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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91화


며칠 전 만해도 그의 입장은 항상 반대쪽을 점하고 있었다.
운명은 이리도 손쉽게 위치를 바꾼 채 인간을 조롱한단 말이었던가?
혈수천자는 손안에 쥐고 있는 두 개의 륜을 힘주어 잡았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에
거부할 수 있다면, 비참한 삶일지언정 구걸하여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그리하고 싶었다. 그의 입을 비집고 메마른 웃음이 흘러 나왔다.

푸흐흐흐자신이 지금껏 죽여왔던 사람의 수 역시나 결코 적다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런 행위자체를 지극히 당연시 해 왔다. 그가 가장 경멸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나약함이었고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이라면
언제든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었다. 정작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되고 보니 죽어가던 자들의 눈빛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도 같았다.
잠시의 감상이 그를 이 위기에서 구출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그의 입에서는 마지막 죽음의 형태를 결정짓는 명령이 터져 나왔다.

천황부의 전사들이여! 장렬하게 산화하자.저 놈을 죽여라!
라는 따위의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정도로 눈앞의 괴인은 도저히 파괴할 수 없는
철벽처럼 여겨졌고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다가왔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저히 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젖어
어찌할 수 없어하던 무기력한 자들의 눈빛이 아닌, 죽음마저도 초월한 듯한
맹렬한 살기와 투기가 힘차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천마를 향해 몸을 솟구쳐왔다. 검과 도를 하나로 하여
전력을 내뿜는 그들의 기세는 사뭇 대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천마는 조롱이 아닌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호, 이제야 조금 무사들답구나.
너희들의 마지막을 나 또한 성의를 다하여 장식해주마.’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어울리지 않는 나직한 웅얼거림이 천마의 입에서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의 몸이 모로 서는가 했더니 손을 앞으로 쭈욱 내 뻗었다.
그의 손은 점차로 커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고
실제로는 그의 손을 감싸고 강기가 물고기의 비늘처럼 벗어지고 있었다.
눈앞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천황부의 고수들을 향해 천마의 손에서 비롯된
수강은 소리도 없이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쓸어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빛의
정령들이 한꺼번에 출몰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퍽퍽퍽닿는 것은
그 무엇이든 뚫어버리는 위력은 보아도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피할 수도 없는 것이
자신들을 향해 전 방위를 메우며 쏟아지고 있었으니 어디로 몸을 빼낸단 말인가?
결국은 더 강한 힘으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자신들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다.

으악

처절한 비명을 토해내는 흑의인들의 몸은 터지고 갈라져처참지경을 연출했다.
혈수천자와 천마의 뒤에 시립해 있던 일백 마황검위대검사들 역시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의 흑의인들 중 온전히 고개를들고 서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천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혈수천자에게로 시선을 고정해 갔다.

`어서 덤비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자신에게 한 말이 분명하건만 그는 마치 딴 세계에서 울려 나오는 그래서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고 싶었다. 정말이지 저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못 마땅했고
하필이면 이런 자리에서 맞닥뜨린 것도 불운이라 여겨졌다. 이제 살아 남은 자라고는
자기 하나밖에 없음을 절감하는 것이 왜 이리 힘이 드는 일인지.

그때 문득 아까 괴인이 뱉어내었던 말이 섬광처럼 뇌리에 떠 오른 것은 정말이지
그가 생각해도 천운이라고 생각되었다.

`한가지 묻겠소.’

혈수천자의 침착한 음성은모두에게 뜻밖으로 여겨졌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며 공격해오리라 생각했건만
그는 의외로 태연했으며 마치 오랜 지기에게라도 하는 듯한 대화를 시도하고 있지 않은가?

뭐냐?

천마는 귀찮다는 듯이 짧게 내 뱉었다.

`아까 분명히 하나만 빼고 모두 죽이라고……하지 않았소?’

천마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놈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 놈도 쥐새끼였군. 어떻게된 게 진정한 무사를 보기가 이렇게 힘이 드나?
죽는 것이 두렵다면 이 거친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말 것이지……
에잉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야.’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지금 이 중에 살아 남은 사람은 나 하나인데…… 그럼 날 살려주겠단 말이요?’

원래 천마가 하나만 빼고 모두 죽이라고 한 것은 한 놈을 살려 알아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것인데 놈은 용케도 그 말을 걸고넘어지며 생명을 구걸하고 있는 셈이었다.
천마의 푸른 얼굴이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 살고 싶나?’

세상에 죽음을 앞에 두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혈수천자 역시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입에서는 당연히 그의 내심을 반영하는 말이 다급하게 흘러 나왔다.

`그렇습니다.살고 싶습니다.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을 금세 뒤바뀐
그의 어투에서 쉽게 알 수 있었다. 천마는 경멸의 눈빛으로 혈수천자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너는 나에게 복수를 하고 싶지 않나? 기회를 주지. 네 수하들의 죽음을 이대로 묻어 버린다면
아마도 원혼이 되어서라도 너를 괴롭힐 것 같은데……

절 살려 주십시오.전……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뱉은 약속은 지키실 분이라 여겨지는군요.

허……

천마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옥기린 역시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삶을 구걸하다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고 그것을 보자
더욱 상대를 죽이고 싶어졌다. 조사님만 아니라면 저 놈을 당장 쳐죽여 버리고 싶었다.
좀 전의 격돌 때 사정을 보아 줬던 것이 이제야 후회되기 시작했다.

좋다. 살려주지.

천마의 그 말에 각기 다른 반응들이 표출되었다. 혈수천자의 얼굴은 희색이 만연했으며
옥기린 등의 천마교 고수들의 얼굴엔 의외라는 눈빛과 말도 안 된다는 심경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대신, 너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 너의 생명을 살려주는 대신 넌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래도 하겠느냐?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살아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지상최대의 목표였으니……

하겠습니다. 제가 어찌하면 됩니까?

그의 얼굴에는 이제야 살아 날 수 있다는 안도감에 겹쳐 상대가 어떤 요구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새롭게 피어난다.

아주 간단하다.내가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과 하나를 두고 가면 된다.

그야 어렵겠습니까?어서 질문해주십시오.

대체 천마는 혈수천자에게서 무엇을 알아내려는 것인가?
눈앞에 있는 놈의 태도로 보아서는 어떤 얘기라도 술술 잘 털어놓을 것만 같았다.

천황부의 중원세력과 너희들의 본진의 전력을 읊어 보아라.

혈수천자는 난색을 표명했다.
마치 그것만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천마는 그의 그런 얼굴 표정을 살피더니 실소를 머금었다.

하기 싫으면 말아라.굳이 듣고 싶지도 않다. 전혀 쓸모도 없는 놈을 살려둘 만큼
난 자비롭지 못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혈수천자는 손을 쳐들며 빠르게 휘저었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하는데 말이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 보기보다 집요하지 못한 놈이었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놈들을 보면
난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한다. 그런 점에서 네게 죽음을 선사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분이 좋구나.
그래 그것도 괜찮겠지. 자기가 속한 조직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니고
사라져 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

천마의 그 말에 혈수천자의 얼굴색은 점점 누리끼리해져갔다.

내, 내가 언제 말을 안 하겠다고 했습니까? 잠시 생각할 시간을……되었다.

갑자기 별로 듣고 싶지가 않아졌어. 흥미가 사라졌어.
그 딴 것 들어봐야 별 소용도 없고 말이다.

대체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가 있는 겁니까?

너 또한 두 말을 하는데 나라고 지켜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

말하겠소. 말하면 될 것 아니요?

‘정말이지

내가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처하게 되었단 말인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살아있고 나서야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죽은 뒤에 내 충성심을 알아 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알아줘 본들 내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지 않은가?
‘혈수천자의 얼굴은 내심의 결정을 보여주듯 빠르게 경직되어 갔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입이 한참이나 지나서 힘겹게 열렸다.

본 천황부의 중원 세력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대상벌에 상주하는 인원은 이천을 넘지 않고 나머지는 현지인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천황부의 본진의 전력은…… 으음……
사실상 우리들은 무림의 모든 세력들의 전력을 파악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죠.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혈마천과 사사혈교가 우리와 비슷한 전력을 지니고는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들보다 떨어진다 할 수 있습니다. 사사혈교는 숫자적인 면에서는
가장 많으나 절정고수의 수에서 뒤지고 혈마천 또한 우리보다 수적인 우위에 있지만
절정고수의 비중으로 따지면 우리보다 못합니다.
또한 자본력에 있어서는 무림맹도 우리의 상대는 아닙니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한다면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본 천황부가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적인 정보는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천마의 낯이 찌푸려지는 것 같자 혈수천자는 얼른 말을 바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도저히 적에게 알려져서는
곤란한 기밀에 속하는 것들이었고 그 자신도 이런 것을 알기에 말하는 내내 편치 않은 표정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놈이군.

부주의 제자라는 놈이 제 한목숨 부지하고자 조직의 기밀을 누설하다니.
이것만 보면 천황부란 곳도 한심한 곳이군.’그렇지만 그가 하는 말들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들이었다.
특히 천황부 전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오황의 세력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이 무림에 나타나야만 천황부의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을것이라는 말로
혈수천자는 설명을 끝내었다. 천마는 그의 설명이 끝나고 나자 흡족함을 얼굴 가득 나타낸다.
그것을 본 혈수천자는 자신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눈앞에 있는 괴인의 기분이 좋아진다면 약속 이행을 할 확률이 그 만큼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괴인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는 않고 있었다.
그 만큼 무림이란 세계에 대한 불신감이 뿌리깊이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좋다. 살려주지.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깐…… 이제 하나를 남겨두고 떠나도 좋다.

네? 하나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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