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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2권 – 18화


‘어허……, 이제 정말 끝장이로구먼.’

흑호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탄식 섞인 소리를 중얼거렸다.

탄금대 밑으로 돌아 강 속으로 헤엄쳐 조선군의 배 후로 돌아서 물 밖으로 나와서는 다시 벼랑을 기어 올라가 중턱쯤에서 토둔술로 조선군의 진지 내부에 들어갔다.

다행히 아직 마수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살 짝 고개를 내밀고 전장의 정황을 살피니, 조선군은 바로 전멸 직전에 있었다. 조선군은 두려워하는 기 색도 없이 용감하게 목책으로 두른 진을 지키며 필 사적으로 싸우고 있었지만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 같아 보였다.

왜병들은 조총을 계속 빗발치듯 쏘아대고 있었지만 조선군은 화약이 부족해 이미 첫 번째 돌격 때에 보 유하고 있던 화약이 바닥이 난듯했다. 때문에 총포 도 쏘지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살조차다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조선군은 죽기를 무릅쓰고 육 박전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참상 에 흑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들 죽기를 무릅쓰는 것일까? 왜들 하나밖에 없는 목숨들을 버리려고 하는 것이여? 차라리 저럴 기운 으로 도망치면 절반은 살아날 수있을 터인데………….’

도망치는 것이 힘들다면 항복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군은왜병들에게 죽기 살기로 항전을 했 다. 한 조선 병사는 비오듯이 퍼붓는 조총에 온몸이 벌집이 되었지만 손에 든 창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몇 걸음을 더 가다가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그는 안간힘을 다해 창을 왜병들 쪽으로 집어던진 후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

또 다른 병사는 한쪽 팔이 잘려나간 몸이었지만 칼 을 휘두르면서왜병 진지로 달려들다가 왜병들의 장창에 찔려 어육이 되고 말았다.

무장도 갖추지 않은 기마병 하나는 빗발치는 조총탄을 뚫고 무작정말을 몰았다. 달려드는 왜병을 깔아 뭉개고 자신도 말과 함께 동시에숨을 거두었다.

인간 세상의 전쟁 이 그리 많이 알지 못하는흑호는 이토록 처절한 전멸전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조선군이 비록 이 싸움에서는 졌지만 조선은 망하 지 않을 것이여.

・백성들이 이리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는데 어찌 망하겠누.’

흑호는 처절한 싸움에 마음이 숙연해져서 속으로 되 뇌었다.

‘도대체 조선이 어떤 나라이기에 병졸 하나까지도 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것일 까?’

숙연해지다 못해 아연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차츰 절망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처연스러운 저녁 노을이 점점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조선군의 수효는 처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부상도 돌보지 않고, 제대 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피곤한 상황에서도조선군 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왜병들의 피로도 그 만큼 극심할 터였다.

조선군이 열세에 몰려 섬멸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지 만 조선군 열명이 쓰러지면 왜병도 한두 명은 죽거 나 상처를 입곤 했다. 붉은 꽃잎처럼 쓰러지는 피아 의 병사들을 보며 흑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래서 조선군은 하루를 버는구먼. 비록 조선군이 몰살당한다 할지라도 왜군들도 당장에는 진군할 수 없을 거여. 조선군이 항복하거나 흩어졌다면 왜병들 은 오늘 해참에 훨씬 더 멀리 진격한 후에 쉬었을 텐데… ….. 더구나 왜병도 승전은 했다지만 적어도 천여 명은 죽거나 다쳤을 테고 저렇듯 총을 쏘아대 니 화약도 바닥이 났겠지. 그러나…. 이건 너무 처 참해, 쯧쯧.’

흑호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새삼 되살아났다. 강효식이라는 은동의 아버지를구해내고, 가능하다면 신립도 목숨 을 살려 정신 나간 여인과 한 번 대면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흑호는 다시 주변을 살펴보다가 저만치에서 몇몇 병 사들이 마지막보루로 에워싸고 지키는 진채를 발견 하였다.

‘옳거니, 저기가 신립이 있는 곳인가 보다. 그러면 혹시 강효식도있을라나?’

흑호는 다시 토둔술을 써서 땅 속으로 들어가 그 진 채로 향했다.

귀를 기울이니 패전을 슬퍼하는 장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립의 중상을 애도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이쿠, 신립이 많이 다친 모양이구나.’

흑호는 장막 한모퉁이에서 슬그머니 눈만 밖으로 내 놓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모두가 싸우러 나 갔는지 장막 안에는 몇 안 되는장수들만이 눈에 띄 었다. 흑호는 그들 면면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신립과 김여물, 그리고 강효식과 그 외 몇몇 군 관들이었다.

이일은 이미 신립의 명을 받고 죽기 살기로 포위망 을 뚫고 단기로탈출한 다음이었고, 배윤기는 이미 왜병들과 싸우다 전사한 뒤였다.

문득 그 중 한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퍼뜩 흑호 의 눈이 뜨이는 것같았다. 비록 나이를 먹기는 했지 만 눈매나 콧날이 우뚝한 모습이 은동과 아주 흡사 한 군관이었다. 아까 언뜻 보았던 그 군관, 강효식 이분명했다.

그는 부상은 입은 것 같지 않았으나 온몸에 피칠갑 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신립의 갑옷과 전포가 피로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그가 부상당한 신립을 이리로 데리 고 온 듯싶었다. 흑호는 그 군관에게 정신이 팔려 신립이 힘겹게 중얼거리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제 왜병을 더 베일 수도 없고, 상처가 심하니 이 제 끝인가 보네………….허나 싸우다 죽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았다면 왜병에게 욕을 보기 싫으니….. 나를 부축해 주게.”

“장군!”

“으으, 절벽으로・・・・・・ 나를…….”

어차피 살아날 가망이 없었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 이상 왜병과 싸울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자결하겠 다는 힘겨운 결의였다. 이에 김여물과 같이 있던 군 관들은 모두 신립과 최후를 같이 하겠다고 굳게 결 심했다. 김여물과 강효식 등은 신립을 부축하여 장 막 뒤쪽으로 천천히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흑호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지 못했다. 은동의 아비인 강효식의 소재를 확인 한 후 혹시라도 마수가 나타나지 않을까 잠깐 딴 데 신 경을 쓰는 통에 신립이 힘겹게 중얼거리는 말을듣지 못했던 것이다.

흑호는 신립과 강효식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얼른 토둔법으로 땅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뒤를 따 라갔다.

절벽 쪽으로 향하여 가는 그들 뒤로 핏빛으로 하늘 이 불게 타올랐다. 드디어 절벽에 우뚝 선 그들은 옷깃을 가다듬고서 한양을 향하여 비장하게 절을 올 렸다.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허공으 로 흩어졌다. 그리고 절벽 아래의 강물로 차례차례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이쿠야! 자살을 하는 거로구먼!’

흑호는 놀라서 급히 절벽에서 튀어나와 아래로 떨어 지는 사람들을나꿔채려 했으나 한 발 늦고야 말았 다. 이미 그들은 물에 빠져 버린뒤였다. 흑호는 할 수 없이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직 해가 지지 않아 도력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흑호는 토둔술과 목둔술은 제법 능했지만,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수둔법에는 그리 능하 지 못했다. 또한 유정 스님이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고 하나 완치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간신히 물 속으로 자맥질을 하자 강효식의 몸이 보 였다. 조선의 장수들은 이미 죽기를 각오한데다가 온종일 힘겹게 전투를 치렀고, 갑주를 입은 상태라 마치 돌덩어리들처럼 강물 속으로 스르르 가라앉고 있었다.

흑호는 물 속에서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터라 여럿을 건사하지못하고 우선 은동과 닮은 강효식의 몸 을 나꿔채어 갑옷 자락을 입에물었다. 그러나 그 사 이 신립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의 몸은 이미 강바닥 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흑호는 물 위로 떠오르려고 애를 썼지만, 물 속이라 힘을 마음대로쓸 수 없었고 갑옷을 입은 강효식의 몸이 생각외로 무겁기까지해서 떠오르기조차 힘에 겨웠다

“…… 이러다간 나까지 물귀신이 되었다. 아이구구…….’

흑호는 마침내 최후의 기력을 모아 물을 박차면서 머리를 솟구쳐올렸다. 그 다음 앞발에 있는 힘을 다 모아서 물을 박차니 몸이 위로솟구쳐 올랐다. 물 속 보다는 허공에서 몸을 놀리기가 차라리 편했다. 흑호는 공중에서 얼른 몸을 돌리면서 마지막으로 뒷 발과 꼬리까지 동원하여 다시 물을 박차자 물기둥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흑호의 몸이벼랑에까지 닿았다.

강효식의 몸을 물고 있던 참이라 토둔술은 쓸 수가 없어서 흑호는다시 벼랑을 박차고 강 건너편으로 몸 을 날렸다. 강의 절반 가량 가자기운이 다하여 강물 로 떨어지려는 순간 다시 물을 서너 번 박차 올랐 다. 드디어 헐떡거리며 건너편 뭍으로 강효식의 몸 을 물고 올라갔다.

‘에휴, 힘들구먼. 그런데 신립도 구해내야 할까?’ 

흑호는 강효식을 내려놓고 다시 물로 뛰어들까 말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저쪽에서 요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조선군이 어느 정도 죽어나가자 마수들이 영 혼을 회수하려고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 마수에게 걸리면 영락없이 독 안에 든 쥐의 꼴로 헤어나오지 못할 거여.’

흑호는 하는 수 없이 황급히 도력을 거두고 강효식 의 몸을 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물고 달리 는데도 강효식은 물로 뛰어들면서기절했는지 송장처 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은동이 옆으로 데리고 가야지. 은동이가 깨어나면 아주 기뻐하겠구먼. 흐흐…….’

조선군이 전멸당한 것은 애석한 일이었지만, 은동에 게 좋은 일을했다는 생각에 흑호는 달리면서도 가끔 씩 히죽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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