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24화 : 정세 변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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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6권 – 24화 : 정세 변화 (2)


정세 변화 (2)

“진짜 이유가 뭐냐?”

노구단이 객잔을 빠져나간 뒤 제갈 윤이 설우진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넌지시 물었다.

“아까 하는 얘기 못 들었어요?” 

“인마, 널 알아 온 게 수 년이다!”

제갈윤이 살짝 눈을 흘기며 일침을 놨다.

“하하, 이거 형의 눈은 못 속이겠 네요. 실은 창천군과 엮이기 싫어서 일부러 스승님들을 거론한 거였어요.”

“그렇게 쌍룡맹이 싫은 거냐?”

“싫어서가 아니에요. 그냥 추구하 는 바가 다를 뿐이죠.”

“그런 식으로 언제까지 회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네가 강 호에 연을 두고 있는 이상은 결국 하나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제갈윤이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형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어 요. 근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요. 창천군처럼 거창한 곳에 들어가 기엔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고…………….”

‘그리고 뭣보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건 딱 질색이거든.’

그가 누렸던 낭왕의 삶은 자유로웠 다.

어느 세력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 다.

게다가 낭인들에게 국한되어 있기 는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면 수만 명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건 낭왕 만이 누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권리 였다.

“네 뜻이 그리 확고하다면 나도 더 이상 권하진 않으마. 대신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날 찾아와라, 널 위 한 문은 언제든 열어 두고 있을 테 니.”

제갈윤은 아쉬웠지만 설우진의 의 견을 존중해 줬다.

살짝 불편해진 분위기 속에서 설우 진이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마천 놈들은 지금 뭘 하고 있어 요?”

“그게………… 섬서가 놈들의 손에 넘 어 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마천의 천주 가 직접 움직였다. 방어선을 치고 있던 섬서의 문파들이 필사적으로 마천의 진군을 막아 보려 했지만 역 부족이었다.”

“그럼 창우대도?”

“대부분이 죽고 일부만이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하더구나.”

순간 설우진의 뇌리에 악불휘의 얼 굴이 스쳐갔다. 전생에 그의 도움을 받았던 인연이 있었기에 영 마음이 쓰였다.

‘죽었으려나? 아직 그때 부탁받은 옷도 건네주지 못했는데………….’

설우진은 그가 살아 있기를 진심으 로 바랐다. 그에겐 아직 갚아야 할 전생의 목숨 빚이 남아 있기 때문이 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한데 창천군은 왜 감숙에 있는 거 죠, 마천이 섬서를 장악했다면 하남 도 안심할 수 없을 텐데?”

“아버지께서 아직은 창천군의 존재를 밝힐 때가 아니라며 일부러 이곳 으로 보내셨다.”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한 데요?”

“역시 네 녀석의 눈치는 속이질 못 하겠구나. 실은 마천의 본진이 아직 천산에 머물고 있다. 우리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마천주가 소수정예로 움직인 게지.”

“그럼, 창천군의 역할은 마천의 본 진이 중원에 들어서는 걸 막는 건가 요?”

“일단은 감시의 임무만 부여받았 다.”

‘하긴, 백 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수천 명의 병력과 맞설 수는 없을 테지.’

제갈윤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창천 군의 숫자는 일백 명에 조금 못 미 쳤다.

그들 전원이 절정급 이상의 실력자 라고 해도 열 배가 넘는 인원을 한 꺼번에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넌 이제 어쩔 생각이냐, 어차피 마천과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학관에 나가기 힘들 터인데?”

“일단은 사천을 통해서 집으로 돌 아갈까 해요.”

“음, 잘 생각했다. 사천은 아직까지 마천의 마수가 뻗치지 않았으니 너 혼자 움직인다고 해도 크게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천은 전쟁의 여파에서 살짝 벗어 나 있었다.

지리적으로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 는 데다 마천이 사천을 도모하기엔 그 땅이 너무 컸다. 그리고 무엇보 다 사천에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당 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형은 계속 이곳에 있을 거예요?” 

“다른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한은 자리를 지켜야지. 창천군 대부분이 무공은 뛰어날지 몰라도 이걸 쓰는 데는 상당히 서툴거든.”

제갈윤이 웃으며 머리를 가리켰다. 그 모습을 보며 설우진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단순 무식하게 들이대던 노구단의 얼굴이 떠 오른 것이다.

‘그래, 그 마음 이해 간다.’


“놈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어디냐?”

“사천입니다.”

“빌어먹을 놈, 멀리도 갔군.”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쩌긴 뭘 어째! 먹잇감이 나타났으니 움직여 줘야지.”

어둠 속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그 리고 동시에 억눌린 신음과 함께 말 을 전해 온 이의 가슴에서 피가 솟 구쳤다.

팔딱거리는 심장.

안광의 주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제갈윤과 아쉬운 작별주를 나눈 뒤 설우진은 곧장 청해를 거쳐 사천으 로 향했다.

청해는 험준한 산맥이 줄지어 있어 서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마천 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덕분에 꼬박 열흘 의 시간이 소요됐다.

“드디어 성도에 발을 내딛게 되는 군.”

설우진이 말을 멈춰 세웠다. 긴 여 정에 상당히 지친 얼굴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근처의 마방을 찾아 말부터 맡겼다. 한동안 성도에 머물 요량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맡긴 뒤 성도 시내를 돌았다.

성도는 번화했다. 사천의 중심지답 게 오가는 이들로 길이 붐비고 양옆 에는 줄지어 선 상인들이 좌판을 깔 아 놓고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었 다.

“아니, 저게 뭐래?”

“석척하고 비슷하고 생겼는데.” 

“석척치고는 너무 큰 거 아니야, 우리 집 황구랑 붙어도 이겨 먹을 것 같은데?”

설우진이 대로에 나타나자 주변의 시선이 그의 등 뒤로 한데 쏠렸다.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은 건 살 라만더였다.

한데 살라만더의 반응이 이상했다. 예전 같았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즐 기며 요란법석을 떨었을 텐데 지금 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매가리가 없 었다.

‘하아, 이걸 괜히 데려왔나? 석척 주제에 뭔 놈의 입맛이 이리도 까다 로운 거야, 대충 처먹을 것이지.’ 

설우진은 골골대는 살라만더를 보 자 부아가 치밀었다.

감숙성에 머무를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냥 놔두면 스스로 먹잇감을 찾아서 사냥했기 때문이 다.

그런데 청해로 넘어오면서 살라만 더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갑자기 바뀐 환경이 원인인 듯했다. 기력을 찾아 주기 위해 설우진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살라만더 가 좋아할 만한 먹잇감을 찾기 위해 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걸 들이대도 살라만더는 좀체 먹으려고 하지 않 았다. 때리고 협박도 해 봤지만 소 용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갑자기 살라만 더가 코를 씰룩이더니 대로변 구석 으로 뒤뚱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저 자식이 갑자기 왜 저래?”

설우진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살라만더의 뒤를 쫓았다.

살라만더가 향한 곳에는 예쁘장하 게 생긴 소녀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열심히 주걱으로 무쇠솥 안을 휘젓 고 있었다.

무쇠솥 안에는 들판에서 흔하게 찾 아볼 수 있는 책맹(메뚜기)이 노릇 노릇하게 튀겨지고 있었다.

책맹은 풀숲에서 요란하게 뛰어 다 니는 곤충으로 서민들 사이에서 간 식거리로 인기가 높았다.

“책맹 유작 좀 맛보고 가세요. 오 늘 새벽에 제가 직접 잡은 것들이에요.”

소녀가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가정에서도 쉬이 해 먹을 수 있는 책맹 유작이 잘 팔릴 리없었다.

“하아, 이럼 안 되는데………….다 팔 아야 언니한테 먹일 말린 해채를 살수 있는데………….”

소녀의 얼굴에 조바심이 떠올랐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좌판 아래쪽에 서 검붉은 빛깔의 짐승이 무쇠솥 쪽 으로 뛰어올랐다.

살라만더였다.

살라만더의 출현에 놀란 소녀는 주 걱을 휘휘 저어 쫓아내려 했다.

책맹을 욕심내는 들개나 고양이들 을 언니가 그런 식으로 쫓아내는 걸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수법이 살라만더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살라만더는 가벼운 발길질로 주걱 을 반 토막 낸 뒤 책맹 유작이 맛 나게 익어 가는 무쇠솥에 얼굴을 처 박고 정신없이 혀를 놀려 대기 시작 했다.

그의 혀가 입에서 한 번 튀어 나 갈 때마다 한 움큼의 책맹 유작이 사라졌다.

“그만 먹어, 그만!”

소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살라만더 에게 달려들었다.

반 토막 난 주걱으로 때려 보기도 하고 온몸으로 매달려 보기도 했지 만 살라만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살라만더의 만행에 무쇠솥에 넘치도록 쌓여 있던 책맹 유작은 말 끔히 사라졌다.

“으아앙.”

텅 비어버린 무쇠솥을 보고 소녀 가 울음을 터뜨렸다.

한데 이놈의 짐승은 양심도 없는지 혀를 날름거리며 소녀를 빤히 쳐다 봤다. 마치 책맹 유작을 더 달라는 듯이.

이에 소녀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 다.

“하아, 이 빌어먹을 석척 놈, 언젠 가 큰 사고를 한 번 칠 거라고 예 상은 했었지만……… 남의 가게를 이 리 만들면 어떡해, 보아하니 이게 살림 밑천인 것 같은데!”

소녀의 두 눈이 한껏 부어오를 무 렵 살라만더의 등 뒤로 설우진이 서슬 퍼런 기세를 뿌려 대며 다가섰 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살라만 더는 소녀 쪽으로 달음질을 치려 했 다.

하지만 그 속셈을 모를 설우진이 아니었다. 그는 금황침을 튕겨 살라 만더의 오른쪽 뒷발을 바닥에 고정 시켰다.

뒷발은 꼬리처럼 떼어 낼 수 없었 기에 살라만더는 속절없이 설우진의 손에 붙잡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석척 같으니 라고. 네놈이 저지른 사고니까 네가 수습해!”

“……?”

“네놈이 유일하게 잘하는 거 있잖 아. 사람들 앞에서 불놀이라도 보여 줘.”

설우진이 살라만더와 눈을 맞추며 입을 벌리는 시늉을 했다. 용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살라만더는 사람 들이 오가는 길목에 대고 입을 쩍 벌렸다.

살라만더의 기행에 자연스럽게 사 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잠시 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 다.

살라만더의 배가 잔뜩 부풀어 오르 더니 입 밖으로 진짜 불을 뿜어 댔다.

“방금 전에 그거 봤어?”

“응, 석척의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잖아.”

“저게 말이 돼? 석척이 용도 아니 고 어찌 불을 뿜을 수 있지?”

“혹시, 용의 새끼가 아닐까? 저 덩 치를 봐, 석척 중에 저렇게 큰 놈이 어디 있어.”

“그럼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자고.”

살라만더의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좌판을 깔아 놓고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더 러 섞여 있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걸 확인한 설우진은 깔끔하게 비워진 무쇠솥을 들어 살라만더 옆에 놨다. 그리고 사람들 에게 시범을 보이듯 무쇠솥 안에 동 전을 던져 넣었다.

처음엔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돈이 아깝다 생각한 것이다.

이에 설우진은 살라만더에게 신호 를 보내 바닥에 드러눕게 했다. 그 리고 결정적으로 설우진의 뒷말이 이어졌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구경꾼들 사이에 소요가 일었다. 어떤 이들은 눈에 빤히 보이는 장 삿속이라고 힐난하기도 하고 또 다 른 이들은 그래도 보고 싶다는 의사 를 내비치기도 했다.

잠시 후, 고급스러워 뵈는 화복을 걸친 이가 무쇠솥 쪽으로 다가와 동전을 던졌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은전이었다.

땡그랑 땡그랑.

여기저기서 동전이 날아들었다.

대부분은 철전이었지만 그중에 은전도 심심찮게 섞여 있었다.

‘이 정도면 하루치 매상으로는 충 분하겠지.’

무쇠솥의 삼분의 일쯤이 채워지자 설우진은 살라만더에게 눈짓을 보냈 다. 이에 살라만더는 귀찮은 듯 몸 을 일으키더니 허공에 대고 연속적 으로 불을 뿜었다.

여기저기서 뜨거운 환호가 터져 나왔다.

살라만더가 재롱을 피우는 동안 설 우진은 무쇠솥을 소녀 앞으로 가져 다 놨다.

소녀는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설우 진을 빤히 쳐다봤다.

“저 녀석 때문에 오늘 장사 망쳤잖 아. 이 오빠가 신세지고는 못 사는 성미거든. 오늘 치 매상이니까 가져 가.”

“이, 이건 너무 많아요. 그거 다 팔아도 은전 한 냥도 벌기 힘든 …….”

“원래 배상금은 평소 수익보다 더 많이 쳐주게 돼 있어. 그러니까 부 담 가질 것 없어.”

“정말 다 가져도 돼요?”

소녀가 유난히 커다란 눈을 반짝거 리며 물었다.

설우진은 그 모습에서 아프게 헤어 졌던 소교를 떠올렸다.

‘소교도 이 아이처럼 순진무구했었 는데……………?”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하지만 애 써 미소 지으며 대화를 이었다. 

“정 부담되면 저 녀석의 밥값이라 고 생각해.”

“밥값 치고는 너무 많은데……….” 

“음, 그럼 너희 집에 남는 방이 있 으면 저걸로 숙박비를 대신하면 어 떨까? 열흘 정도 이곳에 머무를 예정이거든.”

“방은 있는데 누추해서………….”

“괜찮아. 이 오빠가 얼굴은 귀티나게 보여도 제법 험하게 자랐거든. 삼시 세끼만 꼬박꼬박 챙겨 주면 그 걸로 만족해.”

설우진은 소녀의 집에 묵기로 마음 먹었다.

돈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지만 눈앞의 소녀를 더 보고 싶었기 때문 이다.


“언니, 언니!”

소녀, 아니 청미가 양손 가득 보따 리를 들고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남산만큼 부른 배를 부 여잡은 앳된 얼굴의 미녀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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