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17화 : 신립의 최후
신립의 최후
조선군은 전멸 직전의 상황이었다. 목숨을 건 전군의 포위망 돌파작전에도 불구하고 왜병들의 포위망 은 더욱더 조여들었다.
고니시의 신중한 지휘로, 두 번에 걸쳐 감행된 조선 군의 최후의 필사적인 돌격을 조총의 사격으로 막아 냈다. 그리고 조선군이 후퇴하도록 내버려둔 뒤, 조 선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절망적인 분위기에 휩싸이 기를 기다렸다가 서서히 전군을 밀고 들어가는 작전 을 구사했다.
두 번에 걸친 돌격으로 조선군의 기마 부대는 말과 사람이 모두 지친데다가 거의 전원이 크고 작은 상 처를 입고 있어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다. 신립 마저도 어깨의 갑주 틈으로 조총알이 파고들어 부상 을 입은 상태였다.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이 패전 의 기운을 조선군은 감당할 길이 없었다.
수십 년에 걸친 장기간의 내란으로 실전 경험이 많았던 왜장들과왜병들의 전투력은 조선군을 훨씬 능가했다. 특히 조총의 위력을 간과한 조선군의 패배 가 거의 굳어지는 위기의 상황이었다.
부상당한 신립은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주위에는 이일과 김여물, 강효식 등의 휘하장 수들이 둘러싸고있었다.
‘이제 다 틀렸구나. 전멸하고야 마는가? 아아……………’
신립은 고통 속에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최후의 보루인이곳이 함락당하면 한양까지의 길목을 지키는 조선군 부대는 없었다.
‘결국 한양은 짓밟히고 말 것이구나.. 아아 내 잘못 이다.’
신립은 절로 눈물이 솟구쳤다. 새재를 버리고 탄금 대에 진을 쳤던것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다.
강효식 또한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것을 알았지 만, 지난 일을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 입 술을 깨문 채 눈물을 흘렸다.
지금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목숨을 아까워할 필요는 없다고 신립은 생각했다. 오로지 걱정스러운 것은 조선의 안위였다.
‘이제 한양이 짓밟히게 되었으니 조선은 끝이런 가…………….’
당시의 일반적인 전사를 볼 때, 도성이 짓밟히게 되 면 전쟁은 그것으로 끝이났다. 과거 백제나 고구려 가 망할 때에도 그랬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 될 때에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그리 되어서 는 안 된다고 생각을 추스렸다.
‘도성이 짓밟히더라도……… 상감께서 옥체를 보존하 신다면 희망이있다. 상감께서 급히 피난을 가신다 면・・・・・・ 그리 하려면………….’
신립은 잠시 눈을 감았다. 왕을 일단 한양에서 피신 케 하여 후일의기회를 노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 까? 지금 쳐들어온 적들은 말도 통하지 않으며 직 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도 않은 왜병들이었다. 도읍 이점령되더라도 조선 백성들은 그들에게 복속하지 않고 저항하려 함이분명했다.
신립은 지금의 상감을 암군(君)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감은 조선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비 록 도읍이 점령되어도 상감이 무사하기만 하다면 아 직 전쟁에 완전히 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다른 자가 나설 것이다. 틀림없이……………. 내가 졌다고 해서 조선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을 것 이야. 반드시… 반드시 누군가가…………….’
생각에 잠겨 있던 신립은 다시 한줄기 눈물을 주르 륵 흘렸다. 최후의 순간까지 싸워야 했으며 마지막 한 사람의 부하까지도 죽을 각오를 하여야 했다. 그 리하면 시간을 벌 수 있다.
만약 여기서 별로 타격을 입지 않은 왜군 부대가 그 대로 달려 북상한다면 상감의 어가를 포획할 수도 있어 그야말로 조선은 끝장나는것이다. 그러나 최후 의 한 사람까지 결사항전을 하여 죽는다는 것은너무 도 참혹한 일이었다. 신립은 빙 둘러싸고 있는 장수 들을 향해 비통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장들….. 나를 용서하여 주오.”
그러자 장수들이 슬픈 얼굴로 신립을 쳐다보았다.
“명을 내린다. 단기(單騎)로 포위망을뚫고 한양으로 달려가
어서 상감께 피란하시도록 전하라.”
“피란이라니요? 그러면 한양을 버린다는………….”
“속히 서둘라. 이일 자네는 이미 죽을 죄를 한 번 지었다. 그 목숨, 누구보다도 먼저 이 급보를 알리는 데 쓰라. 자네의 용맹을 알기에 특별히 명하는 것이 니라.”
“소인도 싸우게 해주시옵소서! 잘 싸우지 못한 죄 를 죽음으로 갚고싶사옵니다!”
신립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일을 비롯 한 뭇 장수들은모두 짐작했다. 옥쇄(玉碎)… 옥 처럼 아름답게 깨어져 부서진다는, 즉 명예와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일 이 황소처럼 커다랗게 울부짖으며 자신도 싸우다 죽 고 싶다고 말했으나 신립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군명이다.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인 줄 알고 있 다. 그러기에 자네에게 명하는 것이다. 꼭…… 꼭 전해주기 바라네. 도순변사 신립, 어명을 받들고 나갔으나 적을 이기지 못해 죽음으로 속죄한다고……”
이일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푹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머지 제장들은…….”
신립은 눈을 들어 장수들을 쳐다보며 잠시 말을 잇 지 못하다가 이윽고 입술을 떼었다.
“나에게 목숨을 맡겨라. 우리가 일각이라도 더 버틸 수록 상감께서는 멀리 피란하실 수 있다. 한 명의 왜병이라도 더 죽일수록 한양은그만큼 덜 피해를 받 는다. 최후의 일인까지…….”
그 말에 장수들은 슬픔과 알 수 없는 감회에 마음속 이 끓어오르는것 같았다. 그 다음 신립의 한마디에 모든 장수들은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 그러나 헛공을 위해서나 이름을 위해서 가 아니다. 조선백성들을 위해… 조선을 위해서 …….”
“힘이 다하여 공을 세우지 못하니 이 한 목숨 무엇이 아까우리까.”
“최후까지 한 놈의 왜병이라도 더 베이고 죽으리다.”
장수들은 한결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답했 다. 눈물이 글썽한 눈에 호기를 지으며 웃으면서 답 하는 자들도 있었다. 신립이 감격하여 장수들의 손 을 잡자 김여물과 강효식 등의 장수들도 모두 손을 맞잡았다.
곧이어, 부상을 입었거나 지쳤거나를 가리지 않고 장수들은 모두병기를 잡아들며 호기롭게 장막 밖으 로 나섰다. 그 중에는 강효식도끼여 있었다. 잠시 강효식의 뇌리에 부인 엄씨의 얼굴과 은동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다시는 못 볼 것 같으오, 부인. 부디…… 부 디 살아 있어 주기를…………….’
강효식은 검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다시 한 번 속으로 중얼거렸다.
‘은동아, 은동아.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너 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조선을 다시 세우는 데 힘을 다하거라. 이 못난 아비는이제 간다.’
탄금대 벌의 저쪽에서는 왜병들이 서두르지도 않고 포위망을 좁혀들어왔다. 서서히 조선군의 숨통을 조 여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