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9권 – 15화 : 범 아가리 속으로 (2)

랜덤 이미지

낭왕전생 9권 – 15화 : 범 아가리 속으로 (2)


범 아가리 속으로 (2)

그들이 군사전을 씹어 대는 동안 설우진은 근처의 번화가로 향했다. 날이 져서 그런지 번화가는 한산했 다.

불이 켜져 있는 곳은 늦게까지 손 님을 받는 객잔과 기루뿐이었다. 설우진은 불 켜진 객잔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임에도 안쪽에는 사람들 이 꽤 많았다. 이색적인 건 그들 대 부분이 허리에 병장기를 차고 있다는 것이다.

설우진은 일부러 구석진 곳에 자리 를 잡았다.

“손님, 뭘로 드릴까요?”

“죽엽청 한 병하고 동파육.”

주문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설우진은 홀로 자작 하며 주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 우리도 마천에 합류하는 건 가?”

“오늘 아침에 들은 얘길 벌써 까먹 은 겐가.”

“니미럴, 내가 정말 그걸 몰라서 묻는 것 같은가? 하도 어이가 없어 서 그러네!”

또래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신세 한탄을 늘어놨다.

그들은 서안 시내 외곽에 자리한 고검문의 문도들이었다.

고검문은 화도방과 비슷한 규모의 문파로 화산파의 속가제자였던 정이 설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됐다.

한데 지금의 고검문은 그 기질이 전과 비교해 확연히 달라졌다. 이는 전대 문주가 무공 수련 중에 갑작스 레 비명횡사하면서 시작된 변화였 다.

그에겐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무공에는 관심 없고 계집질에만 정 신이 팔려 있는 망나니였다. 몇 번 이고 아들의 성정을 고쳐 보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 그 망나니가 문주 자리를 물려받았다.

다른 자식이 있었다면 문도들도 그 쪽을 밀려고 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자식은 그 망나니 아들뿐이었다.

“후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닐 세. 구파의 후예를 자처해 왔던 우 리 고검문이 마천과 뜻을 함께하다 니… 전대 문주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저승에서도 편히 눈을 감 지 못할 걸세.”

“그걸 누가 모르나. 한데 누가 그 고집을 말리겠나? 문의 제일 어른이 신용 장로님의 조언도 한 귀로 듣 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데.”

청년들의 신세 한탄은 깊어져 가는 밤과 함께 계속 이어졌다.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마천의 소굴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 군.’

청년들 너머에서 설우진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두 사람의 대화 에서 황룡학관으로 숨어들 방법을 찾은 것이다.


탁탁탁탁.

사마중달의 오른손 검지가 초조하 게 탁자를 두들겼다.

그 모습에 하우연은 굳은 표정으로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연아, 네 생각은 어떠냐? 놈이 정말 제 친구를 버린 것이라 보느냐?”

사마중달이 귀기 어린 눈빛으로 하 우연을 바라봤다.

그는 최근 들어 설우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이름을 거론할 정도였다.

“사부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둘의 사이는 각별합니다. 어떤 식으 로든 남궁벽을 구하기 위한 움직임 을 보일 테니 그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하우연이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사마중달이 벼 락처럼 달려들어 하우연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네놈이 감히 내게 충고를 하는 것이냐!”

“크, 크윽, 주제넘었다면 죄, 죄송 합니다. 저, 전 그저 사부님께서 너 무놈에게 신경을 쓰시는 듯해서…….”

하우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 게 말을 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 었는지 사마중달이 손에서 힘을 뺐 다.

“콜록, 콜록.”

숨통이 트이자 하우연은 힘겹게 숨 을 몰아쉬었다.

“크흠, 미안하게 됐다. 요즘 들어 내가 신경이 많이 예민해진 듯하구나.”

“아, 아닙니다. 전 괜찮으니 괘념치마십시오.”

사실 하우연은 이전에도 여러 번 오늘과 비슷한 봉변을 당한 적이 있 었다.

사마중달은 스스로가 최고라는 강 박관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뜻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 번씩 그 안에 쌓인 광기를 풀어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와 가장 오랫 동안 붙어 있던 하우연이 그 희생양 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만 나가 보거라, 혼자 있고 싶으니.”

제자의 얼굴을 보기 민망했는지 사마중달이 하우연을 밖으로 내보냈 다.

홀로 방 안에 남게 된 그는 서랍 안에서 한 장의 초상화를 끄집어냈 다. 그 위에는 설우진의 얼굴이 정 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설우진! 대체 언제까지 날 기다리 게 할 참이냐? 네가 늦게 오면 올 수록 네 친구는 하루하루 새로운 지 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하고 싶다 고?”

수려한 외모의 청년, 정이건이 거 만한 자세로 팔걸이에 턱을 괴고 정면에 마주 선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가 정이건을 찾아온 건 점심 무렵이었다.

정이건은 지난밤에도 친우들과 함 께 기루에서 거나하게 한잔 걸쳤다. 자신을 옥죄고 있던 아버지란 존재 가 사라지고 나자 아주 제 세상이 열린 것이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송문기라 합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이곳 태생?”

“이곳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스무 살 무렵에 수련을 핑계 삼아 전국을 떠돌며 무공을 쌓다 얼마 전에 이곳 으로 돌아왔습니다.”

“실력은 어느 정도지?”

“옆에 두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 는 됩니다.”

송문기가 자신 있게 답했다.

하지만 정이건은 순순히 그 말을 믿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주변에는 말뿐인 사내들이 많았다. 입으로는 일 검에 바위도 쪼갠다고 나불대는데 실제로 실력을 확인해 보면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자신 있다면 이걸 잘라 봐.”

정이건은 책상에 놓여 있던 벼루를 사내의 앞으로 디밀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벼루를 본 송문기가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잠시 후, 한 줄기 벼락이 벼루로 떨어졌다. 송문기의 화려한 발도술 이었다.

사각.

벼루가 시원하게 반으로 갈라지자 순간 정이건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 다.

‘이, 이 자식, 진짜배기잖아. 문 내 에서도 이만한 실력자는 용 장로 외 에는 없는데.’

정이건은 흥분에 휩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문주의 자리 를 이어받기는 했지만 그는 아직 문 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 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의 실력이 문주라는 이름에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재능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정이건 은 어린 나이에 주색잡기에 심취해 수련을 게을리했다. 문의 어른들이 몇 번이고 붙잡아 그 태도를 고쳐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크흠, 실력이 제법이군.”

“아닙니다. 괜히 부끄러운 재주를 뽐낸 것 같아 송구할 따름입니다.”

“과공은 비례라 했다. 너 정도 실 력이면 충분히 과시하고 다녀도 된 다. 한데 왜 하필 우리 문을 택한 거지? 그 정도 실력이면 더 나은 곳을 찾아가도 충분히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이건이 한 가닥 의심을 내비쳤 다.

솔직히 고검문은 구파의 하나인 화 산을 뿌리로 두고 있다는 것을 제외 하면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문파 다. 하니 그의 의심은 어찌 보면 당 연한 것이었다.

“실은 일전에 전대 문주께 구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막 강호에 출 도한 시기였는데 젊은 혈기에 만행 을 부리는 사파의 파락호들과 시비 가 붙어 큰 싸움으로 번졌었습니다. 처음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파락 호들은 취해 있었고 그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데 싸움 막바지에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파락호들이 대거 합류했습니다. 열심히 저항해 봤지만 중과부적이더 군요.”

‘평소 오지랖이 넓다고 아버질 욕 했었는데 마냥 욕할 것도 아니었군. 그 오지랖이 이런 복덩이를 안겨 줄 줄이야.’

정이건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 다.

그의 곁에는 쓸 만한 고수가 없었 다. 다들 놀기만 좋아할 뿐 검술 수 준은 중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 차에 자신보다 강한 이가 찾 아왔다, 아버지와의 인연을 내세우 며, 그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문은 곧 마천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거야.”

“그게 무슨……?”

“수련만 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사 정에 어두웠던 모양인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이제 곧 쌍 룡맹의 시대는 가고 마천의 시대가 올 거야. 쥐뿔도 모르는 놈들은 마 천의 야욕이 결국 쌍룡맹에 의해 꺾 일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건 다 개소리야.”

정이건은 고검문이 마천과 함께해 야 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송문기는 가타부타 대답 없이 묵묵 히 그 얘기를 경청했다.

잠시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저놈은 아버지처럼 꽉 막힌 인간이 아니어야 할 텐데.’

정이건은 초조하게 송문기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 을 뗐다.

“젊은 분이 혜안이 있으시군요. 저 도 이번 전쟁은 마천 쪽에 승기가 있다고 봅니다.”

정이건의 바람은 통했다.

송문기는 정이건의 의견에 적극 동 조하며 힘을 보탤 것을 약속했다. 정이건은 뛸 듯이 기뻐하며 축하연을 열겠다며 바쁘게 밖으로 걸어 나 갔다.

“듣던 대로 정신머리가 가출한 놈 이군. 지금 마천에 합류해 봐야 화 살 받이가 될 게 뻔한데 천둥벌거숭 이처럼 설쳐 대는 꼴이라니.”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송문기가 아 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읊조렸 다.

사실 송문기는 설우진이 정이건에 게 접근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이다.

지난밤에 고검문의 제자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설우진은 역용술로 완 벽하게 외모를 바꿨다. 자주 쓰지 않아 어색했지만 애송이 하나쯤 속 여 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자, 자, 밖으로 나가자고.”

환영회 준비가 끝났는지 밖에 나갔던 정이건이 방으로 돌아와 설우진 의 손을 잡아끌었다.

설우진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정이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잔치가 벌어진 곳은 후원에 자리한 전각이었다.

전각 주변에는 작은 연못과 함께 형형색색의 기화요초들이 흐드러지 게 피어 있었다.

절로 술맛이 돌게 만드는 풍광이었 다.

전각 위로 올라서니 상다리가 휘어 질 정도로 푸짐한 술상이 차려져 있 었다.

“우리 앞으로 잘해 보자고. 내 말만 잘 들으면 본 문이 반석에 올라갔을 때 부문주 자리를 내주지.” 

정이건은 술잔을 가득 채워 건네며 공수표를 남발했다. 그 개소리를 듣 고 있자니 속에서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왔지만 설우진은 꾹 눌러 참 았다.

끼익.

그의 인내심이 바닥으로 치닫고 있 을 때 예고도 없이 불청객이 찾아들 었다.

신선 같은 풍모의 노인이었다.

한데 단단히 화가 난 듯 두 눈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문주!”

노인이 대성일갈을 질렀다.

정이건이 반쯤 눈이 풀린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구,이게 누구십니까? 우리 고검문의 대들보, 용 장로님이 아니십니까!”

정이건이 격하게 노인을 반겼다. 노인은 전대 문주의 사후에 문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는 용성하였 다. 그는 올해로 지천명에 해당하는 나이로 고검문 유일의 장로이자 최 고수다.

“문주, 대낮부터 이게 무슨 짓입니 까! 문도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용성하는 신랄하게 정이건을 나무 랐다.

“용 장로, 좋은 인재가 들어와 가 볍게 축하주 한잔 나눈 것뿐인데 뭘 그리 열을 내시오? 괜히 좋은 분위 기 깨지 말고 돌아가시오.”

정이건은 짜증난다는 어투로 대꾸 했다.

하지만 용성하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형국 입니다. 어찌 문주가 되어서 이리 태평하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차피 마천이 이기는 싸움이오. 전에도 얘기했던 대로 우리 고검문 은 마천과 함께할 터이니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 접어 두시오.”

둘 사이에 치열한 설전이 오갔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용성하의 얼굴 빛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갔다.

‘문주,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네. 이건이 녀석, 내 말은 아 예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네. 자네 한테는 미안한 말이네만 이젠 힘으 로라도 녀석을 말려야겠네.’

뭔가 결심이 섰는지 용성하는 허리 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허리에는 고색창연한 빛깔의 검 한 자루가 걸 려 있었다. 일평생을 함께해 온 검, 비연이었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