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21화 : 거듭되는 위기, 구원 (3)
거듭되는 위기, 구원 (3)
서진용은 사마중달이 말하고자 하 는 바를 단번에 알아챘다. 그리고 그걸 깨닫고는 전에 없이 심각한 표 정으로 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벽에 막혔을 때 나오는 그만의 버 릇이었다.
‘강기를 사물에 머물게 하다니, 설 우진이란 놈 아무래도 품기엔 너무 위험한 칼이야. 그 심지를 제압해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모를까 그게 불가능하다면 일찌감치 쳐내는 게 맞아.’
서진용은 설우진의 재능에 위협을 느꼈다.
마도 제일의 인재로 평가받던 자신 도 강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데는 수 십 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한데 설우진은 약관이 조금 넘는 나이에 원하는 사물에 강기를 담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연스럽게 질투가 일었다.
그가 속이 좁아서가 아니다. 인간 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사마중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그는 서진용이 어떤 답을 할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진용은 척살을 명 했다.
‘설우진, 혼란의 시기에는 넘치는 재능이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개인 적으론 너의 재능을 아끼나 본 천을 위해 너를 죽일 것이다,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고.’
명을 받고 일어서는 사마중달의 두 눈에 진한 살의가 번졌다.
“이곳이다.”
설우진보다 한발 앞서 움직이던 진 추성이 허름한 장원 앞에 걸음을 멈 췄다.
설우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정문으 로 향했다.
문에는 붉게 타오르는 태양과 그것을 관통하는 빛줄기가 그려져 있었 다.
그리고 그 위로 허름한 문패가 걸 려 있었는데 유려한 필체로 통천문 이라 쓰여 있었다.
“설마, 이곳이 통천문……?”
설우진은 문패의 이름을 확인하고 두 눈을 거칠게 비볐다.
그도 수호 가문에 대해 풍문으로만 들어 봤지 실제 그곳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는 수호 가문 주위에 펼쳐진 결 계 덕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마을에 들어설 때 이질적인 기운이 몸에 닿았었지. 그땐 단순히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그게 바로 결계였군.’
“들어가지.”
설우진이 놀란 가슴을 추스르기도 전에 진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갔다. 결계를 믿는 것인지 문근 처에는 그 흔한 문지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통천문이라고? 수호 가문 의 하나라고 보기에는 너무 소박한 규몬데.’
통천문 안으로 들어온 설우진은 자 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통천문의 구조는 단조로웠다. 수호 가문 정도 되면 고루거각까지는 아 니더라도 수십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을 법한데 눈에 보이는 건물이라 곤 정면에 선 삼층 높이의 전각뿐 이었다. 게다가 지은 지 오래됐는지 겉면이 잔뜩 바래 있었다.
“후훗, 예상과 다른 모습이어서 많 이 놀랐나 보군. 통천문은 본시 도 문에서 비롯된 문파다. 해서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지.”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한 거 아 니야? 나무가 삭아서 금방이라도 무 너져 버릴 것 같잖아.”
설우진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나무 부스러기를 가리켰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통천문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건 금강목이다. 일부러 때려 부수지 않는 한 저 통천각이 무너질 일은 없다.”
“금강목이 실제로 존재하는 거였어?”
“존재한다. 어릴 적 이곳에서 금강 목으로 만든 목검으로 수련한 적이 있다. 가벼운 비무였을 뿐인데 당시 에 그 목검을 맞고 사흘 밤낮을 끙 끙 앓았다.”
금강목은 사가의 전설로 전해지는 귀물로 따로 종자가 있지는 않았다. 보통의 나무가 특별한 계기를 통해 금기를 흡수함으로써 금강목으로 변 하는 것이다.
목기와 금기의 결합으로 탄생한 금 강목은 가벼운 무게에도 일반적인 쇠보다 더 단단하고 유연했다.
해서 이 금강목으로 병기를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무당의 송문 고검이 대표적이었다.
‘뭐야, 그럼 저 허름한 건물이야말 로 황금 덩어리잖아, 금강석은 같은 크기의 금보다도 비싸다고 했으니.’
통천각을 바라보는 설우진의 눈빛 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일까, 예고도 없이 통천각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수십 명의 무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뽐내며 밖으로 뛰쳐 나왔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설우진은 살갗에 닿는 날카로운 살기에 이맛살을 사납게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 적형이 널 시험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진추성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은 이 싸움에 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지금 장난해? 억지로 이곳에 데려 온 것으로도 모자라 날 시험하겠다 고?”
설우진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검이 들이쳤다. 수십 개의 검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일사불란
하게 설우진의 빈틈을 노렸다.
‘이 인간이 정말・・・・・・’
설우진은 어쩔 수 없이 천뢰도를 뽑아 들었다.
아직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상황이 었지만 가만히 서서 검을 맞을 수는 없었다.
카카캉.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 왔다.
설우진은 빠른 손놀림으로 침착하 게 검들을 하나씩 쳐냈다. 사방이 포위되어 운신의 폭이 좁아진 상황 이었지만 그는 절묘하게 거리를 재 며 공격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문제는 체력이었다. 혼자서 수십 개의 검을 받아 낸다는 건 그 만큼의 체력이 소진되는 걸 의미했 다.
‘비, 빌어먹을, 가슴이 터질 것 같잖아.’
숨이 가빠 왔다. 어지간히 움직여 선 지치지 않는 그인데 이놈의 검진 은 자꾸만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냥 칼을 놔 버릴까? 내가 필요 해서 부른 인간이 날 죽이려 들지는 않을 거 아니야.’
설우진은 순간적인 유혹에 휩싸였 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전직 왕이 스스로 싸움을 포기 한다는 게 말이 돼? 죽이 되든 밥 이 되든 이 칼로 결판을 내는 거 야.’
설우진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났다.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 다.
한데 막 작정하고 천뢰도를 휘두르려는 순간 쉴 새 없이 압박을 가하 던 자들이 뒤로 물러났다.
때문에 천뢰도는 다소 허무하게 허 공을 갈랐다.
“쓸데없이 욱 하는 건 여전하구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우진의 고개가 자연스레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일전에 헤어졌던 적사호가 서 있었다.
“크큭, 적 학사님! 손님을 이리 대 해도 되는 겁니까?”
“넌 손님이기 이전에 내 제자다.”
“니미럴, 황룡 학관 문 닫은 지가 언젠데 제니까! 더욱이 저 인간을 시켜서 억지로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설우진은 불 같이 열을 냈다.
한데 적사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어 갔다.
“방금 전에 네가 경험한 것은 마천 이 자랑하는 쇄검진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검진은 연환해서 들 어가는 검들이 쇠사슬처럼 상대의 몸을 묶는다. 한번 걸려들면 급속도 로 체력이 소진되기 때문에 진이 발 동하기 전에 무조건 그 시작점인 축 을 부숴야 한다.”
“그딴 걸 왜 나한테 알려 주는 겁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냐? 넌 이미마천과 끊을 수 없는 악연을 맺었다. 해서 넌 좋든 싫든 마천과의 싸움에 나서야 한다!”
통보에 가까운 적사호의 말에 설우 진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그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 다. 귀마들이 나선 시점부터 너무 깊이 엮였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면에 나서 서 싸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 다.
마천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마천과 의 싸움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어서 였다.
“마천과의 악연은 저 혼자서 풀 테니 신경 끄십시오.”
“놈들을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정 쫄리면 도망치면 그만입니다. 쌍룡맹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있는 마천이 제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 진 않을 거 아닙니까.”
설우진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런데 적사호의 반응이 묘했다. 그의 답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표 정이 너무 담담했다.
‘저 인간이 왜 저러지?’
설우진은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적사호의 입에 서 반갑지 않은 내용이 흘러나왔다.
“과연 네가 도망친다고 마천을 떨쳐 낼 수 있을까? 놈들은 긴 세월여러 이름으로 강호에 존재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씨앗을 뿌렸지.”
“그 씨앗이 뭐 어쨌다는 겁니까?”
“마천이 진정으로 무서운 건 그 씨 앗들 때문이다. 마천이 씨앗에 싹을 틔우는 순간 중원 전역은 혼란의 도 가니에 빠질 것이다.”
‘당최, 뭔 소리를 해 대는 거야?’
설우진은 적사호의 얘기가 전혀 이 해되질 않았다.
전생에서 그는 씨앗에 관한 얘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강호의 중심에 나서기 시작한 시기 가 마천 쟁투가 끝나고 한참 뒤였기 때문이다.
“마천의 시작은 종교였다. 그때까 지만 해도 힘을 갖추기 전이었다. 한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마천은 종교로서의 본질을 잃고 점 차 변질되기 시작했다. 민초들을 구 원하겠다는 종교적 신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끝없는 탐 욕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 변화에도 민초들은 마천에 대한 믿음을 저버 리지 못했다. 희망이라는 감정에 세 뇌되어 버린 거지.”
“그 말은 중원 곳곳에 아직도 마천 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겁니까?”
“세력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네 말대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마천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 왜 마천은 그들을 불러내지 않는 겁니까? 정면에서 쌍룡맹의 시 선을 끈 뒤 그들로 하여금 쌍룡맹의 뒤를 치게 하면 손쉽게 천하를 도모 할 수 있을 텐데.”
“놈들 입장에선 아쉬운 일이겠지만 마천을 추종하는 무리는 대부분 무 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들이다. 무력 대의 용도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 지. 하지만 사람을 쫓는 거라면 어 떨까? 그들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 이라면 어디에든 존재한다. 심산유 곡에 들어간다면 모를까 결국엔 그 들의 눈에 발각되고 말 것이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수였 다.
최악의 경우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 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적사호의 말대로라면 도망치는 건 답이 될 수 없었다.
“설우진, 네게 강호를 위해 희생하 라는 말은 않겠다. 그저 네 가족과 친인들을 위해 맞서 싸워라. 그게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적사호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그 이후 둘 사이엔 숨 막히는 침 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한참 뒤 설우진의 입이 열렸다.
“니미럴, 그게 최선이라면 싸워야지 별수 있습니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뭐냐?”
“정식으로 계약을 했으면 합니다.”
“계약?”
“네, 특급 낭인으로서 통천문과 계 약하고 싶습니다.”
“……결국 공짜로는 싸워 줄 수는 없다?”
적사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이에 설우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 를 끄덕여 보였다.
“보다시피 본 문은 가난하다. 밖에 사업체를 한두 곳 운영하고 있지만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삼시 세끼 챙겨 먹는 것이 고작이다.”
적사호는 통천문의 재정 상황을 설 명하며 우회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 혔다.
하지만 설우진은 쉬이 물러서지 않 았다. 원치 않게 전쟁에 나서게 된 것도 억울한데 무료 봉사까지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이렇게 하는 게 나중에 뒤끝이 생 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꼭 돈을 이 곳에서 마련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 까.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멀지 않은 곳에 마르지 않는 곳간이 있을 겁니 다.”
설우진이 비유적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설마, 쌍룡맹?”
적사호의 눈이 커졌다.
“네. 함께 배를 타기로 한 처지에 돈이 없다는데 설마 외면하겠습니 까?”
“무슨 명분으로 돈을 달라고 한단말이냐?”
적사호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반문했다.
“그거야 적 학사님께서 고민하셔야 하는 부분이지요. 저한테 그것까지 알려 달라고 하시는 건 직무유깁니 다.”
설우진은 방법만 제시하고 나 몰라 라 했다.
‘하아, 저놈과 함께하기로 한 게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군.’
적사호는 속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맘 같아선 그냥 다 엎어 버리고 싶은데 지금 그의 입장에서 설우진 은 절대 버릴 수 없는 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