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8장 시간의 장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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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워커 4권 – 8장 시간의 장인 7


7

에델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딴에는 조심스럽게 일어나는 동작이었지만 그녀의 커다란 체구의 움직임은 도저히 감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 니었다. 그래서 모닥불 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그들의 시선에 에델린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운차이 를 찾아냈다.

“운차이 씨.”

“뭐요.”

“Hjan이 뭐죠?”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는 운차이에게로 옮아갔다. 하지만 운차이는 아무런 반응 없이 들고 있던 쇠꼬챙이로 모닥불을 쑤셔댔다. 사람들이 초 단위로 조바심을 증폭시키고 있는 가운데, 운차이는 마침내 나직하게 말했다.

“그걸 왜 묻는 건지?”

에델린은 모닥불 가로 다가섰고 이루릴은 그녀에게 찻잔을(그녀 전용의 1파인트짜리 찻잔을 건넸다. 에델린은 손바닥으로 찻잔을 감싸 그 온기를 느끼 며 말했다.

“도스펠께서 말씀하시기를 솔로처께서 바이서스 임펠에 찾아오셨다는군요.”

“소, 솔로처? 무지개의 솔로처가 바이서스 임펠에? 우우우와!”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만큼 적극적인 경탄을 표시한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들 당혹한 표정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어느 시대의 이야기야. 에델린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솔로처께서는, 요즘 들어 일어나고 있는 이 부활들에는 그 Hjan이라는 것이 관련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는군요.”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별거 아니지. 이를테면, 네리아가 이루릴과 함께 시내를 걷다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루릴에게 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네리아 에게는 그 Hjan이 생기는 거요. 용모에 대한 Hjan이라고 해야겠지.”

“그거 비유지?”

“사실에 입각한.”

“죽일 거야!”

“내가 어처구니없게도 네리아의 손에 개죽음을 당했다면, 또한 나에겐 Hjan이 생기지. 그 억울함은 다들 잘 짐작할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네리아는 옆에 놓아두었던 트라이던트를 끌어와서는 그 물미 쪽으로 운차이를 후려쳤지만, 운차이는 들고 있던 쇠꼬챙이를 살짝 휘둘러 네리아의 공격을 튕겨냈다. 네리아가 손목을 부여잡은 채 죽어가는 신음 소리를 내는 동안에도 운차이의 말은 흐르는 물처럼 유려하게 계속되었다.

“파하스, 당신을 볼까.”

파하스는 고개만 조금 들어 운차이를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사이들랜드로의 도피는 도피였을 뿐이지. 내 마음의 고향은 호롱불 깜빡거리는 펍이었고 내 마음의 양식은 화려한 살롱의 은밀한 그림자 속 에서 레이디와 나누는 짧고 긴박감 있는 키스였으니. 나는 자연 속으로 사라져 사이들랜드의 바람이 될 인물은 아니었어. 난 부캐넌이 아니지.” “부캐넌……?”

“난 녀석이 부러워. 그는 검객답게 싸웠고 검객답게 죽었으니. 만일 승패가 달랐더라면, 나는 부캐넌에게 목숨을 애걸했을지도 모르지. 놈에게는 남 겨진 Hjan이 없을 테지. 놈은 부활하지 않을 거야.”

밤바람이 윙윙거렸다. 하지만 익숙한 모험가들이 많은 일행들은 바람을 타지 않는 위치를 골라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모닥불은 고요하게 타올랐다. 모닥불이 던지는 약한 빛이 검은 나무들에 부딪혀 나무를 발그레하게 물들였고 사람들의 그림자는 조는 듯이 흔들거렸다. 이루릴은 잘 이해되지 않 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 Hjan이라는 것은 안타까움인가요?”

운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오. 그것은 사람들이 보통 운명적, 혹은 숙명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는 커다란 재난에서 생겨나는 것이오. 늦게 일 어나는 바람에 아침을 못 먹은 정도로는 Hjan이 생겨나지 않소. 당신 같은 엘프라든가, 제레인트나 에델린 같은 성직자들은 죽었다 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게요. 당신은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고 제레인트나 에델린에게는 모든 것이 신의 섭리이니.”

제레인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것은 신의 섭리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따지지 않겠어. 하지만 똑같은 말을 저 꼬마에게 해봐.”

운차이는 턱으로 돌맨을 가리켰다. 돌맨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당장이라도 눈물이나 비명 양쪽의 하나를, 혹은 양쪽을 동시에 토해 놓을 것 같은 표 정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운차이가 정말 가리키고 싶었던 것은 돌맨의 오른쪽에 앉아서 비슷한 자세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그란이었다. 그란 하슬러에게 그것이 신의 섭리였다고 말해 보라. 할슈타일 후작에 의해 그의 아내가 죽고, 그의 아들이 죽은 일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잊으라고 말해 보라. 아마도 상 대방은 수프 애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평생 수프보다 단단한 것은 삼키기 어려워질 테니..

운차이는 결론지었다.

“그것은 안타까움과 미련과 그리움과 애달픔과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아우르는 말이며, 그런 복잡한 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러 방면에 걸쳐 사용될 수 있는 말이오.”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대충 이해하겠군요.”

그리고 에델린은 솔로처가 칼에게 들려주었고, 그리고 다시 칼이 도스펠에게 말했고, 도스펠이 꿈을 통해 그녀에게 말해 주었던 내용들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에델린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나이델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차넬과 우타크에게 속아서 죽은 거인에게는 그 Hjan이 남았고, 승자인 루트에리노 대왕이나 여덟 별 같은 경우에는 남겨진 Hjan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거인은 부활했고 대왕은 부활하지 않는 것이군요.”

파하스는 나무 우듬지 너머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나. 때론 우주가 사람을 위해 움직이기도 한다네.”

“하지만, 그럼, 이번에 이 우주가 멈춰버린 것은 누구를 위해서죠?”

아프나이델은 질문했고 모든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같은 대답을 떠올렸다.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한 사람은 이루릴이었다.

“신스라이프.”


짙은 표력토의 들판 곳곳에 이끼는 끈질기게 자라나 있었다.

해변 가까운 곳의 높은 절벽 아래에 가문비나무 군락이 외로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사납게 부는 바람 때문에 높은 언덕들은 가까스로 자라난 관 목 덤불로 치부만 가린 모습으로 헐벗어 있었다. 그런 언덕들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반대편, 해변 쪽에는 눈이 시리도록 흰 빙하가 고고하게 하늘을 이고 있었다. 구름 가득한 하늘 아래 빙하는 희고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먼 수평선으 로부터 다가오는 육중한 파도는 빙하에 부딪혀 흰 물보라가 되어 부서졌다. 하지만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승리자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파도가 될 것이다. 협곡을 가득 메우고 흐르는 거대한 빙하는 마침내 빙산이 되고 자잘한 얼음 알갱이가 된 다음 바다 속으로 사라져갈 것이다.

신스라이프는 탄느완의 부두를 바라보았다.

털가죽으로 온몸을 감싼 사내들은 마치 공처럼 보였다. 사내들은 뒤뚱거리며 수레를 끌고 짐을 나르고 있었다. 이 한랭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사람들 은 팔고 사는 일을 멈출 수 없는 듯했다. 길고 곧은 침엽수들과 물개 가죽, 둔해 보이는 커다란 물고기들이 수레에 실려 부두를 오가고 있었다.

빙산이 떠다니는 바다에서 사람들은 작살로 물고기를 잡았다. 신스라이프는 멀리 떨어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빙산 가장자리로 카약을 탄 사 람들이 물살을 헤치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싱긋 웃었다. 카약에 탄 사람은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반신은 조그만 카약 속에 완전히 우겨넣어져 있으므로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배 모양을 한 괴물처럼 보인다.

그것이 보통의 배와 카약이 다른 점이다. 카약은 모든 부분이 밀폐되어 있고 오로지 사람이 하반신을 집어넣는 부분에만 잠입구가 나 있다. 게다가 탑승자는 카약에 탄 후 잠입구 주변의 덮개를 끌어올려 가슴 주위에 묶음으로써 카약과 완전한 한 몸이 된다. 신스라이프는 그러므로 카약은 탑승물 이라기보다는 옷이나 신발 같은 착용물이라고 생각했다.

부두로 통하는 길이었기에 거리는 사람으로 붐볐다. 물론 탄느완의 다른 거리에 비해 그렇다는 의미이며, 실제로 이 정도의 인원이 바이서스 임펠 같은 곳에 있었다면 고요하기 짝이 없는 거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추운 북부에서 사람들은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다음에야 집 밖 외출을 감행한다. 따라서 신스라이프는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는 착각을 느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전부 신스라이프를 두세 번씩 쳐다보았 기에 신스라이프의 느낌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탄느완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신스라이프는 일단 작은 여자로 보인다. 그런데 그 여자는 이 사나운 추위와 매운바람 속에 셔 츠 한 벌과 바지 하나만을 걸친 차림으로 서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옷을 건네주겠다거나 집으로 들어와 몸을 녹 이라거나 심지어 술을 한잔 마시는 것이 어떠냐는 식의 제안을 해왔다(고지식하고 완고한 탄느완 남자들이 여자에게 이런 제안을 건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신 스라이프는 그 모든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의 사나이가 신스라이프로부터 거절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봐요, 아가씨. 보는 내가 다 추울 지경이란 말이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원 참. 아가씨는 이사의 처녀라도 되는 거요? 가만히 서 있어도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구먼.”

신스라이프는 빙긋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신스라이프는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부두를 바라보았다.

부두 저편, 거대한 배들이 묶여 있는 곳에서 주블킨은 뱃사람 하나와 격렬한 의논을 나누는 중이었다. 뱃사람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거 보쇼. 이 계절에 북해로 가겠다는 선장은 아무도 없을 거요. 다른 배를 찾아보시겠다고? 좋을 대로. 하지만 이 말을 해주지 않으면 내가 당신 을 속였다고 생각할 테니 말해 주겠는데, 지금 탄느완의 부두에서 당신들이 구할 수 있는 배는 내 배뿐이오.”

주블킨은 그런 식으로 넘어가지는 않겠다는 태도로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렇게 배가 많은데?”

“이 배들은 모두 화물을 싣고 남쪽으로 내려갈 배요. 의심스러우면 확인해 보슈.”

“당신 배는?”

“나는 이곳으로 화물을 싣고 왔고, 그래서 빈 배로 돌아갈 참이지.”

“그럼 난 당신을 졸라봐야겠군요.”

“하지만 난 북해로 안 갈 거란 말이오. 그러니 포기하시란 말이지.”

“내가 제시하려는 금액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는 못할 텐데.”

선장은 피식 웃더니 두툼한 가슴 위에 굵은 팔을 얹어 팔짱을 끼었다. 다음 순간 선장이 꺼낸 말은 주블킨을 기막히게 만들었다.

“한 10만 셀 정도 되오?”

“뭐라고요?”

“그 정도 금액이라면 재고해 드리지. 그 이하라면 이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주시오.”

주블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의 옆에 서 있던 발레드가 말을 이어받았다.

“배와 선원, 그리고 당신을 사겠다면?”

“뭐요?”

“당신 배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겠다는 말이오. 어떻소?”

선장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발레드를 바라보았다.

“부자이신가 본데…………, 배는 팔지 않소. 이건 돈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목숨이 걸린 문제란 말이오. 이 시기의 북해가 어떤지 아시오?”

“1만 셀.”

“현금으로?”

“헤게모니아 국가 채권 수수료 공제 없소.”

“좋소.”

주블킨은 사기당한 기분을 느끼며 발레드와 선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발레드는 싱긋 웃으며 외투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발레드는 두툼 한 봉투를 꺼내어 선장에게 건넸다.

“출항은 언제까지 가능하겠소?”

선장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조사하며 말했다.

“여정을 말씀해 주셔야지요.”

“가장 길게 잡으시오.”

“흐음. 짐을 더 실어야겠군요. 하지만 모레까지는 준비가 끝날 겁니다.”

“발레드요.”

“그냥 선장이라고 부르십쇼, 발레드 선주님.”

“알겠소. 확인이 끝났으면 그건 돌려주셔야지?”

“착수금이 필요합니다만.”

발레드는 수수료 지불을 위해 따로 준비해 둔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고 선장은 입맛을 다시며 봉투를 도로 내밀었다. 봉투와 주머니를 교환한 발레드 와 선장은 악수를 나누었다. 선장은 배를 향해 걸어갔고 발레드는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신스라이프를 향해 걸어갔다. 주블킨은 발레드를 따라가며 설명을 요구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선장이 갑자기 배를 팔겠다고 한 거죠?”

“돈 문제가 아니라고 하잖았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니 돈만 충분하면 하겠다는 뜻이잖습니까.”

“예?”

“그 친구가 정말 돈에 관심이 없었다면, 돈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주블킨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발레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옷깃을 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한구석을 차지하고 고고하게 반짝이고 있는 빙하는 발레드를 으스스하게 했다. 초원과 도시에서만 살아온 그에게는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저 렇게 큰 얼음이라니. 발레드는 빙하를 단순히 얼음이라 부른다는 데 신성 모독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먼 곳에서 주블킨과 발레드를 보던 신스라이프는 미소를 지었다. 선장이 발레드가 건넨 봉투를 받아드는 모습을 본 것이다. 배는 마련되었군. 신스 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은 바로 그 순간 찾아왔다.

신스라이프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그를 보았더라도 별 이상한 것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몸이 찢어지 는 고통을 느꼈다.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신스라이프는 육신의 안팎이 뒤집히는 느낌 속에서 전율했다. 뒤집혀진 눈동자는 눈꺼풀 속에서 명멸하 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폭음과 바람소리 같은 것이 그의 귀를 유린했다.

신스라이프는 분노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잠자코 있어!’

말도 아니고 의미도 아닌 무엇인가가 그의 내면으로부터 솟구쳤다. 그리고 그것은 신스라이프의 것이 아니었다. 신스라이프는 이를 악물었다. ‘반항하지 마. 너는 그럴 수 없어!’

느낌은 더욱 거세게 폭풍쳤다. 신스라이프는 거세게 펄떡이는 자신의 맥박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네가 어떻게 살 권리를 주장하나, 파!’

느낌은 일순 주춤했다. 기절할 듯한 고통 속에서도 신스라이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너는 세상에 태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네 부모는 외동딸을 가지게 되어 있었어. 아홉 명의 목숨을 받아, 태어날 수 없는 네가 이 땅에 나타났다. 알 았나!’

느낌은 극도로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신스라이프의 입장에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고통과 쾌락과 피곤함과 활기가 번갈아 그의 몸을 자극해 왔으니 까. 신스라이프는 고함을 내지르기 않기 위해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래. 넌 아홉 명의 목숨으로 태어난 것이다. 뭐? 아홉 번째의 희생자가 있기 훨씬 전에 네가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냐? 시간에 대해 잘못 알고 있군. 죽기 훨씬 전부터 죽음 후를 볼 수 있는 네 언니를 생각해 보지 그래?”

마구 범람하던 느낌의 파도가 갑자기 멎었다. 신스라이프는 휘청거리다가 아예 땅에 앉았다. 하지만 치열한 내적 싸움에서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 다.

‘네 언니는 시간의 긴 흐름 속에서 아무 때나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현재만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그리고 넌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무 때나 태어날 수 있었다. 왜 23년 전에 태어난 건지 아나? 나를 위해서지. 알겠나? 너는 아홉 번째의 희생자가 발생할 때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네가 태어 난 시점은 23년 전이다.’

느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스라이프가 편해진 것은 아니다. 거대한 바위에 깔려 있는 사람이 바위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편해질 수는 없는 것처럼.

‘너는 내 딸이며 내 의복이며 나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나는 아홉의 목숨으로 너에게 영생을 주었다. 그리고 퓨처 워커의 동생으로 태어나 시간을 정지시킬 능력을 계승하게끔 했다. 너에겐 아무것도 없다. 말해 봐. 아버지가 죽었을 때 정말 슬펐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정말 슬펐나? 언니를 사랑 하나? 네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있나? 너에게 집착이라는 것이 있나!’

느낌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스라이프는 거북한 느낌 속에서 어떤 이름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쳉? 쳉을 생각하나?’

실수였다. 조금 전의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신스라이프를 엄습했다. 신스라이프는 혀를 깨물었다.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는 차 가운 공기와 만나 빠르게 식었고 신스라이프는 그 감각 속에서 간신히 기절하지 않았다.

‘얌전히 있어. 쳉은 잊어! 넌 어차피 태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너는 나를 위해 태어난 거야!’

하지만 소용없었다. 신스라이프는 산 채로 몸이 태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신음을 토했다. 그의 입에서 그의 의지가 아닌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파……”

“닥쳐라. 나는 신스라이프다.”

“파 L. 그라시엘…………, 내 이름…………, 나…………, 나는…”

“아냐! 너는 존재할 수 없다. 너는 없다, 너는 없다!”

신스라이프는 ‘너는 없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그 말의 의미를 다짐하는 것은 아니다. 신스라이프는 단순히 파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 해서 계속 말했다.

“너는 없다, 너는 없다, 너는 없다!”

“왜 그러십니까,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힘없이 들어올렸다. 두 사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블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가 불편하신지요? 이런 차가운 땅에 앉아 계시다니, 일어나십시오.”

그러나 주블킨은 신스라이프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발레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신스라이프를 특별히 경멸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무의식중에 신스라이프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신스라이프는 힘들게 말했다.

“소……, 손을 좀 주게.”

주블킨은 당황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보다가 급히 손을 내밀었다. 발레드도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신스라이프는 주븜킨과 발레드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숙소로……………, 가세.”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발레드가 말했다.

“내가 업고 가겠습니다.”

신스라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블킨은 신스라이프가 발레드의 등에 업히는 것을 도와주었다. 두 사람이 걸음을 떼기 시작했을 때, 하늘에 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주블킨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허어, 확실히 북부구먼. 이 계절에 눈이라니. 서두릅시다.”

“예.”

발레드는 발걸음을 재게 놀리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신스라이프의 몸은 가벼웠지만 두툼한 털옷 때문에 그를 안정되게 업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 스라이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발레드는 차분하고 안정된 동작으로 걸으려 애썼다.

발레드의 등 위에서, 신스라이프는 사지를 늘어뜨린 자세로 아무렇게나 얹혀 있었다. 허공에 둥둥 떠가는 기분이었다.

떨어져내린 눈송이가 신스라이프의 코끝을 스쳤다. 신스라이프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기울어진 세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역시 비스 듬히 떨어지고 있는 눈송이들이 보였다. 발레드의 등에 쓸리는 왼쪽 볼이 점점 뜨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떨어져내린 눈송이들이 와 부딪히는 오른쪽 볼은 아프도록 차가웠다.

‘열이 오르고 있어…………….’

신스라이프는 한심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의 안에서 파는 아직도 살아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완벽한 계획의 마지 막에서 이런 사소한 장애가 그를 괴롭히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신스라이프는 더욱 분노를 씹었다.

그는 ‘콜리의 프리스트’라는 재단사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줄 아는 옷을 주문한 바가 없었다.


멈춰 선 김에, 궤헤른은 고개를 돌려 할슈타일 후작과 미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북해로 갔어야 했어요.”

“늦었다.”

“미는 몰랐으니까요.”

“너의 약점이군.”

“걷는 연습을 하는 새는 없어요.”

“노력은 할 것이다.”

“피상적인 주장.”

“내 경우엔, 아니지.”

“어째서.”

“퓨처 워커가 아니므로.”

“그런가요.”

미의 옆을 걷고 있던 아달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 낑낑거리며 주인을 바라보았지만 그러한 행동으로 아무런 소득도 건지지 못했다.

궤헤른은 진저리를 치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멈춰 선 일행의 앞쪽에서는 쳉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궤헤른은 해괴하기 짝이 없는 기분에 빠졌다. 등 뒤엔 알 수 없는 말을 나누는 남녀, 눈앞엔 말을 내버려두고 땅을 기는 사내.

다행히도 눈앞을 기어다니는 쳉에게는 궤헤른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쳉은 기어다니기를 멈추고는 일어나서 캐시헌터의 고삐를 쥐었다. 그러고는 말 위에 올라 잠시 앞쪽의 큐리담 호수를 바라보았다. 니크는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래, 쳉, 뭔가를 발견했나?”

쳉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고스빌로 갔군.”

“고스빌?”

“그래. 미!”

쳉은 고개를 돌려 미를 불렀다. 미의 얼굴이 천천히 들렸다. 쳉은 다정하게 말했다.

“북해로 갔을 거라고 믿는 거지?”

“응.”

“산을 넘는 것을 포기하고, 고스빌………. 탄느완이군. 배야. 하지만 이 계절에 북해로 가려는 선장은 별로 없을 테니 조금 지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 군.”

쳉은 말의 끝에서 조금 기다려주었고, 궤헤른은 그 빈틈이 일행을 향한 배려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쳉에게 질문했다.

“신스라이프 일행은 탄느완에서 배를 이용, 북해로 가려고 한다는 말이오, 쳉?”

“그렇게 생각합니다.”

“흐음…………. 배를 타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말했다시피, 이 계절에 북해를 항해하고픈 뱃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북해는 이 즈음이 해빙기입니다. 수월하게 배를 몰고 다니기엔 부빙들이나 빙산의 위험이 아직 많을 겁니다. 항로가 아직 녹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따라서 배를 구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탄느완에서 발이 묶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무엘은 피식 웃었다. 사나운 웃음이었다.

“모르는 것이 없군, 호위 무사”

“고맙군.”

그리고 사무엘과 쳉은 서로를 잠시 쏘아보았다. 사무엘이 도전적으로 턱을 쑥 내밀고 있는데 반해 쳉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그 깊은 눈매로 사무엘 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양자 모두 그 대결을 더 이상 심화시키지는 않았다. 궤헤른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고개를 돌렸다. “후작님.”

“불렀나, 궤헤른.”

할슈타일 후작은 이제 거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는 예전의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예전의 차가움으로 그것들을 해석했다. 하지 만 예전에 비해 말수는 더욱 줄어들어 있었다. 궤헤른은 대화가 참 뻑뻑하다고 느끼며 말했다.

“들으셨다시피, 탄느완에서 신스라이프 일행을 붙잡을 수 있을 듯합니다.”

“다행이군.”

“이젠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불안합니다. 신스라이프가 이 모든 사건들의 원인이라면, 그를 죽이면 부활이 취소되는 것 아닌지요. 그렇다 면 후작님에게는 아무 일이 없을 수가……”

궤헤른은 말꼬리를 흐렸다. 가이버와 니크, 그리고 사무엘은 어두운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 그를 죽이면 나 역시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

“후작님!”

“나는 이미 죽었다. 궤헤른. 이건 끔찍한 모욕에 다름없다. 나는 죽음의 권한을 누리겠다.”

“살아야 합니다. 무슨 경우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야 하는 겁니다!”

궤헤른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웃음뿐이었다.

“언제까지.”

“예?”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가.”

궤헤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깔깔해진 입천장을 혀로 핥으며 궤헤른은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조용히 말했다.

“죽을 때까지 아닌가.”

말을 마친 후작은 말을 몰아갔다. 후작은 궤헤른과 니크의 사이를 지나쳐 쳉의 옆을 지나갔다. 그러고는 일행의 앞으로 나서서 천천히 말을 달렸다. 니크와 가이버가 먼저 그 뒤를 따랐고, 그리고 궤헤른과 사무엘이 우거지상을 한 채 말을 재촉했다. 쳉은 잠시 기다린 다음 미와 함께 달렸다.

우거진 숲과 산비탈 때문에 일행은 속력을 높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일행은 느긋한 속도로 달려갔다. 그 완만한 속도는 일행들로 하여금 각자 어두운 심정 속으로 침잠하게 만들었다.

후미에서 달리고 있던 쳉은 아무 말 없이 미를 바라보았다. 미는 아달탄을 힐끗힐끗 바라보는 동작 이외엔 오로지 앞만 보며 달리고 있었다. 아달탄 은 미의 시선이 돌아올 때마다 기쁜 표정으로 날뛰었다. 쳉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귓가로 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걷는 연습을 하는 새는 없는 거야. 그렇잖아?”

쳉은 잠시 침묵한 다음 역시 나직이 말했다.

“그래. 어떤 새가 날개를 다치게 될 것까지 염두에 두겠어.”

두 사람 모두 사이들랜드의 들판에서 자라난 헤게모니아 평원인들이었다. 느린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두 사람에게 조금도 어 렵지 않았다.

“하지만 미는 안타깝고 무서워.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너무 속상해.”

“네게는 잘못이 없어.”

“아니. 미는 북해로 갔어야 했어. 그래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북해로 가지 않았어.”

“자의가 아니었을 텐데.”

“그렇더라도……………, 마찬가지야. 미가 고집을 부렸으면 벌써 오래 전에 미는 북해에 도달했을 수도 있을 거야. 퓨처 워킹을 할 수 없어서, 그래서 그만 판단을 잘못했어. 되는 대로 내버려둔 거야.”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어. 잊어버려.”

“잊을 수가 없어. 미가 진작 북해로 갔더라면, 그럼 이 모든 바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후작님의 말이 맞아. 날개를 다친 새는 걷기 위해 서, 새로운 자신에 대해 익숙해지기 위해서 노력은 했을 거야. 하지만 미는 퓨처 워킹을 할 수 없게 된 자신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어. 결국, 보통 사람들과 똑같아졌다는 것이잖아? 그런데도 미는 커다란 재난이나 당한 것처럼, 스스로 판단하거나 생각해 보려 하지 않았어. 어쩔 줄 모르고 되는 대로 내버려둔 거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해.”

“감정 결핍.”

“응?”

쳉은 고개를 들었고, 미가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미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쳉. 북해에 뭐가 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지? 거기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혹은 왜 거기 가야 하는가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 미한테만 관 심 있지?”

쳉은 대답하려다가, 지금껏 자신이 했던 대답들을 전부 되짚어 보고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랑 결혼하지, 바보.”

쳉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미는 차분한 태도로 설명했다.

“내버려두면 죽을 때까지도 관심 없어할 테니 미가 말해 줄게.”

“듣지.”

“북해엔 시간축이 있어.”

“무슨 말이지?”

“시간 그 자체, 아니 그 정수라고 할까. 시간축이라는 이름이 나은 것 같아. 어쨌든 북해에는 그런 것이 있어. 디도스 같은 곳에서 파는 그거,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를 생각해 봐.”

“전에 선물했더니 놓아줬지.”

“그래. 그 쳇바퀴. 그건 어떻게 해서 돌지?”

“다람쥐가 돌리니까.”

“아니… 물론 그래. 하지만 그것이 도는 이유는 뭐지? 그것의 한 점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잖아? 만일 그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돌 수 있을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어떤 것이 돌려면 거기엔 고정된 축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군.”

“그래. 북해에 있는 것에 미가 시간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것 때문이야. 축. 중심점.”

“아아.”

“사람들은 세상에 퍼져서 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어. 사람이 시간의 장인이거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간을 과거로 보내고 새로운 시간들을 만들어 내. 그래서 미는 미래를 볼 수 있어.”

“궁금한 것이 있어.”

“뭔데?”

쳉은 차마 묻지 못하던 것을 물을 때도 담담했다.

“네가 본 미래에서, 나는 너와 결혼하나?”

“쳉은 미래를 알려고 하는구나. 대가가 커.”

“그래?”

“하지만…………, 미 반칙 좀 할래. 미는 과거가 고정되어 있으니 미래를 본다고 했지?”

“응.”

“쳉은 미를 사랑해. 쑥스러운 표정 짓지 마. 이상한 얼굴이 된다? 흐음. 어쨌든 그것이 고정된 과거야. 그럼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런 거야?”

“응.”

“그럼 누구나 퓨처 워커가 될 수 있겠군.”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

“왜? 과거를 보고는 앞으로 이러이러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는 건 누구나 가능하잖아.”

“미를 웃기지 마, 쳉. 어린애도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잖아. 아달탄도 그건 알걸.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틀림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의 발목이 부러질 수도 있고, 강물이 범람할 수도 있고, 도적을 만날 수도 있고,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땅이 갈라질 수도 있고, 목적지가 드래곤의 공격으로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고…………”

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람이 시간의 장인이야………., 쳉.”

“응.”

“사람은 시간을 만들어내.”

“응.”

“그리고 시간은 사람을 떠나가.”

“응.”

“쳉은 미랑 결혼해야 돼.”

“응.”

“쳉은 미랑 결혼해서 평생 밥 짓고 빨래하고 애 돌보며 돈 벌어오고 미만을 섬기고 미만을 생각하며 미만을 그리며 미가 히스테리를 부리면 달래주 고 미가 심심하면 재롱 떨어주고 미가 졸리면 자장가 불러줘야 해.”

“응.”

“미가 졌어.”

쳉은 싱긋 웃으며 캐시헌터의 진로를 조금 수정했다. 그러고는 팔을 옆으로 뻗었다. 미는 쳉의 손을 보고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달리는 말 사이로 뻗어간 쳉과 미의 손은 허공에서 맞닿았다.

미의 다섯 손가락이 쳉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고, 두 사람은 한 손으로 말을 달리고 다른 손은 서로 깍지 낀 채 숲의 머리를 파고드는 은초 록빛 햇살 속을 달려갔다.

미는 얼굴에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에 말을 실어 보냈다.

“아이를 가지자.”

쳉은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미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조용하게 말을 계속했다.

“우리를 향해 칭얼거리고, 우리를 배우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떠날 아이를 만들어서…………, 쳉, 그 아이를 사랑해 주자. 바보처럼 사랑해 주자. 그러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것처럼, 헌신적으로 사랑해 주자.”

미의 매끄러운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어 닥치는 바람은 미의 눈물을 빠르게 식혔고, 목덜미로 파고드는 차가운 눈물에 미는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는 마지막까지 말했다.

“……우리가 시간을 만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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