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43화 : 제왕력의 열두가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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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43화 : 제왕력의 열두가지 형태


제왕력의 열두가지 형태

파천과 일행들은 북부권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유성이 흐르듯 유연하면서도 빠르게 앞으로 전진해갔다.
북부권의 땅 끝. 대지가 끝나는 지점까지 맹목적으로 움직여 가는 그들은 한때, 같은 운명에 동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같은 아픔의 모양을 지녔고 같은 슬픔의 깊이를 체험했다. 서로를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하나라는 생각에 매달려 있었다.
복수, 아니 앙갚음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결과가 가져다줄 성취감이란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잃어버린 것들이, 빼앗겨버린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던가를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는 몸부림들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상실감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이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그들은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려 한다. 하나의 단순하고 순수한 의지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운명이란 괴물에게 증명해 보이려 한다.
실패와 성공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그 행위 자체가 이들에겐 거룩한 시도요, 성전인 셈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도처에서 몰려드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 하나!
영계의 주적, 아바돈이었다. 파멸과 파괴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는 자들. 그들은 파천의 제거를 목표로 앞을 차단시켜 놓고 있었다.
북부권의 여러 경로에 걸쳐 그들의 종적은 발견되었고 도처에 그들의 거점이 마련되었다. 치고 나갈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 그들은 결코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번 일은 아바돈의 삼군 중 최상위 군인 우라노스 군의 제2위 계급 바시류스가 주재하고 있었다. 우라노스에는 바시류스가 단 셋에 불과하다. 서열 2위의 최상위자가 직접 나섰다는 건 그만큼 파천을 제거하는 일을 아바돈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바시류스는 포반에 그노시스에게 마신 열을 붙여 그들의 전력을 시험케 했다. 그 결과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전력을 조심스럽게 이동시켰다. 한 번에 끝장내겠다는 생각보다는 여러 번에 걸쳐 조금씩 힘을 빼놓겠다는 전략이었다.
정신이 지치고 곤하면 허점을 커지는 법. 허점이 드러난 순간 전력을 동원해 단번에 절단내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라노스 사령부에서 급파된 마신들을 적재적소에 배치시켰고 그노시스들로 하여금 지휘케했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지 않은 건 라미레스와 같은 초강자를 고려한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대적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바돈과 별개로 선발대에 다른 목적을 품고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대적자들 중 최상위자 몇 명이 은밀히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아바돈과 대적자들은 최종목표가 다름에도 서로간의 합의로 협력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속내를 공유하지 않은 채 각기 다른 길을 택해 나가고 있는 셈이었다. 이를 테면 무한계를 상대함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협력하지만 서로의 이익이 상치될때는 독자 노석을 걷는다는 식이었다.
그들은 아바돈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이동해 가고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북부권에 자리를 잡고 있는 칠대부족이었다. 이들이 지닌 목적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선발대에 대한 입장도 밝혀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노선은 어쨌든 간에 이들은 카란의 추종자들이며, 어쩔 수 없이 무한계의 소속원들이란 점이었다. 아바돈이나 대적자들과는 결국 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뚜렷한 이 세 흐름을 제외하고도 개별적으로 선발대를 향해 접근하는 자들도 있었다. 마계를 떠나 온 헤르파와 라아그 그리고 라넷이었다.
이들은 마계를 떠나올 때 무한계의 동정을 파악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파천과 천마를 향해 오고 있다는 건 뜻밖의 일이었다.
이외에도 여러 성향의 영자들이 선발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각기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 긴박한 대치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하룬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평화롭던 북부권의 오지에서 새로운 폭풍이 잉태되려 하고 있었다.
그 핵은 당연 파천이었다. 이런 걸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파천은 아까부터 여러 번이나 먼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높이 나는 매가 탁월한 시력으로 사냥물을 살피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먼저 주위를 환기시켰다.
“조심들 해라. 살기를 품은 이리떼들이 몰려들고 있다.”
라미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촉수에는 아무것도 걸려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원령체의 능력은 아직까지 나타난 적이 없었고, 그러니 당연 그 또한 본 적이 없다. 그는 궁금했다.
‘파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일까?’
기운으로 파악해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하늘 높이 뜬 구름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었다. 그에게서는 그 어떠한 류의 특정한 기운도 발산되지 않는다.
‘나를 능가하겠지?’
원령체라면 그럴 것이란 짐작일 뿐이지 확신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또다시 추월당했음에도 라미레스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반기는 심정이었다. 부담스런 적들을 맞이했는데 이쪽의 전력이 형편없이 미약하다면 이것만큼 난감한 일이 없다.
파천이 원령체가 되기 전만해도 라미레스의 심적 부담감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선발대의 앞을 막아설 적들은 뻔히 예상되는데 결정적으로 상대할 이는 자기 하나뿐이다.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하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적들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놈들이었던가. 이제는 그런 근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어서 일단을 좋았다. 그렇지만 아직 마지막 확인 작업은 남아 있었다.
‘내 예상 정도만 파천이 활약을 해줘도 걱정할 만한 고비는 없을 텐데.’
혼자 고민에 빠져 파천의 곁을 따르던 라미레스가 귀를 쫑긋 세웠고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이제야 그도 느낀 것이다. 아직은 미약하나 멀리서 감지되기 시작한 심상치 않은 기운을.
“흐흐, 이제 시작인가?”
페리칸이 다음 말을 받았다.
“지나치게 여유를 둔다고 했더니만…….”
카이로가 한숨을 푹 내쉰다.
“다들 신들이 나셨나 본데 솔직히 난 빠지고 싶은 맘이 간절합니다.”
“웬일이냐, 네가?”
페리칸의 질문에 카이로는 엉뚱한 말로 대신했다.
“난 정말이지 이런 싸움엔 진절머리가 나. 그다지 큰 의미도 없이 단지 적으로 규정되었기에 싸워야 하는. 그 구분이 이제 신물이 난다.” “별스런 말을 다하는군.”
“그렇지 않다. 너도 생각해 봐라. 만약 영계의 존속과 멸망을 결정짓는 그런 정도의 비중있는 싸움터에 내가 서 있다면 이런 불평도 하지 않는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인지도 확인할 길 없는 그런 시시껄렁한 놈들과 투닥거린다는게 영…….”
페리칸의 정곡을 찌는 말에 카이로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 진정한 실력을 아직은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 그런 속 깊은 사정이 있는 줄은 난 짐작도 못했네. 너처럼 체질적으로 싸움을 즐기는 놈이 오늘따라 별소리를 다한다 싶었더니. 이제 보니 지금까지 내가 널 잘못 알고 있었던 거구나.”
“그럼. 너도 나중에 알게 될 거다. 무한계의 비밀병기 카이로의 위대함을 말야.”
“크크.”
그들은 격전의 긴장감을 이런 식으로 해소하고 있었다. 페리칸과 카이로쯤 되는 싸움꾼들도 대결에 임하기 전에는 긴장을 한다. 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적과 싸움이라는 의미가 주는 무게였다.
체계화된 질서가 자리잡고 혼란이 없는 곳일수록 더욱 다양한 폭력의 형태가 존재한다 오히려 현재의 영계와 같이 적아가 분명해지고 대립이 구체화되면 단순한 폭력의 형태로 모든게 결정난다.
서로간의 입장이나 견해나 정당성은 폭력의 결과물로서만 입증이 가능해진다. 전쟁은 승리자에게 모든 걸 안겨 주며 패배자에게는 초라한 변명과 굴욕만이 남을 뿐이다.
힘의 단순 논리로 따지자면 승리자 앞에는 패배자는 언제나 부정이요, 부당한 것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더 강하다고 말한다.K 그리고 내가 이겼으니 내 뜻대로 하겠다고 선언하고 집행하는 것이다.
마계와 아바돈을 백날 악으로 규정지어 봤자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 당당하게 맞서서 스스로 고귀하다 생각하는 가치들을 지켜내면 되는 것이다. 평화는 불변하는 절대적인 힘으로 다스려지기 전에는 오지 않는 것일지도.
그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페리칸과 카이로도 그래서 매번 싸움에 임하게 될 때마다 지지 않기 위해, 최후의 승리자로 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건다. 그리고 언제 또 그런 일에 직면하게 될지 모르기에 언제나 싸움에 대비하며 힘을 키운다.
이것이 모두가 전사가 되어 버린 현 영계의 숨길 수 없는 비국이었다. 모두는 절대강자를 염원했다. 이왕이면 무한계나 선계, 천상계에서 나와 주기를 영자들은 빌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으니 절대강자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절대강자였다. 그러나 그는 침묵중이다. 그 침묵 아래 영계는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더 이상 그 힘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온다.”
파천의 중얼거림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파천의 독백이 설란의 가슴속에서 공명되었다. 그건 처절한 외침이었다.
‘잔인한 운명이여, 와라. 와서 나를 시험하라. 내 강한 두 팔로 너를 꺾고 이 두발로 너를 짓밟아 다시는 날 시험하지 못하게 하리라.’
꼭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설란은 속으로 기원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어요. 당신이 그 길을 모두 극복하고 내 앞에 당당하게 설 날을 기대할게요. 해내리라 믿어요. 언제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처럼 단순하고 맹목적인 신뢰가 또 있을까. 왠지 설란의 기대는 파천과 향유했던 시간을 초월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두두두두두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는 말발굽 소리같았다. 그렇지만 그건 대지를 박차며 말이 쾌속으로 전진해오는 소리가 아니라 마신들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그들은 라미레스가 대면했던 마신들보다 배는 더 크고 우람했다.
귀갑을 걸친 건 동일했지만 한 손에 제각기 하나씩의 병기를 휴대하고 있는 건 달랐다.
그들의 눈은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것 이외에 지독한 살기로 충만되어 있었다.
“만만한 놈들이 아니다.”
라미레스의 그런 진단이 없었어도 다들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쉽지 않은 적. 마신들의 수는 전과 같은 열. 그렇지만 그들이 내뿜는 압력은 천이요, 만이었다. 라미레스가 말했다.
“파천, 네가 해결해라.”
원령체의 위력을 보여 봐라, 라는 주문이기도 했다.
파천은 라미레스의 그 말을 듣지도 못했다. 설란과 그레고스를 놀라게 했던 처음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심장을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눈빛에 적의가 기득해지고, 파천의 몸이 허공으로 빠르게 떠올랐다. 일행들은 파천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집중했다.
파천의 전신을 감싸고 눈부신 금빛 물결이 사방으로 확산된다. 마신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그들의 눈에서 타오르던 투지의 빛은 퇴색되고 빈자리를 두려움이 채웠다. 파천은 외쳤다.
“내 앞길을 막는 자! 그 누구라도 용서치 않겠다.”
일성 외침을 토한 파천은 허공 높이에서 천신인 양 아래를 굽어보는게 그의 몸에서 제왕력의 열두 가지 중 다섯 번째 기예가 일순 터져 나왔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그의 몸을 감싼 금빛 물결에서 가느다란 원령사들이 풀어져 나오며 천지를 휘감아 버렸다. 그건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나 마신들도 대비할 틈이 없었다. 그들은 굳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중이었다.
파스스슷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전경이었다. 원령사들은 마신 열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렸다. 조금 전까지 마신들이 서 있던 곳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귀갑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들고 있던 병기들까지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신들을 이끌고 왔던 그노시스뿐만 아니라 라미레스 등도 천하를 놀라게 할 괴사 앞에 침묵을 두르고만 있었다. 그들은 충격 어린 시선으로 파천을 바라보았다. 라미레스는 가슴이 터질 듯했다
‘됐다. 됐어. 파천의 저런 신위라면 우리 앞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노시스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공간이동을 시동했다.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천이 준비한 죽음의 손길은 어느새 그마저 겨냥하고 있었으니.
파천의 신형이 허공중에서 갑자기 사라지더니 그노시스의 뒤에서 나타났다. 방금 그가 시전한 건 공간이동이 분명했다.
파천은 다소 불완전하기는 하나 원령체가 되었다. 원령체가 되었다는 건 가장 완벽한 신체와 무한대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수호자의 수련, 그 중에서도 마지막에 만났던 두 초인의 기예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왕력이라 명명된 열두 가지의 기예를 파천에게 가르쳤는데 그 모두가 원령을 활용한 것들이었다.
열두 가지라 하나 그건 발현되는 형태의 차이에 의한 구분일 뿐 사실은 따로 구별해 분류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원령이라는 것이 응용이 자유롭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막 공간이동을 시도하던 그노시스의 전신이 그 자리에스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전신을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강한 압력을 느꼈는가 싶은 순간 어느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지배해 버렸다.
“끄어아악.”
비명소리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이나 이어졌다. 단지 파천의 손이 그의 등 뒤에 닿아 있을 따름이었는데도 그가 받는 고통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옴짝달싹은 커녕 숨쉬기조차 힘들었고, 피부가 J지고 뼈가 부러지면 제멋대로 마구 뒤틀렸다.
“가서 전해라. 내 앞을 막으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노시스는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파천의 그 말은 자신을 살려주겠다는 의미임에도 그것조차 판별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대던 그노시스가 잠잠해졌다. 파천의 손이 그의 등 뒤에서 떨어져나가고 곧바로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파천은 그노시스의 터진 살과 부러진 뼈와 녹아버린 일부의 내장들을 말끔하게 치료해 주었고 완벽하게 소생시켰다.
원령의 또 하나의 기능. 원령은 파괴의 상징만이 아니라 소생의 창조면도 더불어 지니고 있었다. 한 가닥 생기만 있다면, 영혼만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면 어떤 상태라 하더라도 말끔하게 원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
이건 그 어떤 힘보다도 탁월한 능력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천이 함께한다면 그 군대는 무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소생하고 끊임없이 치료된다면 그들에게 두려움이란 게 있겠는가? 또한 그런 자들을 무슨 수로 당해낼 수 있겠는가! 라미레스는 기적을 보고 있다 여겼다.
‘원령체가 모든 영자들에게 꿈의 경이라고 여겨졌지만…… 저 정도라니.’
모두는 할 말을 잃고 경이의 시선으로 파천을 주시했다. 그노시스는 아직도 제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였다.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했고 넋이 나가 있었다.
“떠나라.”
파천이 또 한 번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노시스는 반응하지 못했다.
“저놈 완전히 얼이 빠졌군.”
“그럴 만도 하지. 보지 말아야 할 것 보았고, 겪지 말아야 할 걸 겪었으니 제정신인 게 이상하지.”
페리칸과 카이로의 대화가 없었다면 언제까지고 그노시스는 그대로 굳은 채로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놈은 살려줄 때 잽싸게 안 달아나고 뭐하는 거래?”
“그러게. 내버려 둬.살기 싫은 가 보지. 사는 게 지겨우면 저럴 수도 있다고 봐.”
서로 농을 주고받고 있는 페리칸과 카이로의 음성은 그노시스를 급하게 흔들어 깨웠다. 그는 부리나케 뒤로 돌아섰다. 정면으로 보이는 파천의 얼굴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죽음의 신이 있다면 저런 얼굴이리라.’
그는 더 이상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카이로의 말처럼 ‘잽싸게’ 흔적을 지웠다. 공간이동 해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간 것이다.
파천의 경고! 아바돈을 향해 던져진 선전포고였다. 앞을 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 그들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 만무했지만 어쨌든 파천으로서는 할 바를 다했다.
“가자.”
파천은 또다시 광명의 부름에 따라 걸음을 옮겨 갔다. 그 뒤를 얼굴 가득 흐뭇함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라미레스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설란 등이 따랐다.
뒤따르면서도 라미레스는 연신 히쭉히쭉 헤픈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누군들 그의 이런 심정을 이해하랴. 파천의 성장을 처음부터 지켜보며 스승 노릇을 했던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파천이 완성되어가고 있다. 광명만 얻을 수 있다면…… 영계는 역사상 가장 강한 절대자를 곁에 두게 될지도 모른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걸 초인적인 인내로 참고 있는 라미레스. 파천은 그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연구케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파천을 위해서.

천상계 역사상 최초로 내려진 출전령에 서른한 개의 하늘이 즉각 반응했다. 오직 한 곳 균천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소집령에 응했고 그들은 모두 대천인 도리천에 집결했다.
참전해 제몫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 판단되는 강자들만 추려 놓았음에도 3천 명이 넘는 숫자였다. 그들은 마계 침략에 결사항쟁으로 맞설 것을 맹세했으며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열정과 투지까지 짜내겠노라 다짐했다.
신장들은 신장들대로, 천주들은 또 그들대로 모여서 회의를 진행중이었다.
“창고 문을 활짝 열어 보물들을 모두 사용케 하겠소.”
도리천주 제선의 말에 대범천의 천주가 기쁨과 기대의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원래 도리천은 33천 전체를 이르는 말이었다가 나중에는 제석천이 다스리는 대천말을 지징하게 되었다. 대범천의 천주가 저리도 기뻐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연유가 있었다.
도리천에 비장되어 있는 보물들은 하나같이 값어치를 논하기도 힘들 만큼 그 가치가 지고한 것들 뿐 이었다. 비밀리에 전해지기로는 제왕들로부터 독립해 새 하늘을 열 때 가져온 것으로 판단되는 보물들 중 하나가 도리천의 창고에 잠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도리천주만이 알 일이었다. 대범천의 천주는 내심 보물을 얻기를 기대했다.
‘운이 좋다면 이 기회에 본 대범천이 상위 오천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다.’
이런 속내를 꿈꾸고 있는 건 대범천주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내색은 않지만 그 정도 기대쯤 하고 있을 것이다.
천주들이 이럴진대 신장이나 아라한들은 또 어떨까? 무작정 개방한다면 오히려 좋은 의도마저 퇴색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리천주 제석이 그런 것쯤 짐작 못할 만큼 어수룩하고 경솔한 이는 아니다.
“보물이라 해도 임자를 잘못 만나면 오히려 세상에 해악이 되는 법!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기존의 사대천왕을 개편하겠습니다.
신장들 중 최강자들을 천왕단에 편입시켜 명실공히 천상계의 선봉 주력으로 삼고자 하오. 그리고 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창고를 개방토록 할 작정입니다.“
천주들이 품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제석은 또 다른 제안을 했다.
“그리고…… 여러 천주님들 중 원하는 분이 계시다면 우선권을 드리지요.”
천주의 신분으로 천왕단에 들겠노라 자진할 자가 있겠는가? 보물에 대한 욕심이 아무리 카드 해도 제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나설 이는 없었다. 변천주가 한 가지 문제점을 짚고 나섰다.
“신장들이 차출되면 아라한의 지휘는 누구에게 맡깁니까? 대천의 경우야 대신장들이 셋이나 된다지만 저희는 단 한명에 불과합니다. 만약 본천의 신장이 천왕단에 편입되면 제가 몸소 아라한들을 지휘해야 하는…… 겁니까?”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문제점이었다. 천상계 33천마다 신장들이 이지만 그들의 수는 제각각이었다.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일곱까지. 그들의 다양한 만큼이나 실력의 편차 역시 현격하게 크다할 수 있었다.
대신장들이야 공인된 강자들이지만 나머지는 서로간의 우위가 분명치가 않았다. 서로를 견주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대천왕 중 하나인 지국천왕이 변천주의 의문에 대신 답을 했다.
“그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33천의 구분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다시 말해 천왕단과 사신들, 사령부로 조직을 단순화시킬 생각입니다. 천왕단은 기존의 사대천왕단에 일부 신장들이 참여하여 구성되며 천상군의 선봉을 맡습니다.
사신단은 나머지 신장과 아라한을 통합한 주력부대로, 천왕단의 배후를 지원합니다.
사령부는 도리천과 야마천, 도솔천, 낙변화천, 타화자재천의 주력으로 조직됩니다. 천주들께서는 사신단과 사령부에 반부되어 소속되실 겁니다 이와는 별도로 대신장 세 분이 이그시는 사령관 직속의 감찰대가 군령을 전달하게 됩니다.“
지국천완은 의견이 아니라 결정사항을 통보하는 것처럼 말했다. 대범천주는 마땅치 않은 눈치를 보였다.
“이미 조직 편제가 끝나 있군요. 이런 상황에서 굳이 회의를 진행시켜야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군요.”
도리천을 비롯한 상위 오개천과 사대천왕들간에 벌써 조율이 끝난 시점이라면 지금의 회의는 결과는 통보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대범천주의 노골적인 불만에 광목천왕이 허허롭게 웃으며 이해를 시켜갔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천주님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골격이야 만들어졌다지만 그 안을 여러분들이 채우셔야 합니다. 워낙에 다급하게 결정된 사항이라 미처 양해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길.”
대범천주는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야마천주의 눈빛이 매서워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비교적 서로간의 지위가 평등한 신장들에 비해 천주들 사이에서는 서열 구분이 분명했다.33천이 도리천에서 하나씩 분리되어 독립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다시 말해 야마천주는 대범천주의 옛 상관이나 다름없었던 R서이다.
이런 이로 대범천주는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물고 늘어질 수가 없었다. 사대천왕들 중 은연중 수장 노릇을 하고 있는 지국이 연이어 결정사항을 통보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천주들에 대한 지시사항같은 것이었다.
지국은 마지막에 균천주에 대해 언급했다.
“이번 균천주의 무단이탈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중요 사안입니다. 균천은 이번 소집령에 응하지도 않았고, 해명의 연락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장의 설명이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문책이 따라야 한다는게……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상위오개천주들과 사대천왕들을 제외하면 가장 지위가 높은 대범천주는 균천주와는 매우 친밀하다 할 수 있는 관계였다. 도리천부터 다문천까지 구천을 상천이라 하고 대범천부터 염천까지의 십천을 중천, 나머지 음천 무상천까지의 십사천을 하천이라 구분한다.
분리 독립한 시점에 따른 분류였지만 그 지위는 지금까지도 유효했다. 중천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는 대범천주는 균천주의 무단이탈이 도마에 오르자 심기가 불편해졌다.
표면적인 결과만 보자면 무책임하다 할 수 있으나 이 자리에서 굳이 거론되어야 할 정도로 문제시 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게 대범천주의 기본 입장이었다. 중천의 다른 천주들 역시 같은 생각들임은 당연했다.
수호자가 파천을 원령체로 만들고자 한 계획을 가지고 처음 찾아간 이는 대범천주였다. 대범천주는 그레고스와 친분이 두터워 언제라고 그를 끌어들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수호자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그는 한참동안이나 고민했다. 과연 이 일을 도리천을 비롯한 상천에서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으로 보일지 확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까지 염두에 두고 일을 진행시켰다. 같은 중천의 천주들에게 알려 도움을 청했으며 그레고스를 불러와 변천에서 일을 도모케했다.
뿐만아니라 일이 커질 경우를 대비해 선발대 구성에 하천의 이사나천과 무상천을 끌어들이는 포석까지 끝마쳤다.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 파천이 원령체가 되었고, 도리천주 제석이 이를 알았음에도 오히려 그를 연합군 사령관에 임명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대범천주는 아직까지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도리천에 오기 전 접한 한 가지 정보 때문이었다.
‘야마천주와 타화자재천주가 지국을 은밀히 불렀다지 않은가? 이 시점에 그들이 회동을 했다면 그건 십중팔구 파천의 일 때문이었겠지.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저들은 균천주의 부단 이탕을 부각시켜 우리들을 한꺼번에 경계하려는게 틀림없다.’
상천은 상천대로, 중천은 중천대로, 하천은 도 하천대로 이번 마계와의 전쟁을 위기이자 기회고 보고 있다.
서열 조정. 평화시에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나 전시라면 가능하다. 서로간의 비중을 분명하게 가려질 테고 활약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상승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천 쪽에서 선수를 먼저 쳤다. 군편제를 통해 중천이 도양할 기회를 사전에 봉쇄해 버린 것이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균천주의 일을 확대해 명분마저 뺏으려 한다.
이런 의도를 간파한 대범천주를 비롯한 중천의 천주들은 내심 불만이 가득했지만 드러내 놓지는 못했다.
지국의 지적에 이어 야마천주가 은근한 노성을 띤 채 균천주를 성토했다.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신장도 아닌 천주의 신분으로 저지를 수 있다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소. 균천주의 일탈은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하오. 이런 중요한 시점에 본계의 단합에 찬물을 끼얹었으니 마땅히 책임을 지고 천주직을 내놓아야 할게요.
또한…… 같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제지하지 못했던 천주들께서도 무언가 변명이 있어야 마땅하리라 보오.“
변천주를 비롯한 몇몇 천주들의 얼굴이 급변했다. 변천주가 무어라 변명을 하려는데 이를 눈치 챈 대범천주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야겠지요. 염려 마십시오. 중천을 대표해…… 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문책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대천주님,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도리천주 제석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머물다 사라진다.
“이번 일은 나로서도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지만….. 일단은 덮어 두기로 합시다. 나름의 사정이란게 있을테니…… 균천주가 돌아온 뒤에 다시 거론하는게 나을 듯싶습니다.”
야만천주가 가만있을 리는 없었다.
“안 됩니다. 막중한 지위에 있을수록 책임 소재는 더욱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이번 일을 그냥 넘긴다면 신장들이나 아라한들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했을 때 무슨 명분으로 책임을 묻겠습니까? 전시 체제로 돌입된 이상…… 군율은 엄격해야 합니다.”
딴은 맞는 말이었다.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제석의 난처해하는 얼굴은 가식이 아닌 진심이었다.
대범천을 비롯한 중천의 천주들이 불만을 갖고 있는 대상은 도리천주인 제석이나 도솔천주가 아니었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상천의 천주들이었다.
그들은 사소한 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으며 어떤 꼬투리라도 잡히기만 하명 중천을 견제하는 데 써먹을 줄 아는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하천을 부추겨 중천의 권위를 침범케 하기도 했고, 할 수만 있다면 중천의 결속된 단합은 호시탐탐 깨트리려 노력해 왔다. 이런 깊은 알력은 한 순간에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기적이라 불러 줄 만했다.
대범천주는 야마천주를 담담한 시선으로 찾았다. 야마천주도 마침 그쪽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대범천주의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의외로 여유 만만한 태도를 보이자 야마천주는 어리둥절한 심정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 하느라 땀 깨나 흘리고 있겠군.’
그러나 대범천주는 기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파천이 원령체가 된 이상…… 그리고 균천주가 그 곁을 떠나지 않는 한 기회는 우리에게 있다.’
도리천의 후끈 달아오른 열기는 상천과 중천간의 뜨거운 경쟁과 견제로 더욱 커져만 갔다.

파천이 보여준 원령체의 위력은 라미레스을 비롯한 일행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그들은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물론의 파천의 상태가 불완전하여 언제 어떤 식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부담감이 적지 않았지만 아직은 그런 징후가 보이지 않기에 마음을 놓았다.
설란은 파천의 곁에 붙어서서 한시고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계에서의 추억을 다시금 꺼내 놓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행복해 한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지금은 모두가 아름답기만 했다.
‘그 일만 없었어도.‘
마계의 침략만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쓰려 왔다. 아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이들의 변화가 설란은 궁금했다. 또한 두려웠다. 자연스런, 순리적인 아닌 가공된 변화였기에 염려가 되는 건 당연했다. 아이들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부모들을 향해 칼을 뽑아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런 생각은 또다시 루시퍼에 대한 원한을 되새기게 했다.
라미레스는 파천에게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그의 능력이 어디에 미쳐 있는지를 파악해 보기 위해서였고, 원령체에 대한 자연스런 호기심 때문이었다.
“결국 네 말을 다시 풀자면, 제왕력이라는 게 원령을 사용하는 열두 가지 형태를 구분한 것이네.”
파천은 빠르게 앞으로 이동하며 고개만 살짝 끄덕거려 주었다. 옆에서 바싹 붙으며 라미레스가 다시 입을 뗀다.
“그 중에 셋은 무공으로 치자면 신법에 관한 거로군. 넨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원령의 촉발을 다양한 형태로 사용하는 거군. 그말은 그럼…… 무한히 개발될 수 있다는 건데…….”
라미레스는 파천을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괴물을 대하듯 기이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거 참……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군.”
파천이 라미레스에게 설명해 준 제왕력을 열두 가지였다.
라미레스의 말처럼 형태의 구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위력의 차이는 서로 간에도 분명했다.
원령체란 게 의지가 일어나는 즉시 원령의 분열과 융합이 동시적으로 발생했다. 체내에서 시작해 외분의 원령에 영향을 미치고 특정한 물리 현상을 일으킨다.
제왕력의 첫 번째는 속도였다. 빛의 속도. 광속으로 움직인다는 건 영자들에게도 꿈의 경지다.
원령체는 영계의 한계가 잡아낼 수 있는 감각을 초월해 있다. 시력으로 잡아내지 못하니 공간이동으로 여겨질 정도다. 빠르면 강한 건 부언할 필요도 없는 일.
두 번째는 원령체를 보호하는 수법이었다.
원령체는 일반의 영자들이 하는 화신체나 다름없다. 늘 화신한 채로 있는 거나 진배없다는 말이다. 여기다 원령으로 보호막을 치는 것이 제왕력의 두 번째였다.
원령의 보호막은 열두 겹까지 칠 수 있다. 원령의 핵을 이루는 지점에서부터 내장으로 보호하고 뼈와 관절을 보호하고 피부를 감싼다. 그 위를 다시 몇 겹의 보호막이 중첩된다.
단순히 보호만 하는 게 아니라 반탄의 효과도 있어서 타격의 힘이 보호막의 강도에 미치지 못하면, 다시 말해 일시에 파괴시키지 못하면 고스란히 타격이 되돌아간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힘에 의해 자신이 되려 당하게 되면 얼마나 한심하고 기가 막히겠는가.
보호막은 자신에게만 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정 공간을 가둘 수가 있으며 특정 대상에 씌워서 보호할 수도 있다. 이걸 파괴할 수 있을 자가 과연 있을까?
라미레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굳이 선발대원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지 않은가?’
파천은 그 모두를 보호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을 돌려보냈을까? 그건 매우 간단했다. 싫었던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자들과 함께 동행하는 게 꺼려졌던 것이다.
파천의 심리 상태는 극도로 불안했다. 그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원령의 지배를 받는 의식을 현재까지는 통제하고 있다지만 언제 역전될 지는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었다.
세 번재는 하룬에서 사로잡힌 선발대원들을 구해내기 위해 파천이 보여 주었던 공간 일체술이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이라면 그 위력의 차이였다.
신체를 작은 미립자 상태로 분해시키는 세 세 번째 기예의 총체적 특징이었다. 이 상태로 어디든 이동이 가능하며, 심지어 사물과 일체 시킬 수도 있다. 그건 영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파천은 마음만 먹으면 라미레스이 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미립자 상태로 분해시킨 파천을 찾아내거나 공격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자라면 당연 원령체뿐일 거고 거기에 해당되는 건 메타트론과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 그리고 제왕들 가운데서도 단 하나에 불과했다.
루시퍼는 원령체가 아니다. 그는 마력이 탁월하게 강한 것뿐이었다. 그 힘이 원령체에 미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원령체가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무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분열의 형태인 프리즈마 유동이 극에 다다르면 현 파천의 불완전한 원령체도 파괴시킬 수 있다.
원령체가 기본적으로 일반의 프리즈마 유동보가 한 단계 위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덮어 놓고 강하다고 단정 짓기엔 무리가 따랐다.
제왕력의 네 번째부터는 공격기술로 분류될 수 있었다.
‘자연검과 별반 다르지 않아.’
라미레스는 설명을 듣는 순간 곧바로 그렇게 판단했다.
네 번째는 원령을 특정한 형상으로 만들어 공격하는 수법이었다. 파천의 경우엔 물론 검을 주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손바닥에서 발출되거나 특정 공간 중에서 갑작스레 불쑥 생겨날 수도 있으며, 그 수에는 제한이 없다.
‘그 다음은 네 번째 기예가 좀더 확장된 형태일 뿐 그다지 다르다 할 수 없군.’
라미레스의 생각처럼 다섯 번째는 파천이 마신들을 해치울 때 보여 주었던 원령사의 기에다.
네 번째와의 차이라면 공격의 범위와 거리가 단연 확대된다는 점이었다. 비처럼 내리게 할 수도 있고, 공간을 촘촘히 채워버릴 수도 있다. 대지가 갈라지며 솟구치게도, 바람처럼 휘몰아치게 할 수도 있다.
다섯 번째의 효과가 더 확장된 것이 여섯 번째다. 아무리 막대한 양의 원령사의 만들어낸다 해도 미미하게 공간의 허점은 생기기 마련. 아예 통째로 휩쓸어 버리는 것이 원령의 폭풍이었다.
현재의 파천은 자신의 시야가 머무는 곳까지 단번에 돌풍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그 공간에 포함된 것은 무엇이든 가루기 되는 걸 면키 어렵다.
제왕력의 여덟 번째를 제외한 일곱 번째부터 열두 번째까지는 현재의 불완전한 원령체로는 제대로 펼치기가 힘들다.
일곱 번째는 원령으로 사물이나 이지를 지닌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메타트론이 무언가를 창조해냈다면 이 연장선상에서 해석 될 수 있다.
여덟 번째는 영자들의 화신체와 다름없었다. 제왕력에 이런 분류가 있다는 건 파천이 만났던 두 초인들의 특이한 특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른 기예들은 그다지 즐겨 사용하지 않았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게 가능했다. 기실 제왕력의 첫 번째와 세 번째, 여덟 번째가 동시에 사용되는 것이기도 했다. 보호막을 쓰고 광속으로 움직이며 원령체로 공격한다.
당시 그들은 타격술을 위주로 해 적을 제압했다. 처음부터 그들을 위협할 만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들은 초인으로 불릴 수 있지만 그들의 한 수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초강자가 그 시대에도 엄연히 존재했었다.
둘은 그 모든 적들을 오로지 두 주먹과 두 발로만 때려잡았다. 그들은 이런 공격 형태를 가장 선호했고, 그 바람에 다양한 형태로 발전이 가능했다.
현재 파천이 그들에게서 배운 건 그 중에서도 단 두 가지뿐이었지만 그것을 익히게 된 파천도 무척이나 흡족하게 생각하는 공격 수법이었다.
제왕력의 아홉 번째는 펼치기에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이었다.
모든 걸 공의 상태로 돌린다. 지정한 사물이나 영체의 내부에 작용해 스스로 분해되게 만든다. 또한 공간 자체를 파괴시키기도 한다. 공간에 포함되어 있는 건 힘이 발동되는 순간 모조리 사라지게 된다.
이건 적아가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으면 펼치기 곤란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적들 가운데 같은 편이 있다면 절대로 펼쳐서는 안 되는 기술이기도 했다.
현재의 파천은 이걸 펼칠 수 없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원령체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완전한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제왕력의 열두 가지 중 가장 강력한, 최후의 공격 기술이었다.
분열과 융합의 연쇄적인 대폭발을 체내에서 체외로 배출한다. 원령체의 의지가 멈추지 않는 한 범위는 무한정으로 확대되며 거기에 포함된 건 그 무엇이든 소멸을 면치 못한다.
그레고스나 수호자가 마지막까지 걱정하던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이었다. 원령화된 파천이 무한정으로 분열과 융합을 시도하면 영계는 초토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걸 막기 위해선 더 강력한 힘으로 원령체를 파괴시키면 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결국 그에 의한 재앙은 필연적으로 영계의 멸망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런 위험은 여전히 파천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가 광명을 얻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었다. 광명만이 파천에 내재된 위험성을 완전하게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령화가 되는 걸 간신히 모면한 현재의 파천은 이걸 펼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물로 시도야 할 수 있겠지만 그 순간 제어되지 않는 원령에 의해 의지가 소멸당할 가능성이 많았다.
열한 번째는 영혼을 제압하는 능력이었다. 아바돈이 만들어낸 마신들도 일종의 그런 수법에 당했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령체가 펼치는 건 강제로 영혼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인 순종. 적이 사라진다. 굳이 힘을 쓸 필요도 없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은 신의 영역이다. 생성과 소멸. 창조와 파괴. 이걸 피조물인 파천이 할 수 있을까?’
라미레스는 이것만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파천에게 제왕력을 가르쳤던 두 초인도 말로만 가르쳤을 뿐 끝내 펼쳐 보이지 못했다.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였을 것이다. 단, 원령체의 마지막 단계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제왕력의 열두 가지 기예는 단 한번도 현재의 영계에서 재현된 바가 없다. 메타트론이나 수호자가 그런 능력이 있다지만 그들 역시 영자들이 보는 앞에서 펼쳐 보인 적이 없었다.
앞으로 파천에 의해서 원령체의 진정한 위력이 세상에 훤히 드러날 것이다. 과연 그 힘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자들이 얼마나 될까?
라미레스는 그런 생각을 하자니 한 순간이라도 빨리 적이 나타났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파천 하나만을 앞에워도 마계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설마…….’
그럴 수만 있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 아니, 아예ㆍ 전쟁이 일어날 수 었다. 루시퍼가 나와서 파천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들은 영계 통일의 꿈을 접어야 한다.

파천의 앞을 가로막았던 마신들이 소멸당하고 그노시스가 초주검이 돼 돌아온 걸 보게 된 바시류스 어이가 없어 한참을 넋 나간 이처럼 멍하게 있었다.
그러던 그가 화를 내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이 바보같은……. 시험해 보라고 보냈더니 마신들을 모두 잃고 와?”
그노시스는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는 지금 바시류스의 노성 정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두려움을 넘어선 극단의 공포가 그의 의미마저 결박시켜 버렸다.
그는 아무런 의욕도 생겨나지 않았다. 점차 두려움도 감소하는 듯 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도 사라지고 존재에 대한 회의가 인다. 그 순간 모든 게 귀찮아지는 것이다.
이도 저도 싫은 이가 감정의 동요를 보일 리가 있겠는가? 그는 가만 웅크리고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바시류스는 당면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라미레스, 라미레스 하더니만…… 이렇게나 강한 놈이었던가?’
마신들을 때려잡은 이가 라미레스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는 바시류스는 자신이 명령을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스노시스들을 쳐다보았다.
“지금 남은 마신의 수는?‘”
그노시스 중 하나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하급 스물 둘, 중급 열, 상급 셋입니다.”
“그들을 다시 한자리로 불러들여.”
“작전을 변경하시는 겁니까?”
“지금 이 마당에 작전이고 뭐고가 어디 있나? 몇 명 되지도 않는 놈들을 상대하면서 진을 뺄 필요 없다.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고 본대로 귀환한다.”
그는 첫 번째는 시도의 처참한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실패는 크든 작든 모든 아바돈의 지휘관들에게 치명적이다. 하기오스는 냉정해 공과를 분명히 한다. 아무리 바시류스라도 실패에 대한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 내게 주어진 전력으로 파천이란 놈과 그 일당들을 해치우지 못한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소멸뿐이다.’
그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했다. 처음의 느슨했던 기분을 한껏 조여 보았다.
“마신들을 한 자리에 모아들여 그들을 단번에 처결한다. 모두 움직여, 어서.”
그노시스들 중 하나가 급히 보고를 올렸다.
“지금 놈들에게로 접근하는 무리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정체를 파악하라고 지시해 둘까요?”
“필요 업다. 모두 처치해 버린다. 아니다. 일단은 놈들이 우선이다. 전력을 분산시키지 말고 집결시켜라. 이후 내가 몸소 이끌고 나가서 처리하겠다.”
“네.”
그노시스들은 황급히 바시류스 앞을 물러 나왔다.
아직까지도 엎드려 있는 그노시스에게로 바시류스의 냉정한 눈길이 떨어져 내렸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
대답이 없었다.
“기분 같아서는 즉결 처분하고 싶으나, 그래도…… 명색이 그노시스. 너에 대한 처결을 하기오스 님께 일임하겠다. 지금 당장 사령부로 귀환해서 대기하라.”
그노시스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바시류스 앞을 떠나며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아무도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아쉽게도 그가 남긴 한마디를 들은 이가 없었다. 그것이 아바돈의 파견대에게 불운이 될지는 아직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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