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12화 : 학관 풍운(4)
학관 풍운(4)
“얘들아, 미안한데. 아무래도 저쪽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설우진이 애써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들 에게 양해를 구했다. 소녀들은 초무석의 협박 에 굴하지 말라며 붙잡았지만 그는 단번에 그 손길을 뿌리쳤다.
“선수 숫자는 오 대 오. 시간제한 없이 먼저 삼 득점을 내는 쪽이 승리하는 거야.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지는 쪽이 한 달 동안 이긴 쪽의 하인이 되는 걸로 하자.”
연무장 한가운데.
초무석이 선수들을 모아 놓고 내기를 제안했다.
미리 입이라도 맞췄는지 설우진을 제외하고 모두 한입으로 내기를 수락했다.
‘네가 준비한 복수의 무대가 이거냐? 뭐, 유치하긴 하지만 받아 주마.’
마지막으로 설우진도 내기에 동의했다.
“다들 잘해 보자.”
설우진이 같은 편이 된 아이들에게 악수를 건넸다.
예상과는 반대로 다들 반갑게 그의 손을 맞잡 았다. 설우진은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경기에 집중했다.
‘풍류안의 높이는 바닥에서 대략 이 장 남짓. 내력을 사용한다면 가뿐하게 넣을 수 있지만 이런 애들 싸움에 내력을 쓸 수는 없지.’
설우진은 그물 한가운데 뚫려 있는 구멍을 직시했다.
그 구멍은 풍류안이라 불리는 것으로 그 안에 공을 차 넣으면 점수가 나는 것이었다.
“공은 너희 쪽에서 먼저 차.”
초무석이 선축을 양보했다.
설우진은 전에 싸움을 걸어왔을 때처럼 씩 웃으며 그의 호의 아닌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였 다.
“너희 둘은 좌 상방, 너희 둘은 우 상방으로 움직여. 내가 중앙에서 상대편의 움직임을 읽 고 공을 건네줄 테니 거리가 나면 바로 풍류안 으로 공을 차 넣어.”
설우진이 같은 편 아이들에게 익숙한 손동작 으로 작전을 지시했다. 아이들은 발 빠르게 그 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다들 작전 알고 있지? 나머지 애들은 신경 쓰지 말고, 그 자식만 밟아. 어차피 공 넣을 기 회가 생겨도 애들은 차지 않을 거야.”
“어느 정도로 밟아?”
고병용이 물었다.
“평생 다리를 못 쓰게 만들면 좋겠지만, 그리 되면 일이 커질 테니 한 두어 달 정도만 기어 다 니게 만들어. 그럼 놈도 깨닫겠지. 나한테 개긴 대가가 얼마나 큰지.”
초무석은 설우진에게 주먹을 맞고 쓰러진 이 후로 매일같이 똑같은 악몽에 시달렸다. 학관 에서 설우진이 자신을 발아래 두고 개처럼 부 리는 내용이었다.
악몽에서 깰 때마다 그는 설우진에 대한 복수 를 부르짖었다. 주먹 한 대로는 부족했던지 그 는 여전히 설우진을 자신의 밑으로 보고 있었다.
“공 받아.”
상대편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자, 설우진은 망 설임 없이 공을 대각선으로 찔러 넣었다.
힘과 방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멋진 공 넘기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발생했다.
공이 이미 설우진의 발을 떠났음에도 정면에서 달려들던 아이들이 방향을 꺾지 않았다.
잠시 후, 두 개의 발이 거칠게 교차하며 설우 진의 하단으로 날아들었다.
‘자식들, 귀엽게 노네.’
매섭게 짓쳐 드는 두 발을 보며 설우진이 짙게 미소를 그렸다. 잠시 후, 교차한 두 발이 앞
으로 달려 나가던 설우진의 발을 정확히 걸었다.
그 반동에 의해 설우진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 상당한 충격이 예상 되는 상황이었다.
‘됐어.’
정면에 마주 보고 서 있던 초무석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설우진의 몸이 돌았다.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찰나, 왼팔을 지지대 삼 아 공중제비를 돈 것이다.
“뭐, 저런…………….”
발을 걸었던 두 아이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사이, 설우진은 좌측으로 달렸다. 공을 받아 놓고도 가만히 서 있는 같은 편을 향해.
“어, 어떻게?”
당황한 아이가 초무석을 바라봤다.
초무석은 거칠게 팔을 흔들어 자신에게 공을 건네라는 표시를 했다.
퉁!
아이가 힘차게 공을 찼다.
공은 초무석이 서 있는 대각선 방향으로 날아갔다.
허무하게 눈앞에서 공을 잃어버린 설우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같은 편을 바라봤다. 그래 도 양심은 있는지 미안한 표정으로 애써 시선 을 회피했다.
‘하아, 이 자식 해도 너무하네. 어린놈이 어디 서 못된 것만 배워서. 저런 놈이 커서 막광 같은 인간 말종이 되는 거지.’
설우진은 여유 있게 풍류안에 공을 차 넣는 초무석을 보면서 낭인 시절 사사건건 대립했던 막광을 떠올렸다.
막광은 가장 낭인다웠던 개새끼였다.
돈만 주면 십 년을 함께해 온 동료라도 거침 없이 팔아넘겼다. 그 희생자 중 하나가 바로 설 우진, 본인이었다.
낭인들은 혼자서 움직이기보다는 무리를 지 어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일반 무인들에 비해 서 개개인의 실력이 뒤처지는 탓이다.
그래서 출두 초기에 설우진도 열 명의 낭인으로 구성된 십룡대에 들어갔다. 구성원 대부분
이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비슷한 또래는 막광이 유일했다.
십룡대는 주로 수배범들을 잡았다. 의뢰인이 내건 보수 외에 덤으로 관아에서 보상금까지 받을 수 있어서다. 그런데, 황천삼흉의 둘째를 쫓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행방이 묘연 했던 황천삼흉의 첫째가 막다른 골목에서 다수 의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사전에 치 밀하게 준비된 함정이었다.
그날, 십룡대는 두 명의 생존자를 남겼다. 한 명은 사력을 다해 싸운 설우진이었고, 다 른 한 명은 돈 때문에 동료들의 등에 칼을 꽂아 넣은 막광이었다.
초무석이 첫 번째 득점을 한 이후로, 경기는 더욱 뜨겁게 과열됐다.
설우진이 공을 잡을 때마다 상대편은 노골적 으로 발을 걸거나 어깨를 밀쳤다. 물론, 그때마 다 설우진은 절묘한 회피 동작으로 그들을 물 먹였다.
하지만 여전히 점수는 초무석이 앞서 있었다. 설우진은 득점을 하려 애를 썼지만 같은 편이 번번이 방해를 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그도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냈다.
낭왕 시절의 성정을 떠올려 본다면, 지금까지 참은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애새끼들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아주 끝까지 기어오르네. 좋아! 너희들이 그렇게 나오겠다 면 나도 내 방식대로 싸워 주겠다 이거야!’
상대가 애들인 점을 감안해 살살 뛰었던 설우 진은 마음가짐을 새로이 했다.
그리고 펼쳐 보였다.
한때 축국계 최고의 악당이라 불리던 실력을. 타다닥.
설우진이 공을 몰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가 움직이자 그림자처럼 상대편 둘이 바짝 달 라붙었다. 이번에도 손과 발이 노골적으로 사 용됐다.
그런데 이번엔 설우진의 대응이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피하지 않고 되레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둘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충격이 큰지 바닥에 쓰러져서 좀체 일어나질 못했다.
“빨리 막아!”
초무석이 남은 둘을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미리 대비를 하고 그 앞을 막아섰지만 거칠게 밀고 들어오 는 설우진의 힘을 당해 내지는 못했다.
이제 연무장에는 초무석 홀로 남았다.
설우진은 공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초무석을 향해 내달렸다. 자신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 감에 초무석은 뒤돌아 도망쳤다.
“겁쟁이 새끼!”
등을 보인 초무석에게 설우진은 날카로운 한 방을 선물했다. 그의 발끝을 떠난 공이 정확히 초무석의 뒤통수를 맞힌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놀랄 만한 상황이 벌어졌다. 설우진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 인지 몰라도 초무석의 머리에 맞은 공이 절묘 하게 방향을 꺾어 풍류안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경기는 그 한 방으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