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42화
결국 왕비는 일 년에 두 번으로 제한했던 공개 예언 중 한 번을 당장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위험할 정도였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돌아온 예언자가 계속 숨어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죠. 예언자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공개적으로 예언을 한 다는 예고와 함께 그 날짜가 고지되었습니다. 왕비는 공연 홍보 담당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지요. 그리고 대단한 기대감과 성원을 표현한 사람들 덕분에 홍보 담당의 기쁨도 조금 느꼈습니다.
솔베스를 두고 바이서스와 전쟁을 벌였던 적국발탄에서는 공황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약탈과 방화가 일어났다는 말은 아니에요. 발탄 사 람들, 특히 그 수뇌부들이 정신적 공황을 느꼈지요. 전대미문의 예언자가 바이서스를 위해 예언한다면, 좀 조야한 일이지만, 간단히 ‘바이서스가 가 공할 병기를 획득했다.’고 정리해 버리면 되는 일이죠. 긴장하거나 두려워 할 일은 맞지만 혼란스러워 할 일은 아닌 거죠. 하지만 공개 예언이라는 것 은 한 때 바이서스의 왕비를 당혹시켰던 것처럼 그들을 심히 당혹시켰습니다. 발탄의 촉각들이 즉시 바이서스 임펠로 집중되었지요.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선 반응이 한층 더 격렬했습니다. 드래곤 레이디는 바이서스 임펠에 재난을 선사할 수 있다는 뜻을 반복해서 피력했죠. 두렵게 도 그녀가 거론하는 재난이라는 것은 전부 정치학이나 건축학이 아닌 생물학이나 천문학적인 재난이었지요.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아일페사스의 격노에 찬 선언을 듣는 이는 이루릴뿐이었어요.
“그런 일이 싫다면 그 녀석을 도로 데려와! 전에도 탈출시켰잖아!”
“혈연의 그물에서 사람을 빼내는 건 유피넬과 헬카네스에게도 불가능해요. 의절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바뀌진 않죠. 침착해요. 그도 이제 당신과 시에프리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에겐 바이서스의 이득에 대해 더 신경 쓸 이유도 생겼어요. 함부로 바이서스에 당신과 시에프리너의 분노를 불러오진…….
“잊었어? 솔베스를 점령하고 있는 것은 바이서스가 아니야! 발탄이야! 그 녀석은 말 한 마디로 시에프리너와 발탄이 싸우게 할 수도 있어! 그러면 바 이서스로서는 인간들 말마따나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되지. 당신 말대로 그 예언자가 바이서스의 이득을 더 신경 쓰게 되었다면, 사태는 더 위험한 “거야!”
“나는 둘을 거론했어요. 당신과 시에프리너라고 했죠. 물론 바이서스는 시에프리너와 발탄을 싸우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둘 중 어느 쪽이 이겨도 치명상을 입을 테니 바이서스는 뒷정리만 하는 것으로 둘 모두를 제거할 수 있다는 식의 어리석은 생각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강대 한 드래곤 레이디 당신이 남아요. 당신의 분노를 대처할 방법은 없는 거죠. 예언자는 그걸 알 거예요. 내가 다시 그와 접촉해 볼 테니 기다려 봐요.”
하지만 이루릴은 예언자와 쉽게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이루릴의 침입을 경험한 후 왕비는 바이서스 임펠의 가장 오래된 창고와 비밀 금고에서 폐품 처럼 보이는 물건들을 꺼냈거든요. 그것은 현대인들의 눈에는 장식적 가치도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었기에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고대의 권능을 부리 는 이들에겐 상당한 피해나 제약을 줄 수 있는, 그런 무서운 내력을 가진 보물들이었습니다. 핸드레이크와 솔로처, 아프나이델의 나라였던 바이서스 의 궁성에 그런 물건들이 있는 것은 당연했죠. 이루릴이 애초에 예언자와 직접 대화하는 대신 나방을 보내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결국 이루 릴은 예언자가 공개 예언을 하기로 한 날이 올 때까지 예언자와 변변히 말도 나눌 수 없었습니다.
기대와 불안, 경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열기 속에서 그 날이 다가왔습니다.
예언자는 품위 있는 옷차림을 한 채 베란다에 나타났습니다. 음악이나 행진, 춤 등이 없어서 왕자가 세상에 공개되던 그 날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 만 몰려든 인파의 수는 대단했습니다. 장식적 요소들이 없었기에 분위기가 더 엄청났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두서없이 떠들거나 킥킥거리던 사람들 이 동시에 바로 그 순간’임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을 땐 정말이지 그 자체만으로 신비 체험에 가까웠습니다.
사람들을 죽 훑어보던 예언자의 시선이 멈췄습니다. 그의 입이 열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