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49화 : 새로운 전선, 하룬으로!
새로운 전선, 하룬으로!
선발대에 합류하게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했던 너울은 요즘 상당히 심각한 휴유증을 앓고 있었다.
쓸쓸히 파천의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당시의 심정은 말로 할 수 없는 참담함을 경험케 했다. 그는 그때처럼 스스로의 나약함이 부끄러워본 적이 없었다.
선발대를 구성했던 대부분의 대원들은 지금 하룬에 돌아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함께 모여 있었다. 이런 조치는 아난다의 주선으로 이뤄진 수뇌부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서였다. 너울은 마계와 대치하고 있을 선계 진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건 각시를 비롯한 선계에서 차출된 선인들도 마찬가지였고 천상계 출신들도 동일했다.
그들은 여전히 선발대원이기를 고집하고 있었으며 그 심정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 심정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할 일이 없군.”
너울은 그렇게 말했다. 숙소를 정해주니 하릴없이 밀려와 구겨지듯 웅크리게 되었다. 하룬의 긴박한 전경과는 어딘가 동떨어진 모습들을 하고 여기저기 뭉쳐서 시큰둥한 표정들을 짓고 있다.
물론 선발대원들 모두가 그런 처지인 건 아니다. 초기 대원들 중에서도 아난다는 말할 것도 없고 아레나도 상당히 비중 있게 대접 받고 있었고, 앙샹뜨는 전사들 간에 흔하게 있는 사소한 감정다툼 등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데 더없이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심지어 수련자의 자격을 박탈당했던 도나투스나 무한계 영자들에게 경원의 대상이었던 브라함과 페드로도 상당한 위치를 은연중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카이로나 페리칸, 불칸과 몰간이야 워낙에 이름난 자들이니 두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선계와 천상계에서 처음부터 소집되었던 초기 선발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선계와 천상계로 돌아가도 실제로 주력으로 편성되지도 못할 처지이기도 했다. 너울의 말을 각시가 받았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 우리처럼 태평인 것도 다 복이지.”
그러자 마고가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별 생각 없이 말을 툭 뱉어놓는다.
“복은 무슨. 무능력의 소치지.”
무력함. 그랬다. 선발대원들 중 어느 쪽에서도 반길 이 없는 비중 없는 인물들!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절망감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힘이 없기에 싸우고자 하는 열정조차 무시당해야 하는 현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비관한다 해서 달라질 것이 없기에 그들은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너울이 말했다.
“우리는 그래도 선발대잖아.”
찬다마나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파천이 돌아오길 기다리고만 있을 게 아니라 현재의 위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거지.”
마고가 그들의 대화에 참견하고 나섰다.
“뭘? 어떻게?”
“글쎄……그건…… 구체적인 방법은 나도 모르겠지만.”
제명된 도나투스가 껄껄 웃으며 그들의 작은 변화를 반겼다.
“방법이야 찾아보면 많지. 당장 밖에 나가보면 할 일은 지천일 거야. 너희들은 좀더 일찍부터 이랬어야 했다.”
권터가 맞장구를 쳤다.
“아암, 그렇고 말고. 사실 이 하룬에서 너희들만큼 유명한 작자들도 몇 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선발대잖아. 선발대가 몸소 나서서 전사들을 독려하고 일각의 힘이나마 보태는 모습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감동을 줄 거다.”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 황당한 기대였다.
“정말 그럴까요?”
순진한 각시의 반응에 도나투스가 헛기침을 흘렸다.
권터의 그 말은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너무도 감상적인 기대였다. 의기소침해 있는 것이 보기 안쓰러워 무심코 던졌던 말이 이젠 도나투스로서도 수습이 안 될 정도였다.
권터의 말에 용기를 얻은 선발대원들이 숙소를 벗어났다. 그들은 정말이지 어떤 일이든 마다 않고 작은 힘이라도 보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그들이 낄 공간은 그 어디에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이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롬멜 전사단의 조장 하나가 냉정하게 잘라 말하자 너울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공식적인 통보 사항이 없는 한 제 임의대로 여러분을 소속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네.”
너울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대답을 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가던 전사들 중 하나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무심코 한마디를 쏘아붙인다.
“선발대원들 아냐? 왜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는 거야?”
“할 일도 없고 하니 바람이라도 쐬러 나오셨나 보지.”
“팔자들 늘어졌지 뭐야. 산부에서는 왜 저런 자들을 귀빈 대접을 하나 모르겠단 말야.”
자기네들끼리 작게 소곤거린 말이었지만 선발대원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다.
괜히 걱정이 앞서 따라나섰던 도나투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하지 않음만 못하게 된 지금의 상황이 마치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양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가 죽어 있던 선발대원들이다. 몇몇 역량 있는 선발대원들이야 하룬에서도 중요 위치에서 제몫을 다하고 있다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지 않던가? 오히려 천덕꾸러기의 신세나 다름없다는 게 정확했다.
그걸 자각하고 있던 대원들은 그 소리를 듣고 나자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하룬을 뛰쳐나가고 싶은 맘만 간절했다.
“그만…… 가자.”
이레네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지나던 전사들이 무심코 뱉어낸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처연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암흑과 빛은 완전하게 분리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대개는 그렇다. 빛의 영역에 암흑은 다가서지 않고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법.
그러나 지금 파천이 다가선 곳은 그와 같은 일반적인 상리를 완전히 벋어나고 있었으니. 기껏해야 빛이 다가서지 못하는 사각에만 제 영역을 확보해야만 할 암흑이 당당하게 빛과 공존하고 있었다.
빛과 암흑의 공존! 기묘한 현상은 파천을 난감하게 했다.
수직으로 뻗은 거대한 탑은 뾰족한 첨단 부분을 중심으로 네 개의 두드러진 기둥을 사방에 둘렀다. 각기 하나씩의 기둥에는 청, 홍, 백, 자색의 큰 구슬이 박혀 있었고 그 밑으로 용의 모습을 표현해 놓은 듯한 기둥에서는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주변을 압도할 만한 웅장함의 무게가 느껴졌다.
파천은 그 앞에 서서 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탑의 주위 사방에는 빛과 어둠이 물결치며 서로를 희롱한다. 파천은 기묘한 전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첨탑에는 파천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생물이 조각되어 있었다.
“독수리의 날개에 머리는 뱀의 형상, 몸통은 사자, 꼬리는 전갈의 것인 듯하다. 이 탑은 대체 뭐지?”
파천의 중얼거림에 수호자가 답했다.
“배반의 탑.”
“배반의 탑?”
파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탑의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 언뜻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완전자들이 거쳐 가야 하는 중간계의 관문 중 하나다. 너와는 관련이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흠…… 그런가? 하긴…… 나는 완전자가 되고자 함이 아니니…… . 그런데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지?”
“이 탑은 신의 속성 중 파괴와 징벌을 상징하는 것. 무슨 이유에서인지 완전자 중 일부가 이곳에서 모든 걸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리 빈번한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그들은 이곳에서 한참 동안을 목 놓아 울었고 미친 듯이 광소를 흘리다 오던 길로 돌아갔다.”
“…… .”
그들은 신의 다스림에서 제외된 비밀차원으로 자원해서 흘러 들어갔고 지금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 이후부터 천사들은 이곳을 가리켜 배반의 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배반의 탑이라…… . 물론 신에 대한 배반을 이름이겠지? 참 기이한 일이군. 완전자의 반열에까지 이른 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신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비밀차원으로 자진해서 들어가야만 했을까?”
파천은 지극한 호기심에 두 눈을 빛냈다.
수호자는 담담한 음성으로 파천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환기시키려 했다.
“가자. 이곳은 너와 인연이 닿아 있지 않은 곳.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파천은 그곳을 떠나며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파천의 시야에서 첨탑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첨탑의 기이한 생물이 번쩍 눈을 떴다. 새파란 광망을 흘리며 고개를 슬쩍 돌리는데 그 방향이 사라진 곳이었다.
그 생물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시커먼 암흑의 기류가 뭉클뭉클 솟아나고 그사이로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때가 왔다. 새롭게 계약을 맺을 시기가 도래했다. 이번에도 과연 신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모든 건 인간들에게 달려 있다. 그들이 신을 의심하는 한 악마의 무리들은 손쉽게 혼돈의 주인이 될 수가 있지. 그 편이 내게는 좋은 것을, 흐흐흐흐흐….. .”
반가운 손님이 무한계 진영에 합류했다. 그는 귀계의 칠성 중 하나인 대덕이었다. 인세에서 천마의 부인이었던 적루아.
그녀가 칠성대덕의 신위를 회복하고 무한계로 합류한 것이다. 그녀는 아무도 대동 않은 채 혼자 하룬으로 왔다. 귀계가 공공연히 마계의 편을 들어온 지는 오래되었고 둘이 한통속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녀가 하룬에 등장함으로 무한계는 귀계라는 껄끄러운 적의 대두를 현실로 받아들여만 했다.
대덕은 무한계 수뇌들과 잠시 회동을 가진 뒤 곧바로 선발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귀계의 귀령들은 육체가 없다. 허나 칠성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반 귀령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현격한 차이의 영력과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마계의 마력이나 영자들의 프리즈마 유동과는 다른 차원에서 강자들로 공인되어 있었다.
적루아는 선발대원들이 있는 곳에 이르자 얼굴을 활짝 폈다. 아난다와 카이로와 페리칸,
소군을 다시 만난 반가움 이상의 희열의 빛이 그녀에게서 뻗어 나왔다. 숭고한 빛.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길 없는 신비한 기운이 모두를 기이한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대덕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었네요.”
그녀는 누구의 안내도 없이 이곳을 스스로 찾아왔다. 마침 카이로등도 함께 있던 자리였던지라 그들 간에 반가운 해후의 시간이 흘렀다.
대덕은 말했다.
“이곳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이레네가 피식 웃으며 자조적인 음색을 흘렸다.
“빛이라…… .”
‘절망의 빛이겠지.’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너무도 환한 빛. 그래요 이것은 희망의 빛이에요. 여러분들이 계심으로 인해 영계는 무사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이레네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혼자만의 생각이었는데 대덕은 대답을 해오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 놀람 또한 그 혼자만의 것이었다.
아난다는 대덕을 자리로 이끌며 구계의 동정을 물었다.
“그들의 선택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어요. 돌이키길 간곡하게 청했지만 그들은 이미 수렁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었죠. 그리고 그 길이 더 달콤할 것이라 말하더군요. 어쩔 수 없죠. 이미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여야죠.”
칠성 중 가장 불가해한 존재가 대덕이라 했다. 그녀는 반대의 입장에 서서 적이 되겠노라 선언하고서도 무사히 빠져나왔으며,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루시퍼를 만나 전쟁 상황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라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
모두의 생각이었다. 칠성대덕은 모든 것에 초연해 보였다.
그녀는 칠성 중 가장 탁월한 예지력을 지니고 있다. 그건 다른 차원계를 통틀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런 이유로 단 한마디도 허투루 들을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 세상에 있을 때 파천에 대해서도 예언을 한 바가 있었다.
그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말을 했으며 그가 장차 큰 세 가지를 잃고 큰 세 가지를 얻는다고 했었다.
‘사부님은 지금껏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을까? 그리고 장차 또 잃을 것이 있으며 얻을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소군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대덕이 또 다른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힘은 강성하여 선계와 천상계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지요. 그렇지만 그들 역시나 저력은 무시 못 하죠. 가장 원만한 결과가 생겨날 겁니다.”
아난다가 다급하게 질문했다.
“원만한 결과란 게 뭐죠?”
“로메로님도 그렇게 질문하더군요.”
대덕은 빙긋 웃었다.
“순리대로 되는 것이죠.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는 이도 완전히 극복하기 전에는 그 안의 순리에 따라야 하는 법. 뿌린 자가 거두겠죠. 당장에 위험은 커 보이나 마계가 하룬과 메덴을 동시에 정복하지 못 하고서는 원하는 결과를 쉽사리 얻어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암류는 그들 자체 내에서도 여러 갈래이니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것 같기도 하네요.”
쉽사리 단정 지어 풀어내지는 않는다. 대덕은 묘한 미소를 흘리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아난다는 뭔가 알 듯도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파천에 관해서 물었다.
“파천님은 광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앞날을 내다보는 건 생명수와 그 위의 광류(光流)를 보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광명은 광류로서도 알 수 없는 허락되지 않은 영역. 어찌 제 짧은 능력으로 함부로 그것을 입에 올릴 수 있겠어요. 하지만…… .”
“……?”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어요. 그분은 본래의 자신을 찾게 될 것 같네요.”
대덕은 애매한 짐작으로 마무리했다.
그녀는 현재의 마계와 천상계, 선계연합군 간의 전쟁 상황을 간략하게 언급했다. 천상계는 처음에 뜻밖의 우위를 점함으로 기세가 올랐지만 근본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뒤로 밀리고 있다고 했다.
다행인 것은 천상계나 선계가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전력을 운용하기에 단시일 내에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면적인 격돌을 피하고 국지전의 형태로 유도해 나가고 있으며 전력의 손실이 우려되면 후퇴시켜 배후의 새로운 전력으로 대체 하는 식으로 버텨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이면서도 놀라운 것은 마계에서도 전체 전력의 3할 이상을 투입하지 않고 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처럼 대응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연합군측은 점차 뒤로 밀려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까지 다다르게 되었다는 건 분명했다.
“패색이 더 짙어지기 전에 요단을 내리라 봅니다. 그것만이 지금의 전력이나마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아난다가 물었다.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 같습니까?”
“영계는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한계가 전장이 되었으니 이곳 사정에 밝은 무한계 진영으로 합류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대덕은 천상계와 선계가 결국엔 하룬으로 합류하게 될 것이라 단정적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아난다는 그 후의 상황을 짚어보았다. 과연 지금 상황에서 선계와 천상계가 무한계 진영을 합류하는 게 득인지 손해인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내심으로 고개를 젓는 아난다.
‘좋지 않다. 전력을 하나로 집결하는 건 겉으로 보기엔 현명한 처사 같지만 사실 외부의 적들도 단일한 목표를 가지기 때문에 그만큼 명확해진다. 더군다나 현재처럼 적이 하나 이상일 때는 협공의 우려도 있다.
모르겠군. 과연 그렇게 되는 것이 진정 좋은 건지를.’
“그들의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손실은 큽니다.”
대덕의 말과 전황은 너무도 들어맞는 것이었다.
마계의 7로군 중 2개 군단과 중앙군에서 아수라들로만 구성된 2천의 정예만을 차출해서 전선에 투입 했는데도 상황은 급히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8선이 이끄는 선계의 전력과 천상계의 마신단 전원이 전선에 모조리 들러붙어 간신히 막고 있는 상황이었고 수세인 접전 지역을 천왕대에서 지원을 해줘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점차 무한계의 중부권 쪽으로 밀리고 있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막상 개전이 되고 나서 대규모 접전 양상으로 치닫다보니 형세는 애초의 예측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실상 마계로서도 이 정도로 우위를 보이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일이었으니 천상계나 선계가 받은 심정 충격은 꽤나 큰 것이었다.
연합군은 전선의 접점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마계의 2로군단의 수만 물경 2만을 헤아린다. 결국 전면과 측면 그럴 때마다 제석과 노군은 뒤로 조금씩 후퇴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제석이나 노군도 이제는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후방에서 진두지휘하느라 열을 내고 있었다. 수적인 열세가 이 정도로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날지는 누구도 짐작 못한 일이었다.
마계 7로군의 병력 7만에 중아군인 마황군의 병력 3만, 거기다 귀계의 1만에 달하는 구령들. 10만을 상회하는 정예 병력을 천상계와 선계의 8천이 좀 넘는 인원으로 막아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단지 그들이 기대한 건 개개인의 월등한 실력 우위였다.
그런데 그것마저 의외로 간격이 크지 않아 그다지 기대할 게 못 되었다. 게다가 큰 기대를 걸었던 천상계의 천주들도 대마신에 견줄 정도는 아니란 점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마계는 아직 7로군 중 5개 군단과 중앙군인 마황군도 투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정도의 전력 차이를 보이는 상태에서 전략이나 전술이라는 건 무용지물이었다.
선계8선 중 하나인 태선이 노군에 있는 사령부로 와 급히 전황을 보고했다
“이대로는…… 절망적입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말인가? 분명 노군은 그런 표정이었다.
“달리 묘책이라도 있소?”
모두는 허둥대고 있었다. 대책을 수립해 돌파구를 제시해야 할 지도부나 전선에 투입돼 군대를 진두지휘하는 신장이나 선장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8선 중 넷과 33명의 천주 중 17명아 전선에 직접 참가하고 있었으며 그들로 인해 그나마 이 정도라도 버티고 있다는 게 정확한 말 이었다 마계와 연합군을 합해 현재 형성되어 있는 전선에만 2만 5천이 득실대고 있었다.
“…… .”
묘책을 묻는다. 태선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
“저들이 열중에 둘을 투입했는데도 이 지경이거늘…… . 달리 방법이 있을 수가 없겠지.”
나머지 여덟마저 투입된다면 살아남을 자 얼마나 되겠는가?
노군의 옆에 섰던 충선이 제안했다.
“대마신 발리와 찬드라를 직접 노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나마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 때 본진과 적들 간의 간격을 최대한으로 벌려 놓습니다.”
“그런 연후엔?”
“후퇴 명령을 내려야겠죠.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중과부적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껏 농락당하다가 전멸을 면키 힘듭니다. 그런 예측이 확실하다면 더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어디로 후퇴한단 말이오? 저들이 우리를 놔줄 리도 없을뿐더러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디 가서 숨겠소? 끝까지 사우는 수밖에 없소. 전원 옥쇄를 각오하고 마지막 하나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갈 곳은 …… 바로 하룬입니다.”
“하룬이라면?”
“으음.”
“설마?”
주변에서 충선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이들이 저마다 당혹감을 표시했다.
“그렇습니다. 무한계의 주력이 있는 바로 그 하룬입이다. 그들과 힘을 합해야합니다.
다행인 것은 그들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그들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마계와 자웅을 겨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거라니 그것이 대체 뭐란 말이오?”
“현재 우리가 마계에 밀리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수적인 열세입니다. 그것만 대등하게 만들 수 있다면 방법은 생깁니다.”
그의 말은 정확한 현실감각을 보여 주었다. 무한계는 수적인 면에서 마계보다도 월등하다. 아니 전차원계에서 무한계 만큼 인적 자원이 풍부한 곳은 단연코 없었다.
천상계보다는 선계가 많고 선계 보다는 마계가 많으며 마계보다는 무한계가 많다. 그것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전 영자들의 수가 십 억이 되는지 백 억이 되는지 아니면 천 억이 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많은 수의 대다수가 무한계에 터를 잡고 있었다.
지금 하룬에 모여 있는 영자들은 대부분 중부권에서 세력을 이루고 있던 극히 일부의 영자들이다. 마계의 침공이 시작되고 나서 대다수의 영자들은 남부권을 떠나 중부권이나 북부권으로 떠나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충선은 물론 그들 일반 영자들까지 대상으로 거론하는 건 아니었다. 충선은 하룬에 모여
있는 전력만을 언급하고 있었으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선계와 천상계가 그들과 합쳐지면 하룬은 또 나름대로 마계를 상대할 상층부를 보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을 들어 충선은 하룬으로 퇴각할 것을 긴급히 제안 하고 나섰던 것이다.
영계대전쟁의 발발이 예상되던 시점에 무한계와의 합작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그래서 연합군의 한 축을 무한계가 담당하는 구상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그런데도 제석과 노군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당면한 적이 마계가 아니었다면 천상계의 오만함으로 봤을 때 선계와의 연합군을 형성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상대가 벅차기에 그들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하룬으로 가는 건 전혀 상황이 다르다. 그들이 와서 합류해 준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패퇴하여 초라한 모습으로 그들에게로 가 도움을 청해야 하는 모양새는 그들로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충선은 갈등하고 있는 둘을 향해 좀더 강력한 어조로 설득했다.
“자존심을 따질 시기가 아밉니다. 생존의 문제입니다. 다른 방도가 있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좀더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 .”
“그때는 늦습니다. 결단해주십시오. 두 분의 결단이 천상계와 선계를 보존시키느냐 이대로 사라지고 마느냐를 결정할 겁니다.”
이 정도면 가히 협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두 분께서 끝까지 여기서 마무리를 짓길 원하신다면…… 따라야겠죠. 그때는 전원을 투입해 저지선을 돌파하고 살아남은 자가 루시퍼와 대마신들을 쳐야 합니다. 유일한 선택입니다.”
충선은 장삼봉 이었다. 그는 마계가 어느 정도의 전력인지를 가장 잘 파악하고 이 중에 하나였다.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어느 정도는 예견했지만 지금처럼 힘도 못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황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 또한 하룬으로의 전격적인 합류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그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까지는 칠성대덕을 만난 영향이 컸다.
그녀는 루시퍼를 만나고 칠성 중 여섯을 대면한 연후에 곧장 충선을 찾아왔었고 몇 마디 말을 스치듯 흘렸었다. 그녀의 말을 곰곰이 되씹다가 내린 결론이 바로 지금의 제안이었던 것이다.
곁에 선 천주들과 태선은 제석과 노군의 결정을 기다렸다.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하느냐, 전원 옥쇄를 각오하고 최후를 장식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리고 과연 그것이 명예로운 죽음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충선의 제안을 들으며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천상계 천주들이 특히 더 그랬다.
‘천상계가 영계를 지배했었다는 기억은 이제 버려야 할 때, 과거의 영광에 젖어 안일하게 지내는 동안 우리는 이미 그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젠 현실을 인정해야 할 때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제석과 노군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제석은 내심으로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바가 있었다. 마계의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그리하여 본격적인 전쟁 발발의 징후가 보인다면 설마히니 선계와 무한계가 자진해서 다스리고 있는 천상계의 그늘로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그런데 무한계는 현재까지 독자노선을 고집했다. 아바돈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이해시켰다. 이제 그는 무한계의 안전망 속으로 몸을 숨겨야 한다.
기억조차 희미한 까마득한 과거에는 영자들 모두가 자신을 섬겼었다. 영계의 유일무이한 지도자 그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제석의 오랜 숙원이었고, 이번 마계와의 전쟁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도 냉정하게 자신의 이런 기대를 저버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들 속에서 그는 확고하게 그 사실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연합군의 사령부가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있는 동안 전선에 새로운 변화가 발생했다. 귀계 귀령들의 합류. 귀계의 칠성 중 여섯은 이번에 일만의 귀령을 이끌고 참전했다. 그들 중 5천 정도가 새롭게 전면전에 뛰어든 것이다.
간신히 평형을 이루고 있던 세력 균형이 급하게 마계 쪽으로 쏠려갔다. 그걸 감지한 사령부는 안절부절못했다. 제석이 무거운 어조로 탄식하며 말했다.
“하룬으로…… 합류한다.”
파천은 새로운 전경 앞에 섰다
망망한 대해 앞에 서면 탁 트인 전경에 마음속까지 시원해진다. 그런 느낌이었다. 이제야 도착해야 할 곳에 거의 다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원령이 강렬하게 감응하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신비스러운 전경이로군.”
그가 그렇게 넋을 놓고 감탄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빛의 물결. 빛의 바다. 그렇게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일대 장관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형형색색의 빛 무리가 모여 들었다 흩어지며 바다에 크게 너울어치 듯 현란하게 움직이고 시야를 희롱하며 부서지는 섬광은 전혀 뜻밖의 형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몽환적인 환상을 그려내는가 하면 의외의 광경을 연출해내기도 했다. 선한 아이가 있엇고 요부의 모습도 보였으며 늙은 주름살 가득한 노인의 얼굴도 나타났다 사라진다. 수호자가 말했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니, 네가 그렇게 하고지 마음먹는 순간 넌 이미 저 안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길은 그 다음에 열린다.”
파천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까이 온 건가? 저기로 가면 광명을 얻을 수 있나? 느낄 수 있다. 내 몸이, 매 몸이 너무도 뚜렷하게 반응하고 있다.’
불완전한 원령체인 파천이 지금처럼 명료한 의식을 상당 기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광명에 그만큼 가까이 왔음을 뜻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파천은 발을 떼었다.
수호자의 말과 같았다. 어느새 자신은 휘황찬란한 빛 무리 가운데 있었고 끝없이 이어져 넘실대는 빛의 파도에 몸을 싣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그와 같았다. 그는 어디로 가야 힐지 결정하지 못하고 주춤했다.
“중심으로 가야 한다. 우주의 심장과 다름없는 빛의 낙원, 생명의 뜰이 그곳에 있다.”
수호자도 지금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안배하고 이끌긴 했지만 성취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로서도 능력과 권한 밖의 광명을 곧 파천이 대면하고, 어쩌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차올랐던 것이다.
수호자는 더 이상 파천을 도울 게 없다. 이곳까지 이끌어 올 수는 있었지만 이후의 성취는 온전히 파천의 몫. 생명의 뜰에 이르게 되면 수호자는 파천에게 분리되어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된다. 파천도 직감하고 있는 일이었다. 여전히 파천의 내부에 함께하고 있는 아그립바도 그곳에 이르면 분리될 것이다.
그리고 파천은 혼자 가야 한다.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그의 삶의 마지막 선택을 그 홀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의 뜰에서 퍼져 나온 빛의 줄기들은 끊임없이 파천의 전신을 두드려댔다. 파천은 더할 수 없이 상쾌한 기분을 만끽했다. 눈앞을 스쳐 지나는 빛의 결정체들은 한정된 인간의 언어로는 설면함이 적당치 않을 정도로 신비롭고 순수해 보였다.
얼마나 갔을까? 파천은 시간의 흐름도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더 가야 생명의 뜰에 이르게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작정 몸을 맡겨두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파천은 유연한 동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루시퍼에 대한 원한도 친인들에 대한 애정도 세상의 혼탁함도, 불안이나 고통이나 의심이나 실망이나 그를 좌절케 하는 운명의 무거움도 이 순간만은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의식의 밑바닥 아주 깊은 곳에 숨죽이며 잠재되어 있다.
이 순간 그를 지배하는 감정은 극렬한 호기심이었고 불구의 의지뿐이었다.
‘반드시 이룬다 . 지나간 과거에 더 이상 후회의 집은 짓지 말자. 그보다는 미래를 위해 초라한 기둥이나마 세우는 편이 낫다. 이겨내야 한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이 닥칠지라도 내 생명을 던져 이겨내야 한다.
어려움을 피하고서는 극복하지 못한다. 내 몸과 마음을 다해 부딪쳐 그것이 절대 날 지배할 수 없음을 증명하고야 말리라. 백만 번을 거듭 산들 지금의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기호란 이런 것이다. 모든 매듭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기회. 놓칠 수 없다!’
파천은 가고 또 갔다. 지루함은 없었다. 점차적으로 약간씩 호흡이 가빠져 왔다. 이런 순간에 일정한 고승마냥 차분하길 바라기는 무리였다. 파천은 두 팔을 벌리고 날아가다가 순간적으로 눈앞을 급히 가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급작스럽게 눈앞이 환해졌기 때문이다. 도저히 눈을 뜨고 맞받을 수 없는 강렬한 빛을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전혀 새로운 공간. 눈을 어지럽게 하는 휘황찬란한 빛의 물결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파천을 맞이하는 한층 부드러운 느낌의 전경이었다. 연한 초록빛은 파천의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뻗어 있었다. 기실 방금까지 파천이 거쳐 온 곳과 초록의 빛깔은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지금 파천이 딛고 선 곳은 생명의 뜰로 이르기 위한 경계 지점과도 같았다 광대한 공간은 매우 낯설었지만 파천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하늘이 열려 있다.’
그랬다 조금 전까지 파천은 하늘을 볼 수 없었다. 사방에 충만한 빛의 물결은 하늘도 땅도 공간도 차단시켰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초록의 뜰은 나선형을 이루며 하늘로 뻗어 있었고 그 주위로 은은하게 빛나는 빛줄기들이 사방을 향해 어지럽게 뻗어 오른다. 끝이 보이지 않아 어디에까지 이어져 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수호자가 말했다.
“생명의 뜰로…… 들어서라.”
파천은 앞을 향해 묵묵히 걸었다. 저 멀리 초록의 풍경 가운데 유난히 구별되는 하나의 이질적인 느낌이 파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천은 그 대상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파천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가물가물 하던 형체가 확연하게 보이는 지점이었다. 시선을 하늘로 주었다.
‘보이지 않는 곳 너머에…… 천궁이 있을까?’
나선형으로 뻗은 뜰의 끝자락은 파천의 안력으로도 파악되지 않는다.
파천은 다시 걸었다. 파천을 기다리고 서 있는 건 천궁의 천사였다. 천사! 파천은 이 불가해한 존재를 대하고 혼자만의 상념에 젖어들었다.
자신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천사는 루시퍼와는 달리 매우 성결하고 순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고결함이 은은한 서광에 뒤섞여 파천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에게서 소리가 흘러 나왔다.
“결국은 오고야 말았군요.”
파천은 싱긋 웃으며 고개만 끄떡거렸다.
“이곳은 불완전한 생령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은 단 한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제 임무는 허락되지 않은 존재들이 생명의 뜰에 난입하는 걸 막는 것이죠.”
파천이 막 입술을 달싹거리려는 찰나 천사가 먼저 소리를 발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제한적으로 허락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제게 시험받게 됩니다만…… .”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두 가지 시험 중 하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하나는 그대의 능력으로 저를 제압하시면 됩니다.”
파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압하라. 매우 단순한 요구였다. 그렇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지 투지가 일어나지 않는 대상과 싸우고 싶은 맘도 없었다.
“나머지 하나는….. 뭐죠?”
“의지의 견고함을 시험받는 일입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방금 전까지 그대라는 존재에 대해 지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허락되지 않은 생령이 광명을 얻기 위해 여정을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저를 비롯한 천궁의 천사들은 당신을 주목 하고 있었죠.
그대는 열 영계의 강자들과 이런저런 모양으로 관계를 맺고 있더군요. 그리고 정말로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대 안에 수호자를 대동하고서 말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시선, 메타트론을 배후에 간직하고 말이죠. 그래서 전 지금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답니다.”
천사가 살짝 웃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파천의 전신은 급격하게 경직되어갔다.
‘메타트론이?’
천사는 계속 제 할 말만 했다.
“두 분을 한 자리에서 뵙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죠. 지금 천궁의 모든 천사들도 이곳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파천의 뒤에서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음성이 흘러나온다. 파천은 돌아서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메타트론은 파천의 앞에 서 있었다.
“나타나엘, 네 할 말만 하라. 주제넘게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파천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장소와 상황에서 메타트론이 등장하자 일시 당황했다.
메타트론과 루시퍼의 반역이 있고 난 뒤, 천궁의 천사들에게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할 만한 점이라면 급격한 역할과 직급의 변동을 들 수 있었다.
원래 천사들은 총 아홉 품계였으며 상, 하 관계가 철저하고 역할분담이 확실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홉 품계가 일곱 품계로 축소되었고 사실상 역할에 따른 구분일 뿐 서로간의 계급 차이는 무시되었다.
각 품계를 주관하고 소속된 천사들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일곱의 천사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대천사라 칭했다. 그 일곱의 대천사들 중 하나가 바로 나타나엘 이었다.
나타나엘은 지혜와 지식의 천사들로 구분되는 지천사들의 군주로 받들어지는 최상위의 천사였다. 또한 새롭게 대천사장이 된 미카엘의 다음이라 인정되는 천궁의 최강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예전 메타트론이 천사로 있을 때만 해도 동등한 직급이었을 정도로 비중 있는 대천사가 바로 나타나엘.
그런 그를 메타트론은 사정없이 깔아뭉개고 있는 것이다.
나타나엘은 메타트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마저 이었다.
“그 오만함은 여전하군요.”
“지천사장인 네가 직접 이 자리에 나올 이유는 없었을 텐데? 무슨 목적이지?”
“저희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생명수와 생명나무를 지키는 일임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죠?”
메타트론은 나타나엘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천천히, 그렇지만 매우 분명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신이 말하지 않던가? 특별한 계약으로 파천에게는 너희들의 시험이 제외되었다. 그를 지금 당장 뜰 안으로 들여보내라. 그리고 그 스스로 광명을 얻게 하라. 그것이 네 역할이고 임무다.”
나타나엘의 입가에서 잔잔하게, 매우 희미하게 남아 있던 미소가 얼굴 전체로 화려하게 퍼져 갔다.
“그런 언급은 없으셨답니다. 단지…….”
“단지?”
“공평한 기회를 부여하라 하시더군요.”
“공평한 기회?”
메타트론은 나타나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전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에게도 다른 완전자들처럼 생략된 시간을 체험할 기회를 주기로.”
“그건 안 돼!”
메타트론은 불같이 노하고 있었다.
“되고 안 되고는 제가 결정합니다. 그가 혹시라도 광명을 얻게 될까 봐 불안하신가 보군요.”
“날 기만하지 마라. 날 시험하지도 마라. 그가 광명을 얻게 되는 일은 결단코 없다. 특별한 혜택이 없는 한, 인간 따위가 광명을 취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운 거죠?”
“어쨌든 그런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이건……약속 위반이다. 계약을 불이행하겠다면……그것이 신의 뜻이라면……나 또한 더 이상 파천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나타나엘은 피식 웃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메타트론의 음성이 점차 싸늘해져 갔다.
“천궁의 천사등…… 모두를 데려와도 날 막을 수는 없다. 너희들 따위가 내 뜻을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은가! 확인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응해주지. 신이 아니면 안 된다. 허나, 신은 스스로 결정한 뜻을 번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내 뜻에 따라 파천을 들여보내야 한다.”
나타나엘은 침묵했다. 물론 메타트론의 오만한 그 말을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저자는 이제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일곱의 대 천사가 모두 나선다 해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지금 저자와 마주치게 되면 비밀차원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되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때 파천에게서 변화가 있었다. 먼저 아그립바가 분리되었다. 뒤이어 또 하나의 존재가 파천에게서 생겨났다. 수호자! 그는 바로 신비의 존재 수호자였다.
“메타트론, 함부로 날뛰지 마라.”
차분하고 조용한 음성이었다. 파천은 뒤로 돌아서서 수호자를 확인했다. 수호자는 파천과 시선을 마주치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나섰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생략된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면 오히려 네게 더 유리할지도 모르지.”
수호자와 메타트론이 마주섰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었다. 파천은 둘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다. 둘의 모습은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둘의 분위기는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전혀 다른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내 눈이 잘못된 건가?’
그들의 모습은 한 순간도 동일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파천은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게 유리하다고? 너는…… 이미 알고 있었나? 이놈들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걸…… 알고있었던가?”
메타트론이 수호자를 바라보는 시선엔 단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내포되어 있었다. 수호자는 나타나엘에게로 가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군요.”
“네. 그렇군요.”
“대답부터 해.”
메타트론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수호지가 힐끔 그를 주시한다.
“예민한 반응 보일 필요 없어. 어차피 넌 장담하지 않았던가? 어떤 변수가 있어도 생령인 파천이 광명을 얻을 수는 없을 거라고. 두려운가? 그럴 테지.”
“천만에. 그런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아. 그것보다 네 약속은 유효한 건가?”
수호자는 메타트론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신 또한 약속 위반을 한 적이 없다. 단지 너 혼자서 제멋대로 단정 지었던 것뿐이고.
애초에 신은 우리 둘의 대결에 아무런 간섭도 관여도 하지 않기로 했고 지금껏 그 약속은 지켜져 왔다.“
“그 지긋지긋한 변호는 집어치우고 네 입장만 말해.”
“변호, 변호라고? 후후, 그러지. 물론 유효하다. 네가 이긴다면 …… 네 뜻에 …… 따르지.”
“그래. 그 약속이면 충분하다.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껏 인내했음을 너도 잘 알 거야. 좋다, 나타나엘.”
“…….”.
“파천에게 생략된 시간을 체험하는 데 동의하지. 대신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수호자도 나타나엘도 일시 긴장했다.
“그 체험에 나도 동승하지. 그래야 네가 말한 대로 공평할 것 같은데…… . 물론 거절하진 않겠지?”
수호자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걸 메타트론은 놓치지 않는다.
나타나엘은 쉽게 대답을 못하고 망설였다.
나타나엘의 시선이 수호자를 찾는다. 그의 의경도 필요하단 의미일까? 수호자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할 수 없는 일이군. 대신 너와 내가 함께 한다.”
수호자도 참여하겠노라 선언한다. 파천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짐작조차 못했다.
‘생략된 시간? 그게 무엇이기에 저들이 저렇게 예민한 반응들을 보이는 걸까?’
나타나엘은 이번엔 메타트론을 주시했다.
나타나엘은 잠시 동안 자신들의 관심에서 소외되었던 파천에게로 다시 시선을 향했다.
“생략된 시간을 체험하는 데 동의합니까?”
“그것이 대체 뭡니까?”
파천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타나엘에게서가 아닌 수호자에게서 나왔다.
“네 잠재된 의식으로의 여행을 뜻한다.”
“잠재된 의식?”
“그래. 네 안에 있지만 너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잠들어 있는 시간들. 넌 지금부터 그 모든 걸 다시 들춰내는 거다. 나도 메타트론도, 너 자신도 알 수 없는 네 영혼의 깊은 비밀을…… 오직 신만 알고 있는 그 비밀스런 기억들을 함께 한다는 말이다.”
파천은 충격 중에 휩싸였다. 그리고 흥분되기도 했다. 그로서도 거절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염원하던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서 알고자 했던가? 적루아도, 영계의 영자들도, 수호자도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내 전생을 모두 알 수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
메타트론과 수호자와 함께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
파천이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 수호자는 짐작했다. 그는 파천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나 메타트론이 네게 개입할 수 있는 경계는 한정되어 있다. 가장 핵심적닌 건 동승한다 해서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단지….네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나와 메타트론의 견해가 널 엉뚱하게 이끌지도 모른다. 그런 영향이 결과적으로 어떤 작용을 하게 될지 나도 모른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있다는 의미다. 어떻게 하겠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수호자는 씁씁한 표정을 했다.
“그렇긴 하지.”
“좋아, 동의한다.”
수호자와 파천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만났다. 수호자는 지금 강렬한 염언을 파천에게로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한 걸음이다. 내 확신에 대한 선택이 옳았음을 네가 증명 해줘야 한다.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난 나를 잃게 된다. 파천, 부탁하겠다. 부디 널 이겨내길 바란다. 이 지독하게 끈끈하고도 음습한 네 운명을 네 의지로 극복해내기를.’
나타나엘은 파천의 흔쾌한 동의가 있고 나자 다소 긴장하며 셋을 자신의 앞으로 이끌었다.
완전자들에게만 허락되었던 의식이 거행되려 하고 있었다. 완전자들은 실제적으로는 생명의 뜰에서 이 의식을 거치고서야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음을 선언할 수 있었다.
전생을 들여다보는 것뿐만 아니라 채 발현된 적이 없었던 가능성의 의식 까지 생생하게 느낀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건 완전자가 마지막으로 극복해야 하는 관문과도 같았으나 파천에게는 광명에 이르기 위한 시험으로 채택되었다. 그는 굳이 극복해내지 못해도 좋다. 완전자가 되어야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완전자들에게는 그저 주어졌던 광명이 파천에게는 극복의 대상이라는 점이 달랐다.
나타나엘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고 기원하듯 두 눈을 감았다. 생명의 뜰 위, 그 너머 어딘가에 위치하고 잇을 천성을 향해 손끝이 세워졌다. 파천은 그 손이 가리키고 있는 하늘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한 줄기 빛!
그리 화려하지도 아름다울 것도 없는 작은 빛줄기 한 가닥. 저 말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린 빛은 정확하게 파천의 이마를 조준했으며 그의 명료했던 의식은 한번에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