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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2권 – 5화 : 뇌옥으로


뇌옥으로

흑호는 당황해서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흑호로서는 이성을 잃은 편이 오히려 운이 좋은 결 과를 낳았다. 원래 이성이란 긴급하거나 위급한 상 황에서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다. 본능적 인 판단이 훨씬 급박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으니 까.

그런 점에서 볼 때 흑호가 자신도 모르게 위기의식 을 느끼고 있는힘을 다하여 땅 위로 솟구쳐 올라온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몇 줄기인지 헤아릴 수 없는 요기가 땅 속으로 쏘아져 들어온 것은 흑호가 몸을 뺀 바로 직후의 일이었으니..

그러나 흑호는 지금 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태양 빛 아래로나온 셈이었다. 사실 도력이 충만한 밤이라 할지라도 일곱 마리의 마수와 싸운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터였다. 풍생수 한 마리를사 계의 두 저승사자와 근위무사가 당해내지 못했는데, 하물며 흑호는사계의 존재들도 이기기 힘든 상대가 아니었던가.

느닷없이 땅 속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오자 근처에 있 는 사람들이기겁을 하며 펄쩍 뛰었다. 그도 그럴 것 이 마수는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그들의 병장 기로는 감히 마수를 다치게 할 수도 없지만, 흑호는 생계의 존재인지라 그의 몸은 인간들이 얼마든지 공 격을 가할 수있었다.

다행히 전쟁이 한차례 끝난 뒤의 대치 상태라 그 주 위에 무장한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다만 중상자와 시체를 끌어가는 왜군들 몇몇만이 있다가 난데없이 땅 속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오자 꽥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워댔다.

아직 전세가 결판난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왜군이 승리를 거둔 뒤끝이라 소수의 왜군들이 부상자를 후 송하느라 분주한 터였다. 그리고몇몇은 숨이 붙어 있는 조선 병사들의 목을 베며 돌아다니고 있는데난 데없는 호랑이라니! 흑호는 땅 속에서 몸을 빼쳐 올 리는 즉시 힘껏 달음질을 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싸 울 수도, 싸울 생각도 없었다. 그러면서 힐끗 하늘 을바라보았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마계에서 온 것이 분명한 마수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풍생수는 보이지 않았으나 뱀처럼 긴 몸통을 지닌 거대한 녀석이있었고, 마치 인간의 형상처럼 생긴 것이 두 마리, 길짐승의 형상을지닌 것이 두 마리가 있었는데 한 놈은 흑호와 아주 생김새가 흡사해보였 다.

흑호는 다른 놈들을 유심히 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 나 인간처럼 생긴 녀석 중의 작은 녀석이 유독 눈길 을 끌었다. 그 녀석은 키가 아주작고 인간과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유달리 두 팔이 몹시 길고 흉하게 생겨 힘이 세어 보였다. 그 녀석에게서 흑호의 일족들이 죽어간 시체에서 느껴지던 것과 똑같은 요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이 원수 놈!’

물론 전심법으로 서로 통하지 않은 상태라 마수들과 흑호는 서로가 누군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수 들은 흑호가 호랑이의 몸으로땅 속에 숨어 있던 것 이며, 몸에서 도력의 기운을 분출하는 것을 보고위 험하다고 생각했던지 흑호에게 일제히 공격을 가하 려 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미리 대비하고 있지 못했던지라 공격이 정확하지 않았다. 더구나 흑호가 비록 도력 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하나 팔백년의 도력이 그리 허망한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감히 맞서 싸울 엄두 는 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몸을 피해 도망치기에 바빴다.

놈들이 느낌 없는 요기와 냉기, 번개 같은 기운들을 마구 내뿜었다.

흑호는 재빠르게 피해가며 갈지(之)자 형으로 힘껏 내달렸다.

순간 공연히 전장을 떠돌던 왜병들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빗나간 요기들을 몸에 맞고는 픽픽 쓰러 졌다.

“흐윽……!”

삽시간에 요기를 몸에 맞은 왜병들은 사지가 절단되 기로 하고 혹은 시커멓게 온몸이 타 들어가기도 하 며 혹은 녹색의 독이 퍼져 퍼렇게 되어 칠팔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흑호는 놈들의 수법이 이렇게까지 잔혹할 줄은 미처 알지 못해 내심 놀랐다.

‘내가 마수나 저승사자가 아니고 살아 있는 존재이 니만큼 살아 있는 것을 해치는 방법을 나에게 쓰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 무 악랄한 수법이여.’

그러나 어제 겨루었던 풍생수만 해도 녹록치 않은 상대인 판에 일곱이나 되는 마수들이 공격을 해오니 흑호는 이리저리 도망치는 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한편, 출전하지 못하고 진중에서 홀로 발을 구르고 있던 강효식이 귀환하는 모습을 보자 몹시 반가웠다. 일단 조선군의피해가 만만치는 않았으나 그 기둥이 되는 신립이 다치지 않고 돌아왔으니 그 만한 기쁨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미 탄금대 주변은 왜병의 진이 빽빽이 들 어차서 왜병을패주시키든지 조선군이 전멸하든지, 선택은 둘 중의 하나밖에는 남지않았다.

신립도 조선군의 기병전술이 조총의 위력에 밀려 제 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자못 풀이 죽어 있었다. 사실 강효식은 신립이 돌아오는 대로 전날의 일이 자신이 그 여인의 귀신에게 홀려 헛소리를 한것이 며, 실제로는 탄금대에 진치는 것이 위험하니 어서 빠져나가자고주장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왜병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이 고 보니 구태여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강효식은 지금 이대로 싸우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여겨서 그러한 말을 입밖에 내지못 했다. 아니, 신립의 초췌한 얼굴을 보니 그러한 말 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는지도 모른다.

“장군.”

“강 부장인가? 자네, 좀 나아졌는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신립을 보며 강 효식은 왈칵눈물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 곳은 진중이었다. 군관으로서눈물을 보이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진실을 말하면 그나마 꺾인 사기가 더 사그라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라 강효식은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겠다고 입술을 다시 한 번 깨물 었다.

“장군, 적세가 비록 승하여 돌파하지 못하셨더라도 실망은 마옵소서. 우리는 아직 진 것이 아니옵니 다.”

신립은 갑자기 여태까지의 침울한 기색을 거두고 크 게 소리내어호방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는 아직 진 것이 아니지. 그러니 이길 수도 있다는 말아닌가? 좋으이. 우리 다시 한번 회 의를 열어 방법을 찾아보세. 왜병들을 몰아내야 지!”

강효식은 다시 눈물이 솟았다. 이제 만사가 틀려 버 렸다. 그리고 그책임의 가장 핵심 부분이 자신에게 있건만 말조차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럽기 이 를 데 없었다. 김여물 및 이일 등의 여러 장수들과 논의를 하면서 강효식은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조심 스레 닦아내었다.

회의가 한창일 무렵, 파수를 보고 있던 병졸 하나가 황급히 달려와왜병 진지에 괴변이 생겼다고 고했다. 신립을 비롯한 장수들은 그 말에 놀라며 우르르 망 루로 올라가 저만치 펼쳐져 있는 왜병 진지를 내려 다보았다.

“장군! 저것 좀 보십시오!”

맨 먼저 망루 위로 올라간 김여물이 신립을 부르자 신립은 급히 김여물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김여물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난데없이 한 마리의 커다란 호랑이가 시체들과 망가진 병장기들 사이를 누비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어디서 나타난 호랑이란 말인가?”

“신기한 일입니다. 전쟁터에 난데없는 호랑이라 니…. 아, 장군. 좀더 자세히 보십시오. 주변의 왜병들 말입니다.” 

김여물의 말에 신립은 좀더 자세히 호랑이의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놀랍게도 호랑이의 주변에서 놀라 도망가던 왜병들이, 호랑이의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마치 칼에 맞은 듯 몸이 절단되고 비명을 지르면서 타들어가는 몸을 뒤틀면서 마구 죽어가고 있었다. 마수들이나 그들이 쏘아내는 요기를 눈으로 보지 못 하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니 그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천지에 어찌 저런 일이! 호랑이의 몸에 닿지 도 않았는데 왜병들이 죽다니!”

신립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자 김여물이 급히 말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늘의 깨우침이 아니겠습니까?”

“깨우침?”

“저런 일은 원래대로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이 니 이적(異蹟)입니다. 산신의 수하인 호랑이가 하늘 의 부름을 받아 우리를 돕고 있는 것이 분명하옵니 다! 왜군들이 마구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저것 은 영물(物)임이 분명합니다.”

김여물이 말한 대로 흑호가 영물임에는 틀림없지만, 흑호는 지금왜병을 해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도 망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김여물의 눈에는 쏘 아져 나오는 마기와 요기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갈지자로 뛰어다니는 흑호의 모양새가 왜병들을 하 나라도 더 해치우기 위하여 뛰고 있는 것으로만 보 였다. 김여물은 위인됨이 총명하고 지략에 밝았으 나 그 자신 어느정도 ‘하늘의 뜻’을 바라는 성품이 있었다. 이는 그의 성장시에 겪은 기이한 일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김여물이 젊어 소과(小科)에 급제하 여진사(進士)벼슬을 지낼 때의 일이었다. 김여물은 삼대독자로 태어났는데 그의 조부와 부친은 모두 정 체모를 급병으로 요절하였고 그마저도 중병에 들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백약을 써도 무효하자 김여 물의 삼대고부(姑婦)들은 당시 이름이 높던 장님 점 술가 홍계관(洪繼寬)을 찾아갔는데 그 결과 이는 그 의 집안에 원한이 있는 원귀의 소행으로 막을 길이 없다 하였다. 이에 세 할머니와 어머니, 김여물의 부인까지 통곡하고 방법을 묻자 홍계관은 이를 발설 하면 비록 자신에게도로 화가 돌아오기는 하나 그 광경이 너무도 가엾어서 살아날 방법을 가르쳐 주었 다. 이는 명문가 출신으로 장래 나라의 기둥이 될 복인(人)을 모셔다가 그 인물에게 생사를 위임하 여 잠시도 곁을 떠나지않게 하기를 삼일만 하면 원 귀가 그 위인을 해칠 수 없어 결국은 물러가리라는 내용이었다. 홍계관은 그 복인의 이름까지 일러주었 는데 그는 바로 김여물이 살던 사직동의 이웃 필운 대(弼雲臺)에 사는 전 우참찬 이몽량의 아들 이항복(李恒福)이었다. 이항복은 신립과 함께 권율의 손주사위이기도 하다. 

이항복은 악귀를 설복하여 김여물의 병이 쾌차하게만들 었으니 김여물이 이항복과 동서간인 신립의 뒤를 따 르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과거가 있는 김여물인지라 지금 흑호의 활약(?)을 보고 또 다른 하나의 하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옆 모퉁이에 서 있는 강효식은 그 호랑이 의 기색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호랑이 가 날뛰고 왜병들이 죽어 넘어지는 주변에는 잘 보 이지는 않았지만, 마기와 요기가 느껴지고 있음을감 지했다.

강효식은 무당의 피를 물려받아 약간의 영능력이 있 기 때문에 지금 흑호를 공격하고 있는 마수들의 섬 뜩한 기운이 약간씩 느껴지기는했으나 그 일을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탄금대로 진을 옮긴 것이 그 요사한 기운 때문이니 오히려저 호랑이가 요기들과 맞서 싸워 그 것을 없애준다면 혹시 승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언뜻 생각한 일이지만, 전날 자신은 요기에 침탈을 당해 정신을 잃었었는데 아무 일 없이 말짱하게 깨 어났고 지금 신립의 주변에서도그러한 요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저 호랑이가 신통력 같은 것을 지니 고 있어서 그요기를 거둔 것이 아닐까?’

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도 강효식 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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