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15화 : 마계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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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15화 : 마계 회의


마계 회의

루시퍼와 대마신들과 전 마신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궁전의 중앙에 위치하는 대전은 원형결투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 장소로 어두의 천사와 함께 들어섰다. 한참 루시퍼의 말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제일 중앙에 바닥에서 3장은 됨직한 높이로 용상이 꿈틀거리는 형상으로 서 있고, 그 머리 부분에 좌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 루시퍼는 앉아 있다.
그의 주위로 일곱의 용상이 더 보였는데 루시퍼가 앉은 용상보다는 반장 정도가 낮았다. 그곳엔 일곱 명의 대마신들이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했다.
“선맥을 치고 나서 본계를 정비할 잠시의 시간을 갖겠다. 그런 연후 차원정벌을 시작한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라. 그리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
본계로서는 최초이자 마지막 전쟁이기도 하니 아쉬움과 후회가 없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하리라. 마신들은 내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대마신의 지휘 아래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하달된 명을 완수하라.”
그의 준비된 말은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쳤으며 망설임 없이 하달되었다.
가끔씩 대마신들이 하나씩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루시퍼 혼자서 회의 아닌 회의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나와 어둠의 천사는 대회의장 입구에서 그런 루시퍼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많은 계획들이 세워졌으며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졌다. 현 마계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 신분인 저항자들에 대하 처리도, 선맥에 대한 공격도, 선계와 천상계와 귀계와 무한계에 대한 기본적인 대책도 얘기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런 말들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루시퍼를 이해할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적이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중요 사안도 상당했기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단순한 자신감으로 이해하기엔 무리한 점이 뒤따랐다.
루시퍼의 말을 계속 이어졌다.
“이제 몇 가지 먼저 처리해야 할 사안에 대해 언급하겠다. 먼저 칠성대덕, 그대는 본계와 귀계가 현재 연합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내가 저번에 특별히 부탁한 적도 있었지. 귀계와 본계의 연합은 이제 기정 사실화 되어 가고 있음에도 그대는 자신의 본분을 잊고 이와 같이 반역적인 행동을 했다.
묻겠다. 그대는 본계와 대적하려 하느가?
용상 아래쪽에 적루아가 앉아 있다가 루시퍼의 말에 고개를 가만 끄덕였다.
“귀계의 칠성 중 육좌 모두가 날 돕는다 해도 말인가?”
역시 적루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결정은 확고하여 더 이상 번복함이 없을 듯싶었다. 그럼에도 루시퍼는 또다시 확인하고자 했다.
“귀계 전체가 그대를 반역자로 선포한다 해도 말인가? 그 동안 귀계에서 그대가 누렸던 모든 권리를 제한당하고 박탈된다 해도 말인가?”
적루아는 전혀 동요됨이 없었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기라도 하듯 단호하기만 했다.
“좋다. 그대에 대한 처리는 어차피 귀계에 일임해야겠지.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그대에 대한 지금까지의 예우를 유지하도록 하지. 무척 어리석군, 칠성대덕.”
이때 아사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웬만해선 잘 나서지 않는 그였기에 약간 술렁이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마황,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뭔가, 아사셀.”
“귀계와의 연합은 결정된 것이요?”
“아직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만간…….”
“그렇다면 현재까지는 귀계 역시나 우리 마계의 적이군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는 포로로서 대우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괜히 트집을 잡자고 하는 이유가 뭘까?
“이제는 전시 체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적에 대해 아량을 베푸는 따위의 여유를 부릴 단계는 지났습니다. 그 동안 마신들 사이에서 여러 불만들이 있었다는 걸 마황께서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불만? 지금 불만이라고 했나? 무슨 불만이 있다는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먼저 마황의 후사를 독단적으로 결정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휘권의 일부나마 넘겼다는 사실이죠.
그들은 마신들의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낯선 존재들. 그런 그들을 상관으로 섬겨야 하는 마신들의 입장을 헤아리셔야 할 겁니다.
또 하나, 마신들의 편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마신들의 단 두 직급에 좀더 체계적인 위계가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대마신 브리트라가 오래전부터 마황께 건의 드린 것이기도 하죠. 아수라와 나찰들은 전시가 되면 마신갑을 착용합니다. 서로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에서 효과적인 전투를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 당장 차원정벌을 시작하는 데는 무리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동안 정성들여 온 마전사 육성이 완전한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아사셀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들이기도 했다.
루시퍼가 아사셀의 제언에 잠시 생각하는 누치더니 받아들일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별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사려 깊은 제안을 잘 들었다. 먼저 내 아들들과 딸들에 대한 부분만은 아무런 반대 없이 따라 주었으면 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앞으로도 더 이상 말하지 말길 바란다. 마신들 간의 위계는 좀더 심사숙고하여 될 수 있는 한 그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매듭짓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출정의 시기에 대해서는……. 내가 지금 정벌을 선언한다 해서 곧바로 일어날 일은 아니다. 그대 말대로 마전사가 곧 완성되고 그 이후에나 가능하겠지.
뿐만 아니라 여러 변수를 고려해야 되기 때문에 실제 차원정벌의 최초 전투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더 소모될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지금 이 시간 부로 전시 체제로 돌입된다는 것, 이것 한 가지다. 별다른 장애가 없다면, 그리고 판단하기에 시기가 적절하다면 우리는 지금이라고 다른 차원계를 복속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 더 기다려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한다. 그 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 때 브리트라가 일어나며 루시퍼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제 의사를 말해 갔다.
“존경하는 마황이시여, 우리는 마황의 신하들. 감히 마황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반발하고자 하는 마신은 단언하건대 단 하나도 없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황의 명령에 따라 차원정벌에 나설 것이며 그 모든 영광을 마황께 돌릴 것입니다.
대마신 아사셀 님이 말씀하신 의도로 제 생각으로는 좀더 신중하게 대사를 진행시켜 가자는, 그 한가지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하나 더 첨언하고자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본계의 첫 번째 정벌 대상이 선계라는 게 과연 최선책인가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객관적인 전력만으로 따진다면 귀계와 선계는 차원계 중에서도 가장 미약합니다. 그들은 본 마계에 그다지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적은 결국 천상계가 될 것이며, 가장 큰 변수는 무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무한계는 구체적인 구심점이 없어 결속하지 못하지만 그 전체의 힘을 고려한다면 가장 껄끄럽습니다. 귀계와 우리와 연합하여 선계를 견제해 주고, 우리가 천상계와 힘을 겨루고 있을 떄 무한계가 힘을 더한다면 심히 곤란한 일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천궁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전력의 상당 부분을 손실 없이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자는 말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비중을 두고 먼저 처리해야 할 부분은 무한계에 전력을 침투시켜 그들의 분열을 더욱 부추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연후에 귀계가 선계를 견제하고 우리가 천상계를 친다면 별 손실 없이 전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브리트라의 그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던지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다른 마신들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좋다. 그건 좀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것 같군.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면 내게 보고하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때다. 루시퍼가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에 대한 말들이 흘러 나왔다.
“나는 생각하기를, 저기 파천과 바알세불을 차원정벌이 끝나는 시점까지 본계의 노예로 두려 했다. 그런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를 본계에서 내보내기로 하였다.”
웅성웅성
잠시 소요가 있고 난 후 발 리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서더니 흥분해 소리쳤다.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저놈을 놔주다니요?”
“그렇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저놈은 제가 알기로도 다른 차원계의 사주를 받았습니다. 그를 통해 천상계나 선계가 무슨 일인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거늘. 그들의 뜻대로 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찬드라까지 내 방출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브리트라가 날 돌아보며 천천히 말한다.
“저 자 하나만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저 조금 강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이곳 인간계에서나 힘을 쓰지, 다른 영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지요.
허나 그럼에도 염려되는 건 다른 차원계들이 저 자를 상당히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굳이 장애가 될 일을 방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위험 요소를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 품에 있는 한 저 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게 가장 좋지요. 우리가 그를 데리고 있어 봐야 득이 되지 않지만 손해 볼 일은 없지요. 그렇지만 그를 내보내면 어떤 변수가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도 내게 친절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던 그도 이런 예민한 부분에 직면하게 되자 결국 제 잇속을 챙기고 있었다. 그는 날 적 이상으로는 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게 지극히 당연했다.
이때 메피스토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또다시 덧붙여 말하려는 발리를 제지했다.
“제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자의 전생은 저로서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이번 생이 처음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저 자가 오행기를 모아 새로운 물질을 생성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물질 생성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영자들만이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자는 인간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이런 걸로 보아……. 보낸다면 필시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는 모르나 그건 그리 환영할 일은 아니군요.”
모두 반대하는 분위기다. 이러다 마계를 빠져 나가지 못하는 건 아닐지. 난 은근히 걱정되었다.
“내가 한마디 하겠소, 여러분.”
어둠의 천사, 메타트론의 사자가 앞으로 나서며 그렇게 운을 떼가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우리들이 서 있는 쪽으로 몰려들었다.
“이 결정은…… 메타트론 님이 내리신 겁니다. 그래도 반대하시겠소?”
조용했다. 아무도 나서서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주님의 뜻입니다. 무슨 의도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단지 전언하는 사자에 불고합니다.”
“다 들었겠지? 내 아버지의 명이다. 불만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를 보내기로 하겠다, 살아 있는 채로 말야.”
나는 그의 최후 결정을 듣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회의는 한참이나 더 진행되었고, 여러 가지 사안들이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그걸 듣고 있는 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점차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내가 장삼봉 진인을 찾아 가려 하는 건 이들 마계에 복수하기 위함이다. 진인은 날 데려 가려는 이유가 광명을 가져오게 하려는 것이며, 그게 필요한 건 다른 차원계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들이 차원정벌을 나선다면 굳이 광명을 가져오지 않아도 다른 차원계들은 어느 입장이든 나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더 이상 날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광명을 얻어야만 한다. 내 힘으로는 이들을 상대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광명을 내 손에 쥐어야만 한 가닥 희망이라도 바랄 수 있다. 그래야만 다른 차원계들을 움직여 이들을 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게 있어 광명은 복수를 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또 한 가지 염려는 만에 하난 행운이 따라 광명을 손에 쥐게 된다 해도 마계를 처단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차원계 전체와의 전면전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난 루시퍼 앞에 여전히 편치 않은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홀로 사색에 잠겨 나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나 또한 갖가지 생각들에 머리가 복잡하기만 했다.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차원 침략을 결행한다 해도 결국 광명은 필요하다는 것과 이것저것 따져 볼 것도 없이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광명이 어느 정도의 권위와 효력을 발휘할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었지만 만약 그걸 얻어 무한계나 귀계마저 마계와 싸우게 할 수 있다면 그 가치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마계가 자신한다고 해도 전 차원계를 상대로 승리 할 수는 없으리란 생각도 더불어 들었다. 그래, 어차피 길은 하나다. 가지 않으면 멈춰 있을 수밖에 없다.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파천. 왜, 고민되나? 복수는 하고 싶은데 힘이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너무 안달하지마라. 그들이 무슨 제안을 할지는 모르지만 결국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난 한 가지 무척이나 궁금한 게 있다. 널 죽이면 나중에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지…… 난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몇 번인가 그런 충동을 느끼기도 했었지. 기껏 아라한 정도겠지만. 그러니 더 이해가 가지 않아. 네 어떤 점이 그들로 하여금 필요로 하게 했는지. 널 곁에 두고 그 의문을 풀어 보고 싶었는데 좀 아쉽군.”
나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네 놈의 그 잘난 면상을 한 번쯤 시원하게 후려쳐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나도 아쉽기만 하다.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다.”
느닷없는 소리였다. 난 그가 할 말이 무언지 궁금했다. 숨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저 불칸입니다.”
“오, 들어와라. 파천, 그 얘긴 잠시 있다 해야겠군.”
환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애는 슬쩍 나를 쳐다보았을 뿐 이내 루시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만 있었다. 녀석의 그런 태도가 난 야속하기만 했다.
너무 변해 버린 내 아들 환아. 그렇지만 난 아직까지도 환아를 낯설게 쳐다볼 수 없다. 너는 날 거부할 수 있어도 난 널 포기할 수 없단다.
“그래, 어머니를 땅에 묻고 왔다고?”
“네.”
“서운하더냐?”
“아닙니다.”
“그래야지. 마신들이 너희들을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들어 알고 있겠지?”
“네, 들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을 거다. 너희들은 아직 미완성이다. 내가 널 부른 건 그래서다. 환상지대로 다시 들어가 수련을 계속하라. 자신감이 생기지 않으면 나오지 마라. 지금 너희들의 힘은 대마신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에 필적할 만한 실력을 갖추기 전에는 나오지 마라.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루루와 세라핀에게도 그렇게 전하는 것 잊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너희들에 대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마신들이 아닌 마계전사들을 이끌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마력을 연성해야 한다. 명심해라.”
“잘 알겠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없느냐?”
“없습니다.”
간단한 질문과 대답만이 서로 오갔다. 난 환아와 나누고 싶은 얘기들이 많았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웠다.
환아는 역시 내게 단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고 멀어져 갔다. 환아가 사라지자 루시퍼가 다시 날 향했다.
“고백할 것이 있다, 파천.”
“…….”
“궁금하지 않나?”
“말해봐라.”
“사실 몇 번인가 네게 마력을 걸어 두려 했었다. 그건 네 마음속을 헤아리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게 잘 되지 않더군. 인간에게 마력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영혼을 통제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아. 그렇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지.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네게 대한 의문이 더 강해지더군. 어떤 힘이 내 마력에서 널 지켜내는지가 너무도 궁금했다. 너는 분명 보통의 인간이다. 물론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보기에 특별할 것도 없지.
네가 영자였다면 더 쉽게 마력을 걸 수 있었겠지만 인간이라 힘든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솔직히 지금까지도 그 일은 내게 큰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 또한 의문이 들었다. 그가 마음먹었다면 적루아나 천마나 설란에게도 마력으로 마음속을 살필 수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우리 의도가 미리 발각돼 루시퍼를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난 그 이유를 루시퍼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건 내 자존심 때문이었지. 너희들을 마력으로 강제하거나 감시하는 일은 내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일. 그런 짓까지 해야 할 만큼 난 약하지 않다. 내가 뭐가 무서워 그러면서까지 작은 일에 집착해야하는가, 라는 그런 생각 때문이었지.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솔직히 후회가 되기는 하는군. 예전에 난 아버지 메타트론과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분은 내게 말씀하셨지. 인간계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는 있어도 그들 모두에게 순종을 끌어낼 수는 없다고.
그때 나는 자신 있게 말했었다. 해보이겠노라고. 그 분은 그러시더군.
‘결국 거부하는 인간들 모두를 넌 죽일 수밖에 없을 거다. 죽이거나 강제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지만 결국 그건 네 스스로 그들에게 진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지.
‘너는 인간계를 차지하겠지만 인간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 나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라 큰소리를 쳤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아버지의 예견대로 된 셈이군.”
메타트론…….
그는 무서운 자다. 그런 예지력의 소유자가 달리 대책을 세워 놓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쩐지 내 모든 의도나 행동이 그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어 가는 게 아닐까, 라는 의문마저 들었다.
“내일 이곳을 떠나라.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군. 파천, 이왕이면 강자가 되어라.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내가 감탄할 수 있게 말이다. 이렇게 보낸 걸 후회하도록.”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지. 그리고 나도 한 가지 부탁을 하마.”
“뭔가?”
“아이들을 잠시 네게 맡기마. 그렇지만 반드시 데리러 올 것이다. 그 아이들이 내게 칼을 겨눈다 해도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리고 예전의 아이들로 돌려놓고야 말 테다.”
“하하하하.”
“지금은 네가 웃지만 그때는 내가 웃으리라. 기억해 둬라. 내 영혼이 소멸되지 전까지 난 네 적이다. 내 이름은 파천! 이 이름을 기억해서 지우지 마라.”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군. 네가 고집을 버렸다면 아주 이상적인 관계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야. 다시 보게 된다면 나 또한 널 최선을 다해 제거해 주지. 그리고 네 신념이 틀렸다는 걸 보여 주마. 그만 가 봐라.”
루시퍼의 처소를 나서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건 환아가, 화아가, 천아가 내 앞을 막아서고 검을 겨누고 있는 장면이었다.
루시퍼의 처소를 나서는 순간 사실상 난 자유의 몸이 돈 셈이었다. 그의 최후 선고가 내려진 이상 누구도 내 앞을 막아서지 않을 것이었다.
내 예측은 정확했다. 어딜 가든 어디서 무얼 하든 그들은 방관자로 지켜보았고 결코 간섭하지 않았다.
난 나중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알아 두어야 했다. 나중에 마주설 때가 되면 이 모든 건 싸움을 위한 훌륭한 정보가 되어 바탕을 튼튼하게 해 줄 것이며, 승리할 여건을 더욱 확고하게 해줄 것이다.
예전엔 궁전에서 나가는 걸 막았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이대로 마계의 영역을 벗어난다 해도 그들은 막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땅으로 내려 와 마인들을 살피기도 했고, 그들의 규모를 가늠해 보려 애썼다.
여기저기서 인간들을 처형하는 장면이 목격되었고, 그럴 때면 그 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고 진행되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관찰했다. 내 속에 커 가는 분노의 나무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었다. 더욱 빠르고 깊게 뿌리를 내려 온 마음속을 가득 채우길 바랐다.
그 어느 것도 막아서지 않았지만 금지된 곳은 여전히 존재했다.
마전사들이 있는 곳이나 마신들이 수련하는 장소만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어느 정도 꼼꼼하게 살펴보다 나도 모르게 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 기억으로는 아이들이 처소로 삼고 있는 구역이었다.
내일 환상지대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오늘이 아니면 당분간 만날 수 없겠구나. 나는 몇 번인가 망설이다 결국 그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환아가 날 보더니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환아가 아무리 장성하고 마계의 표징을 이마에 지니고 있다 해도 여전히 내게는 사랑스럽기만 한 어린아이였다.
“환아.”
환아가 뒤로 돌아서서 작게 말했다.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세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내 눈엔 여전히 넌 환아인데……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만 가십시오. 당신과 나는 이제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저는 마황님의……”
“그만, 그만해라. 그래, 가마. 대신 이것 한 가지는 말하고 싶다. 아빠는…… 널 사랑한단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언제까지나 널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치 않을 거다. 다시 돌아오마. 그러니 너도 포기하지마라.
아빠와 엄마는 너희들을 원망하지 않아. 기다려다오. 반드시 다시 찾아오마.”
환아는 내 말에 대답하지도, 무시하거나 막으려 들지도 않았다. 그냥 뒤돌아서서 가만있었을 따름이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화아와 천아를 잘 보살펴라. 서로 의지하고 힘을 합해 잘 견뎌내거라. 그럼 못난 아빠는…… 이만 가마.”
환아는 끝끝내 날 돌아보지 않았다. 그곳을 걸어 나오는데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아 나왔고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후우, 그래. 네 선택이었다 해도 그것 역시 널 지켜 주지 못한 아빠의 잘못이지. 아직 어린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선택에 놓이게끔 한 것만으로도 내 잘못이지. 그래, 그렇다 말고.

내게 오늘은 분명 새로운 의미의 날이다. 절망만 가득하던 곳에서 작은 희망을 향해 떠나게 되었으니 어찌 평범하다 할 수 있으리오.
루시퍼가 발리에게 명해 날 마계 영역 밖까지 안내해 주라고 했다. 난 그런 친절까지 바라지 않았으므로 몇 번이나 거절하고 사양했으나 평소 나라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발리까지 흔쾌히 나서서 어쩔 수 없이 그의 뜻을 따라야 했다.
처음 이곳에 오던 날이 다시 떠올랐다.
이들에게 사로잡혀 당했던 온갖 수모와 고통까지도 너무도 생생하다. 수많은 죽음들. 그들의 비참했던 마지막 순간들은 아마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뒤로 몇 번이나 돌아다보았다. 그곳에 남겨 둔 추억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남겨 둔 소중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적루아를 저곳에 두고 나오는 심정은 그래서 착잡했다. 발리가 그런 날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건 마계의 궁전들이 깨알같이 작게 보일 때였다.
“그 동안 고생이 심했어.”
이놈이 갑자기 왜 이리 친한 척하는 걸까? 대답하지 않을 자유 정도는 마계에 있을 때부터 보장받고 있던 거라 난 익숙하게 권리를 행사했다.
“난 네놈이 그냥 싫다.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 게다가 인간인 주제에 물질 생성의 수준에 올랐다니…… 솔직히 네 놈을 보는 즉시 죽여 버리고 싶었어.”
특별한 놈. 그래 최소한 내 기억에서만은 네 놈은 아주 특별하게 남게 될 거야. 네가 ‘왈왈’ 짖던 것과 수하들을 고통 중에 조롱하던 걸 잊지 않으마. 그리고 그런 기회가 내게 허락된다면 배나 더한 고통을 선물 해 주마. 그동안 제발 만수무강해라.
“잘 가라. 메타트론님의 명이라니…… 널 산채로 내보내라니……. 이대로 보낸다만…… 내 기억으로는 죽이지만 말라고 했던 것 같아서 말이야.”
콰악
놈은 갑자기 달려들며 내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빠르게 내 전신을 훑었다. 순간 전신 몇 곳에 거의 한꺼번에 몰려드는 고통을 느꼈다. 놈의 손이 훑은 곳은 두 손목과 발목 쪽이었으며, 그곳에서 핏줄기가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힘줄을 끊어 놓았으니 앞으로는 움직이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난 속절없이 날려가 쩍쩍 가라져 먼지만 날리는 바닥에 처박혔다. 먼지가 풀썩 날려 내 몸을 덮었지만 나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놈! 이런 짓을…….“
난 느닷없는 기습에 방비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한 게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잘 가라. 선맥의 후예들이 있는 곳까지는 꽤나 멀 텐데. 그곳까지 가려면 고생 꽤나 하겠어. 하긴 먹을 게 없으니 곧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군. 운이 있다면 벌리고 있는 네 입으로 벌레라도 기어들지 모르지.”
발리는 자기 말대로 그 말만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동을 해서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목을 움직여 손목 쪽을 보았다.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손과 발을 사용하지 못하니 장백산까지 가는 건 불가능했다. 금응을 불러 용케 그곳까지 간다 해도 이 지경이 되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큰 소리로 악을 써댔다.
“이 빌어먹을 마계 놈들아. 이럴 거면 그냥 죽일 것이지, 풀어 주는 심보는 또 뭐냐!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다. 칵, 퉤.”
내 소리가 저 멀리 궁전까지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과 발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는 있다. 자연의 기운을 빌려 허공을 날아 금응의 등에 타오르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과연 마계 지척인 이곳에 금응을 불러내도 될지 걱정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금응이 살아 있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금응이 마수들에게 당했다면 장백산까지 가는 건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죽을지도 몰랐다.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일단 일어나 앉기로 작정했다. 주변의 기운을 모아 몸을 허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똑바로 떠오르던 몸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다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정말 꼴이 말이 아니군. 놈이 따라나선다고 할 때부터 짐작했어야 하는 건데.”
발리가 독단적으로 행한 일일 가능성이 컸다. 루시퍼가 이런 짓을 명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이리 치졸한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금응을 불러내야 하나? 후우, 어쩔 수 없군. 방법은 그것뿐이니.”
이 상태로 자연의 기운을 빌려 장백산까지 날아가기엔 신체에 무리가 많이 따랐다. 그리고 출혈 또한 문제였다. 금응을 타고 가면 내 힘으로 가는 것보다는 빠를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장백산으로 바로 갈 게 아니라 다시 마계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상처쯤 아무렇지도 않게 치료하곤 했다. 더군다나 루시퍼가 알게 되면 오히려 발리 그놈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일석이조로군. 설사 발리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황은 어쩔 수 없이 나를 치료해 줘야만 한다. 스스로 뱉은 말은 공식적으로는 지켜야 하니까. 그게 조직을 다스리는 자가 수하들에게 보여야 할 모습이기도 하고.”
나는 결국 그렇게 빠져 나오길 원했던 마계로 다시 들어서기로 결심하고. 자연의 기를 받아들여 몸을 허공중으로 재차 띄웠다.
“다시 돌아갈 필요 없다.”
“누구?”
“나다. 어둠의 천사.”
이 자가 어떻게? 그리고 왜?
“내가 치료해 주지.”
그가 내 앞에 나타난 것보다 그가 한 말이 나는 더 반가웠다. 세상에 이놈을 보고 반가워하게 될 일이 있을 줄이야.
“그렇게 해준다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럴 필요 없다.”
그는 손을 내밀지도 내 몸을 만지지도 않았다. 그저 손목과 발목을 잠시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이제 괜찮을 거다. 자, 떠나라. 가서 네 갈 길을 가고 할 일을 하라. 속히 행하라.”
병 주고 약 준다더니 딱 이짝이군. 그래, 네 말대로 내가 네게 빚을 진 건 아니다.
“이것 봐, 어둠의 천사.”
“말하라.”
“날 통해 무얼 얻으려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네 놈들의 의도를 아는 이상엔 말야.”
“상관없다.”
“그래, 나중에 보자고. 그럼 이만 헤어질 때가 된 것 같군.”
나는 그 자리를 신속히 벗어났다. 그리고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전속력으로 신형을 쏘아갔다.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음에도 난 그리 반가운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보이느니 허허벌판이요, 메마른 대지뿐이었다. 게다가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으니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이 넓은 땅덩어리에 나 홀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사무치는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청해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곧바로 금응을 호출했다. 내 염려와는 달리 금응은 건재했다.
이 녀석이 지금껏 어디서 무얼 먹으며 살아남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금응은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서인지 유난히 친근하게 대했다. 나는 금응의 등에 타올라 하늘로 힘껏 날아오르게 했다. 금응은 내 급한 마음을 알아챘는지 전속력으로 장백산을 향해 날았다.

8.파천, 선계로 가다

장백산에 도착해서 무량천으로 들어서자 장삼봉 진인이 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그에게 급한 마음에 마계가 곧 공격해 올 것이란 말부터 풀어 놓았다.
“여기를 알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겁니까? 이렇게 된 것 선맥의 후예들을 모두 선계로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안 돼.”
“왜 안 된다는 거죠?”
“이 중에 선계를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 된 수는 얼마 되지 않으니 그렇지.”
이런 참에 그런 걸 따지고 앉아 있으니, 이 노인네가 제 정신인가 싶었다. 나는 한참이나 더 그를 설득해 보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다. 하긴 어차피 마계는 이들 모두를 그냥 죽일 참인 것 같았다. 그들은 결국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쳐 어차피 선계로 들게 될 것이다. 물론 좀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내가 겪고 들은 일들을 거의 대부분 설명하고 나자 진인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보통 일은 아니구나.”
“빨리 선계로 떠납시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까…….“
그는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며 내 속을 바짝바짝 태웠다. 그리 보챌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여유를 부리다니. 전과는 상황이 정반대가 된 셈이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가야지, 선계로.”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어차피 가야 할 거면 하루빨리 떠나는 게 좋지 않은가? 시간은 기다려 주는 법이 없는데.
진인은 앞으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널 특정 지역까지 동행하는 게 전부야. 그곳에 가면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줄 인물이 있어. 그를 따르면 된다.”
“선계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선계는 선계지.”
그의 설명대로라면 나는 차원의 경계 지점으로 가는 셈이었다.
선계와 귀계와 천상계가 서로 겹쳐 있는 영역이라 했다. 이 중에 선계는 인간계와의 사이에 차원 벽이 없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통로 자체가 하나뿐이었고, 그곳을 또한 선계의 선인들이 지키고 섰으니, 인간이 그곳을 발견한다는 자체도 어렵거니와 설사 알고 있다 해도 함부로 넘나들 수 없었다.
진인은 매년 두 차례 정도 선계를 오갔는데, 그렇게 허락된 지도 기실 스무 해가 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을 때 임의로 드나들 능력은 진인도 갖고 있지 않았다. 선계 8선 중 하나였지만 아직은 인간이기에 제약이 많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나 마찬가지일 것이 아닌가? 선계를 가는 것만도 그러할진대 무한계를 거쳐 광명을 훔치러 가는 길을 어찌 갈 수 있단 말인가?
진인은 분명 무슨 대책인가가 마련되어 있다 했었다. 그렇지만 조금 신빙성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에게 불쑥 물었다.
“이제 마계가 다른 차원계를 공격하게 되면 굳이 인간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죽음을 통한 영계 진입이 아닌 이 상태로의 차원 이탈을 해야 할 필요성은 처음 마계가 유입되기 전이나 마계가 단지 인간계에 대해서만 지배를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상황은 달라졌다.
마계의 목표는 전 차원에 걸쳐 있기에 결국 다른 차원계는 인간계로 들어서지 않고서도 다시 말해 신의 묵계를 어기지 않고서도 그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내가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서 차원 모험을 강행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진인의 생각은 나와는 전혀 달랐다.
“네가 죽음을 맞게 되면 일단은 우리 의도대로 널 이끌 수가 없게 된다. 네가 어떤 차원계의 존재인지도 알 수 없고, 결국 일정한 시간의 흐름 뒤에야 널 찾아낼 수 있겠지. 그 후에도 여러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고. 더군다나 확실한 건 모르지만 네가 인간이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또 있다.”
그런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군. 또 다른 이유 하나는 뭘까?
“그건 뭐요?”
“영자들은 그곳까지 이르기도 전에 천사들에게 제지당하고 말지. 다시 말해 일정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어. 그렇지만 인간은 갈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그 능력만 갖춰진다면 가는 데까지는 문제가 없어.”
그런 이유가 있었군.
영계로의 여행을 위해 나는 진인에게 여러 가지 당부를 듣고 조심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습득하고 있어야 했다.
영계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육체가 지니는 기능은 정지되고, 프리즈마를 갖고 있지 않아 당하게 되는 곤란이 이만 저만 큰 게 아니라 했다.
“선계로 가면 그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입니까?”
“널 차원계들의 경계 지역으로 데려 가고, 그곳에서 너는 모종의 수련을 하게 된다. 또한 몇 가지 능력도 갖추게 되겠지. 그런 연후에야 무한계로 갈 수 있다.”
“그럼 선계로 곧장 들어가는 건 아닌가 보죠?”
“그렇지. 선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선계를 거쳐 가기는 하지만 중심 지역과는 거리가 있지.”
“이것 좀 실망인데요. 선계에 들어 핵심 인물들을 만나게 될 걸 은근히 기대했는데…….”
“널 될 수 있는 한 노출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최대한 은밀하게 D동할 것이다. 어둠의 천사들을 비롯한 여러 이해관계에 얽힌 자들의 눈길을 피해 가야 하니까. 완전히 따돌릴 수는 없겠지만 드러낼 이유는 없겠지.”
나는 앞으로의 여정에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 같은 예감을 때려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영계에 대한 적응력이 없기 때문에 발생할 곤란 또한 얼마나 클 것인가?
“광명에 이르기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오? 그걸 얻어내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지극히 인간적인 질문에 진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공간 개념으로 따지자면…… 글쎄 그건 누구도 모르겠지.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아느냐,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나 모른다. 라고 답해 줄 수밖에 없구나. 그 전체를 아는 건 아마도 신이 유일하겠지.
그렇지만 시간으로 따져 보자면 아마 인간계의 시간으로도 쉬지 않고 간다 해도 물론 네게 기본적인 능력이 갖춰진 뒤의 얘기지만 한 5백일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물론 이건 인간계의 시간 개념이다.“
5백일 간의 여행이라…….
아무 일도 없었을 때란 전제가 붙긴 했지만 일년이 넘는 2년 가까운 시간이다. 그 동안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서둘러야 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에 와서 광명이 필수 불가결한 것일 수는 없지만 있으면 좋은 정도의 가치는 있었다. 특히 무한계나 귀계를 제약할 수 있다는 점은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진인은 나를 한곳으로 데리고 갔다. 무량천의 서고였다. 한 쪽에서 책을 보는 선인들이 있었는데 진인을 보자 예를 올리더니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자리를 피해 준 것이다.
다들 진인을 무척이나 어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그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들에게 선계의 8선이라는 신분이 어느 정도로 인식되겠는가. 선인을 우러러 보고 존경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 이걸 봐라.”
그는 서가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낡고 오래된 양피지로 된 책자였다. 나는 그걸 들춰보다 진인을 급하게 바라보았다.
“네게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게 얼버무리는 진인에게는 날 염려하는 진심이 가득서려 있었고 그걸 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홀로 남겨두고 진인은 서고 밖으로 나간다. 그의 등에 서려 있는 건 인생의 무게였고, 오랜 세월 동안 이면의 진실을 보고자 노력해 왔던 한 인간의 고독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 간 잘에 나 또한 서 있다. 그러나 내게만 특별한 한 한번의 생에서 진실로 붙잡아야 할, 그래서 더욱 내 마음이 천착하는 것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명백하게 스스로를 이해시키지 못하니. 상황에 따라 부표처럼 흔들려 갈 수밖에 없고, 흔들리지 않을 신념이 없으니, 모든 게 즉각적이고 즉흥적이다.
반사적인 행동 의지들은 내게서 흘러 나왔다. 그건 진신도리 나와는 거리가 있었다. 내 속 사람은 언제나 다른 길을 갈망하고. 그 길에 오른 자들을 바라보길 원했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현실은 산산이 부서졌고 내가 서 있던 자리는 황폐화되었다.
근거마저 상실한 내가 바라볼 것은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고 있다. 정신과 몸은 여전히 이 편에 있지만 내 의지는 벌써 저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진인이 내게 쥐어진 책을 나는 빠르게 훑어갔다. 그건 무량천의 선인들이 오랜 세월의 무게로 기록해 놓은 지혜의 보고였다.
이곳 가득 채워진 책자들 대부분이 그런 것이겠으나 유독 이 책을 골라 나게 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마음을 다스리고 의지를 바로 해 흔들리지 않으며, 지식이 아닌 지혜에 끊임없이 다가서는 자세에 대한 기술들이었는데, 저자가 여러 사람이어선지 제각기 다른 입장들이었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건 분명 담겨 있었다. 딱히 이것이다, 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만으로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중간 부분에 이르러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이 바라보고 노력해 온 삶의 모습들은 같은 인간으로서 존경심이 일 정도로군.”
그랬다. 저자들이 간략하게나마 자신의 삶에 대해 기술해 놓은 부분들에서 나는 내 삶이 얼마나 쉽게 그려졌던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처절하고 치열했던 고민과 고뇌들은 세월과 함께 점차 무거워진 것이 아니라 가벼워졌으며 죽음이 임박함에 따라 하나로 이르게 된 것이다.
“아, 이제 보니 선계로 들기 전에 적혀진 것들인가 보구나.”
오랜 수련을 거친 선인들은 제 죽음의 시기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그들이 후인들을 위해 전 생애를 통해 깨닫고 알게 된 사실을 적어 놓은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글을 통해 내게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아.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겠구나.”
만약 예전 같았다면 내 마음을 이리도 쉽게 움직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근래에 겪었던 비참함과 슬픔, 분노와 비애 덕분에 나는 더욱 빠르게 그들의 얘기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 중에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다.

세상에 나고 죽음은 한결 같다. 어제 먼저 간 이나 오늘 살아가는 이나 죽음으로 서로 동일해진다. 육신을 통해 영을 기르고 영은 다시 육신을 바르게 한다. 모든 게 서로 통해 있으니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인간도 자연도 이 세계도 결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가만 보고 뒤로 물러서고 다시 만져 보고 느껴 보라. 이 세상에 저 홀로 있는 것이 있던가? 인간으로 왔음은 행운을 잡은 것, 지난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걸 채워 가야 하리라.
성장은 한 순간에 옺 않고 끊임없는 자기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씩 얻으려 하면 하나씩 잃고 하나씩 버려 가면 점차 가득해지리라.
바라보아야 할 것은 숭고한 세계이니 눈을 뜨지 않으면 천 년이 지나도 소용이 없으리. 외부로 향한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욕심에 가득한 마음을 사랑과 자비로 바꿔라. 가득 채운 자는 또다시 그것마저 버려야 할지니 무엇이든 공한 마음에 오고가게 하라.
편협한 시선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에 그대가 세상이 되고 자연이 되고 우주가 되고 신이 될 것이니 그때에야 참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으리.

그런가 하면 조금 특이한 대목도 있었다.

산에 들지 말고 들에 나서지 말고 강을 바라보지 말고 바다로 나가지 말라. 그저 한곳에 머물며 네 마음만을 살펴라. 마음자리에 무엇이 있는가를 들여다보라. 그곳에 모든 것이 담겨 있으니 세월만이 답을 주리라.

또 한 선인은 전혀 상반된 의견을 개진하고 있었다.

모든 게 부질없음을 알았다. 전진함이 무엇이고 깨달음이 무엇이던가? 정을 버리고 욕심을 버렸으나 날 버리지 못했으니 무슨 소용이던가?
깨달음은 마음 하나만으로 얻지 못하고 정진은 산에서 이루지 못한다. 세상으로 나가라. 부딪히고 뒤섞여 그들 가운데 숨죽이고 있는 바름을 보라. 미워하고 사랑하고 애쓰고 뒤처지는 그들 가운데서 너도 하나가 되라.
구분 짓지 말고 삶에 충실 하라. 너와 그들은 다르지 않으며 하나이니 죽음이 오기까지 사랑함에 힘써라. 네 몸과 마음을 내어 주면 그들도 널 채울 것이니 인간세가 이와 같아야 한다.
인간으로 옴이 이런 목적임을 깨달았으니 지금껏 내가 한 모든 일이 부질없는 일이었더라. 모든 건 죽음 너머에 있으니 서로 해치지 말고 손을 맞잡아라. 그 순간 행복은 불현듯 찾아 올 것이요, 허망한 집착은 사라지고 이 세상이 광명세가 될지라.

나는 서고 바닥에 앉아 서책의 내용에 잠겨들었다. 그렇지만 결국 넘어설 수 없는 한계는 분명했다. 내게는 그들이 지녔던 세월의 깊이도, 그들이 느끼고 체험했던 깨달음의 순간도 없다. 그러니 어찌 그걸 완전히 내 것으로 공감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장에 다다른 난 전율을 느끼고 말았다. 그곳에 천부경의 내용들이 소상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해석서였는데 전에 내가 하다 만 연구의 내용과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어 더 놀라웠다.
서고 밖으로 나오니 장삼봉 진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때가 되었다. 가자.”
이제야 날 데려 갈 때가 된 것인지 오히려 나보다 상기된 얼굴로 서두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난 앞으로의 과정 가운데 아는 것이 전무했으므로 그가 시키는 대로, 앞서는 대로 묵묵히 따랐다.
그와 난 무량천의 밑바닥 쪽으로 내려갔다. 순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위가 아닌 아래로 내려오다니. 또 뭔가 내가 보거나 알아야 할 일이 있나 싶었지만 특별히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차원의 출입구는 호수 밑바닥에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말이었다. 하늘로 오르는 건 줄 막연히 기대하고 있던 나로서는 뜻밖의 말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호수 밑바닥에 있으면 그냥 호수로 뛰어들면 될 것을 굳이 호수 위에 떠있는 무량천 건물을 통해서만 내려가야 되나 싶기도 했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수중 동굴의 입구를 틀어막아 이 건물과 연결시켜 놓았다.”
한참을 아래로 내려가니 그의 말대로 습기 가득한 축축한 동국 벽이 나왔다. 잠시 수직으로 내려가던 경사도가 다시 옆으로 이어진다. 동굴 벽엔 물기가 그대로 배어 있었고 아마도 선인들이 붙이거나 조각해 놓은 듯한 각종 문양들이 가득했다.
처음에 매끄럽던 벽면은 한참이 자나자 천연 모습 그대로의 울퉁불퉁한 것으로 변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장소는 겨우 다섯 평 남짓 될까 싶은 원형의 석실이었다. 전면에 두꺼워 보이는 철문이 하나 있었는데 오랫동안 열지 않은 듯 구석자리에 녹이 슬어 있었다.
“설마 이 안으로 들어간다는 겁니까?”
“그래.”
“선계가…….”
나는 하도 어이없어 잠시 하려던 말을 중단했다. 생각해 보니 더 어처구니없었다.
“선계가 지하에 있습니까?”
진인은 날 물끄러미 쳐다보다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누가 그리 말하더냐, 지하에 있다고?”
“지금 여기가 지하잖소?”
“흐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자 들어와라.”
그는 문을 천천히 밀었다. 그러자 문이 홱 돌아가며 한쪽으로 비껴 선다. 회전하는 문이라니. 내 예상은 또 어긋나 버렸군. 여닫이거나 미닫이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말야. 저 구석이 녹슨 건 워낙에 닦아 주지 않아서였군.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계속 복잡해지고 더욱 혼란스러워졌으며, 머리가 지끈지끈 쥐가 날 지경이었다. 또 석실이라니.
장방형의 석실 중앙에 문과는 대조적으로, 반들거리는 윤기가 가득한 돌이 바닥에 일장 정도의 넓이를 차지하고 깔려 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의 빛깔이었는데 군데군데 푸르스름한 색도 섞여 있었다.
진인은 그 위에 척 하니 서는 것이었다.
“뭐하냐? 이리 올라오지 않고?”
그러더니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했다.
“대체 뭐 하는 거요?”
나는 하도 기가 차서 그렇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자 함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올라와 보면 안다.”
발을 디뎌 조심스럽게 돌 위로 올랐다.l 혹시 밑으로 쑥 꺼지거나 하늘로 올라가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지금의 상황이 나는 조금 우습다고 여겨졌다. 진인이 그제야 어찌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원래 이곳에서선계로 가지는 못한다. 선계에서 선인들이 이곳으로 올 수는 있어도 말이지. 그러니까 이곳은…….”
선계로 가기 위해서는 공간 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스스로 지니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몇 번인가 선계로 들어갔다 나온 것도 그곳에서 불러들여 준 것이라 했다.
이곳은 선인들이 예전부터 인간계에 드나들던 장소였다. 무량천이 이곳에 세워져 있는 게 괜한 이유는 아니었다.
“이곳에 서 있으면 그들이 알고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그리고 만나야 할 자를 만나겠지.”
어찌 된 연유인지를 알게 되었지만 내 속에서는 더 많은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 진인이 그러고 있듯 나 또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꽤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조바심이 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답답하기까지 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마냥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 설마 아니겠죠?”
“기다려야지. 달리 방법이 없으니.”
선맥과 선계는 단지 영적인 교감만 오갔을 따름이라 말했다. 다시 말해 이곳의 뜻을 전할 수는 있다는 말이었다. 결국 우리 둘이 지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들 또한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내 지금 심정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 간다는 이유로 인해 낯선 감정으로 몰입되어 갔다. 조금의 기대감과 설레임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공간 이동할 때의 기분은 어떻죠?”
“해보면 알 것 아니냐?”
“우리가 가는 곳이 구체적으로 어딥니까? 선계의 중심 지역이 아니라니, 8선 중의 다른 분들이나 태상노군도 만나지 못하겠군요.”
“그야, 그렇지. 우리가 가는 곳은 선계의 영역이긴 하지만 다른 차원계와 맞닿아 있어 갖가지 영자들을 다 만나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땅으로 치자면 각종 교역의 중심지인 중원 변방의 도시쯤 되겠구나. 그곳에선 다양한 영자들을 만나볼 수 있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지. 각 차원계의 비밀스런 일들에 대한 정보들도 사실은 그런 곳들을 통해 퍼져 나가는 거란다.
영계 역시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인간계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단지 죽음의 비밀을 본 이후라는 점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좀더 확고한 신념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
그들 역시 아직 불완전함에 머무르고 있기에 욕망은 여전하고, 이해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고급영자들이 아닐 경우엔 인간들보다 더 추악한 자들도 보이지.”
“그럴 수가 있는 겁니까?”
“그래, 너도 겪어 보면 알 거다.”
“왜 그런 거죠?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정진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가 뭐죠? 완전으로 가는 여정을 포기한 것도 아닐 테고.”
“비슷한 이유지. 그들 중 일부는 오랜 기간 동안의 정체로 인해 지쳐 포기하거나 순수한 열정을 잃고 방황하거나, 그도 아니며 이겨낼 수 없는 권태로 인해 오히려 마계로 들거나 윤회를 거부하고 신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으니 말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죽음을 겪게 되고 영계에서 영자로 살아가게 되면 어떤 입장을 지니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아는 바대로 행하지는 않는 법이다. 기약조차 없는 기나긴 기다림. 누구나 할 것 없이 지치게 했을 것이고, 거기서 권태를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영격과 물리적인 전투력의 고강함이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니라고 했었다. 영격이 높은 자들 중에서도 열등하게 전투력이 낮은 영자도 나올 수 있다. 그건 중점하지 않았고 수련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마치 소림사에 무승만 있는 건 아닌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치이다.
“지금 우리가 가는 구역을 선계와 천상계에서는 ‘뜰’ 이라 부르고, 다른 차원계에서는 ‘매소’ 라고 부른다. 선계는 뜰이 하나뿐이지만, 무한계는 수백 개가 넘지.
무한계 매소의 의미는 모여 사는 곳을 모두 통칭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뜰을 주변부를 이르는 말이다“
무한계는 매소가 많을 수밖에 없겠어. 그들은 종족별로 나뉘거나 뒤섞여 살며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선계나 천상계는 일정 구역 안에 모여 산다.
그리고 천상계나 선계의 영자들의 수는 다른 차원계에 비해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자연히 모여 사는 것이 당연하지만, 무한계의 경우엔 워낙에 구역이 넓고 방대하며, 그 수가 월등하게 많다. 그런 이유로 각양각색의 성향적인 분호를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뜰엔 다양한 영자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대부분이 일반 영자들이지만 그 중에 고급영자들이 뒤섞여 있다. 너에게도 미리 말해 두는데 그곳에 가면 얌전히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괜히 멋모르고 나섰다가는 봉변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진인의 경고를 들으며 나는 설마 하는 심정이 되기도 했다. 무슨 무림에 처음 출도하는 신출내기 다루듯 하는군. 하긴 영계에 대한 적응을 마치기 전까지는 조심하는 게 여러모로 낫겠지.
그리고 난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영계로 가는 것이다. 다른데 눈을 팔 여유는 없다. 그런 고로 나는 숨죽이고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영계에 인간의 몸을 지니고 들어서도 아무 문제가 없을까?
“진인.”
내 심각한 얼굴을 보았음인지 진인 역시나 신중한 모습을 한다.
“왜 그러느냐?”
“이것 괜찮은 거요?”
몸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더니,
“뭐가?”
알아듣지 못하는군.
“인간이 영계로 들어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냐는…… 그런 질문이었소.”
“이상은 없지만 불편하기는 하지. 그리고 뜰에 나서는 건 원래 지극히 조심시키는 부분이야. 생령이 들어서면 그들은 금방 알아보거든. 결국 소동이 벌어지거나 곤란한 일을 겪게 되겠지. 하여간 번거로운 일이 생길 거야.”
“대책은 물론…… 있겠지요?”
표정으로 봐서는 미심쩍은데?
“나도 모르지만, 뭐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널 데려 가겠어? 아마도 뜰엔 무언가 준비해 놨겠지.”
우우우웅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급작스런 진동은 바닥에서부터였다. 진인을 보니 그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죠?”
진인의 변함없는 태도를 보니 눈이 휘둥그레진 내가 머쓱해질 지경이었다. 괜히 혼자 부산떨고 있는 것 같아 민망했다.
“그들이 곧 올 거다.”
그들이라면 선계의 선인들을 이르는 건가? 잠시 뒤 검은 빛깔을 돌이 달아오르는 것처럼 붉게 변하더니 두 명의 사람, 아니 선인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미 마계 마신들이 펼치던 공간 이동을 몇 번인가 경험해 본 바가 있었지만 신기한 건 여전했다. 공간을 무시하는 그들의 능력이 놀랍기만 했다. 더군다나 다른 이차원에까지 공간 이동이 된다는 새로운 사실에 나는 주목했다. 최초로 만나는 선계 인물들이라 내 관심이 쏠리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두 분을 모시러 왔습니다.”
모시러? 흐음, 처음부터 역시 마계 인물들과는 뭔가 다르군. 애써 그렇게 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모습엔 분명 마계 마신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하얗게 발광되는 옷은 우리가 흔히 입는 장포의 형태였는데, 그 어디에도 천이 이어짐이 없이 매끄럽고 깨끗했다. 원통으로 짜여진 옷이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그건 실로 꿰매 만든 옷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두 사람 모두 머리는 검은색이었고 길게 자라 있었다. 그리고 머리끝엔 대나무를 잘라 다듬은 듯한 가느다랗고 동그란 형태의 것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수고들 했네. 뜰로 가는 것이겠지?”
진인의 물음에 선인 중 하나가 공손하게, 지극한 예를 갖추어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곧바로 가시면 됩니다.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뜰의 외곽 지역인 선도관에 파천님을 위한 준비도 갖추어 놓았습니다.”
말하는 이는 이제 스무 살이나 됨직한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은은하고 밝은 미소가 얼굴 가득 피어나 있어 역시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선인 중 하나가 말했다.
“손을 내미세요.”
손을 갑자기 왜 내밀라고 하는 걸까? 나는 시키는 대로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진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한 손을 다른 선인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의 손을 두 선인이 살짝 쥔다.
“이제 눈을 감으시고 잠시만 견디시면 뜰로 이동합니다.”
눈만 감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렷다. 허, 이것 이리 간단하다니…….
선인이 내민 손에서 따뜻한 느낌이 전달되었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새로운 변화에 주목했다. 귀가 멍멍해지고 전신이 구름 위로 붕 뜬 느낌. 거기다 전신이 가볍다는 것과는 또 다른, 마치 전신이 잘게 부서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때 선이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울려 나왔다.
“손에서 전해지는 느낌에 집중하십시오.”
난 그의 말대로 내게로 주입되는 따뜻한 기운에 집중해 갔다.
잠시 뒤,
“자,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살며시 눈을 떴다.
“여기는?”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선인이 말했다.
“뜰의 입구입니다.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 고맙소.”
주변을 훑어보았다. 뜰의 입구라 했던가? 그럼 여기가 선계와 무한계와 천상계, 귀계가 걸쳐 있다는 뜰의 한 곳이란 말인데…….
“따라 오시죠.”
나와 진인은 두 선인이 이끄는 대로 묵묵히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 걸까?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따라 오라고만 하더니 입을 다물어 버리는군. 그나저나 왜 아무도 없는 걸까? 선인들이 이들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지금 어디로 가는 겐가?”
진인의 물음이 있고 나서야 그들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두 분을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지?”
“가 보시면 압니다.”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실내였는데 가다보니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마치 회랑처럼 생긴 곳을 우리들은 걷고 있었다. 정원에는 이름 모를 신비 괴초들이 잔뜩 자라나 있고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피었다. 그 사이로 난 길에 우리 일행은 들어섰다.
잠시 가니 온 천지가 꽃으로 둘러싸인 능선이 보이고, 그곳에 작은 석옥이 아담하게 자리 잡았다. 그 앞에 공터가 보이는데 몇 명인가가 서성이며 우리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착해 보니 우리를 기다린 듯한 인물들은 세 명이었다. 노인 하나와 이제 열 살이나 되어 보일까 싶은 동자와 동녀였다.
“어서오세요, 두 분.”
노인이 선한 웃음을 보이며 우리를 환대하자 진인이 반색하고 나섰다.‘
“아니 이거 태선이 아니시오? 직접 오셨군요.”
“허허,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아이들한테만 맡겨 두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내 직접 왔습니다.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시지요.”
작은 석옥.
그저 흔하게 볼 수 있는 돌로 지은 초라한 집이었다. 마계의 궁전을 보아서인지 내 눈엔 상대적으로 너무도 초라하게 보였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둥그런 원형의 형태로 내실이 꾸며져 있었다. 집기라고는 앉을 수 있는 의자만이 몇 개 놓여 있을 뿐 다른 건 일체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가리키는 곳에 앉긴 했는데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중원의 산중 어느 한 곳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이 곳이 선계라고 믿어지는 구석이 없었다. 진인과 노인은 서로 환담을 주고받으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이제 곧 이곳으로 오셔야 할 때가 된 듯한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인간세에 돌아가면 곧 다시 선계로 들 것 같습니다.”
“이제야 8선의 빈자리가 모두 채워질 것 같군요.”
“비워 두나 채우나 별 상관은 없을 듯싶군요, 허허허.”
“허허허허, 괜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선인들이 얼마나 충선을 손꼽아 기다렸는지 아신다면 그리 말씀하시지는 못할 겁니다.”
충선이 진인을 두고 하는 말인가? 말하는 걸로 보아 하니 저 노인네도 8선 중 하나인 것 같고.
솔직히 좀 실망이 되는구나. 으리으리한 궁전은 아니더라도 뭔가 신비함 정도는 풍길 줄 알았더니 허허벌판에 작은 석옥 하나가 전부인가?
“흐음, 이 아이가 파천이라는 아이군요?”
아이라니…… 나 , 참.
“그렇소. 이 아이가 바로 파천이지요.”
“왜, 실망이 되느냐? 하긴 초라하게 보일 법도 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
“이곳은 본계와 인간계의 출입구와 같은 곳, 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곳곳에 상당한 수의 선인들이 숨어 있단다.”
그랬던가?
“오늘 내가 직접 널 마중 나온 건 네게 긴히 부탁할 것이 있어서다.”
“말씀하시지요.”
“뜰에 들면 어떤 경우에도 소란을 일으키지 말아다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도 너는 잠자코 있어라. 할 수 있겠느냐?”
“왜 그러십니까? 뜰에 무슨 일이라도…….”
진인의 물음이었다. 그러자 태선이라 불린 노인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지금 뜰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각계 영자들이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난 상황이고 이름난 전사들도 상당 수 들어 온 것으로 보고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큰 소동이 벌어질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태선께서는 무슨 연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이 아이 때문이겠지요. 인간계의 현 사정은 비교적 상세히 영계에 전해졌고, 마계의 의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분분한 의견들이 많은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각 차원계의 관심이 이곳으로 집중되었고 영자들이 뜰에 모여들게 된 건 당연한 거겠지요.”
“장차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태상을 만나 뵙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시간이 여유롭지 않아 생략했지만 언젠가는 만나 봐야겠지요. 그나저나 충선께서는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저는 이만 돌아가야지요. 가서 할 일도 있으니……. 곧 만나게 될 겁니다. 이 아이나 잘 부탁드립니다.”
“이를 말씀이십니까. 염려 마시고 잘 다녀오십시오.”
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가 한꺼번에 일어섰다. 처음 우리 두 사람을 데리고 왔던 두 선인이 진인을 마중했으며, 나는 태선이란 노인네에게 붙잡혀 다시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이제부터 널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유와 전체적인 상황들을 설명하겠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 보거라.”
“그렇게 하죠.”
“이미 어느 정도는 들어 알고 있겠지?”
“대충은 들었습니다.”
“네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광명’을 가져오는 일이다. 광명이 필요한 이유는 들어 알 테지만 다시 한 번 말하마. 그게 있어야만 다른 차원계를 움직일 수 있다. 더군다나 지금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서 마계를 제외한 다른 차원계가 하나로 연합하기가 쉽지 않구나.
만약 광명만 있다면 마계와의 전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완전하게 뿌리 뽑지는 못하겠지만 야욕을 막을 수는 있을 거다.
광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영자는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메타트론이라면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루시퍼도 잘은 모를 거다. 그것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떤 쓸모가 있는지도 짐작만 갈 뿐이다. 그게 검의 형상일 거라는 것 역시나 전해진 얘기지 확인 한 자는 없다.“
“그렇다면 광명을 가져 와 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지. 광명은 신의 현신을 의미하는 것, 광명이 출현하다면 신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
“광명을 본 사람이 없다면 내가 가져 와 본들 어찌 알겠습니까?”
“광명을 실제로 본 이는 없지만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것이 광명인지 아닌지……. 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할 거야. 영자들이라면 그 건 당연한 거다.”
“영자가 아닌 산 자인 내가 이 일에 적임자로 선택된 건 무슨 이유인지요?”
“거기엔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가 있지. 영자들은 천궁의 여래장 근처까지 갈 수 없다. 그 전에 모두 제지당한다. 천궁천사들이 광명이 있는 여래장 앞을 지키고 있으니 아무도 갈 수 없는 거지.
그렇지만 너는 다르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기대할 수 있어.“
“왜죠?”
“그런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명에 얽힌 비밀은 영자들 사이에서도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지 전부 얘기하자면 길고…… 간략하게 설명하마.
광명세에 든 완전자들은 반드시 현생에서 모든 걸 완성한다. 그들은 생령인 상태로 영계를 지나쳐 광명세로 들어간다. 광명은 광명세에 들기 위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곳에 있고, 그들 모두는 광명을 가지거나 최소한 광명을 겪었겠지.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광명이 있는 여래장에 이르는 길은 생령들에게는 허용되어 있다는 사실.
그렇지만 생령이라고 해서 누구나 그곳까지 다다를 수는 없다. 간혹 생령인 상태로 영계로 들어서는 이가 있지만 대부분이 무한계에서 여정을 마치거나 여래장까지 다다르지 못하고 좌절했다,
지금껏 완전자들을 제외하고 생령인 상태로 여래장까지 이른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만……. 어쨌든 너는 생령이기 때문에 여래장까지는 갈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 하나는 그곳까지 이르기 전에 널 해치는 자가 있을 거라는 것. 두 번째는 그곳에 이르러 네 힘만으로 광명을 얻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중점이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일이군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여래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한계를 종으로 지나쳐야 한다. 무수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터.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곳에서의 나는 약자. 영계에 적응조차 하지 못한 내가 날 해치려고 마음먹고 기다리는 적들을 무슨 수로 당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몇 가지 조치를 취할 생각이다. 먼저는 네게 최소한의 힘을 부여해 줄 참이다. 네 노력 여하에 따라 얻는 힘은 다를 거야.
두 번째는 널 보호하고 그곳까지 인도하는 조력자를 붙여 주마. 이번 네 여정에는 각 차원계들의 복잡한 의도가 뒤섞여 있기에 누가 동지고 적인지는 드러나지 않는 한 최후까지 알 수 없다. 때로 생각지도 못한 조력자가 생길지도 모르고, 이와는 반대의 상황을 당하기도 할 거다.
무한계를 지나쳐 여래장에 이르게 되면 그 다음부터의 여정은 너 홀로 해결해야 한다. 아무도 널 도와 줄 수 없고 실제로 도움도 되지 않겠지.“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뭔가?”
“굳이 무한계를 거쳐서 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무슨 말이지?”
“인간계에서 이곳으로 이동을 해왔듯이 광명이 있다는 곳까지 이동시키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으음…….”
태선은 내 질문에 처음으로 망설임을 보였다. 말하기 곤란한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당사자인 내게조차 숨겨야 하는 일이라도?
“사실대로 말하마. 이번 네 여정에 우리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물론 우선적으로 광명을 얻는 것이 먼저고, 두 번째는 네 여정을 통해 내부의 적들이 가려내고자 함이다.”
내부의 적을 가려내다니? 무슨 의미인지 언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
“광명을 얻는 것에도 일정한 자격이 있을 건 당연한 이지. 네가 그 곳에 이른다 해서 무조건 그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네가 여정을 통해 많은 걸 얻고 배우길 기대하고 있어.
광명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만한 자격을 갖춰야만 가능할 거라고 볼 때 지금의 너로서는 가보았자 소용이 없지. 네가 외우고 있는 천부경의 내용은 그 열쇠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해.
또 하나는 각 차원계의 정리된 입장을 알아보기 위함이야. 오랫동안 마계는 각 차원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쳐왔고, 그들의 그런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번 전쟁에 그 모든 게 드러나겠지.
그렇지만 그리 마음 편하게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게 우리 입장이기도 해. 결전이 있기 전까지 내부에 도사리고 있을 마계의 동조자들을 솎아내지 않으며 참으로 힘든 싸움이 되겠지.
네 여정에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을 보일 거야. 그리고 장차 광명을 얻는다 해도 무한계야말로 최대의 변수가 될 테니 그들을 미리 겪어 보고 파악하는 것 역시 네가 지닌 사명 중 하나다.
네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아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나 너와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니 사명감을 가지고 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나와도 무관하지 않다, 라는 말에 나는 공감하고 있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인간계인 셈이고, 개인적인 소원 역시나 마계에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입히고 싶은 것.
나로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어떤 요구라도 지금으로서는 다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야 아무래도 좋습니다. 대신 성공 확률을 어떻게든 최대화시켜 괜히 헛수고 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군요. 마계 마신들을 제 손으로 처단할 때까지는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해도 마다할 처지가 아닙니다. 지금부터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허허허…….”
태선은 길게 자란수염을 한 손으로 훑어 내리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마음가짐이 이처럼 굳으니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 뜻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모두 이뤄지는 법이니까.”
그래, 태선의 말대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결국은 이뤄질 거야. 내 손으로 모두 이루지 못한다 해도 마계의 행보에 장애가 될 수만 있다면.
“당분간 너는 이 두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 모든 건 아이들에게 묻고 배워라. 어느 정도 준비가 잦춰지면 내가 다시 찾아오도록 하마. 시간을 다투는 상황이니 나는 이만 가보겠다. 혹시라도 이곳이 답답하게 여겨지면 뜰의 중심부로 나가 보는 것도 좋겠지. 자, 그럼 고생하거라.”
그가 일어서는 걸 보고 나 또한 함께 일어섰다. 그런데 이꼬맹이들한테 모든 걸 듣고 배우라고?
“저…….”
“왜 그러지? 무슨 궁금한 점이라도 있느냐?”
“저……들에게 배우라고 하셨습니까?”
“분명 그렇게 말했지. 왜?”
허 참, 아무리 선계의 8선 중 한 분의 지시라고는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하는군.
“알……겠습니다.”
그는 물끄러미 날 쳐다보다 한참을 웃은 뒤에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네가 걱정하는 게 무언지는 안다만 그건 괜한 기우야. 지금부터 너는 인간세에서 지녔던 관점들을 일단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더 많이 비울수록 더 많이 얻는 법. 이 아이들은 많은 걸 채우게 도와 줄 것이고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
일의 중요성을 잘 아는 내가 네게 괜한 헛수고를 시키기야 하겠느냐? 내가 널 가르치는 것보다 오히려 나을 테니 너는 괜한 심력을 낭비할 필요없다.“
노인네가 이제 보니 내 속을 훤히 꿰뚫고 있군. 저렇게까지 말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고.
“그럼 나는 이만 가마. 시간을 너무 지체한 것 같아. 너울이와 각시는 듣거라.”
“네.”
두 아이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인다.
“너희의 사명을 잘 알고 있으렷다.”
“물론입니다.”
꼬맹이 중 남자애가 당차게 대답했다. 짙은 갈색의 꽉 조이는 옷을 걸친 십여 세 소동은 조막막한 제 주먹을 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기가 차는군. 이제 내가 저 어린 꼬마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단 말인가? 이 때 옆에 있던 여자애가 날 힐끔 쳐다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한 점의 때도 묻지 않은 너무도 천진한 웃음이었다. 작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깨끗한 피부가 유난히 청초하다 느껴졌다.
“그럼 쉼 없이 바로 시작하도록 하거라. 너희들을 믿고 난 이만 가겠다.”
“살펴 가십시오.”
두 아이가 동시에 태선에게 허리를 굽히는 순간 노인네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석옥에 남은 건 나와 두 꼬맹이 밖에 없었다. 나는 두 아이를 보며 아뜩한 심정이 되어갔다.
“날 따라와.”
너울이라 불린 남자애가 다짜고짜 하대를 해왔다. 기선 제압인가?
“어디로 가는지는 가르쳐 주고 따라 오라 해야 할 것 아니냐?”
각시라는 여자애가 살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냥 따라 오시면 다 알게 되요.”
“그럴까……그럼?”
“이름이 파천이라고 했지? 너는 앞으로 우리 두 사람에게 공대를 하도록 해. 마음에 별로 들지 않지만 내 신경 써 가르쳐 볼 테니.”
하, 요 새파란 꼬맹이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군.
“으음, 그런데 너 몇 살이냐, 지금?”
각시가 대신 답했다.
“나이를 묻는 건가요?”
“그래.”
“저희도 잘 몰라요. 그리고 여기선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나이로 따지자면 모두가 같죠. 처음 생겨난 시기로만 따진다면 말이죠.”
“왜 그렇게 어린 모습들이냐?”
“저희들 모습은 원래가 이랬고 앞으로도 이렇겠죠. 영체가 소멸되고 새롭게 생겨날 때 지닌 생각대로 되는 거니까…… 그냥 이래요.”
“그래?”
새로운 사실이었다. 그럼 8선 중 하나라는 태선도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저런 모습을 원해서. 참 독특한 취향이군.
“아까 태선님께서 하신 말씀 벌써 잊으셨어요? 인간세에서 지녔던 생각들을 모두 버리라고.”
허, 이것 참 난감하군.
“그럼 현재 너희들의 영체…… 나이는 어떻게 되냐?”
“저는 인간계의 시간으로 따지면 한…… 7백년이 조금 넘었구요, 너울이는 거의 8백 년이 되어 가요.”
윽, 할 말이 없구나.
“파천.”
“왜?”
“조금 전 내가 너보고 뭐라 그랬지?”
햐, 요놈은 만만찮은데. 까짓 그게 뭐 어렵더냐. 소원이라면 해주마.
“공대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게 지금부터 네가 갖춰야 할 자세야. 기본자세부터 흐트러져 있다면 너는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하나라도 더 많은 걸 얻고 배우려면 겸손을 기본이고 신뢰 또한 변함없어야지. 자 따라 와라.”
조막손을 까닥거리며 내게 따라 오라는 시늉을 하고서는 문을 열고 나섰다. 여전히 내 손을 쥐고 있던 각시가 살짝 끌어당겼다. 밖으로 나오니 너울이는 벌써 전만치 혼자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뒤를 십여 장의 간격을 두고 나와 각시가 함께 걸었다.
“저에겐 그냥 편한 대로 하세요.”
요 녀석은 다르네. 환아의 나이 정도나 되어 보이는데 7백 년을 넘게 살았다는 건가? 아니지, 그것도 현채 영체를 입은 지가 그렇다는 말이고……. 하긴 결과적으로 나와 이 녀석이 마찬가지겠지. 나 또한 인가의 육체를 벗ㅇ면 이 녀석들과 다름이 없을 테니.
“그러지.”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요.”
“뭔데?”
“인간세가 정말 멸망했나요? 인간세를 마계가 초토화시켰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래, 사실이다.”
“아…….”
각시의 얼굴에 절망이 가득했다. 그걸 대하니 나 또한 숙연해졌다. 착잡하군.
“이제…… 기대는 버려야겠군요.”
“아직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지. 마계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설마하니 전 차원의 힘이 연합해도 못 이기겠니?”
“아니, 그게 아니구요. 저는…….”
나는 각시의 큰 눈을 바라보았다.
“저는 아직 한 번도 현생을 경험해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제나저제나 기회가 올까 기다렸는데……. 이젠 모든 게 틀려 버렸군요.”
아, 그런 뜻이었던가? 단 한 번도 현생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니 역시 이런 영자들이 꽤나 된다는 말이던가? 전에 ‘그’가 내게 말한 게 사실이었구나.
‘현생에 태어나기가 쉽지 않지. 그걸 바라는 영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이 한 가지만으로도 사실은 엄청난 복이란다. 만약 그걸 누구나 다 안다면 세상은 너무도 살기 좋은 곳이 될 거다.’
……라고 했었지.
“인간세에 태어남이 멈췄다는 건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던 대 이변이죠. 윤회의 단절을 의미하니. 당분간 영자들은 영계에서 새롭게 영체를 입는 것만이 전부겠죠. 제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군요, 한번쯤 현생을 경험하고 싶었는데…….”
가만 듣고만 있었더니 각시가 울먹이며 그 말을 흘려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게 그렇게도 슬픈 일인가 싶어 공감할 수 없었다.
“뭘 하는 거야. 시간이 많은 줄 알아? 빨리 안 따라 오고 뭐하는 거야?”
너울이가 저 멀리 능선에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각시는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는지 내 손을 잡고 훌쩍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너울이의 옆에 다다르자 각시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너울이의 귀여운 얼굴이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리 태평들이냐?”
“알았어, 잘못했어. 그러니 그만해.”
각시가 두 손을 저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너울이는 또 뭐라고 입을 열려다 귀찮은지 관둔다.
“자, 저길 봐라.”
너울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리던 나는 입을 한껏 벌리고 말았다.
“오…….”
능선 아래로 보이는 건 거대한 대시진이었다.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터에 가득 담긴 건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탑들이었고, 그 사이사이로 대로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영계의 가장 큰 뜰 중의 하나지. 선계의 영역에 가까운 지역이라 다른 곳보다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곳이다. 그렇지만 마음을 놓는 건 곤란해, 네 주위엔 항시 나와 각시가 있고 다른 선인들이 보호하고 있다지만 강자는 도처에 깔려 있으니 말야.
그러니 이제부터는 기장해야 할 거야. 우리가 갈 곳은 저기…… 저기 가장자리에 높게 치솟은 탑 보이지?“
“네, 보입니다.”
깍듯한 존대에 너울이는 잠시 날 새삼스런 시선으로 돌아보더니 제 할 말을 마저 이어 갔다.
“저곳이 우리가 잠시간 머루를 곳이다. 제17호 선도관이다. 저 일대는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안전 지역이지만 중심으로 접어들면 우리도 안심할 수 없어. 그러니 우리 허락 없이 함부로 돌아다닐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꼬맹이가 걱정도 팔자군. 내 등을 떠밀어 봐라. 그런 짓을 할 것 같은가?
“그러죠.”
“좋아. 자, 내손을 잡아.”
너울이와 각시는 양쪽에서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따뜻한 기운이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자, 간다.”
쉬이이익
우리들은 하늘 높이 치솟아 17호 선도관이란 곳을 향해 날았다. 능선 위에서 볼 때보다 오히려 그 규모가 더 큰 듯싶었다. 그다지 멀지 않다 여겼는데 그렇지 않았다.
“여, 이게 누구신가?”
빠르게 날아가던 너울이와 각시가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우리 앞쪽에 두 존재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 처음부터 적의 출현인가?
“선계의 말썽장이, 너울 선인이 아니신가? 그래,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시나?”
“너는…….”
“오랜만이지? 라곤의 성읍에서 보고 아마 처음일걸.”
“비켜라. 지금은 너와 놀아 줄 시간이 없다.”
우리 앞을 막아선 두 명, 아니 두 마리 괴물은 꽤나 이상하게 생겨먹어 날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저건 뭐람?
“이것 왜 이러실까. 그때 우리는 분명 같은 동지였던 것 같은데 말야. 술 한 잔 권해도 모자랄 판에 이리 냉대하시다니. 그러고 보니 각시 선인께서도 계셨군.”
“비키라고 하지 않았느냐!”
놈들의 생김새는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어딜 어떻게 얻어맞았는지 온통 멍투성인데다 피부가 쭈글쭈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눈은 새빨갛고 귀가 턱밑에까지 축 처져있다. 손끝엔 독수리의 것처럼 크고 강해 보이는 손톱이 달려 있었으며 몸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손에 든 일장에 달하는 건 자루가 긴 도끼였다. 이놈도 영자인가 싶어 의아했다. 혹시 마계의 마스들 같은 놈들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동행하는 놈은…… 소문이 자자한 바로 r놈인가 보군. 생령이 이곳에 온 것도 아마 오랜만의 일일걸. 자,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가서 술 한 잔 걸치는 게 어떻겠나?”
바로 이때였다.
“다치고 싶은가 보군. 네 주제도 모르고 너무 큰 판에 끼어 든 것 아닌가?”
우리 뒤쪽에서 들려 온 소리였다. 각시와 너울을 살펴보니 그들은 전혀 동요함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너울과 각시는 그냥 가라. 저놈은 우리들이 혼을 낼 테니.”
“쳇, 이놈만 아니면 한판 재밌게 놀 수 있겠는데 말야.”
너울이는 영 불만이라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앞쪽에 떠 있는 두 마리 괴수를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허어, 이러면 곤란한데.”
“네 놈은 우리하고 놀아야지.”
스스스스
앞에 서너 명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은 처음에 보았던 선인들의 옷차람 그대로였다.
“그럼 잘 부탁해.”
“염려 마라.”
너울과 선인들이 주고받는 말에 뒤이어 괴수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놈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속도를 좀 높이자.“
피이이잉
각시와 너울이가 속도를 붙여 하늘을 나는데 눈앞이 흐려질 정도의 가속이었다. 나는 뒤로 고래를 돌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바짝 긴장했다. 뒤에서 연신 쾅쾅 울리는 소음이 들리는 걸로 보아 결투가 벌어진 것 같았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목표했던 곳 위까지 올 수 있었다. 탑의 높이는 바닥에서 어림잡아 30장은 될 것 같았다. 빙 둘러가며 서너 명이 동시에 들락거릴 수 있을 만큼의 창이 뚫려 있었는데 나를 손에 잡고 그곳으로 쑤욱 들어가는 것이었다.
내 전신 크기만큼의 돌을 포개 쌓은 듯한 탑의 구조는 의외로 간단했다. 층과 층 사이에 계단 같은 것 없어 서로 왕래하기 위해서는 조금 전 우리가 들어왔던 방법으로만 가능한 것 같았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탑의 중간 정도의 위치였다. 안은 꽤나 넓은 여러 개의 석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가장 안쪽 지점에 가장 큰 석실이 있었다.
“자, 당분간 우리는 이곳에서 생활한다.”
나는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도무지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너울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떠드는 너울의 말들은 하나같이 내가 여기서 지내며 엄수해야 할 규칙 같은 거였는데, 그 모든 게 스스로 즉흥적으로 만든 듯 여겨졌다.
“자고 일어나는 것에서부터 먹고 쉬는 것까지 모든 건 내 허락이 있어야 된다. 하루에 세 번의 휴식 시간과 한번의 식시 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자유 시간은 당분간 없다. 내 지시에 불응하는 건 용납되지 않으며, 의문이 들 때면 언제든 물어 봐라. 그리고…….”
“잠깐만…….”
너울이 눈을 부라렸다.
“……요.”
“뭔가?”
어찌 보면 화내는 모습도 귀여운 것 같다.
“질문이 있습니다,”
“그놈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조금 전 의문이 들면 무엇이든 물어 보로 하지 않았습니까?”
“흐음, 좋다. 설명해주지. 놈은 무한계의 족속 중 하나인 ‘부루’의 전사다. 이름까지는 알 필요 없겠지?”
“그럼……조금 전 그놈도……영자란 말이요?”
“그래, 너는 또 잊고 있구나. 네가 지금껏 지니고 이던 생각들은 모조리 버리라고 하지 않았더냐? 영자들이 모두 우리와 같이 생겼다는 것도 편견이다. 영체란 것도 인간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껍질에 불과하다. 놈들의 모습이 저런 건 저들 고유의 프리즈마 때문이지. 또 질문 있나?
“지금……우리 주변에 선인들이 또 있소?”
“물론! 네가 만족할 만한 수준에 오르기 전까지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거든. 이번 일에 투입된 선인들의 수만 해도……. 그만하자, 이런 얘기.”
후우, 그런가? 누군가의 보호가 없으면 내 한 몸 지키지도 못하게 되었는가? 처량하군.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주겠다. 나와 각시는 각기 한 분야씩을 맡아 너를 수련시킨다. 나는 네 전투력을 높이는 데 주력할 것이고 각시는…….”
“그런 내가 말하지. 저는 영계의 잡다한 지식들을 가르칠 거예요.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부분부터 알아 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만한 것까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파천님이 습득해야 할 대부분의 지식을 가르쳐 드릴 겁니다.”
‘그’ 와 천마에게서 들을 건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군. 이것 시작부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기본적인 걸 습득한 이후에 너는 이곳 제일 상층인 모처에서 다른 수련을 쌓게 된다. 그걸 끝낸 이후에야 여행은 시작되겠지.”
“그때 두 분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물론 우리도 함께 동행한다. 무한계까지지만. 그 이후엔 너 홀로 모든 걸 처리해야겠지. 그러니 한 순간도 한눈 팔 여유 따위는 없다. 항상 긴장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라. 그렇게 한다 해도 성공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나마 오래 견딜 수 있을 테니 말야.”
“그럼 시작합시다. 뭐부터 하면 됩니까?”
“각시, 시작해.”
“그러지. 자, 이리로 오세요.”
각시가 날 부르는 사이 너울이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그가 사라지자 각시 선인은 보격적인 수업에 들어갔다. 우리 둘은 마주보고 앉았다. 석실 중앙에 역시나 돌로 된 단이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았다 바닥이 따스했다. 각시는 작은 입을 열어 쉴 새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낯선 개념들이 태반이었기에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천님은 현재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인간계로 치자면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프리즈마의 원리부터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번뜩이고 있어 봐야 이해하는 건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각시는 내가 전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한 번 말한 건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후유, 이것 어려운데.
“……영체 고유의 프리즈마가 없기에 신체가 발휘할 수 있는 원래적인 힘 이외에는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대신할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약간 지겹다는 생각이 들 때쯤 너울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와는 반대로 각시 선인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여전히 석단에 앉아 있었다.
“일어나라. 오늘 익힐 건 운신법이다. 전투력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곧 운신법이지. 인간계의 무공에도 이와 같은 것이 있다지만 전혀 원리가 다르니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
너에게는 현재 프리즈마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너는 영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에 불과하지. 기껏해야 걷고 뛰는 정도가 전부야.“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고급영자들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마신들 중 나찰 정도는 가뿐히 이길 수 있다. 으음, 냉정하게 말하자면 쉽게는 아니겠지만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런 내가 허공을 날거나 빠르게 운신하는 것쯤 뭐 그리 어렵겠는가?
“경신술은 자신이 있소. 공간 이동은 하지 못하지만 다른 건 너울 선인에게도 별로 뒤지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 말 자신할 수 있나?”
“그렇소.”
“좋다. 그럼 날 따라 해봐라.”
너울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후 허공을 마음껏 걸어다니고 있었다.
“호오. 그 정도 허공답보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나는 전신에 기운을 일으켰다.
“이, 이것…….”
내공이 전혀 모이지 않았다. 나는 순간 오기가 발동되어 자연의 기운을 끌어 모아 보았다.
“이, 이것도 안 되다니.”
나는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헛공부 했군. 각시.”
스스스스
“왜 불러?”
“이놈 가르치긴 한 거야? 제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잖아?”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난……또 알고 있는 줄 알았지.”
“허……이것, 가르치는 데 골치 깨나 썩겠군.”
나는 졸지에 한참이나 ‘덜 떨어진 놈’ 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좋아, 이렇게 된 것 너와 내가 동시에 이놈을 가르친다. 그 때 그 때 부족한 부분을 동시적으로 채워주는 거야. 어때?
“좋아, 그렇게 하지.”
더 이상 들어 주기 힘들군.
“이것 보시오, 너울 선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놈, 저놈 아무렇게나 막 불러대는 건 너무 한 것 아니요?”
“꼴에 자존심은 살아 가지고.”
“뭐야!”
“왜들 이래요? 너울, 너도 너무 하잖아. 파천님도 참으세요.”
“배우려는 자세가 안 돼 있어. 자존심이 널 지켜 주냐? 그딴 건 저쪽 동네에 다 놓고 오지 않았던가? 네가 그동안 당한 수모와 원한을 생각한다면 이깟 일로 열 내는 건 좀 우습지 않아.”
약을 살살 올리는데 조금 전까지 귀엽게 봐왔던 얼굴이 금세 발리의 얼굴로 비치기 시작했다.
“자, 그만들 하고 다시 시작하죠. 뭐해 너울? 어서 시작하지 않고.”
“좋아, 그러지. 각시 네가 먼저 설명해 줘. 저놈…….”
“놈이라고 하지 말랬잖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저 분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줘라, 됐냐?”
너울은 내가 트집 잡는 게 영 마땅찮은지 고함을 빽 질렀다.
“파천님, 인간계에서 사용하던 무공은 여기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전혀 다른 성질이기 때문에 노력해 봐야 헛수고죠. 처음부터 다시……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무공을 익히고 사용한 경험은 보탬이 되겠지요.
간단히 설명 드리죠. 인간계와 영계의 모든 체계와 구조는 허와 실의 차이만큼이나 분명합니다. 실존하는 물질 형태의 원형이 곧 영계의 물질 개념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모두 실상이기도 하지만 허상이기도 합니다. 관념의 팽팽한 균형이 만들어 낸 실상. 조화와 대립이 빚어낸 실존의 세계가 곧 영계입니다.
만약 균형이 무너지면 이 모든 것도 그냥 사라집니다. 신의 의지가 서로 균형을 맞춘 것이 우주라면 영자들의 의지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영계의 존재 형태입니다. 실재하는 건 오직 영혼뿐. 그 이외의 것은 언제든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영구적인 게 아닌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란 말이죠.
만약 영계의 모든 영자들이 한꺼번에 소멸된다면 영계 역시나 사라집니다. 이 건물도, 건물을 받치고 있는 대지도 모조리 없어지는 거지요. 대신 공간만이 남게 되겠죠. 공간은 신의 의지가 만들어냈기에 영자들의 존재 유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죠.“
“그럼 인간들이 모두 사라지면 인간계도 사라지는 겁니까?”
“그건 아니죠. 인간들은 의지로 물질을 생성시킬 수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인간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구조물 모두는 신의 의지의 권한 내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영계 내의 물질들 태반은 영자들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죠.”
대충 이해가 가긴 하지만……받아들이긴 좀 힘들군.
“영계를 이루는 실체나 움직이게 하는 동인은 프리즈마입니다. 결국 영자들이 지닌 프리즈마와 우주 고유의 프리즈마가 결합해 새로운 운동 형태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파천님은 현재 프리즈마를 갖고 있지 못한 생령의 상태. 결국 아무리 의지를 움직여도 우주의 프리즈마가 작용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걸어 다니고 말하고 숨을 쉴 수 있는 겁니까?”
“그건 생령인 상태이기 때문이죠. 생령이라는 말은 순수 영혼이 일정 부분 억제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억제되어 있지 않은 최소한이 힘은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죠.
그래서 이곳에서 걸어다니고 숨을 쉬고 손을 내젓는 따위의 행위는 가능한 것이죠. 그 이상의 외부적인 힘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자, 다 이해했겠지?”
“그렇소. 대충은…….”
“그래서 널 두고 여러 가지 논의된 것이 있다. 결국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네가 지닌 최소한의 프리즈마, 거의 끌어낼 수도 없을 만큼의 미세한 그 힘을 극대화시키는 방법. 그걸 돕기 위해 여러 방법들이 강구되었으며, 수련 형태가 개발되었다.
뿐만 아니라 널 위한 보조 기구도 만들어졌지. 넌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 너 하나를 위해 선계와 천상계의 일부가 힘을 합쳤으니 말야. 난 지금부터 그 모든 걸 네게 익숙하게 만들 것이다.
네가 따라 오고 못 오고는 전적으로 네 책임이다. 각오 단단히 해둬라. 지금부터 난 널 괴롭힐 것이니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 봐라. 현재 너는 널 위해 만들어진 보조 기구조차 사용하지 못할 만큼 형편없다. 그래서…….“
놈의 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왠지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놈이 지금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요?”
“네게 극한을 경험하게 해주마. 의지가 금강보다 단단하고 예리하게 돌 수 있도록 말야. 더불어 프리즈마를 운용해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신체 적응력까지 곁들여서……흐흐흐.
먼저 나에 대한 존경심부터 일깨워 주도록 하지. 날 보며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야. 자, 시작이다.“
쉬익
그의 몸이 쭉 늘어나는 듯한 환각이 일어나며 그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아예 자취를 뒤쫓지도 못할 정도의 빠르기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이것, 이렇게 해서 뭘 하자는 거야? 무공을 익히는 거라면 이해하겠지만 프리즈마는 성질부터 다르다고 하지 않았던가?
“파천님, 곧 너울이 공격해 올 겁니다. 준비하세요.”
준비? 무슨 준비를 djEJgrp 하라는 거지? 나는 일단 자세를 잡았다. 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는 해도 그 동안 단련해 온 신체 능력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좋아, 한번 해보자.
퍼퍽
“으윽.”
너울의 흔적을 놓치는 순간 어깨 양쪽에 강한 타격이 전해졌다. 나는 그 순간 바닥을 구르며 재빨리 반대편을 점유하고 섰다. 내 눈은 민활하게 상대를 찾아 움직인다. 그렇지만 놈은……보이지 않았다.
“여기다.”
퍼억
“윽.”
놈의 주먹이 옆구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다시 바닥을 구르며 일어섰다.
“이것 형편없군.”
“컥.”
이번에 등이었다. 고통은 견딜 만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타격이긴 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도무지 놈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난 보이지 않는 놈의 흔적을 쫓다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미세한 움직임을 청각으로 포착해내기 위함이었다.
아직까지도 나는 저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체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함인지 그도 아니면 이 방법으로 다른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함인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쉬익
작은 소음이 집중하고 있는 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느 쪽이냐, 왼쪽, 아니면 오른쪽?
퍼퍽
“으윽.”
뒤였다.
“한심하군. 이런 놈을 훈련시키라니……너무 하는군. 차라리 무한계에 널리고 널린 하급영자라도 너보다는 훈련시키기 편하겠다. 야, 관두자, 관둬. 이러다 애 하나 잡겠다.”
“그만두려고?“
“각시, 너도 봤으니 알게 아니야. 이건 무의미해. 곧바로 프리즈마의 운용에나 주력해야겠어. 천상계의 늙은이들 말은 도무지 신뢰할 수가 있어야지.”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이런 썩을 놈이 두드려 팰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만둔다고? 눈을 떠 너울을 노려보았다.
“계속해.”
놈은 의문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를 움찔 떨기까지 했다.
“뭐라고?”
“계속하라고.”
“계속……하자는 ……말이냐? 이건 의외인걸. 그래도 꽤……오기가 있다는 건가? 후후후, 하긴 인간들 중 최강자의 자리까지 올랐다니…… 그냥 이뤄진 건 아니겠지. 좋다, 네가 원한다면…….”
쉬익
놈이 또다시 움직였다. 잔뜩 웅크리고 준비하고 있던 난, 놈이 공격하는 순간을 놓치고 뒤로 성큼 물러섰다. 이번엔 몸이 붕 떠올라 뒤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퍼퍼퍽
날아가는 그 순간에조차 놈의 발이 전신을 두드렸다.
털썩
이것……생각보다 더 빠르군. 감각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야. 그것도 그다지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좋아……헉헉…….아주, 좋아.”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두 발로 버티고 서서 놈의 눈을 노려보았다.
“자, 또 시작해 보시지.”
놈은 약간 화가 난 듯도 싶었고 질린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이후 나는 거의 한 시진 동안 두들겨 맞았다. 정말 아팠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놈의 매타작을 견디는 일이 전부였다.
간간이 후식을 취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각시 선인의 강의를 들어야만 했다. 뼈까지 부은 듯한 통증으로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히려 더 오기가 났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한발짝을 떼기가 두려울 정도로 고통이 몰려 왔으나 정신은 오히려 더욱 또렷해지기만 했다.
거의 눈을 감고 놈의 움직임에 집중한 탓인지 머릿속에서 그림이 펼쳐지는 듯 놈의 동작을 읽어내기 시작했지만……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건 단지 내 상상에 불과할 따름이었던 것이다. 역시 무리인가?
“지금의 과정은 프리즈마를 운용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최소한의 기본을 닦기 위함입니다. 닫혀 있는 영혼의 프리즈마를 인산의 신체로 펼칠 경우 과도한 압력 때문에 결국 견디기 못하고 터져 버립니다.
결과는 새로운 영체로의 환승이 아닌 소멸로 치닫게 되죠. 그래서 극한의 고통 가운데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영혼과의 연결고리를 지탱하는 의지가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보조물이 도움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프리즈마를 사용할 수 있기에 지금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점 명시마시고 임해 주시면 도움이 되겠네요.“
각시 선인이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할 수 있었다. 천마가 일월교주를 상대하기 위해 금제를 풀려 했을 때 그가 하려고 했던 게 무엇이었던가와 그 결과가 왜 영혼 소멸에 이르게 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인간이 지니는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건 고스란히 과중한 압력으로 신체를 소멸시켜 우주의 프리즈마로 영혼이 딸려 가고 마는 기이한 현상을 낳게 한다는 점이었다.
모르고 맞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알고 맞으니 마음만은 더 편했다. 마계에서 당한 경험으로 인해 이제 어느 정도는 고통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그렇지만도 않았다.
육체의 고통은 과중된 정신적 압력으로 다가왔으며, 의지가 무너지는 걸 번번이 실감하고는 했던 것이다.
“이 정도로는 안 돼. 지금이라도 포기하지.”
너울은 이따금씩 이런 조롱조의 말로 내 오기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럴 때면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나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새로워지는 느낌이었다.
“헉헉헉.”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날 향해 너울이 냉소 가득한 얼굴을 하고선 다가왔다.
“어서……다시 시작……해라.”
“질긴 놈. 네 놈이 독종이라는 건 내 인정하지. 그렇지만 이 정도로는 역시 무리야. 어차피 널 보호하기 위해 나와 각시 그리고 몇 명의 선인이 더 따라 가니 이 정도에서 포기해라. 아무도 널 비웃지 않는다. 어차피 무리한 계획이었으니 말야,”
“그래요.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리가 있어요. 어떻게 그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겠어요? 그건 저도 할 자신이 없어요.”
처음으로 각시까지 거들어 날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포기할 거면 진작 그만뒀다.
“안 돼. 다시 시작해. 자, 어서!”
나는 아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눈을 감았다. 고요한 중에 머물러 동요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얻고자 하는 걸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던가? 육체와 영혼은 하나가 아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인간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과 의지를 온전히 분리시킬 수 있다면 그게 어디 인간이겠는가?
온몸에 멍이 들고 피가 스며 나오고 다시 딱지가 앉았지만, 그래서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기만 해도 고통이 몰려 왔지만 나는 너울을 재촉했다.
“좋다, 고집불통.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퍼퍼퍼퍽
나는 기절했다 깨어났다를 계속 반복해 갔다.
“크크크. 아직 멀었어. 난……아직 안 죽었다고…….”
“이제 그만두지.”
내가 깨어난 뒤 너울의 첫마디가 이랬다.
“너 같으면 이리 두들겨 맞고 포기할 수 있느냐! 억울해서라도 중단할 수 없다.”
이제 너울은 더 이상 내 말투 가지고 뭐라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도 이제 슬슬 지쳐 가고 있는 눈치였다. 나 또한 지치기는 한가지였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지, 라는 단순한 고집만은 아니었다. 아직은 물러설 단계가 아니란 생각이 더 절실했다.
“좋아, 이 정도면 됐어. 너에게 요구하려 했던 수위는 넘어선 셈이다.”
그냥 하는 소리인지 저알인지 알 길이 없군. 너울의 눈은 자신이 쏟아내고 있는 말들이 하나 거짓 없는 진실임을 강변하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미심쩍었다. 지금 난 너울의 타격을 앉은 채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기절하는 과정 중에 있었다.
과도한 고통은 의식을 흐리게 했고, 아무리 집중하고 있어도 더 이상의 이어짐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이었는데…… 통과라니. 할 말이 없었다.
다음에 내가 하게 된 일은 쇠 구슬을 굴리는 일이었다. 손으로는 아니었다. 발을 사용함도 물론 아니다. 의지만으로 구슬을 굴리란다. 쟤들이 이제 날 갖고 장난친다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이게 가능하냐?”
대뜸 이렇게 묻는 건 나로선 지극히 당연한 일. 너울이 입을 연다.
“가능하니 시키지.”
때리고 맞는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로의 급진전인가? 조롱하고 조롱당하는 관계로.
“난 분명 말했다. 현재의 난 내공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게 가능하단 말이냐?”
“가능하다. 정신의 힘은 육체의 힘을 능가하지. 의지의 소산은 때때로 그 무엇보다 강하다. 항시적으로 그걸 사용하는 게 곧 프리즈마다. 그리고 네겐 비록 미미한 힘이지만 잠재된 능력이 있다. 너 자신을 믿어라.”
좋은 말이긴 한데……. 까짓 한번 해보지 뭐.
“어떻게 하면 되지?”
“집중이다. 정신 집중. 영자들이라면 의지를 일으키는 순간 저절로 양자간에 작용이 일어나지만…… 너는 그게 불가능할 테니 잠재된 능력을 일깨우는 수밖에 없지.”
“구체적인 방법은?”
“각시야.“
너울은 조금만 심각한 게 나오면 각시 선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지금도 그랬다. 스스로 설명하기 곤란해지니 각시를 부르지 않는가.
“정신의 실체는 영혼의 의지죠. 정신의 집중이란 이 의지를 특정한 현상에 접목시키는 거랍니다. 그 구슬과 파천님은 서로 다르지 않죠. 구분하고 있는 벽을 먼저 허물고 무시하세요. 그리고 그 존재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하나라는 느낌이 올 때까지 집중하세요.
그리고 그 순간 잡은 맥을 놓치지 말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다 보면 점차로 감각에 예민해져 갈 겁니다. 임의적으로 그런 상태로 만들 수 있다면 일단을 성공인 셈이지요.“
너무 추상적인 요구였다. 각시 또한 이것만은 설명하기 난감해 하는 눈치였다. 하긴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보고 누가 ‘숨을 쉬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라고 한다면 뭐라 하겠는가? 그냥 원래부터 하던 거라 그냥 합니다, 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원리가 어떠하며 그렇게 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됩니다, 라고 자세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숨쉬는 일 만큼이나 자연스런 것에 대해 특별히 누구에게 설명할 순간이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터였다. 어쨌든 난 각시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지리한 시간이 오고 갔지만 내게선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구슬도 원래의 자리에서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음은 당연했다.
“이것 시간을 너무 뺏기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고 생각한 듯했다. 이것들 보시게. 나는 그저 평범한 보통이 인간이란 말이지. 너희들 같은 영자의 기준에 날 맞춰 두고 있었다면 그건 오산인 게야.
다시 구슬에 집중했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제길, 이게 움직일 턱이 있나? 이게 뭐 하는 짓이람.
“너울 다른 방법 없나?“
“없어.”
“그래요. 이번 단계만 무사히 건널 수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진득하니 참고 해보세요.”
끙, 결국 되든 안 되든 이마로 치받고라도 나가야 한단 말이렷다. 좋아, 좋다고.
“둘 다 나가 있어. 내가 부를 때까지.”
“왜?”
“나가라면 나가 있어.”
고함을 백 질렀더니 자라목이 되어 너울이 구시렁거렸다.
“성깔만 살아 가지고……. 저놈의 기를 처음부터 콱 눌러 놨어야 나중에 편한 건데…… 에구.”
두 선인이 사라지고 나자 나는 구슬을 향해 안력을 있는 대로 돋우었다. 노려보는 것만으로 가능하다면 아마 구슬은 무한계의 끝까지 날아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놈의 무심한 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구슬과 일체를 이루라는 말인데……. 저 쇠붙이와 어떻게 일체를 이룬단 말이더냐? 답답하군, 답답해. 이럴 때 ‘그’라도 있었다면 그럴 듯한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텐데. 아니면 천마라도 있었다면.
그나저나 천마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죽은 설란과 수하들은 모두 어디 있을까? 아직은 영체를 입지 못했겠지. 차원계로 복귀하기엔 이른 시간이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어쨌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저 구슬을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 어떤 사물이 움직인다는 건 힘이 가해졌다는 의미.
나와 저 구슬 사이에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을 통해 직접적으로 물리력을 가하지 않고도 움직이게 하려면 그 사이의 공간 자체에 힘을 가해야 한다. 공간에…….
영혼의 프리즈마를 사용한다고 했지. 그리고 그걸 우주 공간에 있는 프리즈마와 결합시켜 작용시킨다고 했던가? 그럼 영혼의 존재를 먼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영혼은 어디 있는 건가? 지금 이 의식의 흐름이 영혼인가? 기뻐하고 슬퍼하는 등의 감정이 영혼인가? 그도 아니면 이 모든 게 합쳐진 게 영혼의 실체?
죽으면 영자가 된다. 순수한 영혼의 상태는 육체가 죽어야…….
바로 그거구나. 육체의 기능을 의지와 분리시키는 것. 다시 말해 육신의 기능을 내 정신이 전혀 의식하지 않는 상태가 될 때, 영혼이 주체가 되겠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숨을 쉬지 않으면 그냥 죽을 거고. 일단 이놈의 의식의 흐름을 먼저 차단시켜 보자. 생각하지 말자. 생각을 말자. 하지 말자. 말자.
……졸리는군.
너울과 각시가 초조한 만큼이나……. 아니, 그들보다는 내가 더 초조해져 갔다. 시간은 흐르고 구슬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망할 놈의 구슬. 조금 더 가벼웠더라면 어쩌면 움직였을 수도. 아냐, 무게는 상관이 없다. 쇠구슬이 무겁다는 생각. 내가 어떻게 해도 움직이지 않을 거란 생각 자체가 문제가 되겠어. 좋아, 그럼 저건 그냥 원래부터 굴러다니던 거다. 굴러라, 굴러. 에라이!
며칠이 지났을까…….
“야호, 구슬이 드디어 굴렀다.”
“뭐?”
“정말이예요?”
너울과 각시가 거의 동시에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마도 이 근처에서 머물며 날 지키고 있었던 것 같았다.
“구슬이 굴렀다고.”
“다시 해봐라, 다시.”
“자, 잘 봐라.”
나는 으쓱해져서 보란 듯이 구슬을 쳐다보았다.
스르르르
아주 느릿느릿했지만 분명 구슬은 앞으로 뒤로 움직여 가고 있었다. 그걸 보는 두 아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됐어요, 이제 됐어요.”
“그래, 네가 드디어 해냈구나. 역시 해낼 줄 알았다.”
삼복 더위에 개 하품하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네가 언제부터 날 인정했다고.
“어떻게, 어떻게 한 거야?”
너울은 내가 구슬을 움직인 게 마냥 신기한 듯, 날 이상한 놈 보듯 했다. 혹시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 아냐? 태도로 보아서는 그런 것 같잖아.어째 속은 기분인데.
“어떻게 하긴. 그냥 움직여라, 움직여라 그러니 움직이던데.”
“끄응.”
“설명해 줄까?”
“그래, 설명해 봐라.”
“내가 예저에 오행구슬을 처음 만들 때를 생각했다. 오행기를 모아들일 때 말이다. 프리즈마라는 것 역시나 일정의 체계를 지닌 것으로 이해했지. 확신은 들지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 오행기를 모아들일 때 내 스스로를 기와 일체화시켜 갔듯이 공간과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 그런데 기는 분명 내가 느낄 수 있었지만 이놈의 프리즈마라는 놈은 전혀 느껴지지 않더군.
답은 하나였어. 영혼이 느끼는 기가 프리즈마라는 결론을 얻었어. 내 영혼이 일체감을 느껴야 된다는 생각에 무의식의 상태로 접어들기 위해 애썼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거든. 그리고 그 상태가 분명했는데…… 좀더 선명하고 명확한 의식의 흐름이 느껴지더군. 난 무조건 신뢰했다. 그리고 구슬을 움직이게끔 명령했어. 나 자신에게 말야. 그게 전부야.“
“…….”
“…….”
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날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그게 전부야.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구슬이 움직이는 거였어. 나도 처음에 믿을 수 없더군. 또다시 해봤지. 역시나 움직이는 거야.
아직까지도 내가 어떻게 해서 구슬을 움직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 그냥 내 마음의 신뢰가 저 구슬을 움직였다고 믿고 싶을 따름이야.“
“뭐, 과정이야 어땠든 결과가 좋으니 다행이군.”
너울은 아직도 조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그래요, 이제 곧 모든 준비가 끝날 것 같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각시의 귀여운 얼굴에 깊이 볼우물이 패였다. 깜찍한 아이의 천진한 표정에다 꼭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씨까지 착하니 딸로 삼으면 죻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나도 참 주책이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인을 딸로 삼을 생각을 다 하다니.
“자, 이제 여기 더 이상 머물 필요 없겠다. 바로 상층부로 올라가자.”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상충부레 오르고 보니 그곳에는 여러 명의 선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에 제일 그럴 듯하게 생긴, 기품이 흘러넘치는 선인이 내게로 다가왔다.
“지금부터 두 가지를 파천님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하나는 현재 파천님의 영혼이 사용할 수 있는 프리즈마의 양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장치 하나와 선계의 보물 한 가지입니다. 노군께서 모든 걸 준비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만나면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겠군.
어차피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이라고는 하지만 생명부지인 날 위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준 그 마음씀이 고마웠다.
그렇지만 잠시 뒤 나는 노군이란 노인네를 향해 속으로 욕을 해댔다.
이놈의 늙은이 만나면 얼굴 가죽을 벗겨 버리겠다. 이런 걸 선물이랍시고 주다니.
내가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노군이 내게 준 선물의 하나는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선이들의 친절한 미소에 잠시 마음 놓고 있는 살이 그들은 날 가사 상태로 몰아 놓고서는 내 머리를 쪼개고 그곳에 손바닥보다 더 클 듯싶은 침을 쑤셔 박은 것이다. 그것도 세 개나. 나중에 내가 깬 후에 한 말이 걸작이었다.
“머릿속에 들어간 대침 세 개는 영력이 충만한 것으로 장차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프리즈마를 사용함에 그다지 큰 어려움도 없게 해줄뿐더러 일시지간 힘을 극대화시켜 주기도합니다. 선물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그 말을 내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허락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당히 언짢아졌다. 그때 너울이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자, 이것 받고 기분 풀어라.”
그의 손을 쳐다보니 작은 목함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 돌돌돌 말린 금 채찍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내 물음이 시큰둥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도 갖길 소원했던 선계의 신병 중 하나다. 자, 받아.”
“신병?”
무림에서도 채찍을 무기로 사용하는 예는 흔하지는 않지만 꽤나 된다. 선계에서 손꼽히는 신병이라는 말에 솔직히 마음이 동하긴 했다. 그렇지만 금방 히쭉거리며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흐음. 뭐, 선물이라니 받긴 하겠다만……. 이런다고 내 마음이 다 풀어진 건 아냐.”
“그래, 알았다. 어련하겠냐.”
손에 채찍을 받아 쥐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 이게 왜 이래?”
채찍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고 찰싹 달라붙는가 했더니 살아 꿈틀대며 오른팔 안으로 스며들어가기 시작했다. 불덩이가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에 나는 고함을 질렀다.
“이것 왜 이러는 거야?”
“촐싹대지 마라. 신편이 너와 하나가 되어 가고 있는 거니까.”
나와 하나가 된다고?
춧춧춧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아직 완전히 스며들지 않은 채찍의 끝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팔을 쫙 펼쳐 봐라.”
나는 너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채찍이 완전히 팔 안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신기했다.
“그런데 이것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구슬을 움직일 때와 동일해. 오히려 사용하기 더 쉬울 거다. 한번 해봐.”
“어떻게?”
“그냥 손에 채찍을 쥔다고 생각해 보란 말야.”
“그, 그러지 뭐.”
스스스스
팔 안에서 언제 불쑥 튀어나왔는지 나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채찍. 손 안에 가득 찬 느낌은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걸 휘두른다면?
파앙
“조, 조심해.”
슈슈슈슈
채찍이 길게 늘어나며 사방을 휘감았다. 그러자 번개가 치는 듯 번쩍거리며 사방 가듯 빛으로 충만했다. 내가 채찍을 휘두른 것과 너울이 고함을 치고 선인들이 사방으로 숨어 들어간 건 거의 동시였다.
파파파팡
탑의 제일 상층부가 한순간에 터져나가 버린다.
“헉.”
사방으로 시원스럽게 뻥 뚫린 석실을 보며 나는 아연실색했다. 이것 위력이 엄청나구나. 그저 휘두른다는 느낌을 가진 것뿐이건만 이 정도라니. 나는 손 안에 들린 채찍을 멍한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것…… 마음에 드는데.”
“후유, 깜짝 놀랬잖아. 갑자기 그렇게 휘두르면 어떻게 하냐!”
너울이 지른 소리였다. 어이가 없군. 그 정도에 겁먹는 게 무슨 선인이라고. 선계의 선인들이나 천상계의 천인들 중 아무리 떨어진다 해도 일반 영자들보다는 상위의 수준이었고, 그런 이유로 다른 차원계에 비해 적은 수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이 이까짓 채찍 하나 휘두른다고 놀라 도망가는 꼴들이라니.
“파천!”
“왜?”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
“이번엔 또 뭐냐?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좋으니 망설이지 말고 가져와라.”
“욕심은 많아 가지고……. 그런 것 아냐. 빨리 서둘러라. 그곳을 거치고 나오는 순간 광명을 얻으러 바로 떠나야지.”
“준비되었겠지?”
“네.”
다른 선인 중 하나가 너울의 물음에 답했다.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걸로 봐서는 너울도 선계에서 꽤나 놓은 지위를 지니고 있는 듯싶었다. 무시할 놈은 아니었나보군.
“자, 이제 잠시 헤어질 시간이다. 저들을 따라 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면 새로운 일행들을 소개시켜 주마. 그들 중에는 천상계의 천인도 포함되어 있으니 기대해도 좋을 거야.”
천상계와 선계의 연합 별동대인 셈이군.
“저희들을 따라 오시죠.”
“그러죠, 자, 갑시다. 그곳이 어디든.”
나는 그들을 따라 나서다 잠시 멈칫했다. 뒤에 여전히 서 있을 너울과 각시를 향해 지나가듯 말했다.
“각시 그리고…… 너울, 그 동안 수고했다.”
왜 이리 소름이 돋지? 이것 참 별난 기분이네.
나는 선인들을 따라 허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퍽 자연스런 움직임에 나도 만족스러웠다.
이건 마치 산중 수련을 끝내고 막 무림에 출도하는 신출내기 심정인걸. 왜 이리 가슴이 뛰는 걸까?
앞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이겨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내 안 가득 차 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나와 함께 할 저들만으로도 외로운,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지 않겠는가. 이것만으로도 절반쯤은 성공에 다다른 듯한 기분이었다.
앞에 그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는 중단함 없이 헤쳐 나갈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광명을 얻고야 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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