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44화 : 메덴의 수련자, 라미레스의 또 다른 이름
메덴의 수련자, 라미레스의 또 다른 이름
파천의 걸음은 멈춰져야만 했다. 라미레스는 조금 황당해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고. 미안하지만…… 당장에 급한 일을 처결하자면 여러분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소이다.”
일행의 앞을 막아선 이들은 아바돈도, 대적자들도 아닌 칠대부족원들이었다.
칠대부족의 하나인 거신족 콴의 일원이기도 한 카이로는 낯익은 이들을 대면한 반가움보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 선발대를 초청해야 할 일이 무얼까? 고민을 거듭해봤지만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란 게 박약하기 그지없었다.
‘분실한 보물 건이라면 선발대에 도움을 청할 일은 아니고……. 대체 뭘까?’
선발대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선 세 명은 칠대부족 중 상위를 차지하고 잇는 용족과 요령족, 거신족의 일원들이었다. 카이로가 같은 거신족인 루푼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막무가내야?”
“간청하마. 잠시면 된다. 우리로서는 생사가 걸려 있는 일. 선발대의 도움이 간절하다.”
카이로는 좀 말이 안 된다 싶었다. 최근래 파천의 변화를 그들은 모른다. 칠대부좆ㄱ의 자존심을 감안할 때 그걸 알고 있다 해도 쉽게 외인에게 도움을 청할 자들이 아니다.
무슨 문제가 생겨도 내부적으로 처결하는 게 기본 방침이며 현재는 외부와의 연계를 극도로 꺼려 오던 차였다. 그런 그들이 한 자리에 모여야 할 문제란 게 무엇이며, 선발대가 있어야만 해결될 문제란 게 또 뭘까?
카이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자 답답해했다. 그건 라미레스 역시 마찬가지.
“허, 이런 답답한 노릇이 있나. 무작정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니건만.”
설란은 슬쩍 파천의 눈치를 살폈다. 잠자코 있던 파천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마령이 침범했군.”
무슨 말인가? 라미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마령? 그게 뭐지?’
라미레스가 모르는 일이란 흔한 게 아니다. 세 명의 칠대부족둰들은 파천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는 말일 거다. 파천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령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용족이 급히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족장님부터인 것도 같고 타이론 족장님부터인 것고 같고……..”
“족자의 지금 상태는?”
“칠대부족의 족장님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들은 모두 신지를 상실한 상태이며, 그 직전에 스스로를 감금시키도록 명했습니다. 족장의 권한 역시나…… 스스로 박탈시키셨습니다.”
기사였다. 칠대부족 족장들이 한결같이 마령이라는 것에 침범당해 이지마저 제어할 수 없을 전도가 되었다는 것부터가 그랬고, 족장으로서의 권한마저 스스로 박탈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라는 것도 그랬다.
현재 그들에게서 위임받은 족장의 대행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고, 더불어 칠대부족의 주요 인사들 역시나 한 자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면 요령족의 땅인데……. 거기에 있나?”
라미레스의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꺼지지 않는 헤세시의 불을 수호하는 요령족이 붉데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그래요. 그곳에 모두 모여 있습니다.”
설란이 물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필요하단 거죠? 저희는 마령이 뭔지도 모르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될 텐데 말이죠.”
“그건 가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때다. 파천이 엄지와 검지를 서로 부딪히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마령의 기운이 보통이 아닌데……. 이 정도라면 내가 간다 해도 장담할 수 없어.”
파천이 지금 한 말을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미레스는 엉뚱한 파천의 말에 황당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짚이는 게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원령이 주는 지혜가 파천을 다른 이로 변모시키고 있다.’
“파천, 마령이 대체 뭐냐?”
파천은 라미레스의 얼굴에서 하늘로 시선을 향하며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우주에 악한 기운이 가득해지면 스스로 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지. 생명수가 영자들의 심령을 선한 의지로 이끌어 들이듯이 우주 또한 그런 작용을 하게 된다.
마령이란 이런 우주의 정화하려는 힘 중 어떤 이유에서건 뒤틀림이 있었을 때 이탈하는 기운디아. 인격체에 작용하기도 하고 물리 현상으로 그치기도 한다.
메타트론이 공간을 비틀어 놓을 때 일부의 마령이 이탈했고,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었다. 그것이 하필이면 칠대부족장에게로 한꺼번에 전이된 것이다.“
“그건 너무 공교로운 일이군. 어찌 마령이 그들만 찾아내서 전염시킬 수 있단 말이더냐?”
그는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전염이라 했지만 그만큼 적당한 표현도 없으리라.
“원 숙주가 있다는 말이겠지. 그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거야. 그들을 목표로.”
파천은 결정을 내렸다.
“가자. 가서 봐야겠다. 마령이 그들에게서 칠대부족 전체로 퍼지는 날에는 감당하기 벅차진다. 그런데…… 날 지목해 찾아온 것 같은데, 요령족 중에 헤세시의 정령이라도 있나?”
정확한 판단에 요령족은 놀라워했다.
“네, 본족의 대법사님이 헤세시의 정령을 품고 계십니다. 그 분이 최근에 말씀하셨죠. 선발대에 마령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있다고. 그래서 이렇게 급히 찾게 된 것입니다. 마령이라 판단하신 분도 그 분이셨습니다.”
“그런가? 다행이로군. 내가 생명의 뜰로 들어선 이후라면 시기를 놓칠 뻔했어.”
라미레스 등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금의 파천은 우리가 알고 있던 지난날의 파천이 아니다.’
그의 결론은 무척이나 단순했지만 극히 지당하고도 정확한 것이었다.
파천의 변화는 매우 느리지만 그를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변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작용하고 있었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지혜와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 긍정적이 변화라면, 부정적인 건 때로 파괴적이거나 모든 걸 단순화시키려는 의지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었다.
때로 단순한 것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세상일이다. 서로간의 예의를 따진다거나 이해가 엇갈리는 무제를 춘다거나 그도 아니면 일의 경중이나 선후를 가리는 등 따위가 그런 것이었다.
지금은 어쨌든 긍정적인 면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었다. 파천 등은 칠대부족이 머물고 있다는 요령족의 땅으로 들어섰다.
요령족 헤세시는 무한계의 부족들 가운데서 가장 신비스런 면이 많았다. 그들 역시나 카란으로부터 시작된다지만, 엄밀히 말해 카란 역시 거두어들인 것뿐이지 기원을 훨씬 이전부터였다.
첫 불꽃. 헤세시의 꺼지지 않는 불은 전사라면 한 번쯤 삼키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나 도정한 이들은 많았으나 성공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요령족 헤세시의 땅 중앙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작은 불꽃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새파란 불꽃은 한 자에서 시작해 일장에 이르기까지 타올랐다가 다시 작게 사그라진다. 이런 반복은 영원토록 계속 될 듯했다.
요령족은 누구나 이 불꽃을 몸에 지니고 있다. 그들은 요령족이 되기 위해 불꽃을 삼키고 그 힘을 빌려 살아간다. 만약 어떤 능력자가 있어 헤세시의 꺼지지 않는 불을 꺼버리는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요령족은 그 순간 모두가 소멸할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불의 힘에 의지해 살아 왔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때로 전사들이 이곳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이 원하는 건 하나였다. 그들 역시 불을 삼키길 원한다. 불을 삼키는데 성공한다면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하기에 위험성이 크다는 걸 알면서도 시도하는 자들이 많았다.
파천이 말한 헤세시의 정령이란 불꽃의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기운의 정수를 이름이었다.
불꽃이 제일 커졌을 때 그 중심에는 주먹만한 예쁘고 귀여운 얼굴이 나타난다. 갖가지 표정을 짓고 있는 새하얀 정령을 삼킬 수 있으면 불꽃을 삼키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소유하게 되기에 요령족ㅈ은 끊임없이 그 일을 시도해 왔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걸 삼킨 이가 없었기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던 일이었다.
그러던 요령족에 대법사가 탄생했다. 그녀는 요령족 사상 처음으로 정령을 삼켰고, 그 순간 요령족 족장 다음가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파천과 라미레스 등은 요령족의 대법사와 대면하고 있었다.
카이로는 자신의 부족원들에게 가 있는 중이어서 실내에는 보이지 않았다.
파천은 대법사의 얼굴을 가만 쳐다보고 있었다. 대법사의 몸 역시나 불꽃에 감춰져 있었는데, 그녀는 신비하게도 다른 요령족들과는 달리 불꽃의 색이 새하얗다. 그 바람에 다른 헤세시들은 옷을 걸치지 않았지만 그녀는 옷을 입고 있었다.
대법사는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파천이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라미레스는 생각했다.
‘정령과 영적으로 통하기라고 하는 건가?’
그는 파천이 헤세시의 정령과 대화하는 중이라 판단했다. 그렇지만 대답은 대법사에게서 나왔다.
“네, 그렇네요. 먼저…… 찾아가지 않아…… 미안해요. 늘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어요.”
무슨 말일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설란은 그때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너는 요령족이다.’ 적루아가 소군에게 했던 말이었다. 설란이 반색하며 외쳤다.
“소군이구나! 맞지, 그렇지?”
“네, 저 소군이에요.”
요령족 헤세시의 대법사가 소군이다. 소군이 요령족 헤세시의 대법사다.
행복의 순간은 예기치 않은 가운데 찾아온다. 급작스레 방문해 온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다 언제 그랬는냐 싶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작은 발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건 다시 찾아올 때 행복감이 더욱 커지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소군의 미소는 따뜻했다. 단 한 번도 눈물이라는 걸, 슬픔이라는 걸 겪어 보지 못했던 천진한 소녀처럼 그녀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파천은 소군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만났는걸. 미안한 건 오히려 나지.”
“왜요? 사부님이 제게 미안해하실 게 뭐가 있다고?”
“널 지켜주지 못했잖아.”
“…….”
“…….”
모두의 침묵은 긍정의 의미가 아니었다. 파천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회한의 찌꺼기가, 그 무게가, 그 답답함이 그들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언제쯤이면 잊혀질까? 언제쯤이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될까?’
설란은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혼자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군과 담소를 나누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파천에게는 없었다. 마령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이 더 시급했다.
소군은 파천만을 대동한 채 칠대부족장이 갇혀있는 곳으로 갔다. 칠대부족장들이 이곳 헤세시의 땅으로 모여든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다.
‘출구 없는 방.’ 헤세시들은 모두 그렇게 불렀다. 한때 카란이 머물며 만들어 둔 곳으로 공간을 폐쇄시킬 수 있었다. 다르다면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개폐를 결정한다는 점이었다.
파천은 그 앞에 섰다. 그의 이마에 깊은 골이 잡혔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파천은 안의 상황을 보지 않고서도 훤히 알 수 있었다. 내부의 요동치는 마령의 힘은 갇혀 있음으로 더욱 드셌다.
소군은 파천이 원령체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작은 고민이 하나 생겼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파천을 따르고 싶었다. 천마, 설란, 율극, 광마존이 함께 하는 것처럼 소군은 파천을 따르고 싶었다. 그들 모두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결정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시선들은 부담 이상의 의미였다. 그녀는 요령족을 떠날 수 없는 신분이었으며, 그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빠져나간 빈자리는 요령족에게 족장 이상의 허전함을 줄 것이었다. 파천이 말했다.
“문을 열거라.”
“괜…… 찮으시겠어요?”
파천이 원령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소군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마령의 힘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사부님이 마령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족장들이 이 곳을 빠져나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 혼란이 빚어진다.’
파천은 소군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마령의 본체가 아닌 이상 날 버겁게 하지 못한다.”
파천의 미소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소군은 따라 싱긋 웃었다.
“제가 잠시 잊고 있었어요. 세상에 사부님을 힘들게 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지금 둘은 시간을 거슬러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제자에게 전능하게 비치는 사부와 그로 인해 한없이 맹랑하고 당돌한 제자로.
소군이 문을 개방하는 시점에 맞춰 파천은 원령으로 보호막을 쳤다. 그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소군을 염려해서였다. 개방된 문안으로 한 발을 밀어 넣는 순간이었다.
“크하하하.”
“히히히.“
“우억.”
괴이한 웃음과 고함소리가 한데 뒤섞여 고막을 때린다. 파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 걸음 더 내딛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일곱 명의 괴인들이 구분 없이 뒤엉켜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며 흡족해 하고 있던 중이었다.
외부에서의 방문자를 느낀 족장들은 일시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들은 전신 피부는 거무죽죽해서 살아있는 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썩어 악취를 풍길 것만 같은 모습들이었다.
소군은 펼쳐진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었던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케 했다. 그들 중에는 요령족의 족장도 섞여 있었는데, 그녀는 소군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소군은 시선을 외면했다.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 파천의 반응은 이런 소군과는 달랐다.
“다행이군.”
다행이란다. 저런 꼴을 보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소군은 궁금했다. 파천은 헛되이 아무 말이나 쏟아 놓는 경솔한 인물이 아님을 알기에.
“마령의 골수에 미쳤지만 아직은 영혼이 머물고 있다. 영혼이 떠났다면 이들을 소멸시켜야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다행이야.”
마령이 골수에 미쳤다. 용족의 족장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크크크, 문이 열렸다. 나가서 세상을 한줌의 물로 녹여버리자.”
그들은 의식이 불분명한 가운데서도 서로가 동료임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또한 원래처럼 용족의 족장이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파천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마령의 본주! 넌 지금…… 날 보고 있겠구나. 속이려 하지 마라. 난 널 알고 있다.”
파천의 엄밀한 시선이 일곱 명을 차례대로 훑어갔다. 그들 중에 하나는 구분해 냈다. 타이론족의 족장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파천의 시선이 머물자 뜨거운 불길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놀랐다. 그의 눈은 분명하게 두려움을 떠올리고 있었다.
“너로군. 네게 첫 번째 마령이 씌었구나. 너로 인해 모두가 이 꼴이 된 거고. 그런데…… 이런.”
뭔가? 무엇을 보았기에 파천이 이리도 탄식하는가?
“왜 그러세요?”
족장들이 파천을 두려워하는 것 같자 다소 안심한 소군이 급히 물었다.
“저 자도 마령의 본체는 아니다. 원 숙주는 따로 있다.”
심각한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이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로 인해 마령에게 감염된 자들이 영계를 휘젓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파천은 타이론 족장의 두 눈을 통해 본주를 찾아내려 애썼다. 바로 그때다.
“원령체란 말인가?”
타이론 족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의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고 막강한 기운을 흘려내기까지 했다. 파천은 싱긋 웃었다.
“마령의 본주께서 납시었군.”
마령의 원 숙주는 분명 이곳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감염시킨 마령의 통해 감염된 자를 지배할 수 있었고, 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자신을 실어 보낼 수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여섯의 족장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며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잔뜩 웅크렸다.
“어떻게 원령체가 탄생할 수 있었지?”
그는 파천의 원령체에 애해 극도의 경계심을 나타내었다. 원령과 마령은 상극이다. 천적이라 불려도 좋을 만했다. 파천은 애매한 말로 대신했다.
“원령체는 때가 차면 언제든 나타난다. 마령이 그랬던 것처럼.”
“날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원령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나?”
“아니. 본류와 근원이 동일하니 어느 쪽이 더 강하다고 할 수는 없지. 다만…….”
“다만?”
“넌 공간의 비틀림으로 일부의 마령만 공급받았고 그래서 제한적이지. 네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을 내게 미치지 못한다.
“과연 그럴까?‘
“흐음.”
파천은 마령의 두 눈을 통해 그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느낀 마령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차단시키려 했다.
“네 놈이 감히!”
“놀랍군. 메타트론이 공간을 비튼 걸 기회삼아 마령을 섭취하다니. 너는 그들이 보냈구나.”
“으음.”
모든 걸 들켜버린 마령은 침음했다. 그곳이 곧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바돈을 수족처럼 부리고 마신들을 제조하고 여러 부족을 멸망시켰군. 칠대부족의 보물을 갈취한 이도 너고, 스메이 부족원들을 끌고 간 흉수고 너로군. 너는 바로!
이런…… 왜 이런 짓을 하지? 그리고 네가 만들고 있는 건 또 뭔가?“
“대단하군. 인정할 수밖에 없어. 원령체의 위력이란 게 이 정도란 걸 알았다면 난 어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고 그레고스를 살려 두지 않았을 거다.”
그 또한 파천이 어떻게 원령체가 되었는지를 알게 된 것 같았다. 파천은 마령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일을 도모해 왔는지를 낱낱이 파악하게 되었다.
“넌 지금껏 세상을 잘도 속여 왔군. 심지어 네 후계자에게까지 말야. 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고야 만다. 대단해. 참으로 대단해. 어떻게 수호자마저 속일 수 있었는지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 군.”
파천의 경고를 들은 마령은 큰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뒤에 천천히 입을 열어갔다.
“그때의 나는 순수했다. 무한계와 영계를 위해 그다지 크다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기여를 해왔던 게 사실이야. 이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던 내게도 욕망이라는게 있음을 이후에야 알게 되었지.
수호자? 물론 그를 만난 이후의 변화였다. 내게도 기회가 오더군. 그들의 제안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난 기꺼이 승낙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난…… 마음먹어서 이루지 못한 일이 없다. 이제 결실의 때만을 기다리고 있거늘……. 네가 나타났다. 원령체인 네가.“
“넌 왜 날 제거하지 않았지? 기회는 많았을 텐데.”
“그럴 필요가 없었어. 난 네가 지금처럼 원령체가 되리라곤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널 통해 내가 모르고 간과했을지도 모를, 수호자와 메타트론과 신의 계획아 안배를 알아내려 했었지. 그랬던건데…… 이제 보니 내 실수였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어.”
“네가 만들고 있는 게 뭐지? 그동안 모아들인 보물들로 뭘 만들고 있나? 그걸 위해 그처럼 큰 비극들을 만들어 내다니.”
“그래, 알려주마. 네 말대로 내가 얻은 마령은 제한적이다. 내 목표는 영계만이 아니다. 메타트론과 수호자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둘을 상대하자면…… 지금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
난 그들에게서 조언을 얻어 한 가지 마병을 만들어 오고 있었다. 신의 전능이 만들어낸 광명과 필적하는, 아니 더 뛰어난 마병을 만들어 왔다.
이제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것만 완성한다면 너도 수호자도 메타트론도 내 적수는 아니다.“
“그래서 스메이부족이 필요했던 건가?”
“그래, 그들의 재능이 필요했지 내가 지닌 능력과 그들의 능력이 합쳐져야만 꿈꿀 수 있는 작업이었거든. 두고 봐라. 이제 모든 존재는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이다.”
“결국…… 너 때문에라도 광명은 필히 얻어야겠구나.”
“하하하하, 그래, 기다려 주마. 마신들이 네 앞길을 막지 못 할테니 네가 돌아올 날을 기다려 주지. 제발 광명을 가져 와라. 그래서 매 위대함을 더 돋보이게 해주길 바라마.”
“똑똑히 기억해 둬. 그리고 그들에게도 내 말을 전해라. 너뿐만 아니라 그들 그리고 비밀 차원 역시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너희들이 뿌린 씨를 스스로 거두게 해주겠다”
마령의 대답 없이 떠났다. 남은 족장들은 광분하기 시작했다. 그들 내에 잠재되어있는 마령의 힘이 발작을 일으킨 때문이었다.
파천은 족장들의 발작을 지켜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스스로에게 짐을 지우다니. 루딘족의 장래는 또 어찌 될지.”
마령에 감염된 일곱 명의 족장들이 몸을 가두고 있던 두려움마져 떨쳐낸 채 파천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의 힘은 원래보다도 어떤 측면에서는 더 강하다 볼 수 있었다. 그들의 합해진, 무지막지한 공격력을 헤세시의 대법사 소곤은 전혀 두려운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믿음. 파천이 곁에서 지켜 줄 것이란 믿음이 그녀의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키는 힘이 되었다. 파천은 이런 소군의 신뢰에 부응하기 위해 손을 떨쳤다. 제왕력의 호신막이 발동돼 칠대부족장들을 엄밀히 감쌌다.
파천은 그 위를 사정 두지 않고 가격했다. 제왕력의 제 번째 기예가 펼쳐지고 있었다. 검의 형상을 한 원령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원령검은 최직단의 선을 선택해 칠대부족장들의 호신막을 때렸다.
모든 게 잠잠해졌다. 광분하던 족장들은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고, 조금 전까지도 그들을 특징짓던 사이한 기운은 상당히 감소돼 있었다. 그것으로 끝난 건 아니었다. 파천은 그들을 일일이 일으켜 세워 골수에 미친 마령을 씻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원령으로 마령의 한 점 찌꺼기를 태워 버리려면 상당한 시간을 소요될 것 같았다.
파천은 정신을 가다듬고 원령을 돋웠다. 원령의 기운을 잘못 다루면 칠대부족장들을 회복시키기는커녕 죽게 만들 수도 있었다. 파천은 신중하게 족장들의 내부에 원령을 밀어 넣었고 마령의 기운을 조금씩 태워갔다.
소군은 파천이 족장들을 하나씩 치료하는 내내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족장들이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이 소식은 칠대부족원들에게 새 힘을 주었다. 그 동안 겪었던 마음고생은 칠대부족원으로서 오만함을 한 팔 꺾어놓았고 넓은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워 주었다.
이제 그들은 더 큰 단결심으로 부족을 일치시켜 나갈 것이다. 또한 세상 밖으로 향해 굳건하게 닫혀 있던 문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열 수도 있을 것이다.
파천을 대하는 칠대부족원들의 태도에 고마움과 존경의 빛이 담긴 건 당연했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칠대부족장들은 친히 멀리까지 마중을 나왔다. 파천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파천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던 권위를 벗어 버렸기에 그들은 이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얼마든지 출정이 가능한 상태였다.
하룬으로 가겠다. 그들은 무한계에 닥힌 위기를 나 몰라라 할 수 없다며 그렇게 약속했던 것이다. 파천은 응당 그래야 한다고 여기기에 고마워하는 따위의 공치사는 생략했다.
확인해 본 바로는 벨거서스에서 오대전사단에 넘겼던 보물 역시 사라진 지 오래라고 한다. 결국 그 보물들은 마령의 완성을 위해 소모되고 있는 셈이었다. 카란이 남겼다는 보물. 그것이 오히려 무한계를 위협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군의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군의 갈등을 눈치 챈 요령족의 족장이 임무를 부여한 까닭이다.
“대법사는 선발대에 동참해 결과를 통보해 주시길 바랍니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소군은 파천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아쉬워하는 헤세시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신나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카이로는 뜻밖의 말을 했다.
“헤세시의 대법사라면…… 나보다도 더 지위가 높은데……. 내가 존대를 해야 하나…… 요?”
소군의 눈이 샐쭉해졌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카이로는 농담을 진담으로 어물쩍 받아넘기는 소군이 괘씸했다. 그는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소군아, 네 사부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 설마하니 잊지는 않았겠지?”
카이로, 즉 율극은 파천의 의제다. 그렇다면 파천의 제자인 소군에게는 사숙이 되는 셈이다. 괜히 장난치다 본전도 못 찾을 형편이 되자 소군은 샐샐 웃으며 카이로의 비위를 맞추었다.
“왜 이러세요. 제가 장난친 것 가지고.”
둘의 하는 짓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파천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맞장구를 쳐줄 법도 한데 너무도 냉정한 모습에 소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역시 예전의 사부님과는 어딘가 많이 틀려. 원령체가 되었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군.’
라미레스와 설란, 페리칸도 뒤처질 새라 황급히 속도를 높였고 둘만 남은 율극과 소군은 서로 쳐다보았다. 기대했던 반응들은 고사하고 눈길고 받지 못하자 둘은 머쓱해졌다.
“우리도 그만 따라가죠.”
“그래야겠지.”
소군과 카이로는 힘차게 몸을 솟구쳤다.
헤세시의 땅을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때였다. 파천이 모두에게 말했다.
“잠시 쉬어가자.”
그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앉았다. 설란과 소군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푸느라 담소에 정신을 팔고 있었고, 카이로와 페리칸은 아까부터 시작된 설전을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었다.
아그립바는 설란의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둘의 대화를 경청하는데 열중해 있었다. 파천에게 말을 건넨 건 라미레스였다.
“기분은 좀 어떠냐?”
라미레스가 뭘 궁금해 하는지 파천은 잘 알고 있었다.
“괜찮다, 아직은.”
라미레스는 파천의 상태가 어떤지 판별해낼 기준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을 훌쩍 넘어서 버린 파천이다. 그는 무사하길 기원하는 게 전부였다.
굳이 심각한 얘기로 파천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별로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 헛기침만 해대는 게 안쓰럽다. 이때 다행히도 파천이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수호자가 그러더군.”
“……?”
뜬금없는 서두였지만 내용이 심상치 않아 보여 귀를 활짝 열고 집중한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메덴에서 수호자의 안배를 만났었다.”
제왕력에 대해 설명을 하며 이미 언급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네게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아니 모두가 들어 두어야 할 얘기다. 숨겨야 한다고 내게 충고했으나…… 난 너희들에게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뭘 말하고자 저렇게 사설을 길게 늘일까? 모두의 궁금증이었다.
“수호자는 내 안에 있다. 내가 수호자일 수도 있고 서로 개별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 그는 내 의식 안에 스스로를 봉인한 채 암중으로 내 길을 이끌어 왔다. 그의 마지막 전언은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설란은 다른 이들과 달리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알고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내 곁에 반드시…… 메타트론이 있을 거라고 했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고백이 또 있을까? 모두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파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수호자의 말처럼 메타트론이 반드시 파천의 곁에 있어야 한다면 이들 중에 그가 있다는 말인가? 파천은 고쳐 말했다.
“그 시한은 광명을 어디 전까지다. 난 너희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호자의 말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앞으로 선발대에 포함된 누군가일수도 있고 이미 선발대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털어 놓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난…… 너희들을 신뢰한다. 만에 하나 너희 중에 메타트론이 있어도…… 그래서 내 뒤통수를 치는 일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너희들이라면 난 받아들일 수 있다.“
마지막 부분의 얘기는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 파천은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의 날 만든 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나다. 내 안에 있는 건 그래서 나만이 이해한다. 지금의 나. 나는 혼란을 겪고 있다.”
파천은 솔직한 지금의 심경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지만 지금 함께 있는 이들과는 서로를 구별할 필요도 없는 친인들이기에 가능했다.
“지금껏…… 두려움이야말로 날 돌아보게 하는 유일한 동기였다. 지는 것이, 패배하는 것이,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두려웠다. 주변의 친인들을 그로 인해 잃게 될까봐, 그들이 나로 인해 아파하거나 슬픔에 잠기는 게 난…… 그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래서 난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더 강해지지 위해 애를 썼다. 지금의 나, 충분히 강해졌지만 아직도 여전히 두렵다. 두려움에 맞서 싸우지 않고 뒤로 물러서기만 한다면 결국엔 제 몸을 부풀려 날 집어삼키고야 말겠지.
광명을 얻은 뒤라면 어떨까? 그때도 두려움은 여전할 거야. 아무리 내가 강해져도 끝없이 내 안을 채우고 채워도 두려움은 가시지 않는다. 분쟁이 있는 한, 그 가운데 내가 서있는 한, 날 통해 무엇인가를 시험하려는 자들이 있는 한 말야.
그래서 난 결심했다. 이 지겨운 사슬을 이제는 끊어 보자고. 어쩌면 난 또다시 너희들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난 얼마 전에 기억을 모두 되찾았고 분명한 나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심연 중에서 가물가물 솟아오르는 게 또 하나 있다.
그건 또 다른 나의 모습이었다. 눈만 감아도 선명해지려는 그 존재는 나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뭔데 그러지? 파천, 우리한테 숨기지 말로 모두 털어 놔봐라.”
라미레스의 다그침에 파천은 고개를 숙였다.
“아직은 분명치 않아. 단지 예감일 뿐이다. 아주 불길한…….”
“파천, 내 생각을 말해볼까? 삶에 옳고 그름이란 없다. 유일한 판단자는 다름 아닌 바로 너 자신이다.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이 곧 진리요, 최선이다. 우리는 널 믿는다. 네가 최선의 선택을 해나가길…… 그리고 끝내는 승리할 걸로.
설사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널 원망하지 않는다. 구리는 처음과 동일하게 널 신뢰하기에 널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걸고.“
라미레스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전부를 보여 주었다. 그도 파천에게 하지 못한 말을 꺼내 놓았다.
“이제부터는 내 얘기를 해야겠다. 나 또한 네게 해주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짐작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또 하나의 신분이 있다. 난 메덴의 수련자이고, 수호자는 만난 일곱별 중에 하나지만 그 전에 날 지배하고 있는 위치는…… 옛용의 용천이다.”
또 하나의 숨겨진 이야기. 아난다는 용천이란 말에 헛바람을 삼켰다. 라미레스는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용천의 옛용., 그에게는 두 명의 분신이 있었다. 둘 다 네가 만났던 자들이지. 루시퍼와 그레고스. 그들은 상반된 길을 걸었다. 부정과 긍정.
루시퍼는 옛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메타트론만 인정할 뿐이다. 그레고스는 그와는 또 반대라 볼수 있다. 옛용은 오래 전에 하나의 조직을 만들었다. 지혜전사단! 초대단주는 당연히 그레고스였고, 카란이 한때는 부단주를 역임했지.
지혜전사단에 소속된 자들은 서로를 잘 모른다. 옛용의 지시에만 따르며 그의 명령이 하달되면 그대로 이행한다. 그 대가로 단원들은 모두 가장 소중한 것들을 옛용에게 맡겨 두고 있다. 생명. 그래, 나는 내 생명을 맡긴 대신 힘을 얻었다.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생명은 그의 결정에 달려있다. 만약 그가 악독한 마음으로 우리를 해치기로 작정한다면 우리는 저항하지도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단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들의 현재 신분이 어떠한지도 서로 알지 못한다. 아직은 아무런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곳의 단주가 바로…… 나다.“
아난다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라미레스는 그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혹시 아난다 너도?’
라미레스의 직감이 그렇게 부추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