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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47화


시에프리너가 말했어요.

“드래곤 라자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에 이루릴은 잠깐 동안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 침묵은, 세월 때문에 정제되고 산문화되었지만 아직도 그녀에게 시적인 반 응을 이끌어내는 오래된 추억들 때문이기도 하죠. 예. 이루릴은 드래곤 라자들이 실제로 땅을 걷고 하늘을 향해 웃던 시절을 알고 있었죠. 일 년 내내 계속되는 이루릴의 추도에는 드래곤 라자를 위한 것도 있었어요.

“드래곤 라자라고 했나요?”

“그래. 옛날엔 그런 인간들이 있었다면서? 드래곤과 인간들을 중재해 주는 이들 말이야.”

“드래곤 라자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어설픈 비유를 쓴다면 그들은 탁자였지요. 양쪽에 드래곤과 인간이 마주앉을 수 있는 탁자가 끼어들어 서 회담을 잘되게, 혹은 잘못되게 하지는 않아요.”

“어쨌든 지금은 탁자도 없잖아.”

이루릴은 그녀의 눈엔 어리게만 보이는 드래곤을 지그시 바라보았습니다. 드래곤 라자가 사라진 후 태어난 세대인 젊은 시에프리너는 인간이 파리 에게 품는 감정 정도만 인간에게 품고 있었던 드래곤이었죠. 인간이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을 거예요.

이루릴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혹을 떠올렸습니다. 시에프리너가 그녀의 영토에 솔베스라는 개척지가 생기도록 내버려둔 것은, 물론 수면기인 척 위장하기 위해서지만, 보다 무시무시한 이유도 있었죠.

“시에프리너. 당신은 출산 직후에 먹을 것을 쉽게 구하고 싶었죠?”

“그걸 가지고 나를 비난할 건가? 내가 오라고 부른 적도 없어. 인간들이 제멋대로, 심지어 저희들끼리 죽여가면서 내 영토에 들어온 거잖아. 저희들 끼리도 그런 대접밖에 못 받는데 나한테 좋은 대접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겠지.”

“예. 그래서 당신을 적극적으로 비난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들에게 경고하여 당신이 잠들어 있지 않음을 노출시켜야 된다고도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래서 때가 오면 당신 대신 솔베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할 작정이었죠.”

이루릴은 시에프리너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무시하며 계속 말했어요.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왜 마음이 바뀌었냐는 거예요. 왜 인간들과 탁자를 놓고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 거죠?”

“내가 불안에 떨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건 이미 인정했는데.”

“아니오. 당신이 불안할 리는 없죠. 그 예언에 따르면 당신의 자식은 무사하게 태어나니까요.”

시에프리너의 얼굴에 짧은 순간 분명한 기쁨이 떠올랐습니다.

“예언자는 가장 뜨거운 불을 뿜는 누이와 천 년 동안 세계를 제패할 딸도 이야기했지. 아직 첫째를 낳지도 않았는데 둘째 아이와 손녀라니.”

이루릴도 예의바르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예언은 바이서스의 파멸을 말하는 것이지만 당신 혈통에 내려진 축복이기도 해요. 그 예언을 믿는다면 인간은 이제 당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아 요. 그런데 왜 인간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게 된 거죠?”

시에프리너는 엄격하게 말했습니다.

“이루릴 세레니얼. 당신은 내 아버지와 함께 세상을 걸었고 심지어 드래곤 레이디의 탄생도 기억하지. 그토록 나이를 먹었다면 단명한 자들이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지겠어?”라고 말하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다는 것을 잘 알 거야. 전쟁이 벌어질 테지? 나는 내 아들이 바이서스의 파괴자가 되는 것 엔별 유감이 없어. 하지만 내 아들이 탄생하는 것만으로 다른 드래곤들에게 빚을 지게 되는 것은 달갑지 않아. 그래서 드래곤 라자가 있었다면 내 아 들이 바이서스와 반목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 거야. 하지만 드래곤 라자는 이제 없지.”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 드래곤 라자의 역할을 할 생각은 없나요? 당신 자신이 당신 아들과 바이서스를 중재할 생각은 없나요?” 시에프리너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예언에 도전하라는 건가? 바이서스가 나나 내 아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내 아들이 바이서스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막겠다고 약속하라는 “거야?”

“예. 당신에게 그럴 의도가 있다면 내가 돕겠어요.”

시에프리너는 딱하다는 듯이 말했죠.

“어리석군. 내가 성공한다면 그 예언은 틀린 것이 되겠지. 그렇다면 그 예언이 동시에 약속하고 있는 내 후손의 안녕 또한 틀린 것이 될 테고. 내가 왜 선물을 걷어차야 하지?”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그래도 이루릴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과거의 모든 전쟁, 그리고 그녀가 가까스로 막지 않았다면 일어났을 전쟁들까지 통틀어 봐도 최악의 전쟁이 될 것이 뻔했어요. 그런데 희망은 보이지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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