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13화 : 사제 화해 (2)
사제 화해 (2)
“오히려 좋은 데서 왔다고 부러워 들 하던데요. 인사는 이쯤하고 하던 얘기나 이어 가 보죠. 막동이 어떻 게 하실 거예요?”
설우진이 팽천호 쪽으로 시선을 돌 렸다. 지난 일이 떠올라서인지 그의 눈빛은 전과 달리 무척 차가워져 있 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게냐? 난 사부로서 그 녀석에게 할 만큼 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실은 주가장 입구에서 막동이를 우연히 만났었어요. 한데 그 녀석이 절 보고 원망을 늘어놓더군요, 왜 자길 지옥에 데려다 놨느냐고.”
설우진은 막동이와 나눴던 얘기를 가감 없이 털어놨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두 사람의 얼 굴 표정이 굳어졌다.
“제가 분명히 두 분한테 말씀드렸 을 텐데요, 저 대신 막동이를 잘 보 살펴 달라고, 불쌍한 녀석이라고.”
“미안하다. 네 녀석이 없으니까 자 꾸만 마음이 허전해서 술만 찾게 되 더구나. 내가 더 신경을 써서 돌봤어야 했는데…….”
주천기는 먼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했다. 하지만 팽천호는 자존심 때문인지 굳게 입 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팽 사부님, 제가 막동이를 이곳에 처음 데려왔을 때 녀석은 사부님을 어릴 적에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여 기고 섬기겠다고 했었습니다!”
“날 아버지처럼 대하겠다는 놈이 그따위 소릴 했단 말이냐?”
그에게도 지옥 같았다는 말은 꽤나 충격인가 보다.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겠습니까? 제가 직접 익혀 봐서 알지만, 감각 도는 어지간한 사람도 터득하기 힘든 무공입니다. 한데 녀석은 성치 않은 몸을 하고서도 사부님의 기대 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그 수련을 따라왔습니다. 한데 사부님은 막동 이에게 단 한 번이라도 수고했다는 말을 건넨 적이 있으신가요?”
생각해 보니 없었다. 병신 같다고 윽박지르기 바빴지 그런 따뜻한 말 은 단 한 번도 건넨 기억이 없었다.
‘빌어먹을, 팽천호야! 빈말이라도 한 번쯤은 말할 수 있었잖느냐. 그 게 무에 어렵다고………….’
“사부님, 아직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막동이와 마음을 열고 얘기를 나눠 보세요. 본성이 착해 빠진 녀석이니 사부님이 진심으로 다가선다면 마음속 앙금을 시원히 털어 낼 수 있을 겁니다.”
“그 녀석이 나하고 얘길 나누려고 하겠느냐?”
“그래서 제가 한번 고민해 봤는데, 내일 오시까지 예심장으로 오실 수 있겠어요?”
“예심장이면 얼마 전에 설가장 자 리에 들어선 고아원을 말하는 게 냐?”
“네. 아마 그곳에 오시면 막동이와 자연스럽게 화해하실 수 있을 거예 요.”
설우진은 문 밖에서 두 사람이 나 누는 얘길 듣고 두 가지의 일을 동 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놀이터를 만드는 일에 두 사람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그것으로는 화해가 안 될지 도 모른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앙 금이 얼마나 큰지 모르기에.
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건 그것이 두 사람의 간극을 허무는 작은 계기 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 아직 날이 추워요.”
해가 중천을 향해 갈 무렵, 마당에 서 몸을 풀고 있던 막동이가 문을 열고 나서는 어머니를 보고 황급히 마루로 달려갔다.
그들 모자가 머물고 있는 집은 설 우진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막동이가 수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병약 한 어머니가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구한 것이다.
“너무 집 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하 구나. 한데 오늘은 수련 안 가니? 이 시간만 되면 항상 바쁘게 움직였 잖니.”
“저 이제 무공 그만두려고요. 저한 테 맞지도 않고, 어머니 혼자 집에 두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마렴. 사실 이 어미는 널 볼 때마다 마음 한구 석이 불안했단다, 그 성치 않은 몸 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 지. 한데 네가 무공을 배운 뒤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더구나.”
‘그러고 보니 감각도를 배운 뒤로는 내가 불편한 몸이라는 걸 잘 못 느꼈었지.’
막동이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자신 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여전히 등은 굽어 있었다. 그건 치 료가 불가능한 천형이었기에. 그런 데 전처럼 불편하지는 않았다. 뛰는 것도, 힘을 쓰는 것도.
“동이야!”
바로 그때 문밖 너머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데려가기 위해 달려온 설우진이었다.
“손님이 온 모양이구나. 어서 나가보렴.”
어머니가 막동이를 떠밀었다.
막동이는 살짝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대문 밖으로 급하게 뛰어 나갔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인마, 형을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 지. 자식이 안 본 사이에 많이 까칠 해졌는걸.”
“할 말 있으면 어서 하고 가요, 바 쁘니까.”
“후훗, 오늘 수련 취소됐어. 그거 알려 주려고 온 거야.”
“수, 수련이 취소됐다고요?”
막동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 로 반문했다. 사실 팽천호는 이제껏 수련을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내가 두 귀로 똑똑히 듣고 왔어. 대신 연장 챙겨 들고 예심장으로 오라던데.”
“거긴 갑자기 왜……?”
“그것까진 모르겠고, 여기 연장 챙겨 왔으니까 빨리 가자.”
설우진이 막동이의 팔을 잡아끌었 다. 막동이는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 만 설우진이 작정하고 힘을 쓰니 쇳 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막동이는 설우진의 손에 이끌려 예심장 안으로 들어왔다.
“아저씨, 이 오빠는 누구예요?”
어제 봤던 소담이 설우진에게 먼저 알은척을 해 왔다. 아저씨란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며 부드럽게 대화 를 이었다.
“이 오빤 막동이야. 오늘 너희들이 타고 놀 기구들을 만들어 줄 거야.”
“지, 지금 그게 무슨………….”
막동이가 당황한 얼굴로 설우진을 쳐다봤다.
-너,
저 아이한테 실망감을 안겨 줄 거야? 부모도 없이 외롭게 사는 아인데.
-저 그런 거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단 말이에요.
-그건 걱정 마. 그쪽 분야의 전문 가가 한 명 오기로 했거든. 마침 저 기 오네.
설우진이 예심장 안으로 막 들어서는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남자를 본 순간 막동이의 두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설우진이 말한 전 문가는 다름 아닌 팽천호였기 때문 이다.
“딱 시간 맞춰 오셨네요. 놀이 기 구를 설치할 곳은 저쪽이에요.”
두 사람이 애써 시선을 외면하고 있을 때 설우진이 두 사람을 잡아끌 고 후원으로 향했다.
예심장 후원에는 한가운데 세워진 정자 주변으로 넓게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시서화를 즐겼던 설우진의 조부가 즐겨 찾던 곳이었는데, 설무백이 설 가장을 물려받은 뒤로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아이들이 타고 놀 그네는 이 나무에 설치하면 될 것 같고 널뛰기는 이쪽이 좋을 것 같아요.”
설우진이 놀이 기구를 설치할 위치 를 하나씩 짚어 줬다. 그러고 난 뒤 챙겨 온 연장통에서 낫을 끄집어내 풍성하게 자란 수풀 쪽으로 향했다.
“전 풀밭 좀 정리하고 있을게요. 두 사람은 그네 좀 만들어 봐요.”
설우진은 화려한 낫질을 선보이며 한가로이 풀밭을 거닐었다. 그가 팔 을 휘저을 때마다 무릎 위까지 올라 와 있던 풀들이 허공에서 흩날렸다.
“크흠, 혹 그네를 타 본 적이 있느 냐?”
팽천호가 먼저 어렵게 입을 뗐다. 막동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를 고개를 가로저었다. 철이 들 무렵부 터 몸져누운 어머니를 대신해 생계 를 책임져야 했던 막동이는 그네 타 기 같은 호사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네를 타고 놀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깟 그네 타는 게 무에 어렵다고.’
팽천호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네 타는 건 결코 호사스러운 놀 이가 아니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 고사는 집의 아이들도 맘만 먹으면 타고 놀 수 있는 게 그네였기 때문 이다.
한데 그 그네를 태어나서 한 번도 타 보질 못했다니.
막동이를 바라보는 팽천호의 눈빛 에 후회가 떠올랐다. 사실 그동안 제자랍시고 수련만 시켰지 살갑게 먼저 다가가 그 속내를 물은 적이 없었다. 막동이가 힘들다고 조금만 쉬게 해 달라고 간청했을 때도 꾀부 리지 말라며 소리만 질러 댔었다.
‘팽천호, 이 못난 놈아! 스승이란 놈이 어찌 제자에게 이리도 무관심 할 수 있단 말이냐. 네놈은 스승이 란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다.’
팽천호는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동안 자신이 막동이에게 했던 행 동과 말 들이 주마등처럼 스친 것이다. 미안하고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그 속내를 밖으로 표 현하지 못했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 갈 뿐이었다.
“그네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줄을 걸 수 있는 커다란 나무만 있 으면 나뭇가지에 줄을 건 뒤에 그 줄을 그네 발판에 연결하면 된다. 하지만 이곳처럼 마땅히 줄을 걸 수 있는 큰 나무가 없는 경우에는 통나 무를 가로질러 양쪽에 세운 다음 그 위에 대를 얹고 단단히 고정시켜 주 면 된다. 우진이 녀석이 미리 적당 한 크기의 통나무를 잘라 놨으니 일 단 그것들부터 가져오자.”
팽천호가 막동이를 데리고 후원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양 쪽 어깨에 자신들의 두 배만 한 통 나무를 걸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장정 서넛이 달려들어도 옮기기 힘 들어 보이는데, 두 사람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네는 어디에 만들면 되느냐?”
팽천호가 설우진에게 물었다. 이에 설우진은 정자 옆자리를 가리켰다. 장소가 정해지자 팽천호는 막동이 와 함께 통나무를 교차시켜 세웠다. 통나무가 흔들리지 않도록 바닥에 깊게 꽂아 넣고 통나무가 교차하는 부분에는 줄을 돌돌 감아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나란히 마주 보고 선 그네 기둥.
팽천호는 틀을 만드는 마지막 작업 으로 막동이에게 그네 줄을 고정시 킬 통나무를 건넸다. 기둥이 된 통 나무들과 달리 껍질이 말끔하게 벗 겨 있고 상대적으로 그 두께가 상당 히 얇았다.
막동이는 건네받은 통나무를 왼쪽 어깨에 걸치고는 남은 팔을 이용해 기둥 위로 올라갔다. 얇다고 해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무게였기에 금세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 하지만 막동이는 불평 한마디 없이 기둥 사이에 통나무를 정확히 안착 시켰다.
이로써 그네 틀이 완성되고 팽천호 는 두툼하게 꼬아 만든 밧줄을 그네판에 고정시켰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그 일련 의 과정들은 불과 일각여 만에 이뤄 졌다. 이는 기관지학에 일가견이 있 는 팽천호가 작업을 주도했기에 가 능했다.
“자, 타 봐라.”
그네가 완성된 뒤 팽천호가 막동이 를 불렀다. 막동이가 의아한 표정으 로 그를 쳐다봤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 다. 그저 그네가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해 보려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어서 타라.”
팽천호의 강권에 막동이는 그네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걸쳤다. 한 번도 타 보지 않았던 물건이라 그런지 두 눈에 흥분과 두려움이란 상반된 감정이 교차했다.
“줄 꽉 잡아라.”
팽천호는 막동이가 완전히 안착하 자 가볍게 하늘로 밀어 올렸다.
순간 막동이의 눈이 커지고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하늘을 난다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