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17화 : 위기 초래(2)
위기 초래(2)
쾅.
비싼 자단목이 연일 몸살을 앓았다. 요 며칠 심기가 불편한 주인 덕분이었다.
“네놈들은 그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냐? 대체 언제까지 설가 포목점 따위에 휘둘 릴 셈이냐.”
풍채 좋아 뵈는 노인이 단단히 뿔난 얼굴로 정면을 쏘아봤다. 그 맞은편에는 네 명의 사내들이 고개를 숙인 채로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대원 포목점의 총점주인 포대월과 점 포를 관리하는 네 명의 점주였다.
포대월은 보름마다 각 점포별로 매출을 보고 받았다.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해도 대원 포목점의 매출은 낮게나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가 포목점에서 문제의 허수아비를 세운 뒤부터 매출이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특히 설가 포목점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제일 지점의 타격이 심대했다.
처음엔 포대월도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기며 오히려 점주들을 독려했다. 그들의 사기를 떨 어뜨려 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 달보다 두 달째에 매출 변화가 더 심하게 나타난 것이다.
“입이 있으면 말들을 해 봐라. 대체 내가 언제 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
포대월의 언성이 더 높아졌다.
이에 제일 점주 상곡춘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우리도 허수아비를 세우면 어떨까요? 설무 백 그자가 간교한 술수로 사람들의 눈을 흐리 게 만들고 있지만, 이쪽에서도 그와 같은 허수 아비를 내세우면 그 효과가 크게 반감될 것입니다.”
상곡춘은 맞불 작전을 제시했다.
그런데 포대월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이 에 평소 상곡춘과 차기 총점주 자리를 놓고 다 투던 제이 점주 모대강이 앞으로 나섰다.
“상점주의 의견은 너무 근시안적입니다. 당장 에 어느 정도 효과를 볼지언정 장기적으로 봤 을 때는 오히려 대원 포목점의 명성을 깎아먹 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음,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면 너는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있느냐?”
포대월이 모대강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모대강은 상곡춘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싸움은 시간을 질질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차라리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단번에 쳐 내는 게 좋습니다.”
“네 말뜻은 본단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냐?”
포대월의 눈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생각이 깊어질 때 나오는 그만의 독특한 버릇이었다.
‘이대로 가면 본단에서 내 입지가 좁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야. 차라리 모 점주의 말대로 당 장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설가 포목점을 쳐 내는 게 최선의 판단이 될 수 있어.’
“본단에서 힘을 빌려준다고 가정했을 때, 얼마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 같으냐?”
포대월이 모대강과 눈을 맞췄다.
이에 모대강은 자신 있게 말했다.
“열흘이면 충분합니다.”
“후훗, 대단한 자신감이군. 좋아, 이번 일은 모대강 네게 전적으로 맡기겠다. 대신 기간을 엄수해라. 하루라도 늦어질 시에는 지금 그 자 리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
“그건 염려 마십시오. 열흘도 넉넉하게 잡은 겁니다. 설가 포목점 따위, 단 일주일이면 무너 뜨릴 수 있습니다.”
늦은 밤, 설가 포목점 안.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가니 여소교의 작업장이 나왔다. 주문이 많이 밀렸는지 책상에는 두툼한 수실과 무명, 비단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아얏.”
고요한 가운데 여소교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인, 무슨 일이오?”
비명에 놀라 설무백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바쁘기는 그도 매한가지인지 양쪽 눈 밑이 짙 게 쌓인 피로로 검게 변해 있었다.
“여보, 괜찮아요. 저도 모르게 졸았나 봐요.”
여소교가 바늘에 찔린 검지를 정면에 내보이 며 수줍게 웃었다. 서른 중반에 접어든 나이였 지만 그녀의 미모는 여전히 청초했다.
“미안하오, 괜히 내가 일을 크게 벌여서.”
“아니에요, 오히려 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 는지 신기할 따름이에요.”
“후훗, 이제 와 밝히는 사실이지만 그건 내 생각이 아니었소.”
“그게 무슨………….”
“실은 허수아비를 세우기 며칠 전, 우진이가 날 찾아왔었소. 그리고 대뜸 대호 장포를 허수아비에 걸어 포목점 앞에 세우면 어떻겠냐고 묻질 않겠소.”
“그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실없는 소리 말고 잠이나 자라고 했소. 이 아 비를 위해 어렵게 낸 생각인 줄도 모르고.”
설무백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이에 여소교가 그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으며 고운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여보,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우리 우진이 는 그 정도 일로 꽁해 있을 아이가 아니에요.”
“하아……. 괜히 얘기해 줬어. 그놈의 허수아 비 때문에 좋은 소리도 못 듣고 일만 늘어났잖아.”
설무백, 여소교 부부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내고 있을 때, 설우진은 가슴을 치며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손은 쉼 없이 흰 무 명천 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 번 작품은 물 위를 힘차게 내딛고 날아가는 제비였다.
지난 석 달간.
설우진은 틈틈이 어머니의 일을 도왔다.
어머니 혼자서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기에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을 억지로 떠맡았다.
솔직히 일이 힘든 건 아니었다.
자수야 원체 좋아했던 취미고, 전력으로 매달 리면 두 시진 만에도 한 작품을 끝낼 수 있기 때 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수를 할 때마다 주호장에 서 마셨던 술이 아른거렸다.
그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에 술을 배우면 간혹 나타나는 금단현상의 전조였 다.
“그나저나 아무 일 없으려나, 밑의 놈들이 갑 자기 크게 되면 위의 놈들이 반발하기 마련인 데, 상계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무림과 크게 다 를 바 없잖아.”
설우진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술잔을 억지로 털어 내며 설가 포목점이 처할 앞으로의 상황 을 그렸다.
그가 낭인으로 한참 이름을 떨칠 무렵.
비검문이라는 신생 문파에서 낭인들을 대거 고용했었다. 비검술이라는 독특한 무공을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개파와 동시에 무림에서 꽤 주목을 받았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비검문이 자리 잡은 호광 땅에는 이미 두 개의 세력이 공고히 자리를 잡 고 있었다. 그들은 복호문과 흑사보로, 비검문 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못 잡아먹 어 안달이 났었다.
한데, 공동의 적이 등장하자 그들은 언제 그 랬냐는 듯 은밀히 손을 잡았다. 이후 비검문은 조용히 강호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거 영감이 안 좋은데……………. 분명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아.’
설우진이 찝찝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휘영청 밝게 빛나던 보름달은 어느새 짙은 먹구름에 먹혀 그 잔영조차 희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