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29화 : 브라함과 페드로
브라함과 페드로
파천과 아난다의 표정을 유난스레 살피던 권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왜들 그러는 거야? 내 생각대로 하자니까. 정면 대결을 하자는 것도 아니잖아.”
“넌 느끼지 못했나 보지?”
“무슨 소리야?”
파천은 원형경기장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비행선에 대적자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어.”
“단지 셋뿐인 것 같았는데…….”
아레나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난다에게 질문했다.
“처음부터 이것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신 겁니까?”
“확실한 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졌습니다만…….”
“무슨 소리들이야?”
권터는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치며 모두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 본다.
“권터, 조금 전 원형경기장에서 의도적으로 기운을 뿜어 온 자들이 있었다. 정확하게 세 방향에서. 그걸 말하는 거다.”
파천의 설명에 권터는 다시 아레나를 쳐다본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아레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직까지 겪어 보지 못한 막강한 기운이었어. 그런 자들이 적어도 세 명은 비행선 안에 웅크리고 있는데……. 그런데도 네 제안대로 하자는 거야?”
권터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체념하듯 말했다.
“빌어먹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둘 중에 하나겠지. 이대로 이놈들의 제물이 되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쳐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승산이 없어.”
“그 정도란 말인가?”
아난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온다고 해도 승부는 미지수다. 라미레스 님이 때를 놓쳐 늦어지기라도 한다면 앞일을 장담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파천은 동료들을 라치오에게 맡겨 둘 게 아니라 직접 구해 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접어야만 했다.
“그런 자들이 있는데도 라치오가 지금껏 걸려들지 않았다는건…….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파천의 지적에 앙샹뜨가 동의했다.
“그렇군요. 아니면 벌써 잡혀 있을지도 모르죠.”
“아닙니다. 그랬다면 플로렌서가 입을 다물고 있을 리가 없죠.”
아난다의 말처럼 플로렌서가 그런 것까지 숨기진 않을 것 같았다.
어떤 수단을 가구했는지는 모르나 그는 적진에서 용케 지금껏 몸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난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실내를 오가며 생각에 잠겼다.
‘이때 친구들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 것인가. 진정한 강자들이 이제야 막 출몰하기 시작했거늘, 그대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수호자님, 정녕 이 어려움을 제 힘으로 뚫고 나갈 수 있을까요? 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시기에 이 어려움을 모른 척하십니까?’
그는 속으로 한탄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의 힘은 미약하다. 다행히 파천 님의 진력이 내 기대 이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된다. 대적자들은 파천 님의 안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자들. 마지막까지 몰리게 되면 처결하려 들 것이 분명하다.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아난다는 아레나와 대화중인 파천의 옆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켜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한편 플로렌서는 딜타이와 메르센느까지 대전에서 물리고 혼자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마저 벗어 두어 그녀의 용모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플로렌서의 얼굴은 차가운 심장을 소유한 장인이 만 년을 견딘 얼음을 깨고 다듬어 놓은 듯했다. 아무리 무표정한 얼굴이라도 일체의 감정마저 실리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플로렌서는 이런 일반적인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 얼굴이 아니라도 한 듯 표정 자체가 없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다니…… 안심할 수 없는 위험한 인물들.
상부에서 당부를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너희들과 함께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제멋대로이고 안하무인인데다가 그 기분 나쁜 눈빛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휘이이힝
사방이 밀폐된 실내에서 돌연히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플로렌서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었다.
“무슨일 인가?”
플로렌서의 차가운 음성에 대답하는 소리가 있었다.
“네가 하지 않겠다면 우리가 하겠다.:
“무슨 뜻이지?”
“파천이란 놈을 죽여라.”
“별일이군. 왜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
여전히 실내에는 플로렌서 그녀 혼자였다.
“네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를 죽여라. 살려둘 이유가 없다.”
“내 일에 참견하지 마라. 난 그런 것까지 참고 있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어.”
“후회할 거야.”
플로렌서는 오히려 반문한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원형경기장에서 기운을 내뿜은 의도를 물은 것이다. 상대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놈들의 반응을 알아보고 싶었어. 그리고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고.”
“쓸데없는 짓을 했다. 가만있었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그들은 탈출을 시도했을지도 모르는데.”
“몇 놈이나 내 기운을 감지했을까? 아난다와 파천이란 놈 정도겠지?”
“틀렸다. 그들은 네 존재를 모두 눈치 챘을 거야. 이젠 그만 가봐. 너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사가 뒤틀려.”
‘크크, 잘 들어라. 우리의 밀약이 깨어지는 순간 넌 내 노예가 될 것이다.“
“닥쳐! 네 놈 따위에게 농락당할 만큼 내가 만만해 보이냐?”
플로렌서의 손에 들린 홀이 부르르 진동을 일으켰다.
“자, 자, 진정하라고. 농담한 것 가지고 이리 예민해 질 필요는 없잖아.”
“어서 꺼져! 더 이상 화를 돋우면 밀약이고 뭐고 네 놈부터 작살내는 수가 있으니까.”
“적들이 몰려오고 있어. 네 힘으로 그들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야. 그 때는 날 부르라고. 아주 간절히 말이야.”
“그런 일은 절대 없어.”
갑자기 사방의 공기가 팽팽하게 압축되는 듯했다. 침묵의 순간이었다. 그 침묵마저 대단한 압력으로 인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형체 없는 목소리는 너무도 가볍게 새워 나왔다.
‘무한계의 곳곳에 우리의 동료들이 숨어 있지. 그들이 내게 말하더군. 곧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라고. 그럼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군.“
플로렌서는 풀어놓은 금속제 가면을 다시 썼다. 그때 예의 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한 가지 소식을 전해줄까? 이 비행선에 두 놈이 침입한 것 알고 있나?” “…….”
“모르고 있었나 보군.”
“쓸데없는 소리 마라.”
“사실이야. 놈들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도무지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 단 말이야. 어딘가 숨어 있는 건 분명한데……. 아직까지 움직임이 없어. 그들은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거야. 쉽게 지취를 드러낼 놈들은 아니겠지만…….
다시 움직이는 순간 내 손에 잡힐 거야. 그걸 놈들도 알고 있는 거지. 재미있는 놀잇감이 생겼으니 나는 이만 가보겠어.”
플로렌서는 신경을 기울이고 싶지도 않았다. 한 발로 대전 바닥을 소리나게 울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큰 소리로 말했다.
“딜타이, 메르센느! 어디 있나?”
플로렌서는 비행선의 경계를 더욱 강화 시켰다.
수하들에게 맡겨 두기엔 안심이 안 되었던지 직접 이 곳 저 곳을 챙기며 돌아다녔다. 노예들을 가둬둔 지하감옥에 다다라서는 괜한 트집을 잡아 수하 하나를 본보기로 처형하기도 했다.
수하들이 바라보는 플로렌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감히 눈조차 마주치기를 꺼리게 될 만큼. 막영하고 괜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명백하고 즉물적인 두려움.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플로렌서는 백여 명에 달하는 용병들과 헤브론 수뇌부를 이끌고 비행선 제일 상층부로 올랐다. 거대한 지붕은 자동으로 개폐되게 장치되어 있었는데 플로렌서는 그걸 활짝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어. 느껴진다. 이리로 향해 오는 하루살이들의 움직임이 느껴져.”
전사들은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중부권 오대 사단의 드높은 명예를 짊어진 구출대 일행이었다. 수는 고작 열 명. 그렇지만 오대전사단에서 각기 두 명씩을 차출한 정예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전사단주들은 대규모 파병대신 핵심 강자들만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열 명은 이례적으로 동한 복장을 갖추고 하나의 깃발아래 움직였다. 깃발에는 승천하는 금룡 다섯 마리가 멋들어지게 수놓아져 있었다.
깃발을 쥔 자는 유클릿 전사단 서열 제이위이자 유클릿의 첫 번째 의제인 슐츠였다. 그의 옆에는 마이어와 가장 절친한 스콜스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 일행 중에는 롬멜의 가린차도 보였다. 그는 상위자를 수행하는 입장이었다. 롬멜 전사단의 서열 제삼위인 휘퍼라는 자였다.
원래는 가린차 대신 다른 이가 선출되었다. 굳이 회퍼가 우겨서 일행에 포함되었기에 가린차는 그다지 표정이 밝지가 않다. 가린차는 떠나올 때 롬멜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원래는 가린차 대신 다른 이가 선출되었다. 굳이 회퍼가 우겨서 일행에 포함되었기에 가린차는 그다지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가린차는 떠나올 때 롬멜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가능하다면 싸우지 않고 해결해야 한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너희들의 임무가 그들을 격파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들의 의중을 알아 보는 것이 우선이며, 구출하는 것이 힘들다면 그냥 돌아와라. 동료들이 너희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대적자들과의 전쟁은 그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전사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은 의지를 보여 주듯 결연해 보였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임무라는 것을. 이들 중에 대적자들과 승부를 결해 본 이는 슐츠 하나였다. 나머지는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지금까지는 전사들간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적의 수준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걸 생각하자니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당연했다. 슐츠가 큰 소리로 일행들을 독려했다.
“조금만 더 가면 루하스 강에 도착하오. 힘을 내시오.”
슐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을 겪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서로 적으로 서기만 했던 전사들이 동일한 목적 아래 동료가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나 슐츠는 대적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과의 협상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의사를 타진해 보려는 건 현재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먼저 그들과 싸우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가만 내버려 두면 메덴과 싸우게 될게 분명하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전사들이 루하스 강에 가까워질 무렵 다른 방향에서 하늘을 빠른 속도로 갈라 오는 이들이 있었다.
“좀 쉬었다 갑시다.”
도나투스는 제일 뒤쳐져 날며 툴툴거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속도를 내던 두 인물이 그 순간 동시에 멈추며 도나투스를 노려보았다. 움찔한 도나투스가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린다.
“늦어서 건수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네 놈의 목을 따버릴 것이다.”
페드로의 그 말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님을 도나투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히익, 빨리 가야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잖아.”
도나투스가 둘을 남겨 두고 먼저 공중을 날아갔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걸 보며 페드로가 이를 갈아붙였다.
“이제 보니 저놈이 일부러 늑장을 부리고 있었던 거였군.”
도나투스는 괜한 짓을 한 것이다. 뒤를 바짝 조이며 따라오는 간격이 점차로 좁아져 가자 도나투스는 이를 악물며 속도를 올렸다. 그는 자신에게 이런 임무를 맡겨 준 아난다를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브라함은 어느새 도나투스를 스쳐 지나갔고, 막 추월하던 페드로가 도나투스의 등짝을 후려친다.
“헉.”
간신히 피하긴 했지만 간담이 서늘해지는 일이었다.
‘저 무식한 놈들과는 이번 일이 끝나는 즉시 이별해야 내가 명대로 살겠어.’
숨돌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도나투스는 또다시 비축해 둔 마지막 힘까지 짜내야 할 판이었다.
“오고 있다. 오고 있어! 딜타이.”
“네.”
플로렌서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딜타이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너는 느껴지지 않는가?”
“모르겠습니다.”
“한심한…….”
딜타이는 자신의 잘못이 너무도 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겸연쩍어했다.
메르센느가 다시 한 번 포로들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싸움이 시작되면 신경 쓸 틈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처치해 버리는 게 나을 듯싶은데요.”
“아직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여길 탈출하기는 힘들어.”
메르센느는 플로렌서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을 말씀하시는 거로군. 대체 그들은 누굴까?’
메르센느는 비행선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는 신비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단지 상부와 밀약을 했으며 지금은 조력자로 머무르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헤브론들을 모조리 출전시켜 남쪽의 떨거지들을 처리케 한다. 나머지는 강북을 맡는다. 알겠나!”
“그렇게 지시해 두겠습니다.”
메르센느가 아래로 내려간 이후 플로렌서가 딜타이에게 명했다.
“용병 서른을 데리고 강 북쪽으로 가라.”
“알겠습니다.”
“무조건 부딪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도를 알아보고 대응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주변 전경이 고요하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정신을 집중시켜 사방을 헤아리고 주변의 동태를 면밀히 조사해 나갔다. 뜸할지언정 규칙적으로 오가던 자들마저 감감무소식이다. 라치오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진다. 그는 생각했다.
‘아무런 소음도 없고 움직임도 없다. 이렇게나 조용한 건 여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큰일이 발생했다는 것일 터. 지금이 기회인가? 아니다. 좀 더 기다려 보자.’
그는 지하에 위치한 감옥들 중 빈 곳을 골라 구석진 곳에 은신하고 있었다. 전신의 기운을 차단한 채 이렇게 있기는 얼마였는지도 헤아리기 어렵다.
그가 이렇게까지 신중하게 처신하는 건 한 가지 난관을 만났기 때문이다. 일정하지 않은 움직임이었으나 비행선 깊숙한 곳을 오가는 하나의 기운!
그가 먼저 발견했지만 숨기는 쿤사가 먼저였다. 그 기운이 지척까지 이르렀을 때 그는 격돌할 것을 준비했다. 그런데 천운이 따른 것인지, 그 자는 얼마 머물지 않고 신속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미세한 기운만 느껴질 뿐 형체조차 보이지 않는 상대. 얼마간 양보하여 판단해도 그는 쉽사리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아니었다. 홀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구출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만나서는 안 되는 강자였다. 그래서 그는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라치오가 쿤사를 영언으로 불렀다.
“특이한 점을 발견한 거라도 있나?”
“없어. 주변에는 아무런 기운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호기라고 생각되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이미 구해내야 할 자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지나치게 신중하다 기회는 놓치는 건 아닐지.”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더 신중해도 결코 손해가 아니다.”
둘은 또다시 정적 속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녹였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급하게 몰아치는 바람 같을 것이고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새벽 안개 같을 것이다. 바깥의 상황과 잘만 맞아떨어진다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 늘어서 앞을 막는 자들 앞으로 슐츠는 신중하게 나섰다. 상대의 모습과 기운을 보고 실력을 가늠하고, 그들의 눈빛과 태도에서 의도를 판단한다. 그러나 그가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할 자는 단 하나에 불과했다. 나머지가 우습게 보여서가 아니라 눈조차 보이지 않는 그들의 복장 때문이었다.
슐츠는 손에 들고 있던 깃발을 옆에 있는 동생에게로 넘겼다.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아니면 기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던지 스콜스가 바짝 따라붙었다. 더하여 그 뒤에 서 있던 자들이 활짝 펼친 학의 날개 모양으로 죽 늘어서며 위엄을 더했다.
하나하나가 이름 있는 전사들이어서인지 사방을 향해 쏘아지는 무형의 압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던 바람조차 꽁무니를 빼고 방향을 틀어야 할 정도였다.
“저는 유클릿 전사단의 슐츠라고 합니다. 그쪽은 비행선에서 나오신 분이신지요?”
정중한 물음에 딜타이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는 상대들이 뿜어내는 기세를 겪고는 피가 끓는 듯한 투기가 솟구쳐 나오는 걸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아직은 싸워야 할 자인지 아닌지를 가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굴엔 무한계를 쓸어 버릴 작정이나 아직은 순차적인 움직임이 요구된다. 상층부의 의지가 그러하니 자신으로서는 그 뜻을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전과 같은 과오를 두 번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다는 상층부의 의지는 전력적으로 적에 대한 우선 순위를 매기게 했다. 그 첫 번째가 메덴이었으므로, 나머지는 관심권 밖으로 밀어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굳이 부딪침을 피하고 메덴의 척결에 비중을 두자는 복안이었다.
그래서일까, 딜타이의 껄끄러운 음성이 한결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천성의 탁한 음성은 처음 듣는 이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정도였다.
“드렇다. 그대들은 무슨 용무로 이곳을 찾았는가?”
딴에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할 것이었지만 전사들이 듣기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가 온 것은 전사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선처해 주십사 요청을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후 그대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어 먼저 그쪽의 입장을 들어 보고자 하는 의도도 더불어 있습니다.”
“싸우고자 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슐츠는 상대의 말투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거슬렸다.
“마이어는…… 무사합니까?”
“그렇다. 그 자는 편히 비행선에 머물고 있다.”
마이어가 안전하다는 말에 스콜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도한다. 그가 염려한 건 그것 한 가지였다.
“비행선의 최고 수뇌를 뵙고 싶소.”
“그 전에 날 먼저 거쳐야 한다. 그대들 모두가 비행선에 오를 수는 없다. 단 하나. 한 명만이 나와 동행할 수 있다. 나머지는 여기서 기다려라. 마지막으로 묻겠다. 진정 우리와 싸울 의사가 없는가?”
그가 굳이 또다시 물어 보는 건 상층부의 의지가 어떻든 간에 마음껏 부딪쳐 싸워 보고 싶은 개인적인 욕구 때문이었다. 그 동안 억눌러 둔 게 폭발하기 직전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렇다고 상대도 안 되는 녀석들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땀이 차고 호흡이 가쁠 정도로 싸워 보는 게 그가 원하는 일이었다. 눈앞의 이 자들이라며??? 그런 욕구를 충분히, 아주 훌륭하게 채워 줄 수 있을 거라 판단되었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너무도 간단히 바람을 묵살해 버린다. 딜티아는 거북한 심정이 되어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은 자존심도 없느냐? 우리가 너희들의 동료와 수하들을 억류해 두고 통과하지 못하게 했거늘 그래도 ㅁ부아가 치미지 않는단 말인가?”
돌연한 어조에 슐츠는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딜타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를 이리고 안내해 와라.”
비행선에서 들려 온 플로렌서의 소리가 딜타이의 고막을 터트릴 듯이 울려 나왔다.
“날 따라와라.”
딜타이가 몸을 돌려세워 솟구치자 슐츠가 다른 전사들에게 눈짓을 하며 영언을 전했다.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여기서 기다리오.”
마지막으로 그는 스콜스의 손을 힘있게 잡아 주고는 딜타이의 뒤를 따랐다.
갑판이라고 하기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곳에 슐츠는 떨어져 내렸다. 홀을 한 손에 쥔 여인이 척 보기에도 수뇌로 보였기에 그는 곧장 그 앞으로 착지했다.
딜타이가 그 자의 옆으로 가서 서는 걸 보고 그는 확신했다.
“모두 들었을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곧바로 협상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분명 동등한 조건에서의 협상이었으나 상대도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굴욕적인 요청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나 상대는 그 정도를 감수하고서라도 적으로 돌려세우지 않는 게 훨씬 이득인 매우 위험한 자들이었다.
“넌 마이어와 같은 말을 하는군. 간단하게 말하마. 불가침 협정은 우리로서도 환영한다. 그러나 이곳은 폐쇄되었다. 강을 건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불가침 협정을 맺되 강남에 있는 자들을 강북으로 통과시켜 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슐츠는 너무도 완고하고 강경한 입장에 손을 휘저었다.
“그건 불공평하오. 원래가 협정이란 건 서로 간에 얼마의 양보가 있어야 하고,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조건이 내걸려야 하오. 그런데 그대는 우리만 양보하라고 하고 있구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기시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조금도 굽힘이 없는 상대를 보자 이건 재고 자시고 할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슐츠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싸우거나 받아들이거나. 어느 것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는 마이어가 문득 떠올랐다.
“마이어를 볼 수 있게 해주시오.”
“그렇게 하지. 그를 데려 와라.”
플로렌서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하들 중 하나가 달려갔다.
플로렌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지 뒤로 물러나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여유 있는 태도를 대하고 슐츠는 팔짱을 꼈다.
‘체면을 세워 주기는 실다는 건가? 겉모양새만이라도 그럴 듯하게 하려 했건만 이건 저자세로 굽히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고 싸움을 선택하면 당장 마이어를 데려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돌아갔다 병력을 끌고 오면 그 사이 본진이 도착할 터.
그렇게 되면 어차피 강남의 전사들은 무사할 수 없다. 우리는 대적자들의 본진과 힘겨운 싸움을 치르느라 기진맥진할 테고, 메덴은 뒤에서 환호성을 지르겠지. 결국엔 이들의 뜻을 모두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지금은 우리가 손해를 감수해야 할 입장이다.’
슐츠의 마음속에서는 결론이 내려진 셈이었다. 그는 여기 오기 전 단주들과의 대화를 통해 막무가내로 대적자들이 싸움을 걸어올 경우가 아닌 한은 협상을 타결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롬멜은 이런 상황까지 예견하며 말하기도 했었다. 절대로 강을 건너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적대자들의 선전포고는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후퇴나 양보 따위는 없을 것이란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포로나 노예로서 활용 가치가 충분한 먹잇감을 순순히 내놓지는 않을 것이란 견해였다.
‘롬멜 님의 예측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군.’
저 멀리서 걸어오는 마이어의 모습이 시야에 잡히는 순간 슐츠는 가슴 한쪽에 도사리고 있던 일말의 불안감이 가시며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무사했구나.’
유클릿의 다섯 의형제는 우애가 돈독했다. 그들은 설의 걱정과 고민을 구분 짓지 않고 나누어 가졌으며 한 몸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마이어 또한 슐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무사했구나.”
“먼 길을 오게 해서 미안하구려.”
“괜한 소리 마라. 우리는 항상 하나임을 잊었더란 말이냐.”
“대형께 걱정을 끼치게 돼서 마음이 편치 않았소. 뭐라고 하셨소?”
“너만 무사하면 상관없다고 하셨다.”
플로렌서 앞에 선 마이어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했소?”
“저 자에게 물어봐라. 결정은 저 자가 하는 것이니.”
마이어의 시선이 슐츠에게로 향했다. 입이 열어 묻지는 않았다. 슐츠가 마이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요청하겠소. 그들 모두를 데려 갈 수는 없겠지만 한정적으로나마 우리가 지목하는 자들은 데려 갈 수 있게 해주시오. 이대로 간다면 다른 전사단들이 독자적으로라도 공격을 감행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또한 전투에 가담할 수밖에 없소.”
마이어가 거들고 나섰다.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한 것일 텐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아닌가?”
플로렌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렇게 그들에게 집착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좋다. 너를 포함해서 서른 명만 데려 갈 수 있다. 그 이상은 곤란해.”
“좋소.”
슐츠도, 마이어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불가침 협정의 증거로 가지고 온 기를 맡기겠소. 그 쪽이 먼저 이기지 않는 한 우리는 침묵하겠소.”
슐츠가 손을 뒤로 뻗고 있자 멀리서부터 날카로운 파공성이 빠른 속도로 커져 갔다.
패애애앵
턱
슐츠의 손에 잡힌 건 다섯 마리 금룡이 새겨져 있던 깃발이었다.
“자, 여기 있소.”
프로렌서와 딜타이, 메르센느가 비행선 하층부로 내려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슐츠의 시선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마중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슐츠는 왠지 모를 씁쓸함에 고개를 흔들었다. 슐츠는 곧바로 마이어와 함께 강을 건너 스물 여덟을 뽑아 비행선으로 돌아왔으며, 나머지 하나는 바로크로 채웠다.
그들이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북쪽 강변으로 내려섰을 때 그때까지 전사들을 경계하고 있던 용병들도 비행선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미련을 가져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슐츠가 모두를 향해 힘차게 말했다.
“돌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멈추고 서 있어야 했다. 그들 위를 빠르게 날아가는 자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이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고 조금도 늦추지 않았으며 다짜고짜 비행선을 향해 공격을 해댔기에 그들은 호기심을 거둘 수 없었다.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흐하하하, 이게 얼마만이냐!”
브라함의 통쾌한 웃음에 페드로가 화답을 했다.
“그 동안 억눌러 두었으니 오늘 마음껏 풀어 보자.”
곧 이어 그의 손에서 거대한 푸른색 원구가 만들어져 비행선의 옆면을 가격했다. 거대한 폭발음이 먼저였고 세장이나 될 법한 구멍이 생긴 건 그 뒤였다. 갑판에 대기하고 있던 용들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빛을 향해 두 눈을 감고 저돌적으로 공격을 감행하는, 베르한 호수에 산다는 멜피스를 연상시키는 모습들이었다. 그처럼 그들의 움직임 본능적인 것으로 보였다.
“어서 와라. 화끈하게 놀아 보자.”
둘의 외침에 도나투스는 기함을 하며 만류했다.
“아난다를 먼저 만나야 할 것 아니오?”
이것 저것 재볼 것도 없이 마구잡이로 공격을 퍼붓는 게 능사는 아니다. 아난다를 비롯한 선발대를 구출해내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그러나 브라함과 페드로에게는 그런 것보다 당장의 파괴하고픈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우선인 것처럼 보였다.
갈증에 애타하던 자가 바람결에 찰랑대는 물길을 보았으니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마냥 쓸데없는 힘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 말을 들어 보라니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제길 맘대로들 해.”
그의 말은 이제 둘에게 그 어떤 흥미나 호기심도 던져 주지 못했다. 그걸 깨달은 도나투스가 아난다와의 교감을 시도했다. 아난다의 응답은 그의 예측보다 더 빨랐다.
“우선은 휘젓게 내버려두게. 힘이 달리면 일시 퇴각했다가 재차 공격하는 방법을 택해야 할걸세.”
“이들 정도로는 버티기 힘들단 말인가?”
“필시는…….”
브라함과 페드로의 통제되지 않는 힘은 용병들 십여 명이 달려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동작의 민첩함은 또 얼마나 대단한지 한곳에 멈춤이 없이 갑판 이곳 저곳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
남아 있던 용병들로만은 상대하기가 벅찰 지경이었다. 몇 번인가 얻어맞고 뒤로 날아가 처박히는가 하면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퉁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갑옷은 여전히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엥? 이것 봐라. 놈들이 입은 갑옷이 생각보다 질기고 단단한데.”
이제야 그걸 알아낸 것이 자랑스러웠던지 페드로는 입을 히죽거리며 두 팔을 하늘로 세웠다.
“이건 어떠냐, 이놈들아.”
스파파파팟
그의 몸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더니 일순에 작아지며 빛무리를 쏘아냈다. 하늘에서 내리 꽃히는 빛의 화살이던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작고 가느다란 빛줄기는 한 순간에 비행선을 향해 직격했다.
그 가운데 있던 용병들도 피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걸 보고 있던 슐츠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 자들은 혹시…….”
마이어가 소리질렀다.
“브라함과 페드로가 분명합니다.”
“어찌 저들이!”
“이것 대사건인데.”
분분한 소리들에는 숨길 수 없는 흥분감마저 엿보였다.
가린차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두 주먹을 쥐면서 앞으로 나섰다.
“차라리 저들을 도와 비행선을 괴멸시켜 준다면 전사들을 데려 가는 것까지는 상관없소.”
마이어가 슐츠의 기대를 산산이 부셔 버렸다.
“상대는 되겠지만 저들만으로는 힘듭니다.”
슐츠 역시 갈등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좀더 지켜보기로 하자.”
그의 의중은 완전 멸살이 가능하다면 힘을 보태되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지켜본다는 것이었다. 협정을 했다지만 당사자들이 죽어 버리면 묻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사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이 알려지면 대적자들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페드로의 야심찬 공격에도 십여 명의 용병들은 다시 슬금슬금 일어선다. 그걸 보며 브라함이 큰 소리로 웃었다.
“너도 한물 갔구나. 자, 봐라. 이 정도는 돼야지.”
이번엔 브라함의 차례였다. 브라함의 두 팔이 양쪽으로 활짝 펼쳐지는 순간 그의 전신을 감싸고 강폭한 기운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위이이이잉
귀가 뜯겨 나갈 듯한 굉장한 소음에 멀리서 지켜보던 전사들도 귀를 틀어막고 자세를 낮췄다.
“모두 조심하시오. 더 멀리 벗어나는 게 좋을 듯싶소.”
슐츠의 경고에 라 모두는 격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자 한참을 더 벗어났다.
브라함의 공격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느린 듯 보였지만 그 위력만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갑판을 이루고 있는 상판의 일부가 벗겨져 하늘로 솟구쳤으며 페드로의 공격에 터져 나갔던 비행선의 옆면 일부가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간신히 몸을 세워 막 공격을 감행하려던 용병들의 갑옷에 균열이 생기더니 급기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헥헥,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좀 힘들군.”
브라함의 엄살에 페드로가 일침을 가했다.
“너, 지금 장난 치는 거냐? 갑옷만 상하게 하다니 무슨 뜻이야?”
“나머지는 네가 해치워야 공평하지.”
“뭐야?”
그들은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말했다. 용병들은 지금껏 변변한 공격 한 번 못해 봤다. 아니, 공격은커녕 접근 조차 용이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객관적인 비교 평가가 되기엔 부족할지 모르지만 딜타이나 메르센느보다는 강한 것처럼 보였다.
비행선이 워낙에 거대했기에 전체적으로 봐서는 큰 피해라고 볼 수도 없는 미미한 것이었지만 내부에 있던 자들이 진동을 느낄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인지 갑판 위로 솟구쳐 오르는 용병들의 수가 급속히 늘어나는가 싶더니 결국은 백여 명을 채우고야 말았다. 용병들 전체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 뒤를 플로렌서와 딜타이, 메르센느가 따랐다.
플로렌서는 뒷집을 지고 있다 머리를 들어 공중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페드로와 브라함을 포착하는 순간이었다.
“저 계집이 홀을 들었다. 너도 봤느냐?”
페드로의 호들갑에 브라함이 처음으로 진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봤다. 쟤가 지도부 중의 하나란 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홀이로군.”
“그대들은?”
플로렌서의 질문에 페드로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페드로, 이쪽은 브라함이라고 한다.”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도나투스는 대적자들이 분명 놀랄 것이라 여겼다.
‘아쉽게도 표정은 읽을 수가 없군.’
“당신들이 왜 이곳에 온 거지?”
플로렌서의 질문에 페드로가 허공중에서 옆으로 눕더니 힘껏 기지개를 하며 말했다.
“그야 볼일이 있어서지. 홀을 쥐고 있는 너, 여자! 여기 아난다가 와 있지?”
“그런데?”
“그를 내게 넘겨라. 그러면 아쉽지만 이대로 물러나겠다.”
“호호호호호…….”
플로렌서는 고개를 뒤로 젖혀 가면서 오랜만에 마음껏 큰 웃음을 토했다.
“왜 웃는 거지? 브라함, 너는 계집이 웃는 이유를 알겠느냐?”
“글쎄……. 네 놈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난들 알겠느냐?”
플로렌서가 웃음을 멈추고 둘을 쳐다보는데 조금 전과 눈빛이 달랐다.
“내 손에 든 것이 무언인 줄 아는 자들이 내게 그런 요구를 한단 말인가?”
브라함은 기가 차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너 제정신이냐? 우리야 우리. 브라함과 페드로라고.”
플로렌서가 그들의 이름을 못 들어 봤을 리가 없다. 문제는 그녀가 명성에 겁을 집어먹을 인물이 아니라는 점과 그런 자신감을 뒷받침할 만한 실력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대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들을 들어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앞에서 거만을 떨 정도의 자격은 없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나?”
“호, 그러니까 자신이 있다 이거로군. 뭐, 그러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겠군. 네 손으로 아난다를 데려 오기 싫다면 내가 직접 데려 올 수밖에.”
브라함의 호언에 딜타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게 쉽지 않을 거다. 이 망나니 같은 놈들아.”
딜타이가 위로 솟구쳐 오르려는 걸 플로렌서가 제지했다.
“나서지 마라. 네 상대가 아니다.”
딜타이는 당연히 저들은 자신의 몫이라 여겼다. 그런데 플로렌서가 노골적으로 상대가 안 된다며 저지하니 저도 모르게 놀라는 소리가 나왔다.
“네? 그럴 리가…….”
“내 눈은 정확해. 너보다는 강하니…… 가만 지켜 봐라.”
이때 페드로가 참견하고 나섰다.
“뭐야, 그 말은 너는 우리랑 상대가 된단 말이냐? 우켈켈켈.”
“하기에 따라서는…… 너희 둘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의도적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수하들이 기가 죽는 걸 방지하고 저 멀리서 지켜보는 전사들을 의식하면서 나아가서는 상대들을 격동시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안배까지 곁들여 있었다.
“애송이가…… 못하는 말이 없구나. 물론 네가 쥐고 있는 홀이 너희들 중에서도 지도부만 소유할 수 있는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지. 그렇지만…… 넌 아직 멀었다. 나 브라함 앞에서 그런 자신감을 보일 수 있는 자는 영계를 통틀어서도 열을 넘지 않는다.”
호언장담하는 브라함을 곁눈질로 쳐다보던 페드로가 헛기침을 했다.
“열은 너무한 것 같은데. 너도 말해 놓고 보니 좀 무안하지?”
“으음.”
둘은 아직까지 여유 만만했다.
“그래, 정정하지. 열보다는 많고 스물은……. 그것도 더 되려나. 그렇지만 우리 둘이 힘을 합하면 감히 상대가…… 헉!”
브라함은 말하다 말고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플로렌서의 홀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야, 야. 너 왜 그래?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 이런 길이 남을 승부는 좀더 여유를 갖고.”
“입을 다물게 해주마.”
파층
홀에서 뻗어나간 기운은 붉은 빛을 띠었다. 손가락 세 마디를 합쳐 놓은 두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빠름은 브라함과 페드로를 놀라게 하기에 족했다. 둘은 이리저리 움직여 다니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저 년이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이러다 우리 엉덩이에 구멍이 숭숭 헉…….”
둘의 영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가느다란 한줄기 연기로 변한 듯 기괴한 모양으로 변형되며 플로렌서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는 것이었다.
“잠깐, 할 말이 있다.”
브라함과 페드로는 피하면서도 연신 입을 열어 떠벌렸다. 한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걸 지켜보던 도나투스는 등줄기에 땀이 맺히는 걸 의식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브라함과 페드로 정말 대단하다. 플로렌서의 저 막강한 공격을 장난치듯 피해내고 있잖은가? 그러면서도 저 둘의 눈은 한시도 홀의 움직임에서 떨어지지 않는구나. 역시나 명불허전이었어.’
플로렌서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오르자 브라함과 페드로는 양쪽으로 쫙 갈라지며 서로에게 미루는 것이었다.
“네가 상대해라.”
“아냐, 네가 해봐라. 너랑은 수준이 맞겠다.”
둘의 익살스런 모습은 긴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응원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을 절로 웃음 짓게 만들었다.
천하의 모든 영자들이 두려워한다는 대적자였다. 그 중에서도 지도부에 속해 있는 플로렌서 앞이지 않는가. 한데 일말의 긴장도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플로렌서와 상대하는 것이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는 듯 서로에게 미루고 있었으니.
플로렌서는 둘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하나를 가리켰다.
“너부터 처치해 주지.”
그녀가 지목한 것은 페드로였다. 그러자 브라함이 소리내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것 봐라. 네 실력이 자신이랑 비슷하다는 걸 저 계집애는 금세 눈치 채지 않느냐. 너를 간단하게 제압해 놓고 그 뒤에 벅찬 나를 상대하겠다는…….”
“아니다, 너부터 와라.”
브라함이 황급히 입을 다물며 플로렌서를 노려보았따.
“왜 이랬다 저랬다 하냐?”
“오지 않으면 내가 간다.”
플로렌서의 홀이 또다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브라함이 얼른 페드로 쪽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페드로는 맞상대를 해야만 했다.
“치사한 놈, 네 놈이 그러고서도 친구냐?”
“히히, 아무리 봐도 나보다는 네가 더 어울린단 말야. 저 낭창거리는 ???ㅁ짓을 난 도저히 마음이 여려서 때려 줄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럼 나는?”
“너야 어디 그런 걸 따지냐?”
플로렌서의 홀이 바쁘게 움직이자 둘은 교대로 수비를 해야만 했다. 이번엔 피하지만은 않고 적당히 상대를 하며 대처했다.
플로렌서의 눈빛이 매섭게 빛나기 시작할 때였다. 순간 거짓말처럼 브라함과 페드로의 얼굴에서 동시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둘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짐짓 무서운 얼굴을 해보였다.
“진정 맛을 봐야 제정신을 차리겠느냐!”
브라함의 얼굴이 시꺼멓게 변색된 게 첫 번째 변화였다.
페드로는 기함을 하며 몸을 황급히 빼냈다.
“저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이럴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야.”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도나투스도 엉겁결에 동시에 몸을 멀리까지 빼냈다.
도나투스를 통해 아난다는 밖에 누가 와 있는지를 전해 들었다. 또한 틈틈이 자세한 상황까지 전달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그걸 다시 일행들에게 영언으로 전했다. 이제는 탈출을 시도해야 될 시점이 온 것이다. 문제는 아직까지 비행선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정체 모를 신비인들이다. 그럼에도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히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여길 박차고 나가는 일만 남은 것 같은데.”
파천의 의견에 아난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설사 걸음이 막혀 전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불가항력의 거대한 힘에 짓눌릴지라도 시작은 해야 하는 것이다.
아난다가 말릴 새도 없이 파천은 주변의 상황을 좀더 면밀히 살피고자 실내를 빠져나갔다. 작은 움직임과 호흡과 생명체의 미세한 기운까지 그의 예민한 감각을 비껴갈 수 없었다.
파천은 잠시 주변을 돌아다니다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맞닥뜨린 자들은 큰 소란 없이 제압을 하고 쉽지 않은 적은 밖으로 유인해낸다. 이 안에서 투닥거리며 지연해 봐야 우리에게 득이 없으니 여기서 탈출하는 데 주력하자. 선발대의 나머지 포로들은 내가 구출해서 가겠다.”
파천은 지금까지의 태도와 달리 상당히 적극적으로 제 주장을 펴고 나섰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에서 대등한 관계로 올라섰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제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그 위치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파천의 이런 변화가 비록 긍정적인 것이라 해도 받아들이기 곤란한 부분도 있었다. 위험한 일을 파천에게 맡겨 둔 채 마음놓고 제 몸만을 건사할 자들은 이들 중에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안 됩니다.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한둘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닙니다. 그들의 눈을 속인다는 건 불가능하니 결국엔 맞상대를 하지 않고서는 여길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힘을 모아 그들을 견제하며 신속히 동료들을 구해내는 게 여러모로 합당합니다.”
아레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 너를 두고 우리만 여길 나가는 건 별 의미가 없다. 같이 움직이자.”
파천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적었다. 그럴 바에는 여기서 시간을 버는 사이 밖의 상황을 정리하면 결국엔 모두가 안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역시 비행선 안에 있는 신비인들을 과연 자신이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아그립바와 라치오 일행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가능핟.’
파천은 자신이 지닌 생각을 모두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왜 자신이 남아야 하는가를 집중적으로 설득했다. 누구보다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걸 강조하여 말했다.
“그렇지만……”
“자, 여기서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어. 시간을 다투는 일이야. 내가 여길 빠져나가면 너희들은 최대한 소란을 피우며 탈출한다. 내가 동료들을 구출해내는 동안 너희들은 도나투스와 합류해 적의 수뇌들을 처리해야 한다. 모두 이해했지? 자, 간다.”
막을 새도 없었다. 파천이 실내를 빠져나간 건 급작스런 일이었고 그 순간 아난다도 어??? 수 없었던지 일행들을 독려해 벽을 부수며 뛰쳐나갔다.
‘만약 그들의 수가 셋을 넘는다면……. 우리 모두는 위기에 빠질 것이다.’
아난다의 계산대로일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아난다는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쫓아와 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파천에게 유리해질 것이므로 간절히 바라기까지 했다. 추적자들의 분산을.
파천과 아난다의 생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진다. 파천 일행이 행동을 개시한 순간 그 움직임을 쫓아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는 파천의 기운을 따라갔고, 나머지는 아난다 일행의 기운을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