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00화 : 나 대신 그림을 그려 주시오
나 대신 그림을 그려 주시오
마차는 잘 닦여진 길 위를 천천히 달려갔다. 행인들의 왕래
가 많은 복잡한 대로를 달려가는 것이기에 그다지 빠른 속
도를 내지는 않았다.
덜컹
마차가 가벼운 진동음을 내며 제자리에 섰다. 파천은 의아해 하며
창을 열어 보았다. 왜 갑자기 마차가 선 것인지 궁금했다.
“공자, 내리시지요.”
‘뭐? 벌써 내리라고? 얘네들 장난치는 거야, 뭐야? 그럼 겨우 그거
리를 오기 위해서 마차를 이용했다는 말인가?’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경공술을 사용한다면 촌음에 도착할 수
있는 지척간의 거리였다. 대로의 한 면을 차지하고 커다란 대문이 우
뚝 솟아 있었다. 색 바랜 현판을 올려다보던 파천은 어이가 dqjt다는
듯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천하제일가라고?’
끼이이익
듣기 싫은 소음을 동반하고 몇 년 정도는 열리지도 않았을 듯한 대
문이 활짝 열렸다. 파천은 전면을 응시하다 놀람의 탄성을 발하고야
말았다.
‘오! 저럴 수가.’
대문 앞으로는 기다란 석로가 직선으로 뻗어 있었는데 그 주위로
는 족히 천 명은 될 무사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대문
이 열렸는지, 그곳으로 누가 들어오는지 관심도 없는 듯, 눈동자를
고정하고 서 있었다.
‘훈련이 잘 된 자들이다.’
“들어가시지요.”
저벅저벅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만이 여운을 남기며 그들 뒤를 따르고 있을
뿐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번잡한 시진의 중심과는 달리 이곳은 거
대한 장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기네 지나치게 조용했다. 파천이 그
를 안내해 왔던 인물을 따라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무사들 사이로 진
입하자…….
촤앙!
그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고 하늘을 향해 세우지 않는가.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한 번 해보자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날 언제 봤다고 이런 황송한 대접을 하나?
그는 자신을 초대한 인사가 누구인지 더욱 궁금해져 왔다. 마치 예
전에 무림맹주였던 무상신검 독고한천, 아니 상여락이 했던 짓을 그
대로 따하 하는 듯한 의문의 주인공이 누구란 말인가? 의문을 해결하
기 위해서는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천여 명이 검을 빼들고 있는 사이로 지루하다는 표정을 하고는
지나쳐 갔다.
무사들은 눈알도 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뒤에 처진 사람들
만 눈알을 굴려서 쳐다본다. 그들의 표정에는 상대에 대한 감탄이 서
려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 누구라도 이 정도의 인원 앞을 지
나치게 된다면 표정은 몰라도 걸음걸이가 어딘가 어색해지기 마련
이었다.
그런데 지나쳐 가는 자를 보라. 그는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일
관된 자세로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보폭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한
결 같은 생각은 ‘저게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다.
도열한 무사들 끝에는 위로 오르는 계단이 보였다. 파천은 계단을
지나치며 좌우를 다시 한 번 관찰했다.
‘거대한 장원이군. 그리고 오래 되었어. 세월의 무게가 도처에서
느껴지는군.’
그는 좀 전에 보았던 대문의 현판을 다시 한 번 떠올리고는 ‘풋’ 하
고 웃음을 흘렸다. 계단의 끝에는 거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전각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지만 무림맹에는 이보다 더 큰 전각이 많은지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전각 앞에 일단의 인물들이 파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안내해 왔던 인물은 한 쪽으로 물러서고 그들 중 선두
에 서 있는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한다.
“이렇게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한 마리 곰을 연상케 하는 거한이 남성다운 기개를 맘껏 발산하며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했다. 그를 향해 파천도 손을모아 쥐어 보였
다. 그렇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 자도 아닌가 보군. 누군지 모르지만 꽤나 절차를 중요시하는
것 보니 고리타분한 위인인 것 같은데.’
그는 상대에 대해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자신을 왜 초대했
는지와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기이한 향이 느껴졌다. 파천은 순간 흠칫
했다.
‘이것도 혹시 무상지독 같은 독향이 아닌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더니 파천이 바로 그 짝
이었다.
내부의 구조는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간단한 것은 내부 장식이 없다는 것이고 복잡한 것은 복도의 구조였
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파천은 거한이 우뚝 서자 이제야 다 왔나
싶어 앞을 쳐다보았다.
“할아버님! 명아입니다.”
“어서 들어오너라.”
안에서 들려 온 소리는 노인의 음성이었다.
‘그놈은 아니군.’
파천은 그가 문을 열어 주자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 이를 본 거한은 조금은 놀라는 눈치였다.
‘배짱이 좋은 건가, 아님 심기가 깊어 스스로를 감추는 건가?’
그 또한 파천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로 들어선 파천은
전면을 응시했다. 단출한 실내에는 그 흔한 탁자나 침상도 보이지 않
았다. 벽면에는 초상화 한 점이, 그 아래에는 검 한 자루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파천의 앞에서 등을 돌리고 앉은 노인은 그림을 그리고 있
는 듯했다. 붓을 잡고 미동도 않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체구가 작은 노인이군. 그렇지만 풍기는 기운은 예사롭지가 않
아.’
파천은 노인의 일장 뒤에 섰다. 그러자 노인에게서 차분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 방에는 앉을 의자 하나 없으니 편하신 대로 아무 데나 앉으시
구려.”
파천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인의 몸이 미세하게나마 움
찔거리는 것 같았다. 파천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는가?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왜 불렀소, 당신은 누구요, 라는 질
문이 나올 법도 하건만 파천은 자신의 처소에 온 듯 자연스럽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노인 역시 미동이 없었다. 마치 그 자세대로 평생
휴식을 취해 온 듯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노인이군.’
파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림을 그리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
지 알 수 없었다. 먹물을 찍은 상태로 저렇게 오래 있으면 먹이 번지
기 마련이다. 그림을 그리자면 저러고 있을 턱이 없었다.
“그리기 힘이 들면 붓을 놓으시지요.”
파천의 첫마디였다. 그리고는 또 딴청을 부리기 시작한다.
“붓에 먹물이 묻혔으니 그리기는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럼 아무렇게나 휘저으면 되겠구려.”
“그림을 그리자는 게 목적이오? 아님 좋은 그림을 그리려 하시오?”
“이왕이면 좋은 그림을 그리려 하지요.”
“그럼 애당초 틀렸구려. 노인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분인 듯한
데 먹물을 찍어 들었으니 잘못이요, 찍었으면 그려야 할 터인데 종이
에 대고만 있으니 그도 잘못이구려. 좋은 그림은 애초에 나오기 글렀
소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거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어찌했으면 좋겠소?”
“뭘 어쩌겠소? 먹물을 털어내고 새 종이를 깔고 화공을 불러야 하
지 않겠소? 그림이야 화공이 잘 그릴 터이니.”
“하하, 그렇군요. 명아야.”
“네, 할아버님.”
“가서 차를 내오너라.”
그 말을 하고는 노인은 팔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붓을 종이에서 떼
어 벼루에다 놓았다. 종이를 접어 손에 쥐고는 돌아앉았다. 몸은 흔
들리지 않고 앉은 자세 그대로 휙 돌아가는데 자세히 보니 공중에 한
치 정도 떠 있었다.
“공자.”
“말씀하시지요.”
“제가 공자를 어찌 알고 여기까지 모셔 왔는지 궁금하지 않습니
까? 내가 공자를 왜 불렀는지도……. 그리고 공자에게 무슨 말을 하
려는지도 말입니다.”
“궁금해 한다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말씀하시겠다
면 들으면 그만이고 하지 않으시겠다면 기억에서 지워 버리면 그만
이지요.”
“허허허, 그렇군요. 늙으니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가 봅니다.”
“노인장, 풀 보다리라면 빨리 좀 풀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죠. 젊은 놈이라 조급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하, 늙으나 젊으나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인가 보군요.”
“세월은 그 누구에게도 공평하지 않습니까?”
“…….”
노인은 파천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백미 아래에 빛나는 두 눈
은 깊은 혜안으로 번쩍였다. 파천은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거한이 다시 들어왔다. 손수 쟁반을 받쳐들고
들어온 거한은 각각 파천과 노인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서는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한 노인은 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천천히 목
안으로 삼켰다. 파천은 차를 들지 않았다.
파천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의식했음인가.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노인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 다시 정면으로 파천을 응시했다.
“며칠 전에 있었던 대상벌에서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들이 바로 우리 뒤를 쫓았던 자들!’
“그래서요?”
“공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단지 예상되는 분이 있지
만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는 않군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어서 말이
죠.”
“…….”
노인은 파천의 반응이 너무도 담담하자 잠시 그를 다시 살펴 갔다.
‘진정 대단한 젊은이군. 내 생애에 이런 인재를 또다시 만날 수 있
을지…….’
“제가 그곳에 있는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그거야 별일 아닙니다. 원래가 운경다루는 우리가 운영하는 곳이
지요. 그리고 낙양의 도처에는 우리의 수족들이 있습니다. 전 이미
공자를 멀리서나마 본 적이 있었고, 그것을 기초로 공자의 용모에 대
해 수하들에게 설명해 두었습니다. 언젠가는 이곳에 다시 나타나리
라 생각했습니다. 수하들이 대단한 분들이더군요. 전 우리 아이들에
대해 웬 만큼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데, 공자의 수하들에 비하니 많이
부족할 지경이었습니다.”
“저를 이곳으로 초대한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공자는 혹시…… 옥면신룡 문윤 대협이 아니신지요? 무림맹의 대
령사로 무림5천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분 말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하하, 그야 공자의 용모가 눈이 부셔서지요. 세상 천지에 옥면신
룡이 아니고서는 이처럼 눈부신 분이 또 있으려구요?”
“으음.”
‘괜히 물었군.’
파천은 상대가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해대자 괜히 무안해졌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더군요. 대령사의 수하
들은 제가 보기에도 결코 정도의 인물들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
의문을 해결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는 아예 파천을 옥면신룡 문윤이라고 단정하고 대령사라 칭하고
있었다. 파천도 일부러 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가 이미
알고 물어 보는데 굳이 부정하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정도의 인물이라……. 그렇죠. 일반적 관점에서 보신다면 저들은
정도의 인물은 아닙니다. 단지 제 개인적인 수하들에 불과합니다. 굳
이 표현하자면 사병쯤으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무림에 소문 나 있기로 옥면신룡 문윤 대협은 소림
사의 진전을 이었다 들었사온데 사병들이 정도의 무공을 쓰지 않는
단 말씀이시군요. 더군다나 옥면신룡은 출도한 지 오랜 기간이 되지
도 않았건만 언제 그런 사병들을 키웠을까요? 하하하, 뭐 그야 상관
이 없겠지요. 무림인들이 듣는다면 거품을 물고 달려들 얘기지
만……솔직히 저로서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파천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 갔다.
‘무림인이 아니란 건가? 혹시 관의 인물이란 말인가?’
그는 내심의 격동을 억눌러 두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혹시 야림(夜林)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야림! 바로 이들이…….’
“얼마 전에 들은 기억이 나는군요.”
“부족하나마 제가 바로 야림을 맡고 있는 늙은이입니다.”
‘이 자가 바로 야림주. 바보 같으니. 하긴 그들이 아니고서야 이 정
도의 전력을 보유한 곳이 중원에는 없지 않았던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야림(夜林)!
때로는 공포의 이름으로 때로는 전설과 신비의 이름으로 시대를
초월해 존재해 왔던 이름이었다. 정확하게 이들이 언제부터 이런 이
름으로 존재해 왔는지는 모른다. 단지 그 이름은 전 중원의 살수들과
용병, 청부업자들에겐 하늘과 같은 이름이었다.
야림은 아무도 건들지 않는다. 형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힘의 근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었다. 가장 최근이라 할 수 있는 북검회와의 충돌조차 수십 년 전의
일이고 보면 그들의 행사가 얼마나 은밀한지를 보여 준다.
“이렇게 위명이 자자하신 분을 뵙게 되어서 영광이군요.”
“대령사께서는 저를 무안 주기로 작정하신 것 같군요. 어디 제가
창천에 더 높은 대령사의 워명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보잘것없
는 늙은이에 불과히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무림맹의 대
령사로서가 아니라 문윤 대협으로서 저와 한 가지 계약을 하지 않으
시겠습니까?”
“뭔지 들어 보고 결정해야겠지요.”
“저는 이 문제로 며칠 간을 고민했습니다. 먼저 대령사의 정체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고, 또 하나는 과연 대령사께서 어느 정도의 그
릇인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뵙고 보니 늙은이의 기
우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공자, 그림을 대신 그려 주십시오.”
‘으음……. 공자라고 굳이 다시 고쳐 부르는 건 무림맹이 아닌 나
개인에 대한 제안이라는 말!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제가 우둔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안 돼겠습니까?”
노인의 얼굴은 진지해져 갔다. 그의 입은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열
리기 시작한다.
“야림은 송나라의 개국 공신이자 명재상인 조보(趙寶)의 후손들이
만든 것입니다. 당시 송의 태조 조광윤에게 무인들의 구너력을 약화시
켜 천자 독재의 발판을 삼아야 한다고 주청을 드린 인물이 바로 그
분입니다.
그때 산서성 남부의 절도사와 화남 방면의 절도사들이 반란을 꾀
한 적이 있는데 그 난을 제압하고 평정한 공을 세운 이가 있었습니
다. 그가 바로 금위군의 총수인 석수신(石守信)이었습니다.
태조가 하루는 무장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자신의 뜻을 그들에
게 전하였지요. 목숨을 살려 주고 전답을 내려 고향에 돌아가 평생
호의호식하게 해주겠단 뜻을 비추었죠. 물론 이를 거부하는 자는 참
수하겠단 말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전원 그 제안을 받아들
여 병을 핑계로 낙향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때부터 일어났죠.”
야림주는 목이 마른지 또다시 차를 들이켰다. 그의 얘기는 계속되
고 있었다.
“석수신의 후예들은 은밀하게 낙향한 장군들의 후손들을 모아들
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은 워낙에 오랜 세월 동안 은밀하게 이뤄졌던지라 조정에서
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단지 단 한 분! 제 할아버님만은 그들의 움
직임을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평소 석수신의 야심을 아셨기 때문이
죠. 석수신 자신의 대에는 모르지만 분명이 자신의 후예들에게 무슨
유언인가를 남길 것이란 것을 예측하고 계셨지요.
그래서 생각해내신 게 야림이었습니다. 저희들의 목적은 따지고
보면 그들을 견제하는 것입니다. 할아버님의 예측은 오랜 세월이 지
난 후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지요. 그들은 스스로 천하를 경영할 힘
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통탄하고 그 화살을 저희 가문에 돌리기 시
작한 것입니다.
그 뒤로 어둠 속에서의 암투는 4백 년 이상을 이어져 내려왔습니
다. 그런데 제 대에 이르러 그들의 힘은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감히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힘은 이 땅을 피로
적실 수 있을 정도일겁니다. 도와 주십시오. 저는 스스로 그림을 그
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에게 무슨 말인가? 내가 듣기로도 그렇고, 눈으로 확인한 것만으
로도 엄청난 세력을 지니고 있건만 그럼에도 견제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란 건?’
파천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스스로 지닌 의문이 고스
란히 묻어 나왔다.
“대체 그들이 누구이고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기에 그런 말씀
을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무슨 힘이 있다고 제게 그런 부탁을 하시
는지요?”
“일단 승낙을 해주십시오. 그러면 자세한 사항을 말씀드리죠. 또
한 이것은 무림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공자께서는
승낙을 하셔야만 합니다.”
“허 참.”
파천은 어이가 없었다. 자는 놈을 불시에 깨워 밤하늘을 보여 주
며 뭇 별들의 숫자를 모두 헤어 보라고 하는 것보다 더 황당한 경우
였다.
그렇지만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에 그냥 흘려듣기에는 그 또한
망설여졌다.
파천은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 갔다.
그의 눈은 한 점 거짓도 없는 순수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쩌면 저
나이에 저렇게도 맑은 눈을 지닐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
였다.
“좋소, 귀하의 제의를 허락하겠소.”
“고맙습니다, 공자.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의 얼굴은 정말로 감격으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파천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나의 무엇을 믿고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허, 이것 괜히 찔
리는데…….’
이어 노인의 입에서는 파천으로서도 경악할 만한 내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원을 빠져 나오는 파천의 얼굴은 씁씁함으로 젖어 있었다. 현판
을 돌아보는 그의 눈에는 ‘천하제일가’란 다섯 자가 너무나 또렷이
각인되고 있었다.
‘진정 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가문이구나. 이 땅에 저런 가문들
이 있는 한 명(明)의 기운은 쇠하지 않으리라.’
파천의 내딛는 발걸음이 묵직하기만 했다.
‘가주의 말이 진정 사실이라면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내 힘으로도 그들을 막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그는 현 무림의 상황이라면 스스로가 가진 능력이나 힘으로 얼마
든지 헤쳐 나갈 수 있다 자신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의 심정은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심산으로 훌쩍 떠나 버리고 시펐다. 세상을 등지고
이꼴 저꼴 보지 않으면 속 편하리란 생각마저 들었다. 스스로 무림을
제패하겠단 목표를 향해 뛰어가던 그의 앞길에 생각지도 않았던 거
대한 장애물을 만난 것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군. 만약 가주의 판단
이 틀렸다면 그리고 내가 조금만 실수한다면 이 땅의 미래는 없다.
그들에 의해 이땅이 유린된다면 그때부터 인세는 지옥이 될 것이
다.’
그는 땅을 보고 걸었다. 조금 걷다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토해
낸다.
하늘의 구름은 뛰어 오르면 손에 잡힐 듯 낮게 떠가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눈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작은 손은 너무나 보잘것없
었다.
‘이 자그마한 손으로 대해를 막으라 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그가 손을 쳐다보며 한숨짓고 있을 때, 천하제일가 안에서는 조손
이 마주앉아 있었다.
“할아버님, 대체 그 자를 어떻게 믿고 야림의 운명을 맡기시려 하
십니까?”
“다른 대안이 없구나.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스스로의 능력 중 자
신 있는 것을 꼽으라면 사람 보는 눈이다. 그라면…… 어쩌면 해낼지
도 모르겠다. 물론 천운이 따라야 하겠지만.”
“저도 그 자가 뛰어난 인물이란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전 무
림의 힘을 합친다 해도 어려운 일을 그 자가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요?”
“솔직히 자신할 수는 없지만…… 내게 남은 희망이 달리 없으니 어
쩌겠느냐? 최소한 그라면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을 낼 것 같기도 하고.”
“차라리 조정에 이 일을 의논하시는 것이…….”
“허허허, 명아.”
“네, 할아버님.”
“그들에게 말한다 해도 믿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이라고 해낼 수 있
을 것 같으냐? 오합지졸인 관병의 힘으로 막을 수 있었다면 공자에게
부탁하지도 않는다. 야림이 안 된다면 무림의 힘을 빌리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들 또한 무림을 탐내고 있으니 이는 당
연한 일이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손자의 말에 노인은 두 눈을 부라렸다.
“한심한 소리를 하려면 내 눈앞에서 썩 꺼져라. 어찌 천하제일가
의 다음 대 가주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온단말이냐? 그들의 힘으로
막아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전원 죽을 각오로 덤빌 생각은 하지 않고
벌써부터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다니.”
“죄송합니다. 소손이 잘못했습니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휴우, 그래 네 말도 틀린 것은 없지. 조상님들이 우리들의 이런 꼴
을 보면 뭐라고 한탄을 하시겠느냐. 하긴 가주들 중 역대 최고의 기
재라던 네 아비조차 그들을 쫓다 비명에 갔으니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무리는 아니지. 허허.”
“할아버님.”
파천은 곧장 개봉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찌되었든 무림맹으로 돌
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일이야 두 손으로 태산을 밀어 올리든 대해를
퍼 나르든 오늘은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현 무림의 태풍의 핵으로 부상한 회천문은 동정호(洞庭湖) 남쪽 상
강(湘江)과 유양하(유양하)의 합류 지점인 상강 평원에 자리하고 있
는 장사성의 북쪽 삼십리 지점에 터를 잡고 있었다. 마도련의 총 본
거지라 할 수 있는 동정호 군산과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기에 그들
의 의도가 더욱 궁금해 질 수밖에 엇었다.
처음 그곳에 장원이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
았다. 경치 좋고 전망 좋은 곳에 장원이 들어서는 것은 흔히 있어 왔
고 또 어떤 돈 자랑하지 못해 안달 난 부호가 별장이라도 짓느가 보
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림의 비중 있는 문파 치고는 그다지 크지 않은 장원이었기에 무
림인들의 관심은 더더군다나 끌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곳에 전 무림
의 관심이 집중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장원은 다섯 개의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운데 가장 큰 삼층
누각이 자리하고 있고 나머지 네 개의 전각은 사방을 에워싸듯 둘러
쳐져 있었다. 전각들간의 공간은 운치 있는 정원이나 연못으로 채워
졌다. 일반 개인 장원보다는 크다 할 수도 있지만 한눈에 다 보일 정
도니 그 규모가 아담하다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그곳 가운데 있는
삼층의 누각 어딘가에서 큰 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런 한심한 놈들.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수하들을 모집하러 다
녔다고? 돈을 기부받아? 이런 한심한 것들이 어찌 전대 거마들이라
칭해졌나 모르겠군. 야, 이놈들아. 너희들도 양심이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내가 너희들에게 그런 짓 하라고 했어? 그냥
가만히 웅크리고 있으라고 그랬잖아.”
꽥 고함을 질러대는 인물은…… 천마였다. 그가 이곳에서 왜 이리
흥분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청면마왕 하군표는 개방의 도움을 받아 가며
전대 거마들을 찾아 다녔다. 몇 달 간 그가 한 일이라고는 그게 전부
였다. 그는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그들과 협상을 하거나 힘으로 굴복
시켜 강호로 데리고 나올 수 있었으며, 그들을 한 울타리 안에 두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이후에 이곳을 찾아온 이는 그도 얘기만 들었지 설마하고 있
었던 천마, 그였다. 마황검위대 6개대 6백 명을 대동하고 나타난 그
는 오자마자 전 무림이 꺼려하고 두려워한다는 전대 거마들을 동네
개 때려잡듯이 혼쭐내었다. 원래가 마도인 치고 강한 힘 앞에 굴복하
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그들이고 보면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
히 이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천마의 힘 앞에 두려움보다는 존경의
염으로 굴복하고야 만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까지 저질러 온 일들이, 천마가 생각할 때 기도
안 차는 일들인지라 이렇게 흥분하며 외치는 것이었다. 호화로우면
서도 거대한 태사의에 떡 하니 버티고 앉은 천마는 하나밖에 없는 팔
로 삿대질을 해댔는데, 좀체 흥분을 가라앉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꿇어앉아 있는 자들은 정확하게 99명이
었다. 모두 몇 살들인지 모를 노인들이었다.
“저…… 어, 태상 문주님. 그만 고정하시고.”
“시끄럽다, 이놈아. 너도 마찬가지야.그래도 명색이 문주라는 놈
이 저런 철딱서니 없는 것들의 장단에 놀아나? 그러고도 네가 문주라
고 할 수 있냐?”
금세 하군표는 자라목이 되어 버린다.
“지금 온통 전 무림의 눈이 여기에 쏠려 있는 판에 그래 돈푼이나
벌어 보겠다고 지역의 명사들을 초대해 놓고 돈을 털어 내? 에라이,
그러고도 너희들이 무림인이라고 할 수 있냐? 그리고 가만히 웅크리
고 있으라고 했냐? 여기 시비들이 없냐, 하인들이 없어? 테려 오려
면 좀 똘똘한 놈들을 추려야지. 개나 소나 하류잡배들을 끌어 모아서
뭐 하려고 그랬냐? 아앙.”
그의 고함소리는 대전 밖으로까지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밖에 있
던 마황검위대 대원들은 돌아가는 상황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
다. 대전 바닥에 무릎꿇고 있는 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따지자
면 자신들보다도 한 수 위의 고수들이었다. 물론 각 대주들과 비교하
면 몇몇을 빼고는 모두 떨어지긴 하지만.
그런데 그런 고수이자 노인들을 바닥에 꿇려 놓고 벌써 한 시진 이
상을 야단만 치고 있는 천마조사를 보니, 그들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듣기 좋은 소리도 여러 번 되풀이하면 짜증나는 법이다. 더군다나
야단치는 소리라면 한 번으로 따끔하게 혼을 내고 말아야 효과가 있
다. 그들은 처음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던지라 아무 소리
도 못하고 고개만 조아리고 처분을 기다렸었다. 그런데 한 시진이 넘
어가자 그들은 슬슬 지겨워 오기 시작했다. 무릎 꿇고 있는 일이라면
야 몇 날 며칠이라도 할 수 있는 그들이었기에 편안한 심정으로 고개
만 처박고 있었다. 개중에 몇몇은 그런 자세로 졸기까지 했다. 이런 것을
알 리 없는 천마는 자기 딴에는 있는 말, 없는 말까지 만들어 가며 그
들을 야단치고 있었으니.
천마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마황거위대 6개대 대주들만은 바짝 긴
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던 흑면신수 북궁사혈, 월영 구
양월랑, 사미륵 북궁사혼, 구유사귀 야율소혼, 생사검 담대무구, 독
지화 구양정랑 등이었다. 그들은 전음을 주고받으며 지리함을 잊고
있는 중이었다.
[흑면 오라버니, 어떻게 좀 해봐요. 벌써 한 시진이 넘어서고 있는
데.]
[난들 방법이 있겠냐? 조사께서 아예 작정을 하신 득한데 괜히 끼
어 들었다가 뒈지게 맞고 싶지는 않다.]
그때다. 사미륵 북궁사혼이 장난기 섞인 전음을 독지화에게 보내
기 시작했다.
[너라면 가능하지, 클클. 원래 조사께서는 여자에게는 후하시잖
아. 그러니 너라면 맞을 염려는 없을 거다. 안 그러니?]
[뭐라고? 미륵 오빠. 말 다했어?]
[흐흐, 왜? 그 말이 맞구먼.]
[월영 오라버니까지 그러기예요?]
[다들 조용히 좀 못 있어요? 조사께서 낌새라도 채시는 날에는 우
리 모두 입에 거품 무는 일만 남았다는 것 몰라요?]
구유사귀의 전음에 모두들 바짝 긴장하며 전음을 멈추었다. 그때
다. 슬그머니 생사검이 전음으로 모두에게 물어 왔다.
[그런데 전음을 도청할 수도 있나? 그런 무공에 대해서는 못 들어
봤는데?]
괜히 마음 졸이고 있던 흑면신수 북궁사혈이 한마디 거들고 나
섰다.
[맞아. 그러고 보니 그런 무공은 없다. 아무리 조사님이라고 해도
그럴 수야 없을 거다.]
그러나 그들의 전음은 또다시 멈추고야 말았으니 그 이유는 독지
화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상식이 통할 분이 아니니 조심하는 게 여러 모로 좋다고 생각하는
데. 오라버니들의 생각은 어때요?]
천마는 자신도 지쳤는지 태사의에 몸을 한껏 제치며 기지개를 켰
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이런 놈들을 믿고 대사를 치러야 하다니, 이런 한심한 노릇이 어
디 있단 말이냐? 에잉, 마음에 안 들어.”
그 말은 혼자서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워낙에 장내가 조용했던지라
모두들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너희들.”
“존명.”
뒤에 있는 여섯 대주들을 향한 천마의 시선이 하얗게 번뜩여 갔다.
“날 가지고 농담을 했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헉.”
그들은 동시에 얼굴이 샛노래지며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전음 도청은 밝혀지지 않은 내 장기 중 하나다. 이것만은 파천도
하지 못하는 것이지.]
이런 세상에! 천마는 진정 사람 질리게 하는 괴물이었다. 천마의
말을 듣고 난 여섯 사람은 죽었구나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너희들이 한 가지 정확하게 본 것이 있다면…… 사미륵과 월영이
한 말은 틀림이 없다는 사실이지. 독지화만 빼고 나머지 밖에서 대기
해.]
‘우와, 죽었다’
‘휴우, 산 건가?’
서로 엇갈리는 심사로 각자가 있어야 할 장소로 뛰어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천마의 등을 보며 독지화는 숨도 크게
내쉴 수 없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해 자신도 나가라 할 것만 같았
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생각은 천마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데서 기인했다. 그는 역시나 천마였다. 여자에게는 너무도 후
한. 독지화는 대전 밖으로 나가는 천마를 쳐다보며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그런데 왜 끝까지 전음으로만 말씀하신 거지? 아, 그렇구나. 이들
도 조사께서 전음을 도청하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니……. 차암 대단
한 조사님이셔.’
이제 곡소리 나는 것만 남은 다섯 명의 대주들은 마황검위대 대원
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려움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무림맹으로 돌아가던 파천은 개방에 들렀다가 한 가지 소식을 접
하게 되었다.
환노와 의노가 준비한 세력이 중원으로 나오고 있다는 소식이었
다. 그들은 낙양으로 향했으며, 5일이 지나기 전에 낙양 인근에 도
착할 것이라. 그는 개왕에게 마도련의 제갈초홍에게 보낼 전서
와 환노에게 보낼 전서를 적어서 주었다. 당분간 다른 곳의 일들은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개왕에게 최
근에 접수된 중원 각지의 정보에 대해 들은 뒤, 곧바로 무림맹으로
출발했다.
마황검위대 16개대 중 5개대는 사천으로 급파되었다. 무영존과
무정화, 옥기린, 수라검마, 경혼귀영이 이끄는 5개대 5백 명은 사천
성 성도 근처에 있는 호명(互明)이란 소읍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들
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단지 짐작하건대 밀명
을 받고 왔으리라 여겨질 뿐이었다.
“대형, 이제 움직여야 하지 않습니까?”
옥기린이 무영존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무영존은 고
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이제 움직일 때가 왔다. 한 가지 주의를 주마. 물론 조
심들 하겠지만 어떤 상황에도 무모해지지 마라. 만약 일이 잘못될 경
우엔 무조건 퇴각해라. 우리는 이 일이 끝나는 즉시 낙양으로 합류해
야 한다.”
“알겠습니다.”
무영존은 아직도 안심이 안 되는지 네 명의 동생들을 다시금 살펴
가기 시작했다. 옥기린이야 워낙에 똑똑한 녀석인데다 자신을 제외
하고는 대주들 중 가장 강하다 할 수 있으니 별 문제가 없을 테지만
문제는 무정화였다.
그녀는 호승심이 남달리 강했다. 여자라지만 천부적인 무골인데
다가 스으부에 대한 집착이 의외로 강해 한 번 시작된 싸움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고지식한 면이 엿보이는 성격이었다. 생김새
는 이런 그녀의 성격과는 달리 단정하면서도 고아했다. 긴 생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뜨렸으며 가운데를 천으로 질끈 동여매었을 뿐이었
다. 앞머리가 몇 가닥 흘러 나와 이마를 가린 모습이 어찌 보면 청초
하게도 느껴졌다.
“사사야.”
무정화 북궁사사는 자신을 쳐다보는 무영존을 향해서 고개를 돌
렸다.
“왜?”
“너……아니다. 잘 할 수 있지?”
“…….”
대답이 없다. 그녀는 맑은 눈을 빛내며 그저 무영존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무영존은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는 전체를 향해 입
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세세하게 지시하는
것이었다.
무림맹에 당도한 파천은 수뇌부들을 소집하여 사천의 일과 회천문
에 대해 의논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회천문을 마도련과 함께 정도의
제일 적으로 간주하고 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일하게 이를 반대
하는 사람은 삼인천뇌 소천악이었다.
그는 그들이 비록 전대의 거마들이라 해도 현 정세의 긴박함을 고
려할 때 굳이 적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고 역설했다. 할 수 있다면 그
들과 거래를 하는 한이 있어도 불가침 협상을 끌어내야 한다고도 말
했다.
그의 의견에 동조한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파천 역시나 그들의 논
쟁을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이고 중재안을 내놓지도 않았다. 그들의
토론이 점점 뜨거워져 갈 때 마침 장로원주의 자격으로 참석한 개왕
이 나섰다.
“군사의 말은 일리가 있소. 우리 처지가 무조건 반대만 할 입장은
아니라는 거요. 사실 따지고 보면 마도련과도 대치는 하고 있지만 직
접적인 충돌을 자제하는 이유가 뭡니까? 어쨋든 우리들은 중원 무림
인들이오. 무림의현 상황을 봅시다. 새외의 세력들이 언제 대대적인
혈겁을 일으킬지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시점이오. 이런 때에 우리
들끼리 치고받고 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오. 그들이 우리
를 먼저 치지 않는 한은 우리 또한 잠자코 있어야 하오. 지금 사천의
상황만으로도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인데 그들가지 신경 쓸 틈이 어디
있소? 그러니 왠만하면 좋게 좋게 협상하는 식으로 마무리 지어졌으
면 합니다.”
개왕의 발언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려 있던 소천악
은 개왕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주자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원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나 우리와 같
은 중원인! 비록 다른 길은 걷는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시점이 아닙니다. 일단은 외세의 힘을 물리치고 봐여 합니다. 우리의
이런 뜻을 저들에게 전한다면 저들 또한 중원인일진대 함부로 경거
망동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 회천
문의 개파대전에 우리 무림맹에서도 대표를 파견했으면 하는 바람
입니다.”
개왕의 체면 때문에 잠자코 있던 다른 인물들이 또다시 발작을 일
으키기 시작했다. 승의전주 일수탈혼 공민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나더니 소천악을 노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답답한 소리 그만 좀 하시오. 회천문의 위치가 어디요? 바로 강남
의 동정호 아래에 있소이다. 마도련의 본거지가 그곳임은 군사도 잘
알 것 아니오. 그런데 그런 곳에 우리 대표를 보내자는 말이오?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들어도 정도가 있지.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사자의
벌린 아가리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가겠소? 군사는 갈 수 있소이까?”
“갈 수 있소.”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대립하고 나섰다. 이때까지
잠자코 있던 파천이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 자. 그 문제는 일단 의견들이 팽팽하니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
해 볼까? 군사.”
“네, 대령사.”
“다른 안건은 없는가?”
“저번 대하표국의 건을 지금까지 계속 조사하고 있었사온데 한 가
지 단서가 포착되었습니다.”
“단서?”
“그렇습니다. 대하표국이 대상벌의 신하라는 건 이미 알려져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벌의 배후에는 몽골의 성지라 불리는 천
황부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오?”
“그런 일이…….”
모두의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 좌중을 훑어본 파천은 내심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제야 그것을 알다니, 역시 무리맹은 덩치만 컸지 느려. 이 정도
의 정보망으로 어찌 중원을 지키겠다는 건지. 정말 한심한 위인들이
야.’
“사실입니다. 낙양에 소재하는 대상벌의 본산이 바로 천황부의 중
원 거점인 것 같습니다.”
“바로 지척에 폭탄을 안고 있었던 셈이군.”
파천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그 말을 뱉어내
었다.
“그런 셈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급한 것은 그들을 먼저 쳐야 한
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와해시키지 않고 이대로 둔다면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군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무림맹 낙양 지부에 병력을 급파해야 할 줄로 압니다. 이것은 시
간을 다투는 일입니다.”
“그들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하고 있나?”
“그…… 그것이. 정확한 수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럼 어느 정도의 병력을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겠군.”
“…….”
“그리고 한 가지 난제가 있소. 우리야 그들이 천황부의 중원 세력
이라는 것을 안다지만 일반인들이나 관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소이
다. 만약 우리들이 대규모 병력으로 그들을 칠 경우 우리들은 의심을
받게 되오. 우리와 대상벌은 상계의 이권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해 왔
었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세간에서 모르
는 바가 아니오. 이런 시점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다면 그 즉시 우
리는 의혹의 시선을 면치 못하오. 어쩌면 관에서까지 이 일을 캐어
들어올지도 모르오. 이런 것은 생각해 봤는지 모르겠구려.”
“저…… 그것까지는.”
“그들이 지척간에 있으면서도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우리
들과의 전면전을 대비한 병력은 아니라는 말이오. 어쩌면 상계 장악
을 위해 파견된 병력일 가능성이 높지.”
“으음.”
군사와 파천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내의 인물들은 대상벌의 실체
에 대한 놀람과 그럼에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다는 대령사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잊고 둘을 번갈아 쳐다보기 바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공격해야 하오. 군사 말대로 그들
을 이대로 두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들은 와해시키
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단은 쫓아내기는 해야 하오. 그들 뿐만 아니라
중원에 침투해 있을지도 모를 새외의 세력들을 발본색원해 모두 변
방으로 쫓아내야 하오. 그들을 품 안에 두고서야 어찌 싸움이 되겠
소? 그렇지 않소, 군사?”
“그, 그렇습니다.”
“이 일에 대한 세부 작전은 군사에게 일임하겠소. 앞으로 5일 후
대상벌, 아니 천황부 중원 거점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겠소.
그러니 무림맹 낙양 지부에 병력을 증원시켜 놓으시오.”
“으음.”
“흠.”
“모두 그렇게들 알고 준비를 해주시오. 아, 그리고 회천문의 개파
대전은 3일 후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대령사.”
“그 일은 내가 한 번 해보리다.”
무당 장문인 송학자가 의문을 드러내었다.
“대체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신지요.”
“그들을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소. 개파대전에 무림맹의 대표로
내가 참석하겠소.”
모두들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송학자는 강한 어조로 이
렇게 말했다.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어찌 대령사께서 직접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만약 대령사께 불미스런 일이 있을 시에는 뒷일을 어
찌 감당하시렵니까?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장문인, 너무 심려 마시오. 그리고 무작정 대책 없이 가겠단 것도
아니오. 미리 마도련에 통지를 하시오. 회천문의 개파대전 참석 차
마도련의 영역을 지나가게 되었으니 양해를 구한다고 말이오. 그리
고 이 일을 은밀하게 전 중원에 소문 내시오. 이왕이면 회천문에다가
도 공식적으로 통지를 하는 게 좋을 듯하오만. 군사 이 일도 함께 처
리해 주시오.”
“존명.”
그가 한다면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말해 보았자 소용없음을 안 좌
중의 인물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난 회천문의 개파대전이 끝나는 죽시 낙양으로 가겠소. 차질 없
이 일이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 주시오.”
“존명.”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