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97화 : 돌아온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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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97화 : 돌아온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돌아온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사람들의 의식은 알고 있다. 변화! 그것이 시간을 느끼게 해주었다. 파천과 중원무림맹의 고수들이 신수궁으로 들어간 지 일년 하고도 몇 달이 흘러 갔다, 시간은 모두를 변화시켰다. 특히 요 일년 간의 변화는 중원 역사상 가장 극심한 것이었다.
사람이 역사의 주체라고 하지만 근래의 세상을 살펴보면 인간은 어느새 주체에서 떠밀려 버린 느낌이었다. 인간은 없고 명분만 남았다. 인간은 없고 입장만 남았다. 인간은 없고 욕심만 남았으며, 인간은 없고 원한만 남았다. 그 안에 인간은 없었다. 죽음의 공포에 절어 인간임을 잊은 인간, 죽이고자 제 힘을 맘껏 뽐내는 인간, 이미 죽었음에도 그걸 모르는 인간만이 인간인 채 거리를 활보하고, 그들에 의해 세상은 점차 죽어갔다.
혼세마인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했으며, 그들은 어딜 가더라도 환영받았다. 그들을 환영하는 게 비록 까마귀들 뿐이었지만.
혈마는 상여락, 초량과 함께 손을 잡았다. 어차피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뭉쳤으니 그 하는 짓이란 뻔했다. 공통점이라면 일월교주라는, 아직은 침범할 수 없는 절대 권위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상여락과 초량은 정권 인수를 아주 훌륭히 완수해내었다. 초량은 사부의 가슴에 두 손을 박아 고이 영면에 들도록 했으며 상여락은 사형을 푹 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병신이 된 혈마천주는 앞으로 평생을 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혼세마인을 척결하겠다 호언장담하며 무황성을 떠났던 뇌령은 그 강한 힘을 갖고도 그들의 그림자나 쫓기 바빴고, 간혹 혈마의 혈영신들에게 상갓집 개 쫓기듯 도망 다니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큰소리치고 다녔으니 그의 공력은 입에 팔 할이 모여 있는게 틀림없었다.
가장 큰 변화는 중원무림맹에 일어났다. 중원의 떠오르는 태양! 아니, 이제 영원히지지 않을 태양으로까지 부상한 천 공자는 어느덧 중원무림맹 전 무사들의 절대적인 추종을 이끌어내었고, 결국 군사인 제갈초홍과 정도사령대와 몇 몇 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시 맹주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후 그는 보란 듯이 많은 일을 해내어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뿌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황군과 은밀한 동맹을 끌어내었으며, 야림의 절대적인 지지하에 새외의 떨거지들을 어느 정도는 정리할 수 있었다. 새롭게 야림주가 된 명은 중원무림맹 임시 맹주의 명령이라면 천 길 낭떠러지에서도 의심 없이 뛰어내릴 수 있고, 부글부글 끓어대는 용암에도 과감히 몸을 던질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변화는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파천과 그 지지자들을 중원이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기다림에 지쳐 원망하다가 이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기억 속에서 내몰린 자들을 향해 이제는 원망도 기대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변화된 세상에선 나름대로 거기에 맞춰 살아 가는 인간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살고 있었다.

±ºμμ ¾O ¹U´U, 파도 위에 사람이 서 있다. 파도에 몸을 싣고 거기에 출렁이는 자의 금발이 한없이 쓸쓸하고 허전했다. 바닷바람이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그에겐 아직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대륙의 바람에 길러진 그였기에 오늘도 그는 대륙을 그리워하며 저 끝없는 창공을 향해 제 혼을 실어 보냈다.
중원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은 지 오래였다. 제갈초홍에게서 소식이 끊어진 지 벌써 육 개월이 넘어갔다. 미칠 것 같은 하루를 백 여든 날이나 견디고도 멀쩡한 자신이 그는 너무도 신기했다. 단숨에 날아갈 것만 같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는 그리움만을 파도에 실어 보내었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갈매기 울어대도 그가 듣고자 하는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부쩍 수척해진 듯한 건 그가 딛고 선 바다가 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심중의 고뇌가 깊기 때문일까. 파천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저 하늘 아래엔 그리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저 하늘 아래엔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저 하늘 아래엔 그리움이 있다고 되뇌는 것도 이젠 지겨웠다.
그를 쳐다보는 눈들이 언덕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 그들은 수백번도 더 본 전경을 오늘 처음 본 듯이 쳐다보았다. 모두 죽을힘을 다해 수련을 했다.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긴 자도 있었고 몇 번인가 주화입마를 경험한 자들도 많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유혹은 셀 수도 없이 찾아 왔지만 그때마다 그들을 지탱시켜 준 힘은 저 말 없는 고요한 시선으로 중원을 염원하는 눈동자였다. 그를 보며 어려움을 이기고 그를 느끼며 새 힘을 얻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자리에 섰다. 중원을 향해 자신 있게. 비겁하지 않은 모습으로 서기 위해 그 긴 고통을 감내해 왔다는 걸 모든 눈들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파천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와 보조를 맞춰 그를 향한 눈동자들도 위쪽으로 향한다.
“타앗.”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바다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금방 들끊어 공기 중으로 녹아들 듯 요동치던 바다의 일부분이 물줄기로 솟았다.
콰아아아
거대한 부피로 솟구치는 두 줄기의 물! 파천의 손이 앞을 향해 가리키는 순간, 포말이 되어 하얗게 부서졌다. 그렇지만 그건 눈의 착각이었다. 수천, 수만의 작은 물들은 단단하게 뭉쳐 파천의 손짓에 따라 춤을 춘다. 파천을 중심으로 휘돌기 시작한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었다.
콰아아아
바람이 불어 언덕에 선 자들의 옷깃을 사정없이 날려도 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하앗.”
파천의 두 팔이 양쪽으로 시원스럽게 갈라진 순간, 허공에서 맹렬하게 돌아가던 거대한 물방울들이 바다를 향해 제 몸을 부딪혀갔다.
콰앙

콰과과광
파천의 아래쪽 삼십 장 방원의 바다가 거짓말처럼 쑥 내려갔다가 다시 치솟았다. 그 파장은 대단했다. 집채만한 파도가 해변으로 물려드는가 하면 파고가 십여 장이나 솟구쳐 올랐다.
언덕에 선 자들은 왜 그가 저러는지를 잘 알았다. 불안했던 것이다. 육 개월 간 소식이 없다는 것 때문에, 그는 불안했다. 지금 중원으로 떠나는 것만 남았는데도 아직까지 출발 명령을 내리 않는 이유를 그들은 너무도 잘 알았다. 어려운 선택이었고 모두들 잘 견뎌 주었지만 정작 중원의 운명이 그간에 어찌 되었는지를 모르니 불안했던 것이다.
만약 중원의 현 상황이 최악이라면, 그 원흉들이 활개치는 세상이라면……. 언덕에 선 자들은 생각했다. 세상은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지존에 의해 세상은 완전히 쑥대밭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존은 강했다. 그들이 아는 지존은 그토록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지존께서 ‘출발’ 이란 한 마디를 할 때를.
파천이 돌아섰다.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의 반을 덮고 있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중원으로 가자.”
출발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언덕에 선 자들은 가슴에 구멍을 뚫고 공기라도 집어 넣은 듯이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출발!”
언덕에 선 자들의 입에서 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마나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던가. 이 소리를 하기 위해 그토록이나 힘들었음을. 그렇게 부를 수만 있다면 그들은 목놓아 외치고 싶었다. 중원이여. 너는 아는가. 우리가 이렇게 너희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그들은 하늘을 날았다. 간간이 바다를 차오르며 허공을 마음껏 누볐다. 대륙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얼굴은 환해져 갔다. 육지의 냄새가 날수록 그들의 눈은 축축이 젖어갔다.

파천과 일행은 중원 땅을 밟자마자 변화를 감지했다. 먼저 그 많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에 들어섰음에도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고작 있는 사람들도 그들을 보며 슬금슬금 피해 갔다.
객잔을 찾기 위해 그들은 광주를 한참 동안이나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객잔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장사는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지나는 꼬마를 잡고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먹지 못해 힘이 없어 뵈는, 저 바싹 마른 몸을 간신히 벽에 붙인 노파를 흔들어 깨울 수도 없었다. 파천은 노파  측은해 다가갔다.
“이놈아, 내가 죽은 줄 알았지! 날 죽여 봐야 훔쳐 갈 것도 없다. 어서 썩 꺼지거라, 이놈아!”
파처은 충격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게 현실이라면 너무 비참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어 볼 것도 없었다. 거리가 이 모양이고 사람들이 이 꼴이라면 현 중원의 상황은 어떨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할머니, 자 이걸 가지세요.”
두려움에 발악을 해대는 노파의 손을 잡고 파천은 은자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앞장서 거리를 걸었다. 뒤를 따르는 일행들의 마음 역시나 비감에 젖어들긴 마찬가지였다. 노파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표정이더니 파천의 등 뒤를 향해 연신 절을 해대었다.
저 멀리서 이걸 훔쳐 보는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두 눈을 빛내며 파천과 그 일행들이 멀리멀리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파천의 괜한 동정심이 노파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닐지……. 그러나 파천은 그걸 모르고 사라졌다.

파천은 대륙을 북상하며 많은 걸 보고 들었다. 중원의 사정은 생각보다 더욱 심했다.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광동이 그 중 가장 안 좋다는 걸 느꼈다는 것 정도였다. 그 이유가 광동무왕이었더, 지금은 이황 중 남황이라 자칭하는 초량이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이란 얘기가 있었다. 강서와 북건, 광동, 광서, 귀주 등은 남황인 초량이 다스렸고, 북황인 상여락은 사천과 섬서, 산서, 산동, 하남을 다스렸다. 무황성은 호광을 사수하기에만도 벅차다 했다/
이렇게 된데는 내밀원과 마전이, 호교원과 혼세마인들을 감당하는 것만도 힘에 겨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찌 된 연유인지 최근의 중원무림맹은 무황성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이런 이유도 그들 두 사람은 절강에마 웅크리고 제 목숨 연명하기에도 바쁜 사황성주를 적선이라도 하듯 내버려 두고 있다 했다.
파천은 중원무림맹의 비밀 총단을 찾았지마 그곳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어찌 된 사연인지를 몰라 그들은 개방을 찾았다. 개왕이 수소문해 본 결과 총단은 몇 번인가 위치를 바꾸었다 한다. 그리고 지금은 개방에서조차 그들과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군사가 실종된 지가 한 육 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여러 가지 소문을 종합해 보면 무황성에 납치되었다는 말도 들리고, 남황에게 끌려 갔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다른 소식에 의하면 혼세마인에게 살해되었다는 것도 있어서…….”
모두 좋지 않은 소식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파천은 심장에 돌을 얹어 놓은 듯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가슴 한쪽이 떨어질 것처럼 아프기도 했다.
“맹과 연락을 취할 길을 없느냐?”
“없습니다. 그들과 본 개방은 분리된 지 꽤나 되었습니다.”
눈앞이 깜깜했다. 대체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파천의 일행은 개방의 분타에서 휴식을 취하며 여러 가지 소식을 접했다. 그리 길지 않은 세월동안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변화에 그들 모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야림주가 그렇게 죽었단 말인가?”
“손자 명이 복수를 다짐하고 내밀원과 마전을 중심으로 무황성만을 공격하는 건 다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분타주의 설명을 듣고 있던 파천은 고개를 떨구었다. 신수궁주인 태숙이 개방 분타주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래도 무슨 방법이 있을 게 아니오?”
“없다니까요.”
“야, 이놈아. 방법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개방이 언제부터 이렇게 소식에 무뎌졌단 말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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