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30화 : 황궁 염문 (3)
황궁 염문 (3)
설우진은 강한 의구심을 표했다. 이에 유설하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 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저희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공 자님은 크게 되실 분이라고 했어요.”
“그 말은 내 옆에 붙어서 콩고물이 나 넙죽 받아먹겠다?”
“굳이 표현한다면 그런 셈이죠.”
유설하는 답을 피하지 않았다. 설 우진은 그녀의 반응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솔깃했다.
‘나살문은 살수지문이다. 기본적으로 정보력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하 지. 무력만 존재하는 철사자회에 나 살문이 더해진다면 한층 짜임새가 갖춰질 터.’
“좋다. 내 곁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굳이 밀어내지는 않겠다. 대신 능력 을 보여라.”
설우진은 조건을 내세웠다.
이에 유설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려운 시험이 될 것이라는 걸 직감 한 것이다.
“뭘 하면 되죠?”
“마천과 관련된 정보를 모아라.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마천은 갑자기 왜?”
“그건 차후에 알려 줄 것이다, 내사람이 됐다 판단이 들었을 때.”
설우진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는 마천의 움직임이 우려스러웠 다. 자신이 개입함으로 인해서 생겨 날 변화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변화를 알 아차릴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는 황룡 학관의 일개 관도에 불 과했다. 무력적인 능력치야 강호에 서 손꼽을 정도지만 그 외적인 능력 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나살문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부 족한 능력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마천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전해 드리면 되죠?”
“음, 일단 정보가 모이면 일품점 서안 지부로 사람을 보내도록해.”
“그곳이 정보 창구인가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날 일품점 의 장남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섣불리 정체를 드러내진 마.”
설우진은 일품점 서안 지부를 정보 창구로 활용코자 했다.
일단 번화가에 자리해 있는 데다 상가라 무림 세력의 눈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두 사람의 대화는 한동안 이어졌다. 대부분 설우진이 얘기하고 유설하는 경청하는 식이었다. 그 러다 처음으로 유설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최근에 북경 일대에서 공자님과 관련된 소문이 은밀하게 퍼지고 있 던데…………… 사실인가요?”
“자혜 공주와의 염문설을 묻는 거 라면 사실이 아니다.”
“그럼 왜………?”
“공주에게 부탁을 받았다.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으니 굳이 알려 들지 마라.”
설우진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한번 열린 유설하의 입은 쉬이 멈추질 않았다.
“황궁 제일미로 불리는 자혜 공주님을 직접 보니 어땠나요? 소문엔 선녀처럼 아름다우시다고 하던데.” “음, 소문 그대로다. 공주라는 신분 만 아니었다면 품에 안고 싶을 정도 로 아름답지.”
설우진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럼 전 어떤가요?”
유설하가 갑자기 머리칼을 싸매고 있던 머리끈을 풀어냈다. 순간 삼단 같은 흑발이 단번에 허리까지 내려 왔다.
“……이게 무슨 의미지?”
설우진은 그녀의 돌발 행동에도 당 황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을 수도 없이 겪어 봤기에.
“솔직히 저도 제 감정을 모르겠어 요. 그냥 공자님 앞에만 서면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려 요.”
“첫눈에 반했다는 거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하아, 낭왕 시절에는 돈지랄을 해 야 겨우 붙던 여자들이 이제는 알아 서 붙네. 전생의 박복한 삶에 대한 보상인가?
설우진은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하면 서도 한편으론 기뻤다. 여자들이 스 스로 좋다고 달려드는데, 싫어할 남 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미리 얘기하는데, 난 그리 좋은 남자가 아니야. 한 여자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남자를 기다려 왔다면 이쯤에서 깔끔하게 마음 접어, 괜히 상처만 입게 될 테니.”
“애당초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았 어요. 공자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렇게 머리를 풀 일도 없었을 테니까 요.”
유설하가 처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 다. 남자로 살아온 삶이 녹록치 않 았던 모양이다.
“그럼 오늘 완전한 여자로 만들어 줄까?”
“그, 그게 무슨?”
유설하가 당황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품에 안고 싶어지는군.’
설우진은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 습에 아랫도리가 후끈해졌다. 사실 그는 방학을 한 이후로 본의 아니게 금욕 생활을 했다. 단짝이었던 자스 민이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방 안이 덥네.”
설우진이 손부채를 부치며 상의를 살짝 풀었다. 그 사이로 잘 단련된 구릿빛 가슴근육이 드러났다. 자연 스럽게 유설하의 시선이 그곳에 꽂 혔다.
“더우면 너도 벗지그래?”
설우진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잠 시 망설이던 그녀는 꽁꽁 동여맨 옷 고름을 풀었다.
그러고 얼마 후 방 안에 불이 꺼졌다.
“정녕 떠나야겠느냐?”
건장한 체구의 장년 사내가 안타까 운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그 맞은편에는 가녀린 체구의 여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건청궁의 주인인 영락제 와 그의 딸인 주소령이었다.
“윤허해 주십시오, 폐하!”
“조금만 더 참으면 안 되겠느냐? 천소강이 돌아오면 그 모든 위협으 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 데.”
“저를 위하는 폐하의 마음은 충분 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들 때문에 억지로 사내의 품에 안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소령은 밤새 고민해서 결정한 내 용을 영락제에게 고했다. 영락제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지만 소 용없었다.
‘고집이 딱 제 어미를 닮았구나. 하긴, 그 피가 어디로 가겠느냐.’
“좋다.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이 아비도 더는 말리지 않으마. 대신 호표기들을 데려가도록 해라.”
“호표기라면 폐하의 그림자가 아닙 니까!”
“당금 천하에 이 아비를 위협할 자 는 없다. 하니 아무 소리 말고 따르 도록 해라. 그리고 어딜 가서든 이 영락제의 딸임을 잊지 마라.”
영락제가 주소령의 손을 꼬옥 붙잡 았다. 철혈의 공주라 불리는 이도 결국엔 아버지였다.
잠시 후 그녀가 건청궁을 나섰고 그 뒤로 희미한 형체들이 따라붙었 다. 황제의 그림자라 불리는 호표기 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자혜 공주가 누구와 눈이 맞아?”
“진정하십시오, 장군님, 아직까지는 증빙되지 않은 소문일 뿐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일이 없잖느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지 금 당장 자혜 공주를 만나 봐야겠다.”
밤늦게 북경으로 돌아온 천소강은 아침에 시비들이 나누는 얘길 듣고 크게 발끈했다. 마음의 짝으로 여기 고 있던 자혜 공주가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았다는데 어찌 사내로서 가 만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장 출타할 채비를 하도록 하겠습니 다.”
총관 위소가 천소강을 달래며 다급 히 방을 나섰다.
그런데 그가 떠나고 얼마 안 돼 방문이 열렸고 채비하겠다고 나섰던 위소가 한 남자와 함께 들어섰다. 칠 척이 넘는 건장한 체구에 탐스럽게 기른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사 내였다.
“아버지께서 제 방엔 무슨 일로……?”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순간 천소강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 다. 아니나 다를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폐하께서 자혜 공주와 너와의 혼 담을 파하셨다.”
“이, 이유가 뭡니까? 혹 근자에 떠 돈 소문 때문에…………?”
“폐하의 말씀으론 자혜 공주의 뜻 이라고 하더구나. 아쉽긴 하지만 폐 하의 뜻이니 받아들이도록 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그녀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천소강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 안에는 분노와 절망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네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이런 때일수록 자중토록 해라. 이런 호기를 간교한 도적놈들이 놓칠 없다.”
구문제독 천위산은 아들의 어깨를 두들기며 굵직한 목소리로 경고했 다.
북경은 그 어느 곳보다 눈에 보이 지 않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 었다. 어느 정도냐면 하루아침에 권력의 중심에서 미끄러져 목이 잘릴 정도였다.
천위산은 영락제가 패권을 잡은 뒤 그의 최측근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문관들을 중심으로 그의 권력을 경계하는 목 소리가 커졌다. 아직까지는 뚜렷한 명분이 없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 이고 있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어찌 될지 불을 보듯 뻔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여자 하나 때문에 중심이 흔들려서야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 겠느냐? 내 더 좋은 혼처를 알아봐 줄 테니 청아정으로 가서 마음을 달래거라.”
천위산이 품 안에서 푸른빛이 감도 는 옥패를 꺼냈다. 특별한 이들만 드나들 수 있다는 북경의 명물 청아 정의 출입패였다.
출입패를 건넨 뒤 천위산은 방을 나섰다.
“위소!”
“네, 장군님.”
“지금 당장 놈의 행방을 찾도록 해 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괜찮으시겠습니까?”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면 될 일이 다. 걱정 말고 서둘러서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위소는 천소강의 명에 순순히 따랐다. 천위산을 생각한다면 말려야 하 는 게 맞지만 그는 이미 천소강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한 사람이었 다.
위소가 방을 나서고 천소강은 자신 의 계획을 망친 원흉을 향해 적의를 불태웠다.
“비천한 상가의 자식 놈이 감히 내 여자를 넘보다니. 내 너를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건가 요?”
“아직 방학이 끝나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니 부모님 곁에서 일을 도와 드려야지.”
“보기보다 효자네요.”
“날 낳아 주신 분들인데, 살아 계 실 때 효도해야지. 너도 네 사부 잘 돌봐 드려. 돌아가시고 난 뒤에 후 회해 봐야 아무 소용없으니까.”
설우진은 유설하와 마주 앉아 아침 을 먹었다. 밤새 좋은 일이라도 있 었는지 두 사람의 얼굴에서 유난히 빛이 났다.
“그나저나 이제 남장은 안 하는 거 야? 사람들이 네 본모습을 보면 깜 짝 놀랄 텐데.”
“여자로 살기로 마음먹었으니 차림 새부터 달리해야죠.”
“후훗, 그래. 늦었지만 이제라도 여 인의 삶을 마음껏 누리도록 해, 사내들의 시선도 한 몸에 받아 보고.
“남자들이 절 좋아할까요?”
유설하가 정말 궁금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사내로만 살아왔으니 그런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음, 아마 열에 아홉은 좋아할걸. 그리고 그 아홉 중에 한둘은 노골적 으로 마음을 고백할지도 몰라. 사내 라는 동물은 욕구에 충실한 법이거 든.”
“어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요?”
살짝 토라진 표정으로 그녀가 설우 진을 째려봤다. 이에 설우진은 그녀 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서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사내놈들이 뭔 짓을 하든지 네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걸 알거든.”
이내 그녀의 뺨이 잘 익은 홍시처 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론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는 지 다급히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설우진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 보고는 남은 그릇을 빠르게 비웠다.
진시 말미, 오성각이 문을 열었다. 단골을 많이 두고 있는 가게답게 문을 열기 무섭게 손님들이 들이닥 쳤다.
유설하가 손님을 받는 동안 설우진 은 전망 좋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바쁘게 오가는 이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더니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