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66화 : 용천의 약속, 메타트론이 원하는 대로

랜덤 이미지

황제의 검 – 166화 : 용천의 약속, 메타트론이 원하는 대로


용천의 약속, 메타트론이 원하는 대로

파천이 용천으로 왔다. 옛 용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와 파천이 나눠야 할, 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던가.
옛 용은 파천을 거절하지 않았다. 옛 용은 파천을 특별하게 대했다. 그 역시도 파천에 대한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파천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 그와의 만남이 시작이었다. 다리를 놓은 것 역시 옛 용의 호기심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옛 용의 호기심은 변함이 없었다. 지혜로운 자! 옛 용에 대한 파천의 대표적인 시각이었다. 옛 용이 먼저 다가왔다.
“그대의 용맹스러움과 지혜와 결단이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이끌어 가길 진심으로 바라노라. 상황이나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그대의 판단을 신뢰하고 정진하라. 그리하면 좋은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대의……머뭄은 언제까지인가?”
용천에 몸을 숨기고 하늘과 땅과 사람 보기를 거부한 것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 숨어 있었다. 옛 용은 솔직한 대답을 해왔다.
“진실을 직시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나를 버릴 수 있을 때. 그때가 아니면 난 여기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얻고자 함이지? 자신을 괴롭혀서 얻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 지운 형벌로 책임을 다했다고 여기는가?”
“충분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내 지혜는 사람들에게 더 큰 혼란을 줄 수 있다. 메타트론을 만나보았겠지?”
“물론.”
이번엔 옛 용이 질문을 퍼부을 태세다.
“어떻게 판단하는가?”
파천은 여기 온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 서두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의 이런 대화가 옛 용을 기만하는 것 같아 착잡했다.
“그는 편협하다. 그는 모든 걸 자기 위주로 해석하고 판단하며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다른 이가 그렇게 보아주길 강요한다. 이용할 자와 적으로만 상대를 규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하지만 방식이 틀렸다. 그 사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못한다. 두려운 게지. 그 동안의 의지를 버려야 함이 가련하다 여기고 있으니.”
“잘 보았다. 그는 수호자의 일치를 갈망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 자기애만이 사랑의 유일한 존재양식이라고 믿는다.
지금의 분리에서조차 그는 사랑 나누기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수호자를 인정하지만 거기까지다.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서라도 상대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은 하지 못한다.
메타트론은 극단으로 치우쳐 있다. 그에게 선,악은 무의미하다. 그에게 인간의 존재는 무가치한 것이다. 그에게 극복해내야 할 신은 종속되고자 하는 유일한 대상. 그럼에도 종속시킬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거기서부터 그의 개입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신이 사랑하고 애정을 갖고 있는 모든 대상들을 통해 신의 관심을 돌려보려 애쓰더니 분열시키는 데까지 이르렀고, 이제는 급기야 그들을 지배하거나 소멸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그의 그런 시도가 어디서부터 기인되었든 행동의 결과가 지금의 영계다. 그의 개입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더 방치해두면 사람들은 자존을 포기하게 된다.
만에 하나 그런 지경까지 이르게 됐을 때 신의 개입은 필연이 되겠지. 하지만 그때는 어느 쪽에게나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신은 언제나 무엇을 통해서 섭리하고 말씀하신다.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고 그 누구일 수도 있는.
신의 절대성을 인정한다면 사람들의 세계는 언제나 낙관적이다. 가파르게 꺾어지다가도 바로 잡는 이가 나온다. 악이 만연하게 되면 선을 외치는 자가 나오고 부정이 나오면 긍정이 바로 이어진다.
그들은 그래서 서로 보완적이며 그 상태를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간다. 지금 까지는 그래왔다. 완전자의 출현은 항시 인간세의 고비 때만 있어 왔음도 같은 맥락이지. 그런 점에서 지금 너의 출현은 지금까지의 내 예측과는 사뭇 다른 점이 많다. 너는 어느 때 갑자기 튀어나온 불가사의한 존재다. 예비 됨이 없이 급작스럽게 출현한 너는 과거의 자리도 남아 있지 않고 미래의 자리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특이한 존재다.
네 역할이 무엇인지, 네 결말이 어떨지가 그래서 나는 매우 궁금하다.”
파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날 기억하지 못하는가?”
“너는 내 기억에 없는 존재다. 혹시 네 기억에 내가……있는가?”
물으면서도 옛 용은 그럴 리 없다고 내심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대는 날 기억하지 못하지만 난 그대를 기억한다.”
옛 용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다지 듣고 싶지가 않군. 예감이 좋지 않아. 나도 널 알고 있나?”
“물론이다.”
“너는 누구지?”
파천은 망설이지 않았다.
“비밀차원에서 처음으로 너를 찾았던 자. 아니 사람들을 찾아왔던 자가 바로 나였다.”
옛 용은 조금 전보다 더 많이 침묵했다. 그 침묵을 깨트린 건 파천이었다.
“내가 바로 그였다. 그대들의 타락을 부추겼던, 그 동기를 놓았던 최초의 원인자가 바로 나였다.”
옛 용은 그 때를 기억해냈다. 차원의 경계를 넘어 신을 극복할 방법을 제시했던 사람. 그가 바로 파천이라니!
옛 용의 걱정은 그 안에서 부딪히고 깨어져 결국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더 차분해진 목소리가 옛 용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랬군. 왜 이런 사실을 내게 밝히는 건지를 모르겠군. 몰라도 될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 네 말대로 모르는 게 나을 뻔했던 이야기지. 하지만 했어야 했다. 내가 왜 이곳을 찾았는지 그 목적을 밝히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존재였던 지를 밝힘이 우선 되어야 했다.”
“신은……정말이지……이해할 수가 없구나. 헤아려도, 헤아려도 알 수가 없는 존재다. 널 왜 이런 상태로 우리 앞에 출현시켰지? 하필이면 왜 너를 통해……”
“나도 그것까지는 모른다. 단지 내 간절한 소망을 신이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만 말할 수 있다.”
“네 소망?”
“그래. 사람으로서 그들을 다시 겪어보는 것. 그걸 원했었다.”
“재미있군. 지금도 너는 스스로를 신과 같다고 여기나? 우리에게로 온 너 역시 사람이었다.”
“그래. 맞았어.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나 역시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의 사람들과 구별된 존재라고 여겼다. 그 우월 의식이 신도 사람도 될 수 없게 만든 것이고.”
“한 가지 묻자.”
“말하라.”
“너는 비밀차원의 사람이다. 그들 중에서도 존귀한 지위를 누렸을 걸로 짐작되는데, 맞나?”
“사실이다.”
“그런 네가 그들과 싸우겠다는 건가? 사람들은 위해서 네 동류들과 싸우겠다는 말인가?”
“천만에.”
“……?”
“사람들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싸운다. 내 신념을 위해서. 내가 옳다고 여기게 된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누구에게? 그자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아니, 내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함이다. 내 지금의 삶은 그 물음의 과정이다. 답은 내려졌지만, 확신이 있지만 그것은 새롭게 확인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얻게 되는 것은 뭐지? 네 스스로의 만족감인가?”
“모르겠다. 아직은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과 뒤섞여 있으면서 알게 된 것 같다. 내 안에 가장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야.”
“궁금하군. 그게 뭐지?”
“날 의심하고 신뢰하는 자들을 향한 관심이다. 그들을 향한 사랑이다. 나는 비밀차원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사랑의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그래, 분명하다. 내 안에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상실해버린 사람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랑……사랑이라……”
“나는 내가 뿌린 씨앗이 발아되고 자라나 지금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신과 함께 지켜보았다. 신은 그들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구별하지 않고 관심을 두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경중(輕重)이 없는 사랑이 과연 사랑인지 의문이 갔다. 지금도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이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된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뿌린 씨앗이 비틀려 자란 것을 바로 잡고 싶다. 그리고 기회를 상실한 자들에게 다시 기회를 열어주고 싶다. 내가 지닌 의지로 되지 않는다면 달성할 수 없다면 그 길을 보여주는 것만이라도, 그래서 네 도움이 절실하다.”
“네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는데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리라 여기나?”
“넌 반드시 내 부탁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건 왜지?”
‘왜냐면……네 안에도 그와 같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 메타트론에게 없는 그 사랑이 말이야.”
옛 용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들어보자고 했다. 무엇을 부탁하는지를 물었다. 파천은 오해가 없도록 신중하게 말을 풀어 갔다. 이것이 옛 용과 만날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타트론이 날 극복하지 못하게 되면 최후로 선택할 패가 뭐라고 생각하나?”
“모르겠다.”
“아니, 너는 알고 있다.”
“좋다. 알고 있다고 해두지.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하지?”
“메타트론이 원하는 대로 해줘라.”
“뭐?”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란 말이다.”
“너는 지금…… 그 결과를 알고서 하는 말인가?”
“그래.”
“그런데도 그걸 원하다니……무슨 뜻이냐?”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렇게까지 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메타트론이 네게 원하는 때가 오면 저절로 알게 된다.”
“너는 또 다시 나를 기만하려는 것이냐?”
“아니다. 내가 지금 널 대함은 거짓 없는 진실이다.”
“헤아릴 수 없구나. 널 신뢰할 수 없다.”
‘날 신뢰할 수 없다면 신에 대한 신뢰로써 내 부탁을 들어주길 바란다. 내가 널 믿듯이 너 또한 날 믿어주길 바랄 뿐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나는 메타트론의 강요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내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지만 그에게는 없다. 이 차이가 그런 결과를 만든다.”
파천은 다시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알려주마. 메타트론과 수호자가 서로 연관되어 있듯이 나와 그들도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라면……”
“그래, 그들의 소멸은 곧 내 소멸을 뜻한다. 그들이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최종적으로 부딪치지 못하는 이유처럼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처지란 말이다.”
옛 은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냈다.
“그런데도 메타트론에게서 사람들을 지켜내겠다고? 이 사실도 메타트론에게 알려지길 원하나?”
“네 선택에 맡기지. 메타트론이 굳이 알아서 내게 유리할 건 없지. 신은 장난처럼 우리들의 운명을 공유하게 해버렸다.”
“짓궂군.”
옛 용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미로를 걷는 기분이었다.
‘나를 믿는다고 했던가?’
옛 용은 파천이 떠난 이후에도 그 생각에 몰입해 있었다.

파천이 왔다 간 직후 이번엔 메타트론이 용천을 찾았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교대로 옛 용을 찾은 것이다.
옛 용은 그를 반기지도 배척하지도 않았다. 메타트론은 이번에도 옛 용을 한껏 자극하며 비꼬고 있었다.
“너는 여전히 비겁해. 이곳에 숨어 가늘게 눈을 치켜뜨고서 무얼 관찰하고 있는 거지?”
“여전하구나.”
“그래, 나는 변함이 없다. 내 뜻을 단 한 번도 꺾어본 적이 없다. 내 당당함은 내 의지와 욕망에 솔직하다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그런 것 같군.”
“알고 있겠지?”
“뭘?”
“비밀차원을 정벌하기로 했다.”
“파천에게서 들은 것과는 다르군.”
“파천? 파천이 여길 찾아 왔었나?”
“그랬지.”
“그가 무슨 얘기를 했지?”
“너와 같은 얘기를 다르게 하더군.”
“어떻게?”
“비밀차원을 정벌한다는 말은 없었다. 그들을 바로 잡겠다고 하더군.”
“하하하, 참으로 오만해. 이건 나보다 더 하지 않은가?”
“그도 너처럼 솔직하지.”
“흐음, 그건 그렇고 다른 얘기는 없었나?”
메타트론은 자신이 옛 용을 무슨 일로 찾았는지는 뒤쪽으로 밀어두고 파천에 대한 관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두 가지를 말하고 가더군.”
“뭐라고?”
메타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너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 털어놓더군.”
메타트론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굳이 더 들어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지 자신이 여기 온 이유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언급했다.
“부탁이 있다.”
“너도 냐?”
“파천도…..네게 부탁을 했던가?”
“널 도와주라고 하더군.”
“하하하하.”
이번에도 메타트론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결국 파천에 관한 핵심 단서들을 옛 용은 메타트론에게 모두 던져준 셈이었다. 그런데도 메타트론이 캐묻지 않은 것은 이제 더 이상 옛 용의 소관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옛 용은 메타트론에 대한 책임을 면하려 했다.
“부탁이란 뭐지?”
“만약……내가 파천을 이길 수 없게 된다면……그때 너는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
들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들어줘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는 메타트론을 옛 용은 수용하고 있었다.
“무엇을 해주길 원하나?”
“너는 내게 빚진 것이 있다. 잊지는 않았겠지?”
“……!”
“너로 인해 내 타락은 시작되었다. 네가 날 꼬드기지만 않았어도 지금의 나는 없었다.
옛 용은 가슴이 답답했다. 메타트론이 저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그는 늘 이런 심정이 되곤 했다.
“그래서?”
“그래서 너는 내 부탁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메타트론의 언집함에 옛 용이 최초로 관심을 표명했다.
“구체적으로 말해봐라.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가?”
“결국 그와 나와의 싸움으로 모든 것은 종결된다. 내가 그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넌……내 요구가 있을 시…….완전자의 세계를 열어야 한다.”
결국은 그것이었던 것이다. 공멸! 메타트론의 요구는 충분히 예상 했던 바였다. 그럼에도 실제로 확인하게 되자 옛 용은 잠들어 있던, 그래서 자신에게는 없는 감정으로 치부했던 분노가 어떠하리라는 걸 예상하고 하는 말이겠지?”
“물론.”
“너 하나의 가치와 이 세계의 가치가 동일하다고 보느냐?”
“물론.”
“내가 들어줄 것이라 여기나?”
“그럴 수밖에 없지. 너는 지금 내 앞에서 약속해야 한다. 아, 물론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을 매우 희박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만일을 대비한 내 마지막 포석일 뿐이니까.
자, 이제 약속해라. 들어줄 거지?”
메타트론의 얼굴이 이 순간만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옛 용은 추악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메타트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파천이 누구인지 아느냐?”
하려다가 만 얘기를 다시 꺼내놓고 있었다. 메타트론은 별 관심이 없다는 투로 옛 용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늦추지 않았다.
“내 요구를 묵살할 셈이냐?”
“그가 바로 우리에게 왔던 비밀차원의 사람이었다.”
“너로 인해 내가 타락……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메타트론은 보기 드물게 놀라고 당황했다.
“파천이 바로 그였다.”
“……!”
“놀랍나?”
“파천이……분명 그렇게……말했나?”
“그래.”
“그랬군.”
메타트론도 옛 용처럼 격정을 쉽게 가라앉혔다. 그의 얼굴엔 오히려 더 화려한 미소가 내 걸렸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신이 이제는 우리를 상대로 장난까지 치는 군.”
“또 하나 더 있다.”
“이번엔 또 뭐지? 그가 사실은 신의 현신이라고 말할 참이냐? 이 모든 연출이 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참이냐?”
“너와 수호자와 파천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
“흥,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와 수호자가 파천의 삶을 일정 부분 공유하기로 했던 건 우리의 요구였었다.”
“그 말이 아니다. 그가 소멸하면 너도 소멸한다.”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때대로 같은 말도 듣는 이에 따라서는 이처럼이나 달리 해석되기도 하는 법인가보다.
메타트론은 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또 있을까 싶게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이 그렇게도 반가운 소식인가?”
“하하하하, 당연하지. 파천은 더 이상 내 경계 대상이 아니다. 이제 그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고집을 부려 보아도 내 손바닥 안에서 놀게 된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파천의 말 대로였다. 옛 용은 메타트론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괜한 후회가 엄습했다.
“네가 했던 부탁은 그럼….이제 필요 없게 된 건가?”
“흐음 , 그래도 모를 일. 마지막 단속까지 끝마쳐 놓으면 이제 더 이상의 변수는 없어지게 되는 거지.
자, 이제 네가 약속할 일만 남았다. 네 약속이 네 입을 떠나는 순간 난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신도 이제 내 앞길을 막아설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흐하하하.”
옛 용은 파천의 당부를 떠올렸다.
“좋다. 네 부탁을 들어주지. 네가 요구할 시에 나는 네 뜻대로 완전자의 세계를 열겠다.”
옛 용이 너무도 흔쾌하게 수락하는 게 의외였던지 메타트론은 한참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일이 의도했던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음이 오히려 불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께름칙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아, 아주 좋다. 너도 이제야 네 위치를 제대로 깨달았구나. 아무리 애써보아도 우리는 이미 신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은 지 오래다.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렇게 된 바에야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선택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는 거다. 내가 모든 걸 가지고 누리게 되면 그 영광을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향한 변치 않을 내 약속이다. 이제 너와 나, 파천과 수호자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운명으로 엮이게 된 거야. 후후후.”
메타트론은 연신 웃으며 옛 용과의 대화를 즐겼다.
둘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함께 했다. 메타트론이 머릿속엔 새로운 구도가 재빨리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그 밑그림의 시작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 여하에 달렸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바돈과 대적자의 괴멸 소식은 광명에 대한 기대가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천이 뜻을 세우면 지금 당장이라도 제왕의 마계를 섬멸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자들이 늘어갔다.
맹신은 전염이 빠르다. 그의 출현에서부터 지금까지의 활약만으로도 사람들의 기대는 엉뚱한 곳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파천이 자신들의 곁에서 바른 다스림을 펼쳐줄 것이라 확신하게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연합군의 수뇌들마저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으니 다른 이 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런 확산을 파천은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비밀차원으로 떠나야 한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야 한다. 돌아온다 해도 마지막 고비를 또 넘어야 한다.
절대적 맹신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꼬임을 잘 풀어낸다 해도 사람들을 위해서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파천은 메타트론과의 접촉을 수호자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그는 무리들과 동행하며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가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부재 이후를 대비해 선발대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갔다. 이런 파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장에는 눈에 드러날 정도의 변화가 없었다.
소군이 물었다.
“사부님, 모든 이들을 위하는 길이란 게 있을 수 있나요? 더 많은 이들을 위한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봐요. 제왕의 군대와 마계를 척결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구요.”
파천은 선발대와 잠시 하룬을 벗어나 있었다. 서른셋의 쿠사누스와 라미레스, 설란과 대덕, 충선이 함께 하고 있었다. 모두는 파천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말이 맞다. 소수의 발호를 막아 다수를 보호함은 옳은 일이다. 문제는 그 방법과 수위라 할 수 있지.
화합할 여지가 남았음에도 힘들다 해서 쉬운 길을 택해서는 안 된다. 또한 제 뜻이 아무리 옳고 바르다 해도 그 방법과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면 상대가 되려 명분을 갖게 된다.
행하는 길이 바르고 수단이 떳떳해야만 결과가 빛나는 것이지. 스스로 정직하다면 당장 죽는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옳게 생각하고 행한다는 것은 죽음을 대하는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에서만 나올 수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해라. 그럼 후회가 없다. 결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결단과 자기성찰이 따라야 한다.”
카이로가 물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른데 그 옳다는 것 또한 제각각이자 않겠어요? 그런 기준이란 게 상대적이고 주관적일 텐데 어디에 맞춰야 하나요?”
“모든 가치기준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네 마음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다면 하늘도 너를 책망하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배우지 않아도, 경험하지 않아도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잣대가 있다.
환경과 조건에 의해 다른 것이 덧입혀진다 해도 훼손되지 않는 순수한 원형이 있지. 그것이야말로 회복해야 할 사람의 참모습이다.
네 머리카락 한 올에는 너와 동일한 너 자신이 담겨 있다.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에게도 내재된 신성을 동일하다. 너에게서 떨어진 머리카락이 너 자신이 될 수 없듯이 신에게서 분리된 사람이 신이라 할 수는 없다.
완전하지는 않으나 충분한, 내재된 신성을 회복해야 하고 그 시작이 자신을 바라봄이다. 네 안에 그러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널 그와 같은 존재로 여길 때만이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난다.
이 시도의 결단은 스스로를 새로운 존재로 규정하게 되고 이 행위는 곧 너 자신의 새로운 거듭남을 촉구한다. 그럼에도 신과 같이 완전해질 수는 없다. 우리의 마침은 결국 신에게로 돌아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눈앞에 결정된 것으로 보이는 어떤 상태들은 실상 변화의 과정 중에 놓여 있다. 어떠한 것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시간도 공간도 우리들 자신도 마찬가지다. 옳다는 것은 모든 변화가 나아가는 긍정적인 방향성이다. 우린 이걸 순리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하지.
그럼 이런 순리에 역행함은 무엇을 이르는 걸까? 신에게서 나서 신에게로 돌아감이 순리라면 존재자체와 목적과 나아감을 부정하는 것이 역리다.
신을 부정하는 순간 네 삶에 그나마 남아 있던 향기는 자취를 감추고 삭막하고 메마르고 거칠어진다. 네 영혼이 죽음을 강요당하는 순간이야.
그 부정의 순간에도 변화는 일어난다. 변질된 존재의 목적은 타자와의 분리를 극대화시켜 모든 기준을 자기 판단 아래로 끌어 내린다. 신이 죽고 세상이 죽고 사람이 죽는다. 그에게는 모두가 참이고 모두가 거짓이다.
이런 혼란은 남을 해치고 자신도 해친다. 메타트론이 그렇고 비밀차원의 사람들이 또한 그렇다. 하지만 그들 역시나 돌이킴의 기회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 그것 또한 순리이니까.”
마신이었다가 쿠사누스로 돌아온 바로크가 물었다.
“당신은 완전해졌나요?”
“사람으로서 완전해 질 수는 없다.”
“완전자가 나온 것은 그럼 무엇이죠?”
“그들이 이 세계를 떠났기에 완전해 진 것이다. 신과 일치를 이룬 것이다.”

파천이 하룬을 몇 명의 선발대원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들 중 하나가 물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모든 기준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네 마음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다면 하늘도 너를 책망하지 못 한다.”
또 다른 이가 물었다.
“저는 그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진전이 없습니다. 이런 것은 왜 그런가요? 자질이 부족해서인가요? 같은 시간이 흘러도 각자의 성과가 다르니 분명 그러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망감은 시시때때로 절 괴롭힙니다. 영원이 흘러도 나아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좌절은 자라나게 하고 시련은 단단하게 하며 불행은 널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실패하였을 때 실망할 수는 있다. 이 세상에 포기하지 않는 한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이룰 것이다. 네 조급함을 경계하라.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다.”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이가 고개를 바짝 세우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남을 해롭게 한 적이 없습니다. 제 영격은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이르러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도 힘이 부족하다 하여 멸시의 눈길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을 비웃지요.”
파천은 그의 교만함을 경계해 줄 필요성을 느꼈다.
“스스로 현명하다 믿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스스로 무능하다 생각지 않으면 노력하지 않고,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지 않으면 채우지 않는다.
너는 먼저 몸을 낮추고 남에게서 배워라. 인간은 누구나 마땅히 행할 길을 알고 있다. 배움은 모르는 걸 가르치는 게 아니다. 잊고 있는 걸 일깨우는 것이다.
너보다 못하다 여기는 이에게서도 배울 바가 한 가지는 있을 테니 그 교만함을 버리지 않고서는 마음의 짐은 여전할 것이다.”
“완전한 것이란 무엇이죠?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길에 이를 수 있나요?”
작은 소리였다.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들에 묻혀 파천에게 전달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파천은 사람들 틈을 헤치고 그를 구별해 찾아냈다. 키가 유난히 작은 여자였다. 파천의 절반 정도에 미칠까 싶은 작은 체구의 여자는 선한 눈망울의 소유자였다.
파천은 그녀를 자신 앞으로 나오게 한 후 시선을 같은 높이로 맞췄다.
“다시 한 번 말해줄 수 있나?”
“듣기로 파천님은 영계 사상 처음으로 광명을 이 세상으로 가져오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광명의 지혜를 알고 싶습니다. 저는 보시는 바와 같이 초라하고 볼품없습니다. 완전자의 길은 멀고도 험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기만 합니다.
다른 이들의 냉대쯤은 참아낼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 치여 사는 건 익숙해졌으니까요. 하지만 궁급합니다. 이런 저도 완전해 질 수 있나요? 있다면 그 길은 어떤 길인가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파천은 그녀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파천은 알아본 것이다. 보기 드물게 순수하고 착한 심정의 소유자였다. 미련스럽다 할 정도로 인내심이 많아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파천은 아름답다고 느꼈다.
“너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누구보다 앞서 있다. 만약 완전에 가까운 순으로 줄을 세운다면 너는 앞자리 쪽을 차지하고 있겠지.
하지만 제일 앞선 자와 뒤처진 자의 차이는 그리 크지가 않다. 얼마든지 극복되고 역전될 수 있을 정도의 차이지. 순간은 영원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 순간의 때는 오랜 시간의 결단이 충만 되었을 때 찾아오며 그 순간 비약하게 된다.
깨달음은 동시에 완전에 이르게 한다. 순리적인 동의가 곧 신고의 일치로 이어진다. 그것이 완전의 비밀이다.
파천은 이어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진심을 담아 호소했다.
“포기하지 마라. 선후가 있을지언정 결국엔 모두가 이를 것이다. 신을 부정하지 마라. 네 안에 신이 있음을 인정하가. 그와 하나 되기를 갈망하라. 하늘의 뜻은 항상 인간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진리란 사람들 가운데 있다. 진리를 알았다 해서 진리라 하지 말라. 가두는 순간 그건 네게서 자유를 뺏어 가리라
진리는 말에 있지 않다. 또한 알고 있다 해서 완전하게 표현해 낼 수도 없다. 진리를 보았을 때 채워지는 그 순간의 흔적에 집중해라. 감춰둔 것은 결국엔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세상에 알려져서 흔한 것이 되고 만다.
교만한 마음을 경계하라. 도적은 네 재물을 훔쳐 가지만 교만은 네 양심을 도적질해 간다. 모든 이는 너의 스승이니 먼저 마음을 낮추고 두 귀를 활짝 열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듣고 말하는 걸 아낀다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지닌 생각이 몸을 만들고 뜻을 세우며 운명을 결정하고 길을 연다. 너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지 마라. 그 차이는 걸치고 있는 옷과 같이 모습만 다른 것이다. 편견은 너를 바른길에서 멀게 하며 더 많은 적을 신속히 만드는 지름길이다.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자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네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서야 가능하다. 선한 사고는 선한 행위를 낳고 악한 생각은 악한 행위를 낳는다.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렸다.
길에 든 자들은 누구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운명은 네 생각이 머무는 곳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행동에 주의하고 말에 조심하며 생각을 바르게 하라.
시간은 흐르며 만물은 변화한다. 멈춰 있는 것은 죽은 네 마음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판관은 마음속에 있다. 양심에 충실하다면 넌 그 누구에게도 정죄 받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욕심이 없으면 그가 거하는 곳이 바로 낙원이요, 마음이 어질고 바르면 그와 함께 하는 이들이 늘 행복하다. 좋은 일을 하고서도 즐거워하지 않음은 마땅히 대가를 바랐음이다.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우니 이것이 곧 대가다. 괜한 기대로 가장 큰 대가를 놓칠까 염려하라.
남과 불화하게 됨은 마음에서 시작되어 혀끝에서 완성된다. 말에 조심하라, 허나 말을 아끼는 것에만 애쓰지 말고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말을 하도록 힘써라.
남에게서 뺏기보다는 채워주어라. 그리하면 마르지 않을 만족을 얻을 것이며 그 또한 너를 채울 것이다. 항상 네 발걸음을 살피고 돌아보아 행여나 네 발에 치이고 상처받는 이가 없는지를 살펴라.
죄의 가치는 돌이키게 하는 바요, 선의 가치는 따르게 하는 바다. 남이 선한가를 판단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악인이라 생각하라.
앞선 자나 뒤처진 자나 강한 자나 약한 자나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화합하라. 모든 꽃이 다 향기가 있을 필요는 없다. 꽃은 때때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한 자는 이 세상에 없다. 누군가 네게 도움을 청한다면 손을 내밀라. 언젠가 그 손에 의해 구제 받을 수도 있으니.
사람이 희망을 품는 것은 인생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를 슬퍼하지 말고 오지 않은 미래를 근심으로 맞지 말라. 과거는 흩어져 사라졌으며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음이니 현재만이 그대가 가진 시간의 전부이며 그것 또한 네 의지 아래 놓여 있다.
스스로를 의지하라. 스스로를 의지한 만학 하라. 장래 일을 아는 자가 누구냐! 형통함과 곤란함이 교차하니 그 비밀을 능히 밝힐 이가 누가 있으리요. 절망이 깊다 하나 소망보다 높지 않으며 죽음이 강하다 하나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한 지점을 주시하면 다른 곳은 보지 못한다. 전체를 관조하면 그 모든 거시 보이는 법이다. 완전한 길은 네 안에 있지만 완전자의 길은 네 밖으로 내보내라. 그들을 기억은 하되 널 묶는 사슬로 만들지 말라.
만 가지 길이 있으니 그 모두가 옳은 것이다. 많은 것을 채우고자 하면 먼저 그만큼 자신을 비워야 하며 큰 지혜를 얻고자 하면 어디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 처음과 끝이 한결같다면 완전한 것이다.”

하룬에서만은 시간이 멈춰선 듯했다. 곧 이제껏 없었던 위기가 닥칠 것이란 염려마저도 잊어버린 듯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제왕과 루시퍼가 메타트론이란 절대자의 지휘 아래 두 눈을 번쩍이고 있음도 잊어버렸다.
마음에 평화가 오니 두려움도 불안도 가신 것이다. 파천의 헌신은 지극했다. 그는 되도록 많은 얘기를 들려주려 했고 많은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었다. 그가 가는 곳에 웃음이 피어나고 그가 있는 곳에 안식이 찾아들었다.
파천은 준비를 서둘렀다. 곧 떠날 시기기 온 것이다. 하룬의 영계연합군 수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데리고 갈 자와 남을 자를 밝혔다.
모두가 함께 떠나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 되었다. 비밀차원의 사람들은 영계의 강자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상대할 만 했다. 의욕만으로는 안 되는 것도 있었다.
또 다른 이유라면 파천과 수호자가 자리를 비웠을 때 영계를 지키는 것이 어떤 측면으로는 더 중요한 일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파천에게는 더 큰 관심사였다.
“나, 수호자, 선발대, 라미레스, 카란과 메테우스만 비밀차원으로 떠난다.”
적어도 너무 적었다. 메타트론이 루시퍼와 대 마신, 어둠의 천사들만 데려가는 것도 파천의 생각과 맥을 같이했다.

수호자에게 라미레스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의문을 던졌다.
“대체 일곱별의 나머지는 누구입니까?”
라미레스가 알게 된 건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이 전부다. 아난다와 케플러와 비행매소의 현자. 나머지 세 명이 궁금했던 것이다. 수호자가 말했다.
“일곱별은 내가 준 암시를 그대들 나름대로 해석하고 키워 낸 것뿐이다.”
너무 허망한 대답이었다. 라미레스는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그런 걸 그렇게 거창하게 퍼트렸단 말입니까?”
“왜, 그로 인해 잘못 된 것이라도 있나?”
“……”
하지만 수호자의 원래 의도는 그가 한 말과 달랐다.
‘그들이 파천의 부재를 메울 것이다.’
나머지 셋은 현 영계에 속한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수호자의 생각처럼 그들이 실제로 변수로서의 역할을 해줄지도 의문이었다. 일곱별 중 하나는 마령의 본주로서 파천을 대적하고 있지 않은가! 수호자는 간절히 바랐다.
‘현명한 자들이니……시기를 놓치지는 않겠지.’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