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67화 : 비밀차원의 지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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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67화 : 비밀차원의 지배자들


비밀차원의 지배자들

파천과 메타트론, 수호자를 필두로 영계의 최강자들이 모조리 한자리에 모였다.
적이지만 지금은 힘을 합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제일 앞서 가던 파천이 뒤를 슬쩍 쳐다보았다. 루시퍼와 대 마신들이 메타트론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루시퍼와 파천의 눈길이 허공에서 얽혔다가 떨어진다. 다시 전면을 향해 고개를 돌린 파천과 어깨를 나란히 한 메타트론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빠져나간 영계연합군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우리가 비밀차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공격은 시작된다. 후에 네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
파천은 이런 메타트론의 의도를 진작부터 읽고 있었다. 그는 하룬을 떠나기 전 모종의 조치를 취해놓은 상태였다.
‘하룬을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 마신들이 빠진 마계에서는 거의 없을 것이고 제왕의 쿠사누스들은 하룬에 남겨둔 강자들만으로 충분하다. 더군다나 열두 명의 제왕들까지 가세했으니 우리가 더 우세하다고 할 수 있겠지.’
하룬을 보호하는 막의 강도를 더 높여놓는 것이다. 결국 하룬으로 침투 가능한 전력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고 하룬의 강자들도 막 안으로까지 불러들여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수호자는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옛 용에게서 들은 충격적인 사실들을 메타트론이 수호자에게 모두 털어놓은 상태였다.
‘달라진 건 없다.’
수호자는 애써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비밀차원이 가까워질수록 모두의 얼굴은 점차 긴장감으로 딱딱해져 갔다.
메타트론과 파천, 수호자 등이 신중을 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위력을 짐작할 두 있었다.

새로움에 대한 동경이나 신비함, 호기심 따위의 감정은 없었다.
정서가 메말라서가 아니라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만큼 한가로운 심정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행들을 맞아들인 풍경은 이런 감정 상태를 처음부터 뒤흔들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비밀차원에 대한 선입견은 지극히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출발한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 퍼석퍼석한 마른 대지에 붉게 타오르는 하늘, 여기저기 치솟는 불기둥, 조각 나 있는 이름 모를 짐승의 뼈, 회색 빛 하늘, 말라 붙어버린 강 등을 저마다 연상했다.
아니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이 적당하겠다고 생각한 이도 있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메타트론도 루시퍼도 비밀차원을 들어와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일부분이었지만 당시 그들이 보았던 풍경은 이렇지 않았다.
파천은 익숙하게 일행들을 안내해 갔다. 파천의 곁에 바짝 붙어 따르던 라미레스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낙……원이……따로 없……군.”
그랬다. 적어도 눈에 보여 지는 것만으로 따져본다면 이곳은 분명 세상에 유일한 낙원일 것이다. 무한계도 중간계도 천상계나 선계도 이런 아름다운 환경을 조성해놓지 못했다.
소군은 회상에 잠기며 약간은 들떠서 말했다.
“인간계 어딘가에 있을 법한 곳이야. 저기 태양도 있네.”
맑은 하늘은 새파랬다. 풀쩍 뛰어올라 뒹굴고 싶을 정도로 아늑해 모이는 구름들이 여기저기 뭉쳐 흐른다.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키 높고 낮은 나무들이 향기 가득한 먹음직한 과실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넓은 대지의 끝은 구름과 맞닿아 있었다. 수호자는 이곳이 눈에 익다는 것을 금방 생각해 냈다.
‘태초의 낙원. 그래, 그곳에 다시 온 듯하지 않은가?’
한참을 가던 일행들이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파천이 멈췄기 때문이다.
소군이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다.
“비다. 비가 오고 있어.”
꼬깃꼬깃 접혀 있던 과거의 기억이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소군은 아이 마냥 좋아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발대원들은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파천이 모두의 이런 느슨함을 경고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만날 자들은 너희들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존재들이다. 이들은 너희와 같은 사람이지만 처음부터 소멸을 겪어보지 않았다. 무엇에도 현혹되지 마라. 그리고 절대 흩어져서도 안 된다. 내 지시를 충실히 따라주기 바란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잊지 마라.”
파천의 얼굴이 예전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음을 모두는 보았다.
메타트론도 더불어 긴장했다.
‘파천은 비밀차원의 사람. 일단은 너를 따르는 게 낫겠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선발대와 메타트론의 일행들은 파천의 뒤를 숨죽이고 따랐다. 조금 전까지 내리던 비는 금세 멈췄고 다시 온 세상은 따스한 햇살로 충만해진다.
파천은 비밀차원 중에서도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자들을 먼저 찾아온 것이다, 이곳 사정을 알아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다.
파천은 모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차원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했다.
“이곳은……”
비밀차원은 파천이 있던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밀차원의 사람들은 자연적인 소멸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들에게 죽음은 낯선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타인에 의해 살해되는 일이나 큰 잘못을 저질러 처형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죽은 자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소생한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리와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자들은 현저한 능력 감소가 온다. 그런 이유로 두려움을 갖지 달리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비밀차원은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결정된 계급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영원토록 유지된다. 일순간 넘어 설 만큼의 비약이란 것이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계급은 총 셋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지도층을 이루고 있는 자들은 소수이고, 그 밑으로 갈수록 수가 많아진다. 우라노스, 프뉴마, 에레츠. 아바돈의 세 군대의 명칭은 이들의 계급에서 따 온 것이었다. 지배계층과 중간계층 피지배계층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계층들 내에서도 수십 단계의 미세한 차이가 실제로는 존재하고 있었다.
우라노스는 전체를 다 합쳐서 백 명을 넘지 않는다. 이들 중에 소멸을 경험해 본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만약 소멸을 당하게 된다면 그 즉시로 프뉴마로 강등된다. 그건 강제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소멸을 경험한 이는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이 감소되기에 우라노스로서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들의 입장 차이로 인해 세 계파로 나눠져 있다.”
“입장 차이란?”
메타트론의 물음에 파천이 상세한 설명을 이어 갔다.
“신과 영계에 대한 입장을 말한다. 신 또한 자기들과 다름없는 질서 내 존재이며 능력 차는 인정하지만 특별한 위치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목표는 신을 극복하는 것이고 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들을 지배하려 한다.
이런 성향을 지닌 진보 성향의 인물들이 가장 많고 세력 또한 크다. 이와는 달리 좀더 유연한 태도를 지닌 자들이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들 역시 급진파와 기본적으로 같은 견해이다. 단지 목적이 다르다. 신을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이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들이지.
그 둘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그들 간의 충돌을 방지하고 서로의 뜻을 조율하며 비밀차원의 평화를 지켜오고 있다.”
“그럼 아바돈의 배후는 급진파인가?”
“그래. 이런 진보적인 성향의 계파에서도 두 축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도 균형이 무너진 것 같다. 하나는 지금 즉시 영계를 정벌하자는 쪽이었고 또 하나는 상황을 고려해 가며 움직이자는 신중론자 들이었지.”
‘코모라가 그 꼴이 난 걸 보면 비밀차원에서도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먼저 알아보고 나서 결단을 내려야한다.’
코모라는 급진파에서도 신중론자들의 대표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에 동류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해 상대적으로 반대파에 밀리곤 했다. 하지만 파천이 기억하기로는 코모라의 지지 세력이 이처럼 쉽게 허물어질 정도로 약한 게 아니었다.
파천은 세 계파 중에서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세력의 지도자였었다.
그가 떠난 뒤 영향력이 많이 약화된 건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존재는 비밀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순간 균형이 무너질 있기에 상대적으로 소수임에도 이런 일이 가능했다.

“코모라, 그대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소멸을 각오하고 돌아왔다. 내가 거짓을 말할 까닭이 있다고 보는가?”
“키케로가 어찌 신의 징벌을 면할 수가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야 알 수 없지. 한 가지 분명한 건 키케로는 존재하고 있으며, 광명을 얻었다는 생령이 바로 그라는 사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야.”
언젠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던 그 소리들의 임자였다. 여긴 비밀차원 내 더 비밀스런 어느 한 공간이었다.
실제로 소리의 임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처소에서 분신만을 보내 회담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여섯이었다.
비밀차원의 세 계파를 대표하는 자는 일곱 명이었다. 중간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키케로와 헤르바르트, 급진파를 대표하는 아퀴나스, 캄파넬라, 코모라 그리고 늘 이런 그들과 맞서며 반대해 오던 빈델반트와 바르트가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 중 키케로만이 빠져 있었다. 키케로는 파천이 이곳의 지도자로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이름이었다.
“키케로가 비밀차원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그를 어찌 대해야 할지 결정하는 일만 남았다.” “그는……우리 모두를 대신해 신을 대면했던 자. 그는 영원히 우리들 모두의 영웅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처음 신을 극복할 방법을 제시했고 우리들을 이 자리까지 오게 했다.
하지만 그는 존재하지 않을 때가 가치가 있다. 그가 우리 앞에 다시 선다면, 그리고 예전과 달라진 모습으로 우리 차원을 들쑤셔 놓는다면 그 뒷감당은 힘들어진다.”
“그가 돌아왔다. 엉뚱하게도 사람들을 이끌고 이곳을 침범해 들어왔어. 광명을 얻은 그는 우리의 천적. 그가 결단을 내리기 전에 처리해야한다.”
“그렇지. 그는 이렇게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나를 기억하라. 그대들은 영원토록 나를 기억해야 한다. 그대들을 대신해 난 소멸의 길을 택한다. 신의 저주가 내게만 있을 것이다. 장차 빛의 세상에 혼란이 왔을 때 그대들은 신에게서 그 모든 영광을 훔쳐야 한다. 그리고 영원토록 나를 숭배해야 하리라. 그것만이 내 희생에 대한 대가다.’
그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나 캄파넬라는 지켜볼 것이다.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음을 안다면……이번에야말로 일치를 이뤄낼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의 후회란 없다. 그와의 싸움은 우리가 해왔던 어떤 일보다도 어려운 일이 되겠지. 하지만 이겨낼 것이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한다면 천궁과 사람들 모두가 힘을 합한다 해도 이겨낼 수 있다.”
코모라는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갈 것 같자 몹시 흡족해했다.
“아퀴나스, 그대의 생각을 말해보라.”
“나는……아무것도 결정내리지 못하겠다. 그는……그는……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가 우리를 향해 검을 겨눌 리가 없다. 그가 했던 말처럼 인간들의 왕으로서 옛 친구인 우리들을 찾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나 헤르바르트의 생각도 동일하다. 그는 우리 중 가장 지혜로웠고 가장 용감했다. 그가 있을 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첨예한 대립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난 뒤부터 우리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가 다시 돌아왔다면 반갑게 맞으면 되는 것을. 그가 광명을 얻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게 아닌가?”
헤르바르트는 원래부터 키케로와는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친밀했기에 이런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지만 급진파 세 명의 지도자 중 하나인 아퀴나스마저 그런 입장을 취한 건 의외였다.
“그럼 어쩌자는 거지?”
“키케로가…… 내가 다스리는 곳으로 오고 있으니 먼저 만나보겠다. 그런 뒤에……결정을 하자. 그대들의 우리처럼 정말 이 세계를 말하러 왔다면 생존을 위해서도 싸워야겠지.
그런 게 아니라면……그와는 정말이지 싸우고 싶지 않다.”
“흐음.”
“이를 어쩐단 말이냐? 키케로, 너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들의 대화는 끝이 났다. 어둠의 공간에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건 코모라와 캄파넬라 그리고 아퀴나스였다. 지금껏 급진세력을 이끌어왔던 세 지도자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캄파넬라가 그곳으로 또 한 명을 불러들였다. 마령의 본주 케플러였다. 그가 비밀차원으로 들어와 있을 줄이야.
“케플러, 네 의견을 말해봐라.”
케플러는 아직까지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파천이 이들이 항시 말해오던 바로 그……키케로였다니.’
케플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위험한 자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곳 비밀차원쯤은 멸할 수도 있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는 인간계의 멸망에 관여한 자들에게 조금의 자비도 베풀 마음이 없는 자입니다. 그가 혼자가 아닌 메타트론과 수호자 등 영계의 최강자들만 엄선해 들어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싸우기 위해서 왔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얻을 기회란 주어지지 않습니다. 힘을 합하지 못한다면 일부 만으로라도 그를 제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코모라가 케플러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는 다짜고짜 날 멸하려고 했었다. 그가 적임이 분명해졌다. 그런데도 망설일 이유가 있는가? 그는 키케로다. 키케로를 벌써 잊었나? 마음먹은 일을 그가 이루지 못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강하다. 이제 다 강해졌다. 광명을 얻은 그는 무서울 정도로 강해졌다.
아퀴나스, 그대가 나서야 한다. 그대가 하지 않으면 우리 세계는 멸망할 수도 있다.”
캄파넬라가 아퀴나스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듯 힘차게 말했다.
“들었나, 아퀴나스? 아직도 망설여지는가?”
“그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는……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이런 날 용납하라. 그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
“왜?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나?”
“그걸 모른단 말인가? 그는 우리 모두를 대신해 신의 정벌을 자원했다. 그는 당시 모든 걸 버렸었다. 캄파넬라, 코모라, 그대들이라면 그럴 수 있나? 그대들이 지니고 누려온 것들을 버릴 수 있나?
그런 희생은……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우리를 적대하고 우리 뜻을 거스른다면 당연히 싸운다. 하지만 확인될 때까지는 기다린다. 그것이 우리의 최소한의 도리다.
케플러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아퀴나스의 결정을 저 둘은 받아들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내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어. 가자, 가서 파천이 돌아 올 때를 대비해 내 할 일을 해야겠어. 후후, 설사 이곳에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너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기다림이 지루하지는 않겠어.’

거대한 호수에 다다랐다. 호수의 표면엔 붉고 푸르고 새하얀 꽃잎들이 떠다닌다.
그 사이를 비집고 솟아나온 것은 나무줄기였다. 빽빽하게 채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 많은 나뭇가지들이 손을 하늘로 뻗고 있었다.
물길은 물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호수 정 중앙에서부터 힘차게 솟아오른 분수는 족히 백여 가닥은 될 듯한 물줄기를 사방으로 뿌리고 섰다. 부서지지 않고 그 형태를 유지한 채 전체에서 분리된 줄기는 호수의 가장자리로 자취를 감췄다.
부서지는 햇살로 인해 여기저기 무지개가 나타나 함빡 웃고 있다. 수중생물인지 새인지 모를 생명체가 그 사이를 빠르게 지나치며 연신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
호수 주변에는 작고 아담한 석옥 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파천과 일행들이 그 사이를 지나쳐 가도 아무도 그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들이 없다.
낯선 이방인의 방문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걸까?
그것은 아닌 듯했다. 두세 명씩 호숫가의 푸른 초원에 드러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었는데 작은 말소리는 자신들의 방문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게 했다.
파천은 일행들을 호숫가에 멈추게 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모두가 바라본다.
“저기다. 이곳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사는 곳이다.”
호수 중앙의 분수 상공 위에 꽤 커 보이는 궁전이 햇살을 받으며 떠 있었다.
지붕을 무엇으로 덮었는지 사방으로 신비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눈부셨다. 루시퍼는 마계의 궁전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외벽이 없다는 것이 특히 닮았다.
파천이 다시 말했다.
“내가 갔다 올 동안 여기서 기다려라. 다시 한 번 말하는데……괜히 쓸데없는 충돌을 일으켜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파천은 궁성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묘한 긴장감이 주변을 감싼다. 대 마신들 중 발리는 주변에서 몰려드는 자들을 향해 경계하며 고함치듯 말했다.
“이자들을 해치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큼한 미소를 베어 물고 경계심 없이 다가서던 자들에게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서 그 많은 자들이 나타났는지 무리 지어 여기저기서 출몰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들 중 하나가 물었다.
“좀 전의 그 말은 무슨 뜻인가?”
발리는 우물쭈물했다.
메타트론과 수호자를 제외한 모두가 긴장에 휩싸였다. 언제든 싸울 수 있게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 분위기를 읽었던지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던 자들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주춤 물러섰다. 메타트론은 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을.
‘대체 이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메타트론은 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대 마신에 버금간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싸우게 된다면…… 살아남을 자가 몇 되지 않겠군.’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생각들을 대폭 수정했다.
‘파천의 말대로라면 이들은 세 계급 중 최하위에 속해 있는 에레츠다. 이들이 이럴진대 프뉴마나 우라노스라면 대 마신이나 쿠사누스들을 능가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메타트론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비밀차원의 대다수는 에레츠 계급에 속한 자들이고 프뉴마나 우라노스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메타트론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을 쳐다보며 냉담한 어조로 경고했다.
“나는 메타트론이다. 현재는 너희들을 방문한 것이지만……상황에 따라 적이 될 수도 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너희의 압박은 내게 가소로운 일이다.”
‘너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내 상대는 아니다.’
메타트론은 그런 내심에 확신을 더했다. 문제는 이들이 아니라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보지 않고서는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들의 수준이 예상에 미치지 못한다면 비밀차원을 멸할 생각이었다.

파천이 들어선 대전에는 십여 명의 우라노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크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맞은편에 하나가 비어 있다. 아마도 파천의 자리인 듯했다.
제일 중앙 정면으로 보이는 가장 깊숙한 위치에 앉은 이를 파천은 똑바로 직시했다. 그가 말했다.
“키케로? 키케로인가?”
파천은 자리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얼굴을 똑바로 세우고 눈을 크게 뜬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키케로다.”
우라노스들이 동요했다. 한때는 자신들을 이끌던 지도자 키케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자의 등장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반가움의 감정을 드러내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현재 이곳의 지도자인 헤르바르트가 입을 연다.
“역시 그랬군. 먼저 묻자. 너는 어찌 신의 징벌을 면할 수 있었지? 타협했나? 우리를 정벌하겠다고 자임했나? 그 대가로 살아남은 거냐?”
파천은 우라노스들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을 향한 시선에 인간의 감정이라고 불릴 만한 변화는 없었다. 무심의 상태. 인간의 감정을 모조리 제거한 자들, 우라노스는 그런 자들이었다.
“아니, 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군.”
헤르바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키케로라면……내가 알고 있는 키케로라면 그런 짓을 해서 살아남을 자는 아니지.”
“동일하다. 나 또한 기회를 다시 얻은 것뿐이다. 선택은 여전히 내게 남겨진 채로. 우리가 처음 그랬듯이 신은 다시 내게 삶을 허락했다.”
“자비라는 건가?”
“어떻게 불려도 상관없겠지.”
“그럼 지금 네가 다시금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함이냐? 아니면 다른 저의가 있나?”
“결정은 어디까지나 너희들에게서 나온다. 나는 묻기 위해 왔다.”
“무엇을 묻겠다는 거지?”
“중간계에서 코모라를 보았다. 그가 어떤 짓을 저질러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바돈이 너희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현 영계의 혼란에 너희들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도.”
“그래서?”
“중지하라 그리고 관심을 거둬라. 저들의 삶을 간섭하지 마라.”
헤르바르트는 할 말을 잊고 파천을 똑바로 주시하고만 있었다.
우라노스 하나가 파천에게 따지듯 물었다.
“당신이 처음 시작한 일이오. 신을 극복하자고 부추긴 것도 당신이었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도 당신이었소. 우리의 관심을 저들에게로 돌려놓은 자가 당신이었음을 벌써 잊은 거요?”
“그래, 내가 그랬었지. 나 하나로 족하다. 이제는 거둬야 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너희들은…… 냉정함을 잃고 신과 마지막을 결하고자 했다. 말리지 않았다면…… 내가 저들에게로 가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는 아무도 모르오.”
“아니. 결과는 정해져 있다. 신은 애초에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를 멸할 길은 없다. 그는 너희들 자신이며, 모든 존재를 포함한 우주전체다.”
헤르바르트는 즉각 반박했다.
“그럴 리 없다. 신은 극복할 수 있다. 우리가 힘을 합하면 신은 극복된다. 이건 확신이다. 너는 변했군. 예전의 키케로가 아니야. 그래서 우리와 싸우기라고 하겠다는 거냐?”
“뜻을 꺾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 왔다.”
“키케로, 네가……우리와 싸우겠다고? 왜지? 무엇이 두려워서 그런 결심을 한 거지?”
“두려운 건 없다. 너희에게 두려움이 없듯이 내게도 두려움은 없다. 난……너희들을 여전히 아끼고……사랑한다. 그래서 싸워야 한다. 단 하나라도 살리기 위해서, 다시 기회를 얻게 해주기 위해서 난 물러설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너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지금 너희들이 영계에 직접 침투하게 되면 큰 혼란이 야기된다. 그것만은 막고 싶다. 다시 되돌려야 할 시간이 너무 많다. 너무 멀다. 지금 뜻을 꺾는다면…… 나는 이대로 돌아간다. 하지만…..”
“하지만?”
“고집을 부린다면……난 너희와 함께 소멸하겠다.”
“네가 강한 건 인정하지만 너 하나로 인해 우리가 멸망할 것 같으냐. 우리가 그렇게 약할 것이라 생각하나?”
“아니지. 그래서 결심이 필요했다. 메타트론과 나와 수호자의 힘이면 너희들 전부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공멸하는 건 어렵지 않다.”
“광명, 광명으로 인한 자신감이냐?”
“그래,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광명의 능력은 더 크고 깊고 넓다. 우리가 예전 두려움을 갖고 있던 신의 능력, 창조와 소멸의 권능! 그것으로 이 세계를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파천의 뜻은 명백했다.
“다른 길은 없나? 우리가 뜻을 돌리지 않고도 너와 타협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나?”
이것은 키케로와 친분이 깊었던 헤르바르트에게서 나온 질문이었다. 파천은 단호했다.
“없다. 너는 알 것이다. 내가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둘 중에 하나다. 모두가 살거나, 모두 죽거나.”
“그런데 왜 너희들 셋만 오지 않고 다른 이들까지 이끌고 왔지? 네 말대로라면 굳이 그들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들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지. 자신들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이 곳의 실체를. 모든 것이 안정된 이후에도 여기 온 자들의 입을 통해서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너희들의 존재를. 그 위협을 말 야.”
파천은 알고 있었다. 일시 뜻을 되돌릴 수는 있지만 영원히 잠재울 수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공멸한다면 전해지지 않겠군. 그리고 아무도 기억할 수 없을 테고.”
“아니.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는 살릴 것이다.”
“역시 키케로다워. 대단한 자신감이다.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있다.”
“말해라. 나도 그것이 궁금해서 널 먼저 찾았다. 지금 이곳의 상황이 예전과는 많이 다른 것 같던데?”
“그래, 네 말이 맞다. 달라도 너무 달라졌지. 아퀴나스를 기억하겠지?”
“물론.”
“균형이 깨어진 지 오래다. 아퀴나스는 사실 상 이곳의 유일무이한 절대자가 된 지 오래다. 그의 묵인이 없었다면 현 구도는 오래 전에 깨어졌겠지. 그는 지금의 이런 상태가 좋다고 했다. 급진파의 지도자이면서도 그들의 과격함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반기를 들었던 코모라가 세력을 잃고 비참하게 쫓겨났지. 캄파넬라도 몇 번인가 시도를 했었지만 그때마다 좌절해야만 했다. 캄파넬라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모양으로 간섭함을 묵인하면서도 전면적인 침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뜻은 종잡을 수 없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그만이 안다. 이번 일도 그렇다. 네가 광명을 얻은 장본인이고 우리 세계를 멸할 것이란 다른 지도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뜻을 지지했고, 네 진의를 알아보라 했다.
그에게 달렸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좋지 않다. 이곳이 지금껏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나는 보았고 느꼈다. 신의 망설임을. 그는 비밀차원에 대한 징벌을 지금껏 미뤘다. 서로 간의 견제와 균형이 있는 한 이 상태가 유지될 것이고 회복할 기회는 여전하다.
하지만 헤르바르트의 말대로라면 상황은 다르다. 그 하나에 의해 모든 게 좌우될 수도 있다. 위험하군.’
“그를 만나보겠는가?”
헤르바르트의 제안이었다. 파천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포함한 모두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헤르바르트는 즉각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을 초청했다.
그가 지정한 한 공간에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분신을 보내왔다. 파천은 그들 중에 함께 있었다.
파천의 합류로 그들은 예전처럼 비밀차원의 지도자 일곱 수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천은 키케로가 될 수 없었다. 빈델반트가 말했다.
“헤르바르트와의 대화를 통해 네 진의를 일부나마 알게 되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다. 더 이상 숨겨둔 것도 없지.”
“네 원함이 지나치다.”
“그런가?”
“키케로, 네 뜻을 돌이켜라. 너는 우리와 같은 이다. 거룩하고 존귀한 예전의 키케로로 돌아오라.”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본 진실은 날 새롭게 만들었다. 여기 너희들과 함께 있는 나는 키케로가 아니라 파천이다.”
“어리석군. 네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네가 본 진실이라는 게 대체 뭐지?”
“너야말로 어리석다. 너 또한 사람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
“너희가 닫아 건 마음의 문은 두텁다. 어떤 것으로도 깨거나 부술 수 없다. 그래서 침묵할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좋아. 그렇다고 해두지. 한 번 더 확인하자. 우리가 영계를 침범하면…… 우리와 맞설 것인가?”
“후후, 너희는 여길 떠날 수 없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너희는 영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너희는 여기서, 내 앞에서 결정해야 한다.”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자들이 술렁거렸다. 캄파넬라가 말했다.
“키케로, 네 오만이 더해졌구나.”
“결정하라. 나는 조용히 듣고만 있겠다.”
파천은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파천은 이곳에 오며 사실상 마음을 굳힌 뒤였다. 이들이 뜻을 꺾기를 바람은 무리였다. 하지만 노력은 해봐야 한다. 그 시도만으로도 파천은 할 바를 다 한 것이다.
파천의 의견에 나머지 여섯 명은 서로 의견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전혀 파천을 의식하지 않는 듯, 솔직한 얘기들이 오갔다. 바르트가 말했다.
“키케로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 그는 맞설 것이다. 우리의 뜻을 꺾기 위해 온 자! 신의 사자나 다름없다. 우리의 입장을 확고하게 정리해야 한다.
지금 결정은 신에 대한 우리의 선언이 될 것이다. 광명의 출현은 우리를 향한 신의 대답이 아니던가!”
신의 사자! 신에 대한 선언!
그 말은 모두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번의 결정은 다시 번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후회 없는 선택을 위해 충분히 토론을 벌여 갔다. 캄파넬라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난 싸우겠다. 먼저 우리 세계를 침범해 온 자들을 멸하고 곧장 영계를 정벌하겠다.
천궁과 신과 맞서서 추호도 물러섬이 없이 당당하게 일전을 결하겠다. 지금에 와서 우리 뜻을 꺾을 수는 없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이제야말로 결정을 내릴 때다. 또다시 기다릴 이유가 없다. 설사 패배해 영원히 현상계에서 사라진다 해도 후회는 없다.”
코모라도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나도 캄파넬라와 뜻이 같다. 우리의 힘은 충분하다. 키케로와 메타트론, 수호자의 합쳐진 힘이 가공하다 하지만 우리 전부를 이길 수는 없다.
다른 우라노스의 힘은 더해질 필요도 없겠지.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이후 신과의 마지막 결전마저 승리로 이끈다면 영원히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모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으로 한 발짝도 더 옮겨 놓을 수가 없다. 막다른 벽을 느낀 것은 오래된 일. 이제 더 망설일 이유가 있나?”
여섯 중에 둘이 결전 의사를 표시했다. 이제 남은 건 넷. 지금껏 급진 성향의 지도자들을 견제해 왔던 빈델반트와 바르트가 차례대로 뜻을 밝혔다.
그들은 역시나 어중간한 태도였다. 빈델반트가 먼저 말했다.
“키케로, 다시 한 번만 더 묻자.”
“말하라.”
“너는 영계에 이후에도 계속 남을 것이냐?”
“평화가 정착된다면 내 할 일이 끝난다면……나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확실한가?”
“네가 광명을 얻고 이후 이곳을 찾아온 것은 우리들에 대한 견제의 뜻이냐? 신의 의지가 그렇게 시켰나?”
“아니다. 내 뜻이다. 너희들의 의도가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알고 있기에 이곳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너희들의 힘은 내게 가장 큰 위협이었고,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지어놓지 않고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왔다.”
“공존을 원하나? 영계에 대한 관심을 거둔다면 넌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해 줄 수 있나?”
“아무 것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약속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겠지. 너희가 뜻을 거둬들인다면 영계가 먼저 너희들 세계를 침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역량도 되지 않고. 신 또한 너희를 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너희가 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선택은 이후에도 계속되겠지.”
“그렇군. 이제 내 의견을 말하겠다. 키케로의 말처럼 아직은 우리에게 선택할 기회가 있다. 지금 물러선다며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할 수 있다. 물러서지 않고 나아간다면 끝까지 가야 한다. 최종적으로 신과 마주서야 한다.
나는 아직……그 순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를 극복할 자신이 없다.”
캄파넬라가 물었다.
“그래서?”
“아직 때가 아니다. 난 물러서겠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가 원한다면…… 함께 하겠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좀더 지켜보겠다는 의미였다. 바르트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나 또한……빈델반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키케로가 등장하기 직전까지도 우리들은 이런 논의를 해본 적이 없다. 아바돈을 통해 사람들을 살펴보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싸움엔 동의할 수 없다. 아직은 너무 빠르다는 느낌이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해야 한다. 승리의 확신이 들 때까지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신과의 싸움은……반대다.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난 그를 극복함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입증하는 것에 있다. 우리 세계에 대한 안전이 확보된다면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얻은 영광이란 것이 과연 지금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를 말하겠다. 캄파넬라와 코모라는 키케로를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 듯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냉정한 존재였던가를 상기하라.
그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움직였다. 그가 얻었다는 광명의 능력이 어디까지 이르러 있는지 확신할 수 있는 자가 있나? 그는 공멸을 말했다. 그가 그런 말을 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난 물러서겠다. 확실하지 않은 일에 내 전부를 던질 수는 없다.”
좀더 확실한 반대가 나왔다. 이제 둘만이 남았다. 캄파넬라와 코모라는 불만이었다. 그럼에도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아퀴나스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가 중요했다. 그의 결정은 반대 의견을 말했던 빈델반트와 바르트도 돌려놓을 것이라 확신했다.
헤르바르트가 먼저 말했다.
“나는 싸우겠다.”
의외의 말이었다. 가장 소극적인 태도를 보아리라고 예상했던 자들은 놀라워했다.
“키케로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그가 광명을 얻었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는 것도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그가 싸움을 준비하고 메타트론과 수호자 그리고 영계의 최정예를 추려서 이곳을 찾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싸우기 위해서 왔다.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뜻을 꺾는다면 그가 물러설 것이란 예측은 어리석다. 그는 싸울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만들어놓지 않고서는 물러서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는 어쩌면 우리 모두를 소멸시켜 힘을 약화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그가 원하는 취적의 상황이겠지. 우리는 지금 그의 뜻에 놀아나고 있다. 광명을 얻은 그는 이 세계를 소멸시킬 의도가 없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들 것이다. 그는 우리의 희생을 원하고 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우리들 여섯의 소멸이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헤르바르트가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모두는 생각했다. 헤르바르트는 힘주어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솔직히 영계에 대한 지배와 우리 존재에 대한 입증보다도 더 내게 중요한 것은 바로 나. 내 현재의 지위와 권위가 확보되지 않고서 더 이상의 무엇을 논의할 필요가 있을까?
그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싸운다. 이런 내 예상을 깨고 지금이라도 키케로가 물러가 준다면……빈델반트와 바르트의 뜻에 동의하겠다.
허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키케로는 결심을 굳혔다. 아직도 그걸 모르겠는가?”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아퀴나스뿐이었다. 모두는 기다렸다. 지금껏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듣고만 있던 그가 파천에게 질문을 던졌다.
“키케로, 예전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나?”
“……?”
“난 네게 물었었지. ‘너는 왜 우리를 위해 희생하느냐? 네 이런 선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너는 내게 말했다.
‘날 위해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희생이라고 생각지 말라. 나 하나를 던져 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다. 단지 너는 내 이런 최후를 기억해주면 된다.’
나는 그 이후로 널 많이, 매우 자주 떠올렸었다. 네가 먼저 시작했으니 거두는 것도 너여야 한다고 처음엔……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나섬은 아주,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지만 점점 더 그 확신은 약화되어 갔다. 내 속에서 새로운 반문들이 나오더군. ‘나라면 그럴 수 있나?’ 대답은 즉각 나왔다. ‘할 수 없다.’
이후로 지금까지 난 네게 빚 진 심정으로 살았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너라는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걸 지켜보기가 참기 힘들었다. 그런 과정들을 지켜보며 난 시간을 돌려놓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같은 상황을 재현해내고 싶었다. 그런 내게 지금은 절호의 기회다.
내 마음 속의 확신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다. 다시 그 상황을 만들어내고 싶어졌다. 키케로, 아니 네가 부정하고 있으니 다시 부르지. 파천!”
“말하라.”
“너는 내게 요구할게 없나? 네가 내게 지우고 간 빚은 내 존재만큼이나 큰 것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네 그런 그 결단은 내 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으로 심겨졌다. 그것은 기묘한 모양으로 자라났다. 나는 그것이 마음껏 자라나도록 내버려두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더군. 당시 우리들 중 내 힘은 그리 두드러진 것이 아니었다. 너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헌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능력은 점차 커져만 갔다. 지금에 와서는……너도 느꼈는지 모르지만……이들 모두는 날 두려워하고 있다.
내 하나가 자신들 모두를 좌우함이 마땅치 않다고 여기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 야. 이 현상은 네가 심어 준 그 씨앗, 최초의 질문에 대해 더 집중하게 했다. 그 이후에 내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많은 질문들은 한정되어 있던 내 시각을 점차 확장시켜 갔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말 야.”
“무엇을 알게 되었나?”
“내 생각, 내 의지가 나를 결정한다. 내가 날 어떤 존재로 규정하느냐가 날 좌우하게 된다. 내 의지가 널 기억하면서 널 닮아 갔듯이 내 스스로 날 악마라고 생각하면 나는 즉각 그런 존재가 된다. 신을 부정하면 신은 내게서 사라진다.
나는 지금도 그래서 혼란스럽다. 신에게 귀속되고 싶어 하는 의지는 내 것이 아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신을 극복하자고 외쳤던 네가 심어준 씨앗에서 발원되었다. 나는 이런 내 지금의 상태를 인정할 수 없다. 그래, 얼마든지 이 세계를 내 의지 하에 둘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왜인지 아나?
“그런 변화를 인정할 수 없었겠지.”
“그래, 바로 보았다. 그런 내게 너의 재등장은 새로운 기대를 갖게 했다. 확인하자, 확인해 보자. 널 통해서 내 이 혼란을 잠재우자.”
아퀴나스에게서 나온 말들은 다른 이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적어도 그들이 짐작했던 아퀴나스는 저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이 순간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는 듯했다.
“자, 이제 내 뜻을 밝히겠다.”
모두는 숨죽이고 아퀴나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너와 싸우겠다. 나와 내 의지와 내게 속한 모든 것을 걸고 이 미심쩍은 혼돈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겠다.”
아퀴나스의 선언은 상황에 대한 논의에서 급하게 현실로 부각시켜 갔다. 이제 파천이 무엇을 원하는가만 남았다. 파천은 아퀴나스를 주목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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