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14화 : 고귀하신 분의 부하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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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38권 14화 : 고귀하신 분의 부하 – 1



고귀하신 분의 부하 – 1

라이의 등장에 깜짝 놀란 건 월터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샌드 웜을 때려잡았더니, 그 잔해 속에서 웬 타이탄 하나가 허우적거리며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놀라움도 잠시, 그 타이탄이 갑자기 꽁지가 빠지게 도망친 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 살려줬으니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예의가 아니겠는가.

타이탄이 갑자기 도망치는 걸 본 월터와 다이아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타이탄이 도망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자신들이 파악하지 못한 위험한 뭔가가 있었나 하면서. 하지만 그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순간 뒤쪽에 정신이 팔렸다가 앞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니 타이탄과의 거리는 더욱 벌어져 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서로 대화를 시도해 볼 엄두도 내기 힘든 먼 거리였다.

월터와 다이아나는 일단 자신의 타이탄부터 돌려보냈다. 샌드 웜과의 전투는 끝났고, 링카 성과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타이탄을 꺼내놓고 있는 건 그리 현명한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방금 저 타이탄은 뭐지? 알카사스의 타이탄 같지는 않았는데………….”

다이아나의 물음에 월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나도 처음 보는 형태였어. 문장을 제대로 그려놓지 않은 걸 보면, 우리와 비슷한 임무 중인 녀석이겠지.”

어딘가 다른 나라의 첩자라는 얘기다.

“아, 그래서 도망친 건가?”

“그걸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네 타이탄이라면 몰라도, 내 타이탄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다 알아볼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월터의 말마따나 코린트의 적기사는 특수공작용으로 제작된 것 치고는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걸 딴 걸로 바꿀 수는 없었다.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났으니까. 그런 만큼 알카사스의 기사단인 줄 알고 도망쳤다는 추측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대화를 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아.”

월터 일행은 방금 전에 해치운 샌드 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에 없앤 것보다 훨씬 더 큰 거 같지 않아?”

“내 생각도 그래. 이런 엄청난 게 전혀 쓸모가 없다니…………….”

다이아나는 샌드웜의 뼈대를 만져봤다.

샌드웜이 살아있을 때에 비해 색깔만 칙칙하게 변한 게 아니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꾹 눌러보니 속으로 푹푹 파고 들어갈 정도로 물렁했다. “정말 아까워. 이 뼈대를 쓸 수만 있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본국으로 가져갔을 텐데………….”

이때, 월터가 손짓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걸 봐! 타이탄이야.”

웜의 뼈대에 깔려있는 타이탄 하나.

웜의 뼛조각들은 그 덩치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굳이 타이탄을 꺼낼 필요도 없이 그냥 옮길 수 있을 정도다. 힘을 조금만 줘도 바스러져 버린다.

“방금 전에 봤던 그 타이탄과 동형의 기체로군.”

타이탄은 이미 생명을 다한 상태였다.

“귀국하는 길에 좋은 선물을 챙기게 됐네. 월터의 상관들이 좋아하겠는걸?”

다이아나의 말에 월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나 혼자 독식할 수는 없지. 타이탄 1기의 가치가 얼마나 엄청난데…………….”

“그렇다고 이걸 반으로 나눠서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다이아나의 말에 월터는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 못 나눌 것도 없지. 조금만 기다려 봐. 절반으로 싹 나눠줄 테니까.”

월터는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타이탄을 꺼내 칼질을 했다.

강철 칼로 강철로 된 타이탄의 몸체를 자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강철 검에 마나를 실을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마나를 듬뿍 머금고 불타오르는 듯한 적기사의 검은 간단하게 타이탄의 몸체를 정확히 아래위로 반쪽을 내버렸다.

정말 놀라운 솜씨였다.

저것만 봐도 월터가 자신보다는 한 단계쯤 위의 실력임이 틀림없다고 다이아나는 생각했다.

월터가 타이탄에 탄 채 검술을 구사하는 걸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전에는 자신은 웜의 뱃속에서, 월터는 밖에서 양동작전을 행했었기에

서로의 검술을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었다.

절반으로 잘려 드러나게 된 타이탄의 조종석 안에 시체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방금 전의 칼질로 인해 반토막이 되어버린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다이아나가 살짝 둘러봤지만 시체에서 건질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귀금속이나 검, 심지어 갑옷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신원을 유추할 만한 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럼 여기에 묻어주자. 이걸 본국까지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월터는 타이탄을 이용해 모래를 파내고 그곳에 시체를 넣고 덮었다. 타이탄을 이용하니 시체 매장은 아주 간단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주 무거웠다. 타이탄을 지급받았을 정도의 실력자가 머나먼 타국에서 죽임을 당해 이렇게 허무하게 묻힐 줄이야.

뭐, 이렇게 매장을 해줄 사람을 만났다는 게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이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체를 묻은 후, 월터는 자신의 타이탄에게 타이탄의 반쪽을 들고 공간 저편에서 기다리도록 지시하며 내려왔다.

“너도 저걸 타이탄에게 가져가도록 하면 돼. 저것만 해도 충분히 면목을 세울 수 있을 거야.”

다이아나는 감격해서 말했다. 정말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으니까.

“생각해줘서 고마워.”

“뭘, 이런 거대한 괴물을 두 번씩이나 처치했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 이것뿐이라는 게 더 이상한 거지. 타이탄 반쪽이라니………….”

“맞아. 이 뼈대를 본국에 가져갈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이 정도 뼈대 양이면 타이탄을 몇 기라도 제작할 수 있겠지. 강철로 만든 것보다 가볍고 방어력도 이쪽이 훨씬 우수할 텐데 말이야.”

월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다이아나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본국에 황제 전용 타이탄인 백기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다이아나는 픽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코린트의 상징인데, 무려 드래곤 뼈를 사용해서 만들었다며?”

“전체가 다 드래곤 뼈는 아니야. 본체와 외부에 드러나 있는 2차 장갑의 겉 부분만이야. 나머지는 와이번 본이라든지, 그 외에 잡다한 몬스터들의 뼈를 이용했지. 만들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본국이었지만, 타이탄 전체를 드래곤 뼈로 만들 만큼의 재력은 없었거든.”

“그래도 그런 걸 만들었다는 게 어디야. 다른 나라는 감히 시도도 해보지 못한 건데.”

“우리 코린트에서 백기사를 제작한 후, 더 이상 안 만든 이유가 뭔지 알아?”

월터의 물음에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기사는 유명한 것에 비해 자세한 스펙은 의외로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황제 전용 기체인 만큼 거의 모든 사항이 비밀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글쎄, 너무 비싸서 더 이상 못 만든 게 아닐까?”

월터는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간단한 이치야.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검을 휘두르는 것과 맨몸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 어느 쪽이 검압이 강할까?”

“당연히 갑옷을 입은 쪽이지. 무게는 곧 파괴력이잖아.”

“맞아. 그 때문에 마나를 다룰 줄 알게 되면, 몸무게를 변화시키는 기법을 배우는 거지. 달릴 때는 몸을 가볍게, 공격이나 방어 시에는 몸을 무겁게…………….”

“아, 그렇겠네.”

여기까지 설명을 듣자 다이아나는 곧바로 백기사의 약점이 뭔지를 깨달았다.

무게가 너무 가볍다는 게 약점일 것이다.

드래곤 본이나 뭐 그런 걸 대량으로 쓴 만큼, 무게가 가벼울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 각국에서 최강의 타이탄이라 자랑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100톤이 넘어간다. 엄청난 양의 강철이 들어간 만큼 덩치도 컸지만, 그 무게가 가지는 파괴력 또한 엄청났다.

“이제 알겠지? 백기사가 예식용으로밖에 쓰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말이야.”

“그런 기밀을 함부로 말해줘도 괜찮은 거야?”

라디아의 물음에 월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뭐, 그게 대단한 기밀이라고. 그리고 폐하께서 직접 타이탄을 타고 전장에 나가실 일이 있겠어?”

황제의 실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신하들이 그걸 용인해 줄 리가 없다. 만일의 사태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러네.”

말을 하던 월터는 슬그머니 뒤쪽을 힐끗 쳐다봤다.

자신들의 뒤에 꼬리가 붙었다는 걸 눈치챈 건 제리아 성을 출발한 직후였다.

미행하는 자가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월터 일행은 손을 쓰지 않았다. 링카 성에 주둔하고 있는 콘도르 기사단원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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