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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4권 – 65화


한편, 다시 한번 의주로 몽진 가는 것이 결정되자 행재소는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이번에는 한양에서 의 피난보다 더 급한 상황이었고, 이미 난리를 한 번 겪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 혼란은 더더 욱 심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몽 진길을 지휘하는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도승지 이항 복과 유성룡이었다. 그렇지만 군인이나 관리도 아니 고, 일반 병자에 지나지 않은 은동에게까지 그런 정 리의 손길이 미칠 리 없었다. 허준 또한 몹시 바빠 서 마지막으로 잠시찾아왔을 뿐이었다.

“큰일이로구나. 평양성에도 왜군이 밀어닥칠 모양이 다. 그래서 다시 몽진을 나서는데 너를 데리고 갈 수가 없구나. 네 상처는 어떠냐?”

“많이 나았습니다. 저는 걱정 마세요. 허주부님도 무사하시구요.”

은동은 며칠 동안 자신을 따뜻하게 보살펴준 허준에 게 정이 많이들었다. 또한 허준이 환자들을 대하는 진실한 모습에 감복하여 깊은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슬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자 허준은 미소를 띠 며 말했다.

“어디로 가려느냐?”

“글쎄요……. 음, 금강산에 유정스님을 뵈러 갈까 합니다.”

허준은 유정이 누군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은동은 언제든 흑호나 태을 사자가 오면 같이 왜란종결자를 보호하러 가야 한다 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유정스님이 있는 곳으로 가 고 싶지는 않았다. 허준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 먼길을 어린것이 홀로……………. 걱정이 되는구나.” 

그러면서허준은 은동이 전에 몸에 지녔던 유화궁과 기타 물건들을주었고 은동이 먹을 약재를 환약으로 말려 내주었다. 게다가 뜻밖에도묵직한 쌀자루를 은 동에게 내주었다. 이 쌀은 허준이 녹으로 받은 것으 로, 굶어죽는 사람이 많은 이 난리 중에는 정말 귀 한 물건이었다.

“이…… 이것을 받아도 됩니까?”

“받으려무나. 나야 어가를 따라가는 길인데 설마 밥 걱정이야 있겠느냐? 너야말로 어린 나이에 먼길을 가는 몸이니 반드시 식량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허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천하장사이니 무겁지는 않겠지? 사실 안 그랬으면 너 혼자 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자 은동은 찔끔했다.

“별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단다. 그러나 얘야.”

“예?”

“힘은 올바르게 써야 한다. 공연히 자랑하다가는 화를 자초하는 법이란다.”

은동은 허준의 가르침에 퍽 감명을 받았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네게는 어머님의 가호가 있으니 염려하지는 않아도 될 듯싶다만……………. 좌우간 몸조심하거라. 총 알이나 화살에는 눈이 없는 법이니 싸움터는 피하도록 하고.”

그 말에 은동은 다시 찔끔해졌다. 허준이 설마 자신의 어머니 엄씨를 보았단 말인가? 아니, 그럴리는 없다. 그러면 하일지달을 보았단 말인가? 그러나 하 일지달은 태연히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서은동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상처가 아프면 언제든지 다시 나를 찾아오너 라. 아마도 어가를 따라 나는 의주로 가게 될 것 같 으니……………”

허준은 당시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의 주치의였기 때 문에 반드시 어가를 호송해야만 했다. 그러니 은동 은 글자 그대로 왕자와 같은 치료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정작 헤어진다고 생각하자 은동은 서글퍼져 서다시 허준에게 말했다.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꼭 보답하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옹골찬 은동을 보며 허준은 웃었다.

“생명을 구하는 일에 내 어찌 보답을 바라겠는가? 어서 낫고 난리중에 무사하기만을 바란다.”

“‘예!”

마침내 은동은 허준과 헤어져서 정처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신세가되었다. 평양성 안은 아비규환의 도가 니였다. 그러나 은동은 팔계의 존재들에게 능력과 힘 을 물려받아 그리 두려울 것이 없어 태연스레 평양 성의 남문 밖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하일지달이 따라왔다.

“얘, 얘! 어디로 가니?”

“글쎄요……. 좌우간 왜군이 쳐들어온다는데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왜군들하고 싸울 작정이니?”

돌연 은동의 눈동자가 빛났다. 왜군들은 어머니를 죽이고 마을을약탈한 원수들이 아닌가? 갑자기 은동의 마음이 들끓어 올랐다.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자 하일지달은 안쓰러운 눈빛을 했다.

“은동아. 네가 중간계에서 얻은 힘으로 왜병들과 싸 우면 물론 수십명은 너끈히 상대할 수 있겠지. 그러 나 그런다고 난리가 끝날까?”

하일지달의 말에 은동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 다. 하일지달은호유화만큼 요염하지는 않았지만, 둥 글둥글하면서도 장난기가 어려몹시도 귀엽고 예뻐 보였다. 그러니 계속 하일지달을 보고 있으면 고집 을 피울 수 없을 것 같아 눈을 돌린 것이다. 하일지 달이 은동을 다시돌려 세우고 말했다.

“너에게는 큰 일이 있어. 너는 태을사자와 흑호를 도와 왜란종결자를 보호해야 하는 거야. 그걸 잊지 마라. 난리를 근본적으로 끝내는 것과 몇 명의 왜군 을 해치우는 것,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니? 더구나 너는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잖아?”

은동은 하일지달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호유화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눈물이 솟으려 했고, 까닭없이하일지달의 예쁜 얼굴 이 보기 싫어졌다. 은동은 휙 하니 고개를 돌렸다. 꼭 왜군과 싸우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일지달이 그 러지 말라고 충고하자 오히려 더 그렇게 하고 싶었 다.

“몰라요!”

바로 그때 하일지달이 하늘을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에그그, 이를 어째? 하필 이럴 때 신인님이 부르시다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증성악신인이 하일지달을 부르고 있는것 같았다. 은동은 잘되었다 싶어서 그 냥 고개만 돌리고 모른 척했다.

하일지달은 다시 한 번 은동에게 절대 함부로 행동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돌연 모습을 감추었다. 

“절대 무리하거나 함부로 행동하면 안 돼! 알았 지?”

은동은 하일지달이 사라지자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돌아보고 혀를한 번 날름거렸다.

“난 안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약속을 어긴 건 아니에요.”

은동은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조금 이 상한 광경을 보았다. 분명 이쪽은 남쪽 방향이었고 왜군이 오고 있다고 하는데, 웬 관복을 입은 벼슬아 치 하나가 말을 타고 몇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남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은동은 저 벼슬아 치가 왜 남으로 달려갈까 의아했다. 무기를 들지 않 았으니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었으며,정탐꾼 같지도 않은데 굳이 왜군 쪽으로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흠, 저놈은 이제 보니 왜군에 투항하려는가 보구 나. 나쁜 녀석!’

은동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한창 난리 가 벌어진 판에뭐 저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은동 은 유화궁을 꺼내었으나 화살이 없었다. 중간계에서 증성악신인은, 자신이 간직한 화살이 있다면 어느때 나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으며, 빗나가지 않는다 고도 했다. 또 염라대왕은 어떤 인간이든 맞추기만 하면 죽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은동은 화가 나서 그자를 쏘려다가 세 번씩밖에 쓰 지 못하는 능력을 너무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유화궁을 집어넣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오랜만이다. 잘 있었냐?”

바로 흑호의 목소리였다. 은동은 흑호의 기운이 느껴지자 공연히기분이 좋아졌다.

“흑호님!”

은동이 소리치며 두리번거리자 흑호는 은동의 옆 땅 속에서 느닷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행여 인간의 눈 에 띌까 봐 흙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얼굴만 내민 것이다.

“허허……………. 여기여, 여기.”

“잘 계셨어요?”

“그려. 어라? 너 다 낫지 않은 것 같구나. 근데 왜 나왔어? 하일지달은?”

은동은, 하일지달은 지금 신인의 부름을 받고 갔으 며 자신은 매국노 같은 녀석을 추적하여 해치울 생 각으로 남쪽으로 가고 있노라 간단히 설명했다. 사 실 상처 부위가 조금 아파왔지만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단순한 흑호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웃으면서말했다.

“그려? 난 원래 널 데려가려 왔지만… 그런 놈이 라면 일단 처치혀. 나도…… 아니, 아니지. 나는 인 간의 일에 관여하면 안 된댔으니까구경이나 혀야지. 그냥 가. 내 따라갈 테니. 아니지, 아니지. 내가 발 밑에서 축지법을 걸어줄 테니깐 녀석을 금방 따라잡 을 수 있을 거여.”

은동은 흑호가 같이 있다고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든든해졌다. 흑호는 토둔법을 써서 은동의 발 밑에 잠복한 채 축지법을 걸어주었다.

한 번 발을 움직일 때마다 몇 장이나 되는 거리가 휙 뛰어 넘어졌다.

‘와, 신기하다!’

은동은 잠시 호유화 생각이나 원수의 생각도 잊고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가다 보니 아까 그자가 강가 에서 배를 타려는 것이 보였다. 은동은 멈추어 서서 갈대밭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유화궁을 막꺼 내 들려 하는데, 흑호가 갑자기 튀어나오며 외쳤다.

“에쿠! 안 뒤어, 안 뒤어! 저 사람은 매국노가 아녀.”

“예?”

“저 사람은! 이덕형이여. 왜란종결자는 아니지만 무척 큰일을 할 사람이라구!”

그 말을 듣고 은동이 놀랐다.

“정말이에요?”

“그럼 정말이지! 그러면 안 뒤어. 큰일날 뻔했구먼.”

“그런데 왜 왜군 쪽으로 가는 거죠?”

“글쎄?”

은동과 흑호는 좀더 이덕형을 관찰했다. 조금 지나 자강 건너편에서부터 수많은 뗏목들이 다가오고 있

었는데 왜군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저거 봐요. 왜군 쪽으로 가잖아요?”

“좀더 두고 보자니깐.”

은동과 흑호는 더 기다리기로 했다. 은동은 먼 곳을 보거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도력이 높은 흑호는 할 수 있었다. 흑호는 갈대밭에 숨어 한참 귀를 기울이다가 말했다.

“흠…… 대강 들으니 무슨 화평교섭을 하려는 것 같…..?”

“화평교섭요?”

“그려. 음……, 아마도 무슨 계략이 아닐까 싶네.” 은동과 흑호는 잠시 옥신각신하며 이야기를 나누면 서 말을 엿들었으나 왜 이덕형이 화평교섭을 하러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후, 겐소라는 중 의 말에서 그 단서를 찾아냈다.

겐소와 이덕형은 겐소의 배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 는데, 처음에이덕형은 화평교섭을 하는 듯하면서도, 조선왕이 항복하라는 겐소의말에는 동의하지 않았 다. 다만 왜군의 무도한 침략을 통렬히 나무라고있 을 뿐이었다. 그때 야나가와도 회의석상에 있기는 했지만, 겐소와는달리 조선말에 능통하지 못했기 때 문에 전권을 겐소에게 맡기고 참관만 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덕형을 보며 겐소 는 어딘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겐소는 비록 중이었으나 학식과 식견이 높아대마도주의 외교고문 으로 있었고, 조선에 사신으로도 여러 번 온 인물이라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그래 조금 생각해 보다가 겐소는 의심이들어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한음 대감, 당신은 지금 시간을 끌려는 것이 아니오?”

그러자 이덕형은 속으로 찔끔했으나 껄껄 웃었다. 

“무슨 시간을 끈단 말이오?”

“지금 우리가 평양 아래까지 밀고 들어오니 조선국 왕이 위험해졌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오?”

“조선이 비록 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대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오. 상감께서는 이미 의주로 몽진 하신 지 오래 되었소.”

“의주? 그 국경지대로 말이오?”

“그렇소. 아무리 빨리 따라간다 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요.”

내친 김에 이덕형은 거짓말을 더 보탰다.

“그리고 평양은 아직 빈 성이 아니오. 함락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오. 대사께서 끌고 오신 부대는 경 기병 같은데, 경기병 수 천으로는쉽게 함락시키지 못할 거요.”

평양성은 이미 비어 있는 성이나 다름없었으나 이덕형은 능란하게거짓말을 둘러대었다. 그런데 갈대숲 에서 이 말을 엿듣던 흑호가 은동에게 물었다.

“은동아, 평양성에 방비가 정말 되어 있냐?”

“아뇨. 난리 북새통이고………… 어가도 조금 전에 출발한다는 것 같던데…………….”

“흐음……, 그럼 이덕형은 시간을 끌려고 온 거구먼.”

중얼거리다가 흑호는 갑자기 눈을 빛냈다.

“어! 은동아! 마기다. 몸을 숙여!”

흑호는 다급하게 속삭이고는 은동이 채 그 말을 이 해하기도 전에커다란 손바닥으로 은동의 몸을 눌렀 다. 그러나 이덕형과 겐소의 선상회담은 계속 진행 되고 있었다.

“한음 대감은 지금 정탐을 하러 오신 것이오?” 

겐소가 언성을 높였으나, 이덕형이 한 번 언뜻 보고 서도 자신이 끌고 온 부대를 재빨리 파악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는 놀랐다. 그러나 이덕형은 아무 내색 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대사께서는 그러면 지난번 조선에 오시었을 때 풍 경만 보고 가시었소? 사절로 파견될 때는 살필 것 은 살피는 것이 일반적인 일 아니겠소?”

겐소가 지난번 조선에 사절로 와서 조선의 지리를 속속들이 외워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겐 소는 바로 이덕형의 안내를 받았던것이다. 그러자 겐소는 다시 말했다.

“이미 조선국의 운명은 훤하오. 지금 조선국왕이 항 복하기만 한다면, 그 지위를 그대로 보존하여 왕이 될 수 있게 내 간언 드리리다. 더이상 싸울 필요가 무엇 있겠소? 조선은 어째서 무모하게 싸우려 드시 오?”

같지 않은 겐소의 이야기에 이덕형은 딱 잘라 말했다.

“항복하지 않기 위해서요.”

겐소 역시 지지 않고 싸늘하게 웃었다.

“내가 지금 귀하를 감금하고 곧장 평양성으로 치닫 는다면 어찌하겠소?”

“사신을 감금하는 것은 예가 아니오. 그러지 않으실 것으로 믿소.”

그러자 겐소가 고개를 저으며 되받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법도 없지 않소?”

이덕형은 흠칫했으나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다만 시간을 그리많이 끌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워 되는 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일종의 공갈을 쳤다. 

“나를 그리 순순히 감금할 수 있을 성싶소?” 

조금도 굴하지 않는 이덕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겐 소는 생각에 잠겼다. 이덕형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전부터 이덕형의 인 물됨에 감탄하고 있던 터라 이덕형을 굳이 해칠 생 각은 없었다. 그러나 전쟁의 상황과 관련된다면 사 사로운 마음을 접어두어야 했다. 이덕형이 신임받는 신하이니 만치 이덕형을 미끼로 조선국왕을 잡기까 지야 못할지언정 나중에 무엇인가 양보받을 수도 있 는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덕형이 혈혈단신으로 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무엇인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덕형은 입을꾹 다물고 눈까지 반쯤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째서 저럴까? 혹시 이것이 무슨 계략은 아닐까? 그러나 과연 조선군이 그럴 만한 병력을 모을 수 있 을까?’

그러나 이덕형의 얼굴에서는 아무 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이덕형은 자신의 생사는 이미 포기한 판국 이었으나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끌어야 했다. 그런 이덕형으로서는 겐소가 좀 더 오래 생각해 주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세 놈이다! 흠, 이거 좀 버겁겠는걸? 우리를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으니 일단 피하는 게 어떠?” 

흑호는 은동에게 속삭였다. 마수들이 무엇 때문에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세 마리라면 흑호 혼자 상대하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았다. 중간계에 서 삼신대모가 준 능력 덕분에 은동 역시 지금 마수들이 눈에 보였다. 확연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 만 일렁일렁하는 어두운 그림자 같은 형태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 모습이 자못 무섭기도 했지만 은동은 피하자는 흑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안 그 래도 아까부터 마음이 울적하고, 괜스레 목숨을 걸 고 싸우고만 싶은 충동이들어서 견딜 수가 없는 터 였다. 호유화가 사경을 헤매는데 자신은 멀쩡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싸워 봐요!”

“흠……, 나도 그러구 싶어. 그렇지만…… 삼 대일이니………….”

“삼대 이예요.”

그러나 흑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능력을 많이 받았어두 마수를 상대하기에는 모잘러. 더구나그래도 우린 하나가 비잖어. 일단 조 용히 있자구.”

서서히 움직이는 마수들이 아무래도 선상을 향해 가 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은동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 저놈들이 한음 대감에게 무슨 영향을 끼치려는 게 아닐까? 아니면 왜장에게라도……………?’

마수들은 지난번에도 신립의 마음을 조종하여 탄금 대에 진을 치게함으로써 조선군 칠천 명을 전멸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지금은 아무리임시라고는 하나 화 평교?Q 하는 중이 아닌가? 엉터리 화평교섭을이 루어지게 한다거나 왜장이 급히 평양성을 공격하게 만든다면 정말큰일이었다. 은동은 그 생각을 흑호의 귀에다 속삭였다. 그러자 흑호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흠……, 그럼 이거 그냥 둘 수 없겠구먼. 좋아, 그 럼 한 번 해보자구. 하지만…”

막상 싸우려 하니 숫자가 삼대 일이라 흑호는 은동 의 도움을 받지않고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은동은 사람들의 눈에띄게 능력을 발휘 하면 안 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중간계에서의 언약도 있었으며,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덕형이나 왜장에게 은동이 경천동지할 능력을 발휘하며 싸우는모습을 보인다면 큰 낭패였다. 흑호는 너무 단순했고, 은동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 는 와중에 마수들은이제 거의 갈대밭을 지나 배로 접근하려는 것 같았다.

“제기럴! 별수 없네!”

흑호는 하는 수 없이 은동에게 말하지 않고 대뜸 몸 을 날려 마수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 마수들은 다행 히 풍생수나 백면귀마, 홍두오공만큼 강한 놈들 같 지는 않았다. 뱀의 몸에 닭의 머리를 하고 있는 흉 측한 놈과 다리가 하나 달리고 말처럼 생긴 대가리 만 있을 뿐 몸통이 없는 놈, 그리고 거대한 해골바 가지같이 생긴 놈, 모두 셋이었다.

흑호는 몸을 날리면서 다짜고짜로 법력을 집중하여 허공으로 바람을 세 번 날리고는 갈대밭 속으로 뛰 어들었다. 흑호는 생계의 존재이나 인간에게 그 모 습을 보이지 않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술수까지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능력은 없었다. 그래서 싸우더라도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갈대밭 속에서 싸우려 고 한 것이다. 놈들은 흑호가 쏘아낸바람을 맞지는 않았으나 몹시 놀라는 듯했다. 놈들이 곧장 흑호를 따라 갈대밭 속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은동은 중 간계에서 증성악신인에게 받은 능력으로 표훈사에서 사용하던 화살 한 자루를 원거리전송하여 집어들어 유화궁에 꿰었다.

‘용화의 주인이 명한다!’

은동이 성성대룡에게서 받은 주문을 외우면서 화살 을 내쏘자 화살이 갑자기 가느다란 불덩어리로 변하 면서 닭머리에 뱀의 몸을 한 계두사鷄頭蛇)에게 쏘 아져 나갔다. 은동은 마수를 볼 수는 있었지만 그 자세한 형체까지는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앞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만을 보고 활을 당긴 것이다. 그러자 화살이 스치는 곳의 갈대들이 와스스 흐트러 졌다. 계두사는 몸을 굽혀 피하려는 듯했으나 화살 은 절대빗나가지 않는다고 증성악신인이 예언한 대 로 휙 구부러지며 계두사의 몸통 한가운데를 정확히 맞추어 뚫고 나갔다. 삽시간에 계두사의몸이 타들어가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기이한 굉음소리만 남기고는 순식간에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다. 은동은 그저 자신이 쏜 화살이불화살이 되어 날아가는 것에 놀랐고, 그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느낌밖에는 받지 못했다. 하지만 흑호는 삽시간에 마수 하나를 소멸 시켜 버리는 그 위력을 보고 크게 놀라며 좋아했다. ‘과연 팔계의 대존재들 술법이 헛된 게 아니구먼! 대단혀!’

그런데 은동이 계두사를 맞추기 위해 쏜 불화살은 전혀 엉뚱한 부수효과를 낳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겐소는 결국 이덕형을 잡아감금하고 속히 조선 국왕을 추적하여 잡아 버려야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덕형의 말대로 진을 칠 만한 군사가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강가의 갈대밭의 갈대들이 와스스 흔들리고 불화살 한 대가 하늘을 꿰뚫고 날아가는 것이 보이자 겐소는 깜짝 놀랐다.

갈대가 흔들린 것은 흑호가 쏘아낸 바람과 은동의 불화살이 나르면서흔들린 것인데, 워낙 그 힘이 세 차 수많은 갈대가 흔들렸다. 겐소에게는 그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겐소는 갈대밭 속에 많은 군사가 매복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 이다. 더구나 불화살이 날아올랐으니, 필시 무슨 군 호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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