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5권 – 19화 : 불협화음 (2)
불협화음 (2)
백호 정도가 살고 있는 작은 마 을이었다. 산을 끼고 있어서인지 마 을 곳곳에서 진한 약향이 풍겨 왔 다.
설우진은 가장 먼저 촌장의 집을 찾아갔다. 마을의 규모가 크지 않아 집을 찾기는 쉬웠다.
때마침 촌장은 마당에서 잘 말린 약초를 썰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설우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낯선 이의 출연에 놀란 듯 촌장은 약초를 자르던 손길을 멈추고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누구요?”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날 이 저물어 더는 움직이기 힘들 듯해 이곳에서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합니 다.”
“몇 사람이나 되오?”
“백 명이 조금 넘습니다.”
“서넛 정도면 내 방이라도 내주겠 지만 그만한 인원이 묵을 곳은 없 소.”
촌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을의 궁핍한 사정을 전했다. 물론 설우진은 그럴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낭인 시절에 이런 외진 마을에서 묵었던 경험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굳이 방이 아니라도 됩니다. 그냥 밤이슬만 피할 수 있으면 되니 마땅 한 장소를 알려 주십시오.”
“흐음, 마침 지난주에 상단이 찾아 와 보관 중이던 약초를 모두 가져간 터라 안이 비어 있는데 창고도 괜찮 겠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어딘지 알 려만 주시면 조용히 밤이슬만 피하 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겠습니다.”
설우진은 반색하며 촌장의 말을 반 겼다. 이에 촌장은 손을 털고 일어 나 창고까지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설우진은 촌장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이봐, 그거 얼마야?”
“죄송하지만 이건 파는 물건이 아 닙니다. 삼을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 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손님이 팔라면 팔 것이지 무슨 말 이 그렇게 많아? 여기 금자 열 냥! 이 돈이면 이 궁상맞은 마을에서 벗 어나 부유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북리강이 순박하게 생긴 청년에게 전낭을 통째로 건넸다. 한데 청년은 한사코 전낭을 거부했다.
“천금을 주셔도 이 삼은 팔 수 없 습니다. 기력이 쇠해지신 어머니께 달여 드려야 합니다.”
“그런 귀한 삼을 고작 노인네 기력 회복시키는 데 쓰겠다고? 바보 같은 소리 말고 그냥 내놓지.”
‘그 한 뿌리면 십 년 내공은 족히 얻을 수 있거든.’
삼을 바라보는 북리강의 두 눈에 진한 탐욕이 떠올랐다.
청년이 캐낸 삼은 심산유곡에서 천 지간의 기운을 머금고 자란다고 알 려진 천령삼이었다.
천령삼은 일반적인 삼과 그 형태는 거의 비슷한데 뿌리 표면에 사람의 핏줄처럼 붉은 줄이 나 있었다. 그 줄의 색은 천령삼의 수령이 오래될 수록 진해지는데 눈앞의 천령삼은 그 색이 아주 진했다.
“공자님, 사정 좀 봐주십시오. 다음 에 찾아오시면 그때는 진짜 귀한 삼 으로 대접하겠습니다.”
“그 삼이 아니면 안 된대도.”
흥정은 난항을 겪었다. 사려는 쪽 과 팔려는 쪽의 의견이 다르니 거래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북리강은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 기 시작했다. 이를 방증하듯 목소리 가 커졌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한 번만 더 안 된다는 말이 그 입에서 흘러나오 면 그때는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몰 라.”
북리강은 청년을 대놓고 협박했다.
그런데 순박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청년은 강단이 있었다. 북리강의 협 박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것 이다.
결국 사달이 벌어졌다. 북리강은 손에 쥐고 있던 전낭을 청년의 발치 에 내던지며 강제로 천령삼을 빼앗 아 들었다. 청년이 안간힘을 쓰며 버텼지만 무인의 힘을 이길 수는 없 었다. 힘에서 밀린 청년은 속절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천한 놈이 좋게 말로 할 때 들을 것이지, 꼭 손을 쓰게 만들어!”
북리강은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천령삼을 손에 쥐고 만면에 미소를 그렸다.
한데 바로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청년이 득달같이 일어나 북리강 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북리강이 그런 허술한 공격 에 당할 리 없었다. 그는 가볍게 몸 을 옆으로 젖혀 공격을 피한 뒤 청 년의 무릎 안쪽을 찍었다.
그의 입장에선 가벼운 발길질에 불 과했지만 당한 입장에선 아주 치명 적인 공격이었다. 청년이 비명을 지 르며 무릎을 감싸 안았다. 북리강의 발길질에 무릎 뼈가 부러져 버린 것 이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달려들어서 는・・・・・・ “
북리강은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청년의 무모함을 나무라며 자리를 떴다. 홀로 남겨진 청년은 한동안 바닥에 웅크린 채 앓는 신음만 냈 다.
“오늘은 여기서 묵을 예정이니 다 들 적당한 자리 찾아서 자도록 해.”
설우진은 관도들을 창고로 데려갔 다. 창고 안은 의외로 깔끔했다. 약 초를 밖으로 빼고 나서 따로 청소를 한 것인지 먼지도 별로 없고 퀴퀴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밤이슬을 피할 용도라면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 다.
한데 이번에도 잘난 천자 조원들 이 불만을 제기했다.
“대체 이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어떻게 잠을 청하란 거냐? 우린 따로 방을 구해서 자겠다!”
“선배, 설마 돈 주고 집을 빌리겠 다는 생각은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느냐? 아마 은전 한 냥 만 줘도 이 촌구석 사람들은 안방을 통째로 내주려 할 것이다!”
“그럼 맘대로 하시죠, 싫다는 사람 까지 억지로 끌어안고 잘 생각은 없 으니.”
설우진은 굳이 그들을 붙잡지 않았 다. 본인들이 제 돈 내고 멀쩡한 집 에서 자겠다는데, 무슨 수로 말리겠 는가. 한데 그들의 행동에 몇몇 관 도들이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음이 동했다는 의미였다.
설우진은 그들에게도 원하면 돈을 내고 다른 집에서 자도 된다고. 단 강제성을 띄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 을 걸었다. 그 말을 듣고 전체 인원 의 삼분의 일 정도가 밖으로 빠져나 갔다.
‘그 큰일을 겪고도 아직 정신들을 못 차렸네. 이러니 전생에 마천과 역천회에 휘둘려 쫄딱 망했지.’
편한 것만 찾는 그들의 행태에 설 우진은 쌍룡맹의 미래가 보이는 듯 했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긴 여정에 지친 관도들은 불편한 잠자리지만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밤새 사고를 치진 않겠지?’
설우진은 밖으로 나간 북리강 일당 을 떠올리며 등을 벽에 기댔다. 잠 시 후 그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 다.
“산아, 이게 어찌 된 게냐?”
“촌장님, 무사복을 입은 자들이 천 령삼을 빼앗고 제 다리를 이리 만들 었습니다!”
“그게 참말이냐?”
“네. 어머니 기력 회복에 쓰일 약 재라고 몇 번을 사정했는데도 들어 주질 않았습니다.”
“내 후하게 인심을 써서 마을 창고 까지 내줬거늘 고얀 놈들이로구나.”
촌장의 두 눈에 전에 없던 독기가 떠올랐다. 겁 많고 소심해 보이던 낮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었다.
“산아, 너무 걱정 말거라. 이 할아 비가 꼭 되찾아 주마. 일단 무릎부 터 이쪽에 대거라. 그대로 두면 나 중에 걷는 데 지장이 생길 수도 있 으니 빨리 처치해야 한다.”
청년은 힘겹게 다리를 앞으로 내뻗 었다. 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무 릎 상태를 살피더니 이내 양손을 가 져가 뼈마디를 매만졌다.
“암경을 실어 뼈마디를 이리 으스 러뜨려 놓다니, 정말 악독한 놈이로구나.”
“고, 고칠 수 없는 건가요?”
청년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약초꾼에게 튼튼한 두 다리는 생명 과도 같았다. 험한 산길을 오르기 위해선 다리 힘이 받쳐 줘야 하기 때문이다.
“흐음,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 만 고칠 수는 있을 게다. 일단 으스 러진 뼈마디를 맞출 터이니 이걸 마 시도록 해라.”
촌장이 청년에게 작은 호리병을 건 넸다. 청년은 망설임 없이 뚜껑을 연 뒤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역 한 고린내가 나고 그 냄새만으로 구 역질이 올라올 정도였다.
그사이 촌장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그는 조각을 맞추듯 부서진 뼈마디 하나하나를 이어 붙였다. 그때마다 그의 손끝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 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치료는 이각 여 정도 이어졌다.
통증을 줄여 주는 약을 먹었는데도 치료가 힘들었는지 청년은 잠이 들 었다.
촌장은 청년의 머리 밑에 베개를 넣어 준 뒤 집 밖으로 나왔다. 밤하 늘엔 유난히 살이 차오른 보름달이 환한 빛을 뿌려 대고 있었다.
“조용히 살려고 이 외진 곳까지 들 어왔는데 세상이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군. 호의를 불의로 갚은 이놈들! 모두 기어서 나가게 해 주마!”
촌장은 뒷간으로 걸음을 향했다. 그러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더 니 이내 항아리를 껴안고 밖으로 나 왔다.
“으음, 이게 무슨 냄새지?”
이른 새벽 설우진은 코끝을 간질이 는 기이한 향기에 눈을 떴다. 평소 같으면 무시하고 잠을 청했을 텐데 잠자리가 낯설어서 그런지 눈을 감 아도 오히려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변의 사람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 져 있었다.
설우진은 바람이라도 쐴 겸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달 도 저물어 어두컴컴했지만 야수안을 익힌 그에겐 크게 문제 될 게 없었 다.
그런데 몇 걸음 내디뎠을까. 갑자 기 설우진이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기습적으로 밀려오는 배 속의 신호. 설우진은 황급히 근처 수풀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설우진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수풀 밖으로 걸어 나왔 다.
“빌어먹을, 어제 먹은 건포가 상했 었나? 분명 맛이나 향은 이상이 없 었는데…………….”
설우진은 배를 살살 매만지며 주변을 둘러봤다.
설사를 멈추는 데 효과가 탁월한 풀을 찾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그 풀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설우진이 찾던 풀은 개망초였다. 길가에서 쉬이 찾아볼 수 있는 들 풀로 그 꽃 모양이 계란을 닮아 있 었다.
설우진은 자신의 몸에 나타난 증상 이 배탈이라 짐작하고 길가에 핀 개 망초를 뜯어 그대로 입으로 밀어 넣 었다. 쓰디쓴 즙이 입안으로 흘러들 었지만 아랫배의 통증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쯤은 웃으며 감 내할 수 있었다.
한데 개망초를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는 다시 수풀 안으로 뛰 어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후 그가 다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표 정은 전에 비할 데 없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이건 단순한 배탈이 아니야.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증상은 독 때 문이야. 그 독이 이곳에 왜 있는지 는 모르지만 확실해.”
설우진이 그것이 단순한 배탈이 아 니라 확신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방금 전 일을 보고 난 후 그는 내 력의 소실을 감지했다. 워낙 미약한 변화라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지만 야수감각도로 단련된 그의 예민한 감각은 그 미세한 차이를 읽어냈 다.
‘내가 초짜 시절에 강호를 한바탕 뒤집어 놨던 독공의 고수가 있었지. 그자의 이름은 노천개. 그 재능을 인정받아 당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갔 지만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이후 제 발로 뛰쳐나왔었고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그 후 마 침내 희대의 독을 만들어 냈지. 몸 안의 진원지기까지 모두 밖으로 끄 집어내 버린다는 천하의 절독, 변독 을’
변독은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독이 아니었다. 중독된다고 해도 죽을 일 은 없기 때문이다.
한데 무인들에겐 그 어떤 독보다 치명적이었다.
그 이유는 변독의 독기가 몸 안의 내기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내력을 쓸 수 없는 무인은 더 이 상 무인일 수 없기에 변독에 중독된 무인들은 하나같이 폐인으로 전락했 다.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변독 을 퍼트린 원흉이.”
설우진은 아랫배를 움켜쥐고 부지 런히 주변을 뒤졌다. 그렇게 한참 만에 흰 연기를 내뿜고 있는 단지 하나를 발견했다.
잘 익은 꽃을 연상케 하는 달콤한 향. 설우진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단지를 뒤집어 바닥에 힘껏 내리꽂 았다. 그렇게 입구가 막힌 탓에 연 기는 더 이상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아랫배 통증은 좀체 가시질 않았다.
‘빌어먹을, 왜 이런 촌구석에 괴독 의가 도사리고 있는 거야? 그리고 또 우리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서 변독을 푼 거지?’
그의 머릿속은 풀리지 않는 의문들 로 가득했다.
이에 설우진은 그 답을 찾기 위해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의 대소 사를 관장하는 그이니 괴독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의 걸음 이 절로 빨라졌다.
잠시 후 설우진이 촌장 집의 문을 두들겼고 이내 방 안에서 불이 밝혀 지더니 문 밖으로 촌장이 얼굴을 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