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34화 : 메덴으로부터 온 특사
메덴으로부터 온 특사
하룬에 메덴의 특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사들에게 빠른 속도로 전해졌다.
아직은 평의회 의장이 선출되기 전이라 그는 대회의장으로 인도되었다.
메덴의 원탁이 케로이라는 수련자 하나만 특사로 보냈다는 점에 모두는 놀라워했다. 심지어 수행원 하나 대동하지 않았다는 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걸 달리 해적하면 메덴이 전사들을 업신여긴다고 행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케로이는 분명 다섯의 일행과 함께였지 않았던가? 동행했던 치앙마의 친위대원들은 대회의장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에이어의 인사치레에 케로이는 간단하게 답했다.
“자네가 저사들의 대표인가?”
그는 매우 오만했고 무례했다.
“원탁은 전사평의회를 인정할 수 없다. 메덴이 뜻을 밝혔음에도 굳이 결행하겠다면…… 더 이상 무한계는 그대들을 품어 주지 않을 것이다.”
바늘 끝만한 협상의 여지도 남기지 않은 채 잘라 말하는 케로이.
에이어는 순단 어떤 말로 화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이때 슐탄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닥쳐라. 여기가 메덴인 줄 아는가! 너희들이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평의회는 예정대로 결성될 것이다. 메덴이 원하는 게 전쟁이라면…… 기꺼이 상대를 해주마. 이것이 우리들의 답이다.”
“슐탄, 잠시 고정하시고……”
“그놈 참 성깔이 있군. 네 이름은?”
슐탄은 일어서 있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버럭 냈다.
“무례한 놈! 널 이대로 살려 보낸다면 나 슐탄이 전사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케로이는 아예 죽기로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았다. 그는 입매를 비틀려 차가운 냉소로 화답했다.
“그대가 바로 슐탄이었군. 카포 님의 말씀처럼 너희 전사들은 영계를 위해서는 사라져야 할 족속들이다. 그 동안 무한계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은 것만으로도 부족해 이제는…… 메덴과 적대해 마계를 도울 참인가? 너희 욕심으로 영계를 멸망으로 이끌 셈이냐?
지금껏 너희를 응징하지 않은 건 그래도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계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는 진작에 너희 부류들을 처단했어야 옳았어. 그렇게 하지 않은 게 후회막급일 뿐이다.“
에이어를 비롯한 오대전사단주들도 그 말에는 분개했다. 다른 전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함을 치는 자들로 장내는 소란스러웠다. 특사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면 벌써 처참한 꼴을 당했을 게 뻔했다.
“모두 조용하시오. 잠시만 흥분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에이어의 외침에도 장내의 불길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는다.
화가 머리꼭지까지 오른 슐탄이 케로이를 손가락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무한계에서 없어져야 할 자들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너희 메덴이다. 언제 너희가 영자들은 진심으로 존중해 준 적이 있었더냐. 너희가 무한계에 기여한 게 뭐 그리 크다고 사사건건 우리들 위에 군림하려 드는 거지?
알량한 명성으로 우리를 짓눌려 온 게 그리 자랑스런 일인가? 그럴 자격이 있었다면 마계가 인간계를 침략했을 때 우리가 너희 앞에 무릎을 조아렸다.
모두들 들이시오. 이자의 말은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소. 메덴의 오만한 뜻을 알았으니 이제는 싸울 일만 남은 거요. 설사 우리가 그들을 이기지 못한다 할지라고 우리는 우리의 명예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하오.
우리의 순수한 뜻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고 곡해되었으니 메덴은 함께 할 동지가 될 수 없소. 저 자들의 관심은 무한계 영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뿐인 것 같소. 그러니 더 이상은 이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소. 우리 소신대로 의지대로 행동하면 그만이오.“
“옳소.”
“이 참에 저놈을 죽여 우리 뜻을 보여줍시다.”
“죽어 가면서도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시험해 보십시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팽창된 기류가 어느 순간 꽝하고 터질 것만 같이 뜨거웠다. 이때 소란스런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발대원 전원이었다. 롬멜을 일어나 장내는 진정시키려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슐탄의 살기 등등한 눈이 케로이의 전신을 난자할 듯 노려보았다.
“네 놈을 여기서 당장에 쳐 죽이고 싶다만 넌 그럴 가치도 없다. 널 죽인다면 다른 영자들이 우리를 비웃을 것이다. 전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마. 더 이상은 너희와 함께 공존하지 않겠다. 너희 메덴과 우리 전사평의회 중 하나는 무한계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케로이가 비웃었다.
“가소로운 자들,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고 함부로 떠들어대는군. 다시금 너희들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주지. 무한계가 천상계나 선계로부터 또는 칠대부족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건 우리 메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보호 아래 지금껏 평화를 누려왔으면 고마워 할 줄 알아야지. 그런 망발을 지껄이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 전사연합기구를 해체하고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가 근신하라. 이후 마계의 침략이 시작되면 메덴의 통솔 아래 하나로 뭉쳐 무한계를 위해 산화하라. 그것만이 지금껏 너희가 저질러온 잘못을 조금이나마……“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케로이.”
“케로이는 이어가던 말을 끊고 돌아보았다. 들어 본 듯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라미레스였다.
케로이 또한 라미레스가 무한계에 다시 출현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원탁을 떠나올 때 치앙마는 말했다 라미레스와 아난다가 하룬에 있다고. 그들이 도움을 줄 것이란 언질을 주었다.
“치앙마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을 리는 없고. 카포의 지시냐?”
“이건 내 뜻이 아니라 원탁에서 결정된……”
“내 말을 끊지 마라, 케로이.”
선발대는 오대전사단주와 슐탄이 앉아있는 곳까지 와 있었다. 라미레스는 케로이의 곁으로 다가서며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원탁이 전사평의회를 인정할 수 없다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해도 먼저 싸움을 걸라 하지는 않았겠지. 다시 묻겠다. 카포의 지시냐, 아니면 순수한 네 뜻인가?”
“내 뜻이오.”
“이들 전사들은 널 특사로 예우해 이대로 돌려보내겠지만 난 다르다. 난 지금도 널 죽일 수 있다. 다시 하나 더 물어 보지.”
‘치앙마의 말과 영판 다르지 않은가?’
도와주기는커녕 자신을 협박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어땠든 상대는 라미레스였다. 그는 얼굴마저 발그레해져서는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쉽게 반발하지 못했다.
“원탁이 어떤 결정을 내렸느냐?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그대로만 말하라.”
“지금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메덴의 힘을 보여 주겠다고 했소.”
“한치의 거짓도 없겠지?”
“그렇소이다.”
“아무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게 알고 있소.”
아난다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누구도 원치 않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라미레스는 흥분하고 있는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메덴과 전사들과의 전쟁.
‘종국엔 메덴의 승리로 끝나겠지. 피해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마계는 침략을 결행할 것이다. 그런 호기를 놓칠 리가 없다. 막아야 한다. 그것이 안 된다면 최소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이대로 모든 게 결정 나도록 지켜볼 수는 없다.’
“수련자들이 대규모 전쟁을 벌인 예가 있었나?”
“없……었소.”
“메덴이 무한계의 특정 세력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적이 있었나?”
“대적자들의 경우가 그에 해당하오.“
“전사들은 무한계 밖으로 몰아내겠다는 건가? 그것이 메덴의 목표인가?”
“그렇소. 그렇게 알고 있소.”
“그 다음엔?”
“무슨 말이오?”
“그 다음엔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전사들의 도움 없이 마계와의 전쟁을 수행할 역량이……메덴에게 있다고 보는가?”
“그건 차후의 일이오.”
“너는 오늘 한명의 수련자 자격으로 온 것이다. 네가 한 말은 메덴의 전채 뜻이 될 수 없다. 돌아가라.”
“무슨 뜻이오? 난 분명 원탁의 뜻을 전하러 온 특사요.”
“아무도 널 만나지 못했고 또한 듣지 못했다.”
“라미레스 수련자, 지금 한 말을…… 그대로 원탁에 전해도 되오? 후회하지 않겠소?”
라미레스를 노려보는 케로이의 눈이 노여움에 불타고 있었다.
“심사숙고해서 다시 결정하라고 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한 번 결정된 이상 번복은 없소. 그것이 지금껏 지켜온 원탁의 제일규칙이오.”
“치앙마는 그렇게 생각지 않을 거야. 내 말을 그래도 전해.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그대로.
원탁이 전사평의회를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난 관여할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이들과 전쟁을 하겠다면…… 메덴이 먼저 이들을 치려 한다면 그 전에 나부터 상대해야 할 것이다. 나 라미레스가 살아 있는 한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수련자가 메덴의 원탁을 상대로 적대할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회의장에 참석해 있던 단주들이 술렁거렸다. 그건 선발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파천은 라미레스의 의도를 알 것 같았으나 그렇게까지 극양 처방을 할 필요가 있었던 가엔 회의적이었다.
“그 말 진심이오?”
“그럼 내가 언제 허튼 소리 하는 걸 봤나?”
케로이는 어떻게 해아 할지 얼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라미레스,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상황을 지켜보던 파천이 나섰다. 전사들은 긴장 서린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자를 감극하자. 그런 연후 전사평의회의 특사 자격으로 네가 직접 메덴을 방문하는 것이다. 중재자로 말야. 협상의 여지는 아직 남아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소, 에이어 단주?”
에이어를 포함한 오대전사단주들은 파천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이 제안한 협상 조건이라면 원탁도 수긍할 것이란 말이었다.
케로이를 감금하는 건 시간을 벌기 위함이고, 그 사이 라미레스가 협상을 끌어낸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라미레스도 파천의 의견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좋겠군, 그러지. 케로이 널 전사평의호의 귀빈으로 모시겠다. 넌 내가 메덴에 갔다 올 동안 여기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즉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면 된다. 좋은 생각 이지 않은가?”
이제 라미레스는 전사평의회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했다.
케로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순순히 따르는 것돠 저항해 보는것.
“얌전히 굴거지, 케로이?”
라미레스가 바짝 다가서는 걸 알고 있었으나 케로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항의 뜻을 내비치기가 두려웠건 것이다.
‘이대로 포로 신세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케로이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큰소리를 칠 수 있었던 건 메덴의 특사 자격으로 온 자신을 전사들이 어쩔 수 없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메덴의 무법자로 통하는 라미레스다.
그가 하고자 하면 막을 수가 없다. 자신에게는 그에게 대항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고도 후환이 없을 거라 여기시오?”
“그건 네가 염려할 게 못 돼.”
라미레스가 케로이의 두 팔을 뒤에서 틀어쥔다. 전사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수련자 케로이의 팔목에서 빛이 나고 있다는 걸. 라미레스는 자신이 없는 동안 케로이가 엉뚱한 짓을 할까 봐 아예 결박 시켜 버린 것이다.
프리즈마로 만들어진 팔찌는 케로이를 무력화시켰다. 라미레스가 풀어주지 않는 한 그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평범한 영자에 불과했다.
에이어의 지시에 전사들은 케로이를 회의장 밖으로 데려갔다. 거의 끌려가는 것과 진배없던 케로이는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댔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메덴이 이 사실을 안다면 너희들은 단 한 놈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시끄러운 소음이 잦아진 이후 에이어가 걱정스레 라미레스를 주시했다.
“괜찮겠습니까?”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수 있겠느냐는 염려였다. 그가 그런 걱정을 할 만큼 메덴은 버거운 존재였다.
“별일이야 있으려고. 국면이 진정되고 나면 이런 일쯤은 묻힐 수 있을 거야.”
“그래도 특사 자격으로 왔는데……”
“할 수 없지. 그렇게 해서라도 마지막 수를 써봐야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엔 그 결과가 너무 참혹하거든.”
슐탄이 라미레스에게 물었다.
“우리가 제시하는 협상을 그들이 받아들일 리 없소. 우리를 위해 애써 주시는 건 고맙지만 쓸데없는 일이 될 거요.”
“그건 두고 볼 일이고.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의장 선출을 미를 건가? 지금이라도 당장 결정하는 게 좋을 듯싶은데.”
에어어가 동의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슐탄 후보만 좋다면 저야 상관없습니다.”
자신감이었다. 누가 상대로 나선다 해도 능히 이길 수 있을 거란 자신감. 슐탄도 동의했다.
그들 간의 대결은 예정보다 앞당겨졌다. 예정보다 앞당겨진 일정에 따라 전사평의회의 전권을 장악할 의장이 선출되는 것이다. 선출 될 의장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메덴과의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 짓는 일이 될 것이다.
슐탄은 메덴과의 협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또다시 피력하며 라미레스등을 불안케 했다.
“그들은 끝까지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도 더 이상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소. 내가 의장이 된다면…… 제일 먼저 메덴을 향해 진격 명령을 내릴 것이오.”
가슴 철렁하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엉뚱하게 포로 신세가 돼 버린 케로이는 분에 겨워 안달복달했다. 팔목에 채워진 희미한 방사하는 수갑은 자신의 능력을 완전하게 봉쇄시켜 놓고 있었다.
프리즈마를 유동시켜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찌릿찌릿한 통증이 몰려왔고 금세 힘은 흩어져 버렸다. 몇 번의 시도를 되풀이해 봤으나 마찬가지였다. 금세 풀이 죽어 앉아 있던 케로이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 소식을 어떻게 해서든 메덴에 알려야 한다. 치앙마의 친위대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면……”
“꼴좋군.”
케로이의 등 뒤에서 들려 온 소리에 빠르게 몸을 돌려세웠다.
“누구냐? 그, 그대는!”
치앙마의 친위대원들과 함께 동행 했던 바로 그 사내였다. 그는 채로이의 팔목을 살펴보다 싱긋 웃었다.
“라미레스의 작품인가? 멋진데?”
케로이는 상대의 불경한 태도에 어이없어 하며 막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꼴에 수련자랍시고 자존심이 상한단 건가?”
“네. 네 놈이 감히……”
“자 자, 흥분 가라앉히고 거기 앉아.”
케로이는 막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자신의 몸을 붕 떠오르게 하더니 의자에 주저앉히는 것이었다.
“치앙마는 전사들과 딱히 전쟁을 원한다고 할 수 없지. 그는 유리한 입장은 선점하는 게 목적이지 이들과 싸우고 싶어 하지는 않는단 말야. 그런데도 네 성향을 뻔히 아는 치앙마가 왜 널 특사로 파견했을까? 생각해 본 적 없나?”
케로이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서였던지 아니면 신분도 모르는 놈에게 휘둘리는 게 억울해서였던지 눈마저 감아버렸다.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건 카포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 벵골이 메덴을 떠났으니 이제 자신을 견제할 만한 유력한 인물은 카포가 유일하다고 본 것이지. 카포의 측근인 너를 특사로 지명함으로써 그를 간접적으로 인정해 준거야.
아마 지금쯤은 둘이 마주앉아 있을지도 모르겠어. 치앙마의 계산은 특사는 어차피 여러 번에 걸쳐서 보내져야겠기에 누가 가더라도 별 사오간이 없었을지도 몰라. 회유하려는 최대한의 시도를 했다는 걸 만방에 보여 주면 그만이니까.
그 또한 전사들이 쉽게 뜻을 꺾지는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을 거야. 몇 차례 특사 파젼 이후 적절한 선에서 전사평의회를 무력으로 억압하고 휘하에 두려고 시도하겠지. 전사들 가운데도 친메덴 성향을 지닌 자들은 있으니 그들로 지도부를 다시 편성하는 거지. 거기까지가 치앙마의 계획된 행보일 테고.
그런데 말야. 치앙마의 계산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어. 전사들은 메덴과 싸워 봤자 이길 수 없으리란 걸 뻔히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고 끝까지 대항할 거란 걸 파악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실수야.
두 번째는 전사평의회를 노리는 특정 세력이 이미 오래 전부터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는 거지. 그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 두 세력 간의 전쟁이다.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 그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나?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가 보군. 왜 내가 너한테 이런 일을 시시콜콜 털어 놓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눈을 뜬 케로이가 물었다.
“넌…… 대체 누구냐? 보아하니 치앙마와 관련이 없는 듯 한데 어떻게 그의 친위대와 동행하고 있는 거지?”
“후후후, 그게 궁금했나? 잘 보았어. 난 치앙마 따위가 부릴 수 있는 가벼운 인물이 아니야. 내가 어떻게 치앙마의 친위대와 동행하느냐고? 그건 간단하지. 그들의 우두머리가 우리 쪽 인물이거든, 하하하. 또 하나 알려줄까? 치앙마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누구의 꼭두각시인지는 네가 판단해봐.”
“그야 당연히……”
“바소름이라 말하려는 건가?”
“그렇다.”
“안타깝게도 틀렸군.”
“무슨 소리냐?”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하고 네가 알아야 할 걸 알려주지. 내가 이곳까지 직접 오게 된 건 아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야. 수하들에게 맡기기엔 지나치게 중요한 일이어서 말이지. 그런데 지금 내 꼴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
부탁을 하나 하지. 날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줘야겠다.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다. 사실 네 의중이라 허락 따위는 상관이 없어. 그런데도 네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건 내가 워낙에 사려 깊은 성격인지라…… 최소한의 궁금증을 품고서 죽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말야.“
케로이는 상대의 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죽어 줘야겠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어. 궁금한 게 있나? 딱 한 가지만 풀어주지. 그 이상은 곤란하니 신중하게 물어 봐.”
장난처럼 말하는 상대 앞에서 케로이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상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없나?”
“지금 날…… 죽이겠다는 건가?”
“이런. 지금까지 뭘 들었나? 내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니 내 표현력이 부족했던 것 같군. 다시 말해 주지. 넌 지금 죽는다. 그러니 궁금한 게 있으면 한 가지만 물어라. 무엇이든 가르쳐 주지.”
“넌 누구지, 왜 날 죽이려고 하나, 왜? 난 수련자다. 수련자를 죽이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누가 네게 날 죽이라고 사주했는지 모르지만 다시 생각해봐.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 쯤 잘 알 것 아닌가?”
사내는 피식 웃었다. 케로이의 앞까지 바짝 다가선 그는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두려운가 보군. 한 가지만 질문하라고 했는데 여러 가지를 묻는군. 그 중에 적당한 걸 알려주지. 왜 죽여야 하는지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하고, 누가 날 사주했느냐고 물었나? 가르쳐 주지. 난……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날 사주한 이는 없어. 네가 죽는 걸 내가 원하기 때문에…… 널 죽이는 거야. 이해했나?”
사내의 긴 손가락이 케로이의 턱을 쓰다듬었다.
“잠깐이면 돼. 고통도 없을 테니 안심해라. 이제 그만…… 갈 때가 되었다.”
“안 돼. 안…… ”
사내의 손가락이 케로이의 턱에서 목으로 옮겨졌다. 깨끗한 솜씨였다. 케로이의 목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부릅뜬 그의 두 눈을 잠시 바라보던 사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네 죽음으로 하룬에 지옥이 열릴 거야. 넌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걸 보지 않고 평안히 잠들 수 있지 않은가. 하하하하……”
그는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처럼 실내에서 사라졌다. 단지 케로이의 비참한 죽음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이 모든 게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케로이의 시체는 얼마 지나니 않아 전사들의 눈에 띄었다. 케로이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이는 에이어 전사단 소속의 전사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워낙에 큰 사건이었으므로 호들갑을 떨 만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수하들을 동원해 출입을 통제시키고 곧바로 단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간단한 조치였지만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에이어 전사들의 뛰어난 능력을 판단할 수 있었다.
보고 받은 에이어는 그 순산 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곧바로 오대전사단주를 불러 대책을 상의하기에 이른다. 그는 라미레스와 아난다도 함께 불렀다. 물론 파천도 동행했음은 당연했다. 모두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누가 죽였는가도 중요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특사로 온 수련자가 죽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메덴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롬멜의 말처럼 케로이의 죽음은 전사들의 입장을 아주 난처하게 만들었다. 물론 싸우겠다고 나선 입장이라면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협상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오대전사단두로서는 일이 아주 고약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원치 않는다고 해도 전쟁으로 치달을 수 밖 에 없겠군요.”
실의의 잠신 건 롬멜뿐이 아니었다. 에이어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에 한 한마디를 흘렸다. 에이서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에 찬 한마디를 흘렸다.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지요. 달리 방법이 없다면. 피할 수 없다면 겁내서는 안 됩니다.”
에이어는 이제 메덴과의 전쟁이 불가피 하다고 말라고 있었다. 그만큼 특사 케로이의 죽음은 아무리 방도를 세워 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메덴은 이를 선전포고쯤으로 이해할 것이 분명했다. 파천은 너무 이른 결정이라 생각했다.
“아직은 그렇게 비관적이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을 숨길 수 있는 데까지는 숨겨야 합니다. 그런 다음 협상을 먼저 끌어내면 차후 이일이 알려진다 해도 수습할 길은 있을 겁니다.
여기 있는 우리와 몇 명의 전사들 그리고 케로이를 죽인 흉수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알려지는 걸 막는 일이 급선무겠지요. 그는 치앙마를 비롯한 원탁에 이 일을 알 릴 만 한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 그가 그럴 의도가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과만 놓고 따진다면 흉수는 메덴과 전사들 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걸 원하는 인물입니다. 어쩌면…… 메덴에서 저지른 일일지도 모릅니다. 메덴이라면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다행이…… 그들이 아닌 제3의 세력이라면 피할 수 있는 길이 아직은 완전히 닫힌 게 아닙니다. 그러니 벌써부터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파천이 조목조목 따져 가며 전사단주들을 안심시켜 갔다. 파천은 그들이 생각지 못하고 있던 부분까지 짚어내며 차후에 예상되는 일을 풀어 나갔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숨어 있는 적이 원하는 대로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가장 선결 과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에이어 님께서 의장이 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전사평의회를 통해 전사들을 강력한 하나의 단일 세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더 이상의 혼란과 분열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단호한 지도부의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연후 내부의 숨어 있는 암중 세력을 솎아내야겠지요. 그 다음이 메덴에 대한 처결입니다.
의장 선출이 끝나면 저와 라미레스가 이곳을 떠나 메덴으로 갈 겁니다. 협상은 저희들이 알아서 할 테니 맡겨 두시고 그 동안 에이어 님과 단주님들께세는 이곳의 일을 정리하셔야 합니다.”
파천은 이어 자신이 그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사 조직의 문제점들을 간략하게 언급했다. 단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부분의 내용에 동의를 표시했다. 자존심 강한 전사들이 조직의 체제를 지적하는 걸 순순히 듣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라미레스와 아난다는 그런 파천의 모습을 지켜보며 흐믓해 했다.
‘이제야 네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구나. 그래야 너답지.’
라미레스는 파천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쳐다보았다.
파천의 말이 모두 끝나고 나자 단주들의 얼굴에 가득했던 염려가 많이 누구려졌다. 마지막으로 파천은 슐탄이 내세울 대리자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자신은 있습니까?”
“글쎄요. 슐탄이 내세울 전사가 누구일지 도무지 짐작 가는 인물이 없으니…… 뭐라고 말씀이 없습니다.”
“언제나 준비를 할 때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가 없지요.”
이때 아난다가 에이어를 추켜세우는 말을 했다.
“현재 활약하고 있는 전사들 중에서는 에이어 님을 곤란하게 만들 전사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롬멜도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슐탄이 무슨 의도로 대리자를 내세우려 하는지는 모르지만 상대가 전사가 분명하다면…… 승리는 낙관적입니다.”
이때 라미레스가 한 말이 모두를 긴장시켰다.
“왜 현재의 인물만 따지는 게지? 만약 예전에 명성을 날렸던 전사라면…… 더군다나 봉인한 전사 중 하나라면…… 상황은 달라지는 게 아닌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적었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라도 라미레스의 말처럼 되어진다면 낭패를 보는 쪽은 슐탄이 아니라 에이어가 될 것이다. 파천이 긴급 제안을 했다.
“거기에 대한 대비도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하죠. 우리 쪽에서도 만약을 대비해 대리자를 준비하는 겁니다. 상대가 에이어 님이 감당하기에 벅차다면 대리자를 출전시키는 겁니다.”
유클릿이 고개를 저으며 난색을 표시했다.
“에이어 님을 제외하면 저희들 중 하나 일 텐데…… 모두 비슷한 수준입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지.”
라미레스의 말에 파천이 다급하게 물었다.
“마땅한 인물이 있냐?”
“그럼.”
라미레스의 크게 꺼덕이는 고갯짓만큼이나 모두의 궁금증도 컸다.
“가까운 데 있지.”
아난다가 알 것 같다는 듯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라미레스가 환식에 차 말했다.
“파천, 네 충실한 수하인 페리칸이 있지 않으냐?”
“뭐?”
“오오.”
“그렇군.”
“그걸 잊고 있었다니.”
단주들마저 반색하며 기뻐한다. 이렇게 되니 파천은 어리둥절해질 수 밖 에 없었다.
“페리칸을?”
파천은 광마존, 즉 페리칸이 메덴의 볼꽃 연못에 갇히게 된 경위는 들었지만 이들이 이 정도의 반응을 나타낼 정도였나 싶었다.
‘이들 오대전사단주들보다도 페리칸이 더 강하단 말인가?’
파천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무림에서라면 서로간의 경중, 고하를 쉽게 판단하고 비교할 수 있겠지만 현재 파천은 영자들 간의 실력 우위에 대한 기준이 모호한 상태였다. 직접 상대해 보지 않고서는 쉽사리 감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페리칸을 대리자로 내세우자는 라미레스의 의견은 파천에게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라면 어떤 경우에도 패배하지 않는다. 적어도 거 상대가 전사라면 말야.”
“그…… 정도란 말인가?”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하지 않던 엑크하르트까지 확신에 차 말했다.
“그렇습니다. 페리칸이 나서 준다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이때 롬멜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가 주저하며 입을 뗀다.
“그가 과연…… 우리 일을 도와줄까요? 예전의 불미스런 일도 있고…… 채 앙금이 가시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가 지금껏 참고 묵묵히 있는 것만도 저로서는 신기한 일입니다만……”
이들에게 인식된 페리칸의 존재가 예전에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너무도 달라진 태도가 영 석연치 않은 구석도 많았고 정말 그가 예전의 그 과격하고 사나왔던 페리칸인가 의심이 가기도 했었다.
불안 해 하는 롬멜과 단주들을 보며 라미레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염려 말게나. 내가 부탁해도 장담은 못하지만 여기……
파천이 말하면 군소리 없이 할 게야.”
“정말입니까?”
“그럼. 그렇지, 파천?”
“그야……”
파천은 망설였다.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키는 건 나도 달갑지 않은데.’
그가 걱정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그런 그가 막무가내로 명을 내린 적은 없었다. 그가 수하들을 챙기고 아끼는 마음은 사랑과 애정에 기초하고 있었다.
“으음, 일단은 의중을 물어보고 나서 결정해야겠습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저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않아.”
“자, 그럼 그건 그렇게 결정 난 걸로 하고 모두 각자가 맡은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는 일만 남았군.”
파천은 다시 한 번 단주들에게 할 일을 상기시켰다. 파천이 영계에 들어 온 이후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첫 반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페리칸과 카이로, 파천은 평의회 본부를 나와 매소 하룬의 중심가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로를 걷고 있었는데 그저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하룬 분위기가 어떠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전사들의 얼굴엔 저마다 경계심과 불안이 가득했다. 최근의 계속된 잔인한 살인극이 빚어낸 결과였다. 수상한 자들을 검문하는 전사들의 모습도 여기저기 곳곳에 보였다.
“잠시 조사를 하겠으니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파천에게도 검문중인 전사들이 다가왔다. 파천은 흔쾌히 응하려고 그들 중 하나에게 다가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꺼져!”
파천의 한 걸을 뒤에 있던 페리칸이 뱉어낸 말이었다. 파천은 순간 머쓱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지존,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가시지요.”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수상한 놈들이다. 흉수의 일당이 분명하다. 잡아라.”
근처에 있던 전사들이 몰려와 순식간에 겹겹이 에워쌌다. 대충 훑어봐도 스무 명은 될 것 같았다. 파천이 빠르게 말했다.
“우리는 수상한 자들이 아니니……”
“닥쳐라. 너희를 체포하겠다.”
페리칸이 파천의 앞을 막아서며 낮은 저음으로 그들에게 경고했다.
“비켜라. 지존의 앞을 막는 놈은 그가 누구든……죽인다.”
파천은 지금의 상황이 좀 어이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괜히 시끄럽게 만드는 페리칸도 어처구니가 없었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적으로 몰아가는 전사들도 이해가 안 갔다.
“모두 멈춰라!”
파천이 소리가 들려 온 쪽을 돌아보니 롬멜 전사들로 보이는 자들이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들이 나타나자 사방을 겹겹이 에워쌌던 전사들은 한 걸음씩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외출을 하신다고 미리 말씀을 하셨으면 수하를 동행시켰을 텐데 말입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롬멜 전사는 몇 번이나 그 말을 되풀이했다.
“아닙니다. 별일 아닌 것으로 오해를 사게 했으니 저희 잘못이 큽니다.”
롬멜 전사들 중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포위한 전사들을 나무랐다.
“한심한…… 척 보면 모르나! 이분들은 선발대원들이시다. 너희 어디 소속이야?”
파천은 그들이 하는 양을 가만 지켜보았다. 역시나 그들은 롬멜 전사단의 조장 앞에서 기도 못 펴고 쩔쩔맸다. 뭐라고 변병을 늘어놓다가 조장이 윽박지르자 입을 급하게 다물고는 부동자세를 취했다.
‘소속이 다른 전사들 사이에도 확연한 서열 같은 것이 존재하는구나. 아마도 롬멜 전사단이 명성이 높으니 그런 것이겠지?
파천의 생각처럼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파천 일행을 포위한 전사들은 북부권에 속한 전사들이었다. 롬멜을 비롯한 오대전사단은 전사들 중에서도 최정예로 분류할 수 있다. 가장 지위가 낮은 전사라 하더라도 다른 전사단에 소속된다면 당장에 간부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의 실력 차가 있었다. 그걸 전사들이 가장 잘 안다. 그런 오랜 정통이 결과였다.
파천은 그곳을 벗어나 페리칸과 카이로를 주점으로 이끌었다. 비록 장소도 다르고 맛도 같지 않지만 오랜만에 둘과 술을 나누고 싶어서 밖으로 나온 것이다.
늘어서 있는 주점 중 하나를 골라 안으로 접어들었다. 전사들이 하룬을 접수 한 뒤 주점 역시나 전사들이 관리하고 운영하고 있었다. 전사들 간에 가장 부딪침이 빈번한 장소였던지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내려진 조치였다.
주점 안은 북적이는 전사들로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곳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이 일을 어쩐다?”
앉을 자리가 없자 난처 해 하고 있는 파천과는 달리 카이로와 페리칸은 거리낌 없이 안으로 접어들었다.
“저희들을 따라 오십시오, 지존.”
파천은 멀뚱거리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페리칸이 한 무리의 전사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파천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허 참, 예전 광마존 때보다도 더 거친 것 같군.’
예전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이 정도로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들 마셨으면 그만 일어들 나라.”
“뭐야? 너희들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냐?”
“보시다시피 자리가 없다. 그러니 너희들이 자리를 비워 줘야겠다.”
앉아 있던 전사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중에 덩치가 가장 큰 전사 하나가 천천히 일어섰다. 페리칸의 체격도 큰 편이거늘 그는 페리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카이로가 파천의 눈치를 살피더니 페리칸의 앞을 얼른 막아섰다.
“이봐, 괜히 봉변당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일어들 나는 게 좋을 거야. 이건 순전히 너희들을 위해서 하는 충고야.”
“컬컬컬.”
“하하하하.”
주점 아느이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집중되었다. 곧 벌어질 일에 대한 기대가 가득한 눈빞들이었다. 파천이 페리칸을 불렀다.
“페리칸.”
“네, 지존.”
“다른 곳으로 가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지존. 곧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일어서 있던 덩치 큰 전사라 페리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페리칸이 막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괜한 짓 하지 마라.”
파천의 제지하는 소리에 페리칸이 움찔했다.
“이런 일로 소란을 피우는 건 너 답지 않아. 다른 데로 가자.”
파천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바로 그때였다.
쉬쉬쉿
주점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들이 본 건 빛 무리가 장내를 휩쓸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페리칸의 앞에는 전에 없던 것들이 나타나 있었다. 파천은 강력한 기운을 느끼고는 뒤로 황급히 돌아서다 그걸 보았다. 페리칸의 주위를 감싸고 빛이 뿜어지더니 사방의 벽을 흁었다. 벽 여기저기서 구멍이 뻥 뚫렸다. 그리고 탁자 하나와 의자 세 개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그 모든 것들이 일순에 벌어진 일이었다. 페리칸이 말했다.
“옆으로 조금 옮기는 건 어렵지 않겠지?”
키 큰 전사의 얼굴이 당황감으로 얼룩졌다.
“그, 그야……”
스스스스
그들은 저절로 두둥실 떠올라 옆으로 밀려났다. 그 빈 공간에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깔끔한 솜씨였다.
“이리로 오시지요, 지존.”
카이로도 기상천외한 페리칸의 수단에 혀를 찼다. 설마하니 그런 식으로 일을 해결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파천도 다른 불만은 나타내지 않았다. 별 충돌 없이 자리를 얻게 되었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셋이 마주앉을 때까지도 주점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조금 전 페리칸이 보여 주었던 한 수에 하급전사들은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정교하고 빠르고 강력한 수법을 장난처럼 구사하는 페리칸이 그들로서는 두렵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특히 페리칸과 조금 전 결투를 벌일 뻔했던 키 큰 전사는 얼이 빠져 아직까지 일어선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카이로가 부르를 가지러 간 사이에 파천이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군. 조용히 대화나 나누려고 했는데……
힘들게 됐어. 이렇게 시선을 받아서야 어디.”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지존을 고생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충정으로……”
“됐다. 인간세에 있을 때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군. 아니 오리혀 더 거침이 없어.”
이때 부르를 양손에 가득 든 카이로가 가까이 오며 덧붙였다.
“오히려 더하죠. 인간세에서는 그나마 사리분별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여기서는 망나니가 따로 없죠. 페리칸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전사들이 괜히 견제하고 따돌린 게 아닙니다.”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닌 텐데, 카이로.”
“나야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난 그렇게 요란스럽게 소동을 피운 적은 없어. 내가 비록 우리 부족에서는 사고를 좀 쳤지만 밖에 나오면 얌전한 편이지.”
“그렇게 얌전해서 수련자를 죽이고 부족에서도 쫓겨났나?”
“그거야 다 예전 얘기고. 이제는 서소를 대했다. 페리칸은 동료도 없고 친구도 없으며 소속도 없고 거처도 없었다. 그렇지만 세명의 영자와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 중에 둘이 카이로와 라미레스였다.
그들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주점 안은 텅 비어 갔다. 페리칸에다가 또 한 인물이 카이로라는 것이 확인되면서부터였다. 슬금슬금 빠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그들만 남고 몽땅 사라진 것이다. 파천은 기도 안 차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좀 떠들 걸 그랬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파천이 부르를 한 모금 들이키고 카이로를 적시했다.
“조금 전 그 얘기는 무슨 말이냐? 수련자를 죽이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 부족은 다른 곳들과 달리 부족원들 간에 서열이란 게 없습니다.
단지 거신족 가운데서 주력을 이루는 전승자들만 일정한 지위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줄 따름이죠.
전승자들 가운데서 주력을 이루는 전승자들만 일정한 지위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줄 따름이죠.
전승사들은 부족원들 가운데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 저와 가장 절친한 친구가 하나 있었죠. 우리는 항상 함께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족장이 우리 둘을 함께 불렀죠. 그가 말하길 우리 둘 중 하나가 자신의 뒤를 잇게 될 것이라 했죠. 전 사양했습니다. 그런 것엔 도무지 관심이 없었죠.
그런데…… 부족장은 둘 중 하나가 자신의 쥐를 잇게 되면 나머지 하나는 부족을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 돌을 찾아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돌이라니?”
“칠대부족에게는 카란이 남긴 한 가지씩의 보물이 있습니다. 주복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걸 도둑 맞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결국은 친구가 부족장의 뒤를 이었고, 난 부족을 떠나 돌을 찾아 떠돌게 되었죠. 그러다가 한 수련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동행하다 보니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루딘족이 그 돌을 가지고 있는 걸 봤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루딘족의 비행매소를 찾아갔죠. 그런데 돌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그 수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말하길, 너무 오래된 일이라 착각했다며 사실은 스메이족이 그 돌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자의 말을 곧이곧대도 믿었죠.”
“순진하긴……”
“그때까지만 해도 전 그 자가 설마하니 내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었죠. 저는 그 뒤로 스메이 족을 찾아 온 무한계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흔적은 좀체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때 어떤 수련자가 제안을 하더군요. 스메이족의 위치를 알고 있는 이가 있는데 그 자라면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자기 일도 아닌데 그렇데 애써 주는 수련자가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찾았나?”
“아뇨. 스메이족의 위치를 안다고 했던 자를 마나긴 했는데……
그 자는 알려 주는 대신 한 가지 일을 해달라는 조건을 내걸더군요.”
페리칸이 카이로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네가 멍청한 거야. 그쯤 되면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카이로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내가 한심하다는 걸.”
“계속 얘기해 봐.”
파천의 독촉에 카이로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괴로운 얼굴을 했다.
“그 자가 원하는 건 한 영자를 납치하는 것도 한 영자를 죽이는 일이었죠. 저는 그 자가 지목하는 자를 납치했고 또 죽였습니다. 그들이 누구며 왜 그런 일을 부탁하는지는 제 관심권 밖이 었습니다.
사실 궁금했지만 묻는다 해서 순순히 답을 들을 리 없기에 체념한 거죠. 제 머릿속에는 온톤 빨리 임무를 완수하고 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일념 뿐 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후에 내가 죽인 자가 누군지를 알게 됐습니다.”
“누구였는데?”
“수련자 메사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언급되자 파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메사라면 아레나의?”
“네, 저도 아레나가 선발대에 포함되어 있는 걸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네가 메사를 죽였다는 사실을 아레나도 알고 있나?”
“모를 겁니다.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관련된 소수에 국한 됩니다.”
“메사는 지금 그럼?”
“다시 영체를 입어 무한계에 나왔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시간으로 따져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어쨌든 그를 죽인 뒤에 스메이 부족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놈들을 찾았는데…… 어딘가로 사자진 뒤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찾을 길은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제가 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깨달았죠.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부족원들이 절 찾아왔더군요. 전 부족장 앞에 끌려나가서야 일이 생각보다 커졌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메덴에서 한 수련자가 와 있었습니다. 그는 대수련자 벵골이었습니다.”
“벵골?”
“네, 전 결국 부족장의 명령에 따라 제명 당하 했고 부족을 떠나야 했습니다. 벵골은 사건이 확대되는 걸 원치 않으니 날 제명하는 선에서 마무리 짖자고 했다더군요.
부족을 떠날 때 부족장이 저를 비밀리에 불렀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일을 당부하더군요. 부족의 보물을 찾는 일을 계속 해달라는 것돠 또 하나의 일을 알아 봐 달라고 했습니다.”
“부족장이 뭘 지시했는데?”
“이건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은 것이지만…… 형님께는 말씀드려야겠군요.”
카이로는 파천에게 영언으로 전달했다. 그만큼 기밀을 요하는 중차대한 일이란 의미였다.
[부족장은 몇 가지 의심되는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메사를 죽인 시점과 그들의 부족이 멸망한 시점은 거의 일치합니다.
메사가 아레나에게 맡겨 라훌라족에게 갖다 주라고 한 물건의 행방은 그 후 묘연해졌죠.]
[그건 어떻게 알게 됐지?]
[벵골이 말해 준 건이라 했습니다. 벵골이 그 사건을 캐내고 있었다더군요.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는 벵골이 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 또한 모르면서 허풍을 떤 건지도 모르죠.]
[그럼 라훌라족의 멸망이 그 물건 때문이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또한 메사를 죽여야 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부족의 보물을 탈취한 자가 그 사건의 배후일 거라 했습니다.]
[그 모든 걸 네게 담당시켰단 말이냐?]
[현재 칠대부족은 어디 할 것 없이 보물을 분실했습니다. 그것이 없는 한 칠대 부족은 외부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지?]
[일종의 족쇄죠. 카란의 권의를 인정해 그들 스스로 채운 족쇄. 보족장은 그것이 있어야만 부족원들의 외부 활동에 대한 지시를 내릴 수 있습니다. 부족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이 없이는 외부 활동을 명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발이 묶인 거죠. 예전에는 그들 스스로 피해 왔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진 겁니다.]
파천은 카이로의 말을 듣던 중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용죡의 보물오 인해 마이어가 겪었던 사건이 이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그 일의 전모에 대해 카이로에게 설명을 했더니 그가 되물었다.
[그럼 용족의 보물이 벨거서스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냐, 현재는 오대전사단주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들었다.]
[으음, 그게 알려지면 용족이 가만 안 있을 텐데.]
파천은 마이어가 겪었다는 일과 이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도 한 가지, 매소 뮤린에서 아난다의 친구로 보였던 영자가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
그는 마이어에게 칠대부족의 보물을 돌려 주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 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정보를 지니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어쩌면 아난다 또한 상당히 접근해 있을지도 모른다. 라미레스, 아난다와 함께 상의해 봐야겠구나.’
그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후 파천은 페리칸에게 화제를 돌렸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 해줄 수 있겠느냐?”
“부탁이라뇨. 그냥 명령만 내리십시오. 무엇이든 명하신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역시나 충직한 페리칸. 파천은 페라칸이 듬직하기 그지없었다. 별 의미 없이 스쳐 가는 짧은 인연일 수도 있는, 영자라면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 인간세의 만남. 그는 그것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것이다.
페리칸 역시 파천과의 현재 과계가 영원히 지속될 거라 장담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의 마음은 이렇게 행동하라고 시키고 있었다. 이런 결정에 대해 작은 거부감도 들지 않았고, 되려 마음이 편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의지하고 따라 본 기억이 없었던 페리칸에게 파천은 특별한 의미를 주는 존재였다. 그걸 거부한다는 건 페리칸이 소중하게 여기는 그간의 기억까지 외면하고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파천을 지존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마음으로 전해졌다.
“좋다. 그럼…… 말하지. 페리칸,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내키지 않는다면 굳이 종용하지는 않겠다. 심사숙고해 보고 결정을 내려라.”
“무슨 일인데 그렇게 뜸을 들이십니까?”
페리탄은 직감적으로 어려운 부탁임을 깨달았다.
“이건 결정된 사안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슐탄의 대리자가 에이어 단주가 이기기 힘든 상대라면…… 이쪽도 대리자를 내세우기로 했다. 그 일을 네가 해줬으면 하는데……“
페리칸보다도 카이로가 먼저 파천의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형님, 페리칸과 전사들과의 관계를 아실 텐데…… 그런 명령을 내리시다니…… ”
카이로는 페리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아는 페리칸이라면 아무리 파천의 명령이라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페리칸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잘라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파천의 눈을 똑바로 보며 그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카이로가 그런 페리칸의 마음을 알아채고 선수를 쳤다.
“아무래도 다른 적임자를 찾아보는 게 낫겠군요. 솔직히 나라도 그리 썩 내키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껏 페리칸에게 한 행동을 되짚어 본다면…… 그런 걸 기대하는 전사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그렇지.”
일이 틀어졌음을 눈치 빠른 파천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어색함을 감추며 얼른 다른 얘기를 꺼내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만약을 대비해서 꺼낸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 자, 자 우리 이런 무거운 얘기는 그만두고 그 동안의 회포를 풀 겸 술이나 마시자.”
카이로가 그런 파천의 노력에 힘을 보탰다.
“하하, 그러죠. 페리칸 너도 병을 들어라. 간만에 목을 축여 보자꾸나.”
페리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축 쳐진 어깨를 파천이 탁 치며 가볍게 말했다.
“자, 뭐해? 어서 병을 들지 않고.”
페리칸은 한 손에 쥐고 있던 병을 쳐들었다. 그의 얼굴을 본 파천의 심정은 개운치 않았다.
‘그렇게도 쌓인 게 많았던가? 몰랐구나, 페리칸. 미안하다. 그런 부탁을 해 네게 부담을 지우다니.’
파천과 카이로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무진장 애썼다. 그때다.
“지존.”
묵직한 페리칸의 부름에 파천은 시선을 마주쳤다. 빤히 쳐다보는 페리칸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지존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인간세에서 제가 그런 일들을 겪지만 않았어도 이런 갈등은 없었을 겁니다. 단호히 거절했겠죠. 천상계에서 아라한으로 있을 때도, 무한계에서 원하지 않았지만 전사로 불렸을 때도 전…… 항시 혼자였습니다.
라미레스 님니아 여기 카이로와의 인연도 날 달갑지 않게 여기던 전사들에게 쫓겨 지치고 힘들때 이뤄줬죠.
그 다음 마지막 안식처로 메덴을 선택했지만 그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불꽃 연못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죠.
그때 저는 후회했습니다. 날 공동의 적으로 지명하고 죽이고자 덤벼들었던 전사들. 그들을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했던 제 자신을 후회했습니다. 그들을 깡그리 쓸어 버리지 못하고 도망 다녔던 일을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그때 전 맹세했습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동안 날 힘들게 하고 외롭게 했던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수련자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온갖 패악을 일삼는 일부의 수련자들을 살려 두지 않겠노라고. 그들이 누리던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버리겠다고.
그러다 저는 인간세의 인연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그리 쉽게 가질 수 없는 행운이 제게도 온 것입니다. 다시 영체를 입고 그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앙갚음을 위해 현재의 소중한 것들을 잃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전 그리운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지존을 다시 대 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들떠 지난 일들을 모두 잊었습니다. 아니 애써 잊기로 한 것이죠.
왜인 줄 아십니까? 제게 남은 마지막 하나까지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께는 우리의 과거를 짓이겼고 미래도 빼앗을 것이란 걸 알기에 그들과 싸워야 함은 당연하지만 다른 이들은 틀립니다.
내가 피하면 그만이니까. 더 이상 연연하지 않으면 피할 수도 있으니 그러기로 했습니다.
만약 마계가 더 이상의 침략을 결행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전 그들에 대한 원한마저 묻어 둘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게 그들 모두를 용서하라고 하는 건…… 그들을 대신해 내 힘을 사용하라 하시는 건 아직은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옹졸하다고 말씀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용서를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지존께서…… 명령하신다면…… 그것이 지존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전 합니다.
지존, 차라리 명령해 주십시오. 그럼 전 그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전사들을 위해 몇 번이고 죽어라 명하신다 해도 전 그래도 할 겁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갈등 없이 고민 없이 나설 수 있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페리칸의 음성은 비록 물기 없이 건조했으나 그 내용만은 그렇지 않았다. 파천은 강한 압박에 가슴이 조여 오는 걸 느꼈다. 명해 달라. 감정의 조건이나 이성의 판단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니 당신의 뜻으로 날 움직여 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그런 말을 해야 할 정도로 페리칸에게는 거부하고 싶은 일이란 의미였다. 파천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빤히 바라보는 페리칸의 뜨거운 시선을 더 이상 담담히 맞받을 수가 없었다.
“페리칸.”
“네.”
“이제는…… 널 위해서 살아라. 네 삶을 네가 결정해라. 난 명령할 수 없다. 네가 여전히 날 지존으로 생각하는 걸 나 또한 존중하기에 달라지지는 않겠으나, 네가 그걸 원치 않는다면 난 언제든 네게 날 맞출 준비가 되어 있다.
힘들다면 하지 마라. 그걸 알면서 어찌 명령을 내릴 수 있겠느냐? 전사들이 다른 세력의 앞잡이가 된다 해도, 달리 방책이 없다 해고 나 또한 그것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있다. 아마도 너와 일치 하는 것이겠지.
언제 우리가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원하는 걸 이뤘더냐? 까짓 하는 데까지 해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부담 갖지 마라. 자, 그런 건 탈탈 털어 버리고 우리 술이나 마시자. 카이로, 뭘 그리 멍한 시선으로 쳐다보느냐?“
“네, 네? 아, 아닙니다.”
카이로는 말을 더듬으며 병을 꽉 움켜쥐었다. 셋은 무겁게 짓누르는 부담감을 털어내듯 부르를 목 안으로 들이켰다. 금세 그들의 얼굴을 밝아졌지만 여전히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아직까지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 암울한 흐름은 그들 모두를 불안하게 했다. 무엇 하나 속시원하게 장담할 희망의 여건이 충족되지 않고 있었다. 근 미래에 닥칠 불안 요소는 현재의 조건들 속에 웅크리고 있다. 잠시의 태만이 모두를 더 이상은 전진하지 못하게끔 절망의 족쇄로 채워 버릴 수도 있었다.
그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답을 아는 이 또한 없기에 불안한 것이다. 현재의 작은 결정이 내일에 어떤 변수로 다가올지 모르니 불안한 것이다.
그걸 부정이라도 하듯 부르 병을 잡은 손들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확신할 수 없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듯이.
치앙마의 친위대원들은 한 곳에 모여 있었다. 하룬의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신전이었다. 무한계 곳곳에는 이런 이름도 없는 허술하게 지어진 신정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외형은 그럴 듯했지만 세월의 풍화에 방치된 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석전은 영자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임을 쉽게 알게 해준다. 으레 신단을 요란하게 장식하는 그림들이나 화려한 집기들도 보이지 않으니 그야말로 영락없이 버려진 상태였다.
간혹 지나던 수행자들이 머물렀음직한 곳에 네 명은 모여 있었다. 원래는 신관이 앉아야 할 가장 안쪽의 상석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수련자 케로이가 죽었다.”
“이제부터 저희들이 할 일은 뭡니까?”
“아직은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이곳에서 접선할 자들이 있다. 우리의 임무는 그들과 함께 하룬의 전사평의회를 혼란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평의회 지도부는 별 어려움 없이 예정된 인물이 맡게 될 것이다. 그가 전권을 장악해 메덴으로 진격 명령을 내릴 때까지 우리의 임무는 계속된다.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생존을 위해 지원되는 병력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운이 좋다면…… 살아 남을 것이다 만약 그 전에 발각된다면 우리의 치앙마의 친위대로 죽을 것이다. 이 점을 잊지 마라. 우리는 본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모품에 불과하다.”
“그런 건 강조하지 않으셔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접선자를 만나야 할 이유라고 있습니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지금껏 여기서 암약하며 조사해 좋은 대상이 있을 터. 그들과 우리가 동시에 전사단을 해집는다면 혼란을 기도하는 건 더 용이할 테지. 또 한가지 이유는 본대에서 지시한 걸 그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우리는 발각되어 산화한다해도 그들은 이후에도 여기 남아 해야 할 일이 많다.”
치앙마의 친위대원 넷이 신단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그들은 케로이의 죽음을 예정된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사건을 메덴에 알리고자 다급해 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메덴으로 복귀해 케로이의 죽음을 알리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습니까?”
“그건 염려 마라. 지금쯤 치앙마에게도 소식이 들어갔을 거다.”
“역시…… 그렇군요.”
“상부에서 하는 일이다. 그만큼 치밀하겠지. 그런 건 우리가 염려 할 게 못 된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나누던 대화가 한동안 뜸해졌다. 그러던 그들이 움직인 건 동이였다. 하나는 신단의 벽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그들이 부리나케 몸을 숨긴 건 침입자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제법 훈련된 놈들을 보냈군.”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숨지 않아도 된다. 본대에서 어떤 소식을 가져왔는지 말하라.”
스스스스
모습을 감췄던 자들이 한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아직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사방을 향해 방비할 수 있는 대형으로 모여 있었다. 서로 등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 있소?”
친위대 중 지휘관이 말했다. 거기에 대답하는 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그건 알 것 없다. 본대에서 지시한 게 있을 텐데?”
“그렇소. 그러나 신분이 확인되기 전에는 발설할 수 없소.”
“신중하군. 좋아, 말해주지. 난…… 프뉴마 제3지원대 소속이다.”
“지위는 어떻게 됩니까?”
“제테오.”
‘제테오라면 나보다 두 단계나 위다. 더군다나 프뉴마 군이라면 우리 에레츠보다 상위다.’
“이름까지 말해야 내각 듣고 싶은 걸 들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야 물론입니다.”
친위대원들은 좀 전보다는 하결 조심하는 태도였다.
“너희들이 전부인가?”
“아닙니다. 한 분이 더 오셨습니다. 앞으로 그 분이 하룬의 지휘권을 행사하실 겁니다.”
“뭐야? 누구 마음대로. 여기는 오래 전부터 우리 제3지원대 관할이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본대에서 지시한 걸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하룬은 에레츠의 본대에서 직접 관리합니다. 파견된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으음.”
“메덴의 특사로 파견된 수련자 케로이의 지휘관께서 직접 척결하셨습니다. 차후 그 분의 명령이 있을 시에는 차칠 없이 협력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으음…… 할 수 없군. 좋다. 그 자의 지위는?”
“이건…… 제테오 님을 위해서 드리는 충고입니다만…… 그 분을 대면하게 되면 공경스런 태도를 보이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뜻이지?”
“그 분은 명령 계통을 상당히 따지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해 아래 직급인 수하 불경을 참고 넘어가는 분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 분의 직위는 그노시스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야? 에레츠의 그노시스가 집접 왔다는 말이냐? 별일이군. 메덴을 총괄하고 있어야 할 작 여긴 왜?”
“그동안 변화가 있었습니다. 현재 메덴을 총괄하시는 분은 에레츠의 그노시스에서 우라노스의 그노시스로 바뀌었습니다.”
“놀…… 랄 일이군. 우라노스 군에서도 드디어 활동을 시작했다는 말인가?”
“제가 알리고 마계의 일을 전담했던 프뉴마의 그노시스께서도 하기오스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본대로 귀환하긴 걸로 들었습니다.”
“으음, 꽤 많은 변화가 있었군. 그렇다면 현재 마계의 일도 우라노스에서 전담하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마계는 그노시스의 상위계급인 바시류스로 조정되었습니다.”
“모를 일이야. 마계야 이해가 되지만 여기에 그노시스급을 파견하다니. 이해할 수 없군.”
“그만큼 하룬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란 뜻이겠지요.”
“다른 지시 사항은 없었나?”
“그노시스께서 제3지원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와 너희들이 함께?”
“네.”
“너희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거치적거릴 게 분명해. 우리와 너희는 개별적으로 작전을 수행한다. 그 동안 진행시켜 온 것이 있으니 너희가 지금 단계에서 합류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명령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노시스 님도 이해하실 거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대로 하룬을 뒤집어 놓도록. 다른 특별한 게 없으면 난 이만 가겠다.”
“제테오 님, 그건 곤란합니다. 그노시스 님을 다시 만날 길이 없습니다. 한 번 내려진 명령은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러시면 저희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이런……”
더 이상의 반응이 없음을 깨달은 친위대 지휘관은 망연자실했다.
그는 에레츠의 아홉 계급 중 제8계급에 속하는 싸나토스였고, 그가 데려 온 수하들은 가장 하위직급인 이아오마이였다. 그때까지도 부동자세로 입을 다물고 있던 수하 중 하나가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할 수 없지. 우리는 우리대로 움직여 볼 밖에. 그나저나 프뉴마의 제3지원대가 한바탕 뒤집어질지도 모르겠는걸?”
“그노시스께서는 홀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니 별다른 일 없이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 대화를 모두 듣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그 분의 명성은 괜히 생겨난 게 아니란 말이다.”
그는 언젠가 직속 상위자인 헤데오스에게 메덴의 책임자인 그노시스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프뉴마의 제4계급인 다이모니온이 에레츠의 다이모니온을 부하 다루듯 하며 망신을 주었다.
당시는 에레츠와 프뉴마의 다이모니온 이상급이 모두 모인 수뇌회의였다. 다른 그노시스들과 다이모니온이 모두 함께 모인 자리였음에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프뉴마의 그노시스를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었고, 이에 화가 나 덤벼드는 상대를 반쯤 죽여 좠다고 한다. 그는 에레츠와 프뉴마를 통털어 그노시스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라고 했다.
‘어쩌면 웬만한 바시류스들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신단 가까이 모여 몇 가지를 더 상의하고 곧바로 신전을 떠났다.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살인 행각이 좀 뜸해지나 싶어 모두가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방비하고 있었음에도 불시에 시작된 급물살은 하룬을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정신을 수습할 여유마저 주지 않으려는 듯 급하고 강하게 모두의 혼을 일시에 빼버린 것이었다.
대규모 적의 내습이 아니라고 방비하기 쉬운 건 아니다. 오히려 내부로부터 뒤흔드는 게 대다수의 경우엔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 더군다나 여러 성향이 뒤섞여 효과적으로 대응할 만한 조직적이고 단단한 체계를 지니지 못한 전사들이었기에 혼란은 시간이 지나며 더욱 내부의 분열을 부추겼다.
구심점이 없는 결과였다. 원활한 지휘 계통이 없으니 일시 불란하게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신속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자기 일이 아님에도 발 벗고 나선 선발대와 전사 연합체의 중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오대전사단들이었다.
지금까지는 흔적조차 없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면 이번의 경우는 종전과 양상이 달았다. 그들의 흔적은 도처에서 발견되었고 심지어 무리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빈번했다.
눈과 귀가 아무리 많아도 흉수를 잡을손은 부족했다. 오대전사단은 흉수의 뒤꽁무니를 쫓기 바빴다.
그들과 달리 선발대는 하룬의 중심 지역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중심권에 포진한 채 일정 구획을 나눠 서서히 좁혀 가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특정의 기운을 무리 가운데서 분리해 주목하지 않으면 흉수는 가려 낼 수 없다. 최소한 현장을 포착하거나 사건 발생 지역을 포위하고 있지 않으면 금세 흉수는 무리 중에 뒤섞여 버리는 것이다.
대신 특정 기운을 흉수로 지목하고 구별이 가능해지면 라미레스를 비롯한 강자들의 손길을 벗어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파천은 이왕 나선 김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는 라미레스와 페리칸, 아난다, 브라함과 페드로를 중심으로 선발대를 나누었다.
넓게 산개했다가 좁히는 방식을 택하며 적들의 퇴로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서로 인접한 선발대원들간에 유기적으로 협조하니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효과적으로 적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제일 먼저 포착된 건 아난다와 앙샹뜨가 포진한 구영이었다. 그 반대편은 페리칸과 카이로가 버티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끔찍한 살인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엔 대량 학살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부르르 한 손에 들고 막 주점에서 나와 대로를 걷고 있던 한 무리의 전사들이 기습을 당했다. 그들은 뭐가 어찌된 연유안지도 헤아리지 못한 채 싸늘한 시체로 화해 버렸다. 그러나 그건 근처에 있던 전사들에게 목도되었고 주변은 금세 포위되었다.
그럼에도 흉수는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포위망을 뚫을 생각도 없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전사들을 향해 무지막지한 살수를 전개했다.
잠깐 동안 벌어진 일이 없음에도 벌써 스무 명이 넘는 전사들이 변을 당한 뒤였다.
그때 아난다와 앙샹뜨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둘은 적의 기운을 포착한 채 곧바로 공격을 감행했다. 아난다와 앙샹뜨가 향한 곳은 서로 달랐다 그것으로 보아 흉수는 하나가 아닌 여럿인 것 같았다. 아난다의 손에서 시작된 프리즈마가 한 공간을 격타하는 순간이었다.
퍼퍼퍽
선명하고 또렷한 파육음이 둘러선 전사들에게 들린 것이 시작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의 형체를 그들만은 보고 있는 듯 망설임 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에 보이지 않던 영체들이 전사들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상대는 단 네 명에 불과했다. 기이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표면이 출렁겨렸다. 그들은 다름 아닌 치앙마의 친위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아난다와 앙샹뜨와 합곡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서로 등을 맞대고 수비에만 전념하는데 힘에 벅찬 듯 동작이 점차 둔해져 갔다. 어느새 그곳엔 페리칸과 카이로까지 나타났다.
둘은 사방을 둘러보며 예의 주시할 뿐 아난다와 앙샹뜨를 도울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실상 아난다와 앙샹뜨는 적을 곤경에 빠뜨리긴 했지만 결정적인 살수는 자제하고 있었다.
그들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살아 있는 채로 사로잡아야 했다. 죽은 이는 아무것도 증언해 줄 수 없고 조사래 볼 수도 없다.
아난다의 손에서 수십 개의 프리즈마 고리가 네 명의 친위대원들을 향해 날았다. 원형의 고리가 이지러지며 큰 원이 되더니 위로부터 아래를 향해 내리꽂혔다. 큰 원은 정확하게 네 명을 포위하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건 금세 작아지며 그들을 포박래 가기 시작했다.
“모두 흩어져!”
하나가 외친 HFL에 그들은 전력을 기울여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그때 앙샹뜨는 그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어느새 진로를 막아선 채 그들의 머리 위에서 아래쪽을 향해 막대한 힘으로 내리눌렀다.
콰콰콰쾅
앙샹뜨의 몸이 들썩이는 걸 아난다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위로 퉁겨지는 걸로 보아 조금 벅차 보이는 듯도 했다.
아난다는 도움을 줄 요량으로 아래쪽으로 위를 향해 손을 떨쳤다. 막대한 힘을 실은 강하고 빠른 프리즈마가 하늘을 뚫을 듯이 힘차게 솟아올랐다. 그건 눈으로 분명하게 확인이 될 정도로 선명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퍼퍼퍼퍽
네 명의 친위대 갑옷 위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끄억.”
그들 중 단 하나만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나머지는 주춤하는가 싶더니 다시 도주를 감행했다. 아애로 떨어진 놈은 어느새 카이로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페리칸이 외쳤다.
“하나씩 잡도록 하죠.”
아마도 제안이었을 것이다. 아난다나 앙샹뜨가 허락을 하든 그렇지 않든 페리칸은 개의치 않는다. 그는 제일 가깝다고 판단되는 놈에게 손을 뻗쳤다. 그 순간이었다. 주변에서 늘어서서 일시 구경꾼이 되어 버린 전사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지는 전경이 펼쳐진다.
“어딜 가려고? 이리 오너라.”
손을 뻗치고 있을 따름이었는데 공중에 떠 있던 하나의 영체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자는 아주 느릿하게 페리칸이 펼친 손바닥을 향해 끌려 들어갔다.
“으으으……. ”
어지간히 용을 써보는 것 같은데도 앞으로 나가기는 커녕 끌려 가는 속도만 더 빨라졌다.
“컥.”
목줄기를 잡힌 놈은 곧바로 몸을 틀며 페리칸을 공격하려 했다. 한 손으로 뒷 목줄기를 틀어쥐고 다른 한손으로 적의 갑옷을 쓰다듬듯 스쳤다.
파파파팟
아난다의 타격에도 흠집조차 없던 갑옷의 이곳저곳이 벌레 먹은 나뭇잎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렸다. 그 순간 페리칸의 손에 잡혀 있던 자는 언제 그렇게 팔딱 그렸는가 싶게 축 늘어져 버린다.
아난다 역시 한 명을 막 쓰러뜨리던 참이었다. 투구쪽의 윗부분이 활짝 열려 있는 게 수박꼭지를 칼로 도려놓은 것 같다. 이번엔 앙샹뜨의 차례였다. 가까이까지 접근한 둘은 서로간의 빠른 공수를 전환하며 투덕거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앙샹뜨가 상대보다 여유가 넘쳤다.
그 와중에도 다른 셋이 제압된 걸 확인한 앙샹뜨의 파라슈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손몬을 중심으로 몇 바퀴나 휘돌아 갔다.
소용돌이치는 프리즈마가 적의 갑옷에 모조리 격중되는 순간이었다. 방비하려고 했던지 두 손으로 뿜어낸 기운을 모조리 비껴내며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결과였다.
퍼퍼퍼퍽
무방이 상태로 격타당한 놈이 춤을 추듯 펄쩍펄쩍 뛴다. 고통의 신음성은 흘렸지만 완전하게 기력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멀쩡한 갑옷을 보며 앙샹뜨가 그 기능성에 대해 안심을 했는지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좀 과도하다 싶은 힘을 쏟아낸다.
팡
공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파라슈에서 새파란 불꽃이 번쩍하더니 어찌할 틈도 없이 상대의 상체 정중앙을 강타했다.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는 적을 앙샹뜨는 손쉽게 제압했다.
그녀는 적의 상처 부위를 살피고자 상채를 뒤집어 보았다. 혹시나 죽었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컸다. 그랬더니 웬걸, 여전히 멀쩡하지 않은가.
‘갑옷의 제질이 뭐길래 이렇게 부드러우면서도 질기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막 품으며 감탄하던 앙샹뜨의 눈에 구멍이 숭숭 뚫린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페리칸의 옆구리에 끼워져 축 늘어져 있는 자를 발견한 것이다.
‘역시 페리칸이란 건가? 그 명성이 헛된 게 아니었어.’
주시해 오는 앙샹뜨의 시선을 의식한 페리칸이 그녀를 마주본다.
앙샹뜨는 무안해 하며 얼른 시선을 외면했다.
“자, 이들을 어서 전사들에게 넘기도록 하죠.”
“그럴 것 있겠습니까? 우리가 조사해 보는 게 나을 듯싶은데요.”
카이로는 사로잡은 자들을 전사들에게 넘긴다는 게 영 마땅찮게 생각되었다. 그건 페리칸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지존께 데려 가겠습니다.”
아난다는 페리칸의 고집스런 등을 향해 달리 거부의 뜻을 밝힐 수가 없었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뒤의 정적처럼 다시 하룬은 평정을 되찾았다. 선발대의 활약으로 인해 적은 십여 명이나 발각되었는데 그중 절반만 사로잡았고 나머지는 죽었다.
잠시 잠잠해졌지만 이걸로 적이 완전하게 소탕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들을 사로잡는 과정에 선발대원 몇이 부상을 입었으며 적의 열배가 넘는 전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비교적 중심 지역에서 떨어진 곳에서도 비슷한 살인 행각이 벌어 졌는데 그들 중 체포된 이는 하나도 없었다 아난다 등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제외하고는 에이어 전사단의 포위망에 갇혀 포로가 된 자가 유일했으며, 그들 역시나 중심 지역에서였다.
혼란의 와중에 전사들은 일치와 단결과는 거리가 먼 허술한 작태를 보여 지도부를 실망시켰다.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이런 약점은 생각보다도 더 큰 듯해 수뇌부를 불안케 했다.
사로잡힌 다섯은 완전하게 제압된 채 대전으로 끌려갔다. 라미레스가 약간의 손을 써놓았기에 안심하고 조사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힘 조차 상실한 채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긴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을 것이다.
에이어의 질문에 시종 침묵으로 일관하던 자들 중 하나가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큭큭큭……”
바닥에 대어져 있는 적의 얼굴에 누군가의 발이 올려졌다. 슐탄이었다.
“고통 없이 죽길 원한다면……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파천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리 보기 좋은 전경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지그시 발에 힘을 주던 슐탄이 그것도 모자라 발바닥을 비비적거렸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넌 누구냐? 어디 소속되어 있으며 누구의 지시로 이런 짓을 했나? 네 배후가 누구인지 실토해라.”
다시 영체가 회복된다는 걸아는 영자들게도 죽음은 고통이요, 두려움이었다. 슐탄은 입을 여는 대가로 살려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빨리 죽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것을 그리 큰 유혹일 수 없었다.
“안 되겠군.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해줘야겠어.”
고문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만하시죠.”
에이어는 상대를 존중해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슐탄의 얼굴에 차가운 냉기가 한 겹 깔린다.
“이놈들은 우리의 동료들을 죽인 적이오.”
“그래서요?”
“입을 열게 만들겠소. 이놈들의 정체가 뭔지 배후가 누군지를 모조리 캐내야 하오.”
“그런 식으로 해봐야 우리가 알고 싶은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에이어 님은 그럼 달리 마땅한 방안이라도 있다는 말씀이오? 예의를 갖춰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할 것 같소? 적당히 만져 주면 다 불게 되어 있으니…… 직접 할 요량이 아니시라면 잠자코 지켜나 보시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전사단주들은 두 후보들 간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때 롬멜이 말했다.
“이들을 사로잡아온 건 선발대요. 의향을 물어 보지도 않고 함부로 다루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듯싶군요.”
“우선적인 권리를 행사하겠다면 물러나야겠지만 단지 그렇게만 볼 게 아니지 않소? 선발대는 손님이오. 객이 주인을 제쳐 두고 도둑을 심문한다는 건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결국 슐탄은 자신의 의도대로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슐탄의 전사들이 나서서 포로들이 걸친 갑옷들을 모조리 벗겨냈다. 그런 연후 그들은 프리즈마로 채찍을 사용하듯 휘둘렀다.
촤악
포로들 중 비명을 지르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부릅뜬 눈은 그들이 살아 있으며 충분히 고통스럽다는 걸 여실하게 표현하고 있었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촤악 촤악
슐탄의 수하들이 휘두르는 채찍소리만이 요란할 뿐 장내는 거친 호흡소리조차 흘러 나오지 않는다. 포로들이 안쓰럽게 바라보는 이들은 전사들 중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포로들이 이렇게 다뤄지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며 더 잔인하게 고문하지 않는 게 불만인 듯했다.
파천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생사를 건 전쟁 중에 적에게서 유익한 정보를 얻어내고자 고문을 한다고 해서 비난할 건 못 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혀 효과가 없다면 굳이 고집스레 계속 해 나갈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여러 시선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말이다.
“그만 두시죠. 이런 식으로 알아낼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계속해라.”
슐탄은 파천의 제지에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슐탄의 옆에 바짝 붙어 귓속말을 하던 슈트레가 파천이 무시당하는 게 흡족했던지 가는 미소를 보내 왔다.
“그만두라 했소.”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 더 심하게 다뤄라.”
슐탄의 태도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에이어를 비롯한 오대전사단주의 낯빛도 일그러지고 단주들 중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슐탄의 시선은 꿈틀거리는 포로들의 몸짓에 고정되어 흔들림이 없었다.
슐탄의 수하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포로들의 피부를 절개해 갔다. 발끝에서 시작해 복부를 지나 가슴까지 붉은 선을 그어 갔는데 간신히 피가 맺혀 고일 정도로만 벗겨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 것 같았다. 채찍으로 맞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프리즈마의 열기가 피부 속을 헤집는 고통과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심리적인 효과까지 더해졌으니 오죽하겠는가.
파천은 슐탄의 얼굴에 즐기는 듯한 미소가 걸리는 걸 보고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가 막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더 이상은 지켜 볼 수 없군.”
“라미레스가 나섰다. 그는 사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슐탄을 제지하고자 나선 건 파천이 더 이상 개입하면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전사들 중 상당수는 아직까지도 파천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생령주제에.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슐탄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봐, 슐탄. 너무 나대는 것 같은데…… 그만 두지. 보기 싫은 꼴을 참아주는데도 정도가 있는 것 아닌가?”
기라성 같은 전사단주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였다. 슐탄은 어쨌든 지도자로 추대된 후보의 신분이었다. 그런 그에게 하는 언사치고는 심한 감이 이었다.
하긴 라미레스가 그런 걸 가리고 따질 위인은 아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자신이 당하는 입장이 되자 슐탄 역시나 냉정을 잃고 얼굴이 벌개 졌다.
“이런 방법만이 유일하다면 좀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혼자 즐기든가. 보아하니 그쪽에 취미가 있어 보이는데.”
라미레스의 입은 한 번 열리기 시작하자 막힘이 없었다. 누가 나서서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대전사단주들은 막혔던 속이 한꺼번에 뻥 뚫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드러내 놓고 표현 할 수는 없었던지 표정 관리에 애를 먹었다.
이때 슐탄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슈트레가 다소 흥분된 어조로 공박했다.
“너무 지나친 언사시군요. 전사평의회를 대표하시는 분입니다. 예의를 갖춰 주십시오.”
슈트레는 슐탄을 후보라 하지 않고 의장으로 결정된 것처럼 말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라미레스에 관한 일화는 전사들에게도 상당 부분 알려져 있었다. 그는 예전 수련자의 원탁에서조차 난동을 부린 적이 있을 정도로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무법자였다.
그런 그의 성미를 슈트레가 정면으로 맞서겠다 나선 것이다. 전사단주들은 좀 어이없어 했다. 당자인 슐탄조차 화가 났음에도 내색하지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거늘 겁 없이 슈트레가 용기 있게 나선 것이다.
상대를 생각한다면 어림없는 요기였음에도 충정의 기백인지 야심의 발로인지 슈트레는 당차 보이기까지 했다. 저러다 뭔 일 나지. 지켜보는 이들의 한결같은 기대 섞인 염려였다.
“예의를 갖춰달라…… 고 했느냐? 내 어떤 부분이 예의에 벗어난다는 건지 짚어 줬으면 하는데?”
“모르셔서 되물으시는 겁니까? 라미레스 님이 수련자이든 무한계를 쩌렁쩌렁 울리는 명성을 지니신 분이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사들 편에 서서 이해와 도움을 주시는 건 잘 알고 있고 또한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지켜야 할 선은 있는 겁니다.
전사평의회 의장이 되실 분께 손짓 하나로 부려대는 수하처럼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주제넘게 나서게 되었습니다. 노여우셨다면 용서하시길.”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그럼 한 가지만 되묻지. 예의란 건 쌍방 간에 서로를 존중해 줄 대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네가 말하는 전사평의회 의장씩이나 되실 분은 예의를 갖췄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내부 방침입니다. 사로잡은 흉수에게 고문을 가하든, 찢어 죽이든 라미레스 님이 참견하고 관여할 부분이 아닙니다. 그걸 갖고 예의 운운하시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지요.”
“호, 그놈 참 당돌하구나. 그런데 말야…… 넌 먼저 상대가 말할 때는 끝까지 듣는 습관부터 길러야겠다. 내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괜히 넘겨짚고서 날 이상한 놈으로 몰고 가지 마라. 네 말마따나 그건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지. 나 또한 그게 잘못됐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라미레스의 얼굴이 처음으로 변화를 보였다. 화가 난 것 같았다. 그제야 슈트레는 제 목숨이 아까웠던지 입을 꾹 다물었지만 이미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난 뒤였다.
“으음, 다시 얘기하지. 네가 존경해 마지 않는 슐탄이 전사평의회 의장으로 추대된 후보라면 여기 있는 파천은 선발대를 대표하는 대장이다. 선발대 대장의 간곡한 청이 있음에도 뉘 집 똥개가 짖느냐는 식으로 무시하고 홀대하는 건 예의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나?
파천을 무시하는 건 나와 여기 있는 선발대 전부를 무시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놈들을 너희가 잡았어? 그렇지 않아도 하는 짓거리들이 볼썽사나워 한소리 하려 했건만 별 같잖은 놈한테 훈계를 듣다니……
내가 평소답지 않게 왜 이리 말을 많이 하는 줄 아느냐? 귀를 씻고 경청하거라. 너희가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파천이 이 자리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없었다면…… 넌 벌써 내 손안에 죽었다. 네 말마따나 어차피 쩌렁쩌렁한 악명으로 이름이 높으니 너 하나쯤 더해진다 해서 달라질 게 무어겠어? 그렇게 생각지 않느냐?”
라미레스의 살기 어린 충고에 슈트레는 기가 죽어 시선마저 외면하고 있었다. 그는 불만이 있어도 입 밖으로 더 이상 뱉어 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도 가까스로 위험 수위를 밟고 있는 기분이었다.
라미레스는 파천을 가리켜 선발대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겪어 본 바지만 다른 이들은 이런 사정을 몰랐다.
라미레스는 인간세에서 영계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는 그간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의미만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슐탄이 라미레스를 진정시키고자 나선다.
“고정하십시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파천 님께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는 파천을 향해 머리를 살짝 숙여 보이기까지 했다. 물러섬이 빠른 자였다. 형세가 불리하다는 걸 판단하고 곧바로 몸을 굽히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알고 있다 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슐탄은 단지 야심만 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때로 수변을 돌아보지 않고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저돌적일 때도 있지만 그것 역시나 치밀한 계산 하에 결행되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 같으니 방법을 달리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달리 마땅한 방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죽음마저 두려움이 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모든 걸 체념한 채 스스로 살아 있음을 포기한 자들을 상대로, 회유한들 통할 것이며 윽박질러 본들 될 것인가? 회의적인 눈초리들이 파천에게 몰린 건 당연했다.
“라미레스, 너라면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처음에 적들을 사로잡았을 때 사방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처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게 한 건 다름 아닌 라미레스였다. 라미레스는 선발대와 오대전사단주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말했었다.
“라미네스, 너라면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처음에 적들을 사로잡았을 때 사방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처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게 한 건 다름 아닌 라미레스였다. 라미레스는 선발대와 오대전사다주가 모두 있는 자리에서 말했었다.
“누가 이들과 연관되어 있는지 알아 보자구. 케로이를 죽인 자와 이놈들 그리고 슐탄의 배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 그들이 원하는 건 메덴과 전사들 사이에 전쟁을 기정 사실화해 버리는 거겠지.
‘이들은 배후가 메덴이라 말할 것이다. 자, 라미레스. 이제는 네가 해결해야 한다.’
파천은 이후의 일을 라미레스에게 떠넘겼다. 라미레스는 잠시 파천과 눈을 맞추더니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해보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물론 있지.”
“어떻게 할 건데?”
에이어를 비롯한 오대전사단주들은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포로들 중 누구라도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메덴이 버티고 있다 거짓 발설이라도 하는 날에는 더 이상 그들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평의회 의장이 직권이라도 전체의 격앙된 감정을 진정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미레스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도 도박의 위험성을 줄여 주지는 못했다.
“난 이들의 의지를 얼마간 제압할 수 있다. 아무리 굳은 의지의 소유자라 해도 버텨내기 힘들 거다. 알고 있는 건 모조리 토해 낼 수밖에 없지.”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군.”
파천의 중얼거림처럼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슐탄이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문제라뇨?”
“생각해보게. 이놈들의 배후가 만약…… 이들이 사로잡힐 것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이들의 자백은 허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야.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거든. 잘못된 허위 정보로 인해 전사평 의회가 휘둘릴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따른다는 거야.
결국 이들의 잠재된 의식의 밑바닥까지 긁어내야 하는데…… 그건 쉽지가 않은 일이야.”
단주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라미레스의 말을 쉽게 이해했다. 에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차라리 무시하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괜히 분란을 조장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의장 선출 이후로 미루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그때 가서 다시 결정 내린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슐탄은 전혀 그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건 단지 가능성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할 수 있다면 시도해 보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현재 하룬에 들어와 있는 적의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뭘 원하는지 알아낼 수 있는데 굳이 미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두 가지 의견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팽팽하게 신경전을 펼친다. 두 세력은 반분되어 서로의 주장을 펼치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포로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신세를 비관하는 웃음소리는 아니었다. 어찌 보면 전사들 모두를 비웃는 듯한 여운이 담겨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 자에게로 향했다.
바닥에 반듯하게 누워 빙 둘러서 있는 전사들의 얼굴을 훑어 가던 포로의 얼굴이 어떤 기대감으로 가듯 찼다.
“한심한 놈들, 너희는 하룬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리 멀지도 않았다. 기다려라, 하룬에 지옥이 열리는 날을.”
“넌 어디서 왔나? 누가 이런 일을 시틴 거지? 배후를 밝히란 말이다.”
슐탄이 지른 소리가 대회의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곧 매덴의 수련자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온다. 특사로 보낸 케로이 수련자를 너희들은 암살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어. 원탁이 전쟁을 선언하고 전 수련자들에게 동원령을 내릴 것이다. 과연 너희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살고 싶은 자들은 즉시 하룬을 떠나라. 그것만이 살길이다. ”
슐탄의 눈 깊은 곳에서 악독한 빛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메덴이냐? 메덴이 널 보냈냐?”
대회의장에 모여 있던 전사들 모두는 숨죽이고 포로의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다.”
짧은 긍정. 더 이상 필요한 건 없었다. 그 대답이면 족했다. 그러나 오대전사단주의 얼굴은 이 순간 터질게 터졌다는 표정들이었다.
슐탄의 노성을 시작으로 전사들이 분노의 외침을 토했다.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었다. 어느 진영을 막론하고 동일한 감정을 표시했다.
“그럴 리가 없다. 네 놈은 메덴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시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구나.”
에이어는 나름대로 이 상황을 반전시켜보고 싶어 그렇게 몰아갔다. 그렇지만 화살은 곧장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에이어, 당신을 끝까지 메덴을 두둔하는구려. 그렇게도 메덴이 두렵소? 아니면 그들과 우리가 모르는 밀약이라도 한 거요?”
슐탄의 지적은 시기 적절해 금세 전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에이어와 오대전사단주 모두에게 보냈다.
이때 라미레스가 싱긋 웃더니 포로를 일으켜 세웠다. 제압되어 있어 꼼짝하지 못하고 있던 포로는 어안이 벙벙해 라미레스를 쳐다보았다.
“너는 어떻게 케로이가 죽은 걸 알고 있었지? 난 그게 궁금한데.”
그랬다. 케로이의 죽음은 아직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슐탄 자네는 케로이가 죽었다는 이놈의 말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사실로 받아들이는군. 에이어 단주!”
“네.”
“수련자 케로이가 죽었다는데…… 사실이오?”
“그건…… ”
에이어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고 서 있자 슐탄이 호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던지 에이어를 몰아붙였다. 이번엔 라미레스를 비롯한 선발대까지 겨냥했다.
“역시 포로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메덴이 보낸 특사가 죽었는데…… 그 사실을 숨긴 이유는 뭐요? 메덴과 싸우길 한사코 반대해 왔으니 암살했을 리는 없다고 믿고 싶지만…… 그리고 선발대원들 또한 별반 놀라는 눈치들도 아닌데…… 무슨 수작들을 부리고 있었던 거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분명히 밝혀야 할 거요. 혹시…… 앞에서는 메덴과 싸우길 피하자 해놓고 뒤에서는 그들을 끌어들여 이 곳을 점령하려 획책하는 건 아니겠지요?”
에이어는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슐탄이 지껄여대는 말을 듣고서 평소처럼 침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닥치시오. 그런 음해성 발언을 하다니. 날 어찌 보고 하는 소리요?”
다른 단주들도 가세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슐탄, 네가 후보로 나서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구나.”
유클릿이 참다 못해 그렇게 역정을 내고 말았다. 그러자 슐탄을 지지하는 단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오대전사단주를 몰아붙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속이냐?”
“진실을 가려야 하오.”
“에이어는 더 이상 후보 자격이 없다.”
라미레스와 파천은 옆에서 잠자코 그 상황을 지벼보고만 있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들이 어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난다 조타 지금의 상황은 속수무책이었던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는 다 틀렸다는 뜻이었따.
앙샹뜨가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켜 보려 나섰다.
“여러분들, 잠시만, 잠시만 진정들 하세요. 이렇게 흥분한다 해서 밝혀질 일이 아니잖아요? 모두 잠시만 냉정을 되찾았으면 합니다.”
비교적 멀찍이 떨어져 있던 페리칸이 카이로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역시나 단순해. 적의 한마디에 이렇게 쉽게 요동을 치니 이들의 적들은 얼마나 싸우기 편하겠는가. 그렇지 않나?”
그러게. 하긴 뭐 케로이가 죽은게 사실이고 메덴이 그 소식을 알았다면 이제는 정말 전쟁을 피할 수는 없겠는걸.“
작은 소리였음에도 이 소란 가운데서 그걸 들었던 걸까? 아니면 앙샹뜨의 호소 덕분이었을까? 소란했던 장내가 진정되는 기미를 보였다.
[라미레스, 이제 시작해.]
[알았다, 파천.]
라미레스가 심드렁한 소리로 말문을 열어 갔다.
“자, 자, 이제 할 만큼들 했으면 이쪽을 주목해 줬으면 좋겠군.”
슐탄의 은밀한 손짓에 상당수의 전사단주들이 오대전사단주들의 진영 뒤쪽으로 움직여 갈 때였따. 그건 포위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걸 눈치 롬멜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하든 말든 라미레스는 제 할 말만 이어 갔다.
“차근차근 다시 되집어 보자고. 이놈의 말대로라면 특사 케로이가 죽었다는 말인데……그를 과연 누가 죽였을까? 슐탄의 의심대로 오대전사단주가 그를 죽였다는 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고.”
슐탄이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까?”
“그럼 자네는 단주들이 그를 죽였다는 증거라도 갖고 있나?”
“지금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죽었다면 메덴이 움직일 건 뻔한 일인데, 모두에게 알려 대책을 세워도 불안한 판에 은폐하고 있었으니 그러는 것 아닙니까?”“그렇게 생각할 건 아니야. 왜냐면 그가 죽은 걸 메덴이 아직 모르고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는 게야. 그러니 굳이 드러내 일을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았겠지.”
“길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전사평의회의 이름으로 이번 일을 조사하겠습니다. 그들 다섯 단주들이 혐의가 없다는 게 드러날 때까지 그들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겠소. 이를 거부할 시엔 전사평의회의 첫 번째 공적이 될 영광을 부여해 주겠소. 할 말 있소?”
오대전사단주들의 낭패한 얼굴은 지켜보는 전사들에게 점점 굳은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를 지지하던 단주들까지 들을 돌릴 분위기였다.
이대로라면 슐탄이 평의회의장직에 오르는 건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에이어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가득했다.
“그럼 이놈들이 다섯 단주들의 수하들이고 메덴과 연계했으며 그간의 혼란을 기도한 배후다? 그런 건가? 슐탄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일단은…… 그런 의심을 지울 수가 없군요.”
이들을 선발대가 사로잡았을 때 제일 먼저 저들에게 데려 갔다. 그런데 왜 이들이 공개되는 일을 막지 않았을까? 자기들 무덤이 눈앞에서 파지는 걸 우두커니 손놓고 지켜보고 있었던 이유가 뭘까? 자네는 대답할 수 있나?“
“설사 저들이 이 포로들과 관련이 없다 해도 케로이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일단은 혐의를 벗을 수 없습니다.”
“그렇군. 자네 말이 맞아.”
아난다를 비롯한 선발대원들과 다섯 전사단주들은 슐탄의 말에 태연하게 긍정을 표하는 라미레스를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파천은 슐탄의 수하들이 회의장 안으로 은밀히 들어서는 걸 발견했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진행 시켜라. 이러다가는 말려들 수도 있겠다.]
파천의 다그침에 라미레스가 겸연쩍었던지 입을 쩍 다셨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모두 잘 들어라. 가정을 해보도록 하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매우 객관적으로 판단해 볼 때 이중에 배후와 연관된 자들이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정황을 살펴볼 때 에어어거나 슐탄이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겠지.”
“난 아니오.”
“그래 자네는 아닐 거야. 지금부터 하는 가정은 사실이 아니니까 오해들 없도록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만약 배후의 주재자라고 치지. 내가 원하는 건 메덴과 전사들이 싸우는 거야. 어느 쪽이 이기든 살아남은 세력 또한 망가져 있을 게 뻔하니까 그저 줍는 거라고 행각되거든.
그런 점에서 메덴이 보낸 특사는 매우 좋은 기회야. 잘하면 메덴과 싸움을 붙일 수 있을 뿐더러 눈엣가시 같은 온건파들을 한꺼번에 엮어 버릴 수도 있거든.
케로이가 전사들이 모여 있는 하룬에서 죽어 주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아. 그래서 그를 죽이기로 했고 죽였다. 그리고 죽어도 별로 아까울 것도 없는 수라 중 몇 놈을 희생해 그걸 증언하게 한다. 그러면 단순한 전사들은 길길이 날 뛸 거고 전쟁은 별 저항 없이 순조롭게 시작되겠지.
자, 여기까지가 배후다의 계획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군. 그런데 몇 가지 허점이 있어. 그 동안의 살인을 저지른 것 또한 그들의 짓일 거다. 그건 하룬의 전사들을 극도로 긴장시킬 의도였겠지. 예민해진 자들은 으레 극단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거든.
그런데 지금까지 있어 왔던 살인들을 조사해 보면 이놈들처럼 이렇게 쉽게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라미레스의 말에 모두는 정신 없이 집중해 있었다. 흥분하던 전가들도, 궁지에 몰려 있던 오대전사단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놈들은 아주 강하고 빈틈없는 놈들이야. 이놈들처럼 어리벙벙한 놈들이 아니란 말이다지.”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요?”
슐탄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아직도 모르겠나? 지금 저들 다섯 단주들이 궁지에 몰려 있으니 저들은 놈들이 노린 목표물들이지 흉수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 억지가…… 그럼 내가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흥분 가라앉히고 내말 끝까지 들어 줬으면 좋겠군. 모두들 어떤가? 여기서 관둘까, 아니면 내 의견을 좀 더 말해 볼까?”
“말해 보시오. 의혹이 있다면 풀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말은 의외로 슐탄을 지지했던 단주에게서 나왔다.
“좋아, 자네 마음에 드는군.”
시종 여유 있는 라미레스의 태도에 파천마저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이왕이면 평의회 의장이 강경하게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자면 좋을 거야.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기 쪽 인물이면 좋겠지.
허 참, 자네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인상 구기지 말라고. 이 정도까지 암중에서 모든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 자들이라면 생각보다 대단한 전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겠지.
그런데 오대전사단주들이 슐탄의 말처럼 그들과 연계되어 있고 하수인이라면 굳이 이런 복잡한 과정도 필요 없었겠지. 전사들 모두가 전쟁을 원하는데 가만 내벼려 둬도 되니까. 그렇다고 메덴이 특사를 파견하고 몰래 죽이는 방법을 써가면서까지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동원해야 할 이유가 있나?
결국은 양쪽을 이간질시키고 전쟁을 붙이려는 놈들은 전혀 다른 부류라는 말이야. 이놈에게 한번 물어 볼까? 오대전사단주가 너희들을 사주했나? 그런가?”
“그렇소.”
“봐, 이렇게 쉽게 긍정하지 않은가? 이놈은 참 멍청하군. 아무리 미리 지시를 받았기로서니 분위기도 헤아리지 않고 넙죽 대답하기는. 넌 아니라고 해야 이들이 더 의심을 받을 게 아닌가?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아직도 에이어가 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그들의 머릿속은 헝클어져 버렸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라미레스 님의 말씀은 단지 정황을 따진 것일 뿐 혐의를 벗을 수는 없고.”
“무슨 혐의?”
“케로이를 죽인 것. 그게 아니라도 그걸 은폐한 죄를 물어야 하고 조사는 해봐야 하오.”
“그러려면 자네가 평의회 의장이 되어야겠군. 그 다음엔 메덴과의 전쟁이고 말야. 아마 이후로는 더 이상의 살인 사건도 발생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나?”
“무슨 뜻이오?”
슐탄의 눈이 금세 불이라도 뿜을 듯했다.
“혐의만으로 평의회 후보를 죄인으로 몰아붙이겠다는 건가? 그럼 나도 자네를 의심하는데 함께 조사받아 보지 않겠나? 정황으로 봐서는 저들보다는 자네 쪽이 더 의심이 간단 말이야.”
“그 말 책임질 수 있소?”
슐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건 나중 일이고 먼저 저들의 혐의부터 벗겨야겠군. 이 봐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냐?”
“하하하, 보고 있자니 잘들 놀고 있군. 이러니 카포 님이나 나나 너희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메덴이 굳이 전쟁을 원한다고 생각하는가? 단지 우리는 너희들이 힘을 합해 무슨 일인가를 도모하려는 꼴을 못 볼 뿐이다. 그 정도로 불안하기 때문이지.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안으로 들어선 이는 놀랍게도 수련자 케로이였다.
“케로이, 살아 있어서 유감이군.”
“흐흐흐, 나도 죽어 주지 못해 유감이오.”
“자,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오대전사단주의 혐의는 일단 벗은 건가? 슐탄, 말해 보게.”
“저, 저럴 수가.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지 않겠나?”
라미레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슐탄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얼른 얼버무렸다.
“혐의는…… 벗었소. 적들의…… 술책에 놀아났으니 한심할 뿐이오.”
“흐음, 그렇지. 케로이 자네는 할 말 없나?”
“할 말이야 많지요. 보아하니 어떤 놈들인지 모르지만 숨어서 뭔가를 획책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대로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지요. 우리가 전사평의회를 인정할 수 없다는 건 여전하지만…… 곧바로 전쟁으로 돌입하지는 않을 거요.
모두들 들어라 솔직히 말하지.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놈이 말하더군. 내가 죽음으로써 전쟁이 시작될 서라고. 멍청한 전사들을 요리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말도 함께 했다.
정신들 차려! 저들은 흉수가 아니다. 하긴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늘 있어 왔던 일이니 별로 특이할 것도 없겠군.”
[라미레스,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정리해라. 더 이상 끌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
[알았다. 왜 들통 날까 봐 불안하냐? 염려 마라. 내가 모르겠는데 이놈들이야 더하지.]
라미레스가 전사들을 쭉 훑어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제 의장을 선출하는 일만 남았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메덴과의 전쟁은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야 한다. 두 세력이 부딪히면 무한계는 희망이 없다. 슐탄, 자네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지?”
“당연하오. 내가 의장이 된다면 곧바로 메덴으로 진격 명령을 내릴 것이오.”
“그렇겠지. 자네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무슨 뜻이오?”
“별뜻 없어.”
에이어와 오대전사단주들과 선발대는 죽었던 케로이가 멀쩡히 살아서 나타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에이어가 말했다.
“포로들은 일단 감금하겠소. 의장이 선출된 이후로 모든 걸 미루겠소. 슐탄 호보, 준비가 되는 즉시 알려 주시오. 대결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지요. 이놈들에게서 더 이상 알아 볼 게 없다면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역시나 나와 생각이 다르군요.”
“그렇군요. 그럼 나중에 봅시다. 이들을 감옥에 가둬라.”
에이어의 수하들이 포로들을 끌고 나갔다.
슐탄은 모든 걸 가직 뻔했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자 허탈한 심경이었다. 그는 라미레스와 케로이를 번갈아 보다 몸을 틀어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를 따르던 단주들 중 일부가 머뭇거리더니 회의장에 그대로 남았다. 슐탄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고 있다는 첫 번째 변화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에이어의 질문에 라미레스는 빙긋 웃기만 했다. 오대전사단주와 파천을 비롯한 선발대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는 케로이의 시신을 분명히 확인했었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 있으니 의아히 여기는 건 당연했다. 어쨌든 그가 살아 있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할 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긴? 부활한 거지, 하하하하.”
모두의 멍청해진 얼굴을 보며 유쾌한 웃음을 터트린 라미레스. 그와는 달리 파천의 얼굴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케로이도 자리에 함께 있었다. 파천이 말했다.
“슐탄이 적과 연관이 있음은 심증을 굳혔지만 물증이 없어. 좀 더 몰아붙여 볼 걸 그랬나?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소득을 얻었을지도 모르는데.”
“내버려 둬도 결국엔 모두 드러나게 되어 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의장직을 확보하는 게 시급해. 반격은 그 다음부터다.”
아난다는 케로이를 가만 살펴보고 있다. 무릎을 탁, 쳤다.
“정말 감쪽같군요. 하마터면 저도 속을 뻔했습니다.”
그는 어찌된 일이지를 알아챈 것 같았다. 파천은 눈만 멀뚱거리고 있는 자들의 의문을 풀어 줘야 될 것 같아 간단하게 말했다.
“케로이가 죽은 건 모두가 아는 일일테고, 아그립바가 잠시 대역을 한 것뿐이다.”
그제야 의문이 해소된 너울이 기가 찬 표정을 했다.
“숨기지 않고 오히려 강수를 둬서 위기를 모면한 거군.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지?”
페리칸이 싱긋 웃었다. 앙샹뜨도 감탄성을 연발했다.
“제2, 제3의 계속될 적의 움직임을 미리 봉쇄해 버린 효과를 노렸군요. 결국 이렇게 된 이상 웬만한 일로는 더 이상 음해를 하지 못 할 테고 결국 의장 선출 때까지 시간을 확보한 거네요.”
그렇지만 이 모든 건 단지 미봉책에 불과했다. 메덴과의 전쟁을 억제할 영구적인 수단은 되지 못한다. 라미레스가 협정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에어어가 의장이 된다 해도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파천의 얼굴이 좀체 펴지지 않는다. 라미레스는 그런 파천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능청스런 연기를 펼쳐 보인 아그립바를 칭찬하기 바빴다.
“이놈 아주 그럴 듯하게 잘했다. 나도 착각할 뻔했어.”
“이 정도야 뭐…… ”
아그립바는 라미레스의 칭찬이 기뻤던지 얼굴에 장난스런 웃음기가 가득했다.
에이엉와 단주들은 선발대의 도움이 너무도 고마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심정이었다. 파천이 에이어에게 부탁했다.
“일단은 수하들을 모두 불러들이세요. 지금부터는 어떤 소동이 벌어져도 외부로 전력을 내보내지 마십시오. 일단은 전권을 장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결투에서 승리한다 해도 어떤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슐탄과 그 추종자들의 움직임도 예의 주시해야만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선발대도 마찬가지다. 내부가 정리될 때까지 바깥 출입을 금한다. 적의 움직임에 일일이 상대할 필요가 없겠어. 정리되는 대로 한꺼번에 친다.“
“역시 그게 좋겠지. 그런데 가려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꽤 많은 수가 암약하고 있는 것 같단 말야.”
라미레스의 추측대로라면 에어어가 의장직을 장악하고 평의회 중심의 강력한 조직망을 구성한다 해도 앞으로도 여전히 불안 요소는 남아 있었다.
“그건 그때 가서 대처해야겠지요.”
아무리 큰 난관일지라도 한 고비씩 넘어가는 수밖엔 없다. 하나하나 풀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많아 보이던 문제점도 해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에이어는 그런 점에서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보려는 매우 낙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편안한 미소가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오대전사단주들 중 굳이 그가 대표로 추대된 이유를 알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라미레스가 지금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후보들 간의 대결을 언급했다.
“배후의 역량을 비춰볼 때 슐탄이 내세운 대리자는 막강한 자일게 분명해. 직접 대놓고 할 얘기는 아니지만 냉정하게 승부를 예상해서 에어어 자네를 이길 수 있다고 판단되는 자를 준비해 놨겠지.
다른 대안 없이 자네가 나선다면 반드시 패하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모든 건 저들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다. 파천, 어떻게 하기로 했지?“
페리칸이 대리자로 나서는 걸 승낙했는가를 묻는 것이었다.
[다른 대안을 찾아 봐.]
라미레스는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어찌 된 연유인지를 알 것 같았다.
“하긴…… ”
라미레스는 자신이 페리칸의 입장이었어도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에 자진해서 나설 기분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의 결정이 이해가 갔기에 나무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대의를 생각한다지만 자신의 삶을 온통 망가뜨린 원수들을 대신해 싸움터에 나서고 싶겠는가?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야말로 완전자에 근접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파천이 에이어에게 질물했다.
“오대전사단 진영에서 마땅한 인물이 없을까요? 굳이 내부 인물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롬멜이 대신 답했다.
“저쪽에서 누구를 내세울지 짐작이 가지 않으니 대답하기 곤란하군요. 솔직히 지금도 에어어 단주님이라면 충분히 승리를 끌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에이어 단주님을 이길 수 있는 자라고 새봐야 무한계 전체를 통틀어 봐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전사들 중에서라면 희박하죠.“
라미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네. 처음 메테우스가 무한계를 확장했을 때 그를 따르던 자들이 있었지. 그들은 당시에 천상계에서도 상위권에 속한 강자들이었어. 일반의 영자들은 카란에서 전사의 시초를 찾지만 그 말고도 강자들은 수두룩했지.
그들 중 지금까지 활동하는 자들이 있나? 단 하나도 없어.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완전자가 된 것도 아냐. 일부는 스스로 봉인했고 나머지는 어딘가에 숨어 있어. 이건 기우일지 모르지만 그들 중 하나가 나선다면…… 대결은 해보나 마나야.”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대안이 없거늘 어찌 겠는가? 그 이후의 전사들 중 특출나게 강했던 자를 꼽으라면 단연 페리칸이 첫 번째다.
그가 대리자로 출전한다면 설사 초창기의 신화적인 명성을 쌓은 전사들이 나선다 해도 결과는 쉽게 점칠 수 없다. 전사만이 대리자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항목만 아니라면 라미레스가 출전하면 된다. 그럴 경우 상대가 누구라도 이런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메타트론이나 루시퍼 정도가 상대로 나서지 않는 한은.
달리 방법이 없으니 끙끙거려 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페리칸에게 압박을 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이어의 차분한 시선이 페리칸에게로 향했다.
‘당신에게 부탁을 한다는 건 참으로 뻔뻔한 일임을 나도 알고 있소. 할 수 없지. 죽을힘을 다해 상대해 보는 수밖에. 바라건대 라미레스 님의 예측이 빗나가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