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6화
여러분. 장래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아, 이건 여러분들의 장래가 궁금해서 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기대할 걸 하세요.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 장래에 별 관심 없잖아요.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면 곤란하죠. 질문을 한 까닭은 여러분들이 장래에 대해 생각하긴 하는지 궁금해서입니다.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냐고요? 예. 있습니다. 예언자가 그러했지요. 어느샌가 익숙해진 솔베스의 어느 샐녘, 예언자는 자기가 철든 이후로 미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원인은 예언에 대한 그의 혐오감이었지요. 미래를 아는 것을 싫어하다 보니 미래 자체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그날 아침 예언 자는 노화와 죽음, 남아 있는 시간, 죽을 때까지 사는 것과 더 살지 못해 죽는 것의 차이 등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를 고려하면 도저 히 조숙하단 소리는 못 듣겠네요.
그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까요? 어떤 머리카락 때문이죠. 그 머리카락은 예언자의 옆에 있는, 거대한 소라를 연상시키는 똘똘 말린 이불 더미에서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가발? 해학 취미시군요. 잘린 머리? 엽기 취미시군요. 이불더미 속에 있는 건 그냥 인간입니다. 여자고, 그림을 잘 그 리죠. 홀로 오롯한 존재의 미학에 관심이 많고, 자는 모습을 보건대 새벽 한기를 싫어한다는 특징도 있는 것 같군요.
그리고 어젯밤까지 예언자의 손끝에 묻은 꽃가루인 양 처신하던 여자였습니다. 바람만 불면, 손만 좀 툭툭 털면 떨어져나갈 태세였어요. 예언자는 화가가 오늘도 똑같이 행동하리라 확신했어요. 문제는 예언자가 더 이상 그런 태도에 만족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지요. 예언자는 화가를 손끝에 묻은 꽃가루가 아닌 손에 쥔 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려면 꽃병이 필요할까요? 화분이나 정원?
화가가 갑자기 몸을 뒤척였습니다.
이불이 이리 저리 움직이다가 화가의 등이 드러났습니다. 동쪽으로 난 창문에서 흘러들어온 샐녘빛이 화가의 등에 부딪치더니 액체처럼 변했지요. 예언자는 희광에 흠뻑 젖은 화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예언자는 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거의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예언자는 똑바로 편 집게손가락을 화가의 등에 가져갔습니다. 예언 자는 글을 썼지요. 왼쪽 겨드랑이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줄을 바꿔서, 왼쪽 옆구리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줄을 바꿔서, 왼쪽 허리에서 오른쪽 허리 로.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이지만 손가락으로 쓰는 것이라 예언자는 큼직큼직하게 썼고 화가의 등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세 줄이나 필요했지요. 화가의 오 른쪽 허리에 마침표를 찍은 예언자는 손을 끌어당겼습니다. 그때 화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읽어봐.”
“나의 내일로 너의 내일을 사고 싶어.”
화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깨는 빠르게 들썩였습니다. 화가는 예언자에게 등을 보인 채 기지개를 쭉 폈습니다.
“뒤로 돌아봐.”
예언자는 시키는 대로 화가에게 등을 보인 채 침대에 걸터앉았습니다. 발바닥이 조금 차가웠지만 예언자는 허리를 꼿꼿이 펴는데 더 집중했지요. 곧 화가의 손가락이 다가왔습니다. 물감 찌꺼기가 남지 않도록 바싹 자른 손톱이 예언자의 등을 기분 좋게 긁었지요. 예언자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습니 다.
글을 다 쓴 화가는 마침표 대신 예언자의 등을 살짝 꼬집었습니다. 예언자는 왜 화가가 읽어달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등은 둔한 편이 라 손가락으로 쓴 글을 해석할 수는 없지요.
“읽어줘.”
“싫어, 싫어.”
화가는 낄낄 웃으며 침대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예언자의 등에 쓴 글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언자의 온갖 재촉과 장난 섞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화가를 보낸 예언자는 아침 식사 뒷정리를 하고는 서둘러 일터에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날은 좀 특별한 업무가 있었기에 빨리 나가서 여러 준비 를 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