도의 나라란 말입니다.”

“그럼 궁성 임펠리아다!”

마지막으로 일갈한 엑셀핸드는 모든 이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퍽 기뻐했다. 에델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엑셀핸드를 바라보았 다.

“노커여, 임펠리아라고 하셨습니까? 바이서스의 궁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곳은 전사의 성지이지만 마법사가 지키는 곳이니까.”

엑셀핸드는 한층 높아져가는 기쁨에 거의 취하는 기분을 느꼈다. 일행들은 모두 뒤통수를 매우 딱딱한 무엇으로 두드려맞은 듯한 표정으로 드워프 들의 노커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그래도 가장 초연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루릴이 조용히 말했다.

“바이서스 기사도의 총본산인 성지이지만,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대대로 마법사가 그 수비대장을 맡는 곳. 엑셀핸드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군요.”

“그렇지, 그렇지!”

경악에서 깨어난 제레인트가 달려들 것 같은 과격함으로 엑셀핸드를 겁주며 외쳤다.

“하지만 궁성이 왜요!”

“응? 어, 무슨 말인가?”

“그럼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아니, 비극적인, 아냐. 기괴망측한, 음. 아무래도 제 마음을 적당히 나타낼 수 있는 말을 찾기도 어려운………이라고 말해 야 될 이 사태가 바이서스의 궁성 임펠리아에서 일어났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궁성의 무엇이, 누가? 그게 말이 돼요?”

제레인트의 말투는 마치 질책하는 듯했고 그래서 엑셀핸드도 노기 띤 얼굴이 되었다.

“내게 말할 기회를 준다면, 그 기회를 용도 변경해서 네 녀석의 뒤통수부터 한 대 때려주겠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전사와 마법사의 교차점이라 고 하니 그게 떠오른다는 거다. 이 엉터리 프리스트야!”

에델린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말했다.

“음음. 여러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발 내 말을 들어주세요. 예?”

에델린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때려봐요, 때려봐! 내 뒤통수에 손이나 닿아요?” “크아아악! 이놈의 자식, 정정한다.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놓겠다!” 등등의 험악한 애정 교환을 하고 있던 제레인트와 엑셀핸드도 진정하게 되었다. 에델린은 그 거구에 어울리는 깊이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요정의 여왕께서 주신 말씀의 전반부는 아프나이델 님에 의해, 후반부는 엑셀핸드님에 의해 해석되었습니다. 그 해석에 따르자면 요정의 여 왕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와 같습니다. ‘전사와 마법사의 교차점, 궁성 임펠리아를 찾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리라.’ 이 이상의 다른 해석은 현재로선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에델린의 목소리에는 사태를 안정된 것으로 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고 그래서 일행들은 자신도 모르게 매우 안심스러운 기분을 느껴버렸다. 에델린 은 잠시 쉬었다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궁성 임펠리아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 해석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들은 페어리퀸 다레니안께서 주신 말씀을 수도로 가져가야 될 것입니다. 수도로 가져가서 보다 현명한 분들께 이 말씀에 대해 해석을 요구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잖습니까?”

그러나 이 부분에서 제동이 들어왔다. 자신의 해석을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여기는 일행에 대해서 곤혹스러워하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조금 가로저으며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해석이 옳지 않았을 경우에는 수도로 돌아가는 것은, 글쎄요……………. 저희들은 지금의 이 문제 상황의 이면에 있는 원인을 규명하고 그 해결 방안까지 모색할 것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 아닙니까? 출발하기 전 칼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흘러가는 강물이 멈추고 천공을 일주하는 태양이 멈춰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언제 일어날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밤이 우리들의 ‘현재’로 영원히 고정될 수도 있겠지요. 그럼 우리는 영원한 어둠 속에서 살아야 될 겁니다.”

아프나이델의 말에 일행은 섬뜩함을 느꼈다. 부드러운 포용력으로 일행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에델린과는 달리 아프나이델은 끔찍한 말만 일삼음 으로써 일행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시 바삐 이 상황의 이유를 밝히고 그 해결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들의 해석이 틀렸을 경우 우리들 은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여기서 수도까지 돌아가는 시간, 음, 이건 얼마 안 걸리겠군요. 하지만 그 말씀을 전달하고 다시 해석해야 하는 시 간은 꽤나 많이 걸릴 겁니다.”

“그래서…………, 어쩌자고?”

엑셀핸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준비해 두고 있었다.

“간단하지요. 물어보는 겁니다.”

“물어보다니?”

아프나이델은 대답하는 대신 매우 극적인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일행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프나이델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 시선이 멈춘 곳에는 선량해 뵈는 얼굴이 당혹감을 담고 있었다.

“제레인트?”

“예?”

“이 해석이 맞아요, 틀려요?”

제레인트는 생각하기도 전에 대답했다. 

“틀려요.”

아프나이델은 자신의 해석이 틀렸다는 데서 안도감을 느껴야 된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게다가 일행들이 전부 그 해석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바에야. 그래서 아프나이델은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예…………. 들으셨지요? 틀렸답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그 해석은 그냥 농담이었을 뿐이니까요.”

“11900!”

엑셀핸드가 일행을 대표해서 신음을 토했기에 다른 이들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인간, 트롤, 드워프, 엘프, 드래곤의 이 복잡다단한 구성의 종족들은 모두 각 종족을 대표할 만한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제레인트만은 예외였다.

“하지만 맞아요.”

레브네인 호수에서 들려오는 찰박거리는 물소리만이 잠시 사위를 점령하며 기세등등하게 울려퍼졌다. 만연한 고요함 속에서 일행들이 제레인트를 바라보는 가운데 이 말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이루릴이었다. 그리고 아일페사스가 냉큼 그 뒤를 이어 말했다.

“그런가요라니? 루리! 루리! 아니, 제리! 어떻게 된 거야? 맞다는 거예요, 틀리다는 거예요?”

“틀려. 하지만 맞아.”

아프나이델은 턱을 긁적거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역시 세상은 흑백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법 어쩌고 하는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라면 상당한 짜증을 야기시킬 뿐 본래의 목적에는 실패했다 고 말씀드리고 싶은걸요?”

“아니…………, 에, 그러니까. 아프나이델의 해석은 틀려요. 하지만 우리는 임펠리아로 가야 해요.”

“한결 낫군요.”

아프나이델은 정말 다행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기 때문에 제레인트는 퍽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그 표정 그대로 의문을 제시했다. “그럼 뭡니까. 우리 해석은 틀렸지만 답은 맞았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조건을 붙이는 질문은 제게 부여된 권능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조건을 붙이는 것은, 음. 마치 세 갈래 길 에서 오른쪽의 길로 가지 않는다고 할 경우 가운데와 왼쪽 중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음. 그럼 어쨌든 우리는 임펠리아로 가야겠군요?”

“저는 그러고 싶습니다.”

제레인트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루릴은 침착한 표정으로 레브네인 호수를 향해 작별 인사를 보내었다.

“도움 준 것에 감사해요, 내 친구 다레니안.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일페사스는 뭘 열심히 한다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드래곤의 대표 로서 이 작별의 자리에서 자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기품 있게 앞으로 걸어가서는 씩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다롄, 조그만 것이 제법이었……”

아일페사스는 드래곤의 대표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아프나이델의 손에 입이 틀어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아일페사스를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제레인트는 초주검이 된 얼굴로 수면을 향해 외쳤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잘못 가르쳐서 그러니 부디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레브네인 호수의 넓은 수면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마법사와 프리스트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아일페사스가 입을 막은 이 손을 확 깨물어버릴 까 하는 흉포한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에 엑셀핸드가 후환이 두렵다는 듯이 말했다.

“어, 음. 작별 인사 끝났지? 어서 돌아가세. 흠흠!”

그러자 이루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스트했다.

“게이트.”

이루릴이 그랜드스톰으로 곧장 통하는 마법의 문을 만들어내자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엑셀핸드였다. 그 뒤를 따라 제레인트가 레브네인 호수를 향 해 다시 한번 인사를 보내고는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에델린과 이루릴이 뒤를 따랐다. 아일페사스를 안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그제서야 아일페사스를 놓아주고 그 뒤를 따라 걸어가려 했다. 그때 아일페사스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프나이델은 멈칫하며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조금 놀라버렸다. 아일페사스는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왜 그러니, 아일페사스?”

“펫시라고 부르랬잖아. 그랜드스톰에서는 잘 부르더니 왜 다시 그렇게 불러요, 나이드.”

“아……………, 하하. 그래, 음. 펫시.”

아일페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결투를 신청해요, 결투를. 그게 뭐야? 뻣뻣하게 ‘펫!시!’라니.”

“차차 익숙해지겠지. 기다리렴.”

“글쎄요?”

웃으며 대답하던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의 대답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아일페사스는 호수에서 불어온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 어넘기며 말했다.

“익숙해져? 현재가 고정되면, 나이드는 영원히 저를 ‘아일페스’라고 부르는 거 아냐?”

아프나이델은 침울한 표정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는 그 시선에 움찔하더니 몸을 돌려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프나이델도 덩달아 수면을 바라보았다. 젊은 마법사와 금발의 웜링은 그렇게 자작나무 숲을 등지고 넓은 호수면에 둘의 그림자를 던지며 잠시 서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따스하게 들리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그렇게 안 되도록 하려는 거잖니…………, 펫시.”

아일페사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래야지. 그런데 말이야.”

“응?”

“현재가 고정되면…………… 아, 아냐. 돌아가.”

“응? 왜 그러니.”

아일페사스는 두 손을 엉덩이 뒤로 모으고는 하릴없이 돌멩이를 걷어찼다. 퐁.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작은 물소리를 내자 아일페사스의 입 속을 맴돌던 말이 깜짝 놀라며 튀어나왔다.

“그럼 저, 영원히 드래곤이 못 되고 웜링으로 있는 거야?”

아프나이델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지만 애써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음음. 저 드래곤이 되면 드래곤 라자를 가져야 되지? 그래야 제리랑, 나이드랑, 엑스 오빠들하고 이야기할 수 있죠? 아빠는 그렇다고 하던데.”

“그렇지. 너는 그때 지상에서는 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존재가 될 테니까.”

무의식중에 대답하던 아프나이델은 문득 눈앞의 아일페사스를 바라보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완벽한 존재’라.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의 웃음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저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헤. 그거 귀찮겠다. 어서 가! 게이트가 닫히겠어.”

아일페사스는 그 말만 남겨두고는 재빨리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긴 블론드의 물결이 검은 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아프나이델은 싱긋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문득 그의 발걸음이 멈춰지며, 아프나이델은 요정의 여왕이 거주하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대마법사를 사랑했지만 영원히 그와 자신을 분리시켜버린 여왕이 계시는 호수를 향해 아프나이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미 도움을 받은 주제에 더 바라는 것은 뻔뻔하겠지요.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고정을 타파하는 변화는 마법사의 몫, 그리고 인간의 몫일 테니까요.”

수면을 스치는 가벼운 바람만이 아프나이델의 말에 대답했다. 아프나이델은 아무도 없는 호숫가에서 수면을 향해 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조 금 머쓱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는 그 머쓱함에서 도망치듯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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