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95화
하남성 개봉은 혈마천 주력이 포진하고 있는 곳이었다. 워낙에 대시진이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지만 무림인들의 수는 점차로 줄어들고 있었다. 혈마천에서도 사황성도 마찬가지로 무림인 색출에 들어갔다.
이들이 사황성과 드르게 움직이는 거라면 충성서약 따위의 절차를 무시하고 중워 무림인들이라면 가차없이 죽이고 본다는 점이었다. 흑도에 몸담고 있던 무림인들 중에 절강이나 복건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늘어난 이유도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그쪽은 거짓으로라도 충성서약을 하면 일단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지만 하남은 달랐다.
개봉 대시진의 거리를 대낮부터 활보하는 하남무왕부의 무사들은 수백 명이 넘었다. 그들은 말을 탁거나 걸으며 닥치는 대로 상가를 들이닥쳤다. 그 안에서 병기가 나오면 무림인으로 몰아 잡아가거나 즉석에서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부녀가 대로를 걷다 무왕부의 무사에게 검문을 당했다. 두 사람을 슬쩍 훑어보던 무사는 다짜고짜 이름을 대며 중원무림맹의 무사라며 딸을 보는 데서 아버지를 죽였고, 아무런 근거 없는 행동이었지만 죄라면 여식이 반반한 것이 죄였다.
이런 횡포를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건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그렇지만 평생을 통해 닦아온 생활 기반을 모조리 버려 두고 떠난다는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미루다가 일을 당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그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노라면 몇 가지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인간을 약하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가 두려움이다. 현 혈마천의 움직임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두려움에 길들여진 자는 그 대상을 향해 격렬하게 대항하지 못한다. 또 한 가지는 수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배려였다. 중원을 장악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만족감은 의외로 크게 충성을 유도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마음껏 욕망을 해소했으며 이로 인해 수뇌들에 대해 무한한 충성심을 발휘해 갔다. 지금껏 억눌러 놓았던 욕구를 풀어 버리자 그들은 거칠 것 없이 행동했던 것이다.
오늘도 대시진인 개봉의 대로는 고요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오가기는 했지만 예전에 비할 바 없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윤기 나는 흑마를 타고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며 돌아다니는 자들은 혈마천의 깃발 아래 있었다. 그들은 눈에 거슬리는 걸 참지 않았다. 심지어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거지에게도 칼을 휘두르는 위인들이니 모두 조심하며 그 옆을 스쳐 갔다.
“하하하하, 중원 존속들은 배포가 없단 말이야. 하나같이 노예 근성으로 물들어 있는 놈들이야. 풍족한 물자 때문인지 나약하기만 해.”
모두가 들으라는 듯 마상의 무사가 질러댄 소리였다. 그렇지만 대로에 있는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고, 혹시라도 관심을 끌까 싶어 바삐 그 자리를 피하는 형편들이었다. 단 세 명의 무사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이 순간 염라대왕보다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관군도 건들지 못하는 그들을 누가 있어 당당하게 제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 중 하나가 배가 고프다며 객잔을 가리켰다. 그들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객잔 안으로 말을 몰고 들어섰다.
“어서 옵…….”
점소이는 안으로 들어오는 말을 보고 기겁했다. 그리고 그 위에 탄 자들이 꿈에서조차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혈마천 무사들이란 점에서 불운하다 생각 들었다. 두려움에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나리들,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행차이신지요.”
점소이 뒤에 있던 주인이 부리나케 앞으로 나서 연신 절을 해대며 말을 이어 갔지만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휘익
말에서 멋스러운 자세로 뛰어내린 무사 왈
“식사를 준비해라. 저것들이 먹는 걸로 우리 말에게도 먹이고 우리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걸로 준비해라.”
그가 가리킨 곳에 있던 손님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죽지 않기 위한 가상한 노력을 누군들 탓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층으로 향했다. 이층엔 띄엄띄엄 손님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그들 눈에 띄는 일행이 보였다. 그렇지만 그건 순전히 이들 혈마천 무사들의 눈에만 띄었다는 거고 그저 보통 손님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정확하게 말해 그들 중에 한 명만이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예쁜 소녀였다. 곁에 함께 앉는 자들은 가족들인 것 같았다. 무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곳으로 향했다. 이층에 있던 손님들 태반은 이미 아래층으로 슬금슬금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봐라. 그 자리가 마음에 드는데……자리를 비워 줘야겠다.”
이들이 탐내는 자리에는 네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예의 그 소녀와 두 명의 이십대 장한, 그리고 노인이었다. 그들 중에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얘들아, 자리를 옮기도록 하자.”
“네, 할아버지.”
그들은 아무런 불만도 표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무사의 검집이 소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너는 그대로 있어라.”
의도는 명확했다. 노인의 얼굴은 순간 급변하며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사님, 이 아이는 아직 어립니다. 이제 열일곱에 지나지 않는데.”
“그래서? 같이 식사하는 것도 안 된단 말이더냐? 내가 무슨 무리한 요구라도 했는가? 아니면 네가 날 벌레만도 못한 인간으로 여기는 건……나만의 착각인가?”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이 아이가 겁이 많고 소심하여…….”
“허어, 이 노인이 늙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구나. 단지 식사를 함께 하려는 것뿐이거늘 겁이 많고 소심한 것은 또 무어더냐? 내 이 아이가 하도 귀엽고 예뻐 잠시 얼굴을 익혀 두고자 하는데 그것도 안 된단 말이냐?”
옆에 있던 무사가 거들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이 수상해. 무공을 익히 흔적이 엿보인단 말이야. 너희들 무림인들이지?”
그들이 하는 수작질은 뻔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멀쩡한 사람도 무림인으로 몰아서 백주대로에서 죽이는 살인마들이니 죽지 않으려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야만 했다.
노인은 고개를 떨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시선이 잠시 손녀에게 머물렀다. 소녀는 겁에 질려 입술이 새파래진 채로 떨고만 있다. 할아버지를 향한 시선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노인은 이를 앙 다물었다.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그로서는 힘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녀의 오빠인 두 청년 또한 겁에 질려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음으로야 백 번도 더 무사들을 때려죽이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들을 약자로 규정했다. 그들은 순순히 자리를 물러 나와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소녀를 사이에 두고 빙 둘러앉은 무사들은 얼굴 가득 희미한 미소를 피어 올렸다. 잠시 후에 점소이가 가져온 음식들을 들며 술을 곁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무사가 소녀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술을 한 잔 따라 보거라.”
술잔을 내밀며 능청스럽게 하는 말이었다. 소녀는 흠칫 놀라며 고개만 숙인다.
“어허, 술을 따르라는 말이 안 들리느냐?”
윽박지지르는 소리에 소녀는 울상이 되어 술병을 손에 들었다. 가늘게 떨던 손이 술잔 위에 이르자 와들와들 사정없이 떨어대었다. 그 바람에 술을 쏟고 말았다.
“아니, 이 년이.”
쏟은 술에 옷이 젖은 무사가 화를 내는가 했더니 그 다른 무사가 얼른 소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소녀가 참지 못하고 울어 버린 것이었다.
“아, 이런. 괜찮다.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자, 자 다시 따라 보거라.”
그러면서 무사는 소녀의 손을 덥석 잡아 술병으로 이끈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네 식구들이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음을 명심하거라.]
몰래 전음을 펼치자 소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지만 잡힌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시 술병을 잡고 처음의 그 무사에게 술을 따랐다. 떠는 건 여전했지만 쏟지는 않았다. 바로 그 때였다. 소녀에게 전음을 펼쳤던 무사의 한쪽 손이 소녀의 무릎 위로 슬며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까악.”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자 무사는 소녀의 빰을 호되게 올려붙였다.
“이 계집이 어디서 고함을 지르느냐. 우리가 널 어여삐 여겨 주겠다는데 어디서 앙탈이냐, 앙탈이.”
그러고는 우악스럽게 소녀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발버둥치는 소녀를 뒤에서 한쪽 팔로 결박하고는 다른 손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워 나갔다. 다른 두 명의 무사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장내엔 소녀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몇 사람 남아 있지도 않았다. 이들의 추태는 점차 도를 더해 갔다. 세 명이 달라붙어 소녀의 옷을 벗겨 가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소녀의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손에 든 술병으로 그들을 내리치고자 함이었다. 무공이라고는 단 한 번도 익혀 본 적이 없는 그가 무사들을 당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죽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더불어 손자들까지 죽음을 맞게 될게 뻔했다. 이미 참을 수 없는 분노 속에 빠져 든 노인에게서 이성적인 판단을 기대하기란 무리가 따랐다.
“이놈들, 그 손 놓지 못할까.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이 늙은이가 망령이 들었나. 살기 지겨워 미쳤나 보구나.”
한 명의 무사가 노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우두둑
간단하게 목뼈를 탈골시켜 죽여 버린 무사는 또다시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으악, 할아버지! 할아버지!”
소녀는 무사의 무릎 위에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고함을 지르다 혼절하고 말았다. 소녀는 금세 축 늘어졌다. 이미 옷은 거의 다 벗겨져 있는 상태였다. 소녀의 오빠들도 더 이상은 참지 못했다. 젊음의 혈기로 인해 두려움마저 이미 가셔 버린 것이다. 상대들을 죽이고 싶다는 열망만이 온 정신을 지배했다. 둘은 뛰어 오르며 그들에게 달라붙었다. 주먹을 휘둘러 보았지만 이내 상대에게 잡혀 버린다.
우두둑
팔을 통째로 비틀어 탈골시키고는 발을 복부 깊숙이 차 넣었다.
“컥.”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무사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청년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밟아 버렸다. 비명도 없이 청년은 죽었다. 머리통이 터져 죽은 형을 보며 또 다른 청년이 덤벼들었다. 부질없는 짓이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고 있었다.
쉬익
잔악한 살소를 흘리며 무사의 손이 꼿꼿하게 선 채 청년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끄억.”
무사의 손이 내장을 움켜쥐고 뽑아낸다./ 참으로 잔인한 자였다.
“크크크, 벌레만도 못한 놈들. 네 동생에게 이 나으리가 은혜를 베풀겠다는데 무슨 불만을 가진단 말이더냐?”‘
“에잉, 밥맛이 떨어지는군.”
이층 어딘가에서 들려 온 소리에 세 사람은 일시에 동작을 멈추었다. 홀딱 벗겨진 소녀는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다.
“어떤 놈이냐?”
소녀를 무릎 위에 앉히고 있던 무사가 내지른 고함소리였다. 어디서 들려 온 소린지는 명확하게 확인하지 못한 듯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 그냥 지켜 보고만 있을가 했더니 내장을 꺼내고 지랄이냐. 식사중인 사람도 생각해 줘야 하지 않느냐.”
이층에 이제 남아 있는 자라곤 죽어 나자빠져 있는 세 구의 시체와 혼절해 널브러져 있는 소녀와 자신들 세 명, 그리고 단 두 사람이 더 있을 뿐이었다. 하나는 평범한 노인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곱추였다. 따로 떨어져 앉아 있는 것을로 보아 두 사람은 일행이 아닌 듯 했다.
둘 중에 하나가 말 한 것이 분명할진대 아직도 무사들은 누가 말을 했는지 가려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묵묵히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대단한 배포였고 비위였다.
“너희 두 놈 중에 한 놈이렷다. 감히 혈마천이 하는 일에 간섭할 참이냐?”
기세만으로는 다짜고짜 살수를 펼칠 것 같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혈마천이라…….”
곱추가 일어서며 히죽 웃었다. 얽은 곰보 얼굴에 한쪽 눈이 뭉그러져 있어 추했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오자 역겨운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이런 냄새를 풍기는 자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저 청수한 노인이 갑자기 존경스러워졌다. 세 명의 무사는 각기 검을 뽑아들고, 무방비로 다가오는 곱추를 경계했다.
“이놈들아, 난 너희들을 해치고 싶지는 않다만 내 식사를 방해했으니 죽여야겠다. 그렇지만 걱정 마라. 하나는 살려 둘 테니. 재미있는 구경도 마저 해야겠으니 말이다. 크크크.”
입을 열 때마다 악취가 풍겨 나왔다.
“너는 누구냐?”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느느 걸 보니 이들도 어지간히 마음을 졸이는 것 같았다. 상대는 척 보아도 단순한 자는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 있게 자신들의 앞을 막아설 수 있다는 건 어지간히 자신감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혈마천의 총단이 있는 개봉에서.
“누가 죽을래.”
마치 장난이라도 치려는 사람처럼 지껄여대는 꼽추를 보며 세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놈, 죽어라.”
세 방위로 흩어진 무사들은 겁을 꼬나 쥐고 꼽추의 상, 중, 하를 각기 나누어 공격했다.
“클클, 귀여운 놈들. 재롱을 부리려면 좀 더 그럴듯하게나 할 것이지.”
그가 손을 펼치는 순간, 세 사람은 그 자리에 꼼짝 하지 못하고 서 있어야만 했다. 몸이 결박당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누가 죽을 거냐? 그래 이왕이면 아까 제일 먼저 설쳐대던 네 놈을 살리는 게 낫겠구나. 아무래도 좀더 화끈한 장면을 보여 줄 것 같으니 말야.”
무릎에 소녀를 올려놓았던 무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곱추가 자신을 지목한 것이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너희 둘은 필요 없으니 이만 죽어라.”
괴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무사는 자신의 팔을 들어올려 검을 거꾸로 쥐더니 가슴으로 서서히 검을 밀어 넣고 있는 중이었다.
“어, 어.”
이미 스스로의 통제를 벗어난 팔은 제 멋대로 움직였다.
푸욱
거침없이 심장을 파고든 검에 두 무사는 두 눈을 까뒤집으며 맥을 놓았다. 그 모습을 킬킬거리며 쳐다보던 꼽추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노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으음, 그놈…… 수상한 놈이었는데 이놈들과 노닥거리느라 놓쳐 버렸구나. 에잉, 신경질 난다. 너도 그만 죽어라.”
푸욱
꼽추는 창을 통해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무사는 자신의 눈을 찔러 뒤통수로 검을 관통해 죽어 있었다. 반각 정도가 흐른 뒤에 조 전의 노인이 장내에 다시 나타났다.
“세상이 어찌 도려고 이 지경이란 말인가. 아무도 막을 수 없다면 피해라도 줄여야 하는데…….”
그는 소녀에게로 다가가 대충 옷을 입혀 품에 안아들었다. 아직 혼절한 소녀의 얼굴엔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쌍한 것. 이제 이 아이는 평생을 악몽에 시달리겠구나.”
스스스스
노인이 장내에서 사라지며 마지막 흐리고 간 말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잠자던 대지가 깨어나고 있는데 고집스런 노인들은 돌아볼 줄 모르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중원 각지에 괴인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태껏 무림에 단 한 번도 못브이나 이름을 올린 적이 없는 신비인들이었고, 그 출현들도 괴이하기만 했다. 정작 그들의 출신이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 가지 분명한 건 그들은 동시에 나타났으며 그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악인인지 선인인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지만 진정 같은 부류의 인물인지도 확인된 바가 없었다. 때로는 무황벌의 고수들을 죽였고, 어떤 때는 아무 이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인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공통점이라면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고수들이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중원을 휘몰아 가는 바람은 혈풍이 분명했다.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최후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무황벌로서도 조직적으로 상대하지 못했다.
이래저래 중간에 끼어 낭패를 보는 건 중원인들이었다. 여기저기서 동시에 쳐대기 시작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함은 당연했다. 도망갈 곳도 없는 것이 대륙 전체가 동시에 몸살을 앓았다. 차라리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이 그 중 나을 듯 싶었다.
괴인들의 출몰이 빈번해졌다고 해서 혈마천을 비롯해 새외 세력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중원을 압박해들었다. 이러하던 차에 무황성의 마황군이 움직인다는 소문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무황성의 가장 큰 주력은 뭐니뭐니해도 마황군이었다. 만 명에 달하는 그 정예 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폭풍을 몰아치듯 스치고 지나간 자리엔 기왓장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었다, 예전 야림의 삼만 고수들을 고혼으로 만든 그 저력을 중원은 두려워해야만 했다.
그들이 움직여 간 방향은 하남성이었다. 하남무왕부로 향해 가는 그들 옆에는 놀랍게도 내밀원의 일부 고수들도 함께 했다. 내밀원과 마황군의 전격적인 움직임!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갈초홍은 중원무림맹의 잔여 세력을 지하로 잠적시켜 놓고 총단을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만 했다. 그녀에게 일임된 역할은 두 가지였다. 파천과 그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중원의 힘을 적에게 들키지 않고 숨겨 놓는 일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중원 정세를 파악해 파천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충원의 거의 대부분의 핵심 고수들이 빠져나간 뒤인지라 그 일을 담당하기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녀 주변을 호위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정도사령대의 고수들이었고, 나머지는 전 정도무림맹의 수뇌들이나 마도8문의 수장들도 있었다.
중원에 들어왔던 천마교의 세력은 전원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그들이 중원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갑갑함마저 중원을 위해 견디어 달라고 말하긴 천마교와 중원의 오랜 관계를 감안할 때 무리가 따랐다. 게다가 그들이 굳이 중원에 남아 있어야 할 필요도 없었기에 전원 자신들의 땅으로 철수해 갔고, 제갈초홍 또한 이런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사천성 중경에서 은말한 움직임이 있었다. 참다 못해 그 지역의 무림인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뜻은 좋았지만 힘이 모자랐다. 그들은 중원무림맹이 일어설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더 이상은 참지 못했다.
중원무림맹 계열이 아닌 이들은 예전에만 해도 군소문파로 중원무림계에서 그다지 주시도 받지 못했던 자들이 태반이었다. 지하에 마련된 밀실에 모인 자들은 명색이 각 문의 수장들이었다. 이들은 한때 새무련이 강북을 점령했을 때 무창의 중원무림맹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전력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중원무림맹의 수뇌부들은 고수가 아닌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겠지만 이들로서는 치욕적인 기억이었다. 중원을 위해 한 목숨 바치고자 한 뜻으로 향한 길을 되짚어 올 때는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참고 기다렸다. 중원의 저력이 한데 뭉쳤으니 새외의 무리들을 말끔히 내몰아주리라 기대했다. 그 와중에 피해를 입은 문파도 있지만 그런 거쯤 문제될 게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솔직히 더 이상 중원무림맹을 믿지 않는다. 스스로 치키지 못하면 그 누구도 지켜 주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처가 죽고, 딸이 잡혀 가고, 아들의 배를 저들이 가를 때에도 참아야 했지만 일평생을 함께 했던, 무림과는 전혀 관련도 없는 무고한 이웃들이 하나 둘 죽어 가는 데는 더 이상 참지 않으리라 의기를 불태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켜 바위의 표면이라도 더럽히자, 라는 오기 섞인 생각만은 아니었다. 잠자코 있기엔 이들의 피가 너무도 뜨거웠고, 그리 하지 않으면 검을 잡은 자로서 차라리 고꾸라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게 나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이곳 중경엔 혈마천의 삼백 명만이 있소. 우리 인원은 칠백이 좀 넘소. 냉정하게 따지면 우리 실력은 그들에 미치지 못하오. 그렇지만 기습을 한다면 충분히 이점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 믿소.”
한 중년인이 하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 명 남짓 모여 있었는데 그들의 눈동자는 결의로 활활 타올랐다. 그 무엇으로도 그 불길을 끌 수는 없어 보였다.
“좋소, 해봅시다. 우리 모두가 죽는다 해도 이 소식은 전 무림에 전해질 것이고 이로 인해 잠자고 있는 대륙을 다시 한 번 깨울 수 있을 것이오.”
이들은 승리를 장담하지 않았다. 죽음을 먼저 말하고 있었다. 죽을 것을 알지만 가야 할 길에 대해 가슴을 열어 놓고 토론하는 중이었다.
“죽기까지 우리는 중원무림인의 자부심을 버리지 않았음을 하늘과 땅과 모든 중원인들이 기억해 줄 것이오.”
“그것이면 되오. 우리는 이름 석 자 역사에 남기지 못했지만 우리의 이 시도만은 중원이 남아 있는 한은 살아 있을 게요.”
“자, 마지막 잔을 듭시다.”
“중원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삼류 인생을 위해.”
누군가 쏟아 놓은 마지막 말에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다. 이들은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작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원에 대한 이들의 사랑마저 작지는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중원을 지탱하는 진정한 저력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잔을 한 번에 쭈욱 들이키고는 소리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돌아 나가는 걸 앞엔 기나긴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소리 없는 이동! 그들은 무슨 신기막측한 잠형술 따위는 몰랐다. 그저 어둠에 동화되어 최대한 숨을 죽이고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목표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결과가 어떠하리란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주저함만은 없었다. 칠백에 달하는 인원이 뿜어내는 기운만이 차가운 대기를 잠시 동안 데울 뿐이었다. 이들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차갑게 식어 가겠지만.
장원은 조용했다. 하긴 중원 천지에 자신들을 치러 올 세력은 전무하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고 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요한 장원이 이해가 갔다. 그들은 심지어 정문에 보초도 세워 두지 않았다. 제일 선두에 서 자가 한 손을 들어 앞으로 까닥거렸다. 천천히 장원으로 다가선 자들은 담 위쪽을 살며시 올라서서 안의 동태를 살폈다.
전각 앞에는 큰 화로가 불을 가득 채워 밤의 어둠을 살라먹고 있었고, 그 주위로 모여 있는 자들은 불을 쬐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무슨 재미난 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근래 세상은 자기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매 순간이 즐겁지 않겠는가마는 오늘만은 그리 신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침입자들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도 잠시.
피융
수십 대의 화살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것과 동시에 그들은 담을 뛰어 넘어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억.”
혈마천 무사의 어깨에 화살이 박히는 것이 시작이었다.
“침입자다.”
“적이다.”
역시 중원무림인들은 이런 기습에도 전혀 경험이 없어서인지 첫격돌을 하기도 전에 적에게 내습을 알리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미 서로의 검과 도와 병기와 육장은 상대를 향해 사정없이 꽂혀 갔다. 누구도 동료를 돌보아 줄 틈이 없었다.
적의 내습을 알리는 고함소리에 뒤이어 전각에서 밀려 나오기 시작한 수는 그리 적지 않았다. 삼백 대 칠백이라고는 하나 혈마천 무사들의 실력이 전체적으로 앞서 있었기에 잘 보아 주면 백중지세라 할 만했다.
“중원을 갉아먹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누군가의 피끓는 외침이 중원측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함성은 봇물 터지듯이 적들의 기세를 밀어냈다. 적과 아군이 한데 뒤엉켜 찌르고 베는 모습은 진지하기만 했다. 서로의 죽음을 집행한다는 의식 따위는 없어도 좋았다. 단순한 행위에 몰입된 자들은 적이라는 명료한 공식 아래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갔다.
펄떡이는 심장을 향해 꽃힌 검, 머리를 지탱하는 목을 끊어 버리는 도끼, 너른 등을 파고든 도, 배꼽을 산적 꿰듯이 뚫어비린 창, 그 모두가 의지 아래에서 화려한 비상을 꿈꾸었다. 단 하나뿐인 생명이기에 이들 모두는 더욱 절실했다.
그러나 이들 간의 현격한 차이는 살기 위해서 죽이는 자들과 죽기 위해서 죽이는 자들의 입장만큼이나 분명했다. 가슴에 꽃힌 칼을 마지막 짜낸 힘으로 움켜쥔 쪽은 언제나 중원 무사였다. 바닥에 엎어져서도 적의 다리를 향해 검을 찌르는 자 또한 중원 무사였다, 등을 찌른 자를 죽이기 위해 제 배를 갈라 검으르 꽂아 가는 자는 틈림없이 중원인이었따. 실력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런 것마저 뛰어넘는 의지가 둘 사이의 간격을 없던 것으로 돌려 버리는 기적을 일궈내기 시작했다.
혈마천 무사들은 겁에 질려 갔다. 악착같은 적들의 필살의 의지는 치를 떨게 만들었고 죽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서게 해 용맹을 그들에게서 뺏어 버렸다.
“도망 치지 마라. 적들은 삼류 무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삼류 무사의 검에 외침을 토한 자도 상처를 입었고, 잠시 고통 중에 머뭇거리는 사이 다리가 잘렸으며 비명을 지르는 순간 심장이 파열되었다. 삼류 무사들의 몸부림은 처절하기만 했다.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그들은 진정 오늘만은 일류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처절한 사투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냉정하기만 했다. 뛰어 넘을 수 없는 실력의 차를 의지만으로는 넘지 못했다. 한 사람의 적을 죽이기 위해 두 명이 목숨을 바쳐야만 했다. 점차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한 적의 공격은 날카롭고 거세어졌다.
시간이 흘렀다. 죽음도 늘었다. 마지막 외침을 토한 중원 무사의 목은 땅을 구르고 있었다. 전멸! 단 한 사람도 살아 남은 사람은 없었다. 반면에 혈마천으 십여 명이나 건제했다.
“빌어먹을…… 우리가 졌다. 이놈들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독종들이다.”
벽에 기대 헐떡이는 자는 손에 마비가 오자 검을 놓치고 말았다.
“중원인들이 모두 이놈들과 같다면……우리는 한 순간도 마음놓고 나다니지 못할 것이다.”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죽은 자들을 따뜻하게 품어 주고자 소복이 쌓여 갔다. 지부장격인 인물도 앞으로 나오더니 적들의 시체를 뒤척여 보고 있었다.
“이 놈은 정육점의 철륭인가 하는 놈이 아닌가?”
“이 놈은 중경제일루 점소이 녀석.”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었다.
“완벽한 패배로군. 기세에서 졌어. 이대로 둔다면 중원은 다시 살아난다. 총단에 알려야겠다.”
상무룡은 서찰을 눈앞에 두고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근래 그리 좋지 않은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최악이었다. 샘백여 명이 죽고 칠백여 명의 적을 죽였다는 내용만으로는 그가 이처럼 벌레 씹은 얼굴이 될 리가 없었다.
소상히 적힌 내요을 훑어 가다 그는 전율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 소식이 전 중원에 전해진 이후의 파장을 염려했다. 흩어진 물줄기는 그리 신경을 쓸 이유가 없지만 하나로 뭉친 강하고 급한 물살은 그 무엇도 파괴하는 힘이 있다. 물줄기가 모여들고자 했다. 여러 갈래로 찢어 놓은 물줄기가 제 스스로 도랑을 파고 서로 모여들려 했다.
“이건 막아야 해.”
상무룡이 벌떡 일어서는 때와 맞춰 천마가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중원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내민 서찰을 살펴 가던 천마의 입 꼬리가 슬쩍 휘말려 올라가며 기이하 미소를 만들어내었다.
“생각했던 대로군. 설마 이 정도도 예상치 못했다는 말인가? 중원의 저력은 바로 이거야. 랍아도, 밟아도 일어서는 끈질김. 어려울수록 뭉치는 속성. 그리고 모래알처럼 많은 기인이사들. 그 모든 저력이 한데 뭉치면 걷잡을 수 없지. 몰랐나?”
자리에 앉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천마를 향해 상무료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 잘 아신다면 대책도 생각해 두신 것이 있겠군요.”
“없어.”
‘무슨 개소리야.’
상무룡은 어이가 없다 못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천마는 탁자에 기이한 도형을 그려 나갔다.
“그렇지만 자네가 하려는 행동은 예측 가능하지.”
“제가 어떻게 할 거라 보십니까?”
“이들이 뭉치지 못하게 선수를 치려 하겠지. 어쩌면 중경을 싹 쓸어 버릴지도 모르고.”
“잘 아시는군요.”
“멍청한 짓이야.”
“무슨 의미입니까?”
“저들이 더 잘 뭉칠 수 있도록 아교를 뿌려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일세. 이쪽도 저쪽도 멈추긴 늦어 버렸지. 충돌하는 길밖엔 없어. 충돌하면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거란 걸 알지만 멈추기엔 늦어 버렸어. 이게 바로 교주가 바라는 거라면 자넨 믿겠나?”
“설마…….”
“교주는 무서운 사람이야. 방법은 딱 한 가지야. 모든 걸 포기하고 자네들 땅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겠지?”
“당연합니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란 말씀입니까. 절대로 그렇게는 못합니다.”
“내가 예언자는 아니지만 말야. 한 가지 예언을 해보지. 자네나 다른 새외 세력들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할 거야. 이후 그대 손에 남겨진 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보잘것없는 것뿐이겠지. 하긴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말일세. 어찌 보면 다 부질없는 것이야.”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천마. 그를 향해 상무룡이 다시 물었다.
“어딜 가십니까?”
“나도 한 손을 보태러 가네. 자네가 하려는 일과 내 일은 같다고 볼 수 있지. 우선은 말야.”
내실에서 사라진 천마의 입을 되씹으며 상무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수뇌들을 소집시켜라.”
밖을 향해 외치는 소리엔 신경질적인 감정이 다분했다.
중경의 작은 거사는 전 중원을 빠르게 뒤흔들어 갔다, 대세와는 무관하게 이름도 없이 피어 있던 들풀과 같은 자들이 큰일을 해낸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한 자들은 모두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딘 가로 도망가기 위해 짐을 싸던 자들은 짐을 다시 풀었으며 대로에서 마주친 무황벌의 고수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자들이 두 눈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도 조막손을 움켜쥐고 여자들도 팔을 걷어 부쳤다.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마음가짐들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당당해졌을 뿐이었다. 중경 소식이 중원 곳곳에 두루 펴지기도 전에 그곳은 사상 초유의 대겁난에 휩싸이게 된다. 천마의 예측대로 혈마천의 고수들이 중경을 쓸어버린 것이다.
어른, 아이, 여자, 노인 할 것 없이 보이는 족족 죽이고 또 죽였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중원의 버러지들이 고귀한 무황벌의 고수들의 몸에 칼을 들이댔다는 것이다. 중경에 사는 사람 중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많아졌을 때에 비로소 그들의 살행은 멈추었다. 집 안 곳곳에서 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대로의 건물 중 성한 곳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어미를 잃어버린 아이가 울며 거리를 배회해도 누구 하나 돌보아주지 못했으며, 싸늘한 남편의 시체를 부여잡고 생목숨을 끊는 일도 속출했다. 피는 내를 이루고 원한은 하늘에 닿았다. 까마귀들은 하루종일 하늘을 제 집 삼아 퍼덕거렸으니 이날 죽은 자의 수가 얼마인지는 살아 남은 자들도 죽인 자들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연이어 하남의 개봉에서 출발한 일단의 무리들이 산동의 제남까지 황하를 거슬러 오르며 살아 있는 것은 모조리 죽여 갔다. 그들은 일정한 행로를 취했기에 피하면 쫓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앞에 있는 것들은 개나 소나 사람이나 동등하게 살육했다. 이들이 일만의 마황군이고 보면 감히 황군이라도 그 앞을 막을까 싶었다. 그러나 이들이 죽인 자는 중경보다 많지 않았다.
마황군의 움직임은 무화벌 내부에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라 의견이 분분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관심이 쏠려 갔지만 중원인들 입장에서 본다면 마황군이나 혈마천이나 그놈이 그놈이었다.
하늘도 울고 명도 운 이날 이후로 중원인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마음속의 각오는 이제 서서히 실행되기 시작했으며 각 동리마다 은밀하게 비밀 결사가 조직되어 갔다. 땅이나 갈던 자들도 손에 낫이나 죽창을 잡았으며, 틈만 나면 훈련이랍시고 싸우는 기술을 습득해 갔다. 이들의 움직임은 중원 전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데 중심이 될 만한 축이 없을 따름이었다. 이런 차에 여러 가지 유언이 퍼져 나갔다.
‘호로(胡虜)를 축출하고 중화를 회복하자’ 라는 것이 그 하나였고, ‘나라도, 중원무림맹도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하니, 우리가 스스로 힘을 길러 이 땅을 수호하자.’ 는 것이 그 둘이었다. 이런 기운은 민간에 급속하게 퍼져 나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이 없었으며, 무림인과 민간의 구별도 없었다. 남자도 여자도 한 뜻 한 마음으로 뭉치기 시작하니 그 힘은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어 갔다.
이런 와중에도 장가가고 시집가고, 난 날을 축하하고자 잔치를 열고, 죽은 자를 장례 치르기는 멈춤이 없었다. 동정호 호변에 거대한 장원이 있으니 이름이 대산장(大山莊)이라 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곳을 일러 추돈장(醜豚莊)이라 부르며 경원했다. 원래는 무창 시진 내에 있었는데 사람들로부터 경원시 되자 한적한 곳에 장원을 짓고 살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대산장을 이런 시선으로 보게 된 데는 다 그만한 연유가 있었다. 대산장은 원래부터 대대로 이 지역의 이름난 갑부였다. 그런데 그 장주라는 자의 행사가 치사하고 악독할 뿐만 아니라, 힘있는 자에게 아부하고 힘없는 자를 멸시하기를 먹고 뒷간 가는 듯이 자연스럽게 생각하였다.
이 자는 시류를 잘 읽을 뿐만 아니라 그 간사함으로 대세에 빌붙어 부를 영위해 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도련과 중원무림맹에 상납금조로 매년 막대한 돈을 기부하더니, 이제 와서는 무황성의 비호 아래 그 부를 불려 나갔다. 이런 처세 때문에 원한을 살 일이 많았던지라 항상 그의 곁에는 경호 무사들이 하루 십이 시진 내내 붙어 다녔다. 특별히 고르고 고른 자들이라 무공이 고강한 자들로만 경호단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것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무황성에서 파견 나온 무사들까지 끼어 있었다.
개인 장원에서 오백이 넘는 사병을 거느린 자는 근처 인근 천 리를 뒤져 봐도 이 사람 하나뿐일 것이다. 현 장주인 화경영의 나이 칠순이 되어 잔치를 벌였으니 그 규모가 가히 무창의 주민 절반을 하루 동안 먹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돈을 쳐들여 잔치를 배설하였으므로 그 초대된 유력 인사만도 수백을 헤아릴 정도였다. 무황성의 고수들을 비롯해 평소 가깝게 지내던 각지의 명사들을 한 자리에 불러 들였고, 그들 중에 유력 인사들에게는 따로 선물가지 안겨 주는 형편이었다.
“하하하하, 이렇게 와주셔서 이 늙은이가 그저 감읍하고 송구할 따름입니다. 오늘은 그야말로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니 마음껏 드시고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 나이에 그 정도로 뚱뚱한데도 아직 건강한 걸 보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잔주름 하나 없는 탱탱한 살결 하며, 혈색 좋은 것까지 그가 건강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하기사 이 많은 재산을 두고 죽어야 하니 그 또한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이번 잔치에 초대된 이사들은 그 면면만 보아도 일반인들이 들었다 하면 입을 따악 버릴 정도의 수준이었다. 무림계 인사만 하더라도 한 지역을 관장하는 무황성의 최고위직 인물들만 보일 정도였으니.
무황성 고수들 중에서 참석한 최고위층은 단연 내밀원 소속이자 무황성을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총군사였다. 그가 이 자리에 참석한 것만 보아도 화경영의 수단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역시 무황성의 총군사란 자는 화경영의 옆자리에 앉을만한 위치였다.
장내는 비교적 흥겨움이 넘쳤다. 남의 잔치에 와서까지 인상을 쓰고 있을 만큼 경우가 없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이들 중 태반은 무황성에 비교적 협조적인 인사들이었다. 현 무림의 상황이 어떠하든, 중원이 쓰러지든 말든 개인의 영달에만 관심 있는 위인들이기에 이리 흥겨워할 수 있었다.
중원의 사람들이 보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은 즐겁게 떠들며 먹고 마셨다. 그러나 잔치를 열기 위해 데려 온 인물들이나 몇몇 인사들의 표정만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만 있었다. 당장이라도 웃고 떠드는 자들을 쳐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들은 꽤나 많았다./
무창에서 특별히 초빙해 온 유명 요리사가 화경영 앞에서 육회를 만들고 있었다. 소고기를 결대로 얇게 썰어 갖가지 양념과 함께 내놓고 있었는데 그 맛이 각별해 찾는 이가 많았다. 화경영은 술 한 잔을 들이키며 육회 한 접시를 요구했다.
“그 맛이 아주 특별하군. 역시 돈을 들여야 뭐든 만족이 된단 말이야. 그렇지 않습니까, 총군사님.”
“하하, 그런가요.”
두 사람의 대화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화경영의 관심은 온통 총군사에게 머물러 있었다. 무황성의 실세인 그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두 사람의 대화와는 상관없이 열심히 육회를 만들어 가져 온 요리사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맛있게 드시니 절선 영광입니다. 아무쪼록 백수를 누리소서.”
화경영의 입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 찢어졌다.
“하하하하, 그래 고맙구나. 내 백수를 누린다면…….”
“이놈 죽어라.”
접시 밑에 깔고 있던 작은칼을 빼내 화경영의 가슴을 향해 꽂아갔다. 워낙에 돌연한 행동이라 화경영과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경호원까지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요리사의 표정과는 대조적이었다. 총군사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한 것은 요리사의 단검이 화경영의 심장에 꽂히기 직전이었다.
땅
“헉.”
요리사는 급격히 물러서며 총군사를 다급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무공을 모른다고 알려져 있었거늘……”
“너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요리사는 낭패한 표정이었다. 설마하니 총군사가 무공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그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화경영의 심장과 단검 사이를 막은 것은 놀랍게도 총군사의 손바닥이었다. 도검불침을 이룬 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도 업슨 수법이었으니 그가 어느 정도의 고수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몰라서 묻느냐! 저놈은 무황성에 빌붙어 중원인의 고혈을 빨아 먹는 돼지 같은 놈이다. 저런 놈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 간다는 사실을 늘 부끄럽게 생각해 오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가 와 실행했을 뿐이다. 저놈을 죽이고 총군사 너도 죽이리라 내심 작정했는데……성사시키지 못해 억울하구나.”
“호오, 고놈 참 대단한 놈이군. 무공을 모르는 놈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단 말이냐?”
“너 같은 변방 놈이 중원인들의 뜨거운 피를 알기나 하겠느냐. 내 비록 실패했지만 이런 시도는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너희들이 중원에서 물러 가지 않는 한 우리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저놈을 데리고 가라.”
“천만에.”
푹
자신의 목을 스스로 벨 수 있다는 것은 용기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목에서 치솟은 피가 공교롭게도 화경영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직도 겁에 질린 채 몸을 움찔거렸다.
“이런 독한 놈”
퍼엉
이미 숨이 끊어져 넘어가는 시체를 향해 총군사의 장력이 작렬했다. 뒤로 날아간 시체는 원래 요리사가 서 있었던 자리에 가서 처박혔다.
“별일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총군사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화경영의 안색은 돌아올 줄 몰랐다. 썩은 돼지간처럼 거무죽죽해진 모습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하하하하, 이제야 말로 돼지 같아 보이는구나.”
이번엔 또 뭐란 말인가? 모두의 시선은 웃음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향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연회장의 입구에 화려한 은의를 걸친 이십대의 미청년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보다 더욱 그 사내를 빛내 주는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부드러운 듯하나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눈빛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놈의 앞을 막아라.”
총군사가 벌떡 일어서며 외치자 무황성 고수들과 경호원들이 사내의 주위를 순식간에 에워쌌다.
“으, 으으…….”
화경영은 두려움에 젖은 시선으로 탁자 밑으로 숨었고, 그 앞을 총군사가 막아섰다. 그의 입에선 크면서도 단호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네 놈은 누구며 이 자리엔 무슨 일로 왔느냐?”
“난 돼지 피를 마시러 왔다. 하도 요란스레 돼지가 울어대길래 잠잠하게 재우려고 왔지. 그 울어대는 소리가 워낙에 요란해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와보니 별 거지 같은 놈들이 돼지털을 쓰다듬고 있기에 못 볼 걸 보는 것 같아 그냥 가려 했지만 저 요리사의 숭고한 기백에 감탄하여 내 오늘 기필코 저 돼지의 피를 뽑아 한 모금 마셔 보아야겠다.
“으음.”
사내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총군사는 조금은 놀랐다. 수많은 고수들에게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저리 당찬 말을 스스럼없이 뱉어낼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생각되었다.
‘으음, 저놈 보통 놈은 아니구나. 전혀 눌리는 기색 없이 할 말을 다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그가 무공에 자신이 있어 저런다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일반인들보다는 좀더 용기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될 뿐이었다.
“놈을 죽여라.”
총군사의 살인 명령이 떨어지자 사내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무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스스스스
“아니, 이놈이 어디로?”
“헉.”
달려들던 자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종적을 놓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위다. 위에 있다.”
누군가의 외침소리에 천장 쪽을 보니 어느새 미청년은 팔짱을 끼고 총군사와 무리들의 중간 지점 허공 중에 우뚝 서 있었다. 귀신이 곡할 신비로운 신법이었다. 총군사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나조차도 느끼지 못했다는 건가. 이놈, 알고 보니 엄청난 고수로구나.’
그는 더욱 긴장하며 눈앞을 직시해 갔다.
“내가 말했지 않느냐. 오늘 돼지의 피를 보아야겠다고. 내 앞을 막는 자들은 돼지와 동등하게 취급하여 가차없이 쳐죽이겠다. 난 저놈만 필요할 뿐이다. 괜한 소동을 일으키지 마라.”
“이놈, 자신감이 과하구나.”
이번엔 옆쪽이었다. 검강을 일장이나 뻗어내는 고수의 급습이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슬쩍 손을 옆으로 흔들었을 뿐이었다.
콰앙
“커억.”
검이 부러지며 파편이 이마 깊숙이 박혀 버렸다. 공겨개 가던 자는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총군사는 생각을 다시 정정해야만 했다.
‘저놈을 내가 당해낼 수 있을까……. 저 정도의 고수였다니.’
슈욱
그가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사내는 움직였다. 아니 단지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광오한 놈.”
총군사의 손이 활짝 펴지는 순간 눈을 멀게 할 혈광이 쭈욱 뻗어 나갔다.
스스스스
“케엑.”
비명은 엉뚱한 데서 터져 나왔다. 총군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어떻게 한 것일까. 화경영의 노구는 어느새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의 심장 부분이 뻥 뚫렸다. 그리고 뒤 이어 들려 온 소리는 허공에서였다.
“이런…… 간을 뽑는다는 거이 그만 심장을 뽑아 버렸군.”
“저놈을 죽여라.”
“타앗”
“하앗”
사방에서 그를 향해 솟아오르는 인영들은 부지기수였다. 이제 경호할 대상을 잃어버린 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분노했다. 쏠쏠한 돈벌이를 놓치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 보니 네 놈들은 간이 아니라 심장을 먹고 싶었던 게로구나. 자 여기 있다. 많이 처먹어라.”
파앙
순간 심장이 터져 나간 것인가. 작은 불덩이들이 바닥을 향해 쏟아진다.
“크악”
“컥”
솟아오르던 자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비명을 질러대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생명줄을 놓은 것 같았다. 그 혼란의 와중에도 총군사는 상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하하하하, 나는 이만 가마. 다음에 볼 때는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잔대가리 굴리길 좋아하는 네 놈은 내 특별히 머리를 해부해 주마. 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는 이미 전각 밖에서 들려 왔다.
“놈이 도주했다. 쫓아라.”
누군가가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에.
“되었다.”
총군사의 제지하는 말이 흘러 나왔다.
“쫓아 봐야 소용이 없다. 이미 수백 장 밖을 날고 있는 듯하니……. 너희들로서는 추적할 수 없다.”
모두들 불신으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어찌 인간이 그리 빠를 수 있단 말인가.
‘진정 엄청난 고수가 등장했구나.’
순간 그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고 말았다.
‘이제 보니 큰일이야. 그렇지 않아도 중원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구심점마저 갖추어진다면……. 외부이들은 모두 죽일 수도 없고.’
“외부 인부들을 모두 죽여라.”
그럼에도 그에게서 잔인한 살인 명령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오늘 눈으로 본 것을 퍼트리고 다닐 것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뒤 이어 그는 중원인들 중 초대된 외부 인사들에게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오늘 본 것을 그 어디에 가서도 발설하지 말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는 내심 불안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입이지 않던가…….
무황성 총군사의 염려대로였다. 대산장 연회에 참석했던 인사들 중 무황성에 반감을 지닌 중원인들이 자신의 본업도 잊고 온갖 지역을 돌아다니며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 소문은 원래가 부풀려지게 마련이었다. 전해지는 과정 중 더해지고 변질도어 원래와는 사무 다른 소식이 되고야 만 것이다.
대산장의 연회에서 신비인의 활약은 중원이 새롭게 꿈꿀 수 있는 촉매의 역할을 했다. 일수에 숲을 절단내는 신비인이나 일수에 무황성 최고 고수들을 떡치듯 주무르는 신비인 모두 중원인들에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그래서 아직은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각지에 꿈틀대던 비밀 결사는 이로 인해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해 갔다. 중원무림맹만 바라보고 인내해야 했던 중원인들이 다른 꿈도 동시에 꾸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반가운 일일 수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발전되어 가자 무황성의 움직임 또한 더욱 빨라져 갔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에라도 그들은 중원을 더욱 철저하게 탄압해야만 했다.
A|°¥AEE≪Aº ¿A´Aμμ ≫o·I¿i ¼O½AA≫ Ay°eCI°i ºÐ¼RCI´A¶o ºÐAOCN CI·c¸| º¸³≫´A AßAI¾u´U. 중원 곳곳에서 전해져 온 비밀 서찰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거기서 그녀는 두 눈을 번쩍 뜨여지는 서찰을 발견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움직여 볼 만도 하다.’
그녀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강서성에서 전해져 온 전서였다. 그녀는 파천의 신신당부하던 말을 잊지 않고 떠올렸다.
“어떠한 경우에도 움직여선 안 된다. 꼬리가 밟히겠거든 과감히 잘라 버려라. 비밀 지단 한 곳이 발견되어 전멸을 당할 위기가 오더라도 전력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 명심해라. 내가 돌아오기 전에는 절대 먼저 움직여서는 안 된다.”
제갈초홍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래 지존의 명을 어길 수는 없어. 이렇게 조급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다.’
제갈초홍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옆에서 지켜 주던 파천. 그가 없는 빈자리는 예상보다 훨씬 큰 공백이었다. 그 누구도 그 공백을 대신 메울 수는 없었다.
‘지존이 오시지 않는 한 승산은 일 할도 되지 않는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다.’
중원무림맹의 군사직을 해오면서 느낀 것은 더욱 과중해진 책임감이었다. 파천이 없는 지금 중원무림맹의 움직임은 처움부터 끝까지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만약 작은 실수라도 하는 날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심려가 그녀의 몸과 마음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최근에 그녀가 완성한 일은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비밀 지단의 연결점을 완전하게 끊어 버리는 일이었다. 소면살검의 일을 겪고 나서 바로 착수한 일이기도 했다. 작은 단위 지역 내에서는 서로간의 연락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단위 지역만 넘어서면 서로가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없다.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은 하늘 아래 자신뿐이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그녀는 이빨 사이에 독단을 늘 물고 다녔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적에게 붙들리기라도 하면 가차없이 독단을 터트릴 마음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핵심 고수들이 모두 빠져 나간 지금 주변에서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대부분인 정도사령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나마 두뇌 회전이 빠르고 변함없는 충성심을 믿을 수 있는 자들이었기에 옆에 두어도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서찰에 눈길을 주었다.
정확한 소식통에 의하면 군주 중 하나가 납치되어 무황성으로 이동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접수한 경로를 반대로 추적해 본 결과 거의 확실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적의 함정일 경우를 대비한 조사였으므로 허위일 가능성은 일 할도 되지 않습니다. 적의 이동 경로는 정확하게 추정된 바 없으며 현재는 절강성 항주에 있는 사황성의 주력 가운데 구금되어 있습니다. 곧 무황성으로 옮겨질 것으로 보입니다. 속하가 생각하는 몇 가지 이동 경로를 예정하면……
(후략)
‘사실이라면 구해야 한다. 황실과는 어차피 연계할 수밖에 없고, 군주를 통해서라면 가장 확실하다. 지금까지 수집 된 정보에 의하면 지금껏 황실이 잠잠하게 있었던 건 조정에서 암약하는 간세들 때문이었다. 결국 이 상태로 간다면 명 황실은 무너지고 만다. 지존이시라면 구하라고 지시하셨을 거다.
문제는 과연 누가 이 일을 주도하느냐다. 저 쪽의 호송 책임자가 어느 정도의 고수냐에 따라 이 일은 성공과 실패로 확연하게 갈라진다. 초홍아, 초홍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좋다, 일단 검토는 해보자.’
갈등은 길었지만 결정은 신속하게 내려졌다. 그녀의 치밀한 성격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항시 일을 시작할 때 실패를 가장 먼저 염두를 둔다. 그에 따라 판을 짜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큰 타격이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짚어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해두고 무리가 따른다면 과감하게 포기한다. 이런 장점이야말로 중원의 거점을 무황성에 들키지 않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었다. 그녀는 꼬박 하루 동안을 고민한 끝에 결국 납치된 군주를 탈취하기로 작정한다. 이 일은 결국 정도사령대에게 맡겨진다. 지금으로서 제갈초홍이 가장 믿고 신임할 수 있는 조직이기도 했다.
강서성 초읍을 지나면 병풍을 두른 듯한 계곡 사이로 길게 뻗어난 길이 있다. 예전에 간혹 산적이 출몰하던 지역이기도 하거니와 강서성에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험한 지형인지라 흔히들 무리를 지어 다녔다.
거의 사십 리가 이어진 거친 길을 가자면 무엇이든 든든하게 먹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초읍객잔은 휑뎅그렁한 들판을 저 홀로 자리잡고 있지만 장사는 잘 되는 편이었다. 운하를 이용하지 않고 이 길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겐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드러내면 곤란한 물자를 운송중이거나, 도피하는 자들이 주로 이용한다고 보면 정확했다.
초읍객잔은 오늘도 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초읍객장의 주인인 팽노인은 오늘 입이 저절로 찢어지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열 배나 많은 인원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객잔에 다 수용하지 못해 너른 마당에 자리를 깔고 마련해 주어도 군소리 없이 응하는 건 주변 십 리 이내엔 유일한 객잔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육아, 어서어서 움직이지 않고 뭘 그리 꾸물대느냐?”
주방에서 나온 식사를 들고 식당 곳곳을 누벼 가던 점소이가 객잔 주인을 흘낏 쳐다보며 궁시렁대기 시작했다.
“사천 중경제일루의 점소이는 중원을 위해 제 한 몸 바쳤건만 난 저 욕심꾸러기 주인에게 돈을 벌어 주기 위해 몸을 바치는구나.”
그가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주인이 들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럼에도 큰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어서 빨리 움직이지 못하겠느냐?”
그러자 옆에 있던 손님 하나가 재촉을 한다.
“이것 보슈, 주인장. 점소이에게 뭐라 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라도 거드는 게 어떻소. 이 많은 손님을 혼자서 처리하라는 건 내가 봐도 너무한 것 같군.”
“아, 네. 그래야 하구 말고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거들 생각이 없었다. 돈을 주고 부리는 이유가 이럴 때 써먹기 위함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이고 보면 한 손이라도 거들어 점소이 녀석이 편한 꼴은 못 보는 작자였다.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아예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았다. 그걸 본 점소이가 또 투덜대기 시작했다.
“내 며칠 이네로 여길 그만두지 않으면 사람 자식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쉬는 법이 없었다. 식사를 끝마치고 일어서는 자리의 접시들을 포개고 빈자리를 말끔히 치우는가 하면 주방에서 음식이 나오자마자 부리나케 손님 탁자로 옮겨 간다.
“동족업계에 종사한 그 점소이의 위대함을 본 받아 나도 이 짓을 때려 치고 무황성을 햐애 화살 한 대라도 날려 봐야 하는데…….”
그는 중얼거리다 멈칫했다. 등 뒤에서 몰려오기 시작한 괴이한 기운 때문이었다. 등이 따끔거리는 듯했고 뒤통수가 근질근질했다.
“이놈아 뭐라고 지껄여대는 것이냐!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다간 제명에 못 죽는다는 것도 모르느냐?”
싸늘한 음성에 점소이는 땀을 삐지럭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신경 쓸 것 업삳. 너희들은 빨리 식사를 마치고 교대할 준비나 해라.”
“알겠습니다.”
그들 일행은 객잔의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병기들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 더군다나 무황성의 무사들일 것이다. 이런 걸 생각지 못한 점소이로서는 생명이 오락가락 할 정도의 큰 실수를 한 셈이었다. 자기 쪽으로 쏘아지는 사나운 눈길들을 한쪽으로 흘리며 점소이는 슬며시 그 자리를 떠났다.
객잔 밖에서도 일단의 무리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마차 세대를 둘러싸고 주변을 경계하며 음식을 들고 있었다. 점소이는 밖에 나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밥 먹을 때만은 편하게 먹어야지 저게 뭐 하는 짓이람.’
그나마 그들은 좀 나은 편이었다. 십여 명의 무사들은 동료들이 식사하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마차 주변에서 한시도 떠나지 못하고 경계에만 열중했다.
‘저 안에 뭐가 들었기에 저리 철저히 경계하는 걸까?’
노육은 궁금했지만 참기로 했다. 괜한 관심을 가지다가는 단칼에 죽는다는 것쯤 모를 리가 없었다. 객잔이 내려다보이는 곳 언덕에 머리만 살짝 내밀고 쳐다보는 자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남궁혁련이었다.
“저 세 대의 마차 중에 하나에 있단 말인데…….”
“대형, 세대의 마차가 모두 똑같고 세 곳 모두에 날라진 것을 보면 시선을 분산시키고자 함인 것 같습니다.”
부령사 두 사람이 빠진 정도사령대의 현 지휘자는 남궁혁련이었다. 그는 탁월한 지위력으로 정도사령대를 무리 없이 이끌어 갔다. 평소 신중한 성격답게 지금도 섣불리 행동하려 하지 않아싿.
“매복은 확실하게 해뒀겠지/”
“네, 염려 마십시오. 저들의 인원이 약 백여 명 가량이라고는 하지만 사령들 이백여 명의 기습을 감당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일은 금세 끝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이 언덕 위에서 자취를 감춘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객잔 안은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하나는 무황성의 고수들이었고 또 하나는 상인들 같았다. 스무 명 정도의 상인들은 대충 식사를 마치고는 밖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주시하던 무황성 고수 하나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저들,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 같지 않습니까?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데요?”
이번 호송의 책임자격인 무황성 외순찰감은 수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렇긴 하나 신경 쓸 것 없다. 이번 호송은 이부에 전혀 알려진 적이 없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라. 설사 외부에 정보가 유출되었다 하더라도 감히 누가 우리 앞을 막겠느냐.”
책임자로서 자격 미달인 자였다. 작은 허점이라도 그냥 지나칠 경우 큰 화로 돌아오는 법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을 가당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잠시 후, 호송 일행은 길을 재촉했다. 갈 길이 멀기에 이런데서 노닥거릴 여유가 없었다. 마차 세 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벌려 세우고 앞과 뒤를 무사들이 앞서고 뒤따르며 보호했다. 전체적으로 그다지 긴장하는 빛도 없어 보였다. 무사들은 이 호송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계곡 사이로 난 길은 마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폭을 지녔다. 가파르게 위로 솟은 길을 마차는 쉼 없이 덜컹거리며 잘도 올라갔다. 오르막길이 끝나고 내리막길이 펼쳐지자 무사들은 한결 편안한 표정들이 되었다.
“자, 힘을 내라. 무황성에 도착하게 되면 며칠 술독에 빠지게 해줄테니.”
어디선가 함성 소리도 난 것 같았지만 외순찰감은 고개를 돌려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이번 호송을 맡으며 절강무황부까지 갔다 오는 길은 그에겐 일상에서 긴장하며 맡기던 총군사나 사황성주를 생각하며 별일도 다 있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그의 상식으로 백여 명의 무황성 무사들을 상대하려면, 더군다나 그것이 탈취의 목적을 가지고 벌이는 거라면 최소한 두 배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 정도의 인원이 무황성과 절강무왕부의 세력권 안에 멀쩡히 들어왔다 나갈 수는 없겠기에 하는 생각이었다. 거기다 그는 또 하나 믿는 구석이 있었으므로 마음 든든해 할 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술병을 주둥이에다 갖다 붙이고 갔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단 한 번도 이렇게 따분한 임무를 맡아 본 적이 없었기에 쓸데없는 생각도 그만큼 자주 들었다.
한편 계곡 위쪽에 대기하고 있던 남궁혁련은 점차 초조해져 갔다. 원래 그가 공격 시점으로 잡은 곳은 오르막의 마지막 지역이었다.
[아직도 따라 오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정체가 무언지 알 수 없습니다.]
[괜찮을까요?]
[할 수 없지. 저들이 무황성이 따로 딸려 보낸 자들이라 하더라도 지그에 와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알겠습니다.]
스스스스
사라지는 사령을 보며 남궁혁련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럴 때 대령사가 옆에 계셨다면…….”
그는 파천을 지존이나 맹주보다는 대령사로 기억하길 좋아했다. 절대의 무공과 거침없는 지휘력을 지니고 있는 그가 그리웠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도 움직여야겠다.’
무황성 무사들 뒤를 따르던 스무 명 정도의 상인들은 원래 그들보다 앞서 객잔을 출발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들 뒤를 쫓고 있었다.
“어찌할까요?”
“흐음, 무황성에서 매복까지 준비해 놓고 있을 줄이야.”
“명을 내려 주십시오. 조그만 더 가면 공격 시기를 잡기가 힘이 듭니다.”
“할 수 없지. 계획한 대로 시행하자.”
“존명.”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상인으로 변복한 자들의 정체가 무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들은 객잔을 미리 나와 매복할 곳을 찾았었다. 그리고 마땅한 곳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매복하고 있는 자들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숨어 있다 무황성 무사들의 행렬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피차간에 서로를 무황성의 숨겨진 전력쯤으로 오인하여 빚어진 상황이었다.
“저 앞에서부터는 전력으로 마차를 몰아라.”
울퉁불퉁한 길이 거의 끝나 가는 참이었다. 무사들은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내리막길은 쉬울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마차를 뒤에서 잡아 당겨야만 했다. 이런 험한 길에서 속도를 내게 되면 자연 바퀴가 상하고 마차가 전복될 게 뻔했다. 추우 겨울에 땀을 흘리는 수하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놈들아, 그러게 진작에 무공 수련을 좀 열심히 할 것이지. 맨날 술에 절어들 사니 그 모양이지 않느냐.”
큰 소리로 힐책하고서는 자신은 말의 배를 슬쩍 찼다. 맨 앞에 있는 마차 곁으로 갈 때였다.
“으악.”
“적이다.”
“매복이다.”
갑자기 들려 온 비명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던 외순찰감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었다.
“마차를 보호해라. 전열을 정비하라.”
사방에서 몰려 나오기 시작한 적의 숫자는 얼른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많았다. 뿐만 아니라 몸놀림들을 보니 하나같이 일류 고수들이었다.
외순찰감은 말 등을 차며 허공으로 도약하여 공간을 가로질러 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가운데 마차가 있는 곳이었다. 어느 정도 전열을 정비해 가던 무황성 무사들은 살기 등등한 적의 살수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때 또다시 연속적으로 터져 나온 비명성은 행렬의 후미였다.
“끄악.”
“이번엔 또 뭐냐?”
“적이 뒤에도 있다.”
남궁혁련은 팽정후와 함께 적의 수장이 움직여 간 두 번째 마차로 다가갔다. 적들이 앞을 막아섰으나 그 정도는 이들에게 문제될 게 없었다.
“앞을 막는 자는 누구라도 죽인다.”
패앵
“끄악.”
남궁혁련의 검은 그 동안 몰라 보게 빨라지고 힘이 붙은 것 같았다. 천마교 고수들에게 영향을 받은 탓인지 필요 없는 힘을 무리하게 운용하지 않고 상대에 다라 가장 적절한 힘만을 사용했다. 팽정후의 주먹은 사람 키만 한 바위도 깨뜨리는 위력이 있었다. 권풍을 뿜어내면 이 장 밖에 있는 사람까지 상처 입을 정도였다.
“하하하하, 이놈들아. 그 동안 잘도 설치고 다녔겟다. 이 어르신의 주먹 맛이나 봐라.”
꾸르르릉
연신 공기를 진동시키 강기 소리가 사방을 향해 쏟아졌다. 몇 명의 무사가 남궁혁련과 팽정후의 공격에 맥도 추지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여기저기에 낯익는 얼굴들이 보였다. 남궁아연과 남궁혜미 뿐만 아니라 화산4검, 당정우와 당소윤 남매도 보였다. 그들은 간만에 마음껏 무공을 뽐내는 것이 즐겁다는 표정들이었다.
정도사령대 오백 명 중에 이번 일에 동원된 자만 이백이었다. 이 정도의 인원으로 백여 명의 무황성 무사들에게 곤란을 겪을 일은 없었다. 어차피 이번 작전의 요지는 군주를 구해내는 일이었다.
남궁혁련은 검으로 신중하게 중간에 있는 마차를 향해 내리그었다.
크앙
그는 검강을 운용해 마차의 옆면만 터트렸다. 그 안에는 누군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이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그 자는 미동도 없이 고요히 좌정하고 있었다.
“이런, 잘못 짚었단 말인가?”
남궁혁련은 마차에 앉아 있는 자가 여자도 아닌 남자에다 노인임을 발견하고는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앉아 있는 모양이 범상치 않아 보였고, 의도적으로 뿜어내는 기도 또한 대단했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남궁혁련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수비 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상대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어린놈이 대단하구나.”
팽정후를 상대하던 외순찰감이 지른 소리였다. 팽정후는 아직은 거뜬했지만 백 초를 넘길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상대는 자신보다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고수였다. 슬쩍 그쪽을 쳐다본 남궁혁련은 아직도 노인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발을 굴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상한 늙은이군.’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제 수하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데도 별반 관심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남궁혁련은 제일 앞에 있는 마차를 공격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 주위엔 겹겹이 포위망을 구축한 무황성 무사들이 보였다. 그들을 제일 앞서 공격하는 이는 자신의 여동생인 남궁혜미였다.
“차앗.”
매서운 검기가 무사들을 쓸어 간다. 그렇지만 상대들 역시 그리 쉽사리 당해 줄 만큼 호락호락한 위인들은 아니었다.
창창
몇 합의 대결로도 격퇴시키지 못하자 남궁혜미는 은근히 약이 올랐다. 적의 수비 대형은 견고해서 그리 쉽게 뚫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화산4검의 첫째인 제옥풍이 검강을 날려 상대의 검을 쳐올린 사이에 남궁혜미의 검이 상대의 목을 꿰뚫었다.
“커, 컥.”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무황성 무사들의 숫자는 줄어들어 갔다. 저멀리 가장 뒤쪽에 있던 마차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상인 차림의 신비인 스무 명이 해낸 일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꽤나 대단한 것이어서 혼자서 두 명의 무황성 무사를 당해 낼 정도는 되었다. 남궁혁련은 공격을 하는 와중에도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려보았다. 역시 그곳에도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이번엔 거탑을 연상케 할 정도로 큰 덩치의 소유자였다.
“이곳에 군주가 있다. 모두 힘을 내라.”‘
남궁혁련의 말에 무황성 무사들까지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 역시 호송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점차 접전은 치열해져 갔지만 쉽사리 결정날 것 같지는 않았다. 남아 있는 무화성 무사들은 사십여 명 남짓이었지만 죽어간 자들보다는 비교적 강한 자들이었고, 게다가 마차를 둘러싸고 워낙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명의 상인차림의 신비인들도 슬슬 눈치를 봐가며 무황성의 무사들을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 서로가 적이 아닐 거라는 짐작만으로 합작하고 있는 셈이었다. 뒤쪽엔 깨어진 마차에 눈감고 앉아 있는 두 노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남궁혁련은 격전장에서 약간 뒤로 빠져 나와 상황을 지켜 보았다.
‘이제 한식경 정도면 상황은 끝난다. 이렇게 되면 만일을 대비해 요청해 놓은 지원이 필요 업겠구나.’
제갈초홍은 그가 떠나 올 때 이렇게 말했다.
“혹시 그쪽에 초절정 고수라도 있을지 모르니 우리 쪽에서도 미리 준비를 해야겠어요. 남궁사령을 못 믿어서가 아님은 아실 거예요. 마도8문 중의 하나인 살막주 살황과 의천백룡 곽운성 부령사의 사매인 설봉(雪鳳) 옥첨향(玉添香) 소저가 도와 줄 거예요. 그들은 상황이 우리 쪽에 블리하지 않는 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제갈초홍은 한때 무당파의 속가제자 신분이었던 적이 있었다. 굳이 당시의 배분을 따지자면 곽운성이나 옥첨향은 그녀의 사숙과 사고가 된다. 먼발치에서 두어 번 본 적이 이씨만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 그녀가 제 발로 개방을 찾아와 연결이 된 것이다.
그녀의 무공 수준은 오히려 곽운성을 능가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원체 세상 나들이를 하지 않는 여인이어서 그 실력이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무당파에서 은밀히 퍼져 나간 것이기에 신빙성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핵심 고수들이 빠져 나간 중원무림맹에 힘을 보태고 있었는데 든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궁혁련은 사실 그녀의 실력이 어떠한지를 보고 싶었다. 살막주의 실력이야 익히 아는 바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정도사령들 모두가 가진 생각이기도 했다.
‘오늘은 그녀를 볼 일이 없겠군.’
이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슬쩍 돌아보았다. 여기 어딘 가에는 그녀가 있으리란 생각에서 자기도 모르게 취한 행동이었다. 남궁혁련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체되자 자신도 격전장으로 가담해 갔다. 이미 상황은 종료 직전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외순찰감은 여기저기 상처르르 입고서 울부짖었다.
“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겁니까! 우리 모두가 죽기를 기다리는 겁니까!”
피 토하는 절규에 공격하는 자들도 살아 남은 무황성의 고수들도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다시 격전이 시작되려 했다. 그때 외순찰감의 검이 뒤족에 있는 마차를 향했고 그러자 검강이 발출되었다.
콰앙
박살 난 마차 안이 좌중에 남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이럴 수가.”
없었다. 아리땁든 그렇지 않든 군주라면 여자일 것이다. 마차 안에는 염소 수염을 하고 한쪽 눈 주위에 계란만한 반점이 있는 노인이 역시 두 대의 마차와 다름없이 좌정하고 미동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
남궁혁련의 욏미에 정도사령들은 신속하게 뒤로 물러난다. 그들의 얼굴은 침중해져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속은 건가?”
남궁혁련이 하는 혼잣말에 외순찰감은 키득키득대며 말했다.
“속은 거지. 솔직히 이 정보가 어떻게 유출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군주는 무황성에 도착했을 거다. 군주는 운하를 통해 배를 타고 무황성으로 갔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적의 공격에 대비해 이런 행렬을 따로 준비했던 건데, 크크크크. 너희들은 보기 좋게 걸린 거다.”
“네 말대로 하자면 함정이란 건가? 웃기는군. 물론 우리가 헛다리를 짚었다는 건 인정하지. 그렇지만 보다시피 너희는 거의 전멸했다. 이건 함정이라 할 수도 없지.”
“크크크, 멍청한 놈. 너희가 고통 중에 죽어 가는 꼴을 보지 못해 아쉽다만…… 장담하건데 너희들 중에 살아서 돌아갈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쳐라.”
그들은 죽기로 각오하고 덤벼들었다. 승패는 갈렸지만 그들으 깔끔한 죽음을 원했다. 정도사령대의 손속은 인정을 허락지 않았다. 그 동안 중원이 당한 억울함을 풀기라도 하는 듯한 잔인한 손속들이었다. 한 명의 몸에 서너 개의 검과 도가 박혀 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목으르 뎅강 잘라 버렸다.
“커억.”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은 외순찰감의 눈동자엔 희미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가 남긴 말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남궁혁련을 비롯한 사령들과 상인 차림의 신비인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던 그들이 한결같이 동시에 쳐다본 것은 세 대의 마차에 각기 앉아 있는 노인들이었다.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서 아무런 기운도 스며 나오지 않았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
재차 터진 남궁혁련의 명령에 정도사령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스무 명의 신비인들은 뒤로 물러서지 안혹 오히려 마차로 다가갔다.
“이제야 끝나 건가.”
“한심한 놈들이야.”
“별 재미도 없겠는데.”
각기 한 마디씩 하며 얼음같이 굳어 있던 노인들의 표정이 풀리며 슬며시 눈을 떴다. 다가서던 신비인들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리 오너라.”
그들 세 노인이 각기 활짝 두 손을 펼치자 근처에 있던 신비인들 십여 명이 한꺼번에 세 방향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괴인들의 근처 일장까지 미치는 순간 놀랍게도 그들의 몸은 절로 녹아들어갔다.
“크크크크”
“역시 약해빠진 놈들이었군.”
사위는 순간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린 무황성 마전의 고수들이다. 너희들을 지옥으로 인도해 주마.”
제갈초홍이 말하길, 절대 마주치면 안 될 네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했다. 그 첫째가 무황성 마전이며, 둘째가 내밀원이며, 셋째가 호교원이다. 마지막으로 마황군이다. 현 중원무림맹 고수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네 부류의 인간들 중, 하나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세 명씩이나. 이들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있는 고수들일 거라 했다.
남궁혁련은 믿지 않았다. 강한 고수들이란 생각은 했지만 설마 하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이런 자들을 상대하려면 신수궁에 가 있는 핵심 고수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어찌해야 할 바를 결정치 못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남궁 공자. 어차피 목표를 이주리 못했으니 저 노괴들을 상대해 봐야 소용이 없어요. 어서 빨리 정도사령대를 퇴각시키세요.]
여인의 음성이었다. 남궁혁련은 직감적으로 누구의 전음인가를 깨달았다.
“모두 퇴각하라.”
멍청하게 굳어 있던 정도사령들은 그 소리에 퍼뜩 꿈에서 깨어났다. 이후 전력을 다해 장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림없는 소리.”
쉬이이익
세 명의 노마들은 허공 중에 몸을 띄어 올리곤 아래쪽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그 위력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콰쾅
“꺼억”
거북이 등처럼 땅이 균열되고 바위가 깨져 허공으로 비산했다. 인간의 손속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령들은 멈추지 않았다. 괜히 이 자리에서 오기를 불태워 보았자 얻을 소득은 아무것도 없음을 그들 스스로가 잘 알았다.
“모두 그 자리에 멈춰라. 한 놈도 도망가지 못한다.”
“흥, 그렇게는 안 된다.”
후루루룩.”
백의를 펼럭이며 한 여인이 노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허공을 움직이며 얼굴에 반점이 있는 노마를 향해 검을 떨쳤다.
“이건 또 웬 계집이냐?”
노마는 손을 뒤집으며 거치적대는 여인을 쳐죽이려 했다.
“헉.”
심상치 않은 기운이 몰려 오자 그는 전력을 뽑아 올렸다.
콰아아아
대기가 휘말려 오르고 쩡쩡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이에 반해 백의 여인의 검에서 비롯된 기운은 부드럽기만 했다.
쾅
“으음.”
노마는 충격으로 뒤로 삼 장이나 밀려났지만 여전히 허공 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나이 어린 계집이 보통이 아니군.”
“킬킬, 계집 하나 처지하지 못하고 망신을 당하는군.”
가운데 마차에 앉아 있던 노인의 말이었다.
그와 거대한 체구의 노인은 전력을 다해 도망가는 사령들과 상인차림의 신비인들을 쫓았다.
“여기도 있다. 이 징그러운 노마들.”
또 한 명이 장내에 나타났다. 그는 살막의 막주 살왕이었다. 한때는 중원 최고의 살수라 불리던 자객들의 신화였던 자였다. 그의 무공은 마도8문의 수장 중 하나였기에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세 노마 중 가장 평범한 외모의 노인이 살왕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이건 또 웬 거지같은 놈이냐? 보아하니 자객질이나 해먹으면 딱 맞을 놈이군.”
살왕은 정확하게 본 것이라 감탄만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품안에 잡히는 단검을 있는대로 상대에게 뿌렸다.
쉬쉬쉬
“장난질이나 하자고 날 불러 세웠느냐.”
휘리릭
아무렇게나 휘젓는 손길에 단검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고.
그는 물끄러미 살왕을 쳐다보며 다음 수를 써보라고 재촉했다. 살왕은 상대의 여유 넘치는 못브에 부아가 치밀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런 처지로 전략했더란 말인가.
“하앗.”
검을 고쳐 잡고 전력을 끌어 모았다. 검을 타고 암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자객검은 원래가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적의 허점을 노려 일검에 적을 죽이지 못하면 되려 자신이 당할 가능성이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 살왕이 펼치는 것은 자객검이 아니었다.
“타앗”
꽈르르릉
뇌전을 방불케 하는 뇌음을 동한반 검강이 쭈욱 뻗어 나갔다. 검강은 상대의 전신 세 곳을 각기 노렸다. 머리와 목과 심장.
“이건 좀 그럴 듯하군.”
슈슈슛
“아닛?”
“여기다. 이놈아.”
살왕은 뒤쪽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가슴 한쪽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느새 노인의 진기가 흘러 나와 자신의 전신요혈을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했구나.’
어이없는 일이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도 있었지만 상대는 자신이 막아낼 수 있는 자가 아니었던 거다. 비참한 건 둘째치고 그는 사령들의 안위가 염려되었다. 이 자리에 함게 온 설봉은 비교적 노마를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 무엇으로도 결코 밀린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한 명의 노마는 사령들의 뒤를 쫓아 갔다. 그리고 뒤에 있는 노마 역시 자신을 죽이고 곧 뒤를 쫓을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가 무능한 놈이었던 것을…….”
그는 시수궁의 수련에 포함되길 바랬었다. 그렇지만 지존은 자신을 뽑아 주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없는 사이…… 중원을 지켜 주시오.”
중원을 지켜 달라는 말! 당신들을 믿는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록 음지에서나마 중원을 위해 작은 일일지언정 해왔었다 자부했다.
‘마지막이 영 시원치 않군.’
“유언이나 해라.”
“헛소리하지 마라, 노마. 잠시뿐이다. 너희가 찧고 까부는 호시절은 잠시뿐이다. 너희들은 모른다.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때 가서 피눈……컥.”
“지랄하고 있군. 곧 죽어도 큰 소리는”
살왕의 허리는 반쪽으로 동강나 버렸다. 눈도 감지 못감고 죽은 자의 얼굴이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죽었다. 그건 그 자신만이 알 일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으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중원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겠다., 흐흐흐흐/”
살왕을 죽인 것만으로는 양에 안 차는지 그의 신형은 빠른 속도로 반대편을 향해 날아갔다.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기 위함이었다. 남궁혁련은 도망가면서도 큰 소리로 외쳤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라. 여기서 헛된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도 서글펐다. 웬만해야 죽을 각오라도 싸워 볼 텐데 이건 아예 대적한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 이런 기가 찰 노릇이 어디 있는가.
이백여 명의 사령들은 전력으로 도망갔지만 그것도 쉽지 않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어느새 앞질러 온 노마가 거대한 팔을 휘저으며 허공에서 땅을 향해 강기를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쾅쾅
폭탄을 매설해 놓고 터뜨리는 것 같았다. 땅 거죽이 뒤집히며 흙덩이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고, 여러 개의 구덩이가 점차 그 크기를 더 했다. 고양이가 쥐를 갖고 노는 듯, 유홍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사령들이 없는 곳을 향해서만 강기를 쏘았다.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그들이 도망갈 곳은 차단된 셈이었다. 그들은 어찌해야 하는지를 남궁혁련에게 묻고 싶었다.
‘결국…… 죽기로 각오하고 싸워야 한단 말인가. 진정 중원에 새로운 하늘을 열리는 걸 보고 싶었거늘.”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사령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한마디.
“우리 여기서 모두 주자.”
“우와.”
비탄에 젖은 아쉬움의 한숨이 아닌 함성이 터져 나오리라곤 그들 스스로도 몰랐다. 가슴 밑바닥에서 흘러 나오 소리엔 그 동안 억눌러 놓았던 무인으로서의 기개가 숨어 있었다.
“어찌 그리 쉽게 목숨을 버리려 하시오.”
새로이 장내에 나타난 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자신들 또래에 불과한 청년이었다. 뭔가 새로운 희망이라고 생기나 내심 기대했던 그들은 젊은 천년을 보고 낙담했다. 그러나 남궁혁련만은 달랐다. 허공에 떠 있는 노마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젊은이의 기도는 어디선가 본 듯했다.
‘저 기도……. 그래, 저건 대령사의 기도다.’
그는 꿈을 꾼다 여겼다. 그렇지만 현실의 대상은 대령사가 아니었다. 은의를 걸친 젊은 미청년은 남궁혁련을 똑바로 보며 다가갔다. 사령들의 삼 장 앞에 우뚝 선 청년은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늦지 않아 다행이오. 중원의 의혼들이 이런 곳에서 헛되이 사라질 뻔했구려.”
“그대는?”
“난 무명인이오. 이름을 버린 지 오래라서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시종일관 조용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괜히 이 자리에 나서서 억울한 죽음을 당할 이유가 그대에겐 없소이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 또한 중원인이고 보면 무관하다 할 수 없지요. 더군다나 그가 누구든 위기를 외면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뜻은 가상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이오. 어서 돌아가시오.”
청년은 오히려 화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절 염려해 주신 뜻은 고맙지만 귀 공의 말씀대로 현실은 냉정한 법이지요.”
“무슨 개소리들이냐? 죽음이 두려워 드디어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이더냐?”
아직 허공에 떠 있던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 냅다 지른 소리였다. 이어 떠 한 명의 노인이 장내에 나타났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저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지켜 보고 있었지.”
“빨리 모두 때려 죽이고 그만 돌아가세.”
“그럴까?”
그들은 들풀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메뚜기라도 잡는 듯이 쉽게 말했다. 그들은 슬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악한 자들, 인륜을 저버리고 패악을 몸에 둘렀으니 그 죄가 어찌 작다 하리오. 내 오늘 너희의 죄과를 천지신명을 대신하여 묻고자 하니 죽어서도 잊지 말고 참회하도록 하거라.”
자신들을 향해 웬 미친놈이 일성대갈을 해대자, 어안이 벙벙해진 두 노마는 서로를 마주보며 멍청해지고야 말았다. 그것도 잠시, 분기탱천한 노마가 두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까지 해대며 식식거렸다. 그냥 죽이면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아서였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녀석이 누구보고 훈계를 하는 것이냐! 내 너의 사지를 자르고 찢고 토막내어 반은 들개에게 주고 반은 돼지에게 먹여야겠다.
“저 험한 일 좀 보소. 당신의 업은 한 가지 더 추가해야겠군. 입으로 악업을 쌓으니 그 어찌 작다 하겠는가. 장차 후세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고자 그 혀를 먼저 뽑아내야겠구나. 부디 날 원망하지 말아라.”
“저, 저, 저, 저놈이!”
“허, 어이가 업슨 놈일세.”
두 사람의 반응을 제각각이었다. 그렇지만 살심을 일으키는 건 똑같았다. 청년의 뒤에 서 있던 남궁혁련 등은 대체 어찌하려고 저리 여유를 부리는지 모르겠단 표정들이었다. 그들이 노했으니 편히 죽기도 힘들겠다고 염려하는 자들도 있었다.
“네 놈이 그리 큰 소리를 치는 걸 보니 그만한 실력이 있으렷다. 좋다. 한번 마음껏 날 공격해 보거라.”
열 살도 안 된 아이를 제자로 둔 이가 비무를 재촉하는 듯한 말이었다.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지는 두 사람 모두 오래였다. 그런데도 이리 망설이는 데는 뭔가 억울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눈앞에 있는 놈을 쳐죽이면 그 분이 한 동안 가시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네 놈이 끝끝내 오마방자함을 버리지 못하는구나. 이놈아, 너는 사부도, 부모도 없더냐? 노인 공경은 못할망정…….”
말을 하다보니 이상한 걸 느낀 노마가 입을 꾸욱 다물고 말았다.
“오호, 이제 보니 그런 것도 알고 있었구나. 난 또 개, 돼지가 잠시 인두겁을 썼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던가 보군, 너희 무황성의 것들은 하나같이 인간이라 할 수도 없이 잔악하여 패륜을 부끄럼 없이 저질러서 난 또 다 그런가 했더니 내 오해였던가 보군.”
사내는 정말이지 진진하게 그 말을 하고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사령들 중에 몇몇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대들은 참 이상하군. 그리 오래 허공에 머물러 있자면 그대들이 신선이 아니고 내공 소모가 막심할 터인데 그건 무슨 짓거리인지 모르겠군. 아하, 내가 아둔하여 미처 깨닫지 못했군. 이제 보니 그대들은 땅을 밟기가 스스로 부끄러워 그리하고 있는 거구려.”
“하하하하”
“호호호”
현 처지의 위급함과는 상관없이 드디어 참고 있던 웃음보가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이놈들 모조리 때려 죽이고야 말겠다.”
“아, 한 가지 더. 내가 말했다시피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내 옷자락 하나도 움켜잡지 못할 터이니 괜한 멋 부리지 말고 땅에 내려서 운기조식이라도 함이 어떠할는지, 이건 진정 어린 충고요.”
“이! 놈!”
두 노인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그들의 두 손엔 하늘과 땅을 불태울 듯한 화염과 냉기가 동시에 흘러 나왔고 거기에 땅을 뒤집어 놓을 만한 힘까지 실려 있었다.
“역시 두 놈이 동시에 덤비는군, 모두 뒤로 물러나시오.”
쩌렁쩌렁 울린 소리에 사령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미청년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를 웅웅거리며 울리고 있었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의 내공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휘리리릭 스스스스
눈을 감았다 뜨면 일장 전진해 있고 다시 보면 십여 장이나 옮겨 가 있었다.
“극상승의 이형환위다.”
누군가 외친 소리와 같이 그들이 단 한 번도 견식해 보지 못한 고도의 이형환위였다. 저렇게 여러 번에 걸쳐 진상조차 남기지 않는 이형환위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심지어 노인들의 한 걸음 앞까지 갔다가 그들의 등 뒤로 돌아가니 이게 무슨 귀신같은 신법이란 말인가.
노인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적과 손을 맞대는 건 고사하고 그의 말마따나 옷자락조차 움키지 못하니 눈알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다. 마치 조롱하듯 여기저기 옮겨다니던 청년에게서 또다시 훈계조의 말이 흘러 나왔다.
“생명은 모두가 소중한 것이되 그 가치를 모르는 자에겐 헛된 것이라. 내 그대들의 악업을 여기서 종식시킴도 그대들을 위한 것이니 아무쪼록 원을 지고 세상을 떠나지 말기를 바라노라. 눈을 감고 보면 세상이 어둠이나, 세상은 그대들 생각처럼 어둠만이 있는 건 아니니, 세상의 빛을 위해 내 잠시 자청하여 생명을 거두니, 하늘은 분노하지 마시고 땅은 잠자코 있을 지어다.”
“오오.”
“저, 저것은.”
모두들 시선이 허공 한 곳에 머물러 떨어질 줄 몰랐다. 노인들 역시 그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은의인은 허공을 밟고 서서는 두 손을 모았다. 모아진 손바닥 사이에서 눈을 멀 것처럼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모아진 손바닥을 벌려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을 본 두 노마는 위기감을 느끼며 두 장심에 전력을 돋우기 시작했다. 모든 잠력까지 격발시켜 전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들의 몸이 잠시간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타앗.”
“죽어라, 재수 없는 놈”
청년은 두 눈을 감고 있다 천천히 뜨며 양 손을 앞으로 쭈욱 밀었다.
화악
빛의 폭풍인가. 폭발한 빛은 노마들의 장력을 소리 없이 녹이고는 그대로 그들의 몸을 덮어 버렸다.
툭
툭
무엇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뼈다귀였다. 사람의 몸에서 가죽과 내장과 피가 완전히 제거된 뼈였는데 거무스름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전경에 사령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 노마들의 가공할 무위를 직접 경험한 자신들로서는 그들의 허망한 죽음이 불가사의하게만 여겨졌다. 과연 저기 허공 중에 옷자락을 날리고 더 있는 자는 인간이 아닌 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건 모두가 공유하는 생각이었다.
그때 마침 설봉이 한 손에 피가 뚝뚝 흐르는 머리통 하나를 쥐고 장내에 나타났다. 그녀는 몸 여기저기에 가볍지 않은 상처들을 입고 있었지만 견딜 만한 것 같았다. 그녀는 장내의 묘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도사령대는 이후 뒷수습을 해갔다. 동료들의 시체를 거두고는 장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십여 명 정도가 살아남은 상인 차림의 고수들은 황실에서 나았다고 했다. 자신들은 어사대의 일원이며, 군주의 실종을 조사하던 중이라는 것이다. 이제 황실에 들어가 이 모든 일을 보고하면 장차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가 두렵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들마저 떠나 가고 난 뒤 설봉 옥첨향은 남궁혁련을 따로 불러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녀는 사령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미청년을 멀리 눈여겨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쉽게 볼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그가 생명의 은인이고 또한 얼마 전에 대산장에 나타났던 신비인이라고 밝혀졌다고는 하지만 무림맹 총단에 들인다는 건 여러모로 무리가 따랐다. 그녀의 의견에 남궁혁련도 반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야 물론이지요. 조직엔 엄연한 규칙이 있는 건데 그걸 무시할 수는 없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군사에게 이 모든 일을 전서로 알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에게 온 답변은 의외로 냉정한 거절이었다.
ºO°¡CO´I´U. 그를 총단으로 들일 수는 없습니다.
현명하게 처신하시리라 믿습니다.
짤막한 글귀였지만 그녀의 뜻은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남궁혁련은 어렵게 은의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내부의 방침이 분명치 않아 은공을 모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의견이 결정되는 대로 은공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사령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렇지만 남궁혁련은 손을 들어 제지하고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했다.
“은혜를 입고 도리가 아닌 줄은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럼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은의인은 환한 웃음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개의치 마십시오. 무슨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니고, 전 단지…… 중원의 의혼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하여 부족하나마 한 힘이라도 보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런 것이었으니까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디로 가시는지요?”
“발길 닿는 대로 갈 생각입니다. 이번엔 낙양 쪽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그럼, 몸조심하십시오.”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그들은 헤어졌다. 설봉은 떠나 가는 신비인의 뒷모습을 눈여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