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5권 – 15화 : 낭왕, 응징하다 (2)
낭왕, 응징하다 (2)
“크, 크윽, 주, 죽여 버리…….”
마백풍은 설우진의 손아귀에서 빠 져나오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때 마다 설우진은 머리를 들었다 다시 바닥에 내리찍기를 반복했다.
어느 새 마백풍의 얼굴이 붉은 피 로 얼룩졌다. 다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여기 몇 놈이나 왔지?”
“내, 내가 그걸 말할…… 커억!”
설우진이 이번엔 마백풍의 오른쪽 발목을 그대로 찍어 눌렀다. 얼마나 발끝에 힘을 실었는지 단단한 발목 뼈가 그대로 으스러졌다.
“지금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너한텐 선택권이 없어. 강·자·존. 네놈들이 가장 좋아하는 논리잖아. 약자면 약자답게 굴어.”
설우진은 마천의 방식으로 마백풍 을 다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방법이 먹혔다.
“크큭, 네놈, 우리와 같은 부류였구 나. 좋다. 이곳에 온 청랑대의 수는 백 명이 조금 넘는다. 일반 무사들 은 내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우리 대주님은 나 따위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지.”
마백풍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대주인 육지환이 자신의 복수를 해 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 만 설우진의 반응은 태연자약했다.
‘청랑대주 육지환. 그자가 과연 적 사호 그 인간을 상대로 승리를 가져 갈 수 있을까? 벽뢰진천을 얻지 못 한 게 변수이기는 해도 오성 중 으 뜸이라 불렸던 그인데……………’
설우진이 기억하는 전생의 적사호 는 천하제일인에 근접한 초고수였 다.
그는 정형화된 무사는 아니었다. 기존의 무공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익혀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기 때 문이다.
특히 뇌기를 실어 휘두르는 철봉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제천대성처럼 모든 것을 깨부수는 엄청난 위용을 뽐냈다.
천번지복.
육지환과 적사호의 대결은 그야말 로 하늘을 날게 하고 땅을 뒤집어엎 었다.
둘의 싸움이 시작된 건 일각여 전 이었다. 당시 육지환은 사도무기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초반의 승 기를 마지막까지 이어 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찰 나에 등 뒤에서 적사호가 기습을 가 해왔다. 무시하고 넘기기엔 느껴지는 기세가 너무 흉험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사도무기의 목으로 향하 던 검을 돌려 적사호의 공격을 막았 다.
이후 두 사람의 본격적인 대결이 이어졌고 선공을 취한 건 육지환 쪽 이었다. 앞선 공방에서 적사호의 경 지가 자신에 비해 낮지 않음을 간파 한 그는 사도무기를 상대할 때도 펼 치지 않았던 비기를 초반부터 꺼내 들었다.
육지환은 백팔천마공의 하나인 비 마검의 전수자였다.
비마검은 검기를 유형화시켜 마치 이기어검처럼 부릴 수 있는 검법이 었다. 내공 소모가 심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영약을 취해 온 그에게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그가 부릴 수 있는 비검의 최대치 는 다섯 자루였다. 한데 그는 초반 부터 다섯 자루의 비검을 만들어 적 사호에게 날려 보냈다.
다섯 자루의 비검은 적사호를 강하 게 압박했다. 육지환의 의지대로 움 직이는 비검은 적사호의 시야가 닿 지 않는 사각을 노려서 섬전처럼 파 고들었다.
하지만 적사호도 호락호락 기세를 내주지 않았다.
그는 비검이 날아드는 방향으로 내 력을 집중해 일종의 호신강막을 형성했다. 호신강막에 부딪힌 비검은 힘을 쓰지 못하고 스러졌다.
이에 육지환은 하나의 비검에 내력 을 집중했다. 힘을 분산하기보다는 하나에 모아 호신강막을 부수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육지환이 검을 하 나로 모으자 적사호도 소극적으로 호신강막을 형성하는 대신 철봉에 기를 모두 실어 비검에 맞선 것이 다.
이후의 싸움은 힘과 힘의 대결이었 다.
수비는 도외시한 채 오로지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려 했다. 때문에 두 사람이 싸우는 주변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학사들이 머무는 건물은 그 형태를 잃은 지 오래였고 바닥은 난무하는 기의 파편에 여기저기 깊은 생채기 가 나 있었다.
“후우, 적성, 소문 이상의 실력이 군! 백풍 녀석이 덤볐다간 십 초도 버티질 못했겠어.”
육지환은 가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까지 내공의 여유는 있었지만 문제는 체력이었다. 내공이 많다고 해서 체력까지 좋은 건 아니다. 심 법 수련이나 영약을 통해 얻어지는 내공과 달리 체력은 순수하게 육체 적인 단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외공을 익힌 삼류 무사가 내 공을 익힌 이류 무사를 꺾을 수 있 는 것과 같은 이치다.
‘흠, 이대로는 승부를 내기 어렵겠 어. 이럴 땐 마음을 뒤흔드는 것도 하나의 방책이지.’
육지환은 적사호와의 대결이 길어 지는 데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싸움은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 기 때문이다.
“비명이 잦아드는 걸 보니 자네 제 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군. 마음이 많이 아프겠어?”
육지환이 관도들의 생사를 언급했 다. 제자들을 아끼는 적사호의 마음을 흔들겠다는 심산이었다. 한데 의외로 적사호의 표정이 무척 담담했 다.
그 모습에 육지환은 적잖게 당황했 다.
그간에 비선을 통해 조사해 온 바 로는 적사호가 관도들을 크게 아낀 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반응은 그 조사 내용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 었다.
“왜, 내가 너무 태연한 게 이해가 안 돼 보지?”
“……”
“실은 저곳에 나 못지않은 괴물이 도사리고 있거든. 나이는 어리지만 나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녀석이지. 녀석이 있는 한 난 안심하고 이 싸움에 전념할 수 있어.”
‘설마, 비선이 파악하지 못한 고수 가 이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건가?’
육지환은 아차 싶었다. 마천이 부 리는 비선은 역천회의 정보통인 흑 개방과 연결돼 있었다. 근거지가 서 역에 있으니 그들을 통하지 않고선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에 와선 그 점 이 정보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리 고 있었다.
“이제 그만 결착을 내지.”
적사호는 철봉에 내력을 주입했고 전에 없이 강한 패기가 철봉 주위를 휘감았다. 이에 육지환은 부랴부랴 비검을 소환했다. 비검은 여전히 날 카로운 예기를 발했지만 어쩐지 철 봉의 패기에 비해 그 존재감이 떨어 져 보였다.
‘비검은 결국 내기로 뭉쳐진 덩어 리일 뿐, 실제 검에 비할 바는 아니 지. 고로 힘으로 깨부수면 끝이야.’
수비 위주의 움직임을 보이던 적사 호가 이번엔 빠르게 공세로 전환했 다.
극한의 패력기로 강도를 끌어올린 철봉은 그대로 육지환의 몸이 아닌 비검으로 향했다.
“어리석군. 그런 쇳덩이가 내 비검 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육지환은 적사호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철봉을 향해 그대로 비검을 날렸다. 힘으로 뚫어 버리겠단 심산이 었다.
이윽고 비검과 철봉이 맞닥뜨렸다. 그 순간 적사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부서져라.’
적사호는 철봉에 회전력을 더했다. 회풍패천. 패력기를 극한으로 끌어 올리는 기술이었다.
카카칵.
비검이 거칠게 요동쳤다. 철봉의 패력기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비검의 몸뚱이를 두들 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육지환은 다급히 단전이 뻐근해질 정 도로 비검에 내력을 더했지만 한번 기세에서 밀려 버린 비검은 제대로 힘을 내지 못했다.
이에 육지환은 궁여지책으로 새로 운 비검을 소환했다. 순간 울혈이 치밀어 올랐다. 내력이 과도하게 소 진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비검을 소 환하느라 단전에 무리가 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파상 공세를 막기 위 해선 그게 최선이었다.
한데 그것이야말로 적사호가 의도 한 바였다.
적사호는 육지환의 신경이 두 번째 비검으로 쏠려 있는 사이 패력기를 거둬 첫 번째 비검에 철봉이 튕겨나가게 했다.
비검에 밀려 튕겨 오른 철봉. 적사 호는 그 반동을 역으로 이용해 두 번째 비검을 향해 철봉의 끝을 돌렸 다.
신경이 분산된 상황에서 육지환의 반응은 처음보다 더뎠다.
펑!
두 번째 비검이 철봉의 패력기에 의해 터져 나갔고 순간적으로 벽이 사라진 상황에서 철봉은 그대로 날 아가 육지환의 복부를 강하게 두들 겼다.
육지환의 신형이 무너진 학사관 안 으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육지환과 마백풍이 제압당한 뒤, 청랑대는 사마무기가 이끄는 학사 부대에 의해 빠르게 정리를 당했다. 사마무기는 관도들의 죽음을 목도 한 뒤 과거의 살귀로 돌아가 사정없 이 칼을 휘둘렀다. 학사들이 그 몸 으론 무리라며 극구 만류했지만 소 용없었다.
결국 날이 밝아 올 무렵 청랑대는 모두 제압당했다. 사마무기가 미쳐 날뛴 덕분에 살아남은 청랑대의 숫 자는 열에도 미치지 못했다.
“빌어먹을.”
진무관에서 청랑대가 정리되는 걸 지켜본 맹철기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는 사마무기가 이끄는 학사군과 청랑대의 싸움이 어느 정도 결론 났 을 때 본격적인 행동에 나설 심산이 었다.
한데 그가 나설 틈도 없이 싸움이 끝나 버렸다. 그것도 황룡 학관의 일방적인 승리로.
“조장님, 그만 밖으로 나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창우대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 을 꺼냈다. 마음이 불편하기는 그들 도 매한가지였다.
‘그래,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일. 그리고 관도들의 입은 틀어 막으면 그만이야. 제 놈들이 무슨 배짱으로 내 말을 거역하겠어.’
맹철기는 납덩이처럼 얹혀 있던 불 편한 마음을 털어 내고 진무관의 문 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예상했던 대로 그를 바라보는 관도 들의 표정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이제야 나오십니까?”
강철후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를 맞 았다. 이에 맹철기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철후, 수고 많았다. 널 내보내기로 한 건 내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게 무슨?”
강철후는 어이없다는 어조로 반문 했다. 한데 맹철기는 뻔뻔하게 그가 세운 공을 자신의 명에 의한 것으로 왜곡시켰다.
-네 입에 창우대의 명예가 달려 있다. 네 녀석이 그토록 존경하는 악 대주에게 불명예를 안겨 주고 싶 지 않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 라.
-어찌 이리도 뻔뻔스러울 수가 있 습니까?
-내 개인적인 영달이 아니라 창우 대를 위해 내린 결정이다.
으드득.
강철후는 이를 악물었다. 맘 같아 선 면상에 주먹이라도 박아 넣고 싶 은데, 악불휘의 얼굴을 떠올리니 차 마 그리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사마무기가 학사들을 이끌고 진무관으로 찾아왔다. 그의 의복은 청랑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시뻘겋게 얼룩져 있었다.
“오셨습니까?”
맹철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사 마무기는 그의 복색이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싸움에 나서지 않은 겐가?”
“청랑대의 공격이 너무 급작스러워 관도들을 피신시키는 데 주력했습니 다. 저도 전면에 나서서 싸우고 싶 었지만 지켜야 할 관도들이 많았던지라…….”
맹철기가 뒤따라 나온 관도들을 가 리켰다. 황보민을 비롯한 유력 세가의 자제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뒤로 늘어섰다.
“맞습니다. 맹 조장님은 몇 번이나 나서서 애들을 구하고자 하셨지만 못난 저희가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황보민이 맹철기에게 힘을 실어 줬 다. 진무관을 나서기 전에 이미 둘 사이엔 은밀한 합이 오갔다. 둘 다 비슷한 부류인지라 마음이 잘 통했 다.
“흐음, 그럼 저 친군 뭔가?”
사마무기가 한쪽에 덩그러니 서 있 는 강철후를 가리켰다. 맹철기는 강 철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대화를 이어 갔다.
“저희 조원입니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조에서 가장 무력이 뛰어난 친구를 내보냈습니다.”
“저 친구가 고생이 많았겠군.”
사마무기가 강철후에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냈다.
“네, 그때 저 친구가 나서지 않았 다면 관도들의 희생이 더 커졌을 겁니다.”
맹철기는 강철후의 공을 치하함과 동시에 자신의 과를 가렸다. 이는 우직한 성품의 사마무기에게 적절하 게 먹혔다. 맹철기의 간교한 말장난 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다.
“아무튼 고맙네. 자네들이 있었기 에 학관을 무사히 지킬 수 있었네.”
“무슨 그런 말씀을…….”
“일단 맹에 기별을 넣었으니 곧 지원대가 이곳으로 올 것이네. 그때까 지만 더 수고해 주게.”
사마무기가 맹철기에게 학관의 방 비를 부탁했다. 청랑대와의 혈투로 황룡학관의 학사들은 반수 이상이 죽고 한동안 거동하기 힘든 부상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