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62화 : 그들이 가장 먼저 파천을 보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파천을 보았다.
하룬에서 이보다 더 안전한 장소를 찾아내기란 힘들다. 라미레스의 거처. 그곳에 몇 명이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사령부의 실질적인 두뇌 역할을 하고 있는 로메로와 지혜전사단주이자 사령부 생사군단장인 라미네스, 봉인을 풀고 나온 메테우스와 카란, 그들을 맞으러 갔었던 그레고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아까부터 그레고스는 마음이 편치 않은 지 이맛살을 한껏 찌푸리고만 있었다. 카란의 강경 주장 때문이었다.
“지금 방법을 놓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만큼 우리가 한가하지 않다는 걸세. 왜 그렇게 내 말을 이해 못하는지 모르겠군. 조속하게 처결해야 할 문제를 놓고 시간만 보내고 있으니 답답해서 이러는 거야.”
라미레스의 반박도 만만찮았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그런 식으로 내몬다는 게 말이 되나?”
로메로가 시큰둥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안 될 것도 없다고 보는데……”
“로메로 자네까지?”
“작은 걸 놓치지 않기 위해 큰 걸 버릴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아. 당장에야 그들이 섭섭해 하고 원망할지도 모르지만 나중엔 모두 이해할 거라고 봐. 이 상태로, 통제되지 않는 상태로 둔다는 건 더 큰 불행을 불러오는 일. 결단코 그런 일을 좌시할 수는 없어. 그게 내게 맡겨진 임무이기도 하고.”
그레고스는 심사가 편치 않아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메테우스도 눈을 지그시 내리 감고 있다.
카란이 라미레스를 설득해 가기 시작했다.
“로메로의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어. 어떻게 할 텐가? 자네가 하지 않겠다면 나라도 하겠어.”
“다들 오해하는 것 같은데……다시 한 번 말하지. 나 또한 그들을 후방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데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해.
하지만 그 방법이 틀렸다면 난 찬동할 수 없어. 우리가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스스로를 변명한다 해도 그런 식으로 영자들을 다룬다면 명분을 잃게 돼. 알겠나? 그래서 뭘 얻겠다는 건가? 그렇게 해서라도 얻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란 대체 뭔가?”
로메로가 차갑게 말했다.
“영계의 안녕과 평화지. 지금은 그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있을 만큼 여유가 없어. 지금 당장이라도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이곳을 쳐들어올지도 모르거늘 이대로 두 손 놓고 있다 당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진단 말인가?
이번에 자네가 틀렸어. 밀어붙여야 해. 그들을 무력으로 몰아내지 않는 한 절대로 자진해서 응하지 않을 거야.”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아직 일러.”
“해봤지 않은가! 나도 자네도 대천주와 노군까지 나서서 그들을 설득해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요지부동이야. 그들은 생명을 내놨어. 참전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고 있어.”
“좀더 해보겠네. 내가 해보겠어. 그래도 안 된다면……”
“안 된다면?”
“그때 무력을 동원하게.”
“흐음.”
메테우스가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라미레스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지. 그리고 상황을 좀더 지켜보세.”
“허어, 이것 참.”
카란은 라미레스의 고집이 답답하기만 했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웬만해서는 꺾기 힘든 성격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어보니 더해보였다.
로메로도 더 이상 강경하게 밀어붙일 분위기가 아님을 알았지만 끝내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
“시기를 놓치고 후회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군.”
그레고스는 생각했다.
‘어느 누가 옳다고 옹호할 일은 아니다. 모두가 옳으니까.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냐. 적들에게는 강력한 지도자가 있는 반면 우리에겐 그런 적임자가 없다는 점이다. 어느 하나에게 전권을 준다 해도 이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이 드러나는 순간이군. 조정하고 중재하고 강력하게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없다는 것. 이를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메테우스도 막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천상계의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다고 이대로 여서는 곤란하다. 예상치 못했던 난관이군.’
메테우스라면 무한계측에서야 누구라도 동의할 것이다. 카란이 보좌하는 한은 말이다. 하지만 천상계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집단 지도체제의 문제점은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힘든데 그런 걸 기대할 수 없다면 보나마나다.
어쨌든 라미레스의 의견대로 하룬의 영자들을 좀더 설득해 보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카란과 로메로는 여전히 찜찜해하는 기색을 지우지 않는다. 메테우스가 로메로에게 질문했다.
“아직까지도 마계나 제왕의 군대 측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나?”
“여전합니다.”
“흠, 그렇다면 역시 우리 예상대로 그들 역시 광명의 출현을 주시하고 있겠군.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아 답답한 건 그들 역시 마찬가지 일 테고.”
“광명을 얻었다 해서 그들이 진정 개전을 미룰지도 의심스럽습니다만…….”
그레고스가 단언하듯 말했다.
“그건 그렇지가 않아. 파천이 광명을 얻었다면 메타트론도 그 사실을 알게 될 거고 루시퍼와 제왕은 그의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메타트론은 현명하다. 그런 그가 대적을 앞두고서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려 하지는 않을 거야.”
자충수(自充手)를 두지는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는 그레고스의 의견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로메로는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싶은 것이 있었다.
“파천이……광명을 얻은 이후……그가 하룬에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냐는 질문이었다. 메테우스와 카란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둘은 잠시 뜸을 들였다. 카란이 먼저 대답했다.
“우리처럼 암중에서 지원하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로메로의 고개가 메테우스를 향했다. 메테우스는 좀더 신중했다.
“그를 만나보지 않고서는 입장을 정리하기 힘들군.”
“어떤 의미입니까?”
“그가 광명을 얻은 게 분명하다면 또한 그만한 그릇이라면…… 우리로 이끌게 해야겠지.”
로메로가 듣고 싶었던 대답이기도 했다. 라미레스가 반문했다.
“그가 원치 않는다면?”
“그럴 리가 있나? 대의를 생각한다면 거절하지 않을 거야.”
파천을 만났었던 그레고스는 파천이 쉽게 승낙할까 의심스럽기만 했다.
‘광명을 얻었다면 또 다른 면모를 보일지도 모르지. 거기에 기대를 걸어봐야 하는가? 허허……“
라미레스는 이 중에서 파천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의견은 그래서 모두에게 중요했다.
“뭐야 그 눈빛들은? 내 의견을 묻는 건가?”
“당연하지. 어떨 것 같은가?”
라미레스는 카란의 집요한 관심에 헛기침을 해댔다.
“뭐라 단언하기는 좀 그렇고……누구보다 잘 해내리란 장담은 할 수 있어. 그놈의 결단력과 통설력은 인간세에 있을 때부터 나를 감탄시킬 정도였으니.
거기다 광명까지 얻은 파천이라…… 솔직히 상상이 안 되는군. 하여간 어떻게 해서라도 맡기기만 하면 속 시원하게는 해줄 거야.”
좀 애매한 말이긴 했지만 라미레스의 극찬에 아직 그를 대면하지 못한 메테우스와 카란은 두 눈을 빛냈다. 로메로는 천상계 천주들의 반응이 어떨지가 걱정되었다.
“천주들이 동의할 지가 의심스럽군요.”
“동의해야지. 이제 그런 자존심을 내세울 시기가 아닌 걸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 거야. 또 그런다면 망신을 줘서라도 뜻을 꺾어야지.”
과연 카란 다운 말이라고 로메로는 생각했다.
라미레스는 한 수 더 거들고 나섰다.
“설마하니 먼저 그런 뜻을 내비친 자들이 한 입으로 두말 할까! 정말 그런다면 모조리 중간계로 내쫓아야지 볼 것도 없어.”
그 말에 모두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선발대원 중 선계 출신인 너울과 각시 무초, 무명, 대로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하룬 전역을 새까맣게 뒤덮다시피 한 군중들은 정말이지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너울이 중얼거렸다.
“어디서 이렇게 많이들 몰려왔나 그래.”
각시가 말을 받았다.
“이처럼 많은 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일 거야.”
무초가 대뜸 그런 무식한 소리 말라는 듯 핀잔을 준다.
“예전 제왕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다는데 이보다 더 많지 않았겠어?”
무명은 웃으며 말했다.
“기억에도 없는 일은 접어두고 하는 얘기지.”
그들은 영자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별의별 부족이 많다지만 정말이지 그들의 눈에 비치는 영자들은 갖가지 무리가 뒤범벅이 되어 인종 시장을 방불케 했다.
너울이 키득거리며 한곳을 가리킨다.
“저것……봐 저것, 크크……”
그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던 자들도 일제히 표정이 기이해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너울을 따라 함께 웃자니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참자니 고통스런 일이다. 정말이지 생겨도 어찌 저렇게 생겼단 말인가?
너울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각시는 이해가 갔다. 전신에 털이 수북한 것은 별로 짚어낼 것도 특별한 것도 없었다. 얼굴이라고 생각되는 가운데 부분만 반들반들하니 윤기가 나고, 나머지는 손가락 세 마디 정도의 털이 쑹 쑹 솟아나 빳빳하게 섰다.
코는 길쭉하게 튀어나왔고 눈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점하나 콕 찍어놓은 듯 보일 듯 말 듯 했다. 윗입술은 가는 데 비해 아랫입술은 턱 밑까지 축 쳐져 있어 현재 입을 다물고 있는지 열고 있는지조차 구분이 안 갔다.
너울도 처음 보는 기이한 모습의 영자였다. 나란히 세 명이 붙어 서서 한참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들 주위로 많은 영자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둘러서 있었다. 그들의 재미있는 모습과 달리 그 내용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니 심각했다.
“연합군 사령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니까. 생각해봐. 이 통제되지 않는 무리로 인해 전쟁 수행이 방해받는다면 그보다 더 한심한 일이 어디 있겠어? 그러니 우리는 그저 멀리서나마 기원이나 드리는 게 백 번 돕는 일이라니까.”
다른 동료가 화가 나 소리쳤다.
“힘이 모자란다고 생명도 무가치한 건 아냐. 우리도 힘을 보태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모인 건데 이런 박대를 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강력하게 항의해야 해. 난 절대로 물러설 수 없어. 날 죽여서 끌어내기 전엔 내 잘로는 못 나가.”
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머지 한 영자가 이 쪽 저 쪽을 보다가 한마디 했다.
“어쩌자고?”
“싸워야지.”
“물러나야 한다니까.”
세 명을 주시하고 있던 영자들 중 하나가 참견하고 나섰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우리 뜻을 보여서 영자들이 결코 특정 세력의 지배를 받아들일 의지가 없음을 보여줘야만 해. 그래야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그건 맞는 말이야.”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말이 오가는 가 했더니 뒤따라 반대하는 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뜻이라면 충분히 전달되었지. 우리들로 인해 영계정예들인 연합군이 제대로 기동조차 못해보고 당할 수도 있다잖아.
그리고 마계나 제왕의 군대가 좀 악랄하겠어? 우리들의 생명을 담보로 무리한 요구라도 한다면 연합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백기를 들 수도 있단 말이다.”
“그것도 맞는 소리네.”
“싸워야 해.”
“의사 표명은 이 정도로 충분해.”
그것이 시작이었다. 곧장 여기저기서 합세한 소리들로 주변은 한꺼번에 고함을 질러대는 것처럼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너울 등은 기가 질려서 그곳을 속히 벗어났다. 현재 사령부로 쓰이고 있는 벤하민의 궁성이 있는 곳까지 와서야 소음이 좀 잦아지는 것 같았다. 하룬 중앙부를 제외하고는 어디를 가도 저런 광경이 흔하게 연출되고 있었다.
“심각하군.”
“그러게.”
“사령부도 골이 지끈거리겠어.”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도 없을 거고.”
너울과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대오선인인 간략하게 정리했다.
“결국엔 모두 물러나야 할 거다.”
너울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풀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끝까지 버틴다면 무슨 수로 내쫓아?”
“힘으로 몰아내겠지.”
“에이, 설마……”
“아냐, 대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이대로 방치해 둔다는 건 더 말이 안 되잖아.”
“그런가?”
너울은 고개를 살짝 흔들다가 궁성의 지붕을 언뜻 쳐다보았다. 벼락이 그에게만 내리꽂혔는가? 그는 전율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각시가 그런 너울을 흔들었다.
“왜 그래?”
얼굴마저 딱딱하게 굳어 있던 너울은 더듬거리며 지붕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저, 저기……”
“저기 뭐?”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너울이 가리킨 곳을 향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너울은 두 눈을 비비며 고개를 흔들었다.
“잘못 보았을 리가 없는데……분명, 분명……”
“뭐? 뭘 봤는데 그래? 루시퍼라도 봤어?”
“아니, 그게 아니라……파천, 파천이었어.”
각시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이제 헛것을 보고 그러네. 요즘 네가 파천 얘기를 자주 하더니……”
“그게 아냐, 정말로 봤단 말 야. 날 보고 빙긋 웃었단 말 야.”
너울은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너울은 선발대가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나머지 선발대원들은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른다.
연합군 제3군단장은 선계의 거목, 팔선 중 하나인 태선이다.
3군단은 천상계나 무한계의 영자들이 되려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그들보다는 선장들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군단장 예하에만도 십수 명의 부대장들이 있고 그들 밑으로 분대장, 조장, 호장 순이었다.
호장에도 상호장과 하호장으로 직제를 나눠 구분하고 있다. 연합군에는 총 여섯 품계가 있는 셈이었다. 물론 사령부는 별개로 했을 때 얘기다.
하호장 정도만 되어도 적게는 십여 명, 많게는 백여 병의 수하를 거느린다. 그럼에도 이 정도에 만족치 못하는 이는 많은 법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슈트레였다.
그는 자신의 직급이 최하 품계라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여긴 슈트레는 몇 번이나 시정을 요구했지만 군단장인 태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상호장인 바이롬과 함께 있던 슈트레는 골이 나서 마음 내키는 대로 지껄였다.
“모두 한통속이야. 전사의 수가 많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이따위 말도 안 되는, 누가 보아도 상식에 어긋나는 짓거리들을 하다니. 내가 그렇게 비중이 없단 말이야? 빌어먹을.”
바이롬은 상호장이었다. 그는 그다지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보다 실력이 출중한 전사들 중에서도 하호장에 만족하고 있는 이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롬이 현재 부여받은 임무는 수하들과 함께 하룬에 모여든 군중들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들의 현재 위치는 하룬에서도 북서부 쪽이었다. 여기저기 감시의 눈길이 아무리 많아도 군중들은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소요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곳곳에 무장한 병력을 배치시켜 놓았으나 설마하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바이롬이 슈트레에게 눈치를 주었다. 자신들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조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급자는 중부권 전사단의 수석전사 출신이었다. 그는 몇 명의 하호장을 뒤에 대동하고 있었다. 바이롬에게 지시를 내린다.
“곧 사령부에서 조치가 있을 테니 그때까지 한시도 감시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만약 폭동을 선동하는 영자들이 발견된다면 가차 없이 체포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조장의 눈길이 잠깐 동안 슈트레에게 머물다가 거둬진다. 그가 다른 곳으로 사라지고 나자 슈트레가 또 툴툴거렸다.
“저런 놈도 조장인데 내가 하호장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
“하호장이 어때서? 저들을 봐. 참전조차 못하고 쫓겨날 판이거늘……”
“말이면 다 말이야? 저놈들하고 나하고 같아? 뭘 봐!”
수하 중 하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거슬렸던지 빽 고함을 질렀다.
슈트레는 다시 불만을 이어 갔다.
“솔직히 부대장 정도는 무리겠지만……부대장은 줘야 할 거 아냐? 나 슈트레라고, 슈트레. 남부권에만 가도 내 이름을 모르는 영자들은 드물어. 그런 날 일개 하호장에 임명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생각해보니 또 부아가 치밀었던지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번 따라 유난히 흥분하는 슈트레를 바이롬은 이해할 수 있었다.
‘좀 전에는 그런 일을 당했으니 이럴 만도 하지.‘
그가 이렇게 흥분하는 건 무한계 남부권의 뜰에서 온 듯 보이는 영자들이 슈트레를 자극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참이나 슈트레를 비웃으며 조롱하다 사라졌다.
그들이 남긴 말은 지금까지도 귓가를 맴돌며 슈트레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때다. 슈트레를 열 받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이 또다시 슈트레와 바이롬 앞으로 슬그머니 다가서고 있는 게 아닌가? 표정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겨우 문지기나 하려고 그렇게 위세를 떨었나봐, 크크크.”
“그러게. 난 또 위대하신 슈트레 님 정도 되면 연합군에서도 군단장은 못 돼도 부대장 정도는 차지하고 있을 줄 알았지.
그런데 이게 뭐야, 구래? 저 얼굴 붉어지는 것 봐. 하기 나라도 죽고 싶을 거야. 에구, 어쩌다 저런 꼴이 됐는지 애처롭기만 하지.“
“자네들 슈트레의 계급이 뭔지 아나?”
“몰라. 계급은 무슨, 문지겠지. 크크크.”
“아냐. 하호장이래, 하호장.”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
“뭐가?”
“슈트레야 가진 게 루딘 밖에 더 있던가? 그걸 풀었으면 부대장은 몰라도 분대장 정도는 꿰차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전쟁 통에 루딘이 다 무슨 소용이야? 오직 실력이지, 실력. 봐 그래도 마이론은 한 계급 위라잖은가.”
“하여간 쉽지 않은 세월 만나셔서 참 고생도 많지. 떵떵거리던 위세는 다 어디로 가고 오가는 영자들 얼굴이나 썩은 눈깔로 쳐다보고 있어야 하다니. 나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만 두겠건만, 쯧쯧.”
참다못한 바이롬이 은근한 어조로 점잖게 타일렀다.
“그만들 하시지. 그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그만 사라지는 게 어떻겠나?”
“햐, 이보게들. 바이롬이 지금 하는 말 분명 협박 맞지?”
“그러게. 연합군 상호장이 도우러 온 영자들을 협박하네. 이래도 되는 거야, 이거?”
“기강이 해이해져서 그렇지. 윗분들이 너무 풀어줘서 아랫것들이 형편없구먼.”
바이롬의 목소리에 살기가 담겼다.
“더 이상 떠들어대면 소요죄로 즉결처분하겠다.”
영자들은 그제야 뜨끔한 표정이었다. 바이롬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 흥이 돋는 마당에 물러서기엔 달갑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화를 돋울 수도 없었다. 슈트레는 모르지만 바이롬이라면 입에 한 번 담은 말을 거둬들일 위인이 아니었다. 뒤처리야 어찌 됐든 일단 저지르고 불 성격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찾다가 슬금슬금 바이롬의 눈치를 살피며 몇 마디를 더 하고 사라진다.
“시간은 많으니까 이따 다시 오지 뭐.”
“그럴까?”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먼.”
“크크크크.”
그들은 뜰에서 슈트레에게 이런저런 모양으로 박해를 받아 왔던 영자들 중 일부였다.
힘으로도, 인맥으로도, 세력으로도 견줄 수 없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는 슈트레와 자신들과는 처지가 다른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다는 걸 헤아리고 있는 자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슈트레는 보아주기 애처로울 정도로 전신을 떨고 있었다.
“내가……이러고도 연합군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단 말이냐?”
“어쩌겠어. 먼 훗날을 생각해야지. 전쟁이 끝난 뒤를 생각해보면 이까짓 수모쯤 못 견디겠는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 거야.”
“끙.”
그도 그런 판단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꾹 참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정말 한계 상황까지 온 듯했다.
“후유.”
슈트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다 한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군중들이 오가는 곳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슈트레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전신을 관통하는 전율에 소스라쳐 놀랐다.
“저, 저자는?”
슈트레의 다급한 외침에 바이롬이 놀라 되물었다.
“왜 그러나?”
“저, 저기. 저기를 좀 봐.”
바이롬의 눈길이 슈트레가 가리키는 곳을 향했다. 바이롬은 슈트레가 뭘 보고 그리 놀랐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가 있다고 그러나?” 여전히 북적거리며 오가는 영자들만 가득했다. 슈트레는 얼빠진 듯 중얼거렸다.
“사……라……졌……어……”
“뭐가?”
슈트레는 말이 없다.
“뭐가 사라졌단 말인가? 대체 뭘 봤기에?”
“분명, 분명 파천이었어.”
“뭐라고?”
“확실해. 그가 날 바라보고 있었어. 파천, 파천이었다고!”
살아남은 바로크 전사들은 더 이상 선발대와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단주인 바로크가 아바돈의 마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고민했다. 그렇지만 결론은 한 가지였다.
“단주님을 찾아 떠나자. 이곳에 더 이상 우리가 머물러야 할 의미가 없다.”
“그래, 가서 죽더라도 우리 할 바는 다해야지.”
“우리를……못 알아본다 해도…… 약속은 끝까지 지켜야 하는 거야.”
그 말을 남기고는 하룬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매소 하룬 외곽 지역까지도 영자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영자들의 물결을 헤치고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어딘가를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하룬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지점까지 왔다. 그들 중 하나가 뒤돌아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전쟁에 참여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구나.”
“어쩔 수 없어.”
그들은 미련을 버렸다. 그들은 한곳에 서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디로 가지?”
“북부권. 일단은 그곳으로 가보자. 아바돈이 중부권에 남아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아. 아마도 북부권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그런데…….어떻게 찾지? 그들이 우리 같은 삼류전사들을 맞으러 나올 리도 없고.”
“방법……이야 생기겠지.”
그들은 알고 있었다. 백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들이 아바돈이 숨어 있는 곳을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을. 설사 찾아낸다 해도 침투조차 해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란 것도. 그럼에도 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들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힘을 냈다.
얼마를 더 갔을까. 그들은 다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고민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더 이상 발길을 떼어 놓을 수 없었다. 그들 앞에 파천이 나타난 것이다.
처음엔 그들 모두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천은 분명 실체였다. 자신들을 향해 미소를 보내오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바위라도 된 듯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파천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
“바로크를 찾으러 가나?”
“……”
“나를 다시 만난 게 반갑지 않은가 보군.”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럴 리가 있……”
“말도 안……”
세 명은 동시에 입을 열다 다시 다물고 말았다.
“참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때가 차면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정말 그럴까요?”
그들은 파천에게 광명을 얻었냐고 묻지 않았다. 파천은 최초로 자신들을 눈여겨봐 준 고마운 존재였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때 자신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넸고 같은 길을 동했다.
바로크를 대면했을 때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지켜주었고 이후에도 선발대에 포함시켜 따르게 했다.
그런 파천이 하룬을 떠나가는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싱그러운 미소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한층 부드러운 눈길이 따스했다.
“그대들의 확신이 그를 건져낼 것이다.”
“저희가 어찌하면 됩니까?”
“하룬으로 돌아가라. 이제는 그대들도 선발대원들이다. 가서 기다려라. 곧 좋은 날이 올 테니.”
“네. 네, 그러겠습니다. 기억이 소멸할 때까지라도 그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세 명은 몇 번이나 그 말을 되뇌었다. 파천이 다시 사라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눈물마저 정신 나간 이들처럼 중얼거렸다.
파천은 이후에도 여러 인물들에게 자신을 보였다.
그를 보았다는 자들이 여기저기 속출하면서 그 소문이 빠르게 하룬 전역을 질주해 갔다. 그는 설란이나 라미레스나 아난다를 먼저 찾지 않았다. 무한계와 천상계와 선계의 지도자들을 먼저 찾지 않았다. 그는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여러 성향의 인물들 앞에 나타났으며 그 상황 또한 갖가지였다.
영자들은 이제 광명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광명의 출현!
영계 역사상 현세에 광명이 출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이제 한숨과 눈물대신 광명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재능 있는 자들은 시와 노래를 만들어 광명을 찬양하기도 했다. 급전된 분위기에 놀란 건 영자들 자신들이었다. 아직도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에 놀라워했고, 곧 자신들을 찾아 날아와 줄 것이란 것에 감격했다.
연합군 수뇌회의가 소집되었다. 바로 그 시간 선발대원들도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너울이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제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님을 알겠지? 나만 본 게 아니었어. 파천이 하룬에 나타난 거야. 그가 돌아온 거라고. 기가 막힌 놈이라니까. 이런 시기에 짠 하고 나타나서 한번에 영자들을 사로잡았잖아. 모두들 그 얘기로 떠들썩하다니까.”
이런 너울과 달리 다른 이들은 좀 석연치 않다는 표정들이었다.
아난다가 의문을 표시했다.
“파천님이 돌아오신 게 확실하다면 우리를 먼저 찾았을 겁니다. 아니면 라미네스님이나 설란님을 찾았겠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그야……”
너울도 얼른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긴 했다.
이때 각시가 너울을 흘겨보았다.
“대화를 나눠 본 것도 아니잖아?”
“그야……그렇지.”
“다들 환상을 본 거 아닐까? 긴장감이 지나쳐서 간절히 염원하는 대상이……”
“그건 아냐.”
“그럼 지금 상황을 설명해봐. 사령부 수뇌들 중에서도 없다고 하지. 가장 최측근이라고 한는 라미네스님이나 아난다님도 영문을 몰라 하시지.
그렇다고 여러 영자들이 동시에 지켜보는 자리에 나타난 것도 아냐. 봤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제 혼자 봤다지. 그리고 슈트레, 그 정신 나간 작자 앞에 파천이 짠 하고 나타났을 리가 없잖아. 혼내주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니고 말야.”
“그럼 네 말대로 하자면 슈트레가 파천의 등장을 간절히 염원한 게 되냐?”
“말이 또 그렇게 되나?”
“어쨌든 한 둘이 아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열 명이야. 모두 다른 장소, 다른 상황이었고 시간대고 각기 틀려.
뭐야, 그 표정들은? 아직도 못 믿겠다는 거야? 좋아, 두고 보자고.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너울이 자신만만해 할수록 다른 이들의 눈길은 깊어 간다. 당연히 의심의 눈초리였다.
그런데 상황이 일시에 반전되는 일이 벌어진다.
바로크 전사들의 등장.
언제 그들이 떠났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들의 존재감마저 신경 쓰기엔 너무 미약했던 자들이었다. 그렇게 떠났던 자들이 발을 돌려 다시 나타났을 때는 너무도 어마어마한 내용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들이 선발대를 찾은 것이다.
카이로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분명하게 대화를 나눴다는 말이군요.”
“네,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더 이상 묻지도 않는다. 너울이 거 보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안 믿을 거야?”
각시가 배시시 웃으며 너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믿어, 믿을게. 믿는다고.”
“쳇, 내 말에는 모두 콧방귀를 뀌더니만. 내가 평소에 어느 정도로 신뢰를 받지 못했는지……이제야 알겠군.”
아쉽게도 너울이 터라져서 하는 말을 귀담아듣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들어 있었다.
수뇌회의의 분위기도 선발대원들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나타날 리가 있겠소?”
제석의 지적에 모두는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여 동조한다.
모든 정황이 의심스러웠던지 노군은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어쩌면 적들이 군중들을 새로운 국면으로 선동하기 위해 획책하는 일일 수도 있소.”
로메로가 입을 쩍 다시더니 허허롭게 웃는다.
“그건 좀 억지 같군요. 파천의 등장을 적들이라고 반길 리가 있습니까? 우리측 사기를 올려줘서 그들이 무슨 득을 보겠습니까? 라미레스 님의 견해를 듣고 싶군요.”
공적인 회의석장인지라 라미레스도 존대를 잊지 않는다.
“잘 모르겠군요. 제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그런 식으로 출현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뭐라 확언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니니 부정할 일도 아니고. 이거 참……”
로메로는 이 참에 파천이 등장했을 때에 대한 확실한 언질을 받아 두고자했다.
“그것보다는 광명을 지닌 파천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의논을 했으면 합니다만.”
1군단장인 야마천주가 눈을 예사롭지 않게 번쩍인다.
“어떻게 대하다니요? 설마하니 새로운 군단을 만들기라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새로운 군단 어쩌고 하는 것이 심상치 않다.
벌써부터 저지하려는 분위기를 풍겨 오는 야마천주에 비해 충선은 직설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가 광명을 얻었다면 더 이상 생각해볼 여지도 없습니다. 연합군에 총사령관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전체를 일사불란하게 이끌어갈 지도자가 없다면 전쟁은 필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나 야마천주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를 쓰고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무한계의 지도자들인 메테우스님 이나 카란님도 사령부에 귀속되는 걸로 합의되었는데 아무리 광명을 얻었기로서니 연합군 총사령관이라니요? 그게 지금 사리에 합당하다고 보십니까?”
로메로는 곧바로 제석의 뜻을 물었다. 예전에 파천을 두고 영계연합군 총사령관 운운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천주님의 생각도 1군단장님과 동일합니까?”
“흐음.”
자신이 당시 그런 뜻을 비치긴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파천을 사령관에 앉히는 건 자신이 그런 그마저 지휘할 위치를 확보함을 전제한 의견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대천주는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물러서 있을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광명을 얻었다면……그만한 자격이 있겠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능력과 지도력이 검증된 이후에 한해서입니다.”
짧으나 확고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가 광명을 얻었다면 시험을 해본 뒤 그때 가서 결정하겠다는 뜻이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달리 말해 대세라면 자신도 따르겠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로메로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다른 이들의 견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로메로는 생각했다.
‘광명을 얻은 파천을 반대할 명분은 없다. 그런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그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이지 않고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파천일 터. 그가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야.’
큰 슬픔을 머리에 이고 비탄을 가슴에 꽂은 채 기나긴 세월을 견뎠다. 유형지와도 같이 척박한 흐름을 느낄 새도 없이 단호한 결정을 강요하기만 했다. 하나의 결정은 다른 하나를 그리워하는 몸부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를 용납할 수 없음이 서러워 흘리는 눈물이었다.
메타트론과 수호자는 하룬의 남부, 찢어진 언덕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기물거리는 하룬의 그림자는 회색 빛 반투명한 색채였다. 하나는 지키고자, 하나는 지배하고자 하는 상반된 의지를 지녔음에도 이 순간 둘은 그런 것 따위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메타트론의 암울한 눈빛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된다. 수호자의 입술이 열리며 창세의 비밀과도 같은 내밀한 웅얼거림이 흘러나온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의 시작은 언제나 끝에 맞물려 있었지.”
“이젠 끝내자.”
“그럴…….수 없어. 이대로 물러서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내 의지는 말한다. 후회란 없다. 선택의 결과를 당당하게 맞으면 된다.”
“애초에 얻을 것도 없는 싸움이었다. 대상조차 명확하지 않은 혼자만의 몸부림이었지.”
“그러는 넌 무엇 때문에 날 막아섰더냐?”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네 분노도 슬픔도 내게는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해진다. 네 고뇌는 내 것이기도 하지. 그래서 막아야 했다. 막을 수 없음을 알지만 그 결과에 상관없이 난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너와 나는 결국 아무것도 얻어낸 것이 없어. 저들처럼 치열한 삶의 흔적이란 것이 없어. 저들처럼 실수하고 돌이키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그러하질 못하지. 무가치한 순간에 매달려 전부를 던져버리지도 못한다.
저들은 내가 보기에 여전히 어리석은데……저들에게서 어찌 완전자가 나온단 말인가?“
“영원이 허락한다 해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어쩌면……이해하려 들기에 얻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런……가?”
“궁금한 것이 있다.”
“……”
“네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면……그때는 어쩔 셈이냐?”
“너도 알다시피 내 목적은 아주 단순하다. 신의 침묵을 깨트리는 것. 설사 그 결과가 참혹한 심판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다. 그의 침묵만은 깨어져야 한다.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난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도 있다.”
“달라지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이로군?”
“넌 또다시 막아서겠지. 하지만 너 역시 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 여전하지 않은가?”
“후, 당연하지. 나마저…… 날 버릴 수는 없으니까.”
“날 도울 수는 없겠지? 단 한 번만 내 뜻에 따라줄 수는 없느냐?”
“……”
“너와 내가 일치를 이룰 수만 있다면, 그리 될 수만 있다면 내 의도는 당장이라도 이뤄질 수 있을 텐데……아쉽군.”
“비밀차원과의 싸움은 우리 생각보다 힘겨울 거야.”
“그래도 지지는 않는다. 비록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들 중 내가 두려움을 가질 만 한 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다수라는 것이 걸림돌이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너와 나 그리고 파천을 넘어서는 자는 그들 중에 없다.”
“확신을 금물이다.”
“아니, 만약 그들 중 날 이길만한 자가 있었다면 영계는 진작에 그들의 놀잇감이 됐을 거야. 그들은 언제나 너와 날 두려워해 왔다. 그들의 무기는 비밀의 장막일 뿐이야.”
“그들을 멸할 생각이냐?”
“거추장스런 돌부리는 걷어차 버려야지. 그런 연후 파천과 승부를 낸다. 내가 이긴다면……사람들은 내 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을 인질로 삼아 신을 끌어내겠다.”
“그래도 침묵한다면?”
“영원히 사람들을 내 종으로 삼겠다. 더 이상 소멸당하지 않아도 되게끔 자유를 주겠다. 영원히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 내 다스림이 신과 다름을 보이리라.”
“반대의 결과가 생긴다면?”
“파천에게 내가 패한다 해도 최후의 방법은 있다. 어차피 내 뜻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내가 만일 너와 함께 소멸하고자 한다면?”
메타트론의 눈빛이 처음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너는 그럴 수 없다. 너는 끝내 날 포기할 수 없다. 내 소멸이 곧 네 소멸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랬다. 메타트론의 소멸은 수호자의 소멸을 의미했다. 둘의 대립이 지극히 은밀하고 간접적인 방법을 통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이번에도 수호자는 그런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파천이 막상 메타트론을 제압하고 소멸시키려 든다면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될지는 그 자신도 단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메타트론은 수호자의 관여함이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파천이란 막강한 패가 등장한마당에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결국엔 메타트론을 자기 손으로 소멸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파천이 날 제압하게 된다면…….너와 나의 운명은 어찌 될까?”
수호자는 대답을 피했다.
“그가 그러지 않을 거라 보느냐? 과연……그럴까?”
수호자가 물었다.
“그가 두렵나?”
“그래, 두렵다. 그가 지닌 힘의 근원이 날 두렵게 한다. 파악되지 않는 무한함이 날 한없이 초라하게 한다.
그렇지만 난 결코 지지 않는다. 너도 내가 이기길 빌어라. 내가 진다는 것은 곧……전 차원계의 소멸을 뜻하니까.”
이게 무슨 소린가? 느닷없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전에 수호자는 메타트론의 내심을 짐작해보려 애썼다. 그래도 질문은 별 수 없이 같은 것이었다.
“뭘 염두에 두고 있는 거지?”
“너도 알 텐데. 마지막까지 몰린 내가 선택할 길은 단 하나.”
“설마……”
“그렇게 해서라도 난 내 의도를 이루고야 만다.”
“……!”
“결국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승부야.”
“안 돼. 안 돼. 그것만은.”
“파천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나보군.”
하룬 상공에 신비한 전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메타트론의 눈빛이 더욱 깊어져 간다. 수호자도 눈길을 떼지 못했다. 하룬 전역을 한 번에 뒤덮을 정도로 넓은 막이 상공을 두르고 있다. 그리 밝지 않은 은은한 금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을 청량하게 할 듯했다. 메타트론이 그걸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파천의 등장은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기도 하지만……또 한편으로는 절망이기도 하지. 결코 나타나서는 안 될 완전의 능력이란 현세의 사람들에게는 공포에 다름 아니야.
저들의 의지는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것.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새로운 흥밋거리겠어.”
수호자도 동의하는 것일까? 가타부타 말이 없다.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주시한다. 그들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하룬의 전경을 바라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라치오와 쿤사였다.
더 이상 하룬에 머물러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간주한 라치오가 대적자들을 찾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역시 파천을 만났다.
그리고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갈등은 그리 오래 사지 않았다. 쿤사의 단호함이 갈등하고 있는 라치오를 자극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하룬에 없다. 더군다나 광명을 얻은 파천이 하룬에 머무는 한 그들과의 조우는 요원하기만 해. 가자, 가서 우리 손으로 얻어내자.”
쿤사의 다그침에 라치오도 결심을 굳혔다.
‘발길을 돌리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래서 얻는 게 뭐지? 작은 명예? 자부심? 그런 것이 내 욕망은 채워주지는 않는다. 그들, 대적자들의 수뇌를 만나야 한다. 모험을 해서라도 얻고야말겠다. 그것만 손아귀에 넣으면 미련 없이 떠나겠다.’
라치오와 쿤사가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하룬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일행인 밴살렛 등을 하룬에 남겨둔 채 대적자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하게 자취를 감춘 뒤였다. 수호자가 말했다.
“저들을 알고 있나?”
메타트론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물론, 잘 알고 있지. 내 기준에 가장 합당한 자들이지.”
“어리석은 자들이야.”
“그렇게 매도해서는 안 돼. 자연스런 욕망이다. 신과 같아지려 하는 자들이다. 아니, 그보다는 좀더 소박하지. 최소한의 기회. 그래, 저들이 원하는 건 단지 그것뿐이잖아. 소멸극복은 한계가 분명한 인간들에게는 영원히 떨쳐낼 수 없는 유혹이다.
“소멸을 극복한 자들을 보라. 그들이 더 행복해졌는가? 그들이 더 나아갔는가?”
“어디를 향한 나아감인가가 문제겠지. 최소한 만족하고 있잖아. 그들에게 불안은 없다.”
“천만에. 그들의 불안감은 예전보다 더 심하다. 발전이 없다는 건 상대적인 퇴보거든. 소멸을 극복한 자들은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 신에게서 점차 멀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건 그들에게도 괴로운 일이니까. 우리처럼 말이야.”
“그 정도 괴로움은 감수해야 한다. 그들의 발전이 더딘 건 자질 문제이지 소멸극복이 변명거리가 돼서는 곤란해.
한계에 다다른 자들이 그 단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운이 따라줘야 한다. 그 운은 신의 선택이고.”
“여전히 네 생각은 나와 다르구나.”
“긴말할 필요 없어. 당장 저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가 저들에겐 가장 중요한 거야. 자유의지란 어떤 기준으로도 제한 받아서는 안 된다. 그래야 의미가 있다. 저들이 소멸을 원치
않는 다는 게 핵심이야. 너나 신의 판단은 저들의 몫이 아니다. 선택이 있고 그에 따른 책임만 존재한다.”
“책임이 단지 견딤이면 족한가?”
“그래,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따라서는 곤란하지. 그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게 속하길 원한 자들이 내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너는 항상 그런 식이구나. 네가 강제하고 구속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를 존중한 것이 되고, 신의 침묵은 방치함이 되니.’
“너와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그들과 나 사이에 공통점 같은 게 있었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 한다지만 실은 모든 걸 제 의지 하에 구속시키고자 한다는 것. 선택의 폭을 좁혀 운명이란 이름으로 강제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끝내는……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간다는 것. 그 이유가 신의 징벌에서 자유롭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
그래서 너희는 악이다. 용서받을 수 없는 절대 악.
그럴 듯한 명분으로 위장해보지만 그 시커먼 속내는 금방 드러나 버리지. 그 열매를 보면 알아.
너에게서 비롯된 마계는 네 혼돈된 욕망과 가치를 그대로 답습했고, 그들의 행사 또한 순리에 언제나 반하는 것이지. 부정할 수 없는 네 실체가 바로 저들이야.”
수호자는 늘 메타트론을 비난해 왔고 메타트론은 변명해 왔다. 하지만 이번만은 메타트론에게서 어떠한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단지 한마디만을 했을 뿐이다.
“나는 이긴다. 이김은 진리의 정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영광을 나와 함께 하지 않겠는가?”
“떠나라. 나는 남을 테니. 나는 저들과 함께 하리라.”
하나는 남고 하나는 떠났다. 수호자는 하룬의 변화를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메타트론, 너는 아직 모른다. 내가 왜 파천을 고집하는지 아느냐?
그의 출현이 곧 신의 다른 대답이기 때문이다.“
메타트론은 하룬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지켜볼 것이다. 네 뜻이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그리고 살피겠다. 신의 의지가 무엇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