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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2권 – 20화


흑호가 힘들게 은동의 아버지 강효식을 은동이 있는 동굴 옆에다물어다 놓을 때까지도 강효식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흑호는 기분이 좋아서 강효 식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으나 조금시간이 지나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강효식이깨어나면 일이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강효식은 살아 있는 사람이고 도력 같은 것은 없을 터이니 전심법으로 대화를 할 수도 없었다. 또 자신 은 아직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으니 둔갑도 할 수 없는 호랑이의 몸 그대로가 아닌가.

강효식이 호랑이가 자신과 은동을 물어왔다고 생각 하고 죽기를 무릅쓰고 덤벼들면 어찌하겠는가? 그 렇다고 강효식의 영혼을 빼내어두는 것도 마음에 걸 렸다. 이전에 은동의 영혼을 빼내었다가 이 고생에 말려들지 않았던가.

‘제기, 태을사자가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 그러면 뭔가 의사 소통이 되겠지.’

흑호는 강효식이 혹시라도 정신을 차리면 그 즉시 자신을 보고 놀랄 테니 일단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 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강효식이 행여 밖으로 은 동의 몸을 안고 나가면 그것도 큰일이었다. 흑호는 바닥에 발톱으로 안심하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간단 한 글귀를 서툰 필적으로 남겼다.

그러고 나서 동굴 밖으로 나온 뒤 커다란 바위를 밀 어다가 동굴의입구를 막고 그 바위에 떡 하니 기대 고 드러누웠다. 바위는 약간 틈을두어 공기가 드나 들고 비록 날이 저물긴 해도 빛이 들어오게끔 해두 었다. 강효식이 깨어나 글자를 보아야 안심할 것이 라 생각하고 세세하게 신경을 썼다.

마냥 기다리고 있자니 어제부터 눈 한 번 붙이지 못 하고 쉬지도 못했을 뿐더러, 계속 도력을 소모하며 꼬박 돌아다닌 탓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배 도 고프고 솔솔 졸음이 왔다. 비록 도를 닦은 호랑 이라고는 하나 몸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배 고프고 목마른 것은 참을수 없는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흑 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꾸벅꾸벅 졸다가 스르르 잠 에 빠지고 말았다.

강효식이 동굴 안에서 정신을 차리고 문득 눈을 뜬 것은 흑호가 막잠에 빠져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눈 을 뜨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내 분명 신 장군과 함께 탄금대에 몸을 던졌건만 어두운 동굴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내가 죽은 겐가, 아니면 살아 있는 겐가.’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곁에 누군가가 누워 있음을 알았다. 누워 있는 사람 의 몸이 조그마한 아이라는 것밖에는 식별할 수 없 었다.

은동이 이 전쟁터 부근까지 찾아와 혼이 빠져나간 채 동굴 안에 누워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 이 당연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누가 나를 이리로 옮 겨놓았을까?’

강효식은 손을 더듬다가 옆에 무언가로 파인 자국이 손끝에 전해왔다. 눈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더듬 으며 그 글씨를 간신히 식별해보았다.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서툴기 짝이 없는 필체로 안심하고 여기 서 기다리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었나 보구나. 그러나 정녕 나 혼자만 살아남았단 말인가?’

강효식은 의아한 마음에 동굴 안을 한 번 돌아보았 으나 자신과 그자그마한 아이의 형체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동굴 안이 아직 어두운 탓에 아 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불을 켜고 싶었으나 물에 빠 졌었던 지라 불통과 화섭자가 모두 젖어 불을 켤 수 가 없었다.

일단 동굴 입구를 찾았으나 동굴 입구도 집채만한 바위가 막고 있어서 제아무리 애를 써서 밀어보아도 꼼짝하지 않았다.

‘바위로 출구를 이렇게 막아놓은 것은 왜병들이 나 를 보지 못하도록 해준 것인가, 아니면 내가 도망치 지 못하도록 가두어둔 것일까?’

강효식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갑자기 서글퍼졌다.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감금된 것 같았다. 약간의 영 력이 있다고는 하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강효식은 사람이 아닌 그 무엇인가가 물에 빠진 자신을건져주 었다고는 애당초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조선군은 전멸되었으니 조선군 중의 누가 자 신을 건졌을리는 만무했고, 혹여 지나가던 어부나 백성이 자신을 건졌다기에는어딘지 석연치 못한 구 석이 있었다. 백성이 자신을 건져내었다면 일단 집에 데리고가는 편이 맞았으며 이렇게 동굴에 넣어 감금해두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가 힘을 썼다면 응당 찬 물이라도 먹이고 간호를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었 다. 그런데 물에 젖은 옷을 그대로 놔둔 채 차가운 동굴 바닥에 눕혀놓다니. 더구나 동굴을 막고 있는 바위는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이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아니란 결론인데…..

‘왜병들이 물에 빠져 의식을 잃은 나를 건져올린 것 은 아닐까? 아이쿠, 그러면 이제 욕을 보겠구나.’ 

강효식은 섬칫한 느낌에 몸을 살펴보았다. 몸에 지 닌 패검과 투구등은 기실 모두 물에 휩쓸려간 것이 었지만, 강효식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왜병들의 포로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으로 무장 해제 당한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이제 놈들에게 심한 고문을 받겠구나. 그리고 포로 가 되어 왜국으로 팔려갈지도 모른다. 아, 이 일을 어찌하랴. 어떻게 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 여보, 은동아…… 이제 영영 보지 못하나?’ 

가슴이 저미는 고통이 한없이 파고들었다. 불현듯 은동이와 아내엄씨 생각이 났다. 특히 어린 은동이 가 말할 수 없이 보고 싶었다. 군관 생활 때문에 변 방을 돌아다니느라 집에는 거의 들르지 못하고, 은 동과 변변히 놀아주지 못한 것이 몹시도 후회스럽고 아쉽기만 했다.

외동아들의 원래 이름은 은호였지만 어린아이들을 부르는 아명이은동이라 강효식도 그리 부르고 있었 다. 금동이야 은동이야 하고 이미 돌아가신 할머님 이 은동이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셔서 붙였던 이름이 었다. 은동이의 해맑게 웃는 얼굴이 자꾸 떠오르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괴롭기가 한량없었다. 

‘은동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구나. …………그러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터인데………….’

핏줄에 대한 회한이 밀려오자 은동과 아내 엄씨의 뒤를 이어 이미죽었을 신립과 김여물, 배윤기 등등 의 상사들과 전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으려고 마음 먹었다가 죽지도 못했다고 생각하니, 앞서 같이 간 전우들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아이 하나만 감금되어 있는 것을 보니 물에 뛰어든 함께 다른 장수들 모두 살아남지 못한것 같았다.

그러다가 강효식은 저만치에 누워 있는 아이가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했다. 그리로 몸을 더듬어가까이 가서 아이의 얼굴을 살펴 보았다. 그 순간…….

“은동이가!”

강효식은 너무도 놀라고 어이가 없어서 큰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그곳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아이는 아들은동이임에 분명하였다. 뜻밖의 상봉에 기쁘고 놀라워서 소리조차 제대로 나 오지 않았다.

흑호가 곯아떨어지지만 않았어도 강효식이 내는 소 리를 듣고 눈을떴을 터였다. 그러나 강효식의 목소 리는 바위에 막혀 밖으로까지 나가지 못했다.

“은동아…………, 은동아……”

강효식은 너무도 기뻐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은동의 몸을 부여안고 얼굴을 마구 비벼대었다.

‘아,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일까? 신령이 감응하여 은동을 이리로 보내주신 것일까?’

그러다가 느닷없이 떠오르는 생각에 강효식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혹시나… 왜병들이 이 아이를 이용하려고……’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야만스러운 왜구들이 전쟁에 앞서 아이를 제물로 제를 올린다는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아직은 고려의 무관으 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가 왜구들과 싸울 때에 그 러한 일을 숱하게 목도하였는데 혹은 갓난아기의 배 를 갈라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며 혹은점을 치기도 하였다는 소리가 있다. 태조는 그 일에 분격 하여 신궁(神弓)의 솜씨로 부장 퉁지란과 함께 왜장 아지발도를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지 고 있었다.

‘혹여 그런 몹쓸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 또 다른 가능성이있을지도 모른다.’

은동의 외가는 상주에 있었으며, 상주는 바로 왜병 들이 유린한 곳이었다. (사실 상주를 짓밟은 것은 고 니시 부대가 아니라 가토 부대였다. 도요토미 히데 요시는 왜란을 일으키기 전 이상한 군령을 내렸는 데, 그것은 가토와 고니시가 하루씩 번갈아가며 선 봉군을 맡으라는내용이었다.그러나 강효식은 그런 부분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병들이 우연히 은동을 잡게 되었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 다. 게다가 은동에게서 그 아비가 신립 밑에 있는 군관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 리고 은동은 강효식보다훨씬 얼굴이 수려하기는 했 지만 부자(父子)가 많이 닮았다.

‘혹여 왜병들이 나에게서 군사기밀을 캐내는 데에 은동을 이용하려고 우리 부자를 한꺼번에 잡은 것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강효식은 가슴이 마구 쿵쾅거리며 뛰어올랐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부들 떨었다. 만약 자 신만이 왜병에게잡힌 것이라면 놈들이 어떠한 고문 을 가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려고기밀을 누설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었다. 특히 이일이 상감을 피란 하시도록 한 신립의 마지막 기별을 지니고 갔다는 것은 중요한 기밀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은 목숨이 아깝지 않으니 상관없으나, 이들이은동을 고문하면 서 자신에게 기밀을 누설하라고 다그친다면…. 

‘아…………… 안 돼…..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강효식은 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 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러 고는 은동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은동은 깨어나 지 않았다. 혼이 빠져나간 상태여서 눈을 뜨지 못한 것이지만, 어둠 속이라 정황을 알지 못하는 강효식 은 은동이 왜병들의 심한 고문으로 정신을 잃은 것 이라고 생각했다.

‘짐승 같은 놈들…. 아이를… 어린아이를 이렇 게…………….’

강효식은 자신들 부자를 잡은 것은 틀림없이 왜병들 이라고 마음속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동굴 속에 가 두어진 것, 은동이 정신을 차리지못하고 혼절해 있 는 것 등등이 강효식에게는 명백한 증거처럼 보였 다. 강효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다가 마침 내 입술을 깨물었다.

‘내 이렇게 된 바에 더 살아서 무엇하랴. 욕을 당하 느니 차라리 자진하여 몸을 지키리라.’

비장한 각오로 자신의 품안을 더듬었다. 그러자 늘 지니고 다니던짧은 단검 한 자루가 용케 물살에 빠 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손에 잡혔다. 그 단검을 쥐 자 용기가 났으나 슬픈 마음 또한 감당할 수 없으리 만치 밀려들었다. 강효식은 정신을 잃은 은동의 얼 굴을 보며 처절하게 눈물을 흘렸다.

‘은동아… 은동아………… 우리 부자가 살아서 욕을 당하느니 함께죽자꾸나. …은동아. 이 아비를 용 서해라. 용서해…………….’

그리고 떨리는 강효식의 단검이 은동의 가슴을 향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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