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2화 : 낭왕궁악비 (2)
낭왕궁악비 (2)
신보일체의 경지에 이르면 평범한 걸음 속에 보법이 녹아들게 되어 그 냥 걸을 때보다 빠르고 은밀하게 움 직일 수 있었다.
-형님, 아는 얼굴입니까? 뭘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십니까?
-이 애송이 놈이 복도를 거닐 때 신보일체의 경지를 선보였다.
-에이, 설마요! 연초를 많이 태우 시더니 귀가 흐려진 거 아닙니까?
-이놈아, 삭풍이 쉼 없이 몰아치는 풍야곡에서도 정확히 마적들을 찾아냈던 나다. 저 애송이 놈, 분명 신 보일체의 경지를 넘어섰어.
궁악비와 고유광,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한 전음이 오갔다.
“일 층의 낭인들이 어찌 그리 무례 한가 했더니 다 이분의 영향이었군 요.”
몸을 훑는 시선이 거슬렸는지 설우 진이 손동유에게 항의하듯 말을 건 넸다.
작지 않은 목소리였기에 궁악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설우진의 얼굴로 향했다.
‘실력만 보통이 넘는 줄 알았더니 배짱도 만만치 않군. 어떤 의뢰를 해 올지는 몰라도 저놈과 함께 움직 이면 꽤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 아.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얼굴이 군. 하기야, 무료하기도 할 테지, 한 때 투견으로 쉴 새 없이 전장을 누 볐던 영감이니까.’
설우진은 궁악비와 전생의 연이 그 리 깊지는 않았다.
초보 낭인 시절에는 낭왕이라는 존 재와 얼굴을 마주칠 기회가 없었고 차기 낭왕으로 지목받던 시기에는 이미 새로운 낭왕이 등극해 있었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네, 이리 젊은 친구가 날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거든. 일단 이쪽으로 앉지.”
궁악비가 미소 띤 얼굴로 설우진에 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그는 그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광호야, 손님이 왔는데 뭐 하냐. 엽차라도 한잔 끓여 오너라.”
궁악비가 멀뚱히 서 있던 고광호를 불렀다. 고광호는 살짝 인상을 찌푸 리면서도 순순히 안쪽 부엌으로 향 했다.
“그래, 날 고용하러 왔다고?”
“네.”
“젊은 친구가 돈이 많은가 보군?”
“남부럽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설우진은 궁악비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확실히 여간내기는 아니군.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 비슷한 기 질이 느껴져.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궁악비는 설 우진에게서 친근감을 느꼈다.
“여하튼 잘 찾아왔네. 그렇지 않아 도 몸이 근질근질했거든. 한데 거금 을 들여 날 고용할 정도면 상대가 꽤 위험한 실력을 지닌 모양이군?”
궁악비가 은연중에 자신이 상대해 야 할 적들에 대해 물었다. 순수한 호기심의 발로였다.
“네, 정확이 짚으셨습니다. 놈들을 상대할 땐 낭왕께서도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크큭, 이거 내가 젊은 친구에게 너무 얕보였나 보군. 낭왕이란 자리 는 거저 얻은 게 아닐세.”
궁악비의 두 눈에 잔뜩 힘이 실렸 다. 눈빛으로 설우진을 잡아먹을 기 세였다.
하지만 설우진은 태연한 얼굴로 말 을 이어 갔다.
“얕봐서 그리 말한 게 아닙니다. 솔직히 저도 그들의 힘을 확실히 알 지는 못합니다, 워낙에 그 행사가 비밀스러운 족속들인지라.”
“그럼 이름이라도 말해 보게.”
궁악비가 재촉하듯 묻자 설우진이 마천을 입에 담았다.
챙그랑.
막 차를 끓여 오던 고광호의 발치가 흥건하게 젖었다. 마천이라는 이 름에 놀라 저도 모르게 찻잔을 바닥 에 떨어뜨린 것이다.
“자네, 농담이 지나치군.”
궁악비가 정색하며 눈을 부라렸다.
“왜 농담이라 단정 지으십니까? 전 이미 여러 차례 그들과 도검을 맞댔 습니다.”
설우진은 그간에 마천과 있었던 일 들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단순히 지 어냈다고 보기에는 그 정황이나 설 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이 새끼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 냐?
궁악비의 시선이 고광호를 향했다.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설마 형님을 찾아와서 헛소리를 지껄이겠 습니까?
-아니, 어느 정도여야 믿지. 마천 놈들이 기본적으로 대가리 수로 싸 우는 놈들이기는 해도 그 실력은 비 슷한 부류인 사파 놈들하고 질적으 로 다르다고.
궁악비는 실제로 마천의 무사들과 칼을 맞댄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낭 왕이 되기 전이었는데 패망한 마천 의 잔당들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았 었다.
싸움이 벌어진 곳은 섬서 남단에 자리한 안강이었다.
마천의 무사들은 쌍룡맹에 의해 퇴로가 막히자 결사 항전을 펼쳤다.
수적으로는 낭인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다. 머릿수로 거의 다섯 배 정도가 차이 났다.
한데 그 싸움이 끝나고 낭인전으로 돌아온 낭인의 숫자는 서른 명도 채 되지 못 했다.
-마천 놈들이 무서운 건 손에 쥔 칼이 아니라 독을 품고 있는 그 심 장이야. 놈들에겐 기본적으로 두려 움이란 감정이 결여돼 있어. 해서 상대를 죽이겠단 마음을 먹으면 제 팔 하나쯤은 우습게 내주지.
-그럼 거절하실 겁니까?
-당연하지, 천하의 낭왕이 애새끼의 장난질에 놀아날 순 없잖아.
궁악비가 전음을 통해 자신의 속내 를 드러냈다. 이에 고광호도 동의한 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 다.
“미안하지만 자네의 의뢰는 못 들 은 것으로 하겠네.”
궁악비가 거절의 뜻을 단호하게 내비쳤다.
한데 그가 거절할 줄 알았다는 듯 설우진은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 갔 다.
“이거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새가 슴이시군요, 마천이라는 이름에 이 리 벌벌 떠시다니.”
“……손님이라고 예를 다 했더니 도가 지나치구나.”
“후훗,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에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네놈이 아주 때려 달라 용을 쓰는 구나.”
궁악비의 두 눈에서 사나운 불이 일었다. 낭왕이 되기 전까지 그는 급한 성정으로 낭인들 사이에서 악 명이 자자했다. 오죽하면 움직이는 화탄이란 우스갯소리가 생겨날 정도 였다.
그런데 오늘 설우진이 그 화탄에 제대로 불을 붙여 버렸다.
쿵쿵, 쿵쿵.
궁악비가 설우진 앞으로 걸음을 옮 겼다. 발바닥에 실린 경력이 단단한 자단목을 거칠게 찍어 누르며 그의 분노를 대변했다.
-선배님, 말려 주십시오.
험악해진 분위기에 손동유가 다급 히 고광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고 광호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어깨 를 으쓱거렸다.
-저 인간, 한번 눈이 뒤집히면 대 라신선이 와도 못 말려. 그러니까 여기서 말릴 생각 말고 밑에 의원이 나 대기시켜 둬. 괜히 치료가 늦어 지면 뒷수습하기 더 골치 아플 거 야.
‘하아,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많이 다치든 적게 다치든 그 뒷수습은 모 두 내 몫이 될 터인데.’
손동유는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악비는 설우진의 어깨를 거칠게 틀어쥐 었다.
“네놈이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여기선 내가 왕이야. 너 같은 애송이 하나 밟아 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고.”
“그래서 절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내가 못할 것 같으냐!”
어깨를 틀어쥔 궁악비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뼈마디를 부숴 버릴 기세였다.
한데 울며 매달려야 할 설우진이 되레 웃으며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 어…….’
궁악비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 이 떠올랐다. 손목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려 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분명 힘을 적게 준 것도 아 닌데 말이다.
“그동안 수련을 많이 쉬셨나 봅니 다, 저 같은 애송이한테도 힘에서 밀리시고.”
“다, 닥쳐라! 네놈이 다칠까 봐 일 부러 힘을 아꼈을 뿐이다. 지금부터 제대로 힘 쓸 테니 각오해라!”
설우진의 도발에 궁악비는 이를 악 물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손등 위 로 힘줄이 솟아오르고 그의 입에선 성난 황소처럼 거친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이 자식은 대체 정체가 뭐 야? 내력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힘으로 날 찍어 누르는 거 지? 설마 아까 했던 얘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건가?’
궁악비는 자신이 힘에서 밀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는 천생의 신력을 바탕으로 백 근이 넘는 철부를 휘둘러 왔다. 그 러니 당연히 힘에선 누구한테도 지 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한데 오늘 그 자부심이 와르르 무 너지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손자뻘 되는 청년에게.
-형님, 그쯤하시죠. 더 해봐야 형 님만 우스워집니다.
맞은편에서 고광호가 전음을 보냈 다. 이에 궁악비는 눈을 질끈 감고 설우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네놈의 진짜 정체가 뭐냐?”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 금은 휴관한 황룡 학관의 관도라 고.”
“일개 관도의 실력이 아닌데…”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투자한 시간이 다른데 어찌 그 성과가 같겠 “습니까.”
“결국, 네놈이 잘나서 그렇다는 거로구나?”
“뭐,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젠장, 말할 놈의 하늘, 뭐 저리 싸 가지없는 놈에게 넘치는 재능을 준 게야.”
궁악비는 설우진의 얼굴을 사납게 흘기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 네가 마천 놈들과 원수가 졌다고 치자. 근데 그게 날 고용할 이유가 된다고 보느냐? 마천은 지금 쌍룡맹의 앞마당에서 진을 치고 결 전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한데 황 룡 학관의 일개 관도 따위를 신경이 나 쓰겠느냐?”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닙 니까. 그리고 보아하니 할 일이 없어 방구석에서 곰방대만 물고 계셨 던 것 같은데….”
설우진의 시선이 침상 밑으로 향했 다. 궁악비가 열심히 연초 냄새를 지웠지만 설우진의 예민한 후각을 피해 가지는 못한 것이다.
“크흠, 그래, 좋다. 거금을 주고 날 쓰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대 신 선금으로 약속한 보수의 절반을 내놔라. 네놈 말만 믿고 따라갔다가 돈이 없다고 버티면 나만 손해가 아 니냐.”
한 방 먹으라는 심정으로 궁악비가 선금을 요구했다. 치졸한 방법이었 지만 무력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설우진에겐 통하 지 않았다.
설우진은 과도한 선금 요구에도 인 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주머니에서 금전 쉰 냥짜리 전표를 꺼내 앞으로 건넸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돈도 많구나. 하기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돈 마를 날이 없을 테지.”
“그렇지 않아도 부모님께 항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 잘났다, 잘났어.”
말싸움에서 완전히 밀려 버린 궁악 비는 신경질적으로 전표를 잡아채 가슴팍에 쑤셔 넣었다.
“출발은 언제 할 참이냐?”
“오늘은 잠시 둘러볼 곳이 있으니 내일 오시에 청연각에서 뵙도록 하 지요.”
설우진은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 고 그대로 방을 나섰고 그 뒤를 손 동유가 배웅하겠다고 따라나섰다. 다시 방 안의 두 사람은 아까와 달리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어찌 보느냐?”
궁악비가 묻자 고광호는 턱을 쓰다 듬으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 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정말 상대가 마천이란 것 이냐?”
“네, 일전에 서안으로 일을 떠났던 마훤이 황룡 학관에 사고가 있었다 는 얘기를 제게 전했습니다. 그때 들은 내용 중에 분명 마천의 정찰대 와 황룡 학관의 재학생들이 충돌했 다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궁악비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우진 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진짜 마천 의 무사들과 철부를 맞대게 되는 상 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쫄리십니까?”
고광호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니미럴, 나 낭왕이야! 내가 왜 그 딴 놈들을 겁내!”
궁악비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하지 만 뒤로 감춘 그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역시, 이 고광호의 형님다우십니다. 마천 놈들을 만나게 되거든 마혈부로 그 목을 찍어 버리십시오.”
“그, 그래.”
열의에 가득 찬 고광호의 시선에 궁악비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