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56화 : 지혜전사단의 마지막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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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56화 : 지혜전사단의 마지막 임무


지혜전사단의 마지막 임무

록페른을 홀로 지키던 영자가 떠나고 난 뒤 그곳엔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라미레스가 파천에게 필요한 알파이온을 얻기 위해 들렀던 곳. 바로 그곳에 영자들이 모여들었다.
수는 3백이 조금 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록페른 정상에 흩어진 채 서로를 무시한 채 서거나 앉았다. 때로 안면이 있는 자들끼리 삼삼오오 떼 지어 모여 있는 것도 눈에 띈다.
놀랍게도 하룬에서 실종되었던 아난다도 이곳에 모습을 보였다. 아난다는 모여든 자들을 살피며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들 가운데서 눈에 익은 자들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난다의 오랜 친구들이기도 했다.
‘저들도…… 결국엔 왔군. 하긴……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그들도 아난다를 반겼다. 전사평의회가 열렸던 매소 뮤린에서 만났던 두 영자, 마로 그들이었다. 이름도 신분도 알려지길 꺼려했던 자들의 얼굴에서는 그 전과는 달리 잔잔한 흥분이 서려 있었다.
“어서 오게. 하룬에서 오는 길인가?”
대머리를 하고 있는 작달막한 키의 영자였다.
그는 아난다의 손을 쥐고 한동안이나 흔들어댔다. 그의 손이 유난히 새카맣다.
또 하나의 영자는 선발대에 닥친 위기를 해소시켜준 신비의 걸인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은…… 여기까지 왔군.’
셋이 모여서 담소하고 있는 곳을 주시하고 있는 눈길이 있었다. 아난다의 슬쩍 보는 눈길은 그는 맞받지 않고 빠르게 외면했다. 걸인 행색을 하고 있는 자가 말했다.
“저놈도 왔군. 하긴 아무리 시간이 흘렀지만 태연하게 널 다시대할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 않을 테니. 거의 다 온 것 같아. 당시의 일에 결부된 영자들은 거의 다…… .”
록페른 정상, 너른 초지에 모인 영자들은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들을 소집한 장본인을 기다리는 것이다. 대머리 수련자가 중얼거렸다.
“단주가 누구지? 지근도 그레고스님인가?”
걸인도 모르는 듯했다.
“아닐 거야. 그 분은 단주에서 물러난 지 오래됐다.”
아난다는 알고 있었다. 현재의 단주가 누구인지를. 밝힐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조금 있으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기다림의 지루할 텐데도 무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들의 인내심은 대단했다.
휘이이잉
한줄기 바람이 초원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바로 그때 음성이 들려왔다.
록페른 정상 전체를 떨어 울리는 큰 음성의 주인을 모구는 너무도 잘 아는 듯했다. 그레고스, 바로 그였다.
“모두들 잊지 않고 모여 줬구나. 정겨운 얼굴들을 다시 대하니…… 감회가 새롭다.”
그레고스는 무리 중의 가운데에 갑자기 뚝 떨어져 내렸다.
그의 곁에 또 하나의 영자가 보였다. 그는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여든 자들의 손에도 하나씩의 탈이 들려져 있었다. 눈구멍만 빠끔하게 있는 무면 탈 이었다.
지니고 있는 무면탈의 색깔은 저마다 달랐다. 검은색과 흰색, 붉은색과 푸른색, 황색이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었고 극소수의 은색 탈이 보인다.
그리고 현재 그레고스의 옆에 선자가 뒤집어 쓴 탈은 유일한 금색이었다. 그레고스가 말했다.
“옛용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 매우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지혜전사단은 이번 임무를 끝으로 영원히 해체한다. 그대들은 구속에서 자유로울 것이면 더 이상은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그대들이 저지른 실수는 이번 임무를 완수함으로 상쇄될 것이며 용서받을 수 있다. 축하한다, 지혜전사들이여.”
그토록 침착하던 아난다까지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걸인은 전신을 경련하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 고난의 순간을 잊지 마라. 순간의 실수가 얼마나 가혹한 형벌로 되돌아오는지를…… 앞으로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대들은 새롭게 출발할 수도 있고 자유롭게 영계를 떠돌 수도 있다. 이제 아무도 그대들에게 명령하거나 지시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조건이 있다. 영계에 평화가 자리 잡을 때까지는…… 여전히 지혜전사임을 망각해서는 안 되며 더불어 그 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영계의 적들은 섬멸할 때까지, 영자들이 안전하게, 평화롭게 살 수 있을 때까지 그대들은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단주를 소개하겠다.”
지혜전사들은 금면탈의 주인공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범상치 않은 기도가 느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그의 정체까지 알기엔 힘들었다. 단주가 말했다.
“우리의 적은 강하다. 그대들의 힘이 절실하다. 지금까지 그대들은 무한계나 선계, 천상계에 골고루 소속되어 있었다. 이 중에 전사단주도 있고 수련자도 있으며 천주도 있다.
모두…… 잊어라. 그대들의 신분과 소속을 잊어라.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가 완수되는 순간까지 기억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우리는 지혜전사이며 영계의 평화를 위해서 싸운다. 전투 중에 죽음을 맞게 되어도 누구 하나 그대들을 위해 슬퍼하거나 애도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름도 빛도 없이 영광과 영예도 없이 싸움에 임해야 한다. 잊지 마라. 지혜전사가 되는 순간 그대들의 생명은 내가 관장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내 지시에만 따라야 한다. 우리는 강하다. 오랜 시련 동안 연단되었기에 우리는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우리가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언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지도, 그럴 가능성이 더 많다. 운이 좋아 임무를 완수하게 되면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지워졌던 짐은 하나 남김없이 제거될 것이다. 그때부터 그대들은 자유인이다. 옛용의 약속이니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나중엔 기회가 없다. 이후엔 지시에만 충실해야 할터이니 스스로의 의지마저 의문 속에 묻어야 한다.”
단주는 단원들에게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이라 했다. 여기저기서 질문들이 쏟아졌다. 단주는 그 모든 질문들에 성실한 답변을 했다.
“단주의 신분을 알기 원하오. 이 중엔 조금씩 서로를 알고 있던 자들고 있으며 오늘 처음 대면한 자들도 보이오. 평소에 친분이 있었음에도 전혀 같은 지혜전사단임을 알지 못했던 자들도 있을 것이오. 우리는 이제 동일한 목표를 위해 뜻을 모아야하고 삶과 죽음을 함께해야 하오. 이후엔 단주의 명령만이 우리의 유일한 의지가 된다하시었소. 그렇다면…… 당신에 대해 최소한의 신뢰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우리의 생명을 맡겨야 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되오.”
그는 놀랍게도 천상계 33천의 하나인 호천(昊天)의 천주였다.
이 자리엔 두 명의 천상계 천주의 모습이 보였다. 또 하나는 화천의 천주였다. 둘은 함께 붙어 있었는데 그들 손에는 은색의 탈이 쥐어져 있었다.
호천주는 천상계의 천인들 사이에서도 무척이나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신위나 능력이 어느 정도 인지를 아는 천인들은 많지 않다. 심지어 그가 다스리는 호천의 신장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품성이 고아하고 소탈하며 사심이 없어 그를 대한 자들 치고 호감을 지니지 않은 자들이 드물었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나서지 않아 다른 차원계에는 많이 알려진 편이 아니었지만 천주들 치고 그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중천을 이끄는 지도자격인 대범천주도 호천주에 대한 예우만은 지나칠 정도로 극진했다.
그런 그가 지혜전사로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런 그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가 까마득한 예전엔 스스로 최고라고 자부하던 자들이었다. 물론 몇몇 절대자들에게는 한 수 양보하긴 했으나 자존심만은 대단했으며 지금까지도 그건 변함없었다.
호천주의 요구에 그레고스가 단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쩔 텐가?”
“해가 되지 않는다면 밝혀도…… 무방하겠지요.”
“해가 될 리야 있는가?”
지혜전사단주가 말했다.
“좋소. 그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겠소.”
그는 호천주에게 매우 호의적인 눈빛을 보냈다. 호천주는 그 눈빛이 낯설지 않게 여겨졌다. 지혜전사단주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가린 탈을 벗겨냈다.
“아.”
“저자는 바로.”
“으음.”
“라미레스!”
“이럴 수가…… .”
각양각색의 반응이었다. 한때는 마계의 대마신으로 영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마계를 떠나면서부터는 수련자로 명성을 드날렸다. 영계에서 절대자의 반열로 손꼽히는 유력한 인물이 지혜전사단주라는 신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라미레스는 단원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 나는 라미레스다. 그대들 중에는 나와 익히 알고 지내던 자들도 있을 것이며 그리 좋지 않은 사건으로 얽혀있는 자들도 있겠지. 모두 잊어라 그간에 나와 어떤 인연이 있었든 이후로는 단주로서 단원으로만 대할 것이다. 궁금증은 해소되었겠지요. 호천주. 아니, 부단주라고 해야 옳겠지요.”
호천주와 라미레스는 각별한 사이였다. 바알세불에서 라미레스로 전향하게끔 영향을 끼쳤던 자가 바로 호천주였다. 호천주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요, 단주가 단주라니…… 기쁘기 한량없구려.”
그는 정말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자신이 한 말이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지혜전사들도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였다. 어려운 싸움을 앞둔 입장에서 자신들의 생사여탈을 책임지고 감독하고 있는 지휘자가 이왕이면 유능했으면 하고 바라는 건 당연했다. 그런 점에서 라미레스 만큼 적당한 인물이 또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꽤 성질머리가 더럽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능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부단주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은색의 탈을 손에 쥔 자들이 라미레스 앞으로 다가왔다. 모구 다섯 명 이었다. 그 중엔 아난다도 끼어 있었다.
“아난다, 이렇게 또 만나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부단주는 호천주와 화천주, 아난다, 그 외 두 명이 더 있었다. 하나는 여기 모인 자들 중 가장 큰 덩치와 체격을 지닌 자였고, 또 하나는 여자가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섬세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둘위 이름은 부우버와 홀딘이었다. 부우버는 라미레스가 처음 마계 대마신의 지위를 버리고 천상계에 잠시 몸담고 있다 다시 무한계로 들어섰을 때 인연이 있던 자였다.
그는 카란이 메테우스를 따라 나섰을 때 적극적으로 막았던 인물이었으며 한때는 대천의 대신장이라는 지위를 지녔던 적도 있었다.
그는 메테우스의 품성과 지도력에 감복해 카란과 함께 그를 지지하다가 대신장의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카란이 메테우스와 함께 무한계를 개척해 나가는 걸 막음으로 해서 그들과도 사이가 벌어졌다. 그는 이후 영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 그가 옛용과 관련이 있고 지혜전사단의 부단주로 임명되어 있을 줄은 라미레스도 지금 처음 안 사실이었다.
“오랜만이군, 부우버.”
“그렇군요.”
부우버는 라미레스를 내려다보며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라미레스와 부우버는 예전 한번 격돌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근소한 차이로 라미레스가 승리를 하긴 했다. 그때 그 사건을 겪고 나서야 라미레스는 무한계의 잠재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나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었다.
또 하나의 부단주인 홀딘은 다른 단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야말로 그레고스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제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홀딘은 라미레스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레고스는 홀딘에게 자극을 줄 필요가 있을 때면 늘상 라메레스란 이름을 들먹이곤 했었다. 그 바람에 홀딘은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지만 그에게 경쟁심과 더불어 오랜 기간 생사를 함께 해온 친숙함도 더불어 지니게 되었다.
홀딘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결국은 만났네요.”
라미레스는 영문을 몰라 하며 그레고스를 쳐다보았다. 홀딘이 그레고스가 키워낸 제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레고스는 묘한 미소를 흘려낼 뿐 일언반구도 없었다. 홀딘이 말했다.
“이제 명령을 내려주시죠, 단주님.”
라미레스는 활짝 웃고 있는 홀디의 얼굴에서 지신의 천아를 떠올렸다.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는 부단주들과 그레고스와 함께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 오기 전에 벌써 장차의 행보에 대해 계획해 놓은 것이 있었지만 앞으로 함께 할 부단주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아난다가 제안했다.
“영계연합군에 침투해 있는 적의 첩자를 가려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부우버도 동의했다.
“모조리 때려잡아야죠. 그놈들을 품안에 안고서는 불안해서 제대로 싸우기나 하겠습니까?”
그들이 상의하고 있는 동안 지혜전사들은 탈을 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색의 탈을 쓴 자들끼리 대열을 이루며 모였다. 그들은 곧 단주가 명령을 내리리란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지혜전사라는 이름으로 모이지 않았다면 모두가 한 조직의 수장을 맡고 있을 능력자들이었다.
호천주는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모조리 솎아낼 게 아니라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도 효과적일 겁니다.‘
화천주는 의문의 표정을 지었다.
“밝혀내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묘수라도 있습니까?”
라미레스가 그레고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흠흠, 오래 전부터 첩자들의 동태는 파악해 오고 있었지.”
“으음.”
“역시.”
그레고스에 대한 감탄이었다. 그레고스는 각 조직에 흩어져 있는 지혜전사를 이용해 무한계와 천상계, 선계에 침투해 은밀하게 암약하고 있는 첩자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모두 이때를 대비해서였다. 그는 명령을 내리면 되었지만 그 동안 지혜전사들이 겪었을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그들이 치렀던 곤란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때로는 마계의 심장부에 직접 침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비천한 신분으로 위장해 수모를 겪기도 했다. 죽을 뻔한 위기가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지혜전사들은 나름대로의 사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내려진 지시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동원했다. 그 결과 현재 합취된 정보는 지혜전사단의 출범에 때맞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었다.
그레고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연하게 말했다.
“이 일을 위해 희생된 자들만 해도 부지기수임을…… 그대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이었다. 현재의 영계의 형세와 마계나 아바돈, 대적자, 또는 제왕의 군대에 대한 것까지 이들이 확보하고 있는 정보는 참으로 놀라울 정도였다. 밝혀지지 않고 어둠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부의 사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움직임을 그레고스는 파악하고 있었다.
이후 그의 입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내용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던 라미레스를 제외하고 부단주 다섯의 얼굴을 급변시켜놓고야 말았다.
심지어 파천을 기다리고 있는 마령의 본주가 보낸 자객까지도 언급되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 상세하고 세밀한 조사가 또 있을 수 있으랴 싶었다. 홀딘이 말했다.
“그럼 그들 중 일부는 색출해 제거하고 나머지 놈들은 바꿔치기 해 수뇌들을 가려내는 일에 이용하면 어떨까요? 물론 우리 지혜전사로 말이죠.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장난처럼 씩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이면서도 적절한 제안이었다.
이어 그는 죽일 자와 바꿔치기 할 자들을 분류해 가기 시작했다. 라미레스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내심 생각해두었지만 저처럼 빨게 즉각적으로 분류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들어보니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은가? 라미레스는 새삼스런 눈길로 홀딘을 쳐다본다.
“왜 그러세요, 단주님? 제게 따로 지시하실 거라도…… .”
기대의 눈빛이었다. 라미레스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작전은 홀딘, 그대가 전담하는 게 나을 것 같군. 방금 한 말을 나는 다 기억도 못했으니 말이야.‘
“그럴까요? 그러죠. 알았어요. 확실하게 처리해서 홀딘이 무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드릴께요.”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지혜전사단의 행사가 결정되었다.
첫 번째 작전은 홀딘이 맡고 있는 제5대에서 전담하는 걸로 결정돈 것이다. 지혜전사단은 하룬으로 떠났다.
그리고 은말하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제왕은 한때는 지신의 것이었던 군대의 힘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결심을 굳혔다.
‘이들 연합군을 도와 마르시온을 치는 데 힘을 보태자. 회복하지 못해도 좋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는 쿠사누스들이 비운 대지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은밀하게 숨어 있던 열한 명의 제왕들을 찾았다.
그리고 설득했다. 모두는 더 이상 제왕이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투지를 찾기란 힘들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한편으로 극복하기 힘든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마르시온의 악마적인 능력을 체험한 그들은 현실을 인정했고 그들이 인정한 현실이란 회복하고자하는 꿈과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남은 건 이제 회색빛의 절망뿐이었다.
제왕은 그들을 설득시켰다. 무한계의 상황을 들려주며 다소 긍정적인 방향으로 부풀려서얘기 했다. 다른 제왕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틀렸다. 포기하자. 그들을 이긴다 해도 우리가 얻을 건 없다. 상실한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존재 의미는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다.”
“그렇지 않다.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정말 죽은 것이다. 다른 사실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살해당한 제왕들의 복수는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로 비겁자로 낙인찍힌 채 도망 다니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소멸당하지 않는다. 옛 영광을 잃어버린 우리에겐 저주일 따름이지. 가자. 가서 우리가 살아 있음을,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자. 파천이란 생령을 보았다. 그는 판드아의 제왕과 같은 원령체였다. 그는 광명을 얻기 위해 생명의 뜰로 들어갔다. 신의 계획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 현장으로 가자. 그리고 신의 섭리를 체험하고 관찰하자.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보고 나서도 겪고 나서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차라리 우리를 소멸시키자.”
제왕들은 잠시나마 흥분을 보였다. 원령체의 등장이란 말에 그랬고 무한계의 상황이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그들을 일으킨 말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의지가 남아 있다면 죽은 것이 아니다.”
완전자가 되어 이 세계를 떠나간 최초의 제왕이 했던 말이다. 그러자 다른 열한 명의 제왕이 나머지 부분의 내용을 기억해 내며 동시에 소리쳤다.
“하고자 하면 이룬 것이다.”
그들은 좌절 가운데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죽음을 맞으러 갔다.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나선형의 뜰은 크고 넓고 아름다웠다.
파천은 족적을 하나 둘씩 남기며 앞으로 걸었다.
천사는 그를 이곳까지 데려다 놓고 사라졌다. 그는 파천의 곁을 떠나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었다. 그는 파천을 향해 이렇게 말했었다.
“많은 이들의 염원이 그대에게 모아져 있습니다. 그대를 보고 있으면 마치…… 타락하기 전의 첫사람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들의 순수한 열정이 그대 안에 살아 숨쉬는 것 같습니다. 뜰을 걸어가다 보면 당신은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생명나무에서 생명수가 나오죠. 아래엔 생명수가 흐르고 위로는 여래장이 흐릅니다. 그곳이 당신이 머물 곳입니다. 광명을 얻기를 바랍니다.’
파천은 천사가 이른 말처럼 천천히 걸어갔다.
맨발에 짓밟히는 부드럽고 고운 흙의 감촉은 참으로 신선했다.
파천은 앞으로 전진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위로 올라가고 있는 셈이었다.
빠르게 날아서 갈 수도 있었지만 파천은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당장에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을 묻어버리고 한 걸음씩 디뎠다. 그는 어쨌든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매우 더딜지라도.
‘이곳에서 첫사람과 용과 천사들이 함께 살았던가? 생명의 뜰에 생명이 없구나.’
파천은 생략된 시간을 체험하며 이곳을 보았다. 남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그 상황들을 자세하게 살폈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그들의 온기를, 그들의 생명을…… .
하지만 느껴지지 않는다. 허허로운 기운만이 가득하다.
‘생명의 뜰이 아니라 죽음의 뜰이라 불러야 할지도. 하긴 죽음이나 생명이나 매일반이니 어떻게 불려도 상관없겠지.’
파천은 걸으며 생각하고, 걸으며 보고, 걸으며 느꼈다.
생략된 시간을 거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목적은 단순했다. 지금은 모두 헝클어져버렸다. 뭔가 제대로 배열하고 정리해 이것이다, 라고 할 만한 걸 건져 올려야 했다. 희미해져 갔다. 여기 온 동기조차 다시금 짚어보지 않으면 잊어버릴 정도로 그는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갔다.
아니 부정한다는 의식마저 없었다. 그는 온통 걷는 데에만 집중해 있었다.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의 전부인 양 그런 행위에 새롭고도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파천은 이제 생각하는 것도 중단했다. 중단하겠다는 의지의 작용이 아니라 저절로 그런 상태로 빠져 들고 있었다.
아무런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시간의 흐름을 인식할 만한 변화가 전무한 곳에서 비슷하게 반복되는 공간을 파천은 ‘걸어간다는’ 맹목적이고도 무가치한 목표에 열중하고 있었다. 관찰하는 이도 없었다. 완벽한 그 혼자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파천이 인식하든 못하든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물질세계는 변화하고 있었다. 파천의 발이 무엇인가에 부딪혔다.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 때문인지 아니면 걷는다는 행위를 방해받았기 때문인지 파천은 발을 보고 있던 시선을 약간 앞으로 전진시켰다. 그곳에 나타난 것은 또 하나의 발이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발. 파천은 그제야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발이다. 누군가의 발이다. 누군가 나타났다.’
이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는 걸까? 파천은 시선을 좀더 높은 각도로 들어올렸다. 다리가 보였고 굵고 튼튼한 허벅지가 보였고 잘 발달된 상체 근육이 보였으며굳게 다물린 입술이 보였고 타는 듯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파천의 시선은 거기서 멈췄다.
습관적인 의식은 상대에게 누구냐고 물어볼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파천은 거절했다. 상대의 눈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흔한 경계심도, 하다못해 작은 호기심도 담겨있지 않은 완벽하게 죽은 눈. 그것은 생명을 부여받지 못한 조각에 불과했다.
파천은 손을 들어 슬쩍 밀었다. 넘어진다. 부서졌다. 정교하긴 했으나 생명이 없는 흙덩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부서진 머리와 부서진 팔과 발은 잠시 뒤 파천의 발에 밟혀 형체를 잃었다.
파천은 이제 새로운 놀이에 열중했다. 웃고 울고 분노하고 아파하는 갖가지 표정의 흙덩이들을 부수고 짓밟는 일이었다. 파천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 그의 기억은 생생하게 그를 새로운 시간대로 인도해 갔다.

마지막 떠나가는 길이었다. 왜 그런 짓을 시작했는지 설명할 길은 없었다. 인간으로 신이 안배한 인간세에 태어난다는 설레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인 듯 미친 듯이 흙덩이를 뭉쳤고 수많은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

파천은 그 기억을 짓뭉개기라도 하는 듯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부수는 일에 미친 듯 열중했다. 그리고 만들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이제는 하나가 돼 구분할 길 없는 흙을 계속 밟고 있음을 깨달았다.
“후우.”
이제 그가 걷는 걸 방해할 것은 없었다. 눈에 거슬리는 게 없었다. 다시 걸었다. 앞을 향해서가 아니라 발에 시선을 두고 그는 또다시 걸어갔다.
드디어 다 온 모양이다. 더 이상 걸어갈 곳이 없었다. 천사의 말대로 앞쪽에는 금빛 모래 같기도 한 생명수가 무수히 많은 지류를 이룬 채 흘러가고 있다.
생명수는 생명나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명나무 역시나 금빛이었다. 눈을 부시게 하지 않는 은은한 빛은 자신만을 물들일 뿐 사방으로 뻗쳐나가지 않고 있었다. 생명나무에 과실이 없다. 생명나무에 생명이 없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명나무의 위로 둥그런 동심원 같은 별무리가 생명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파천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것이 생명수, 저것이 여래장, 저것이 생명나무, 광명은…… 광명은?”
또다시 중얼거린다.
“난 누구인가?”
그의 마음속에서 두 가지 상반된 외침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하나가 또 하나를 삼키려 든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
“나는…… 파천이다.”
무릎을 오므렸다. 그리고 얼굴을 그 사이에 묻었다. 흙냄새가 났다. 살아 있는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파천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이곳에 왔던 이의 감정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그가 미친 듯이 흙덩이를 뭉쳐서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을 때의 그의 감정 상태는 단지 혼란, 그것이었다. 마치 자신이 매심의 혼란을 다스리지 못해 그것을 짓뭉개는 일에 전심을 다했듯이. 둘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나는 누구인가?”
대답을 얻고자 인간이 되길 자청했던 그나 인간이면서 대답을 얻지 못한 파천이나 의문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인간이 되면……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나? 인간이 되어보면, 인간세를 거쳐보면 네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거라 믿었나? 어리석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구나.”
파천의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가 고였다가는 끝내 담아두지 못하고 흘러내린다. 그는 지금 처음으로 자신이 예전의 그임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파천의 마음속에서 그 동안 억눌러두었던, 부정했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솟아오른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 난 인간이다. 빌어먹을. 그래 내가 그랬다. 이 세상을 생지옥으로 만든 게 모두 내 작품이란 밀이다. 신도 날 막질 못했어. 난 신이다. 난 신이야. 내가 바로 신인데 누가 날 벌주겠는가?
모두 죽어버리든 소멸하든 지옥이 열리든 고통 받든…… 무슨 상관이람…… 제기랄.”
파천은 울고 있었다. 마지막 외침이 잦아들며 작은 중얼거림으로 바뀌는 순간 뺨을 적시며 흘러내리던 눈물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흙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떨구었다. 흙이 젖어간다.
떠오른다. 인간세에서의 기억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태어나고 죽어가던 모습들이 하나 둘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황궁에서 살기위해 도망쳤던 기억이 살아났다. 설란을 만났을 때가 눈앞에서 재현됐다.
환아가 화아가 태어나던 순간이, 마계의 침범에 사람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하던 기억이, 루시퍼가 죽음을 선언하는 모습이 환상처럼 파천의 머릿속을 헤집어놓는다.

파천은 이제 드러누워 버렸다. 심신이 지쳐 곤하니 잠이라도 자고 싶었건만 생각해보니 잠을 자본 적이 오래다. 꿈을 꿔본 적이 오래다. 방법이 없었다. 고리를 이루며 쏟아져 내리는 생각의 줄기들을 끊어버릴 방법이 없었다. 흙 위를 뒹굴었다. 몸부림을 친다.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다.
파천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차라리 행복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다시 일어섰다. 몸을 솟구쳐 올랐다. 하늘 끝까지 오르기라도 하려는 듯 맹렬한 기세로 솟아올랐다. 멈출 기색이 없었다. 얼마나 날아왔을까? 위에는 여전히 처음의 높이에 여래장이 흐르고 있고 아래를 보니 생명수가 여전히 그 자리에 큼지막하게 보였다.
파천은 그렇게 허공에 매달려 모든 의지를 포기해 버렸다. 의지를 잃어버린 파천은 다시 떨어져 내렸다. 바닥을 향해, 흙 위로 떨어져 내렸다.
‘고통을 느낄 수도 없다니…… .’
부서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죽음이란 단어를 생각해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삶을 포기함은 비겁하다고 생각해 오던 파천이었다.
그런 그가 살기 싫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꿈을 잃어버린 인간의 현주소 이인가? 신을 잊어버린 피조물의 절망인가?
메타트론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돌아온 천사는 그런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인 듯 잠자코 듣고만 있다. 메타트론이 먼저 말했다.
“파천이 다시 밖으로 나오는 순간 놈을 내 손으로 잠재우겠다. 그리고 널 합일시킨 뒤에 곧바로 영계를 굴복시킨다. 내 오랜 기다림은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다. 완전자들은 여러 생을 통해서 안전해질 수 있었다.”
“너도 인정하는 건가? 완전자의 출현을?”
“천만에. 그들이 완전을 획득한 건 마치 네가 파천에게 했던 여러 가지 안배처럼 필연적인 신의 개입이었다. 특별한 혜택과 배려가 없었다면 그런 일은 저절로 일어날 수가 없다.”
“메타트론, 부정해 봐야 소용이 없다. 인간 중에서 완전자가 나옴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신의 배려가 있었든 혜택이 있었든 그들 스스로 획득한 것이다. 사람만이 가능하다. 참사람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어둠의 천사들 중 일부에게 그 일은 시도케 했음을. 그러나 아무도 완전자가 되지 못했지. 그들은 생명의 뜰에 이를 기회조차 얻어내지 못했다. 또한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 역시나 마찬가지. 그들은 사람이 분명함에도 이단의 길을 걸으며 완전자의 길을 포기했다.
제왕들은 또 어떠냐? 너도 잘 알지 않은가? 그들이 선택한 소멸극복이 완전자가 나오는 걸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렸다. 우주의 영적인 존재들 중 사람만이 참사람만이 완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특혜라 하지 않는가! 신의 그들에 대한 편애는 유독 각별했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
“네 말대로 파천이 광명을 얻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도 인정해야 할 분명한 사실은 그가 생명의 뜰로 들어서는 것을 신이 허락했다는 바로 이 부분이다. 그것도 오랜만의 일이지.”
“후후, 거기까지다. 파천은 지금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을 거다. 인간의 나약한 의지가 견디어낼 정도로 생명의 뜰이 가벼운 곳이 아니지.
반쯤 미쳐서 헤매고 있을 게 틀림없다. 어쩌면 스스로 죽고자 할지도 모르지. 타락한 영혼이 견디기엔 생명의 기운은 너무도 강렬하다. 왜 그렇게 되는지도 모른 채 조금씩 무너지다 결국엔 모든 걸 포기하고 물러나오겠지. 그때 그의 생명을 거두겠다.”
수호자는 이번엔 대답을 않았다.
“초조한가?”
“사실이다. 그래, 초조하다.”
“솔직하군.”
“내가 도울 수 있다면, 그래서 그가 광명을 얻을 수 있다면 난 어떤 고통도 감수할 수 있다. 여기서 이렇게 무력하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내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신에게 기원이라도 드려보지 그러나, 하하하하.”
“파천을 믿는다. 그가 해낼 수 없다면…… 네 뜻대로 되겠지. 그래도 소용없다. 결국엔 너 또한 신의 다스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만에. 나는 다르다. 내 품에 인간들이 있는 한. 그들이 내 지배를 인정하는 한 난 그들을 볼모로 얼마든지 신과 새로운 협상을 끌어낼 수 있다.
그는 인간을 존재케 하기 위해 자신의 품성 중 일부를 제거했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사태가 지금처럼 내가 주도하는 형국으로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스스로의 품성에 제한받는 신이라면 난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그게 내가 너나 신과 다른 점이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가리지 않고 시도한다. 무엇에도 제한받지 않고 한계도 그어놓지 않았다.
그러니 날 이기려면 나보다 더 교활하고 더 잔인하며 더 강해야만 한다. 신이 나보다 더 강한 건 맞지만 잔인하지도 교활하지도 못하지. 그래서 내가 이기는 거다. 알겠나, 네가 끝내는 나를 이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수호자는 고개를 젓는다. 그도 확인하고 싶었다. 메타트론의 주장이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파천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지금쯤 루시퍼와 제왕은 내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파천을 제거하고 너와 합일해 완전해 지면 그 동안 참아왔던, 용납했던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인간들 따위가 내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내리는 신성한 자유를 선사하겠다. 기억소멸과 육체소멸을 영원토록 극복시켜주면서 말야. 그럼 그들은 더 이상 신을 찾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영원토록 내 지배 아래 평안을 누리도록 해주겠다.”
“그렇게 되리라 믿다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소멸을 극복한 자들이 지금 행복한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해서 그들이 완전해? 그들이 가지는 불안감은 더 크다. 그들이 누려야 될 완전을 빼앗는 것이 어찌 그들을 위한 일이라 우기는가!
차라리 솔직해져라. 널 위해서 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제물로 삼는 것이라고…… .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진실이지 않은가?”
“어떻든 마찬가지 결과지.”
“널 따르느냐, 아니냐로 그들을 판단하고 헤아리겠지. 너와 나는 피조물. 신과 같이 완전한 조화와 질서를 헤아리기엔 너무도 미흡한 존재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네 괴로움은 끝나지 않는다.”
“닥쳐! 날 모욕하는 건 널 모욕하는 것. 신의 허락이 있었기에 난 신을 떠났다. 신이 방관했기 때문에 난 자유로워진 거야. 괴로워한다고? 천만에! 난 단 한 번도…… 그 일로 인해 괴로워해본 적이 없다.”
수호자는 더 이상 이런 논쟁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끝없이 달려가는 평행선을 하나로 모으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시도해보지 않았던가. 수호자는 생각했다.
‘네 얼굴이 이제는 더 이상 아름답지가 않구나.’

무한계 하룬에 진영을 두고 있는 연합군은 좀더 전진해 단위 부대를 배치시켰다.
그들의 역할은 마계나 제왕의 군대에 변화가 있을시 즉각적으로 본진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이들의 배치를 끝으로 연합군의 준비는 끝났다. 매소 하룬에 집중되어 있던 전력을 방사형으로 조금 더 넓은 지역으로 포진시켰고 1군에서 7군까지 교묘하게 서로의 측면과 후방을 지원토록 했다. 이제 마계와 제왕의 군대를 살피는 일에 주력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수련자 몇이 모여 있었다. 메덴 원탁의 주재자였던 치앙마와 카포, 벵골이 한자리에 있었다.
그들 중 치앙마는 바소름의 휘하 부대장으로 자리가 정해졌고, 나머지 둘은 다른 차원계의 인물이 수장으로 있는 군단에 배속되었다. 그들 둘 역시나 각기 단위부대의 수장이었기에 비교적 드나듦이 자유롭고 움직임에도 제한이 없었다. 카포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필이면 야마천주의 밑에 들어가다니.”
그들 중 유일하게 천상계측의 군단으로 배치되어 불만을 터트리는 카포를 벵골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도 현재의 위치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벵골이라면 메덴에서는 최고의 지위를 누렸던 수련자였다. 수련자를 대표해 바소름이 군단장이 되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아야 할 입장이었다. 카포는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1군단에는 유독 천주들이 많아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란 말야. 야마천주가 노골적으로 내 의견을 묵살하고 창피를 주니 이래도 되는 거야?
게다가 천주들까지 가세해서 설쳐대니…… 참모장한테 얘기해서 다른 군단으로 옮겨달라고 하든지 해야지. 우리 정도 되는 수련자들은 바소름이 맡고 있는 6군단에 넣어주면 좋잖아.”
벵골이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불만 가져봐야 소용없어. 여간 신경 써 배치한 게 아니니까. 내가 볼 때는 적절해 보이는데?”
“카포님, 저희 6군단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바소름님이 군단장을 맡았을 따름이지 그 밑의 부대장은 수련자보다 다른 차원계의 인물들이 더 많습니다.”
치앙마가 위로한다고 한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르는 카포.
“부대장을 뽑은 기준이 대체 뭐야? 실력이야, 명성이야, 아니면 지위야?”
그런 그를 벵골이 나무랐다.
“그런 태도는 곤란해. 분란을 일으키면 최악의 본보기를 보이고자 즉형으로 다스릴 수도 있으니…… 불만이 있어도 참는 게 좋을 거다. 부대장을 뽑은 건…… 그 세 가지를 다 고려한 선택이지.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데…… 괜히 그런 소리하다 로메로님 귀에라도 들어갈까 두렵다.”
이들이 메덴의 실질적인 지도자들이어도 로메로는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메테우스를 기려 그를 본받고자 모여든 자들이 수련자였으니 메테우스와 카란의 참모였던 로메로는 그들도 어려웠다.
물론 로메로가 수련자보다는 전사의 성향에 더 치우쳐 있다고는 해도 초기의 메테우스와 카란을 따랐던 무한계 초기 지도자들을 그런 식으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칠대 부족장들은 카란의 직계제자다. 그들과 로메로를 동격으로 볼 수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들이 로메로나 불칸을 어려워하는 데는 이런 현실이 반영된 결과였다.
카포는 불칸이 단주가 된 것도 그다지 곱지 않은 눈길로 보았다.
“솔직히 그의 명성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전사하나, 수련자하나 이런 식으로 갖다 붙이면 안 되지.
불칸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가 군단장을 맡을 정도로 통솔력이 있거나 다른 능력이 탁월한 건 아니잖아. 내 맘 같아서는 불칸을 사령부로 보내버리고 수련자들 중에 한자리를 더 줘야 마땅하지.
오대전사단주들이야 실력이 딸리고, 현재 하룬의 전사들 중에서는 불칸과 몰간, 페리칸을 제외하면 군단을 책임질 정도로 비중이 있는 인물도 없잖아.”
“흐음.”
치앙마는 카포가 내뱉는 불만의 소리가 점차 높아져 가자 불안했던지 은근슬쩍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붙들려 곤욕을 치르는 벵골도 여간 이 자리가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로메로의 특별 명이 있어서 지금은 모두가 극도로 조심하는 시기였다. 로메로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은 극도로 엄격했기에 명망 높은 대수련자라 해서 봐줄 리가 없었다.
“사실 우리가 천상계나 선계의 부족한 전력을 채워주는 입장인데 공평하게 직위를 나누는 것도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말이야.”
“자네 너무 흥분하는 것 같군. 자제를 해야지 안 그러면 다칠 수도 있어.”
“자제를 하라고? 뭐가 무서워서 할 말도 못하나.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꼴이 됐는지…… 거참 한심하군.”
“그런 말을 할 게 아니지. 모두가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 자칫하면 큰 분란으로 번질 소지가 있으니 엄격하게 통제하는 건 당연한 조치야. 단일한 조직이 아닌 연합이니 필요한 일이지.”
“후후, 자네 많이 변했군. 예전의 당당하던 대수련자 벵골이 아니야. 그냥 생각 같아서는 메덴만이라도 연합에서 탈퇴해 자체적으로 적들을 상대했으면 마음만이라도 편하련만…….”
“그만 가보겠네. 자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야.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시기가 시기인 만큼 꾹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어.”
“자네나 그렇게 살도록 해. 난 말야, 천주 놈들 꼴 보기 싫어서 그 짓은 못하겠으니까.”
버럭 지른 고함소리에 벵골이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밖에서 싸늘한 음성이 흐른다.
“어떤 놈이 이런 불만을 터뜨리는 거야?”
벵골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포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선 자는 천상계의 인물이었다. 지국천왕이었다.
그는 카포와 함께 1군단의 부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가 근처에 있을 줄이야. 카포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막상 이런 일이 눈앞에 닥치자 그도 불안해졌던 것이다.
“아니, 당신은 본군단 7대장이 아니오? 방금 말한 장본인이…… 바로 그대요?”
카포는 순간 눈앞이 아찔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곧바로 머리를 숙이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도리어 기세를 올렸다.
“그렇소만 왜 그러시오? 뭐가 잘못되었소?”
지국천왕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아무리 천상계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지만 자신은 명색이 사대천왕 중에 수좌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부대장이라고는 해도 메덴의 수련자가 대들 듯이 고함을 지르는 꼴을 겪게 될 줄이야, 예전엔 상상도 못해본 이었다.
“이거…… 완전 엉망이구만. 이 따위 정신 자세를 갖고 있는 자와 함께 생사를 나눠야 하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군.”
벵골도 얼굴이 굳었다. 카포가 실수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 심한 소리를 들을 정도로 큰 잘못을 하지는 않았다. 카포는 할 말을 잃고 굳어 있었고 대신 벵골이 나섰다.
“지국천왕, 너무 말이 심하시군요.”
“심하긴…… 본계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지. 그대들이 자유롭게 살아온 건 이해하겠지만 지금은 전쟁 중, 조직의 결정에 따르는 법도 배워야지. 안 그러면 자기만 죽는 게 아니라 남까지 죽인단 말야. 더군다나 조금 전…… 천주 놈들…… 어쩌고 한 것 같은데 맞나?”
지국천왕의 다그침에 카포는 지지 않고 대들었다.
“그래 맞다. 더 심한 소리라도 듣고 싶으냐?”
“이런 경우에 없는 자를 보겠나. 난 1군단 1대장이고 넌 7대장이다. 난 수석대장이니 너에 대한 감독 권한을 가진다. 고로…… 널 질책할 수도 있다. 지금 그 태도는 항명인가?”
사실 그가 한 말은 전혀 근거가 없었다. 군단장에게는 그런 권한이 있었지만 같은 부대장끼리 차등을 두지 않았다. 카포가 열 받을 만한 소리였다.
벵골은 일이 더 이상 커지는 걸 막아야만 했다. 그가 앞으로 부리나케 나서며 카포의 입을 막았다.
“그만둬.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참으란 말야.”
“비켜. 저놈 하는 소리를 들었잖아. 저런 소리를 듣고 그냥 참고 있으란 말이냐?”
‘그래도 어쩌겠어. 소란 피워봤자 너한테 유리한 것 하나도 없다.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짓자. 제발 부탁이다.’
벵골이 영언으로 사정사정했다. 카포는 얼굴을 붉히기만 했을 뿐 혀끝까지 이른 말을 끝내 목 안으로 삼켜버렸다. 지국천왕이 마지막으로 카포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지금 즉시 1군단 7부대장은 내 처소에 가서 대기하고 있길 바란다. 이번 일에 대해 칙임을 물을 것이다. 물론 군단장님의 최후 결정이 있어야겠지만…… .”
“뭐, 뭐라고? 이, 이이…… .”
카포는 결국 더 이상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벵골이 이끄는 대로 못 이기는 척 밖으로 나가는 게 상책임을 알았다. 더 이상 있어봤자 좋은 소리 못 들을 거고 화를 참지 못해 큰 소란을 벌인다면 원인 제공자인 자신이 더 큰 벌은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끌려가다시피 나가는 카포의 모습을 보며 지국은 만면에 만족한 빛을 떠올렸다. 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군단장인 야마천주가 지국의 보고를 듣고 즉시 카포를 불렀다. 그는 카포에게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이며 심한 모욕을 주었다. 그것도 부대장들 중 천주들만 부른 자리에서.
그들의 멸시어린 눈길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어금니를 저려 물며 끝까지 참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금방 하룬 전역으로 퍼져 갔다. 수련자들뿐만이 아니었다. 1군단에 소속된 다른 차원계의 인물들까지 평소에 야마천주에게 불만을 품어오던 터였다.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러자 군단장인 야마천주가 부대장들을 소집시켰고 천주들을 제외한 선계와 무한계의 부대장들을 호되게 나무랐다. 이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꺼지기엔 불씨가 너무 커졌고 또 여러 곳으로 옮겨 붙었다.
그 일을 한 것이 3군단장 태선이었다. 그는 1군단에서 벌어진 일을 자신이 들은 그대로 예하 부대장들 중 천주들에게 앙갚음했다. 이러고 나니 무한계와 선계가 연합하고 천상계만 외톨이가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부대장들쯤 되는 자들이면 야마천주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기 일쑤였고 바소름과 충선을 제외한 용족족장 그리고 불칸까지 그 분위기에 편승했다.

로메로가 걱정스런 눈길로 좌중을 살폈다. 이번 일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군단장과 부대장들을 사령부로 불려 들였다. 제석과 노군 로메로가 함께 하고 있었다. 군단장들 주에는 충선과 바소름, 도솔천주만이 제외되었다.
이번 사건에 관련돼 불려온 부대장만 자그마치 스무 명. 그들은 지금까지 감정이 남아 있었던지 서로를 경원했다. 이쯤 되면 연합은 실패라고 볼 수 있었다.
‘왜 이리 고집스러운가? 자신들이 지금껏 누리고 있던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자멸을 택하겠단 뜻인가?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권위의식이며 아집에 불과하다. 이걸 다스리지 못하면…… 큰일이다.’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반전시켜줄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자각 하지 못하면 명분으로 다스리고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두려움으로만 가능하다.
‘저들 모두가 두려움을 지닐 만 한 자가 필요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고민하게 될 줄이야. 이처럼 뿌리가 깊을 줄이야, 진정 몰랐었다.’
로메로는 노군과 제석이 말할 기회를 주었다. 제석은 천상계 천주들을 타일렀고 노군은 선계의 인물들을 나무랐다. 로메로는 무한계의 인물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는 불칸을 힘주어 불렀다.
“불칸!”
“말하십시오.”
둘은 친구사이지만 지금은 공적인 자리다. 7군단장인 불칸은 예의를 잃지 않았다.
“대체 어쩌자는 건가? 이대로 연합이고 뭐고, 모조리 끝장낼 참이었던가?”
불칸도 할 말은 있었다.
“문제는 저들 천상계의 천주들에게 있습니다. 저들은 아직까지도 예전의 권위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예하 부대장에게 작은 일이라도 시키려면 부탁하고 사정해야 하는 게 현실이니 장차 어찌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식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저들이 먼저 바뀌지 않는 한 연합은 전력을 극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망쳐버릴 게 분명합니다.”
용족족장도 동의하고 나섰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상관을 무시하고 깔보는 건 다반사고 무슨 말이든 토를 달고 이유를 달아 지연시키기 일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모욕하는 일도 빈번합니다. 그건 수하가 아니라 상전이지요. 애초부터 연합은 무리가 있었던 겁니다. 다시 재조정해서 배정하든지 아니면 연합을 파기해야 합니다.”
야마천주도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자신들의 잘못은 말하지 않고 남 탓만 하는구려. 마치 이번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예의에 벗어날 정도로 심하게 대하니 반발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처음부터 이렇게 몰아가려고 조직적으로 일을 벌인 게 아닌지 오히려 의신이 갑니다. 굳이 연합을 파기하겠다면 우리로서도 망설일 이유가 없지요.”
“닥쳐라, 야마천주.”
제석이었다. 그가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내심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가 이처럼, 더군다나 자신의 충성스런 직속 부하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야마천주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진정으로 제석을 따르고 위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천주들과 마찬가지로 존경의 일념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으로 인해 분노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워 했고 죄스러워했다.
“미안하오. 모두가 내 부덕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니…… 아무쪼록 서로 조금씩만…… 양보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저를 봐서 이쯤에서 서로 화해를 해주길 바라겠습니다. 이대로, 이대로 싸워보기도 정에 자중지란에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부족한 힘입니다. 똘똘 뭉쳐서 상대해도 벅찬데 이렇게 서로를 헐뜯고 비난해서야 어찌 단결을 기대할 수 있겠으며 승리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제석은 진심어린 부탁을 했다. 야마천주는 제석의 진심에 머리 숙여 자책하기보다는 이런 상황까지 초래하게 한 무한계와 선계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다.
‘전쟁만 끝나고 나면…… 절대로 이번 일을 잊지 않고 갚아주겠다.’
노군도 로메로도 고개를 저었다. 마땅한 대책이 서지 않았다. 감정의 골은 그들 생각보다도 더 깊고 뚜렷했던 것이다. 누구 하나를 벌해서 끝낼 수 있는 일이라면 로메로는 벌써 그렇게 했을 것이다.
‘뭔가 근원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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