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01화 : 혜능이 태산으로 간 까닭은
혜능이 태산으로 간 까닭은
파천은 밖으로 나오는 내내 낙양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언
제나 자신만만했던 그로서도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너무나 벅차다. 지금 중원의 상황도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이 들
건만 그들마저 끼어 든다면, 아니 그들이 끼어들지 않는다 해도 그
들을 찾아 나서려면……. 방법이 없구나. 현 중원의 힘만으로는 어
림 반푼 어치도 없다. 그렇다고 천마교의 힘을 그쪽으로 졸릴 만한
여유도 없으니. 일단은 무림의 일을 수습하는 게 최우선이다. 그런
뒤에 야림과 중원의 힘, 그리고 천마교의 힘을 총동원하는 수밖에.
문제는 세외 세력과의 싸움 이후에 과연 얼마만한 전력이 남을 것인
가 하는 건데.’
걸음을 걷는 내내 홀로 사색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은 외로워 보였
다.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문제이기에 혼자 고민할 수밖에 없
다는 게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이렇게 되면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주력해여 한다. 무림맹과 마
도련을 이간시키거나 필요 없는 충돌은 지양해야 한다. 후우, 모든
계획이 전면 수정되는 것인가? 숙부! 당신은 아시오? 어쩌면 태조께
서 이루어 놓으신 제국의 기틀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그는 착잡했다. 신룡각에 딸린 정원 사이를 서성이던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또다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
기며 분주히 정원을 오간다. 얼마 뒤 마음이 안정이 되었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정원 밖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가 맹 내를 지나치는 동안 경비를 담당하던 무사들이나 공무에
바삐 움직이던 무사들 또는 시비들이 그를 보고 극경의 자세로 인사
를 했다. 그가 지나가는 동안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가 가는 곳은 맹
주전인 신검각이었다. 아들과 손자를 잃고 마지막 노년의 세월을 외
롭게 지내고 있는 보잘것없는 노인을 찾아 가는 것이다. 그는 독고무
의 사망 소식 이후 맹 내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파천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그의 무너진 심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수 없고, 위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맹주전에 다다르자 문 앞을 지키고 섰던 무사 둘이 안에다 보고를
하려 했다. 그러자 파천이 손짓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너희들은 잠시 멀리 가 있거라.]
“존명.”
낮은 소리로 대답을 한 두 경비 무사들은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파천은 나지막하게 심호흡을 했다. 가볍게 문을 밀치
자 소리 없이 열렸다. 그 사이로 내실의 바닥에 깔려 있는 붉은 색 융
단이 보였다. 예전에는 없던 것이었던지라 파천은 이채를 띠며 안으
로 들어섰다. 안에 들어온 파천은 등 뒤로 문을 닫고는 안으로 한 걸
음 더 다가섰다.
“맹주, 접니다.”
파천의 말에 뒤로 돌아 앉아 있던 잠룡대제가 일어서는 모습이 보
였다. 그는 돌아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그는 얼마 못 본 사이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고 두 눈은 칙칙하니
암울한 빛으로 가득했다.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기도 했다. 잠룡대제
가 가리키는 포단에 파천은 슬그머니 앉았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파천이 먼저 입을 떼었다.
“몸이 많이 수척해지신 듯하군요.”
“이제 갈 때가 되었나 보지요.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이 없으니 아
무런 의욕도 없군요.”
“대제, 대체 왜 이러시오. 설란을 위해서도 그렇고 무림을 위해서
도 대제께서 힘을 내시지 않으시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설란…… 그 아이는 지존께서 잘 보살펴 주실 것을 믿기에 그다지
염려가 되지 않습니다. 무림도 굳이 제가 나서서 해여 할 일도 없으
니 또한 염려가 되지 않고요. 소망이 있다면 나보다 먼저 간 아이들
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 보는 것뿐입니다.”
파천은 처연한 맹주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잊고 침묵했다. 자신이
과연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두 분의 원한과 분노는 어쩌지요? 모두 갚아 주어야 하지 않겠습
니까? 며칠 뒤에 낙양의 대상벌, 아니 천황부의 중원 거점에 대한 대
대적인 공격이 감행될 겁니다. 그곳에 혈마천의 세력도 들어와 있다
하니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그 자를 처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
다.”
잠깐이지만 맹주의 두 눈에 생기가 반짝였다. 그렇지만 이내 사그
라져 버린다.
“허허, 그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지요. 그 자를 죽여 본들 내 아들,
손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 아이들이 못 다한 생을
돌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 아이들의 명이 거기까지려니
생각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아…….”
그의 노안이 뿌옇게 흐려져 갔다. 파천의 가슴도 찡하게 저려 왔
다. 인생의 온갖 풍파를 다 맛보았을 나이건만 아들과 손자의 불행만
은 그도 잊을 수 없나 보다.
이제는 씻어도 좋으련만 그는 스스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자
책하는 일로 조금이나마 두 사람에게 속죄하려는 것 같았다. 부모가
자식을 낳은 것만 해도 갚을 수 없는 대은(大恩)이겠건만 어찌 자식
에게 속죄하는 맘으로 남은 일생을 살아간단 말인가. 그의 삶도 무척
이나 고단하다고 여겨졌다.
‘대제, 어찌하면 병들고 피폐해진 그 가슴을 활짝 펼 수가 있겠소.
마지막 생을 어찌하면 기쁨으로 보내다 한을 남기지 않고 가실 수가
있단 말이오.’
파천의 가슴속에서만 울려 나오는 소리는 입 밖으로 흘러 나오지
는 못했다.
‘손주라도 있다면 그 마음이 조금은 위안디 될 터인데…….’
생각을 하다 말고 파천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이제 잠룡대제의
유일한 혈손은 독고설란 하나이다. 그러니 그녀를 통해 자손을 보려
면 결국은 자신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것도 쉽지는 않겠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잠룡대제를 향해 파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밀입니다. 이번 낙양 공격 때 대제께서도 함께 동행하시
는 것이 어떨는지요?”
“아미타불!”
‘어라?’
“오셨습니까, 시주?”
“혜…… 햬능?”
“오랜만에 뵙는군요.”
고개를 들고 앞을 보는 대제의 두 눈은 혜안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생기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죽어 있던 눈동자였건
만 지금 눈앞에서 빛나는 두 눈은 깊은 현기를 담고 있었다. 파천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시간을 구분함도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마음을 버리면 감춰진
것이 드러나지요.”
“끙……또 그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가? 그건 그렇고 혜
능, 대제를 위로할 방도가 없을까?”
“허허,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누가 누구에게 위로받을 수 있겠습니
까. 그가 받는 현생의 고통도 그의 업보에서 비롯된 것이니 다른 사
람이 그를 위해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의 마음에
서 여러 가지 과보가 생기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
지만 그가 짊어져야 할 과보인 셈이지요. 물은 하나로 이어져 흐르지
만 뒷물이 앞 물을 알지 못함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에서 얻게 되는
과보 또한 이와 마찬가지지요. 결국은 그 스스로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각을 하면 그만이나, 그 또한 인연이 닿아야 가능한
것이니 애써 그를 이르게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오관이나
마음은 여러 가지 괴로움을 짓고 있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아무것
도 아닙니다. 법(法)의 성(性) 자체에는 짓는 것이 없지만 그 표현에
는 있을 따름입니다.
파천은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그런가? 어쨌든 대제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더
군다나 혜능 너까지 덤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그것도 썩 내키
지가 않고.”
“시주의 얼굴에 근심이 잔뜩 서려 있군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
으신 지요?”
“그렇게 보이는가 보군. 있기는 있지만 별로 말하고 싶지가 않군.
말해 보았자 소용도 없을 테고.”
“허허, 그러시면서 들어 주기를 바라시는 군요. 말씀하세요. 속에
담아 두면 병이 된답니다.”
“그래, 천마나 너에게라면 말해도 무방하겠지.”
파천의 입에서는 야림주에게서 들었던 말이 그래도 흘러 나왔다.
혜능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그가 쏟아내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러니 내가 고민이 없을 수가 없지.”
“때가 차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것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시주께서 헤쳐 나가야 할 일이란 비단 시주 개인의 일에만 한정되
어 있지 않습니다. 천지조화가 맥을 찾지 못하고 뒤엉켜 있다가 때가
되어 현세에 미치게 됩니다. 그 매듭은 인간들 스스로가 풀어야 하지
만 하늘은 때가 되면 그 인연자를 세상에 내려 보낸답니다. 그리고
그 매듭을 풀 수 있는 힘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화의 시대’입니다. 지금이 곧 그때이니 시주에게
그 연이 닿은 것이지요. 모든 세상의 힘이 시주에게 부여되지만 그것
은 엄밀히 말해 시주의 힘이 아닙니다. 힘을 잘못 사용하면 악이 되
어 오히려 정화의 시기를 앞당기게 됩니다.
모든일이 하실 때 살피고 또 살피십시오. 생명을 귀히 여기고 인
간을 사랑하십시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시주께서 때를 분별치 못하
고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업보가 시주에게로 미치게 되고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어떤 힘도 파
멸을 막을 수가 없게 됩니다.”
파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천마가 가끔 하는 말 중에도
이런 비슷한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별로 주의 깊게 듣지 않았었다.
처음으로 혜능에게서, 지금까지 의문으로 묻어 두었던 자신에 대한
얘기가 거침없이 흘러 나오자 파천은 충격으로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성급하게 알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때가 차면 알게 됩니다.
한 가지 명심하실 것은 완전한 힘을 얻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함부로
판단하지 마시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군요. 천마 님의 무공이나 제 무
공이 시주에게 큰 힘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미미한 작은 힘에 불과합니다. 시주께
서 얻으셔야 할 힘에 비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 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저희들도 알지 못합니다.”
“혜…… 능, 지금까지 한 말……무슨 말이야?”
솔직히 파천은 처음으로 혜능이 농담이란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일 것이다. 아무리 수행이 깊은 고승이라 할
지라도 농담이야 하고 살겠지, 하는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허허, 농담도 다 하고 말야. 혜능 너도 이제 보니 세속에 물들었구
나. 잠룡대제의 몸을 입고서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고 해서 그런가?”
혜능은 혜안이 담긴 눈으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파천을 바라보
았다.
‘시주가 앞으로 당할 고통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된답니다.
그 연약한 몸에 감당하지 못할 슬픔이 차 오르더라도 잊지 마시기
를…….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시주, 천부경에 대한 연구는 계속 하고 계시겠지요?”
“연구? 연구라고 할 것까지야 있나? 그냥 저냥 심심할 때 외우고
하는 정도지. 이상하게도 그것을 외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잡념이 사
라지거든.”
“저와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약속?”
“앞으로 정확하게 60일 뒤에 태산의 망죽애로 찾아 와 주십시
오.”
“그게 무슨 말인가? 60일 뒤라니? 그리고 태산은 왜? 태산으로 갈
셈인가? 대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혜능을 바라보며 파천은 다급하게 물었다.
“이미 독고 시주도 동의한 일입니다.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잊
으시면 안됩니다. 60일 뒤 태산 망죽애입니다.”
스스스스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혜능을 바라보며 파천은 멍청해져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혜능이 한 말과 행동들은 그를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파천은 독고설란의 처소에 있으면서도 혜능이 한 말에 몰입되아
있었다. 그녀가 애교 섞인 말로 관심을 돌려 보려 애쓰는 것을 느끼
면서도 집중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딴 생각에 몰
입되어 있는 파천, 그를 보는 설란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러나
파천은 이런 설란을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혜능이 한 말이었다. 그냥 흘려 들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구체적
인 언질 또한 하나도 없었기에 그의 생각은 고민으로만 그칠 수밖
에…….
독고설란은 이리저리 뒤척이는 파천의 등을 보며 오늘따라 유난히
그가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손이 그의 손을 찾았다. 두
사람의 손은 하나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에 몰입
되어 있었다.
무정화 북궁사시는 백 명의 수하들을 데리고 모처로 이동해 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마황검위대 백 명의 대원들은 모두 여자였다. 연
령층은 이십대 초반에서 삼십대 초반으로 다양했다. 그녀들은 자신
들의 대주인 북궁사시를 하늘처럼 믿고 따랐다. 천마교 여교도들 중
최고의 고수인 검후 담대명인과 단장화 담대무린이다. 그 둘을 제외
하고는 무정화가 가장 강한 축에 들었다.
그녀의 무공은 일반적으로 북궁 가문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장법에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여자의 몸으로 익히기 힘든 양강기공에 능했
다. 그녀는 특별히 적양마의 의녀의 신분으로 그에게서 적양마장을
직접 전수받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따르는 마황검위대 제7대의 대
원들 또한 대주를 닮아서인지 자부심이 유달리 강하고 승부에 집착
하는 면이 많았다.
그녀들의 옷은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짝 달라붙는 야행복이었
다. 밤의 야음을 틈타 그녀들은 어딘가로 침투해 들어갔다. 도둑고양
이의 몸놀림이 이러할까. 어둠에 묻혀 분간이 안 가는데다 그 움직임
이 지극히 은밀해 움직임을 포착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듯했다. 거대
한 장원의 주위에는 3장 간격으로 경비 무사들이 자리했다. 아마도
그녀들의 목표가 그 장원의 내부인 듯했다. 거대한 전각은 밤인데도
불야성을 방불케 했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 오련회의 총단으로 불리
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청해 사황성의 전진 기지로 화해 버리고
말았다.
무정화 북궁사시가 손을 앞으로 기울이며 까닥거렸다. 그러자 백
명의 대원들이 3개조로 나뉘어 차례대로 앞쪽으로 전진해 갔다. 아
직은 경비 무사들의 눈에 띄지 않아서인지 조심스런 움직임이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10여 장 정도 되었을 때였다. 그녀들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엎드려 있었기에 밑에서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문제는
그곳을 벗어났을 경우였다.
‘으음, 신호가 올 때가 되었는데……. 이 녀석 대체 뭐 하는 거야?’
무정화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침투가
목적이라면 이건 터무니없어 보였다. 이 인원으로 수 천명의 적들을
상대하려는 것이었으므로.
한편 이 순간 오련회 총단 내부의 한 곳에서도 은밀한 움직임은 있
었다. 경혼귀영과 그의 수하 넷은 전각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그들
의 움직임은 귀신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은밀했다. 마황검위대 제15
대는 그 대주가 그러하듯 경신술에 재간이 뛰어난 무사들이 상대적
으로 많았다. 그들의 허리와 등과 어깨 위에는 각각 소가죽으로 된
가방이 매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진천뢰(鎭天雷)라고 불리는 폭탄이
들어 있었다. 이들은 신속한 동작으로 각각에게 배정된 양을 모두 소
화시켜 갔다. 이후 그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동시에 심지에 불을 당긴다. 너무 늦거나 빨라도 안 된다. 알겠나!
시작해라.]
경혼귀영의 전음이 끝나는 순간 그들은 바람처럼 장내에서 사라졌
으며 자신이 설치한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반각이 지
났을까, 그들은 다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경혼귀영은 품 속에
서 길쭉한 막대 하나를 꺼내었다. 주먹 굵기의 막대 끝에는 역시 굵
은 심지가 달려 있었다. 그는 그곳에 부싯돌을 사용하여 불을 붙였
다. 그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허공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이후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팡
하늘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어둠으로 젖어 있던 밤은 때아닌 불빛
에 침범 당해 소스라쳐 몸을 떨어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무정화의
손이 앞쪽을 향해 힘차게 뻗는다. 그것이 신호였던지 백 명의 마황검
위대원들은 동시에 경비 무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 적이다. 꺽.”
그녀들의 손에는 각종 병장기가 쥐어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어김없
이 상대의 목줄을 끊어 놀고야 만다. 경비 무사들은 불시에 당한 급
습에 놀라 채 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황급하게 황천으로 달려가
고야 말았다. 그녀들은 이후 담을 넘어 장원 안으로 훌쩍 날아 올랐
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콰쾅
쾅
여기저기서 약간의 사간차를 두고 폭발음이 울려 나오기 시작했
다. 제일 선두에 서서 달려가는 무정화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 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녀석, 역시 넌 믿을 만한 놈이야.”
그녀들이 안쪽을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경혼귀영이 대주로 있는
머황검위대 제16대 역시 장원 안으로 난입해 들었다. 폭발은 끊이지
지 않고 계속되었다.
“적이다.”
“식량 창고에 불이 붙었다.”
“꺼억.”
“캑.”
고요하던 밤의 적막은 송두리째 파괴되고, 간신히 폭발 속에사 살
아 남은 사황성 무사들은 옷도 채 갖추어 입지 못하고 뛰쳐나오다 기
다리고 있던 마황검위대 무사들에 의해 난자되어 죽음을 맞았다. 역
시 마황검위대는 강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절정 고수의 반열에 올
라 있는데다 실전에 강한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살
인의 방법을 이해하고 있는 그들은 쓸데없이 공력을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무정화의 손이 번쩍일 때마다 상대의 두개골은 박살이 나 흩
어지고 경혼귀영의 몸이 춤을 출 때마다 상대의 허리가 반으로 잘려
나갔다.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나머지 2백 명의 마황검위대 역시나 적들 가
운데 뛰어들어 무지막지한 살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공은
다양했으며 병기 또한 갖가지였다. 어떤 이는 낫을 쓰는가 하면 채대
를 사용하는 여 고수들도 보였다. 암그를 사용하거나 갈고리 같은 무
기를 사용하는 이도 있었다. 장을 주로 쓰거나, 각을 주로 사용하거
나, 고도의 은잠술을 사용하거나, 환술로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중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다양한 무공이 그들의 손
과 발에서 뿜어져 나오니 상대들 역시 결코 약하지 않았음에도 속수
무책으로 넘어져 갔다.
기습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사황성 무사들이 전열을 정비해
가는 듯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수뇌부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누님, 어서 퇴각하십시다.]
[그럴 수 없다. 이제 시작인데 퇴각이라니.]
[이놈들의 수뇌부가 보이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고집 피우지 말고
어서요. 벌써 대형의 당부를 잊은 것 아니겠죠?]
무정화의 얼굴이 곱게 찡그려졌다.
“모두 퇴각하라.”
“퇴각하라.”
두 사람의 고함소리가 있자 무서운 것 없이 몰아쳐 가던 마황검위
대 대원들의 동작이 일시에 뚝 그치는가 싶더니 한꺼번에 몸을 날려
밖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급습을 받아 아직도 제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사황성 고수들은 일순간에 적들이 빠져 나가자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들이었다. 그때 막 장내에 도착
한 이는 사황성주의 다섯 제자 중 둘째 제자였다. 거대한 몸짓임에도
그의 몸놀림은 표범처럼 날렵했다. 그는 장내에 도착하자마자 분노
의 포효를 터트렸다.
“뭐 하는 거냐? 놈들을 쫓지 않고.”
그의 말이 떨어지자 얼이 빠져 우물쭈물하고 섰던 사황성 인물들
이 우르르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일부는 말을 가져 와서 타고 나머
지는 경공술을 사용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장내에는 적들의 흔
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역시 수하가 가져오는 말을 집어탔다.
“둘째가 놈들을 추적해 갔다고?”
“네, 사형.”
여전히 품에 날선 도를 품고 있는 셋째 제자가 사황성 중원 정벌군
의 총책임자격인 자신의 사형에게 하는 말이었다.
“으음……. 그들이 무림맹의 돌격대란 말이냐?”
“아마도 그런 듯합니다. 수하들의 보고에 의하면 워낙에 창졸간에
일어난 일아라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당하긴 했지만 그들의 무공은
중원의 것이 틀림없었다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분명 마황검위대 대원들은 중원에서 쉽
게 볼 수 없는 각종 다양한 무공을 펼쳤었다. 그럼에도 보고는 이렇
게 엉뚱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대체 놈들이 노리는 바가 무엇일까? 수천의 공격도 아니고 단지 3
백 명 미만의 소수 정예의 투입이라.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곧바로 사라 졌다고?”
“…….”
“우리측 피해는 얼마나 되나?”
“그들이 사용한 폭발물에 의한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중
원 무림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진천뢰를 사용한 듯합니다. 폭파 반경
이 비교적 크지 않아 대부분 격전 중에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폭발
물입니다. 사상자는 총 4백 명 남짓 됩니다.”
“으음, 둘째를 따라간 인원은?”
“천여 명 정도가 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사형, 후속 조치를 신혹
하게 내려야 할 듯합니다. 만약 이것이 우리들을 끌어내기 위한 함정
이라면 사형이 위헙합니다.”
“그럴 테지. 경솔한 놈. 바보같이 그 정도도 생각지 못하고 함부로
따라 가다니.”
“어찌할까요?”
그의 음성은 다급함으로 급박하게 흘러 나왔다.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면 지금 따라 가봐여 늦는 건 마찬가지다.
더 중요한 것은 서부 무림의 전력이 기다리고 있을 경우다. 그때는
이미 선수를 빼앗긴 우리 쪽이 불리해진다. 더군다나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다면 말이다. 기다려라. 어쩔 수 없다.”
그는 사제의 목숨이 달려 있음에도 지나치게 냉정했다. 지휘관으
로서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함은 당연하겠지만 그의 태도만 봐서는 사
형제간의 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내 결정이 못마땅하냐?”
그의 말에 도를 품에 안고 있던 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닙니다.”
“가서 네 일이나 봐라.”
그는 돌아서서 걸음을 떼어 갔다. 그는 입술을 찌그러뜨리고 있었
는데 이것으로 봐서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가 실내에서 사
라지고 나자 태사의에 몸을 묻고 있던 소성주의 입에서 나직한 독백
이 흘러 나왔다.
“쓸모 없는 것들. 너희들은 어차피 소모용에 지나지 않는다. 내 야
망을 위한 디딤돌에 불과하다. 흐흐흐, 이번 일만 끝나면 사황성이
내 품 안으로 들어올 뿐만 아니라 후계자가 될 가능성도 그만큰 높아
지는 것이지.”
그는 사황성의 대제자였다. 이미 그는 다음 대 사황성주로 내정되
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느닷없이 후계자 운운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간격은 일정했다. 더도 덜도 아닌 백 장. 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더 벌어지지도 더 좁혀지지도 않았다. 이것
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속도가 같지
않으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이게 계속 유지되려면 어느 한
쪽에서 상대의 속도에 맞춰 자신들의 속도를 조절하지 않고서는 불
가능했다.
뒤를 쫓는 사황성의 인물들은 이런 점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죽
으라고 쫓고 있었지만 간격이 좁혀지지 않자 더욱 열을 올리며 땀을
빼고 있었다. 오히려 쫓기는 자들의 표정이 더욱 여유가 넘쳤다.
[놈들의 속도가 좀 쳐지는 것 같으니 속도를 늦춥니다.]
[그럴까?]
두 사람은 앞에서 나란히 달리면서 일행의 속도를 조절해 갔다. 그
들은 뒤를 열심히 쫓아 오고 있는 놈들이 한심해 보였다. 이 정도 왔
으면 눈치를 챌 법도 하건만 그들은 그런 것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는
듯했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는데, 그것만이 인생 최대의 즐거움이
라도 되는 듯 최선을 다해 경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슬슬 속도를 늦추어야겠는데요.]
이번에는 무정화의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뭐가 불만인지 아직도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살핀 경혼귀영은 혀를
내밀며 속으로 생각했다.
‘에구, 역시나 싸우지 못해 심통이 났구나. 대형의 재차 당부가 없
었다면 아마도 그곳에서 뼈를 묻는 한이 있어도 끝장을 봤을 테지.’
무정화의 승부욕이야 천마교 내에서도 소문난 것이니 새삼스레 들
추어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속도가 늦추어지자 뒤따라오던 추적
자들과의 간격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일 앞서서 말을 몰아
오던 자의 독촉이 이어졌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놈들도 이제 지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러
면 그렇지 네 놈들이 그 정도의 속도를 계속 낼 수 있으리라고는 믿
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쫓는 인물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릴 때부터
어떤 훈련을 받아 왔는지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이런
소리로 나올 수 없었다. 싸움이란 항시 진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빠
른 퇴각도 이기는 방법 중 하나다. 그렇기에 천마교도들은 몇 날 며
칠을 달려도 지치지 않는 체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럴 때 내공을
어떤 식으로 배분하여 사용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뼈가 저릴 때까지 달려본 경험은 이들 모두가 수도 없이 겪어
보았고, 지금의 경우는 차라리 휴식과도 같았다.
두 집단의 간격이 30장으로 좁혀졌을 때였다. 사방에서 우렁찬 함
성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우와.”
“놈들을 도륙하라.”
“사정을 봐 주지 마라.”
양쪽 가파른 언덕 위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한 추적자들의 혼을 단박에 빼놓는 것이었다. 급습은 효과적이
었다. 제일 선두에서 달려 나온 인물은 수라검마였다. 그는 곧장 제
일 선두의 거한에게로 검을 빼들고 덤벼들었다. 천명 대 백명의 싸
움. 그러나 기습이 가져온 이점은 전력의 우위를 상대에게서 빼앗아
버리는 결과를 얻었다.
그들은 치열하게 접전을 펼쳤다. 아니 일방적으로 사황성 고수들
이 당하고만 있었다. 그러나 수적인 우위는 전열을 정비한 사황성 고
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전세는 뒤집어질 듯했다. 바로 그때
도망가던 2백 명의 마황검위대가 돌이켜 가세하자 또다시 전세는 어
찌 될지 알 수 없는 혼미 속으로 빠져들고야 만다.
특히 수라검마와 사황성 이제자와의 접전은 이 중에서 가장 치열
한 것이었다. 상대는 외공을 전문적으로 익혔는지 웬만한 검기는 그
의 몸에 닿아도 되퉁겨 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라검마는 강했다.
몇 차례의 공격이 가중되고 검기가 아닌 검강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거한 역시 쉽게 수비하기가 곤란했는지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과 발이 휘돌려질 때마다 바람이 일었고 귓가를 스치는 파공
성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퇴각이다.]
수라검마의 전음이 또다시 적들 사이를 거침없이 누비던 경혼귀영
과 또한 적들을 신나게 베어 넘기던 무정황게 전해졌다. 그들은 망
설이지 않고 동시에 고함을 질러댔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무정화의 고함은 신경질적이었다. 그녀의 내심은 착잡했다.
어쨌든 마황검위대는 또다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황성
이제자의 입에서 천둥소리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온다.
“놈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주하는구나. 놈들을 끝까지 쫓아 도륙하
라.”
그는 신이 나서 수하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지치고 상처 난 말을
내버려 두고 경공술을 펼쳐 쫓아가기 시작했다. 도망가던 무정화가
수라검마에게 물었다.
[근데 이것 저 정도의 숫자면 그냥 쓸어 버려도 되지 않나?]
[대형의 명이나 따를 뿐이다.]
사실 이번 작전은 추적해 오는 적들의 숫자가 이, 삼천이 넘을 경
우를 대비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따라온 자들은 고작 천여 명. 사실
이렇게 번거로운 작전을 펼칠 필요는 없었다. 적들의 수준이 마황검
위대보다는 몇 수 아래였고 한 사람이 세 명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애초의 작전대로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필요 없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대형의 명에 따르고자
하는 일념 때문이었다. 무정화는 혼자서 툴툴거리고 있었다.
또다시 쫓고 쫓기는 행렬이 이어졌다. 그들이 떠난 자리엔 백여 구
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사천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그 시각, 북방의 한
곳에서는 출정을 준비하는 대병력이 숨을 고르고 도열해 있었다. 온
통 사방이 얼음으로 둘러쳐진 분지 가운데 거대한 빙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안의 넓은 광장에서는 하늘을 뒤흔드는 소리가 사방의
얼음벽을 때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 북해빙궁의 천 년 염원을 담아 중원의 땅에 우리의 혼
을 심으러 떠날 때가 왔다. 그 동안 사방이 얼음뿐이었던 동토의 땅
에서 절차부심하며 힘을 키워 온 것은 빙궁의 신화를 중원에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본좌의 뜻에 따라 준 너희들이
나는 자랑스럽다. 이제 가자. 그래서 보여 주자. 북해빙궁의 위대함
이 어느 정도인지를.”
“우와.”
“북해빙궁의 힘을 보여 주자.”
“중원은 우리의 밥이다.”
“궁주님 만세.”
북해검왕이 하늘 높이 빼어 들고 있는 것은 대대로 북해빙궁주의
신물이라 알려진 빙검(氷劍)이었다. 얼음의 정화로 만들어졌다는 빙
검은 무지개 빛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북해검왕의 옆에는 언젠가 중원에 온 적이 있었던 송궁주가 두꺼
운 털옷을 입고 얼굴만 간신히 내놓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해
염려스런 눈길을 보냈다.
‘내게 무림맹과의 동맹을 약조하셨던 아버님이 왜 갑자기 뜻을 바
꾸셨을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정말 중원과 승부라
도 결하시려는 걸까? 그렇게 되면 오빠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토록
사랑을 주었던 오빠마저 이제는 아버님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는 말인가?
한숨을 토해내자 금방 결빙되어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
녀의 근심은 깊어만 가고 북해의 밤도 깊어만 갔다.
사황성의 이제자 거력패산(巨力敗山) 타경(打景)은 사방을 둘러보
며 기쁜 숨을 몰아쉬었다. 3백여 명에 이르는 적들을 추격해 온 3백
여 리가 자신의 절망만큼이나 멀게 느껴지고,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
이 벗어나기 힘든 생사의 기로임을 자각하자 자신의 아둔함으로 수
하들까지 죽음으로 내몰았음에 그들에게 미안했다.
어느새 적들은 3백 명에서 5백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와는 반
대로 자신들은 천 명에서 4백으로 줄어 있었다. 3백 명을 쫓으며 또
한 번의 기습을 받았고, 그때 많은 수의 수하들이 생명줄을 놓아 버
렸다.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적들은 수도 많을뿐더러 자신들보다
더 강했다. 살아나기는 틀린 것이다. 마지막 희망을 걸어 보자면 혹
시나 자신들의 위험을 감지한 사형이 지원 병력을 보내 주었을 경우
였다. 이런 생각을 하던 타경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형에게 그걸 바란다는 것이 우습군.’
사형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타경이었다. 자신의 야망과 욕
망을 위해서라면 사부조차 망설임 없이 시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런 사형을 두려워해 온 것은 오래 전부터 였다. 사황성의 실질
적인 지배자인 사형은 사황성 고수들에게는 감히 범접치 못할 절대
자로 각인되어 있었다.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을 다시 한 번 훑어 보았다. 그들은 강
해 보였고 여유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저들은 결코 무림맹의 인물들이 아니다. 우리가 상대해 본 무림
맹의 고수들과는 그 격이 다른 자들이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상대들은 이미 다 잡아 놓은 고기를 관찰하기라도 하듯 여유를 부
리고 있었다. 타경은 이런 자신의 처지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고, 순
간 살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오를 것만 같았다.
“모두 내 말 잘 들어라. 우리가 오늘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변함 없
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청해의 자랑스런 용사들답게 마지막 한 사람
인 남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다 죽자. 죽음 따위에 겁을 내어서는 사
황성의 무사라 할 수 없다. 알아들었나?”
“존명.”
“우와, 놈들을 도륙하라.”
오히려 그들이 기세를 올려 갔다. 그것을 본 무영존의 입가에 희미
한 미소가 걸렸다.
“이것 봐 친구. 차라리 그냥 투항하는 게 어떤가? 이미 승부는 끝이
난 것 같은데.”
“청해의 용사들에게 투항 따위는 없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그런가? 마음에 드는 친구군. 좋아, 그럼 함께 죽어라.”
무영존은 슬쩍 손을 쳐들었다.
“와아.”
사황성의 인물들로부터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것과 대조적으로 마황
검위대의 고수들은 아무런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먹이를 앞에 둔 매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번뜩이는 시선들은 상대를
일수에 절명시킬 약점을 찾아내느라 분주했다.
쉬익
쉬익
그들의 움직임에서 나는 소리였다. 고함을 치며한껏 기세를 올린
사황성 고수들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렇지만 역부족임을 느끼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최강의
무공을 사용하며 나름대로 투지를 불태우지만 현격한 실력 차 앞에
서 허무하게 꺾이고야 만다.
거력패산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르게 도약하며 적들의 수장으
로 보이는 자에게로 돌진해 갔다. 아무려면 사황성주의 이제자인 자
신이 중원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자에게 밀리기야 하겠는
가……. 그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수하들을 염려했을
뿐이지 자신의 상대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불끈 쥔 주먹은 일장 크기의 바위도 부술 수 있었다. 사황성
최고의 권법인 붕권(鵬拳)과 패산권(敗山拳)을 대성한 자신의 적은
중원 전체를 뒤져 보아도 별로 없을 것이라 자신해 오던 터였다. 소
림사 방장과 붙는다 해도 결코 약세를 보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무영존은 다가오는 거한의 몸놀림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폈다. 그
가 손을 말아 쥐고 도약하며 거리를 단축하는 것과 2장 간격부터 발
을 놀리며 보법을 밝아 오는 것까지 그리고 지척에 다다라 두 팔을
기이한 각도로 휘저으며 권을 내질러 오는 것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살폈다.
‘이놈이 얼이 빠졌구나.’
타경은 내심 득의하여 상대를 비웃는 마음까지 들었다.
‘작전에는 졌지만 실력에서야 질소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에 닿기도 전에 그의 주먹은 이미 무영존
의 근처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주먹은 형체가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빨랐다. 상대가 피하거나 맞상대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타경의 입
가에 진한 미소가 스쳐 간다. 막 무영존의 관자놀이를 쳐갈 때였
다. 타경은 곧 이어질 타격음을 기대하며 더욱 힘을 실었다.
휘잉
타경의 기대가 일순간에 무너지는 소리였다. 바람인 듯 무영존의
실체는 허상으로 화하여 타경이 휘두른 주먹을 피해 그의 뒤로 돌아
가고 있었다. 이걸 느낀 타경의 오른발이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 빠르
게 따라 갔다. 순간 그의 발은 공간 전체를 점유하며 십여 회나 찍고
휘돌리고 찬다. 그럼에도 그는 속절없이 허공에다 혼자 힘을 쏟고 있
었다.
무영존은 빨랐다. 이쪽인가 하면 어느새 저쪽에 있고 앞인가 하면
뒤에 가 있었다. 타경의 권이나 각은 엄청난 위력을 싣고 있었지만
하나도 격중시키지 못하는 바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또한 이
것을 모를 리 없고 보면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편 옥기린 등은 적진 중에 파고들어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내
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무정화는 그 동안 쌓아 놓은 울분을 한꺼번
에 해소라도 하려는 듯 무지막지한 살기를 피워 올리며 적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일방적인 도살에 가까운 싸
움이었다. 실력이 딸리는 데다 숫자 면에서까지 뒤지니 어찌해 볼 방
법이 없었다. 속절없이 쓰러져 가는 수밖에.
무영존은 타경의 주위를 빠른 속도로 돌아 다녔다. 눈이 핑핑 돌아
갈 정도의 속도인지라 타경 역시나 제대로 손발을 뻗어 보지 못했다.
아쉽게도 타경은 장법이나 지법 등을 익힌 적이 없었다. 그러니 자신
의 몸이 닿을 수 없는 거리의 적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때서야 타
경은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이놈이 나를 노리고 있구나. 그렇지만 한 번 만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그는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꿈나라를 헤매고 다녔다. 상
대의 실력이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지
막 자존심 때문인지 그의 눈은 상대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이놈, 도망만 가지말고 제대로 한 번 부딪쳐 보자.”
그 소리를 들었음인가. 타경의 주위를 돌아가던 무영존의 발이 그
자리에 딱 고정되었다. 그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회색빛으
로 물들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타경은 온 힘을 짜내어 몸을 띄웠고 그 상태에서 두 발을 힘
껏 모아 돌진했다.
쐐액
무영존은 그를 향해 오히려 다가섰다. 오른쪽으로 몸의 중심을 무
너뜨리며 왼손을 쳐올려 모아 차는 타경의 발끝을 슬쩍 한쪽으로 밀
어 놓았다. 이후 무영존의 말아 쥔 오른 주먹이 타경의 무릎 관절을
힘껏 쳤다.
뻑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 갈라선 두 사람은 다시 돌격해 갔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무릎이 박살났었어야 할 타격에도 타경은 끄떡없는
것 같았다. 그는 주먹을 힘껏 찔러 왔다. 이번에는 무영존도 물러서
지 않고 오른손을 펼쳐 맞상대했다. 주먹과 편 손이 가운데 지점에서
부딪쳐 갔다. 무영존은 상대의 타격을 오히려 손바닥으로 슬쩍 끌어
들이며 순간적으로 힘을 뻗었다.
뿌작
“으악.”
타경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토해지는 순간 무영존은 손으로
그의 주먹을 잡고 오히려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끌려 오는 타경의
턱을 향해 왼손을 작렬시켰다.
퍽
고개가 힘껏 돌아가며 입에서 피와 이빨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
나 무영존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순간 반사적으로 오른발을 뻗
어 올리는 타경의 무릎 관절을 밟으며 그의 키를 훌쩍 넘어 갔다. 무
영존의 손에는 아직도 타경의 오른팔이 쥐어져 있었다.
뿌직
팔이 빠졌는가 부러졌는가. 뒤로 휙 돌아간 타경의 팔이 무사할 리
는 없었다.
그럼에도 무영존의 손은 타경의 오른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참으
로 끈질긴 공격이었다.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무영존의 발이 타경의
허리 뒷부분을 강하게 가격한다.
“컥.”
입에서 피가 토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연 이어 터져 나온 무영존의
발 차기는 타경의 등과 허리와 목을 사정없이 두드려댄다.
퍼퍼퍼퍽
비명 지를 힘도 바닥났는지 타경은 조용했다. 오른팔을 무영존의
손에 맡긴 채 그는 이미 허물어져 있었다. 온통 뼈마디가 부서져 너
덜너덜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그를내려다보며
무영존이 한마디했다.
“중원은 아무나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이미 임자는 정해져 있
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것들은 모두 지옥으로 보내 준다.”
무영존이 그 말을 토해낼 시점에는 이미 장내의 상황도 끝나 가고
있었다. 완벽한 승리! 몇 차례의 기습으로 상대의 진을 빼놓은 탓도
있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실력 차는 이들의 승부를 일찌감치
결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확인하는 절차가 좀 복잡했을 뿐이
었다. 고통스러운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를 향해 무영존은 마지
막 말을 했다.
“억울하게 생각지 마라. 너희들보다는 우리의 수련이 더 처절했을
뿐이니까.”
무영존은 그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손을 휘저었다. 적강륜이
그의 손에서 뿜어졌다. 강기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타경의 목을 몸에
서 분리해 버렸다.
사방으로 모여들고 있는 마황검위대 대원들을 향해 무영존의 명이
떨어졌다.
“낙양으로 간다.”
파천은 일찌감치 무림맹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정도사
령대 5백 명이 따랐다. 율극에게 죽은 대원들을 대신해 새로운 인물
들로 채워져 있는 정도사령대의 모습엔 비장감이 흐르는 것 같았다.
새로 사령들이 된 인물들에게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짙게 흘러 나왔
다. 마도련의 본거지로 가야 하는 처지이니 이런 불안감은 당연한 것
이었다.
심지어 부령사 의천백룡 곽운성에게서도 이런 불안감은 내비쳤
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원스런 갈기를 흩날리는 잘 빠진 몸매의 흑마
에 멋들어지게 올라타고 있는 듯했지만 그의 내심은 초조하기 그지
없었다. 소림사로 떠난 또 한 명의 부령사 풍운비룡 청운학이 부럽기
까지 했다.
이번 대령사의 결정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적진의 한복판에 아무런 대책 하나 없이 들어선다는 것은 배짱이
좋다, 또는 대담하다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짓이라 여기고 있는 그
였다.
만약 마도련과 생사를 놓고 결하는 것이라면 그 또한 불만이 없었
다. 어차피 그것은 각오하고 있던 바이니 마음에 부담은 있을지언정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경우가 달랐다. 이러나 저러나 해봐야 이미 결
정된 사실이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얼굴 표정까지 관
리하기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대령사에 대한 믿음에 스
스로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마차에 홀로 타고 있는 파천의 머리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복잡하
기만 했다. 그는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놓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림맹과 마도련의 힘, 그리고 야림의 힘까지 더한 힘이라면 중원
전체의 힘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그 힘일지라도 세외3세나 혈마
천, 사사혈교, 천황부의 힘을 감당하기 벅차다. 그들이 연합한 힘이
라면 더더군다나 힘들다. 결국은 그들 세력 하나 하나를 따로 고립시
키고 각개 격파해야 한다는 말인데. 현재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그들 모두를 제압한다고 해도 우리 또한 거의 힘을 상실한 연후일 것
이다.
과연 그 힘으로 그들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유일한 희망은 천마교의 힘을 최후까지 남겨 두는 것. 과연
가능할까?’
그는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힘껏 저었다.
‘어쩼든 해보는 데까지는 밀어 붙여 보자. 최선을 다하고서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당분간은 사천에 침입한 사황
성의 세력들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번 셈이다. 그들을 한
꺼번에 움직이게 하면 곤란하지.’
파천은 무영존이 이끈 마황검위대를 떠올려보았다.
‘개파대전을 통해 무림맹과 마도련의 힘을 자연스럽게 합해야 한
다. 내가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두 세력의 연합이 알려지지 않고 은
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이것이 알려질 경우 다른 세력들이 하
나로 뭉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은 더 어렵게 된다. 보안이 가장 큰
문제다.’
그럼에도 이렇게 요란법석을 떨어 가며 전 무림의 시선을 한곳에
모으고 있었다. 정도사령대의 위용은 관도를 지나 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두었다. 하나같이 영기발랄하고 위풍당당한 그들의 풍
모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그다지 빠르
지 않은 속도로 행렬을 진행시키고 있었음에도 관도를 지나는 사람
들은 한 편으로 비켜서서 길을 터주었다.
그들은 아직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다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럼에
도 사령들은 근심이 많아서인지 주변의 경관을 살필 마음의 여유는
없는 것 같았다.
장강까지는 육로로 말을 이용하고 장강헤서부터는 배를 이용해 동
정호를 거쳐서 가야 한다. 먼 여정이었다. 파천은 행렬의 속도가 너
무 느리다 생각했던지 마차의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아 가던 부령사
곽운성에게 명했다.
[속도를 좀더 붙여라.]
“존명. 다들 속도를 빨리 하라.”
그의 외침이 발해지자 정도사령대 5백 기마대는 속도를 내기 시작
했다. 그러자 금세 관도상에 뿌연 먼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천은
눈을 감았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적당한 진동은 오히려 몸의 긴장을
풀어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늘어지기 시작했으며 금세 졸음
이 쏟아졌다.
같은 시간 낙양에서도 한 무리의 인마들이 행렬을 짓고 남으로 이
동해 갔다. 그들의 숫자는 5백 명 정도였으며 깨끗한 백삼들을 걸치
고 있었다. 한쪽에 검이나 도를 차고 있는 걸로 봐서는 무림인들로
보였지만 무리의 중앙에서 달려가는 마차 위에는 대상벌이란 표기
가 바람에 나부꼈다. 마차 안에는 두 명의 청춘 남녀가 마주보고 앉
아 있었다.
“먼 여정에 함께 데려 가게 되어 미안하오.”
“…….”
여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차의 창을 열어 놓고 바깥
풍경에 넋을 놓고 있었다.
“자운, 그대 혼자 낙양에 두고 올 수가 없었소. 그 동안 바깥 출입
을 하지 않았으니 답답하기도 했을 터이고…….”
말하는 사람은 초량이었다. 그리고 앞에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 앉
아 있는 여인은 천향옥봉 자운이었다. 회천문의 개파대전에 참가하
기 위해 초량이 직접 가게 되었는데 그가 생각하기에 그녀 혼자 낙양
에 두는 것이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라 함께 데려 온 것이다. 검황이
나 이총사를 믇을 수 없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녀를 한시라
도 곁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형주를 통해 동
정호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녀의 반응이 냉담하자 초량은 어쩔 수
없었는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하긴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 기다리겠소. 그대가 내
마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녀의 눈동자는 정지해 있었다. 창을 통해 밖의 경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가득 채우고
있는 영상은 광마존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광마존이 파천에 의해 구
해졌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고 믿
었다. 한사코 그녀의 의문에 답하기를 회피하던 초량이 한 말은 ‘그
는 죽었소’ 사는 단 한마디.
‘내가 그 이를 죽였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가 죽은 거야.’
그녀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자
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죽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마 그녀는 이대로 죽을 수가 없었다. 그녀
는 광마존의 복수를 다짐했다. 아무런 힘도 없지만 복수하리라 다짐
했다.
초량은 그녀가 자신을 적대시 할 것이 두려워 광마존을 죽인 자가
검황이라 거짓말을 했다. 자신은 그의 목숨을 구하려 했지만 검황을
막을 수 없었노라고도 했다.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수
혈을 짚여 실신하기 전까지 본 것은 초량의 섭선이 그의 드을 가르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의 공격마능로 그가 죽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두 사람에 의해 그가 죽었으리란 추측쯤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모두 죽일 거야. 내 사랑을 빼앗아 버린 당신들을 죽이지 않고는
결단코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당신들의 가슴에
차가운 비수를 꽃고야 말 거야.’
그녀의 얼굴은 더욱 차갑게 굳어 갔다. 그녀의 내심을 모르는 초량
은 그녀가 점점 수척해져 가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당분간은 애쓰지 말자. 그녀가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
는 거사.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열병 같은 사랑도 잊혀지기 마련이
지. 당신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다 얻은 들 무슨 소용이 있으
리요.’
서로의 속마음이 이처럼 다른 두 남녀가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었
다.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는 전경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올 리 만
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